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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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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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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10.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기사년(道紀 59, 1929) 8월에 재차(再度) 조선 총독으로 임명되야 부임 당시에 교주난 김 홍규(金烘圭) 이 병철(李柄喆) 원 약제(袁若濟) 3인을 명하야 가로대 전일 총독에게 답례(返禮)의 예의(儀)를 행치 못하야 귀국하게 되고 귀국당시에 친히 송별(餞別)도 못함은 유감만천이러니 금일 재차 이곳에 부임하신다 하니 너희들은 나의 대표로 부산 상륙장에 참열하야 환영하라 하였다. 김 홍규는 앞서(前期) 출발하야 부산으로 가고 이(李), 원(袁) 양인은 본 군(郡) 경찰서에 들어가 이(右) 사정을 진술하고 부산경찰서장에게 소개함을 청구하니 정읍경찰서장 망교광차(望橋光次) 가로대 총독환영의 여행은 허가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2인 가로대 교주선생의 정의(情誼)와 교중 전체의 체면상 면회는 불능한다 할지라도 총독환영의 의사만 발표하여도 우리의 정의(情誼)라 하니 서장 가로대 나의 명을 위반하야 허가없이 출발하면 중도에서 구속 취체(取締:단속)하겠다고 강경히 막음(防止)으로 부득이 중지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후 9월에 원 약제(袁若濟)가 경성방면 어떤 사람(或人)의 소개로 인하야 한줄기 길을 얻어 고다마 히데오(兒玉 秀雄:1929.4월-1931.6월) 정무총감을 면회하고 앞서 기록한 이유로 총독 면회하기를 요구한 바 총감도 거절함으로 부득이 면회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보천교에서는 사이토(齋藤) 총독에 대하야 감격한 의사(意思)를 두었지마는 관청으로부터 이를 막고 각 사회에서는 중상적 수단을 희롱하야 근거 없는 말을 유포하되 총독이 보천교 본소에 일 차 간 것이 체면을 손상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보천교에서는 이를 기화로 하야 교도에게 조선총독이 조회(朝會)하려 왔다고 선전하고 금전을 착취하야 을축년(道紀55, 1925) 창시(刱始)한 신건축 공사를 준공하게 되었다고 운(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내 관민(官民)간에 주지(周知)한 바 보천교에서 포교이래로 제일 곤란을 받기는 병인(26) 정묘(27) 양년에 비할 바가 없다가 점차 무진년(1928)에 즈음하여 교세가 진흥하야 기사년 3월에 준공하게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제반 사실을 매 건마다 들기(枚擧) 불능하나 중요한 점을 일괄하야 서술하자면 전선(全鮮) 내에 각 사회와 및 각 종교단체 중에서 홀로 보천교만 고립하게 된 원인은 서양 야소교에서 선전하는 말에 의거하면 만일 조선에 보천교만 아니면 우리 야소교가 전선(全鮮) 민족에게 선포하기가 아침 아니면 저녁 하룻거리(非朝則夕)로 주기적(晝期的) 전선(全鮮)의 교세를 독점할 뻔 하였는대 보천교는 우리 교 발전상 대 장애물인 대 악마라고 질시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더욱이 대도회(大都會) 및 거리 골짜기(巷谷)를 물론하고 야소교 남녀 신도난 날로(日月) 증가하야 대세를 점령 중, 야소교도의 형제자매 원근족척과 학교 동창생이 관청의 상하관리와 사회단체원과 결탁 악수하야 비밀행동을 취하며 일방에서는 사회상으로 단체로 치는(群討) 공격을 하며 혹은 관청에 허무한 풍설(流說)로써 중상(中傷)하야 보천교 박멸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膾炙) 혹은 자연히 멸화(滅化)되도록 방책을 강(講)하야 시종(終始) 저해법(沮害法)을 연구함을 그만두지 아니하니 그 원인을 상고해 