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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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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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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9.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9월에 이 달호(李達濠)가 혁신난을 일으키다가 성공치 못하고 도주하다. 이달호난 경북 성주(星州)인이라 정사년(道紀 47, 1917)에 입교하야 기미년(道紀 49, 1919) 60방주 조직시에 경(庚) 방주가 되었다가 그 후에 춘(春) 방주로 승진 임명된 자이다. 갑자년(道紀 54, 1924) 8월 이 상호 혁신운동 당시에 경상 진정원장 이 종익(李鍾翊)이 공모자임으로 이를 면임(免任) 출교시키고 이 달호를 경성진정원장으로 임명한 바, 재임 중에 기녀를 첩으로 삼아(作妾) 공금을 낭비하고 회임(懷妊)까지 된 사실이 발각된 고로, 목 방주(木方主) 김 홍규(金烘圭)가 그 죄를 논책하여도 계속 불복하고 또 그 본처를 돌아보지 않은지가 10여 년이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 사실을 교주께서 들으시고 백방으로 깨우쳐 말씀하시되 따르지 않고 교주의 장남 희남(熙南)이 병으로 인하야 정읍병원에 입원하였드니, 심야에 이 달호가 정읍에 비밀리 가서 희남을 유인해 나가 불량배를 인솔하여 요리옥(料理屋)에 가서 다액의 금전을 낭비할 뿐 아니라, 각기 기녀를 품어 이와 같이 소년을 악도(惡導)하고도 교주의 장남도 기녀와 관계가 있다 하면서 스스로(自分)의 악행을 엄폐코자 함으로 8월 24일에 부과(付科)에 처하였더니 회개할 마음은 조금도 없고(豪無) 도로혀 불평의 악감을 가져 박 래필(朴來弼) 함 익록(咸益錄)과 혁신을 운동하다가 음모가 발각되야 동년 9월 12일에 면임(免任)시킨 바 동월 22일에 遂히 혁신의 봉화를 거하다가 미연에 낭패하야 도망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에 교도 등이 함 익록을 엄중히 신문(訊問)하니 그가 말하되 우리가 혁신을 음모계획 당초에 폭탄 및 무기를 구입하야 본소를 폭파하기로 이 달호 가내(家內)에 감추어 두었다고 자백하니 교도가 이달호의 가택을 수색하여도 폭탄과 무기난 없고 교주 명의에 이 달호가 3만 4천 5백 원의 보관증과 친 사진계약금 3천원의 영수증이 발견되었다. 이는 각 방주에게 분배되어있든 글자가 기록되지 않은(無記字) 백지에 교장(敎章)을 날인한 교첩지(敎帖紙)로써 위조한 것이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우리교의 당국 양해(조선 총독부에 단체 및 차 경석 교주공개) 전에 교주난 은거하고 관청에서난 교도에 대하야 취조가 엄밀함으로 교중 각 임원의 임명첩을 기명(記名) 배부하기 불편하야 각 방주가 우 교첩 용지를 가지고 직접 교임(敎任)을 명할 자의 집에 가서 기명(記名) 수여하게 된 고로 각 방주에게난 이 교첩용지가 산재한지라. 그럼으로 이 달호도 자기의 사용하고 남은 교첩지를 이용하야 보관증과 및 계약서를 위조한 것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도 등이 일방에서난 도주하난 이 달호를 삼산교(三山橋)에 뒤쫓아 추궁해(追及) 전신을 수색하니 품안(懷中)으로부터 현금 1천 9백 원이 발견 되난지라, 이를 횡령한 교중 공금인가 의심하야 총령원(總領院)에 인도해 와(引來) 그 금전의 출처를 질문 한 바 경성에 거주하난 이 우혁(李愚赫)의 금전인데 상업경영하기 위하야 보관한 것이라고 답한다. 