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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풍수 관상 대가 국사(國師) 지창룡 대사(大師) 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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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지창용 선생과 이승만대통령


청오 지창룡 선생이 청계천 복개 부당성에 대해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저서 지창룡 박사님의 에세이 집 내용 중...

" 각하, 청계천 복개공사를 중단하소서.
아뢰옵기 황감하오나 각하 혼자서는 절대 복개할 수 없습니다.
군주 셋의 힘이라야 능히 복개할 수 있는 지난한 일이 니 수도의 지리에 변화를 가해서
국운이 쇠하는 것을 사전에 예방코자 하는 충정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각하께서 집무하시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는 자좌오향이고 남향판입니다.  청계천 명당수는
신득수 (申得水)진파(辰破)로 서로부터 나와서 동으로 흘러갑니다. 이는 주인(子)이 있고
나그네(申)가 있고 파(辰)가 있으니 신자진(申子辰) 삼합이온데 이에 변화를 가져와 나그네와 파를 보이지 않게 하는 건 그 일을 시작하는 군주, 진행하는 군주, 마무리하는 군주 등 셋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국가 대사입니다.
그깟 지저분한 개천 하는 덮은 일이 뭐가 그리 큰일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중략)  오간수교는 풍수적으로 매우 중시되는 다리입니다.
명당수가 나가는 파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오간수교까지 덮게되면 참으로 상상치 못할 일이 벌어 질 것입니다.
파구가 막혔으므로 반드시 각하에게 변화가 생길 것이며, 나아가 이 나라의 군대가 국경밖으로 출병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3.15 부정선거로 이 대통령 하야,
5.16 쿠테타로 윤 대통령 실각,
1979년 말경 마장동 마무리 공사와 동시 박대통령 시해.
월남전 파병 등...
비서진에서 이편지글을 이 대통령께 전하지 못하자 후일 이대통령이 하야하고
지창룡 박사님과 후일 만나서 이야기 하던중 이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것이 운명이었던 것이다. 지창룡 박사를 더 가까이 두지 못한것을 후회하고 풍수의 이치가 정말 오묘함을 알았다며 아쉬워 했다 한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청계천 복개공사와 관련

"청계천 복개공사는 3명의 임금이 필요한 공사"로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불행이 찾아올것이라고 예언하였고 결국 이승만, 윤보선 대통령을 거쳐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완성되었는데. 청계천 복개공사가 완료된 1979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가 알다시피 10.26으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청오 지창룡 선생께서는 김영삼대통령시절에 "다음대에는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올 것이며(김대중) 그후 가장 불쌍한 대통령이 나올것이다.(노무현) 한 사람의 쫒겨나는 대통령이 나올것이며(박근혜) 그 다음 성군이 나와 나라를 부강케하고  나라를 우뚝서게 할 것이다(  ?  )"
라고 예언을 한 바 있습니다.

청오(靑奧) 지창룡(池昌龍) 선생은 독립기념관, 동작동 국립묘지, 대전 현충원, 대전 정부종합청사 등의 터를 선정하는 과정에 역리적 의견을 제공하는 역대 정권을 가리지 않고 국지사(國地師)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 월간역학에서>




풍수 관상 대가 국사(國師) 지창룡 대사(大師) 서설



필자/李史達(본명 송우)  



왕건이 세운 고려왕조의 터를 잡는데는 국사(國師) 도참이 있었고,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의 터를 잡는데는 대사(大師) 박무학(朴無學)과 정도전이 있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터를 잡고 세우는데는 누가 있었을까. 

의문을 풀기 위하여 을지로 6가 동대문지하철 역에서 내려 청오(靑奧) 지창룡(池昌龍) 옹(翁)을 찾아갔다. 올해 77세의 희수(喜壽)를 맞는 노옹(老翁)이다. 작은 체구의 노안(老顔)은 홍조(紅潮)를 띄운 신선과 같고 항상 싱글벙글 미소를 짓은 마음씨 고운 할아버지였다. 

천지인(天地人)에 대한 해박하고 심오한 천리(天理)를 쉴새없이 피력하는 옹의 얼굴에는 아직도 선명한 쌍가플의 눈망울이 천진(天眞)스런 어린 아이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인생의 예지(叡智)를 발(發)하는 신비의 눈이었다. 

옹이 일을 보는 사무실 청오제는 오후 네 시까지만 문을 연다. 그 후의 옹은 술집에 가 있기가 십중팔구(十中八九)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한 번 시작한 술자리는 밤 열두시 전에 끝나는 일이 거의 없고, 새벽 두서너 시까지 연장되는 일이 허다하다. 

"천리란 무상치 않아. 거기에 무슨 연유가 있는지 늘 생각하지."

지그시 눈을 감고 옹이 한 말이다. 그러면서 대통령 이승만과 대통령 박정희의 부름을 받아 도와주고 '국사(國師)'라는 칭호를 받은 옹이지만 그의 손으로 두 대통령을 땅에 묻을 때는 마음이 아팠다. 한 대통령을 묻고 나면 또 다른 대통령이 옹과 인연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을 묻고 얼마 후에

옹은 다음과 같은 비기(秘記)를 써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냈다.

"귀의삼보(歸依三寶)하니 삼이후예(三耳後裔)라.

입왕이십환(入王二十煥)이니,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

비기란 비밀스런 기록이라 보통 사람이 보면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위에 적은 귀의삼보 삼이후예 입왕이십환이란 무엇인가.

귀의삼보란 불교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삼이후예란 좀 어려운 해석인데 전(全) 씨의 시조가 전섭(全攝)이라 섭(攝) 자에 있는 귀 이(耳) 자 세 개를 뜻하며, 입왕이십환이란 전두환의 한자를 파자(破字)한 것이다.

전(全) 자는 입(入) 자와 왕(王) 자로, 두(斗) 자는 이(二) 자와 십(十)으로 파자하고, 환(煥) 자는 그대로 표기했다. 
  
