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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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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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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8.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 해 동월 그믐(晦)경에 이 상호(李祥昊)가 내알하다. 지난 해 갑자(道紀 54, 1924) 8월에 이 상호가 혁신운동이 불성공함으로 지나(支那:중국)에 망명하였다 함은 위(上文)에 기술한  바어니와 그 내용 사실을 들은 즉 당국자 중에서 이 상호(李祥昊)와 친밀한 사람이 있어 이 상호를 권고해 가로대 군(君)이 조선 내에서난 피신할 곳이 없으니 만주 방면에 건너가 개척 사업에 종사하면 우리도 될 수 있는데 까지 원조하고 선도 하겠다 하고 김 응두(金應斗)를 수행케 하야 만주에 들어가라 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 상호(李祥昊)는 당국자의 지도 후원 아래에 상등(上等) 양복(洋服)을 착용(着用)하고 금은보석(金銀寶石)의 장신품(裝身品)을 갖추며(俱) 그 첩(妾)인 여학생도 극(極)히 사치적(奢侈的)으로 장식하야 동반(同伴)으로 만주에 들어가 이름(名字)을 바꾸어(改) 전라남도 이(李) 모(某)라 가칭하고 백만장자로서 만주 토지를 매수하려 왔다고 선전하였다. 그런대 금전이라 하면 친자식 사이(親子)도 모른 체 하는 만주 각 사회단체 등은 이 상호(李祥昊)의 내력을 철저히 탐사한 후에 그 사람(彼)은 보천교의 금전을 절취하야 왔으니 그 재물을 우리들이 나누어 먹음(分食)이 가하다 하야 주야로 협박 공갈하여 일방으로난 지나 관헌에게 불량분자로 고발하야 이 상호를 포박(捕縛) 수금(囚禁)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 상호(李祥昊)의 친동생(實弟)인 순탁(淳鐸:보천교 자금으로 교토대 상경대 유학하여 교토의 개신교에 다니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언더우드(연희전문 초대 의대 학장)와 함께 연희전문 창립(초대 상대 학장) 해방 후 기획처장 역임. 6.25때 월북 혹 피납)이 경성에서 그 형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경무 당국에 교섭하야 당국의 소개장을 얻어 만주 일본 영사에게 교섭하고 영사는 지나 관청에 교섭하야 이 상호(李祥昊)를 석방하니 이상호 형제(이상호, 이성영)는 만주를 벗어나 을축(道紀 55, 1925) 정월에 경성에 도착하야(이 성영은 입지가 없음을 알고 지나로 다시 건너가 1928년에 귀국) 자신이 앞서 걸은 길을 고려한 즉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보천교에서 고소한 것이 기소중지 중에 있으니 조선 내에서는 활동이 부자유하겠고 외국을 갈라 하니 신변이 위험한지라 몸 하나를 둘 곳이 없어 부득이 보천교에 용서를 얻어 기소문제를 해결한 후에 활로(活路)를 구하겠다는 야심으로 경성부(京城府) 마포에 사는 최순영(崔淳永)을 설득하야 간선방(幹旋方:주선통로)을 구하였다. 최순영(崔淳永)은 즉 교주 자부(며느리)의 실제 부친이니 이 상호가 그 관계를 안 까닭이라. 