경성에 탐문하여도 사실이 없고 이 달호의 부하 교도에게 조사하여도 수령한 자취(形跡)가 없는지라, 문 정삼(文正三)에게 보관하고 이 달호를 석방하니 경찰서 고등형사 송 달목(宋達穆)이 보호하야 정읍 읍내 시기리(市基里)로 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내동방주(內東方主) 이 달영(李達榮)은 이달호의 실제 누이(實妹)인대, 이때 형제간 정의(情誼)로 달호를 회개시키기 위하야 정읍에 가서 깨우쳐 말한 즉, 달호 가로대 지금 나의 사정이 교중에 죄를 범하는 것 보담 목전에 급한 재앙(急厄)이 이르렀으니, 설령 지금(縱今) 교중에서 허용함으로도 나의 몸을 지탱(支持)하기 불능한 사정이 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달영이 그 일을 물으니 답해 가로대 내가 경성에 있을 때에 심상(心傷)이 변환하야 중앙을 속이고(欺罔) 금전을 사기해 먹을(詐取) 목적으로 경남 거창군 거창읍 하동(下洞)에 사는 김 병우(金秉佑)를 유인하되 우리 보천교 수백만 교도가 교주선생의 얼굴을 뵙기(拜顔)을 원하야도 교주가 거절하야 왔으니 우리들이 교주선생의 사진을 촬영하야 교도에게 발매하랴면 수십 만 매는 용이할 터이오, 또 사진관에 염가로 계약하면 순이익이 수 만원에 달하리니 그 이익금을 등분 사용함이 어떠하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나는 중앙에 친근하니 교주의 진영(眞影) 촬영은 내가 부담하고, 복사 및 기타 비용은 김 병우(金秉佑)가 부담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 3천원을 김 병우(金秉佑)에게 받아 1천원은 이 우혁(李愚赫)이 나누어 쓰고, 백 원은 내가 소비하고 잔금 1천 9백 원을 일전에 교도에게 압수되었난대 그 때에 경성인의 금전이라 말함은 거짓핑계(假託)의 말이나 지금에 만사가 낭패하야 김 병우(金秉佑)가 고소하면 징역을 면키 어려움이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지금이라도 우(右) 압수된 금전만 있으면 해결할 방책이 있겠지마는 이미 교중에 압수되었으니 할 도리가 없다 하니 달영이 깨우쳐 말해(說諭) 가로대 교주선생은 온화 관대하신 덕의(德義)로 항시 너를 선량자(善良者)가 되도록 훈유(訓諭)하되 네가 악습을 제거하지 못하야 스스로 화를 취하는 바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러나 내가 이 사실을 교주 선생에게 상세히 보고하야 양해를 얻고 그 금전을 너에게 반환하도록 힘을 다할 터이니 너는 지금으로부터 회개하겠느냐. 달호 가로대 내가 회개하기는 용이하나 이 금전을 반환하기는 기대(可望)할 수 없고 교주도 이는 능히 하지 못하리라. 만일 우금(右金) 만 반환하면 김 병우 사건을 해결한 후에 고쳐 사죄 개오(改悟)하겠노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달영이 본소에 돌아와 이 사실을 고하니 교주가 문 정삼(文正三)을 불러 들이사(召致) 가로대 이 달호에게 압수한 금전이 교중 공금이 아닌즉 우리에게 관계가 없으니 곧 반환하라 명하시다. 달영은 이 돈을 수취해 정읍에 가 달호에게 반환하니 달호가 땅에 엎드려 감격해 울면서(伏地感泣) 교주의 크고 훌륭한 덕(盛德)을 기리다(祝辭).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달호난 사건 해결을 위하야 경성 이 우혁(李愚赫)을 전청(電請:전보나 전화로 연락)하고 김병우에게 전보를 발송하니 김 병우(金秉佑)의 부친이 대리로 왔는지라, 화해를 비니 김(金)이 듣지 아니하고 이 밤을 경과한 후 고소하기로 내정하다. 이 달호가 밤이 깊도록 애걸하되 아니 됨으로 숙소에 가서 잠자기를 청하니 김(金)이 도주할까 염려하야 붙들고 허락치 아니하난지라. 