해석하면 중이 될 팔자를 타고난 전섭의 후예인 전두환이 왕이 되어 치국평천하한다는 뜻이다. 전두환은 물론 옹의 비기대로 후에 대통령도 되고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지만, 10.26 직후 보안사령관 때에 이 비기를 받아든 전두환은 손을 달달 떨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는 직감이 엄습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노태우도 김영삼도 옹과 인연이 깊다. 물론 다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이번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으나, 이미 3년 전에 어떤 작가를 통하여 발표한 '풍수'라는 소설에 호남 인사의 대권 승리를 예언한 바 있고, 
  
지난 번 선거 기간 중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가신(家臣)으로 불리워 지는 한화갑의원 등이 찾아와 김대중후보의 당낙에 대한 운수를 물어 보기도 했고, 최형우 이회창 이인제 캠프 등에서도 몰려와 '어찌 하오리까'를 연신 조아렸다.

물론 옹은 세 후보에 대한 운세(運勢)와 방책(方策)을 모두 말하여 주었고, 결국 그 방책을 실현하지 못한 사람은 낙방(落榜)을 하였다고 최근에 나온 저서(著書)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에서 공언하고 있다.

이쯤 되면 지창룡 옹은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들을 도운 국사(國師)임과 동시에 천리(天理)를 꿰뚫는 대사(大師)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고려 왕조에는 도참 국사가 있고, 조선왕조에는 무학 대사가 있으며, 대한민국에는 청오 지창룡 대사가 있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청오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유명한 국사이며 대사가 되었나를 더듬어 보자.
 
청오와 풍수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옹의 조부는 4대 독자였다. 대(代)가 끊어질 판이었다. 증조부가 조부에게 이르기를 '이 자리는 순전히 대를 잇기 위하여 택한 자리다.

내가 죽으면 이 자리에 묻고 네가 아들 넷을 나으면 이장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 증조부의 말대로 조부는 아들 넷을 나았으나, 증조부의 말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 결과 4형제 중에 셋이 일찍 죽었고, 창룡의 아버지도 창룡이 두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가족의 수난은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되었다. 네 아들들의 자손이 많았으나 이상하게 아이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어린 창룡이 증조부의 유언을 기억해 내어 '소년 참상'만은 면할 자리로 증조부의 묘를 이장했다. 신기했다. 그 후로 자손들의 소년 참상이 멎었다. 이리하여 열 살 전에 천자문과 격몽요결, 사서까지 읽었던 창룡은 주역(周易)에 관심을 갖는다.

  나이가 들어서 일본에 건너갔다. 공학을 공부하고, 동경의 한 공장에서 용광로 책임자가 되어 일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천황릉(天皇陵)에 놀러갔다.

거기에 '망국의 한을 패철로 다스리고 있는 한 나그네'라는 도인(道人)을 만난다. 조선인이었다. 도인은 천황릉 앞에서 패철을 읽다가, '일본은 곧 망하니 고향에 가라'는 말을 한다.

 창룡은 무엇인가 느낌이 와서 귀국한다. 어머니에게 도인의 말을 전하고 가야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는다. 어느 날 눈을 떴다. 모든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운명과 산세와 지리,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는 영혼의 눈을 뜬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여주 여인과 결혼하고 바로 경북 봉화에 가서 더욱 정진(精進)한다. 거기에서 영롱한 철인(哲人)의 세계가 개안(開眼)한다. 

하루는 하숙집(?) 딸이 간질병을 일으켰다. 보아허니 선조의 무덤 탓이었고, 주인에게 말하여 이장한 후에 그 집 딸의 간질병은 없어졌다.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봉화에 젊은 도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창룡을 찾아와 상담해 주었다. 

1950년 새해 새아침이었다. 창룡은 해마다 의식처럼 주역의 괘를 뽑아 그 해의 국운(國運)을 가름해 보았다. 큰일이었다. 그해 음력 5월에 공산당의 남침이 있을 수가 나왔다. 주인에게 슬며시 이 사실을 일러주고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린 후 피난 차 밀양으로 갔다. 그의 예측과 예언대로 6월 25일 새벽에 난리가 난 것을 라디오를 통하여 알았다.
 
전쟁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았다. 9.28 수복 후 밀양에서 고향에 와 여주에 가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난리는 3년만에 휴전 협정으로 끝이 났다. 창룡은 그 때에 서울로 왔다. 
   
하루는 집 앞에 검은 뾼차가 멎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타나 이승만 대통령이 만나자고 한다는 말을 전달했다. 젊은 창룡은 소스라쳐 놀랐다. 왜 대통령이 자기를 만나자고 할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에 이승만 대통령 앞에 창룡이 갔다. 
   
"젊은이가 해방이 될 것과 전쟁이 날 것을 알고, 산을 잘 본다고? 우리나라는 난리통에 수 많은 청장년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할 안식처를 만들려고 한다. 어느 자리가 좋은가 점지(點指)해 보라."
  
지창룡은 미리 예정되어 있던 후보지인 덕소, 소사, 팔당을 버리고 한강대교 건너 동작동을 점지했다. 오늘의 국립묘지이다. 이 일로 지창룡은 국사(國事) 지관(地官)이 되어 일략 명성을 얻는다.
 
4. 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망하고,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다음 해 새해 초에 사복 입은 짝달막한 사람과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인을 비롯하여 몇 명이 찾아와 신수(身數)를 보아달라고 했다. 첫눈에 영험이 있는 한줄기 서광(瑞光)이 청오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4월에 무슨 일을 하실려고 하는데 4월은 안됩니다. 5월에 하십시오. 그래야 뜻한 바가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5월 16일에 군사혁명이 났다. 사복을 입었던 체구가 작은 사람은 육군 소장 박정희였고, 중령 계급장을 단 사람은 김종필이었다. 
  