최 순영은 이를 승낙하고 이 상호의 개과(改過) 사죄장을 첨부하야 교주에게 용서하는 방향의 요구(容赦方要求) 서간(서찰)을 송달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난 이를 보고 생각하되 혁신 당시에 교주의 성토문을 전 조선(全鮮) 교도에게 발송하야 교도를 난동케 함은 실로 가증하나 금일에 이르러난 그가 의탁할 곳이 없어 전의 잘못을 회오(悔悟)하고 나에게 귀의하기를 청함은 흡사 우매한 자식이 일시에 부모를 배반하고 이역(異域)에 방탕하다가 굶주림과 추위(飢寒)가 몸을 범하면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야 개과귀순하난 것과 같이 생각하시고 이를 가련히 여기사 비밀히 당시 손방주(巽方主) 임 치삼(林致三)으로 하여금 이 순탁(李淳鐸)을 불러오고 밤에 임 치삼 집에 찾아가 순탁을 인견(引見:접견)하시니 순탁은 그 형이 지나(중국)에서 받은 곤란상황과 및 개과천선하야 교주선생의 양해를 구하난 일을 상세히 고하니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가로대 나난 너의 형을 아이(童蒙)와 같이 가히 사랑할 바탕으로 보아 용서하지마는 대중에게 얻은 죄를 나 한사람의 용서만으로난 효과가 없으리니 네 형이 와 일반 방주(方主) 앞에 용서를 구하라. 이 상호(李祥昊)난  순탁(淳鐸)의 회답(回報)을 듣고 정읍에 올새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야 경성 종로 경찰서 미와(三輪) 고등계 주임에게 의뢰하야 정읍 경찰서장에게 이 상호 신변 보호하라는 소개서를 미리 발송하고 김 응두(金應斗)와 동반하야 정읍역에 하차할 새 흔적(形跡)을 숨기기 위하야 모자로 안면을 덮고(覆) 소로로 사잇길로 가 진산리(辰山里)에 잠입하얐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시 정읍경찰서 고등계 형사 송  달목(宋達睦)이 정거장에서 이 상호가 하차함을 멀리서 바라보고 경찰서에 전화하니 서내(署內) 출동 순사가 보호하기 위하야 통로에 기다려 대비하든 바, 이 상호의 흔적(形跡)을 보지 못하고 송 달목은 다른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즉 상호의 종적이 묘연한지라. 정읍 각 여관에 탐사하여도 숙박처가 없으니 인력거를 급히 몰아 본소에 와 이 상호가 왔는지의 여부를 물으니 이 때 이상호가 온다는 약속을 교주 이외에는 아는 자가 없는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간부 등은 이를 알지 못하고 답해 가로대 만주에 망명한 이 상호가 이곳에 올 리가 없다 하니 달목(達睦)이 가로대 이 상호가 금일 하차하난 것을 보았노라 하고 진산리(辰山里)를 향하여 출발하다. 당일 밤에 채 규일(蔡奎壹) 김 정곤(金正坤) 외 수 인이 협의해 가로대 송 형사의 말을 들은 즉, 이 상호가 왔음이 분명하다. 만일 이 상호가 무난히 이곳에 들어오면 허용할 수 없으니 오늘 밤에 찾아 조사하자 하고, 한 무리는 진산리(辰山里)에 파송 탐문하고 한 무리는 삼산교(三山橋)에 기다려 대비하고 한 무리는 본리(本里)를 수색하야 공기가 심히 긴장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일 밤에 이 상호는 진산리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경찰서에 들어가다가 과교리(科橋里) 통과 중에 교도에게 잡혀 질문 혹 구타를 당하니 교주가 이 급보를 듣고 측근자(親近者)로 하여금 교도를 진정해 어루만지고 이 상호를 비밀리에 인솔하야 임 치삼(林致三) 가(家)에 머물러 묵게 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때 동반인 김 응두(金應斗)난 혼잡(雜踏) 중에 이 상호와 분리되야 정읍경찰서에 고발해 가로대 지금 이 상호가 보천교도에게 잡혀 그 종적을 알 수 없으나 혹 위난(危難)에 빠졌는지도 헤아리기 어려운지라. 경찰은 인민보호하난 의무가 있는대 미와(三輪) 경부(警部)의 부탁(囑託)도 무시하니 즉시 구하러 오지 아니하면 전주 경찰부에 가서 질문하겠다 하니 서장도 변명키 불능하야 김응두(金應斗)를 여관으로 호송하고 주효로써 우대하야 안심하라고 위로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난 그 후에 이 상호를 인견(引見:접견)하시니 상호의 행동은 전의 과오를 개선하고 보천교(普天敎)를 위하야 진력하겠다는 의사는 표현치 아니하고 그 요구의 제 1은 교중(敎中)에 용서를 얻어 기소를 해제하고 또는 경성 창신동과 가회동 양처 진정원(眞正院)을 타인에게 전당을 잡혔난대 기한이 멀지않음이라. 