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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산문화-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성자산(城子山)


*동산취(東山嘴) 유적지 조감: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咯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다. 곧 각좌현(咯左縣) 대성자(大城子) 동남의 대릉하(大凌河) 서안의 한 산구(山丘) 고지상에 있는데 사방은 일망무제의 대평원이다.
*옥거북(玉ꜫ),옥촉(玉钃),*갈고리구름형 옥패(勾云形玉珮)




요하(遼河)유역의 제사 중심
종교의 전파

홍산(紅山)문화 만기(晩期)에 종교 유적지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데, 별도로 중소형의 제사유적지들이 있어, 규모는 우하량(牛河梁)만은 하지 못하나 단, 상호간에 동일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제단이 유사한 제사건축 형식을 하고 있다. 즉 원방각의 동이족 형태를 고스란히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제단 부근에 시체를 묻은 묘장(墓葬)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유적지 특유의 유물은 제사용 진흙 채도 통형기(筒亨器) 등 특수한 도기(陶器)와 동물류 그릇, 옥벽(玉璧) 등이다. 최근 발굴된 이런 종류의 유적지는 적게는 3군데 있으며, 그 가운데 동산취(東山嘴)는 중형 유적지에 속하며, 성자산(城子山)과 호두구(胡頭溝)는 소형 유적지에 속한다.

지모신사(地母神社)-동산취(東山嘴)

동산취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각라심(咯喇沁) 좌익 몽고족 자치현 대성자(大城子) 동남 대릉하(大凌河) 서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하천에 임한 대지(臺地) 상에 건립되어,  건축은 방형(方形)과 원형(圓形)을 주체로 하여 건축한 단상기지(壇狀基址)로 주위에는 겹쳐 쌓은 석괴(石塊)가 있다. 이곳에는 서로 같지 않은 시기의 유적지 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제사활동을 거행한 장소다. 유적지에는 대량의 돼지뼈와 사슴뼈가 있는데, 이는 마땅히 제사에 희생동물로 바쳐진 것이다. 출토된 도자기는 주로 채도 통형기(筒形器)와 채도 쌍복분(雙腹盆) 등 제사에 사용된 특수도자기이며, 또 쌍룡수(雙龍首) 황형(璜形:璜은 瑞玉,벽옥을 두 쪽 낸 것) 옥장식과 녹송석(綠松石)을 사용해 만든 부엉이(鴞)가 있다. 가장 사람의 주목을 끄는 것은 진흙을 개어 만든 사람 소상(塑像)이 있는데, 그 중에 소형은 머리가 없고 발이 짧은 나체 임신부(孕婦) 입상(立像)이며, 대형인물은 흙덩어리만 약간 남아 받침에 단정히 앉은 반퇴단좌상(盤腿端坐狀)이다. 이들 소상(塑像)은 마땅히 유적지 제사의 주요대상인 지모신(地母神)으로 여겨진다.

홍산문화 선주민의 묘지-성자산(城子山)