이 우혁(李愚赫)은 김 병우(金秉佑)와 서로 얽혀져 있는(連葛) 처지인대 김 병우의 부친에게 깨우침을 권해 가로대 달호가 도주할 사람은 아니니 만일 도주하면 내가 부담하리라 하니 김 병우 부친이 이 달호를 풀어주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달호가 문밖에 나갈 새 이 우혁이 전송하려 나오난 체하고 문밖에 나와 달호다려 청하야 가로대 내가 요즈음(近頃)에 꼼짝 못하는 어려운(窘束) 사정이 있난대 300원만 있으면 해결 하겠다 하니 달호난 자기가 도주하자면 이 우혁의 환심을 아니 살 수 없어 품속으로부터 300원을 꺼내어 주니 이 우혁이 달호에게 눈을 주어 도주함을 암암리에 권유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달호는 그 밤에 도주하야 군산을 경유로 경성에 은둔하야 우금(右金)은 전부 애첩에게 낭비하였다. 그 후에 달영을 수차 경성에서 면회하야 가로대 금 3천 5백 원 만 교주께서 내어주면 김 병우(金秉佑) 사건을 해결하고 자기 일신이 자유 활동하야 헌신적으로 교무에 종사 하겠다 하나 그 심리를 궁구(究)하면 금전만 사취 낭비하자는 목적임으로 이를 불응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병인년(道紀56, 1926) 10월에 이르러 임 경호, 임 치삼, 문 정삼, 채 규일 등과 연락하야 증산교(甑山敎) 간판을 경성부 가회동 진정원에 게양하고 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야 보천교도의 금전을 거액으로 사취하며 보천교 박멸할 계획을 백방으로 연구 중이더라. 정묘(道紀57, 1927) 정월 8일에 내동(內東) 방주 이 달영(李達榮)과 손양저(孫亮儲) 2 인이 포교차로 경북 지방에 출장하든 바 대전역에서 환승차(乘換車)를 기다리던 중 마참 정낙영(鄭洛永)이라 하난 자가 이 달영을 보고 말해 가로대 내동주(內東主)난 어느 곳에 가느냐 달영은 정낙영(鄭洛永)이 그 오라비(娚兄) 달호의 수족임으로 달호의 행동과 심리를 알기 위하야 의견에 반해 대해 가로대 나도 보천교애 싫증(厭情)이 나서 본소를 하직하고 시가(媤家)에 돌아가서 살림이나 살기 위하야 가노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낙영(洛永)이 웃어 가로대 내동주(內東主)의 철저한 교심(敎心)으로 그럴 리가 없겠고 포교차 가겠지요, 달영 가로대 어찌 기망할 리가 있나냐. 실지로 보천교를 그만두고 시댁(媤家)에 가는 길입니다. 낙영이 웃어 가로대 정말로 고향에 가시면 만분다행(萬分多幸)이 다 하늘이 지시함이로다. 달영이 그 이유를 물으니 낙영 가로대 임 경호 채 기두는 보천교 박멸하기 위하야 경무국 모 관리의 소개를 얻어 전주 경찰부(警察部)에 교섭하러 가고 이 달호 외 10 여인은 정읍으로 직행하야 경찰서에 교섭하고 보천교 본소를 함몰할 계획으로 출발하였으며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또 각처 진정원에 심복인을 파견하여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교주 타살한 전보가 도달하거든 곧바로 진정원을 습격하야 교(敎) 소유재산을 점령하기로 약속하였다 하니 달영이 승차하야 손 양저(孫亮儲)에게 낙영이 하는 말을 상세히 말하야 본소에 급보하라 하고 시가(媤家)으로 향하다. 손 양저(孫亮儲)는 경부선 옥천(沃川)역에서 차를 갈아타고 본소에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함에 이들의 행동을 감시하더니 9일에 달호 등이 경찰서에 출입함이 판명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9일 밤에 원 약제(袁若濟)는 광주로부터 귀로에 정읍 시기리(市基里) 유사중(劉士仲)의 여관에 숙박하든 바, 10일 이른 새벽에 문 정삼(文正三)은 원 약제(袁若濟)의 숙박함을 탐지하고 와서 함께(同一) 행동을 하자고 간청하되 원은 이를 불응하고 임 경호가 협박하되 굴치 아니하고 경찰서에 들어가 서장 및 고등계 주임을 면회하고 저들의 행동을 고발하니 답해 가로대 각별히(別段) 위험사건이 발생되지 않도록 진무(鎭撫)할 터이니 안심하라 함으로 본소에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하였더니 동일 오전 11시 경에 이 달호, 채 기두, 채 규일, 임 치삼 등 10 여인이 자동차 두 대를 분승하고 본소에 도착하는대 형사 송달목(宋達睦)이 동승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들은 하차 즉시에 교소 문전에서 교도를 만나는대로 난타 혼도케 하난대 그 사용하난 무기는 육각 곤봉과 및 죽창 끝에 고초가루 견대를 씌운 것이러라. 