만일 기한을 지난 즉 그 사람이 고소를 제기할 터이니 금 8천 5백원을 지급해 주시면 이를 다시 찾아 활동상 편의를 꾀함이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제 2난 만주에서 교도 50 호를 이민시키면 외무성으로부터 금 10만원을 당겨 쓰겠다 하야 교도 이주시키기를 청구하는대 그 내용을 들은 즉 당국자와 결탁하고 만주개척하기 위하야 보천교도를 이민시킨다 하면 외무성으로부터 만몽(滿蒙) 개척비로 금 10만원의 보조를 받아 그 안에 얼마는 당국자에게 보수(報酬)하고 잔액은 교중(敎中)에 사용한다 이르며 제 3은 다시 보천교도로 선포하자면 권리와 신용이 없이 행치 못하겠으니 그러나 하급의 방주(方主), 선화사(宣化師)는 원하지 않고 전일 서방주(西方主)의 임직을 복임(復任)하여 줄 것이며 또는 정령(正領)의 중요한 임직(重任)을 요구하는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가로대 제 2의 만주 이민은 불가하다. 가령(假使) 외무성 보조금을 끌어 쓸 수 있을지라도 후일에 그 보답이 지극히 어려우므로 도저히 그 말을 듣고 좇을 수 없고 제 3은 고어(古語)에도 장공속죄(將功贖罪:공을 세워 죄를 면함)라 하였으니 죄를 범한 후 하등의 공이 없이 중임(重任)을 명(命)함은 불가능하니 먼저 임직이 없이 포교를 일심하야 공을 세우는 동시에 중임을 희망함도 무방하고 제 1 건(件)은 내가 이 지위에 처하야 그대 한사람을 용납치 못하겠느냐 하시고 이 건(件)만 허락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후에 이 상호난 용서를 얻어 기소문제를 해결한 후 일신의 자유를 얻어 포교할 의사는 없고 중요간부에 임명치 아니 한다는 감정뿐으로 경기도 경찰부 모(某)의 촉탁(부탁)으로 만주개척을 빙자하고 보천교 금전을 사기해 속이기(欺瞞)로 목적하다가 계획이 불성립함으로 인하야 탈퇴하고 예전(前日) 혁신운동 하던 때에 저당 잡힌 진정원도 환추해 되찾지 아니하고 우(右) 금액을 사기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후에는 전주군 우림면 동곡리 김 형렬(金 亨烈)에게 추종하야 미륵교(彌勒敎)를 조직하든 바 도로혀 보천교주의 방해적 언론을 유포하야 보천교도를 유인하다가 또 김 형렬을 배반(背叛)하고 김제군 수류면 용화동에서 당국의 허가를 얻어 동화교(東華敎)를 조직하고 교주라 칭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화교 창설의 동기를 탐문하면, 그 때 당국에서난 보천교 해산을 명하게 되면 보천교도 대중이 귀의할 곳이 없어 반란을 일으키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미결(未決)중인 바 경무국 촉탁(囑託) 김 환(金丸)이라 칭하난 자가 이를 탐지하고 이 상호, 임 경호, 이 성영과 공모하야 강증산 생존제자 박 공우(朴公又)로부터 교의 종통(敎統)을 이 상호에게 대를 잇게 시킨다는 제전(祭典)을 행하고 동화교(東華敎)라 명칭하야 당국과 협의상 보천교도를 받아들인다(受容)고 선전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전에 이 상호로 인하야 수행인 김 응두에게 정읍 경찰서장이 일시 핍박을 받고 더욱이 이 상호 보호 상 교도의 반동으로 인하여 미와(三輪) 경부(警部)의 부탁(信託)을 완벽에 이르게 수행치 못함으로 보천교를 증오하야 심히 거리를 두고 있던 중(懸隔中) 그 때에 외교(外交)난 채 규일(蔡奎壹)이 담임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을축(道紀 55, 1925) 정월 16일부터 보천교에서는 신건축 공사를 창설(刱設)하였는데 부지매립하기 위하야 산토운반할 토거궤도(土車軌道)를 부설코저 도로사용 허가원을 정읍서에 제출한 바, 국유도로를 횡으로 끊음(橫切)이 통행상 불편하다는 이유로 허가를 지연(延拖)하며, 기타 채석용 화약 사용 허가원과 토목공장 설치 허가원과 장대목(長大木) 운반도로 사용 허가원을 지연(延引)하야 수 백 명의 직공이 누(累) 십일 휴업하야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또 각 지방 관청에서는 포교사(布敎士)를 단속(取締)하야 본소에 납부하난 교도의 의성금을 압수하야 교도에게 반환하고, 또 해당 지방(當地) 관리는 군내(郡內) 재산가에서 보천교와의 대차관계를 일체 금지하야 원근을 물론하고 보천교에 대차(貸借)치 못하도록 연락을 취하야 보천교에서는 상당한 담보물로써 차금(借金)코저 하여도 감히 대부자가 없고 경성에 가서 차용할라 하여도 또한 관리의 연락 중지요구로 인하야 성사되지 아니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심리를 추측하건댄 전 조선(全鮮) 교도의 의성금 납입을 방지하며 차용의 방도(途)를 두절하야 보천교 건물을 풍우(風雨)에 새나가게(滲漏) 하야 부패 붕괴(倒壞)케 하자는 계획이였다. 