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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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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문 안에서 찍은 왕건릉


◈ 역사(歷史)는 바뀌어야 한다. (정용석)

현재(現在)는 과거의 연장이요 미래(未來)는 현재의 계속이다.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고 현재 없는 미래 또한 갑자기 변하거나 돌출 되어 올 수는 없다.
따라서 현생의 우리는 선인(先人)들의 생활 리듬이자 과거의 사실(史實)들을 언제나 되씹고 집어보기 위해서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 역사를 알기 위해서 또 빛나고 값진 그 무엇을 찾기 위해서 기록물(역사서와 사료)들 사이를 헤쳐나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위를 전문적으로 하는 것을 '역사연구'라고 하고 담당자를 '역사가'라고 한다.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문헌(원전)들을 모두 섭렵한다는 것은 짧은 인생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일정한 관심분야에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바로 역사가들의 의식개조에 따른 발상의 전환만 이루어지면 많은 역사적 사실(기록)들을 새롭게 접근할 수가 있다.
역사연구는 곧 기록물(역사서)들이란 밀림을 답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답사자가 탐험가들의 관심도와 관점, 사고체계와 목적에 따라서 여러 이론(사론)이 생겨나듯이 항상 일정함이 있거나 고정불변의 원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랜 옛날이나 과거시대는 살았던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고 그 시대를 현생의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볼 수도 없는 현실이 있는 것처럼 역사가는 지루한 세월을 역사서란 기록물들을 통해서 선대와 선인들의 생활문화와 정신세계를 만나고 투영해보면서 선조(先祖)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역사서라고 하는 기록물들을 살펴보면 역사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권리를 가진 사람들 모두는 해당되는 시대의 권력 다수파(多數派)와 승리자(勝利者)들로써 소수(小數)와 패배자들의 이야기를 제외시키거나 축소 왜곡하여 역사의 기록에 있어서의 곡필(曲筆)은 필수 과정으로 등장하는 것을 수없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즉 억지기록이 기록이란 수단의 발달로 팽배되어 있어 왜곡의 기록물이 많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의 역사가들이 역사 연구를 함에 있어 역사서(원전)에서 찾아야할 것은 지금껏 조명되지 않은 사실들을 발굴하여 재조명, 새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연구 자세가  필요하고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수록 그 사회는 진보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사(조선사) 연구에 있어 반도 일변도, 반도 중심으로 엮어놓은 기존의 관변사학의 체계와 질서는 이국(異國)으로써 반도 침략 승리자 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들은 계획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고, 편리함과 타당성을 추구하기 위해 생명력 없는 한국사 편수질서를 반도에 자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굽어진 한국사(조선사)를 곧게 펼 연구책무도 있는 것이다.
식민통치 정부가 설계도도 그려주고 건축 재료까지 공급한 한국사란 건물(집)은 안방에 해당하는 고구려(高句麗)를 부실 공사로 일관함에 따라 누수현상이 곳곳에 발생하여 고구려 전후의 조선사(朝鮮史)란 솜이불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역사연구를 할 때 한국사(조선사)라고 하여 현재의 한국 강역인 한반도로 한정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현재의 중국대륙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대내외적국명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역사가 곧 한족중심이란 기존의 주장과 다르게 조명되고 있는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온 고대조선과 연계된 고구려에 대해서의 재조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구려(高句麗)는 나라가 없어질 때(668) 이미 나라가 세워진지 900년 정도가 되었다고 삼국사기와 대륙사서들은 쓰고 있다. 고구려는 조선(朝鮮)과 9한(九韓)에 들어가고 동이(東夷)와 마한(馬韓)의 주체(主 )였다는 것도 어느 역사서든 의견을 같이한다.
동이(東夷)란 한정된 반도강역을 뜻하지 않으며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나 조선(朝鮮)은 나라로 칭하며 책봉(冊封)으로 이루어진다고 사기 주본기(周本紀)가 쓰고 있으나 이것도 대륙사 편수 질서일 뿐이다.
동이(東夷)에는 고대의 은(殷)나라도 들어가고 조선(朝鮮), 삼한(三韓), 9한(九韓), 왜(倭)도 포함되지만 기자(箕子)가 조선의 왕으로 봉해진 이후부터는 동이(東夷)의 별종으로 구체화되는 기록도 보인다. 기자(箕子)란 역사 속의 인물은 한국사(조선사) 어디를 보아도 첫머리에 등장하고 기자조선의 왕이자 최초의 책봉군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朝鮮)의 역사는 은나라 말기에 '은(殷)의 왕족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으로 이주했다'로 시작하여 중국사 중심에서 조선이 분리되어 나온다.

이때의 '사기'기록을 보면,

'은을 멸하고 은(殷)의 땅을 차지한 주(周:서주) 나라는 장안(호경)을 국도로 했고 동생 주공 단(旦)을 노(魯)나라에 봉하고, 동생 소공(召公) 석(奭)은 연(燕)나라에 봉했으며, 강숙(康叔)은 위(衛)나라에 봉해졌다.'

'섬주(陝州:하남성 서부 섬현)로부터 서쪽은 소공의 연(燕)나라이고 동쪽은 주공의 노(魯)나라였다.'

고 쓰여져 있다. 이때의 연나라 중심도시이자 소공의 거점지역은 홍농(弘農)으로 지금의 하남성과 섬서성의 경계지역 영보현(靈寶縣)지역이고, 주공의 노국(魯國)의 거점지역은 산동성 곡부(曲阜)였다고 쓰고 있다. 바로 두 나라 사이에 조선은 있었던 것이고 연(燕)의 동북(東北)지역 하동(河東:산서 남서부, 하남북부)지역에 있었던 것이 조선이요 기자가 주나라 무왕(武王:發)에 의해 봉해진 조선인 것이다.
요동의(하동지방) 조선왕으로 봉해진 기자는 정기적으로 주(周)나라에 업부보고 및 협의하러 가는 도중에 주(周)와 연(燕)의 땅이 되어버린 옛 은나라의 땅을 지나면서 맥수가(麥秀歌)를 지었다고 사기(史記)에 쓰여져 있다.