연구(考究)하건대 대정(大正) 8년 기미(1919) 만세 소요 후로 보천교에서는 가정부(假政府:임정) 및 일반사회와 악수하야 비밀적 동정(同情)이 없는 까닭(所以)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우리 교에서는 저들로부터 중상 박해는 받을지라도 대항적 행동은 취하지 아니하고 무저항주의로 만사를 인내하며 고락은 원래(元然) 천지로부터 정한 운명으로 간주하고 허물이 나에게 있지 아니하냐고 회고(回顧)하는 보천교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월에 교령(敎令)으로써 남, 북선(南北鮮) 간판을 철폐하고 성전 신건축 사무청 간판을 현 수호사(守好司)에 게양하다. 진성사(眞誠士) 교첩을 발행하고 개인에게 돈신록(敦信錄)을 급여하다. 동년 7월 경에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하수일리(下水溢里) 박 인원(朴仁遠)이 연와(煉瓦) 대금 청구소송을 제기하고, 최초에 을축년(1925) 신건축을 창시할 시에 박 인원(朴仁遠)이 연와를 책임질(請負) 새, 한 장(一枚) 대금은 1 전(錢) 9 리(厘) 씩으로 정하야 70만 장을 을축년(1925) 6 월 말일 내로 구워 납부하고 그 사이 공인(工人)의 식료품과 불쏘시개 나무 대금(火木代)를 먼저 지급하기로 계약하였든 바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70만 장을 구울 화목대와 공인 식료품대는 이상의 것을 지불하였는대 연와는 6월 말일까지 불과 25만 장이오. 계속하야 만여 원을 지불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중간 기능이 좋지 않아 2차 실패한 것 까지 합하야 일백 이 만 장 대금 중 잔액이라고 8천 4백여 원을 경성 지방법원에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 그 후 8년간 재판을 거듭하다가 교중에서 패소하다. 동년 8월경에 손주(巽主) 임 치삼(林致三)이 탈교하다. 그 원인은 북선(北鮮) 사무소 간판 철폐에 불평이 생긴 것이다.  동시에 한 상익(韓相翊) 이 석하(李錫夏) 등이 탈교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9월에 총령원장 김 홍규(金烘圭)가 사임하고 민 영성(閔泳晟)이 총령원장에 피임되다. 동년 10월에 수방주(水方主) 문 정삼(文正三)이 의의(意義)가 없이 배교하야 임 치삼(林致三), 임 경호(林敬鎬), 이 달호(李達濠) 등과 단결하여 경성부 가회동 보천교 진정원(眞正院)에 증산교 간판을 걸고 이 상호(李祥昊)와 공모하야 진정원 대지 및 가옥을 매각 소비하다. 동년 11월  경에 광주(光州) 진정원 반부(半部)를 채 규상(蔡奎象)이 훔쳐 팔아 횡령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최초 교금으로 전남 진정원을 설립할 새 채 선묵(蔡善黙) 김 홍규(金烘圭) 2인의 명의로 등기하였더니 규상(奎象)이 상속증명을 신고제출(屆出)하야 반부(半部)를 도적질해 팔고 그 반부(半部)는 신미년 정월 도(度)에 본소로부터 매각할 새 소액의 계약금을 받고 가등기 이전수속을 하여주었더니 매수인이 이를 기회하야 남은 잔금(餘金)을 지불(拂渡)치 아니함으로 누차 재판하였으나 패소하고 말았다. 동월에 임 경호가 문 정삼 위임으로 함흥 진정원 건축 반부(半部)를 도적질해 팔아 횡령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최초 함흥 진정원은 성전 및 회관만 건축하다가 중지하였는대 그 대지와 건물증명을 문 정삼(文正三) 차 윤덕(車輪德) 2인 명의로 하였는대 정삼이 이 건물 반부(半部)를 매각함이오. 그 남은 건물 및 대지는 그 후 김 우경(金宇景)이 대(對) 문 정삼 차 윤덕 소송 비용으로 전부 매각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11월에 김 홍식(金鴻植)이 총정원(總正院) 간사 겸 경리에 피임되다. 동월 경에 교중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야 신탁자 4인을 지정하고 권리증과 및 인감장(印鑑章)은 중앙에 보관하니 신탁(信託)을 받은 자는 차 윤덕(車輪德) 김 홍규(金烘圭) 김 정곤(金正坤) 이 병철(李柄喆) 4인이러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포교 19년 정묘(道紀 57, 1927)라. 