교도도 부득이 정당방위하기 위하야 일장 대혼전을 연출한 후에 달호 등이 패주하다. 당일에 날씨(天氣)가 청명하였난대 달호 패의(達濠輩) 전쟁이 시작되자 갑자기 풍설이 크게 일어나다가 전쟁이 끝나는 즉시에 풍설이 갑자기 잠잠해지고 밝은 태양이 다시 밝게 빛나다. 이때 이달호 패가 대흥리를 함몰한다는 소문이 읍내에 회자하야 시기리(市基里)에서 그 광경을 구경(玩賞)하려고 온 사람이 수 천 명에 달하였난대 돌아갈 즈음에 모다 날씨(천기) 이상함을 칭찬해 말하다(稱道).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김 병우(金秉佑)난 이 달호(李達濠)와 공모하고 위조한 계약서로 금 2만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진주 지방법원에 제기 하였다가 패소하고 대구 복심(覆審)법원에 공소를 제기중이다. 동년 11월 경에 박 종하(朴鍾河), 채 규상(蔡奎象) 등이 배교하다. 포교 18년 병인(道紀 56, 1926)이라. 정월에 교령(敎令)으로써 60방주를 전부 도태(淘汰)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전부터 내려온 재래(在來) 방주는 각기 지방열(地方熱)이 있어 서로 의견이 불일치함으로 남북선(南北鮮)의 원주지로써 포교 관할기관을 분리해 세워(分立) 대전을 중심경계로 이북은 북선北鮮) 이남은 남선(南鮮)이라 칭하고, 북선 회장은 임 치삼(林致三), 남선 회장은 김 정곤(金正坤)으로 선거하야 각기 사무소 간판을 걸고,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경상남북도 교도는 남선 사무소에서 관할하고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교인은 북선 사무소에서 관할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러나 인심은 부진하야 사무소는 다액의 부채도 유지키 불능하고 당쟁(黨爭)의 폐단만 생기게 되었음으로 교주께서 이를 우려하사 3월에 교령(敎令)으로써 남북선 사무소 간판을 철폐케 하였더니 이로 인하야 북선 소속(附屬) 기개인(幾個人)은 불평을 품게 되었다. 동년 정월 27일에 교주의 장남 희남(熙南)이 사망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3월에 사이토(齋藤) 조선총독이 남선 시찰도중 본소에 내림(來臨)하야 교주와 면회한 후에 완성하지 못한 신건축을 시찰한 후 즉일 출발하였다. 그 후에 교주난 총독이 당지(當地)에 머뭄(留駕)을 감사히 생각하야 즉시 회사(回辭)의 답례를 행코저 하나 을축년(道紀55, 1925) 총독 면회 당시 도로 가운데(中途) 차중(車中)에서 무뢰배(無禮輩)에게 곤욕을 받은 일이 있어 왕래 불편함으로 미리 총독의 형편을 따라(適) 출발할 양으로 정읍 경찰서에 의뢰하야 교주가 답례(返禮)를 할 터임에 총독 면회될 만한 기회를 물어 봐 달라 한 바 총독부의 회답이 어간의(御懇意)는 감사하오나 지금은 면회의 호기(好機)가 없다 함으로 후일 기회를 기다리고 있더니 불행히 교중에서 총독부 교섭원으로 출입하든 수 방주(水方主) 문 정삼(文正三)이 중병에 걸려(罹) 쾌차치 못함이 5, 6개월이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9월에 이르러 문 정삼이 겨우 행보함을 얻음으로 교주가 문 정삼(文正三) 원 약제(袁若濟) 양인을 경성에 보내여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히가시(東忠紀)에게 의뢰하야 교주로부터 총독에게 답례(返禮)할 의사인 즉 총독에게 면회방(面會方)의 