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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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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7.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정교부(釜山正敎部) 사변기(事變記)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갑자년(道紀 54, 1924) 음력 12월 분(分)에 부산부(釜山府) 국제관(國際舘)에서 시국대동단 취지를 강연할 시에 강연을 듣던 청년 수 백 명이 폭동하야 강사에게 대하여 모욕의 말을 발설하고 거리상에서 교기(敎旗)까지 찢었다. 이듬해 을축(道紀 55, 1925) 정월 중에 부산 청년 등은 경남 각 군의 청년단과 연합 결속해 회집(會集)하야 정교부(正敎部)를 박멸한다는 공기(空氣)가 긴장함으로 교부원(敎部員)이 부산경찰서장과 및 경부(警部) 유 진후(劉鎭厚)를 면회하고 청년단의 태도를 상세히 고발 한 바 관청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발생 아니 되도록 진압할 것이니 안심하라 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2월 초에 각지 청년이 부산에 운집하야 시민대회를 개최하고 정교부 박멸을 선언 결의함으로 보천교도(普天敎徒)도 교부(敎部)를 보호하기 위하야 수백 명이 뒤덮어 지켰더니, 7일 새벽(早期)에 청년 수 명이 자동차를 타고 교부(敎部) 앞을 통과하는데 자동차 후면에 금일 전쟁이라 크게 쓴 광고지를 붙이고 부내(部內)를 우회함으로, 이를 본 교부원(敎部員)은 경찰서에 가서 서장(署長) 및 경부(警部)에게 이(右) 사실을 보고하니 답해 이르기를 관청으로부터 해산 명령을 발(發)하였는 즉 박멸행동은 절대 불가능할 터이니 보천교(普天敎)에서는 안심하고 집합한 교도를 속히 해산하라 함으로, 교도는 관청을 믿고 따라 일제히 해산하고 교부(敎部) 사무 상 관계인 40여명 만 머물러 있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러나 집합한 청년은 전과 다름없이(依然) 해산치 아니함으로 위험을 염려하야 4, 5 회 경찰서에 부탁(囑託)하야도 안심하라는 말 뿐이러니, 오후 2시경에 청년 및 시민 수 만 명이 풍우(風雨)와 같이 쇄도하야 교부(敎部)를 포위하니, 이때의 날씨(天氣)는 혹독하게 추운데(嚴寒) 흰 무지개(白虹)가 태양을 꿰고 살기가 하늘에 가득이라. 일이 진행되는 형세(事勢)가 시시각각 위험함으로 경찰서에 전화하여도 한결같이(一向) 안심하라는 말 뿐이오, 초량진(草梁鎭) 파출소 경관 2 명이 현장에 와서도 말없이 순찰 중, 돌연 『야래』라는 한 마디 소리를 크게 대창(大唱)하더니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청년 및 군중이 일제히 정교부(正敎部)에 침입하야 곤봉 및 작은 돌(石礫)로써 교인을 난타하고 교기(敎旗)를 찢고 교부(敎部) 가옥 및 실내 물품 담장 벽(墻壁) 전부를 파괴하여도 경관은 한 명도 출동치 아니함으로 외부에 거주한 교도가 헌병대에 전화하야 구호를 청한 바 기마헌병이 현장에 달려온(馳來) 후 경찰서 형사 사카이(坂井)가 와서 단독으로 해산 진압(鎭撫)키 불가능함으로 경찰서에 응원 파견을 청구하니 동(同) 6시경에 이르러 겨우 경관 10 여 인이 와서 진압 해산케 하였다. 이 폭력적인 습격으로 임하야 부내(部內)에 거주하는 교도 40여 명은 중상을 입어 부내(部內)에는 유혈이 낭자(滿地)하고 빈사상태에 빠지므로 철도병원에 응급수당(手當)을 베푼(施) 후 수 주간 입원치료하야 다행이 전부 소생하였다.