동년 9월에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동 충기(東忠紀)가 정읍에 와서 실지상황을 조사한 후에 금천(金川) 서장은 전근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3월 15일에 새로 주조한 교종(敎鍾)이 준공되다. 무게가 1 만 8천근이요, 주위가 직경이 8척이오, 높이가 12척이라. 높은 누각에 달고 매일 맑은 첫 새벽, 정오, 저녁 후 3회로 매 회에는 72번씩 쳐 울리다. 동년 동월 21일에 미주(未主) 채 규철(蔡奎喆)이 사망하다. 동년 5월 18일에 임주(壬主) 강 기돈(姜琦暾)이 사망하다. 동년 6월 25일에 동주(東主) 유종상(柳鍾相)이 사망하다. 동월 경에 강원도 진정원은 큰물에 표류되다. 동월에 경칩주 겸 평남 진정원장 조 동우(趙東雨)가 사망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7월경에 해주(亥主) 임 경호(林敬鎬)가 배교하다. 경호난 본시 사회에 출몰하야 협잡의 수단으로 금전을 남용하다가 해외에서 용납할 곳이 없어 몸만 빠져 도망갔다 돌아와(脫身逃歸) 보천교문에 우연히 들어와 일시적으로 교주의 총애를 받고 다액의 금전을 횡령(橫取)하야 돈을 물같이 쓰다가 을축년도(道紀 55, 1925)부터 교세가 침체함을 보고 인하야 탈퇴하다. 동년 동월에 채 규상(蔡奎象)이 평남 진정원장에 피임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8월에 목주(木主) 김 홍규(金烘圭)가 총령원장에 피임되다. 동년 동월에 화주(火主) 채 규일(蔡奎壹)이 배교하다. 채 규일은 전남 무안군 비금면 사람이라. 갑인년(道紀 44, 1914)에 입교하야 병진년(道紀 46, 1916) 24방주 조직 시에 자방주(子方主)가 되었다가 기미년(道紀 49, 1919) 60방주 조직 시에 화방주(火方主)로 선임된 자이다. 교주는 수족과 같이 자애하시나, 본대 윗사람에게 대드는(犯上) 완악한 버릇(頑習)과 시기 질투해 싸우며 스스로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버릇(自勝之癖)과 색탐(貪淫)하는 허욕이 있어 동(同) 간부 간에도 항상 화목하지 못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께서난 오만 비행을 용서(容赦)하시고 여러 번(累) 훈회해 가르쳐 깨우치시되 계속(一向) 고치지(改悛) 아니하니 을축 8월에 이르러서난 교주도 부득이 채 규일다려 일러 가로대 나의 천박한 재덕(才德)으로난 군(君)을 도저히 교화시킬 수 없으니 군(君)도 금일로부터난 나와 사제(師弟)의 관계를 풀고 다른 덕망이 숭고한 사람에게 배우라 하시니 인하여 배교(背敎)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동월에 채 규상(蔡奎象)이 평양부에 있는 평남 진정원(眞正院) 대지 및 건물을 도적질해 팔아(盜賣) 소비하다. 최초에 교인의 공금으로 평남 진정원을 평양부내(府內)에 매수설립할 새 그 대지 및 건물증명을 금방주(金方主) 채 선묵(蔡善黙)의 단독명의로 이전하였더니 채선묵 사후에 교주께서 채선묵의 공로를 생각하사 그 아들 규상으로 평남 진정원장까지 겸임하였든 바, 규상은 이를 기회로 상속증명을 얻어 도적질해 팔아(盜賣) 돌아온지라 평안도에 있는 교인이 평양관청에 형사고소를 제기하니 평양관청에서 정읍으로 조회하야 규상을 구인(拘引)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께서 고(故)  금주(金主)의 정곡(情曲)을 생각하사 3년 상(喪) 안에 그 아들이 감옥(囹圄)에 들어감을 차마 보지 못하사 평안도 교인 중 대표자 수 인(數人)을 부르사 깨우침으로 권유해 소 취하로 화합케(權喩取和) 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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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    지인지감 김형렬  안원전   2017/05/17  1311