보리이삭은 이미 모두 패어 났고,
(麥秀漸漸兮)
벼와 기장은 보기 좋게 자라있구나,
(禾兮油油)
저 교활하고 어리석은 사람아
(彼狡 兮)
나와 뜻이 맞지 않았구나,
(不與我好)

동이(東夷)이며 은나라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갑골편(갑골문자)의 대부분은 하남성 안양(安陽), 맹현(孟縣), 섬주(陝州), 신향(新鄕)을 비롯한 황하지대와 하동지방과 하남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주나라의 무왕에 의해 조선의 왕으로 봉해진 기자의 땅은 지금의 중국하남성 북부와 산서성 남부이외는 갈곳이 없다.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 기자는 호경(鎬京:섬서성)에 있었던 주(周)조정에 업무 협의차 출장을 자주 갈 수 있었고, 지나는 길에 옛 은나라의 도읍지가 보리밭과 기장 밭으로 변한 것을 상심해한 나머지 맥수가를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자조선(箕子)은 어떠한 경우든 반도에 넣어둘 수는 없는 것이며 역사서에 쓰여진 조선왕 기자는 반도에 넣어지지도 않는다. 이제는 아무리 힘있는 관변사학자라 할지라도 기자조선을 축으로 선후(先後)의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반도 중심으로 연계시키는 연구발표 같은 것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위만조선이 없어진 후 조선은 여러 지파로 갈라져 각자의 군소(群小) 집단으로 분열하는데 역사서 편수에 일치일난(一治一亂)의 법칙이 적용되어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로 분열하는 시대에 조선(朝鮮)은 70여 개국 또는 78국으로 분열한다.

다시 통합의 원칙이 적용되어,

'흉노의 땅은 동(東)으로 예맥조선(穢貊)과 접하고 예맥은 동호(東胡:동트르크, 선비, 오환)이다로 화두를 연 뒤에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통하여 예맥조선과 고구려를 기자(箕子)와 연결시킨다.

⊙ 사기(史記) 조선열전,

'한무제(漢武帝, 유철)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예맥 조선을 쳐 4군(四郡:진번, 낙랑, 임둔, 현도)을 두었다'

⊙ 한서(漢書) 왕망전,

'신(新)을 세운 왕망이 예맥의 고구려에게 운중(雲中:내몽고, 오르도스), 삭방(朔方:산서성북부), 안문(雁門:내몽고)지역에 침투한 흉노를 치라고 했으나 듣지 않고 어울려 왕망을 곤란하게 했다'

'이때 왕망은 고려왕을 유인하여 죽이고 고구려를 낮추어 하구려(下句麗)로하여 왕(王)을 후(侯)로 강등시켰다. 이에 화가 난 고구려는 신(新)의 관할부 북동(北東)쪽을 자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진한(辰韓)의 왕은 마한(馬韓) 사람이다. 마한(馬韓)이 먼저 나라를 세워 고구려(高句麗)가 되었고 진한은 신라가 되었고 백제(百濟)는 고구려에서 시원했다'

⊙ 당서(唐書) 배구열전(裵矩列傳)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인데 주나라가 은의 현자 기자를 봉하면서 조선이라 했다. 한나라가 3군(三郡)으로 나누어 현도, 낙랑, 대방이라고 했다.
이 기록은 통전(通典)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 삼국유사 낙랑국(樂浪國)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무휼왕) 2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을 정벌하여 소속 군현으로 만들고 살수(薩水)이남을 차지했다'

⊙ 송사(宋史)

'안정국(安定國:돈황)은 마한의 족속인데 키타이(契丹)에게 멸망했다'

⊙ 후한서(後漢書)

'고구려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침공했다'

⊙ 위지 동이전 옥저(沃沮)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 바닷가에 있으며 천리가량된다. 북(北)에는, 읍류와 부여, 남(南)은 예맥(穢貊)과 접해있다. 유주(幽州)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자 고구려왕은 죽령(竹嶺)을 넘어 옥저로 달아났다'