옹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정치계 뿐만이 아니었다. 경제계 이병철을 비롯하여 수 많은 각계 최고위 명사들의 이름과 일화가 줄줄이 나왔다. 한 때 옹의 생일에는 길옥윤이 와서 색스폰을 불고 박춘석이 와서 노래를 불렀으며, 내노라 하는 명사들이 일만 있으면 찾아와 상담했다.
   
벌써 밤이 깊었다. 시계는 11시가 넘었다. 한 자리에서 일행들과 함께 양주 몇 병을 비운 77세의 노옹은 뜻밖에 노래방으로 2차를 가자고 했다. 나는 손을 반짝 들며 노옹의 지칠줄 모르는 정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며시 도망칠 요령으로 몇 가지 문제를 더 물어 보았다.
   

-남한에는 남한대로, 북한에는 북한대로 6.25 전란으로 인한 국립묘지가 있다. 통일이 되면 이 적대적(敵對的)인 두 국립묘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납골당을 만들어야 해요. 그곳에 같이 모셔야지요."
 
-그러면 통일 후에 수도(首都)는 어데로 해야 합니까?

"서울 평양 둘 다 안되지요. 대전 근처 계룡산 일대나 황해도 해주 근처 구월산 일대가 좋습니다."
  
-왜 그런가요?

"두 곳 모두 산세(山勢)가 좋기 때문입니다."
  
-대전은 한반도의 너무 남쪽이 아닌가요?

"그게 무슨 상관 있습니까? 신라는 경주에서도 한반도를 다스렸고, 고구려는 평양에서도 한반도를 다스렸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통일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통일은 꼭 오고야 만다. 그 때에 옹이 살아계실지는 모르나 옹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그 때 가서야 증명이 될 것이다.

한 평생 나라와 대통령, 그리고 숱한 시민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살아온 국사(國師) 청오 대사(大師)는 이 말을 끝으로 노래방에 갔고, 나는 청오 선생 몰래 집으로 야반(夜半) 도주(逃走)를 했다.


해방 후 서울 장안에 상학으로 이름난 대가(大家) 김경훈 노인이 있었다. 이름은 났다고 하나 풍수 관상 역술계에서는 풋내기에 불과했던 지창룡도 익히 그 어른의 존함은 알고 있었다. 다만 직접 상면(相面)한 일은 없었다.

어느 날이다. 지인이 집터를 잡아달라고 해서 관철동에 갔다. 일을 마치고 어떤 노인을 만나 주안상이 벌어졌다. 그 때 그 노인이 주석(酒席)에서 난데없이 벌떡 일어나 창룡을 향하여 입을 열었다.

"아이구, 국사(國師)님! 큰 절을 받으십시오."

이름 모를 노인한테 큰 절을 받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 노인이 그 유명한 김경훈 옹(翁)이었다. 역술의 대가인 김경훈 노인의 이런 갑작스런 행동으로 좌중은 숨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고, 얼떨결에 절을 받은 창룡은 어쩔줄을 몰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마져 몽롱했다.

"여보게들, 이 분이 장차 국사가 되실 분일세!"

노인의 말이었다. 이 때 쯤 창룡이 서울 장안에서 이름이 좀 나기는 했으나 역술계의 대가이며 대선배의 큰 절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역술 도인(道人)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정말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할 세계가 도통(道通)한 역술인 사회에는 있다. 바로 그것을 많은 사람들은 천기(天機)라 한다. 김경훈 노인이 어떻게 장차 지창룡이 국사가 될 천기를 알았는지, 그만 그 자리에서 큰 절과 함게 누설하고 말았다.


그 때 서울 장안에는 풍류를 즐기고 정객들이 운집하는 서 모씨가 살고 있었다. 신익희 김성수 이시형 등을 비롯하여 해방 후 내노라하는 정객들이 모여들던 집이다. 집안이 좋고 가산(家産)이 많은 덕인(德人)이었으나 자손 복이 없어 어린 아들 하나를 겨우 두고 있었다. 창룡도 그 집을 자주 갔다. 어느 날이다. 부인 마님이 창룡에게 관상을 보아달라고 했다.

"부인은 자식 복이 없습니다!"

창룡의 말이었다. 아들을 두고 있는 멀쩡한 귀부인에게 내뱉은 창룡의 이 한 마디에 마님은 넋을 잃고 얼 빠진 사람처럼 한 참 있다가 제 정신이 들었는지, 남의 정신이 들었는지 벌컥 화를 냈다.

"여보시오. 내 아들이 이렇게 멀쩡하게 크고 있는데 자식 복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닙니다. 그래도 마님은 자식 복이 없습니다."

"자식 복이 없다니요? 애가 커서 부모를 몰라 본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마님은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

이후에 두 세 차례에 걸쳐 마니은 관상을 더 보아 달라고 하였으나 창룡은 똑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자 마님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반색했다. 관상 대가란 그런 사람이다. 아들이 없는 사람도 아들을 낳을 상이면 자식이 있다하고, 아들 딸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팔자에 아들 딸이 없으면 없다고 말한다. 사실 그 여인은 아기를 낳지 못해 서 영감의 애첩의 뱃 속에서 나오는 아들을 그 자리에서 받아다가 자기가 낳았다고 소문을 내고 키우고 있는 무자식(無子息) 팔자의 여인이었다.

이런 일화들로 지창룡의 이름은 벌써 알만한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태평(太平) 성세(盛世) 몰고 온 것이 아니라 6.25라는 전쟁을 몰고 왔다. 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서울 장안의 백성들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자신의 운수를 알아 보려고 유명한 역술가를 찾는 일이 많아졌다.

이 때에 이미 서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승만 대통령이 순국 용사들의 안식처로 국군묘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전국에 유명한 풍수쟁이를 골라오라는 명령을 내려 지창룡이 대령했었다. 1953년 7월에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난 두 달 후인 그 해 9월의 일이었다.