제주도 성토(聲討) 전말기(顚末記)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제주도는 관청 단독제도가 있음으로 육지 행정법과는 큰 차이가 있다. 보천교(普天敎) 포교난 비밀리에 선전한 지 10여 년 간에 실로 수 만인에 달하였으나 관청 취조(取調)가 극히 엄중하야 독실히 믿는 자(篤信者)와 포교에 열심하난 교도는 일일이 체포하야 구류, 벌금, 늑삭(勒削:두발 자르기), 고문 등이 매 건마다 거론함이 불가요, 교도의 육지 출입을 엄금 방지(防止)하야 승선장(乘船場)에서 남녀를 물론하고 강제적으로 의복을 전부 벗게(渾脫) 하야 나체로 여러 사람 앞에서 검사하야 치욕을 당케하니(신 정심(愼正心), 백 운정(白雲貞) 양 여자가 산지포(山地浦)에서 당함), 이럼으로 교도가 비밀리에서는 신념이 열심하나 노골적으로는 발표키 불능하든 바,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임술년(道紀 52, 1922)에 이르러서는 당국의 양해를 얻어 경성에 진정원(眞正院)을 설립한 후 당국에서 각지 교도 체포령 취소를 명함으로부터 제주도 교인도 양해 통지문을 보고, 교도 및 포교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야 본 도성(道城) 내에 진정원을 건설하고 모슬포(摹瑟浦)에 정교부(正敎部)를 설립하야 교무(敎務)를 진행하나 관청 취조는 불변하더니, 갑자년(道紀54, 1924) 12월에 시국 대동단 취지를 전선(全鮮) 각지에 강연한 결과 사회 인심과난 점차 반목되야 보천교 성토설이 섬 전체(全島)에 전하더니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듬해 을축년(道紀 55, 1925) 3월에 모슬포에 거주하난 우 영하(宇永夏)라는 자난 원당지(元當地) 주재소 형사(刑事) 순사(巡査)로 근무하다가 현시(現時)는 본 면사무소 회계원으로 청년회장을 겸해 근무하고 있는대 보천교(普天敎) 성토회를 조직하야 모슬포 시장에서 연극을 개최할 새 각 리(各里)에 청년단을 집합하고 보천교 치성식을 모방하야 별도로 제단을 설치하야 우상(偶像)을 만들어 단상에 안치하고 보천교주라 칭호하며 또 한 우상을 만들어 신도 허 경횐(許景煥)이라 칭하야 사제(師弟)의 구분을 만들어 놓고 청년 1인으로 통역한다 하야 담화를 꾸미되(假飾) 교주의 말이라 이르는대 너 경환이 나의 말을 신용하야 성력(誠力)을 다하라. 허 경환이 물어 가로대 성력(誠力)이라 함은 무엇입니까.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가로대 다만(다못) 금전만 다액으로 납입하면 수령 방백의 관직을 임명하겠다. 허는 신문지를 여러 겹으로 접어 절단(疊折切斷) 하야 지폐모양으로 헌납하면 교주난 수취하난 모습(樣子)을 지은 후 청년 수십 명은 경관이라 칭하고 교주를 체포하기 위하야 수색하난 모양을 하면 1인은 문 정삼(文正三)이라 자칭하고 교주에게 보고하난 모양으로 지금 관청에서 수색이 급하니 금전이 아니면 해결키 불능하다 이르면 교주난 지폐를 문 정삼에게 교부하고 비밀히 도망가는 모양을 가장하고 허 경환은 파산하고 걸인이 되야 집집마다 걸식하는 모양과 교주는 경관에게 체포되야 도적의 죄명으로 빈 총(空銃)을 난사(亂發)한 후 장검으로 목을 자르는 연기(形像)를 행하야 각리(各里)에 순회하니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此) 연극을 본 정교부원(正敎部員)은 분한 마음이 생겨(發) 본남(本南) 순사 주재소에 이상의 모욕사실을 명예훼손이라 고발한 즉 경관이 답하되 청년은 자유활동이라 보천교와는 하등 관계가 없거든 교도난 교를 믿기나 할 뿐이라 하고 청년들에 대하야는 한마디의 훈계도 없으니 청년은 관리의 태도 냉정함을 기회로 하야 정교부(正敎部)의 간판을 탈취하야 바다 가운데 던지고 교도에 대하야 모욕함이 무수하니 몇 사람의 교도가 분노함을 참지 못하야 말(言論)로 대항한 바 무례한 청년배 수 천 명이 교도를 포위 구타하야도 현장에 있는 경관은 방관적 행동 뿐이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수십 명 교도는 중상을 입어 온몸에 유혈낭자하여 빈사상태에 빠짐으로 부득이 상해진단서를 첨부하야 관청에 고소를 제기하였더니 하등의 처분이 없이 방치하였다. 또 내수방주(內水方主) 차윤숙(車輪淑)이 제주도에 들어왔더니 수 백 명 청년이 몰려와 교주의 친매(親妹)이므로 모욕하는 말은 말로 기록하기 불능이오. 