성자산(城子山) 유적지는 지금의 요령(遼寧) 능원시(凌源市) 능북향(凌北鄕) 삼관전자(三官甸子)의 서산파(西山坡) 위에 있다. 동북으로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와 약 8천미터다. 홍산(紅山)문화 선주민은 일찍이 이곳에서 거주하다가 후에 딴 곳으로 가 묘지가 되었다. 현재 유적지 서남에는 한 기의 원각방(圓角方:원각방은 동이족 고유의 특징, 천부경 참조) 형의 방 터가 있으며, 부근에는 1개 2M로 보이는 사각형(方形)의 석퇴(石堆:언덕)가 있는데, 석장(石牆:돌담장)과 더불어 서로 연관이 있다. 석퇴(石堆:언덕)와 멀지 않은 곳에 일단의 쇄석대(碎石帶)가 있으며, 위에는 파쇄된 밑바닥 없는 통형기(筒形器)의 조각들이 남아있다. 성자산(城子山)의 홍산(紅山)문화 묘장(墓葬)은 공히 3기가 있는데, 한결같이 토광(土壙:흙구덩이) 석곽묘(石槨墓)로, 그 중에서 한 기의 묘갱의 혈(穴)은 비교적 크며, 부장품은 갈고리 구름형 옥장식, 말발굽형 옥고(玉箍:그릇 둘레의 테), 옥조(玉鳥), 옥월(玉鉞:도끼)과 죽절상(竹節狀) 옥장식 안에 9건의 옥기(玉器)가 있으니, 묘주(墓主)의 신분은 일반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 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 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 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또한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입니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 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 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 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 족이 하북 성과 산동 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 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1.B.C.6000~B.C.5000 황하유역(화하족) - 자산문화,배리강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북신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흥륭화문화,신락문화
2.B.C.4500∼B.C.2500 황하유역(화하족) - 앙소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대문구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홍산문화
3.B.C.2000∼B.C.1300 황하유역(화하족) - 이리두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용산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하가점하층문화 -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黃帝活動遺址,最重要的有三處。太史公司馬遷《史記·五帝本紀》中的黃帝居軒轅之丘,邑于涿鹿之阿,葬于橋山。黃帝所居軒轅之丘就在我們新鄭,這是眾多的歷史文獻記載,還有近當代學者研究所得到的一個共識。當代國學大師錢穆先生有一句話說得非常肯定:“古代黃帝部落之居地,應在今河南新鄭,斷無疑矣。”黃帝所邑之涿鹿,文獻也有很多記載,但是,《史記·正義》引《括地誌》說:涿鹿是黃帝初都,很快又遷往有熊。黃帝陵也有多處,但是都不能動搖陜西黃陵縣黃帝陵的地位。這三處重要活動遺址裏,新鄭黃帝故里這個遺址有關黃帝文化的內容最為豐富。新鄭黃帝故里,既是黃帝長期活動之所在,更是其建邦立國之地,史籍記載延續不斷,斑斑可考。
  許順湛 《黃帝故里故都歷代文獻匯典》一書,有關黃帝都有熊的記載,收錄得比較全面,它包括了古代、近代及現代學者的觀點,沒有一個人與皇甫謐有分歧,說明古往今來,在學術界取得了共識。1992年中華炎黃文化研究會與河南炎黃文化研究會、新鄭縣炎黃文化研究會共同舉辦的“炎黃文化與中原文明學術研討會”,對黃帝都有熊居軒轅之丘的地望,學者們認識完全一致,所以前後得出一句話:黃帝故里在新鄭。新聞媒體發了消息,地方政府在這方面做了大量的實際工作,因為黃帝故里這一桂冠戴在新鄭頭上,取得了億萬炎黃子孫的認同。黃帝故里桂冠在新鄭不能動搖。
  蔡全法(新密古城寨考古項目主持人)  裴李崗文化是少典氏文化,仰韶文化的早期是神農時代,中晚期是黃帝時代,龍山早中期是顓頊、帝嚳、堯、舜時代,龍山文化晚期已進入夏禹立國前後。新密市古城寨古城的發掘是由李伯謙、張忠培、俞偉超、嚴文明、安志敏、殷衛璋、仇士華、張學海、安金槐、許順湛、鄭傑祥、馬世之、楊肇清、李友謀、陳旭、張居中、方燕明、趙會軍、李昌韜、張松林、曹桂岑等一批考古學家參與並“確定是一座龍山文化晚期的城址”。根據《國語》、《史記》、《水經注》、《通鑒外紀》、《括地誌》等文獻記載,新鄭是有熊之墟、黃帝故都。但是有個別持黃帝文化龍山說的學者,將新密古城寨龍山文化晚期城址,在缺乏確鑿事實根據的情況下硬拉到龍山文化早期偏晚,甚至將古城寨龍山文化二期陶器變形,提前至龍山中期。這種無視客觀事實的研究必得不到同仁的支援。新密古城寨是一座晚于王城崗的城址,而又早于新密新寨城址的龍山文化晚期城址,同時,也是考古學文化的實物載體,有著不可改變的客觀性,不會因個人意願而隨意改變成黃帝故都—軒轅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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