1234    삼제갈 팔한신 관우장비 조자룡 모두 나서~~  안원전   2017/05/07  1335
1233    유심결唯心訣 by 永明禪師  안원전   2017/05/07  1548
1232    한신팔월 병종길도 출인~~  안원전   2017/04/29  1349
1231    후천~ 토화작용의 평화낙원  안원전   2017/04/27  1339
1230    달마 혈맥론6  안원전   2017/04/26  995
1229    달마 혈맥론5  안원전   2017/04/26  1195
1228    달마혈맥론4  안원전   2017/04/26  903
1227    달마 혈맥론3  안원전   2017/04/26  950
1226    달마 혈맥론2  안원전   2017/04/26  896
1225    달마 혈맥론1  안원전   2017/04/26  934
1224     <범증산계 통합경전> 사륙배판 1000 여 페이지 파일공개(무료다운 가능)  안원전   2016/10/28  1735
1223    (18개 경전포함 범 증산계 통합경전 <가칭 십경경전>) 내용: 1.  안원전   2017/02/28  1178
1222    궁팔십 달팔십~~태모님께서 선천운수는 궁팔십달팔십이요 지금운수는 동지한식백오제니라~  안원전   2017/04/24  950
1221    배가 따뜻해야 장수...  안원전   2017/04/18  1140
1220    명리학대가 제산 박재현  안원전   2017/04/18  1475
1219    궁팔십 달팔십~~  안원전   2017/04/18  967
1218    프랑스 막달라 마리아의 영지주의 종통제거 비밀과 임제록의 본질  안원전   2017/04/10  1362
1217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무구광 동자에게의 수기  안원전   2017/04/01  1439
1216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심백강  안원전   2017/03/23  1056
1215     (보천교의 독립운동)함석태와 강우규, 그리고 대동단-신채호 부인 박자혜는 보천교 '부인 선포사' 단원  안원전   2017/03/17  1628
1214    천지설위 로 드러난 역의비밀~정역~~  안원전   2017/03/15  1072
1213    중화경 정체와 이효진 번역 <중화경> 서문  안원전   2017/03/15  1103
1212    성경신~ 진심을 다하여야~~  안원전   2017/03/13  961
1211    ◎원평에서 의통제작 후 20년 대휴게기 선포와 이상호에 대한 성도들 반응  안원전   2017/03/05  1186
1210    ◎6.25 피난시 혼사시켜준 이정립 부부와 한강을 함께 넘은 젊은 總師首  안원전   2017/03/05  1153
1209    이정립이 왜곡한 <증산교사>의 조직은 허구, 젊은 總師首가 직접 조직한 실체  안원전   2017/03/05  1359
1208    교주제도가 아닌 목화토금수 방주제도로 운영한 8.15 해방이후 증산교 대법사  안원전   2017/03/05  998
1207    숙구지 문왕 추수사명 초,중,말복 세살림 종통의 핵심잡기  안원전   2017/03/03  1405
1206    ◎이상호 정립형제 2변 운산 총사수님 조직 접수 및 청부 살해 기도 내막  안원전   2017/03/05  1086
1205    보천교 기관지 보광의 폐간은 이 성영 스스로 <증산교사>에서 차교주에 불만한 자신이 했다고 고백  안원전   2017/03/0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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