즉시 이곳을 떠나지 아니하면 타살하겠다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협박하여도 경관은 청년을 금지 해산치 아니하고 도로혀 차윤숙을 권하되 이같은 위험한 장소는 우리도 금지키 불능하니 조속히 돌아감이 가하다 일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대동단(大同團)의 본주의(本主義)는 대 동양을 일가족과 같이 동일한 인종 간에 전쟁참살을 피하고 서양세력의 침해(侵害)을 방지하야 평화시대를 건설하자는 목적으로 다액의 금전을 소비하고 정신상 수고로운 일(苦勞)을 인내하면서 먼저(先次) 조선 일본에 취지를 선전하고 정부와 협력하야 대대적으로 장래 사업을 경영한 것인대 오호라 강사(講師)가 그 사람이 아니므로 주의 선전을 그릇 속이고 의견일치에 흠결되야 마침내 관민 간에 동정도 얻지 못하고 고립무원하게 된 보천교난 일반의 어육(魚肉)이 되고 말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같이 언사상반(言事相反)한 당국자의 심리를 의아(疑訝)하는 즈음에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의 수족인 채 기두(蔡基斗) 및 고 희준(高羲駿)이 와 동경 체재중인 총감(總監)의 말을 전하되, 지금은 여하한 곤욕을 받을지라도 수개월간 만 참고 지내면 국회 종료 후 즉시에 귀임하야 만사를 해결하겠고, 또한 압수금에 대하야난 국고로 편입한지 시일이 이미 오래되야 지불키 불능하니 장차에 그보담 이상의 가치를 가진 조선 내에 대 삼림을 불하하야 경비에 충당해 쓰도록 하리라 하더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는 전차(前次)에 교주께서 채(蔡), 고(高) 2 인에게 말씀하사대 당초에 정부에서 우리 교금을 압수하야 국고로 편입할 때에는 우리교의 양해(諒解) 전이라 바르지 못한 금액으로 취급한다 하였지마는 지금은 정부에서 우리 교(敎)를 이미 양해하는 동시에는 교금(敎金)으로 판명된 것이니 교중으로 지급해 주는 것(出給)이 경위에 적당할지라.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에게 언급하야 해당 금액을 반환하라 하였더니 그 답이 이와 같음일러라. 귀임(歸任) 후 4월경에  채(蔡), 고(高) 양 인이 와서 말하되 총감으로부터 교주선생의 면회를 청한다 하거날 교주 가로대 서로 면회하는 것이 급무가 아니라 정치가와 종교가가 명분은 다를지라도 인민을 교화하는 성의(誠意)는 같은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대동단 강연 후로 현금 전 조선(全鮮) 민심이 비등하야 발전상 큰 장애가 있으니 이를 해결할 방책이 제일 급한 일(最急務)이니라. 채 기두(蔡基斗) 가로대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이 동경으로 건너가는 중에 가토(加藤) 수상이 물어 가로대 조선 보천교(普天敎)를 악수하였다 하면 보천교주를 면회한 일이 있는냐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이 답해 이르되 아직 면회치 못하였습니다. 수상 가로대 그러면 교주도 면회치 못하였는대 무엇을 보고 어떠한 의견으로 보천교에 악수를 하였느냐 하고 비상(非常)한 면전 질책(面責)을 받은 고로 교주를 면회한 후라야 제반사항을 협의하며 장래방침을 수립하겠다 하더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가로대 시기가 오히려 이르니(尙早) 가을(秋期)에 면회하기로 연기를 하라 하니 채(蔡), 고(高) 양 인이 부득이 상경하였다가 수 일 후에 다시금 와서 가로대 총감이 말하되 교주가 공적인 자리(公席)로 면회를 불원할진댄 사적인 자리(私席)로 중간에 회견장소를 정하고 일야 간(一夜間) 비밀히 회견하야 협의하는 것이 어떠하뇨. 대동단 선전 이래로 보천교(普天敎)에서는 적지 않은 돈(敎財)를 투자하야 동양을 대표적으로 선전함은 나도 지극히 환희하고 정부에서도 조선민족 중으로 보천교(普天敎)가 자발적으로 동양평화를 주창하니 어데까지 찬성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강원도 지방에 수십만 평의 대 삼림을 무상으로 팔아넘길(拂下) 방침을 정하얐다 하기로 실지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야 시찰한 결과 시가 60만 원 쯤 되겠는대 이를 매도하자면 조선인은 매수불능일 듯 하기로 일본 수위(首位) 부호가 이와사키(岩崎)에게 불하 즉시 매도하야 반액인 30만원은 기밀비(機密費)로 사용하고 30 만원은 대동단 사무소 경비에 충당할 양으로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과 단단(團團)한 약속을 정하였으니 무엇보담도 이 사건이 선결 급무(急務)인 고로 면회를 청함이오. 