역사서(원전)에 쓰여져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마한(馬韓)의 주체이자 고죽국(孤竹國)이고 예맥조선의 후예 였으며 기자가 봉해진 하동(河東)지방에 있었다. 고죽국은 연(燕)의 홍농(弘農:하남성 영보)의 동괵(東 )에서 섬서성 봉상(鳳翔:보계현)의 서괵(西 )지역 까지로 산서성 남부 역산(歷山:수양산)이 백이·숙제의 전설 탄생지가 된다.
고죽국(孤竹國)은 은(殷)이 멸망한 지역이자 무왕의 동생 소공(召公)이 봉해진 연(燕)의 땅으로 편입된 낙양 서북지역의 옛 조선의 땅을 말한다. 조선이 연의 북동쪽 하동(河東)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남서쪽에 있었던 연(燕)과 왕망의 신(新) 관할 북동지역을 자주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고구려는 흉노, 선비, 오환과 혈통을 같이하는 예맥(穢貊) 조선의 후예로써 선조 땅은 마한(馬韓)까지였고, 감숙성의 돈황을 비롯한 안서(安西) 4군의 땅도 마한의 땅이었던 것이다. 후대에 흉노의 본 세력이 중원을 공략할 때 가장 강력한 군벌세력으로 등장한 고구려의 주 세력이 중원(장안)과 관동지방을 장악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고조선 및 예맥 조선국 하내(河內)의 중간시기 근거지는 섬서성 한성(漢城)이였고 맥의 고구려는 하동(河東)지역이자 지금의 임분(臨汾) 지역에도 있었다. 이후 왕망의 반란과 정권 탈취로 고구려, 부여, 낙랑, 현도 세력은 동쪽과 동북(東北)쪽으로 흩어져 가는 혼란기도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고조선과 예맥조선이 하동에 근거지를 두었다는 역사서 기록은 예맥조선의 진졸(津卒:뱃사공) 부인이자 하동 곽리( 里)에 살았던 자고(子高)의 부인 여옥(麗玉)이 지은 공후인(  引:공무도하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곳은 지금의 산서성의 하진(河津)이며 강 건너에 섬서성 한성(韓城)이 있는 곳이다. 공후인이라는 악기(樂器)는 유목민들의 악기로 현재의 서양악기 '하프'의 원조라고도 한다.
따라서 초기의 조선(3고조선)을 비롯한 78국으로 분리된 조선은 고구려와 혈통을 같이하던 형제지간의 종족들로써 '흉노' '오한' '선비' 등 동호(東胡)의 모든 세력들처럼 수초(水草)를 찾아서 이동하는 유목(遊牧) 및 이목(移牧)의 군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朝鮮)은 고구려로 이어지고 상대(上代0로는 기자와 은(殷), 요(堯), 황제로 이어진다.
은(殷)의 현신 기자가 봉해진 조선의 땅은 하동(河東)지역이고, 하동에서 고구려(高句麗)는 출발을 하는 것이다. 하동지방과 하내(河內:섬서성 중동부)에 고구려가 있어야만 왕방(신나라)의 정권 탈취시 고구려가 위수(渭水)와 장안(長安)의 북동지역에서 흉노와 어울려 반란을 일으키고 왕망에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후한(後漢, 25∼220)시대에 고구려가 어양(漁陽), 상곡(상곡), 태원(太原)을 공격하고, 태조왕(太祖王, 궁)이 요동군(遼東郡:섬서성 남동부 및 산서성 서부)을 공격하고, 현도군(玄度郡:섬서, 산서성 북부 및 내몽고 지역)에 예속되기를 바라고 후한이 유주자사(幽州刺史:산서성, 섬서성북부, 내몽고)를 시켜서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가 요동선비(遼東鮮卑)와 예맥(穢貊)의 기병과 합세하여 저항하며 대항했던 역사시대의 장소는 현재의 '내몽고남부, 산서성서부, 하남성 중서부, 섬서성, 감숙성, 영하오르도스'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이다.
바로 이 지역들이 주(周)나라로 갔었던 기자, 침략한 위만(衛滿), 한무제의 조선4군(朝鮮四郡), 왕망의 신(新)을 침략한 고구려가 있었던 곳이며 조선여인 여옥의 공무도하가의 탄생지이다. 요동선비와 예맥기병이 고구려와 합세하여 후한의 침략세력에게 저항했던 곳은 중원과 그 주변 인근지역이었는데 그러한 조선과 직속 후예 고구려를 지금의 동북3성(東北三省)과 한반도 중북부 지역으로 옮겨다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옥저(沃沮)천리 평원은 옥야천리(沃野千里)로 현재의 관중평원(섬서성 위수 남북의 평원)을 말하며 이곳에 남북옥저(南北沃沮)가 있었고 동(東)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었으며 옥저는 남쪽으로 읍루이자 숙신과도 경계를 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후예이자 마한(馬韓)의 땅에서부터 시원한 고구려는 이동 기병 군단의 군벌로써 많은 전쟁도 치르고 침략도 받는다. 후한이 무너지고(219년) 삼국(三國:위, 오, 촉), 서진(西晋), 동진(東晋:양자강 지역),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를 거쳐 수(隋)로 통일(589)될 때까지 370년 세월동안 분열에 따른 혼란과 전쟁의 용광로 시대를 같이 격는다.
3C에 이르면 고구려(동천왕, 234)의 강성함은 위(魏:조조)가 사신을 먼저 보내 화친을 맺고자 화의를 청하고, 2년 뒤(236년)에는 오(吳:손권)도 사신(호위:胡衛)을 먼저 보내 화친을 요청할 정도로 중원(中原)의 강성한 군벌로 성장하며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한다.
이때부터 고구려의 독점과 강성함을 시샘한 서역(기련산맥 지역)군벌이자 같은 선비족인 모용씨(慕容氏)의 침략을 받기 시작한다. 위(魏)와 오(吳)나라에서 까지 고구려란 군벌에게 협조를 구하거나 연합작전을 도모하고자 화의(和議)와 화친(和親)을 먼저 요청했을 때는 당시의 고구려를 통하여 이익 됨을 취하고자 함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외교(外交)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먼저 추파를 던지거나 적극성을 보이는 나라는 외교 상대국을 통하여 자국(自國)에게 얻어짐이 있거나 이익 됨이 있을 때 먼저 서두르는 것이다.
고구려가 서안평(西安平:장안지역)을 습격하여 승리하자 다급한 위(魏)는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치고 패한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위수를 건너 남옥저(南沃沮)로 피신한다. 이때의 위나라도 고구려의 서쪽 인근에 있기는 모용씨와 같았다.
동천왕(東川王)의 뒤이어 왕위에 오른 중천왕(中川王)은 고구려를 침략한 위(魏)와 군대를 지금의 '섬서성 한성(韓城)'서쪽 맥(貊:조선과 고구려)의 땅 양산(梁山) 계곡에서 괴멸시키는 등 위(魏)의 접근 자체를 차단시켜 버리는 용맹을 떨친다. 중천왕의 둘째 아들 서천왕(西川王)은 정벌사업을 크게 벌려 고구려의 남쪽이자 남옥저와 접해있던 숙신(肅愼)을 정벌한 후 정벌군 사령관 달가(達賈)를 안국(安國:감숙성 돈황과 안서지역)의 군주(소속 제후국)로 삼는다. 이때 서천왕은 서쪽의 위(魏)를 공격 무력화시킨 기념으로 신성(新城:감숙성 주천과 장액지방)을 순행한 후 도성으로 귀환한다.
서천왕의 태자(太子:황제의 황위계승자 칭호) 봉상왕(烽上王)은 강력한 정적이었던 아버지시대의 충신 안국(安國)군주 달가를 음모로 살해한 후부터 다시 모용씨(慕容氏:외)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유린되자 북부대형(北部大兄) 고노자(고奴子)를 신성(新城) 태수로 삼아 전연의 모용씨(외) 침략을 물리친다. 봉상왕 시대의 3년에 걸친 기상이변과 지진의 발생으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기근의 시대가 있었을 때 고구려는 잠시의 침체시대를 맞이한다.
미천왕(美川王) 20년(319)에는 동진(東晋, 서진으로 하여도 무방)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고구려로 망명하고 모용씨(외)와는 휴전을 하며 모용외에게 평주자사 자리를 준다. 휴전 20년쯤이 되어 모용외가 죽자 아들 황( )은 고구려와의 약속을 깨고 다시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침략한 후 우문씨(宇文氏:선비족의 지파로 중원지역 소재, 우문이란 중원의 천자란 뜻임)와 고구려를 멸하고 중원의 천자로 등극하려고 대거 침략(342)하는 전쟁의 시대가 열린다.
모용황( )의 침략 목적을 파악한 고국원왕(故國原王)은 '평양성을 증축' '신성을 수축' '환도성(丸都城)보수' '국내성(國內城)을 신축'하는 등 외침에 대비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고구려에게 항복했던 모용씨(황)는 절치부심 국력을 길러 4만의 군사로 북쪽을 방비하는 고구려의 허(虛)를 찌르는 우회작전으로 남쪽으로 침략하자 고구려는 대패(大敗)한다.
모용황은 환도성(丸都城:왕이 주재한곳)을 침략하여 방화한 후 왕모(王母)와 왕비(王妃)를 납치하고 왕부(王父)인 미천왕의 묘를 도굴해가고 남녀 포로5만 명도 잡아간다. 시대의 상황은 역전되어 고구려는 전연왕(모용황)에게 신하국을 자청하고 서경(西京:섬서성 장안)이자 평양(平壤)의 동황성으로 천도한다. 동황성은 서경의 목멱산(木覓山:섬서성 남부 종남산) 가운데 있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평양(平壤)은 장안(長安)이고 호경(鎬京)이며 유경(柳京)이다'