헬리콥터를 타고 한강대교를 건너 동작봉 위를 선회하고 있을 때였다. 동승한 원용덕 헌병사령관과 지창룡은 한전 주택지로 예정된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ㅡㅡㅡ"바로 여기입니다. 공작새가 아름다운 날개를 펴고 있는 공작장익형 (孔雀張翼形)임과 동시에 장군(將軍)이 병사(兵士)를 거느리고 있는 장군대좌길지(將軍對坐吉地)입니다. 이곳에 호국 영령들의 터를 잡으면 우리 겨레가 발복(發福)할 자리입니다."

ㅡㅡㅡ동작봉의 주산(主山)은 관악산이다. 관악산은 서울의 모산(母山)이며 불꽃이 타오르느 형상의 화산(火山)이다. 관 머리와 같다하여 관악산이다. 관악을 타고 나온 동작봉 일대는 현무수두하고, 주작상무하며, 청룡완연에 백호순부하다. 사방팔방에 군혈(軍血)이 신장(神將)같고, 물소뿔 모양으로 선동(仙童)이 달을 희롱하는 형세이다. 수세(水勢) 또한 한강수와 합해지는 양합수이다. 이보다 더 좋은 명당은 없다는 판단이었다. 특히 팔당과 덕소 일대는 서울의 젖줄인 한강수 위 자리라 좋지 않고, 부천 소사는 서울보다 너무 아래 지형이라 호국영령을 모실 자리로는 적합지 않았다.

이 일로 지창룡은 김경훈 도사가 해방 후에 술자리에서 예언한대로 하루 아침에 나라의 일을 보는 국사(國師), 나라의 터를 잡는 국사(國事) 지관(地官), 통치자와 뭇 인생들의 운명을 귀신같이 알아 ?추는 달인(達人)으로 떠올라 세인(世人)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만남은 지창룡에게 등용문(登龍門)이나 마찬가지엿다. 드디어 그의 이름처럼 연못(池)에 갇혀 있는 용(龍)이 승천할 계기를 만나 막 문(門)을 나서는 셈이었다.

이 때에 지창룡은 지인으로부터 청오(靑奧)라는 아호를 얻는다. '이제 등용문을 통과했으니, 조그마한 연못에 갇혀 있는 용이 되지 말고, 시퍼렇게(靑) 깊고 깊은(奧) 연못(池)에 사는 용(龍)이 되라'는 뜻으로 지창룡을 지청오로 작명해 주었다.

천리와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철없이 용이 되었으니, 승천을 하느니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역술계의 '젊은(靑) 용(龍)'이된 지창룡은 천방지축 하늘 땅을 가지지 못하고 날뛰는 청룡으로 뽑내지 않고, 지인의 말대로 깊고 푸른 연못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들의 운명을 바라보며 점지하는 청오의 평생 수양 길에 접어든다. 풍수 관상 역술의 세계에서 큰 일을 했다하여 겸손을 잃고 덕을 잃으면 남는 것은 자만과 오류와 오판과 사악뿐이라는 것을 창룡은 알고 있었다

천리(天理)는 하나이다. 그러나 천리를 헤아려주는 역학의 세계는 그 하나인 천리를 찾고 가르쳐 주기까지에는 수 많은 길을 헤매야 한다. 만일 그 많은 길 중에 자기도 모르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헛소리만 하기 마련이다. 이름을 얻은 후에도 창룡은 그 점을 가장 두려워하며 계속 책을 보고 사람을 보고 하늘을 보고 땅을 보며 천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정진한다.

역학을 하는 사람들은 경쟁 사회에 끌려들어 갔을 때에 가장 어려움을 당한다. 경제인들은 돈을 벌고 기업을 일으키는 것이 주목적이고, 자신이 돈을 벌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이 큰 기업을 일으켜 세웠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또 다른 큰 기업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경제계에는 사활(死活)을 건 경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 사회는 다르다. 특히 선거를 통하여 당락(當落)이 결정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같은 자리를 놓고 누가 당선되고, 누가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춘다는 것은 천기를 풀어내지 못하면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설령 그들의 운명을 안다고 해서 섣불리 발설(發說)하거나 말해 주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묘지 터를 잡느라고 처음 조우(遭遇)했지만 해공 신익희 선생은 그 전부터 알고 지냈고, 창룡에게 글까지 써 주는 자상한 분이었다. 하루는 해공이 창룡을 불렀다.

"내가 이미 이 박사와의 인연이 끊어졌고, 갈 길이 서로 다르며, 야당의 지도자가 된 나의 대통령 출마 입장은 피할 수가 없오. 청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내 운수가 어떤지 한 번 봐 주시오."

이 박사와 해공을 둘 다 알고 있는 창룡으로서는 입을 열기가 난감한 질문이었다. 그 때 창룡은 이 박사와 해공 중에 누가 하늘의 뜻이며, 누가 하늘의 뜻이 아닌가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왜 하늘의 뜻이 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비켜 가는가도 알았다. 창룡은 입을 떼기가 어려웠지만 해공에게 대통령 출마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해공의 관상은 턱이 짧아 그의 명운(命運)은 60이면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5세가 된 해공이 대통령에 나온다는 것은 역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해공의60 이후의 삶은 덤이었다. 창룡의 말을 들은 해공은 자기 자신도 낙선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며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 서울 수송국민학교와 한강백사장에 해공의 유세를 들으려고 온 사람들의 무리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운(運)대로 호남선 여객 열차 속에서 객사(客死)하고 말았다.

지창룡의 이야기는 다시 이승만과의 관계로 넘어간다. 국군묘지가 완성된 다음에 이 박사가 창룡을 불러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며, 넌즈시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자유당 공천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이 박사는 지창룡과 같이 총명한 사람이 정계에 나와서 난세(亂世)를 다스려 주는 정치인이 되어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창룡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은 정치인을 도와줄 수는 있으나 정치인이 될 운명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 박사의 권고를 물리치자, 그러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다구쳐 물었다.

"풍수가 저의 본업이라 산을 좋아하니 산에나 다니겠습니다."