정월 10일에 이 달호 외 수십 인의 혁신란(革新亂)이 오다. 동년 2월 5일에 내동방주(內東方主) 이 달영이 사망하다. 그 원인은 동년 정월 이 달호 혁신 반란의 즈음에 달호의 실매(實妹) 이 달영(李達榮)은 달호의 행하는 바가 악독함이 한이 없으니 혈족관계로 보면 형제의 명분이 있고 교중에 헌신한 일을 생각하면 사제(師弟)의 정의(情誼)가 중한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와 같이 진퇴유곡이 되야 가장도 자식도 없는 기구한 운명을 비관하고 이 광막한 천지간에 일신을 허용해 맡길 곳이 없으니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 만 가지 고통을 망각함만 같지 못하다고 결심하야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시가(媤家)인 경북 태곡군(溙谷郡)에서 독약을 마시고 33세를 일기로 영서(永逝)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는 이 부전(訃電)을 접하고 슬프고 불쌍히(哀矜惻隱) 여기사 내간부(內幹部)를 파견하야 예식으로 매장하고 동월 15일에 내정원(內正院)에서 추도제를 거행하며 3월 7일에 본리(本里) 춘방(春方) 공실내(公室內) 이 달영 생존시 거주하든 방실에 영위(靈位)를 설(設)하야 고혼(孤魂)을 불러 위로(招安)하고 혈통을 잇는(繼統) 방주를 정하야 3년 상을 치루게 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달호 임치삼은 혁신운동이 불성립함에 더욱 악감을 발하야 대구 복심법원에 김 병우(金秉佑)의 증인이 되야 법정에 나가 위증함으로 김 병우가 승소하야 일만 원은 삭제(削除)하고 일만 원은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아 정묘년((道紀 57, 1927) 7월에 가차압 집행하려 왔다. 이 보도를 접한 일반교도는 극도로 분개하야 수 십 인은 본리(本里) 비룡산 아래 피난동(避亂洞)에 회합하야 만일에 김 병우가 교중 물품을 강탈하는 경우에는 중음을 걸고(賭) 쟁의(爭議)하겠다는 결심을 표시하기 위하야 총력으로써 자기의 뇌부(腦部)를 3회 갈라 파열(割裂)하야 피가 흐르되 늠름히 단에 서서(凜然立壇) 결심을 맹서한 사람도 있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김 병우는 집달리와 함께 와 교주 거실에 들어가 물품 전부를 차압하야도 교주는 이를 허락해 주었다(許與). 김 병우는 차압 물건 가격이 10원 금에 미만하다 하야 교의 공동물건인, 교도 1인에게 밥 수저 하나(葉)씩 거두어 주조한 교종(敎鍾)을 차압하려 함으로 수 백 명 교도가 회집하야 그 물건은 교중에 공유물이오, 교주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교주 개인에게 소송하였은 즉 교주 거실에 있는 물건은 차압을 당할지언정 공유물건은 차압을 하지 못한다고 반항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제 2회에는 김 병우가 미리 위험과 차압불능을 각오하고 경찰서에 응원경관을 청구하니 경찰서에서는 경관 80여명을 출동시키고 경비전화까지 가설하야 차압에 착수하야도 교도 등은 이같이 삼엄함에도 불구하고 교종(敎鍾) 차압을 시종(終始) 반항함으로 사태가 중대화 하였더니 전주 경찰부 곡구(谷口) 고등과장이 와서 교주를 면회하고 쌍방 조정하기 위하야 교도 진정(鎭撫)하기를 요구하니 교주난 분쟁을 방지하기 위하야 4천원 가격을 담보하고 교도를 진정(鎭撫)시키니 곡구(谷口) 과장은 원 약제(袁若濟)를 대하야 보증금을 공탁하고 상고하기를 권고해 가로대 이 일이 사실 억울(冤枉)함은 지방에서 다 아는 바라. 