라고 쓰여진 것을 볼 때 삼국사기의 고구려의 평양과 대륙의 역사지명 호경(서주의 서울), 장안(서한의 서울), 유경(버드나무로 상징되는 평양)은 같은 곳이며 한 점의 오차도 없다.
모용황(慕容 , 연왕)이 용성(龍城:감숙성 민현《岷縣》)으로 도읍을 옮긴후 '고구려를 먼저 빼앗고(先取高句麗) 다음 우문씨를 멸한(後滅宇文) 다음에야 중원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然後中原可圖)'라고 하여 먼저 고구려를 침략하여 고국원왕을 패북시켰고 고구려는 동황성(東黃城)으로 이동하게 만든다.
이 당시의 모용황이 목표로 삼았던 중원(中原)은 말할 것도 없이 옥야천리의 기름진 땅 관중평원이며, 장안과 평양(호경)으로 불리던 지금의 섬서성 서안(西安)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의 서쪽 위(魏)의 땅에 있었던 같은 선비족 모용씨 황( )의 목표는 중원(中原:관중지역) 확보였고 같은 선비족의 성씨로 지파였으며 '중원의 천자'를 상징하는 우문씨(宇文氏)의 주거점 지역도 관중(關中:중원, 섬서성 장안)에 있었기 때문에 선비족 모용황에게 패한 고구려와 신하국으로 화의를 자청했던 고국원왕(故國原王)이 한반도나 동북삼성을 활동거점 무대로 했을 이유와 근거는 없는 것이다. 또 역사서 어느 곳 어느 시대를 살펴보아도 대륙의 중원(中原)에서 찾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 고구려다.
고구려를 침략한 위(魏)나 모용씨는 모두 점령1차 목표지점이 신성(新城:감숙성, 주천, 장액지역, E98∼100° N39∼40°)이었고, 고구려도 신성을 중요한 요새지로 정하여 왕들이 '수리, 증축, 순행'을 거듭한다. 신성에 관한 내용은 호태왕비(好太王碑)에도 나오는 성 이름이며 6C중반까지 고구려(양원왕 시대)와 돌궐(突厥:Turk)이 전쟁을 격렬하게 벌렸던 고구려의 북변 요새지기도하다.
광개토왕은 침략한 키타이(契丹:돌궐지파) 세력을 궤멸시키고 중원(中原)을 회복한다. 아도(阿道)와 순도(順道)가 전파한 불교를 확산시키기 위해 평양(平壤:장안)에 9개의 사찰을 짓는 등 불교국가로 전환했을 시대에 백제와의 물고물리는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결판이 나고, 신라는 상국(上國)으로 고구려를 섬기면서 신라왕족을 고구려에 인질로 남게 한다.
모용씨의 후손 모용운(慕容雲, 혜의제, 후연 또는 북연왕)은 광개토왕에게 자신의 할아버지(高和)는 고구려의 혈통의 분가 세력으로써 자신의 본래 성씨도 고(高:고양《高陽》씨 묘족의 후예)씨였는데 고구려에서 모용(慕容)이란 성을 주어 지금의 성씨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광개토왕이 중원을 평정하고 주변의 외침세력을 진무한 후 고구려는 장수왕(長壽王, 巨連, 광개토왕의 장자)시대로 넘어간다. 장수왕 즉위15년(427)에는 그 동안 회복하지 못했던 평양(平壤:장안)을 완전 평정 회복하여 도읍을 다시 평양으로 옮긴다. 북방을 평정하여 평양을 수중에 넣은 고구려 장수왕은 게릴라전을 벌리며 고구려 강역을 자주 침략하는 백제의 도성(都城:한성)으로 진군하여 함락시키고 백제의 개로왕(경<慶>, 경사<慶司>)을 살해하고 포로 8천을 생포하는 등 고구려와 남부 침략세력 백제를 평정해 버린다.
물고 물리는 전쟁시대, 황하와 중원을 중심으로 위진(魏晋) 남북조 시대와 5호16국 시대의 모든 나라들은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맺었거나 거쳐가지 않은 나라가 없었고, 조조의 위(魏)와 손권의 오(吳)나라도 강성한 고구려의 군사력을 빌려볼까 먼저 외교추파를 보냈었다.
이 당시(3C∼6C까지, 수의 등장 전까지)의 중원(中原)의 주인은 고구려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천하(天下)를 주무른 패권자였던 것이다.
현 중국사는 이 시대의 황하지역 역사를 위(魏)와 연(然), 북위(北魏)시대로 연결시켜 해설을 달고있으나 마한(馬韓)에서 출발하여 짧은 세월의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수많은 나라 중 중원 고구려와 인연이 없었던 나라가 없었다는 것은 역사서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왕들은 일찍이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동방을 정벌 평정한 장군중의 장군)
'낙랑공(樂浪公:중원지역《장안, 호경》의 군주)
'영호동이 중랑장(領護東夷 中郞將:동이지역을 평정하고 호령한 장군)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전차와 기병군단을 지위하는 장군중의 장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말을타고 용감하게 싸우는 기병군단의 장군중의 장군)
'영동장군(寧東將軍:동방을 편안하게 진무한 장군)

이란 작호(爵號)를 받았다.