소개(紹介)를 청구하였든 바 교섭의 결과에 총독은 일양일(一兩日) 중 동경으로 건너가심(東)으로 면회불능이라 전함에 부득이 총독부로 귀환하는 날을 기대하였더니 환부(還府) 후는 곧바로 군축회의 일본 전권대사가 되야 서양으로 행하고 군축회의의 임무를 완료한 후에난 사직 귀국함으로 심히 유감만천(遺憾萬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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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후천~ 토화작용의 평화낙원  안원전   2017/04/27  1355
1230    달마 혈맥론6  안원전   2017/04/26  1004
1229    달마 혈맥론5  안원전   2017/04/26  1205
1228    달마혈맥론4  안원전   2017/04/26  907
1227    달마 혈맥론3  안원전   2017/04/26  961
1226    달마 혈맥론2  안원전   2017/04/26  907
1225    달마 혈맥론1  안원전   2017/04/26  942
1224     <범증산계 통합경전> 사륙배판 1000 여 페이지 파일공개(무료다운 가능)  안원전   2016/10/28  1743
1223    (18개 경전포함 범 증산계 통합경전 <가칭 십경경전>) 내용: 1.  안원전   2017/02/28  1192
1222    궁팔십 달팔십~~태모님께서 선천운수는 궁팔십달팔십이요 지금운수는 동지한식백오제니라~  안원전   2017/04/24  957
1221    배가 따뜻해야 장수...  안원전   2017/04/18  1147
1220    명리학대가 제산 박재현  안원전   2017/04/18  1489
1219    궁팔십 달팔십~~  안원전   2017/04/18  973
1218    프랑스 막달라 마리아의 영지주의 종통제거 비밀과 임제록의 본질  안원전   2017/04/10  1374
1217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무구광 동자에게의 수기  안원전   2017/04/01  1449
1216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심백강  안원전   2017/03/23  1070
1215     (보천교의 독립운동)함석태와 강우규, 그리고 대동단-신채호 부인 박자혜는 보천교 '부인 선포사' 단원  안원전   2017/03/17  1635
1214    천지설위 로 드러난 역의비밀~정역~~  안원전   2017/03/15  1081
1213    중화경 정체와 이효진 번역 <중화경> 서문  안원전   2017/03/15  1109
1212    성경신~ 진심을 다하여야~~  안원전   2017/03/13  971
1211    ◎원평에서 의통제작 후 20년 대휴게기 선포와 이상호에 대한 성도들 반응  안원전   2017/03/05  1198
1210    ◎6.25 피난시 혼사시켜준 이정립 부부와 한강을 함께 넘은 젊은 總師首  안원전   2017/03/05  1165
1209    이정립이 왜곡한 <증산교사>의 조직은 허구, 젊은 總師首가 직접 조직한 실체  안원전   2017/03/05  1366
1208    교주제도가 아닌 목화토금수 방주제도로 운영한 8.15 해방이후 증산교 대법사  안원전   2017/03/05  1006
1207    숙구지 문왕 추수사명 초,중,말복 세살림 종통의 핵심잡기  안원전   2017/03/03  1413
1206    ◎이상호 정립형제 2변 운산 총사수님 조직 접수 및 청부 살해 기도 내막  안원전   2017/03/05  1096
1205    보천교 기관지 보광의 폐간은 이 성영 스스로 <증산교사>에서 차교주에 불만한 자신이 했다고 고백  안원전   2017/03/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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