상고만 하면 해원(解寃)이 될 터이니 속히 상고하라 하고 돌아갔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원 약제(袁若濟)는 교주 명의로 경성 고등법원에 상고 하였든 바 이를 기각하고 교중 공용물인 관계상 강제집행 이의소(異議訴) 교(敎) 재산 신탁해 받은 자 명의로 제기하였더니 1,2,3 심에 다 기각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6월 3일에 60방주 교첩을 하사하시니 수(無) 화(火) 방주 김 정곤(金正坤), 금(金) 계통(繼統) 김 규찬(金奎燦), 목(木) 김 홍규(金烘圭), 동(無) 서(西) 민 영성(閔泳晟), 남(南) 차 윤덕(車輪德), 북(北) 한 규숙(韓圭淑), 춘(춘) 신 철휴(申哲休), 하(無), 추(秋) 권 창기(權昌機) 동(東) 계통(繼統) 정 세현(鄭世鉉), 간(艮) 계통(繼統) 한 효식(韓孝植) 인(寅) 이 대준(李大俊), 갑(甲) 이 병철(李柄喆), 묘(卯) 한 정호(韓錠浩), 을(乙) 강 수영(姜琇永), 진(辰) 김 홍식(金鴻植), 손(巽) 김 기용(金基鏞), 사(巳) 이 영조(李英兆), 병(丙) 전 병덕(田炳悳) 오(午) 김 병희(金昞熙) 정(丁) 조 제승(曺悌承), 미(未) 계통(繼統) 서 일만(徐鎰萬), 곤(坤) 장 인택(張仁澤), 신(申) 최 남진(崔南鎭), 경(庚) 이 병엽(李炳燁), 유(酉) 권 중기(權重基), 신(辛) 유 붕석(劉朋錫), 술(戌) 이 달상(李達相), 건(乾) 강 응규(姜應奎), 해(亥) 이 중규(李重奎), 임(壬) 김 태욱(金太旭), 자(子) 이 영호(李英浩) 계(癸) 손 양저(孫亮儲), 축(丑) 계통(繼統) 김 수권(金洙權), 동지 이 범구(李範九), 소한 강 원병(姜原柄), 대한 문 재익(文在益), 입춘 전 용기(田溶起), 우수 이 내갑(李來甲), 경칩 김순기(金純基), 춘분 신동휴(申東休), 청명 김용남(金容南), 곡우 원 약제(袁若濟), 입하 노 서봉(盧瑞鳳), 소만 이 용두(李用斗), 망종 최 종한(崔鍾翰), 하지 김 승권(金升權), 소서 최 병훈(崔柄勳), 대서 송 심옥(宋心沃), 입추 권 상립(勸相立), 처서 박 용중(朴容重), 백로 조 종정(趙鍾鼎), 추분 권 상도(勸相道), 한로 이 중창(李中昌), 상강 홍 성신(洪性信), 입동 한병구(韓炳九), 소설 강희봉(康熙鳳), 대설 정기도(鄭基道) 등 제 인이러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6월 4일에 28 선화사(宣化師)의 교첩을 하사하시니 피임인은 각(角) 최 일문(崔逸文), 항(亢) 김 영두(金永斗), 저(氐) 조 만원(趙晩元), 방(房) 차 윤경(車 輪京), 심(心) 이무열(李武烈), 미(尾) 이극선(李極鮮), 기(箕) 전 용소(全鏞韶), 두(斗) 이 인래(李仁來), 우(牛) 이 병규(李炳奎), 여(女) 배 익현(裵翊玄), 허(虛) 우봉양(禹鳳陽), 위(危) 홍 영우(洪泳佑), 실(室) 조병호(趙秉頀), 벽(璧) 조 병연(趙秉緣), 규(奎) 손 양중(孫亮中), 루(婁) 설 진하(薛鎭夏), 위(胃) 고 주경(高周景), 앙(昻) 김 언수(金彦洙), 필(畢) 김 주권(金周權), 자(觜) 이 정희(李玎熙) 삼(參) 손 기모(孫奇模), 정(井) 김 성관(金聲貫), 귀(鬼) 박 운락(朴雲洛), 류(柳) 정 재흠(鄭在欽) 성(星) 최 회경(崔會慶), 장(張) 김 재선(金在璿), 익(翼) 장 명제(張明濟), 진(軫) 김 병제(金秉濟) 등 제 인이러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8월 22일에 총정원 간사 겸 경리사장(司長) 김홍식(金鴻植)이 사임하다. 동년 9월 19일에 교령(敎令)으로써 선화사(宣化師) 28 인을 사정방(四正方)에 분속(分屬)하니 규루위앙필자삼 7위는 수(水)부에 속하고, 각항저방심미기 7위는 화(火)부에 속하고, 정귀류성장익진 7위는 금(金)부에 속하고, 두우여허위실벽 7위는 목(木)부에 속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9월 20일에 교주께서 총정원의 직원인 육사장(六司長)을 친히 임명하시니 피선인은 전문사장(典文司長)에 김 기용(金基鏞), 포정사장(布正司長)에 김 정곤(金正坤), 전의사장(典儀司長)에 김 규찬(金奎燦), 수호사장(修好司長)에 이 병철(李柄喆), 사도사장(司度司長)에 김 홍규(金烘圭), 경리사장(經理司長)에 원 약제(袁若濟) 등 제 인이러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11월 29일에 교령(敎令)으로써 선화사(宣化師) 6임의 임명을 제정(制定)하시니 하나는 가로대 숭례사(崇禮士), 둘은 가로대 유신사(柔新士), 셋은 가로대 중정사(中正士), 넷은 가로대 비정사(備整士), 다섯은 가로대 양명사(揚明士),  여섯은 가로대 근진사(謹眞士)라 반포해 알리시다(頒示). 선화사 6임 하 12임의 임명(任名)은 방주(方主) 6임의 12임과 동일히 쓰게 하시다. 방주(方主) 하 8임인 보수원(保守員)의 임명(任名)을 자강원(自强員)으로 개정하사 선화사(宣化師) 하에도 동일히 쓰게 하시다.