"그래? 훌륭한 생각이야. 그렇다면 내가 강원도지사를 불러 그대에게 산을 주고 산판을 벌이도록 해주겠네. 나라를 위하여 묘지를 잡아준 그대를 내가 그냥 보고만 있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 대통령은 지창룡이 산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생판 모르는 산판, 그러니까 벌목(伐木) 사업의 길을 열어 주었다. 도지사를 만나 강원도 홍천의 우거진 숲 속에서 나무를 잘라내어 파는 사업이었다. 남들은 떼돈을 버는 사업이라 했고, 한 때 800 여 명의 인부를 쓰는 큰 공사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팔자에 없는 벌목 장사는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5.16 후에도 장경순 농림부 장관이 지창룡이 산판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계속 밀어주는 계기가 있었으나 결국 운에 없는 사업은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고, 손을 떼었다. 도지사도 국회의원도 산판도 모두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것은 오직 풍수 관상 역철학뿐이었다. 그는 오직 하늘과 땅과 사람을 도와줄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지,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천리를 거역하며 살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은 풍수지리학상 참으로 좋은 곳이다. 주산과 안산, 좌청룡 우백호가 명확한 명당이며, 남으로는 한강수가 천 년 만 년을 향하여 굽이쳐 흐른다. 이 좋은 터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한양 땅의 한 복판을 흐르고 있는 냇가가 있다. 이름도 맑디 맑고 맑은 청계천(淸溪川)이다.

ㅡㅡㅡ이 물은 서울 인구가 30만명 내지 50만명이 살 때까지 깨끗했으나, 100만 200만명이 넘으면서 탁한 물이 되었고, 300만 500만이 살면서는 청계천이 아니라 탁계천(濁溪川)으로 변하여 악취(惡臭)가 진동하는 시궁창이 되었다. 해방 후까지 붕어와 미구라지가 서식하던 개천이었으나 6.25 후에는 완전히 죽은 개천이 되어 서울의 하수도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구가 밀집한 청계천 3-4가 일대는 불결하기 짝이 없는 개천이 되었고, 7가 쪽으로는 별반 사람도 살지 않고 있었다.

청계천이 죽어가자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그런 중에 정부에서는 삼각동에 있던 아름다운 전설의 발취취가 남아 있던 수표교를 장충단 공원으로 옮겨 놓고 ㅡㅡㅡ청계천 복개(覆蓋) 공사를 시작했다. 1958년이었다. 복개 공사란 냇가를 아예 시멘트로 덮어 버리는 공사였고, 그렇게 하면 청계천 일대에 형성되었던 판자집촌을 현대화하고, 복개한만큼 땅도 넓어져, 대지와 도로로 쓸 수 있다는 명분이었다.

이 때에 지창룡은 이 공사를 보고 끝일 났다는 생각을 한다. 청계천은 복개하면 청계천은 햇빛을 보지 못하는 암천(暗川)이 된다. 맑고 푸른 곳이 어둡고 더러운 곳으로 변한다. 안될 일이다. 특히 청계천은 풍수적으로 한양 땅에서는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개천이다.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 더러워져 이를 인공적으로 정화하려는 관리들과 이를 반대하는 풍수지관들 사이에 서로 의견을 다투던 냇물이다.



ㅡㅡㅡ청계천 복개 공사를 놓고 지창룡이 가장 염려한 점은 동대문에서 을지로 6가 사이에 놓여있는 나무다리에 관한 일이었다. 이 다리는 다섯 간의 오간수교(五間水橋)로 한양 땅을 명당으로 받드는데 중요한 다리가 된다. ㅡㅡㅡ이곳은 명당수(明堂水)가 나가는 파구(破口)이다. 파구를 막으면 명당은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명당에 영향을 준 군주(君主)는 온전치 못하게 된다.

ㅡㅡㅡ지창룡이 풍수적으로 본 청계천은 공사를 해도 한 군주 대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의 흐름이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것처럼, 공사를 시작하는 군주와 공사를 진행하는 군주, 그리고 공사를 마무리하는 군주 등 ㅡㅡ3대에 걸쳐 해야할 공사였다. 조급하게 자유당 정권이 단독으로 덮어 공사를 끝내려는 계획은 무모했다. 완성된 청계천의 복개 공사는ㅡㅡㅡ 이승만정권 장면정권 박정희정권 3대에 걸쳐 완성된 것을 보면 지창룡의 풍수적 혜안이 얼마나 번득이나를 알 수 있다.

당시 지창룡의 입장 정도이면 경무대에 이승만 대통령 면담 신청이 가능했다. 창룡은 대통령 면담 신청을 하지 않고 편지로 공사를 중단하지 않으면 국가와 민족, 또는 각하에게 무슨 변고(變故)가 생길지 모르며, 풍수쟁이의 말이지만 귀담아 달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이 박사한테 가는 지창룡의 편지는 대통령에게 전달이 되지 않고 경무대 비서실 책상 서랍 속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다.

공사를 시작하고 세상이 분분해졌다. 1960년 3월에는 3.15 부정 선거 시비가 크게 일어났고, 이어서 4월 19일에는 4.19 학생 혁명이 났다. 지창룡의 진언은 불행하게도 적중(敵中)했다. 나라에 변고가 생기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하야(下野)해야 했다. 이로써 국부(國父)로 존경 받던 이승만은 하루 아침에 낙마(落馬)하여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이화장에 가서야 이 박사는 지창룡의 편지를 읽었다. 재임 중에 받았더라도 어떻게 처리 되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벌써 엎질러진 물이었다. 편지를 보고 이 박사는 측근들에게 경무대에 있을 때에 전해 주지 않은 점을 섭섭히 생각하며 지창룡을 이화장으로 불렀다.

"자넨 귀신이야. 어찌 그걸 알았나? 내가 자넬 가까이 두고 있었어야 했어. 청오! 지금이라도 무슨 방안이 없나?."