고구려왕들의 작호에 특별히 말과 관련된 표기(驃騎)와 거기(車騎)가 부여된 왕들이 많은 것을 보면(장수왕, 문자왕, 안장왕) 고구려의 주력군단은 기병(騎兵)이였고 유목 및 이목(移牧) 군벌 이였다는 것도 틀림이 없다.
한나라 무제(武帝:유철,BC141∼BC87) 때 곽거병과 위청도 표기장군 이였고 특히 곽거병(藿去病)은 태중태부(太中太夫)로써 최고위 벼슬에 올랐었다. 표기장군으로써 '말로써 흉노를 밟았다(馬蹈匈奴)'고 쓴 묘비(墓碑)가 한무제의 무릉옆(섬서성 홍평현) 곽거병의 묘 앞에 서 있다.
고구려는 왕들의 작호(표기, 거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또 모용황이 용성(龍城:감숙성 민현)에 도읍을 정하고 중원(中原:관중)을 수중에 넣으려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을 이때 제일 먼저 제거할 세력이 고구려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최대한 양보하여 수 천리를 후퇴해도 한반도 북부이거나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지역 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모용황이 4만 군사에 패하여 불에 탄 환도성(丸都城)과 국내성(國內城:고국원왕신축),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기공비(紀功碑)를 세웠다는 환도산(丸都山)의 불내성(不耐城)을 답사해 보고자 제도권이자 관변사학에서 정리해놓고 장소로 규정해놓은 현재의 압록강 북변 집안(集安)을 찾은 일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참담했다.
집안이 풍수지리적으로 앞에는 강(江)이 흐르고 뒤에는 산(山:환도산)이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가 되는 지역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국도(國都)로 정하거나 정해질 타당성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돌산(石山)의 산비탈 급경사 지역이자 궁벽진 집안이 유리명왕(琉璃明王) 22년(3년)에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겨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와 산상왕(山上王) 13년(209년)에 도읍을 '환도성(丸都城)으로 옮겼다'로 역사서에 쓰여진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집안을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과 환도성(丸都城)이 있었던 곳이며 고구려 국도(國都)로써 424년(장수왕 15년, 427까지)을 활용했던 지역으로 보기에는 격(格)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거로 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며 역사서(삼국사기와 삼국시대를 포함한 전시대의 대륙 역사서)와도 일치되는 점이 전혀 없다는 것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어느 힘있는 자들이 모여서 '집안을 삼국사기의 고구려 국내성과 환도성이 있었던 424년 도읍지로 정하자'에서 만들어진 의도적인 행위가 뚜렷이 보였다. 집안의 모든 유물유적(길림성 유물유적)들은 현 중국 정부가 1982년 개혁개방 시대로 돌입하면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급조하고 새롭게 색칠하여 보수하여 놓은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졸작의 모조품으로 역사서(삼국사기)의 고구려를 팔아 장사를 하기 위한 도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뚜렷했다.
허물어진 돌 더미의 급경사 벼랑지에 농사짓기조차 힘든 환도산성의 유지(고구려의 218년 도읍지)라는 곳의 황량함이 그러하고, 아파트 단지 내에 돌담장을 성의 없이 쌍아놓고 2,686m의 국내성 유지(고구려의 206년)라고 푯말 붙인 썰렁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이없게도 했다.
태양신을 경배하는 제단성격의 스투파(Stupa:탑의 변형, 피라미드 모형) 문화의 석구조물을 놓고 광개토왕의 능(陵)이라고 하지를 않나, 근래에 그려 넣은 현무, 주작도, 청룡, 백호도가 있는 현실(玄室)을 놓고서 고구려의 것으로 정해놓고 있다. 이러한 탑 변형의 제단과 4방신(四方神), 5방신(神)이 그려져 있는 현실도(玄室圖)는 동양의 어디에도 있는 것이 아닌가,
선비와 오환의 혼혈 종족이자 동호(東胡)의 지파였던 중원 공손(公孫)씨에게 패한 고구려 산상왕은 국도를 국내성에서 환도성(還都城)으로 옮겼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그러나 선비족 공손(公孫)씨는 대륙의 섬서성 중북부 포성(浦城)을 중심으로 산서성 서부, 감숙성 동부지역에서 중원(中原)을 수중에 넣으려 했던 야심 세력이었지 공손씨가 반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세력이었다고 대륙사서 공손씨 열전이 기록하고 있음을 어찌하랴, 그러니 지금의 집안(集安)이 중원(섬서성 장안 및  황하의 위수지역) 고구려와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인가.
선비족의 지파 모용씨와 공손씨는 모두 중원(中原:장안지역)을 수중에 넣으려 했고 또 넣었다. 그럴 때 가는 길목에 있었던 고구려 고씨(高氏)와 우문씨(宇文氏)를 제거하여야 한다고 했고 또 했다. 이렇게 대륙 중원이란 장소에 있었던 고구려를 현재의 남 만주나 한반도가 역사시대의 중원이 아닌 이상 억지를 써서 고구려의 옛 강토로 만들 일도 아니고, 현재의 집안을 고구려의 424년간 도읍지 환도성과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며 있어야할 곳이라고 해서도 될 일은 아닌 것이다.
더하여 고구려 산상왕(山上王)은 선비족 중원 공손싸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국내성을 버리고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했다. 그 동안 도읍지이자 왕도(王都)로 했던 곳을 포기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전쟁에서 패했을 때 피난의 성격과 대비의 목적이 공존한다.
그러나 관변사학에서 정해놓은 환도 성유지는 국내성 유지라는 곳에서 북쪽으로 2,500m 떨어진 산기슭 자리로 정해놓고 있을 뿐인 것이다. 국내성과 환도성 사이에는 통구(洞 )라는 하천이 있고, 다리 옆 하천 변에는 1982년 이후에 중국 국무원(國務院)에서 문물보호 지역으로 선포하면서 대대적으로 토목공사를 벌려서 거대한 적석총(積石塚) 집촌 단지를 만들어 놓은 곳도 만날 수 있다.
산상왕은 공손씨(公孫氏:중원의 요동, 낙랑태수)에게 패하여 본거지(왕도)를 옮겼고 침략 세력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각고의 어려운 결정을 내려 국도를 환도성으로 옮겼는데 국내와 환도의 거리가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2,500m뿐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어줍잖은 천도(遷都) 해설이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천도는 역사시대의 어느 나라에도 없었다. 더구나 환도성으로 만들어진 곳의 지형은 급경사를 이루고있는 산 아래의 좁은 개활지로 입구 한곳을 막으면 출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山)이 둘러쳐져 있어 침략 세력이 입구를 봉쇄하면 오도가도 못할 곳이다. 앉은자리에서 굶어죽기 적당한 지형지세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고구려의 유리왕(3년,BC17)은 황제(皇帝)를 상징하는 황조가(黃鳥歌)를 지었다는 사람이고, 미천왕(美川王,31년,330년)은 낙양(洛陽) 서북쪽(금용성)에 있었던 갈족( 族)의 후조(後趙:石勒)에 사신을 보내어 싸리나무 화살( 木:호목)을 보내 주었던 사람이다. 이 당시 갈족인 후조 사람들은 코가 크고 높으며 눈이 움푹 패인 것이 특징이라고 역사서는 쓰고있는 것도 참고 할만하다. 우리가 황조가의 황조(黃鳥)를 꾀꼬리라고 풀이한 어줍잖은 지식이 보편화 되어있으나 황조는 봉황(鳳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중원의 주인공이란 뜻이며 동이조선의 황제를 뜻하는 말이다. 즉 고구려 유리명왕은 중원의 황제였다는 것을 황조로 표현한 것이 황조가의 본래 의미다.
더하여 미천왕(美川王)의 할아버지 중천왕(中川王)은 위(魏)의 군사를 섬서성 한성(韓城) 지역인 양산(梁山) 골짜기 맥(貊)에서 대파했고, 숙신을 대파한 장군 달가(達賈)를 돈황과 안서의 안국(安國:安是國) 군주로 임명했던 사실도 있었다. 아들 고국원왕(故國原王)은 나라의 북(北)변의 요새지 신성(新城:감숙성 죽천)을 쌓은 적도 있다. 훨씬 후대로 내려와 양원왕(陽原王,3년 574년)은 돌궐(Turk)의 침략에 대비하여 신성을 수리했고 7년(551년)에는 돌궐을 맞이하여 전쟁도 치렀으며 이듬해에는(552년) 장안성(長安城:섬서성 서안)도 축조했다.
고구려 유리왕 이후에 환도성과 국내성을 왕도로 했던 왕은 장수왕을 포함하여 19명이나 된다. 고구려 28명의 왕 중 68%가 두 성을 왕도로 했는데 관변사학에서 환도와 국내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자리를 잡아놓은 집안(集安)을 가보면 고구려 424년간의 도읍지 흔적은 향기조차 나지 않고 그림자조차 찾을길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반사적으로 등장하는 질문이 고구려 광개토왕비가 있지 않느냐로 반문한다. 허나 우리가 제도권 교화식 암기 교육에서 익히 지식화 된 광개토왕비는 역사서 어느 곳에도 없는 막연한 호칭의 호태왕비(好太王碑)이고 비문에는 고구려(高句麗)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동방 어느 지역에도 해당되는 태양(알)과 관련이 있는 부여 전설시조 추모왕 사화(史話)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비일 뿐이다. 장수왕(거련)이 아버지 광개토왕(담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 주었다고 알고있으나 실제의 비문 내용을 분석해보면 누구를 위해서 누가 세웠다는 문장은 있지도 않다. 삼국사기의 광개토왕과 장수왕과는 관련조차 연계시킬 수 없고 주인을 알 수 없는 모호한 '호태왕비'일 뿐인 것이다.
고국원왕 초기에 모용황에게 패한 려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어 서경(西京:장안 호경)의 동황성(東黃城:종남산)으로 옮겨 절치부심, 와신상담 하면서 내실을 축적했던 소수림왕, 고국양왕 시대를 거쳐 19대 광개토왕 담덕(談德)의 시대가 열린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고 활달했던 광개토왕은 고토회복을 주창하며 북(北)으로 키타이(契丹:선비와 돌궐의 지파)를 물리치고 남으로 백제(百濟)를 무력화시킨 후 서쪽의 모용씨와의 전쟁(모용귀)에서도 승리한다. 그런 후 궁궐을 증축수리 하는 등 독산(禿山)등 6곳의 성을 쌓아 평양(平壤)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한다.
이때에 이르러 광개토왕이 서경(西京)이자 평양(平壤:장안, 호경) 지역을 장악했으니 고국원왕이 서경이자 평양의 환도성을 잃고 동황성으로 이거한지 65년만의 쾌거였던 것이다. 광개토왕이 재위22년(413년)만에 할 일을 다하고 죽자 또 키가 크고 호걸스러운 아들 장수왕 거련(巨連)이 등극하여 큰 풍년이