<보천교 연혁사 끝>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 原田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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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9    풍수 관상 대가 국사(國師) 지창룡 대사(大師) 서설  안원전   2017/05/20  1650
1238    (신명 세계) 귀신3 귀신 점호하는 선비와 화담 서경덕의 구미호 체험  안원전   2017/05/20  1082
1237    (신명세계) 귀신 2 조선의 신비한 조상 혼령-인평대군 부인의 혼령& 흥선대원군과 산신&두창신(痘瘡神)  안원전   2017/05/20  1205
1236    (신명세계) 귀신1 혼령의 귀국, 현현  안원전   2017/05/20  1036
1235    지인지감 김형렬  안원전   2017/05/17  1326
1234    삼제갈 팔한신 관우장비 조자룡 모두 나서~~  안원전   2017/05/07  1347
1233    유심결唯心訣 by 永明禪師  안원전   2017/05/07  1558
1232    한신팔월 병종길도 출인~~  안원전   2017/04/29  1356
1231    후천~ 토화작용의 평화낙원  안원전   2017/04/27  1354
1230    달마 혈맥론6  안원전   2017/04/26  1004
1229    달마 혈맥론5  안원전   2017/04/26  1205
1228    달마혈맥론4  안원전   2017/04/26  907
1227    달마 혈맥론3  안원전   2017/04/26  961
1226    달마 혈맥론2  안원전   2017/04/26  906
1225    달마 혈맥론1  안원전   2017/04/26  942
1224     <범증산계 통합경전> 사륙배판 1000 여 페이지 파일공개(무료다운 가능)  안원전   2016/10/28  1743
1223    (18개 경전포함 범 증산계 통합경전 <가칭 십경경전>) 내용: 1.  안원전   2017/02/28  1192
1222    궁팔십 달팔십~~태모님께서 선천운수는 궁팔십달팔십이요 지금운수는 동지한식백오제니라~  안원전   2017/04/24  957
1221    배가 따뜻해야 장수...  안원전   2017/04/18  1147
1220    명리학대가 제산 박재현  안원전   2017/04/18  1489
1219    궁팔십 달팔십~~  안원전   2017/04/18  973
1218    프랑스 막달라 마리아의 영지주의 종통제거 비밀과 임제록의 본질  안원전   2017/04/10  1374
1217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무구광 동자에게의 수기  안원전   2017/04/01  1449
1216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심백강  안원전   2017/03/23  1070
1215     (보천교의 독립운동)함석태와 강우규, 그리고 대동단-신채호 부인 박자혜는 보천교 '부인 선포사' 단원  안원전   2017/03/17  1635
1214    천지설위 로 드러난 역의비밀~정역~~  안원전   2017/03/15  1081
1213    중화경 정체와 이효진 번역 <중화경> 서문  안원전   2017/03/15  1109
1212    성경신~ 진심을 다하여야~~  안원전   2017/03/13  971
1211    ◎원평에서 의통제작 후 20년 대휴게기 선포와 이상호에 대한 성도들 반응  안원전   2017/03/05  1198
1210    ◎6.25 피난시 혼사시켜준 이정립 부부와 한강을 함께 넘은 젊은 總師首  안원전   2017/03/05  1165
1209    이정립이 왜곡한 <증산교사>의 조직은 허구, 젊은 總師首가 직접 조직한 실체  안원전   2017/03/05  1366
1208    교주제도가 아닌 목화토금수 방주제도로 운영한 8.15 해방이후 증산교 대법사  안원전   2017/03/05  1006
1207    숙구지 문왕 추수사명 초,중,말복 세살림 종통의 핵심잡기  안원전   2017/03/03  1413
1206    ◎이상호 정립형제 2변 운산 총사수님 조직 접수 및 청부 살해 기도 내막  안원전   2017/03/05  1096
1205    보천교 기관지 보광의 폐간은 이 성영 스스로 <증산교사>에서 차교주에 불만한 자신이 했다고 고백  안원전   2017/03/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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