"황공하옵니다. 건강에 유념하옵소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이 박사가 지창룡을 불었다. 왜 그런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박사가 넌즈시 눈을 감고 그 특유의 느릿 느릿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집에서도 떠나야할 것 같아. 내가 죽은 다음에 시신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될거야. 창룡! 부탁하네. 그 때 내가 묻힐 자리를 잡아 주게."

창룡은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몇 일 후에 이 박사는 하와이로 망명 길에 올랐고,그 후 4년 반이 지난 1964년 말에 비서를 통해 자신의 한시(漢詩) 저서 책 한 권을 보내왔다. 그리고 몹시 아프다는 소식이 있었다. 언뜻 이 박사의 묘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박사의 충신이던 윤치영 전 내무장관을 만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 박사의 묘지는 국군묘지가 좋으나, 이 박사는 대통령으로서 국군의 총수일뿐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곳에 묻힐 수 없으므로, 국군묘지를 국립묘지로 이름을 바꾸어 국가 유공자들도 안식할 자리가 되도록 조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윤치영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지창룡은 살아 권세 아래에서만 충성을 하고 죽어 저승에 갈 사람 앞에서는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ㅡㅡㅡ윤치영의 거절을 당한 지창룡은 김일환 장관을 만나 같은 말을 했다. 김 장관이 다리를 놓아 김 장관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김성은 국방장관을 불러 하명(下命)해 주어 지창룡의 지휘로 이 박사의 묘역 공사가 시작되고 준공되었다.



1965년 7월에 이 박사는 자신의 말대로 시신이 되어 이화장으로 돌아왔다. 장례 문제가 나왔다. 정부는 국민장을 원했고, 유족과 이 박사 관계자들은 초대 건국 대통령이라는 점을 들어 국장(國葬)을 원하고, 국장이 아니면 아호를 따서 우남장으로 하겠다고 맞섰다. 그 때 서울 시장이던 유치영의 상가에 와서 유족과 관계자들에게 국민장을 권했다. 이런 윤치영의 처사를 보고 많은 조객들이 이마를 찌프렸고, 그 중에 이 박사의 생질 한 사람이 순식간에 윤치영의 멱살을 잡고 망신을 줌과 동시에 근엄하게 쓰고 있던 모자를 벋겨 짓밟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이 윤치영을 가르켜 '권력의 개'라고 혀를 찼다.

ㅡㅡㅡ이승만 대통령의 유택지는 풍수지리상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으로 목 마른 거북이 한강을 향하여 내려가는 형상의 길지(吉地) 중의 길지이고, 동작동 국립묘지 중에서 가장 좋은 자리로 널리 이름이 나 있다. 후에 이국 땅에 와서 퍼스트 레이디가 된 프란체스카 여인의 시신도 이곳에 지창룡이 묻었다. 그는 그 때에 '나랏님을 묻은 죄인'이라는 생각에 한 동안 근엄(謹嚴)한 생활을 했다. 영혼(靈魂)에 대한 경의(敬意)였다.

역학 무속 풍수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 형편 없는 친구들이 있다. 찾아 오는 손님들은 하나 같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오는 사람들이다. 역학을 하거나 풍수를 하거나 무당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 되었던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람의 운명에 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남의 운명을 점지하고 말해 주는 사람은 덕을 쌓아야 한다. 덕을 쌓지 않고 재물에 눈을 뜨면 그 날로 사기 행각 쟁이가 되고 만다.

ㅡㅡㅡ풍수를 팔아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다. 제 눈에 명당으로 보이기는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엉터리 야산에 엉터리 땅을 잡아놓고, 명당이라 소문을 내어 원래 땅 값의 수 십 수 백 수 천 배를 받아 먹는 자는 지관이 아니라 지랄이다. 그렇게 하여 떼돈을 번 사람이 있다는 소리가 업계에 파다하다.

굿이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잔치이고 염원이며 행사이다. 이런 행사에는 행사 요원과 준비물이 있다. 그런 준비물과 요원들에 들어가는 정도의 '이해할만한 경비'는 모르는 바가 아니나,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굿은 정성에 앞서 무당의 탐욕이 배어 있는 돈 지랄굿이다.


역학과 역술도 천운과 천기를 알아 ?추는 학문이고 문자 그대로 술(術)의 일종이라지만, 믿고 찾아오는 사람을 보고 등을 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예를 들어 남편의 계급이 대령인 부인치고 남편이 별을 달기를 원하지 않는 부인이 어데 있을가,이런 부인이 찾아와 남편이 별을 달을 것인가, 달지 못할 것인가를 물을 때에, 단다 못단다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고, 내가 참모총장를 잘 아는데 부탁해서 별을 달아주겠다며 거액의 금품을 요구하는 역술인은 역술의 탈을 쓴 사기꾼에 불과하다.

지창룡이 그런 사기를 치려면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화려한 명성을 팔아 얼마던지 사기를 치고 엄청난 재물을 모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창룡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 마음이 선하고 평생 동안 덕을 쌓기에 게으르지 않고 자고 나면 잠 자리에 들 때까지 술 자리를 빼고는 늘 수양에 정진했다. 집도 변변치 않고 그것도 아내가 고생해서 겨우 마련한 집이다. 그 돈 다 벌어 어데 썼느냐고 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그는 명성은 귀히 여겼으나 돈은 귀히 여긴 사람이 아니라, 호주머니가 텅 비어 있어도 부자같이 살았고,호주머니에 그득하게 돈이 있어도 거지나 다름이 없이 돈과 담을 쌓으며 살아왔다.