드는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이어졌다. 왕은 드디어 왕도를 옛 환도성과 국내성이있었던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긴 후 64년 세월을 더 황위에 있으면서 중원(中原)을 호령하게 된다.
장수왕이 오래 살아 손자로써 왕위에 오른 문자왕 시대에 이르러 나약해진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게 패하고 안원왕 시대에는 남쪽지방에 홍수가 나고 메뚜기의 피해 및 지진이 발생하면서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는 등 자연재해까지 국력을 피폐케 하여 표기대장군으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시대로 이어진다. 양원왕(陽原王, 545∼558) 시대에는 백제에게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기고(550), 이듬해에는 돌권(Turk)이 신성을 침입하여 전쟁을 치르는 사이에 무방비 상태의 남쪽 성(城) 10개성을 신라에게 빼앗기는 수모도 당한다.
6C중반까지 오면서 고구려는 선비족과 오환의 동호세력이였고 오호(五胡)의 세력이었던 위(魏:조조), 후조(後趙:갈족의 석륵), 진(晋:사마씨), 연(燕:모용씨), 전진(前秦:저족의 부견), 북연(北燕:선비모용씨), 낙랑과 요동의 공손씨(선비, 오환의 혈통), 북위(北魏:선비 척발씨), 동위(東魏:고구려 고씨의 고환<高歡>섭정, 효정제<선견>, 534∼550, 낙양), 북제(北齊:고환의 아들 고양<高洋>556∼581, 낙양), 북주(北周:선비 우문씨, 장안, 560∼581), 수(隋:선비혼혈, 589∼618, 장안)와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북방의 모든 세력과 통교했다. 남방으로 흩어져 양자강 지대에 자리했던 동진(東晋:사마씨, 336년), 송(宋:유씨 455년), 남제(南齊:소씨, 480년), 양(梁:소씨, 502년), 진(陳:진씨, 561년)등 모두와 통교를 하는 외교관계를 설정하면서 6C말을 맞이한다. 즉 대륙의 양자강 지대와 황하의 남북(南北) 동서(東西:낙양과 장안)를 내 집 드나들 듯 종횡무진 하는 외교관계를 설정하고 있었던 나라가 고구려다. 대륙의 남북전체 외교관계 설정은 남만주 집안(集安)과 반도의 평양(平壤)으