1960년 새해 벽두에 찾아온 일단의 군인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사복을 입은 사람은 계급이 높아 보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몇 사람은 대령 계급장을 달고 한 사람은 겨우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군사 혁명이라는 이성계 이래 최초의 꿈을 꾸고 있는 이들은 내심(內心)을 감추고 진급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물어 볼양으로 가장(假裝)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섬? 심상치 않은 서기(瑞氣)를 발견한 지창룡은 태연하게 말하기 시작햇다. 대령 계급장 단 한 사람에게 '당신은 장관이 될 운수요'라는 말을 해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당신은 마음이 둘이라 관재(官災) 수(數)가 있다'고 일러주고, 중령 계급장을 단 젊은 친구에게도 '장관급에 간다'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사복을 입은 거므잡잡하고 작달막한 사람에게 한 말은 이미 제1편에서 말한 바 있다.

사복 입은 사람과 독대(獨對)를 마친 후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덕담(德談)이 오고갔다. 이제 대령 중령 계급을 단 사람들이 어떻게 금년에 장관 벼슬을 하는냐는 덕담이었다.

"두고 봐라. 장관 정도는 되고도 남을 운이다."

서로 없었던 일로 하기 하고 헤어졌다. 그들이 바로 5.16 군사 혁명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5.16 전야에 혁명 주체들과 이런 관계를 맺은 지창룡은 그후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의 부름을 받거나 심부름을 하게되고 술자리를 같이 한다.

ㅡㅡㅡ하루는 박정희 대통령이 불러 청와대에 갔다. 박 대통령은 제2의 수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선처로 헬리콥터를 타고 전국 주요 산수(山水)를 섭렵한 다음에 계룡산 아래에 제2의 수도인 행정 수도 자리를 잡을 것을 진언했다. 이 말을 들은 박 대통령은 조선 건국 초기에도 그 터에 도읍지를 세워야 한다는 말이 있었으나 결국 합당치 않다는 의견이 많아 한양으로 정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아마도 그 점이 박 대통령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지창룡은 계룡산 산세와 신도안 풍수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했다. 이 글에서도 거론하고 싶지만 글이 너무

어렵고 길 것 같아 생략한다.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지창룡 박사의 에세이집인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를 참고해 보기를 바란다. 그래서 대전에 행정 수도인 제2 수도의 터가 확정된다.



ㅡㅡㅡ이 때에 행정 수도가 세워질 일대의 옥녀봉 아래에 있는 '쟁반 같은 땅'에 제2 국립 묘지 터가 동시에 확정되고, 공사를 진행한다. 그 때에 10.26이 났고, 방대한 대전 행정 수도 건설 계획은 박 대통령의 서거로 실천에 옮겨지지 않는다.

10.26 후에 하루는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사람이 지창룡을 찾아와 박 대통령 시절에 세운 행정 수도 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통령의 생각은 그것을 발표하여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한 인간이 범(犯)하기 어려운 천기(天機)에 속하고, 천기를 누설(漏泄)한 자는 벼락을 맞는 법이다. 지창룡이 점지하여 박 대통령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발표 하지 않은 땅의 위치는 천기였다. 지창룡은 모른다고 잡아 떼었다.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국립묘지 터를 잡아 공사가 진행 중인데, 그 때에 행정 수도 터도 같이 잡은 분이 선생님이십니다. 제발 국가 대운을 위하여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 때서야 청와대와 그 사람의 집에 전화를 걸어 신원을 확인하고, 박 대통령에게 원본을 올리기 전에 떼어 놓았던 사본을 꺼내 그 비서관에게 주었다.

ㅡㅡㅡ지창룡이 점지한 터는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오덕구(五德丘)를 모두 갗춘 곳이다. 일국의 도읍지는 예로부터 원형(圓形) 직형(直形) 방형(方形) 첨형(尖形) 곡형(曲形)이라는 오덕구 중에 하나만 빠져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 땅에는 이만한 땅이 이 땅밖에 없고,ㅡㅡㅡ 북한 땅에는 황해도 구월산 아래가 이 땅과 같이 오덕구를 모두 갗춘 땅이다. 그래서 지창룡 옹은 남북 통일 후의 수도로 이 두 곳이 손색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육영수 묘지와 박정희 묘지, 그리고 지창룡

면담 집필/사초집필실 이사달, 문헌/자료 제공 지창룡

청오는 예술계 인사들과도 절친하게 지냈다. 이당 김은호와도 그랬고, 운보 김기창과도 그렇다. 운보가 지금은 불후의 명작을 많이 내는 노화백이 되었지만 지창룡이 처음 김기창을 알게 될 때만 해도 운보는 그렇게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면 중개인들이 몇 장 씩 가지고 시내에 나와 팔고 갈 정도였다. 하루는 운보가 창룡을 찾아와 자기 아버지의 선산을 보아 달라고 했다. 선산은 충북 청주의 어느 산꼭대기에 있었다.

"만수(滿水) 광판(廣板)이오."

"아니, 이 높은 곳에 물은 무슨 물이란 말이오?"

그래도 지창룡이 보기에는 틀림없이 묘소에 물이 차 있었다.ㅡㅡㅡ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하지만 그래도 물은 산 보다는 항상 위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한 비를 생각해 보면 금방 한다. 그러나 운보나 보통 사람들은 그 물의 진리를 쉽게 알지 못한다.

창룡의 말을 듣고 운보는 선친의 묘소를 이장하기로 했다. 흙을 파헤치자 진짜 묘소에는 물이 괴어 있었다. 그날로 운보는 창룡을 '귀신'이라 부르며, 서로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대림산업의 이재준 회장의 맡형이 이재형이다. 이재형은 자유당 시절에 장관을 지내고 4.19와 5.16 후에는 야당에 몸을 담아 당대 최고의 거물인 유진산과 함께 한국 야당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으나, 끝내 유진산과 뜻이 ?지 않아 정계를 은퇴하고, 초야에 묻혀 있다가 5.17 이후 전두환시대에 다시 컴백하여 민정당의 총재를 맡고 있었다. 이 때에 이재준이 지창룡을 찾았다.

선친의 묘소는 좋은 곳이었으나 그 보다 더 좋은 자리가 있어서 이장을 권했다. 묘역이 완성된 다음에 집안 사람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청오장! 이곳은 어떻소?"

"앞으로 3부 요인이 나올 자리요."

지창룡의 말대로 선친의 묘를 이장한 후에 큰 아들인 이재형은 3부 요인 중의 하나인 국회의장이 되었다. 묘소에 물이 있다느니, 이장을 해서 영광을 얻었다느니, 액운을 막았다는니 하는 말은 많고, 이에 얽힌 지창룡의 일화도 끝이 없다. 그 대표적인 일이 얼마 전에 한참 문제가 되었던 육영수 여사의 묘소이다.


육 여사는 평소에 지창룡을 가까이 했다. 그래서 국모(國母)와 지관(地官) 사이를 넘어 인간적인 서로의 존경과 아낌이 있었다.

1974년 새해 아침에 괘를 뽑았다. 국상(國喪)이 날 괘였다. 지창룡은 허겁지겁 경호실장을 만나 불길한 새해의 국운을 말하고 잘 예방하도록 권했다. 그런데 8.15 경축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맞아 서거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창룡은 소식을 듣자마자

대통령이 자기를 찾을 것을 직감했으나, 돌아가신 다정했던 육 여사의 안택을 잡아야할 운명이라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대낮부터 만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밤중에 고향 땅으로 몰래 숨어 들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자고 나니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안 갈 수가 없었다. 오전 열 한 시 경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도착했다. 이 때는 이미 남 모 풍수와 허 모 풍수, 두 노인이 육 여사의 묘소 터를 잡아 파고 있었고, 국립묘지 관리소장은 지창룡이 터를 잡아 묘역을 조성하고 있다는 제1보를 이미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후였다. 묘역 현장에 도착한 지창룡이 입을 열지 않자 관리소장이 불안한 모습으로 지창룡의 얼굴을 주시하며 제1성이 터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쁜 곳은 아니나, 좋은 자리는 아니오."

지창룡의 말이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육 여사가 모셔지면 그곳에 박 대통령도 모셔야 할 가능성이 많은데, 그 자리는 대통령의 시신을 모시기에는 청룡(靑龍) 좌(座)가 약했고, 현재 제기 되고 있는 '물'에 관해서도 산듯한 곳이 아니었다.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므로 관리소장은 다른 자리로 옮기기를 꺼려했다.

하는 수 없었다. 지창룡은 수리(水理) 전문가를 찾았다. 산세와 수맥과 담수 깊이 등을 면밀히 조사해서, 묘역의 가장 자리에 깊은 도랑을 팠다. 수리 전문가가 이만하면 묘역에 물이 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했으나, 풍수에 능한 지창룡은 더 깊고 더 확실하게 치수(治水) 조치를 했다. 그래서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그 자리만큼은 물과는 관계가 없는 자리가 되었다. 다만 육 여사가 묻힐 때는 청룡좌가 약하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다시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박 대통령 본인이 흉탄에 서거했다. 운명은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대통령 부인과 대통령 자신이 둘 다 현직에서 흉탄으로 서거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창룡으로서도 이승만 대통령 부부를 땅에 묻고, 그것도 모자라 박정희 대통령 부부까지 손수 땅에 묻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의 모진 운명을 통탄했다.



ㅡㅡㅡ지창룡은 먼저 수 백 톤의 흙을 운반하여 약한 청룡좌를 보강했다. 그만하면 청룡좌의 모습도 상당히 보강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 박 대통령의 시신을 묻었다. 이러한 사연과 이러한 조치들로 육영수와 박정희가 묻힌 자리는 풍수지리상으로 문제가 되던 수맥과 용좌를 보강 보완했으므로 별문제가 없는 묘역이 되었으나, 후에 근혜는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근영은 이혼을 하고, 아들 지만 군은 마약에 연관되는 불행을 겪자,다시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의 묘자리가 나빠서 그렇다는 말들이 분분했고, 심지어 텔레비젼에까지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여기에서 공개하는 지창룡의 비화가 또 하나 있다. 연령으로 보나 건강 상태로 보나 통속적인 사실로 보면 육 여사가 박 대통령 보다는 더 오래 살아야 했고, 그렇게 되었다면 박 대통령이나 육 여사는 동작동에 묻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박 대통령은 평소에 대전에 새로 만든 제2 국립 묘지에 묻히기를 원했고, 그러한 말을 생전에 여러 번 지창룡에게 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때나 박 대통령 자신이 죽었을 때는 대전 국립 묘지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였다. 지창룡의 말에 의하면 대전 국립 묘지가 완성된 뒤에 박 대통령이 죽었으면 박 대통령은 틀림없이 대전에 묻혔을 것이고,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육 여사가 죽었다면 육 여사 역시 동작동 국립 묘지가 아닌 대전 국립 묘지에 묻혔을 것이 분명하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고, 유택(幽宅)도 하늘의 뜻이다. 두 분의 묘역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가 보통 사람이 아닌 터에 보통 사람들처럼 이장(移葬) 문제를 거론할 수 없슴도 어쩌면 운명(運命)이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늘의 뜻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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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    증산도 제1 부흥의 역사로 기록된 600만명의 보천교시대(이종물사명)  안원전   2017/06/08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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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    [정역으로 보는 인사] 간태궁(艮兌宮)과 인신상화(寅申相火) / 칠현금  안원전   2017/08/06  997
1271    보천교 윤고문(보천교총정원)의 상해 임정 독립운동자금  안원전   2017/08/21  976
1270    도통맥을 직접전한 선매숭자 ~  안원전   2017/07/02  1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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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7    후천으로 이끄는 세살림~ 문왕과 이윤의 사명~  안원전   2017/07/0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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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4    21세기 미래문명 만능 광물자원 희토류 정보  안원전   2017/07/31  2029
1263    선정원경은 상제님 태모 고수부님 결연(結緣)시기를 계묘년(癸卯:1903)으로 기록  안원전   2017/07/21  1064
1262    징비록과 꽉 막힌 증산도(서나파)의 도정  안원전   2017/07/27  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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