로 고구려의 왕도를 정해놓고는 그려질 수도 없는 그림이요 꾸어보지도 못할 꿈의 역사 이야기가 될 뿐이며 가상조차 할 수가 없다.
대륙북방을 통일했다는 북위(北魏)의 척발씨는 고구려를 최대의 군벌이자 연합세력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북위 조정의 양대외척 세력으로 우문국의 우문씨와 고구려 고씨(高氏)를 두었다. 초창기에는 우문씨가 조정의 외척세력으로 등장했으나 효문제(孝文帝, 471∼499)가 고구려왕족 고소(高昭:소황후)를 태후로 맞이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선무제(宣武帝, 499∼515, 세종)도 고구려 고씨이자 어미나 친족인 고씨성의 외사촌 여동생과 결혼을 하여 황후로 맞이하는 시대가 열린다.
북위가 성씨를 원(元)씨로 바꾼 후의 척발(拓跋)씨 세력은 왕조를 세운지 100년이 지나자 노쇠하기 시작했고, 북방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외척 세력들의 전횡에 따라 정치는 부패했다.
이 당시 선비족으로서 고구려 고씨(高氏)였으며 무소불위의 북위 외척세력이였던 고구려왕족 장군(군이) 고환(高歡)은 선무제(宣武帝)를 추방하고 효정제(선견)을 황제로 삼아 섭정하는 동위(東魏)시대를 연다. 동위의 효정제(선견)는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고구려 고씨의 북제(北齊, 556∼581) 시대도 열었다. 북제는 우문서의 북주(北周)에 패하고 북주는 또다시 선비 혼혈이자 외척세력이었던 양견(楊堅)에게 중원의 황제자리를 넘겨주어 수(隋)의 시대가 열린다.
북위(北魏, 척발씨)의 황후로 고씨성의 고구려 왕족이 간택되어 황태후로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활동 지역이자 주거점 지역이 최소한 반도와 남만주로 할 수는 없다는 것과 같다. 북위(척씨)가 중원에 입성하여 양자강 이북을 통일했을 때의 주 거점 지역이자 국도(國都)로써 이용했던 곳은 내몽고 집녕시(集寧市:察哈爾), 산서성 대동(大同), 태원(太原), 하남성 낙양(洛陽)이였고 제2의 부도(副都)지역은 섬서성 장안

(長安:서안)과 하남성 복양( 陽), 안양(安陽), 하북성 한탄, 임장(臨 )으로 황하연변 남북지역을 주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북위(北魏)를 비롯한 5호(五胡)가 황하지대(중원)를 번갈아 장악하며 이어 달리는 300년 세월동안 서역(西域)을 통해 이들과 함께 중원에 입성한 불교는 중원 본래의 황노(黃老:황제와 노자) 사상과 어울리면서 전파되고 성장·발전한다. 더하여 불교국가들의 절대 정치권력의 배려까지 있게되어 국가적 역사(役事)의 상징물인 거대한 불탑(佛塔), 사찰(寺刹) 및 상상을 초월하는 대형 석굴사원(石窟寺院)까지 중요지역 마다 조영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조선의 후에로 군림한지 600년 이상이 넘었기 때문에 군자지국(君子之國)의 후예인 고구려를 능가할만한 것이 없었던 나라가 북위였다. 북위가 고구려보다 잘 할 수 있었던 일이란 불교숭배와 말 타고 초원을 달리며 전쟁하는 업무정도 이외는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중원과 북해(北海:황하지대)의 고구려 역사를 한족중심의 중국사를 재조립하면서 고구려의 고(高)와 뜻이 같은 위(魏)란 글자로 바꾸어 북위라는 나라를 역사서에 등재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무력(武力)으로 일단 기존의 정부와 왕조는 허물어 버릴 수 있고, 추방 할수도 있다. 그러나 왕조와 정권을 접수한 새 정부가 기존에 있었던 정부와 대등하거나 월등한 정치이념이 없으면 나라와 백성들을 통치할 수가 없으며 새정부(왕조)는 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조(정권)의 통치이념은 고등학문과 철학에서 축출되어 사회와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5호16국 시대에 혼란의 시대가 거듭되었던 것은 5호(五胡:갈족,흉노,선비,강족,선비) 종족들은 초원을 질주하는 유목이동 민족들이였기 때문에 중원의 정복민족에게 어필될만한, 또는 정착중원 백성들이 수용할만한 정치이념의 부재(不在)에서 혼란은 가중

되었다.
유목이도 민족으로써 중원정복과 장악에 성공한 북위(北魏)는 고구려 정부와 연합(고씨세력)하는 공동 정부의 형태가 아니었으면 역사서에 등장하지도 못할 유목민이자 무지한 세력들이었다.
4C∼5C의 북위(양자강이북 전지역)로 역사서에 등장하는 군벌은 하드웨어는 북위, 소프트웨어는 고구려로써 사실대로 말하면 고구려의 꼭두각시 왕조이자 괴뢰정부였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정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념(理念)을 필요로 하고 고등학문 체계에서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원에서 한자(漢字)와 유학사상을 모르는 유목민의 북위는 최소한 고구려와 공동정부를 구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들의 신앙세계의 부처가 구원해 줄 것이라고 머리를 조아려 봤자 내세(來世)를 목표로 하는 종교이념이 현세의 극력한 생존경쟁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용문석굴 고양동(高陽洞)에 있는 용문20품이란 확실한 불상조상기의 문장에서 보여진 진실대로 북해왕국(北海王國)을 지칭하는 것이니 만큼 북위(北魏)로 한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조상기에 주로 등장하는 성씨를 보면, 정(程),손(孫),위(衛),유(劉),한(韓),가(賈),조(趙),왕(王),장(張),동(童),변(變),화(和),번(樊),제갈(諸葛),양(楊),오(吳),구(寇),련(輦),곽(郭),마(馬),방(方),풍(馮),이(李),위(魏),노(魯),윤(尹),전(田),모(毛),강(姜),주(朱),사마(司馬),창(倉),도(陶),허(許),록(菉),송(宋),상(上)마(麻),해(解),임(林),좌(左),신(辛),개(盖),등(鄧),설(薛),고(高),

이며 그 중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이 고구려 고씨(高氏)다.
여기에 등장하는 성씨들은 대소규모의 나라(國)나 부(部)를 이룬 부족과 종족들의 거점지를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대륙사서에서 북위(北魏)의 성씨에 해당하는 척발(拓跋)씨나 바뀐성씨 원(元)씨는 조상기에는 등장하지 조차 않는 것도 이상한 것이다.
불교국가로써 풍성한 불교문화 유산을 곳곳에 찬란하게 남겼고 최후의 도읍지 낙양(洛陽) 용문석굴에는 북위시대의 모든 불교 결실을 쏟아 부어 수많은 석굴사원과 불단감실을 조성하여 북위서체라고 하는 글씨체로 불상조상기의 기문(記文)까지 써놓았는데 북위의 왕실성씨 척발(拓跋)이나 원(元)이 없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 말은 곧 북해왕국(北海王國)으로 4C∼6C까지의 낙양을 거점으로 했던 왕국은 북위(척, 원씨)의 왕국이 아니었으며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씨 고구려 고씨들의 왕국과 정부였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애고이즘과 민족역사의 편견을 배제한 채 생각해 보아도 5C말에서 6C초에 조상된 용문석굴의 불상조상기에 성씨고(高)를 사용했던 나라는 오직 고구려 왕족과 후예뿐이 없었고 5C말에서 6C초에 조상된 용문석굴의 불상조상기에 고(高)씨가 낙양읍주(邑主)로 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 당시의 낙양의 권력층이자 북해왕국의 실세는 이유를 불문하고 고구려(高句麗)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하여 오늘날 북해왕국을 북위로 변형시켜 용문석굴 조상기 서체를 북위서체라고 한 것도 당연히 고구려 서체로 바뀌어 불리어져야 타당한 것이다.
이러한 한자서체와 조상기 문장은 상당한 실력이 있는 자라야 쓸 수가 있고 작성될 수가 있었던 만큼 유목민이며 한자를 모르는 북위세력(척씨)들은 쓸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무제 시절의 재상 고윤(高允)이 왕자 공종(恭宗)에게 왕자로써 사사로움을 버리고 이재(理材)를 너무 밝히지 말라고 충고까지했던 것이다.


이 당시의 고구려는 동방의 군자지국 후예로 성장한 군벌로써 상당한 학문의 체계와 누적된 실력이 있었다. 단기적으로는 무(武)가 이길 수 있으나 장기전에는 무가 문(文)을 당할 수는 없다.
고구려는 이미 연도를 알 수 없는 개국초기부터 문자(文字)를 사용했고 이때의 역사서의 기록인‘100권의 유기(留記)'를 남겼다. 이것을 요약 편수하는 방법으로 옛 역사를 저술하여 신집(新集) 5권으로 정리한때가 영양왕11년(600년:이문진)이라고 했다. 정확히 알 수 없는 기원전(BC)에 벌써 고씨의 고구려는 문자(文字)를 사용했고 책자도 만들었기 때문에 5C말∼6C초의 용문석굴의 불상조상기 정도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행위다. 이미 600년이란 누적 세월의 문자(한자) 사용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겨우 4C말에 중원 북변(北同)에 들어와 태원(太原)을 거쳐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효문제(고조:낙양 창업자)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1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스스로 중원 정착화를 꽤할 수 없었던 유목이동 군벌이었기 때문에 북위에서 한자문화와 유교정서를 찾아내기에는 곤란하다.
고구려의 학문이 우수했던 것은 '일본서기 민달(敏達) 원년(572)' 기록에, "고구려왕 평원왕(平原王)이 국서를 왜국에 보내주었는데 왕과 대신들이 3일이 지나도록 누구도 읽지 못했다'

에서도 살필 수 있고, 고구려에서 분가한 백제의 유학자와 승려들이 학문을 깨우쳐 주고(유학) 불교를 알게 했다는 일본서기 도처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있어 고구려의 유교학문과 불교(담징)의 번성함은 역사서와 실제의 중원에서 충분히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유리왕(琉璃王)은 기산(箕山:산서성 태곡현)의 벌판에서 사냥을했고, 양원왕은 장안성(長安城,섬서성 서안,552)을 축조했으며, 평원왕(平原王)은 즉위28년(586)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말할 것도 없이 고구려왕들이 거동하고 이도(移都)한 지역은 현 대륙 중원(中原:황하지대)지역이 전부이며 역사서에 기록된 실제의 장소들이다. 수서 동이열전에도 '고구려의 도읍에는 평양성도 있고 장안성도 있었으며, 남쪽으로 패수(浿水)가 있다. 고구려에는 국내성이 있었고 한성도 있었다'로 쓰여져 있다.
고구려 전시대를 삼국사기와 대륙사서를 비교할 때 역사서의 사이사이에 기록된,

'패수(浿水)와 벌판에서의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 패하(浿河)의 들판에서의 사냥, 신라 북변의 고구려, 말갈의 침공, 백제 북변의 말갈의 침략, 고구려의 백제 한성(漢城)함락, 관구검의 고구려 국내성 침략, 공손씨(公孫氏:중원의 황제자손 이란 뜻)의 고구려 침략, 백제의 2회 천도, 신라 진흥왕의 순수, 서부대인 개소문의 장성(長城)역사, 신라 김춘추, 김유신, 김법민의 삼국통일' 등 중추적인 사건들의 발생지역과 인물들의 활동지역은 도저히 한반도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가 어찌하여 주책없이 한반도와 현 남만주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더하여 선비족이자 서로 이종간이였던 수당(隋唐)의 수 차례의 고구려 침략,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 고구려 멸망이라는 역사의 공식들도 현 대륙과 반도를 사이에 두고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수당과 고구려와의 전쟁 및 백제의 멸망은 조선 전쟁사 연구에서 별도로 다룰 것임)
역사서에 쓰여진 900년 정도의 고구려의 활동 강역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예맥조선→고구려로 직접 이어지는 황하 중심부의 중원과 하동(河東)지역을 축으로 하여 남방(양자강 이북), 북방(내몽고, 오르도스, 감숙, 신강, 중앙아시아)까지 뻗어있었다.
이런 곳에 있었기 때문에 사마르칸트 아프라샤프 언덕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고구려 사신'의 벽화그림을 볼 수 있고, 섬서성 건현(乾縣)의 장회태자(章懷太子, 고종의 둘째아들)의 묘에서 같은 깃털모자 모양의 고구려 사신벽화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밖에 고구려 벽화라고 하는 '수렵도' '수렵출행도'는 북방의 어느 곳에 가도 볼 수 있을 만큼 볼 수 있다.
조선의 후예이자 동호(東胡) 선비의 강력한 군벌 고구려는 나라가 역사서에서 사라질 시기에 5부(部:동부,서부,남부,북부,중앙부)에 대인을 두고 있었고 176개의 성곽도시에 성주(城主)를 두고 있었으며 백성의 민호는 69만여 호나 되었다. 고구려를 점령한 선비족 당(唐)나라는 고구려 땅에 9개의 도독부와 42주, 100현을 새로 만드는 등 평양(平壤)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설인귀(薛仁貴) 대장군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진무케 했다.
설인귀 역시 북방 민족으로써 신라경주 설(薛)씨였으며 대륙사의 고구려 패망전후 당(唐)의 장군으로 되어있으나 신라의 장군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고구려 중원 대제국의 붕괴 후 당(唐)제국 건설로 할 것이 아니라 신라(新羅)대제국 건설과 흥기로 바꾸어야 현 대륙의 역사도 타당성을 잃지 않을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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