교주선생과 한 번(一度) 회견한 다음에 교주 명의(名義)로 청구가 있으면 이 사건은 서로 어긋남(相違)이 없이 성취되겠다 운운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에 경무국으로부터 여행권을 정읍 경찰서로 송부하야 본소에 전달되였다. 교주께서난 최 기두(崔基斗)의 말이 사리에 합당하지 않으나 또한 중간에 전하는 말로써 진위를 판명키 불능하니 총감과 직접 면담하면 판명하겠다 생각하고 회견을 승낙하야 회견장소난 영등포역으로 정하였든 바 총감이 사정에 의하야 경성부(京城府) 마포(麻浦)로 장소를 변경하고 약속일에 출발하야 마포에 도착하니 총감이 전해 알리되 근일 마포 부근은 독립단 잠복의 흔적(形跡)이 있고 또한 신문기자와 및 불량배가 다수 출몰하니 위험하야 왕래가 부자유하고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총감 관저가 도로혀(오히려) 한적하고 조용(閒靜)하여 외인이 출입이 없으니 심히 불안 천만이오나 관저에서 회견하면 좋겠고 또 총감 관저에 도착하기 전에 경무국장 관사(官舍)에서 잠시 휴게(休憩)하기로 약정하였다 함으로 교주난 이를 허락하고 오후 9 시 경에 총독부 앞에 도착하니 사절(使節)이 국장 관사로 안내함에 채 기두(蔡基斗), 고 희준(高羲駿) 등이 현관에 나와 영접해 들여(迎入) 미쓰야(三矢) 경무국장, 다나카(田中) 고등과장, 다나카(田中) 통역관 등과 처음 대면인사를 마친 후에 미쓰야(三矢) 국장이 말하되 각지 보천교도의 불온선전과 및 유언비어가 많아 황실에 저촉되는 말(言論)과 행동이 있을 시는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터이니 금후로는 특별주의하야 이 같은 언동이 없도록 교도에게 명령하라는 엄중한 경고적 언론을 하여도 교주는 사실무근이기 때문에 변명할 필요도 없어 한 마디의 답변이 없이 태연히 청취할 뿐이러니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국장이 말머리(語句)를 전환하야 가로대 시국대동단에 대하야 한 번은 실패에 돌아갔으나 그것을 폐지하기는 불능이고 계속하야 조직 아니할 수 없으니 조직을 하자면 자금의 필요가 있는 즉 차교주가 자금을 얼마나 제공하겠느냐고 압박하거늘 교주 가로대 지금 보천교에서는 교회당 건축공사를 진행중임으로 금전의 여유가 없다 하니 국장 가로대 금전이 없다 함은 빈 말(虛言)이고 보천교에서 대금적립이 있음을 내가 아노니 어느 선까지 제공하겠느냐 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가로대 금전만 있으면 대동단은 성립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였다. 국장 가로대 금전만 있으면 대동단 뿐 아니라 어느 일(何事)이든지 경영대로 될 수 있다. 교주 가로대 나는 어느 일을 물론하고 그 사람이 있어야 성공할 줄로 생각하노니 사람이 없으면 금전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이라 하니 국장 가로대 현금(現今) 세계난 황금만능 시대이니 대동단 조직 비용을 제공하라. 교주 가로대 대동단은 나의 대동단이요, 정부에서 창립(刱立)한 대동단이 아닌즉 나에 관한 사업을 계속하든지 중지하든지 권한이 나에게 있거날 국장이 여하한 의사로 이와같이 무례하게 권유하는가.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국장은 체면불구(不顧體面)하고 금전제공만 협박해 가로대 교중(敎中)에 거액 소유를 아난대 금전이 없다함은 빈말(虛言)이로다. 교주 가로대 군자는 사람을 대하야 빈말(虛言)을 토(吐)치 아니한다 이르니 이같이 수시간 권유하다가 국장도 자기 주장이 성립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옆에 있는 채 기두(蔡基斗)와 고 희준(高羲駿)을 지목해 가로대 대동단을 만일 중지하면 이 두 사람의 생활이 궁핍한 지경(窮境)에 빠져 곤란하겠다 이르니 채, 고 2 인이 이를 부끄러워 하야(耻止) 안면을 다른곳으로 돌리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국장에 대해 가로대 금번(今般) 면회 후에난 한 자리 회담이 가히 쉽지 않으니 서로 심복인 한 명을 오늘 밤 안에 회석상(會席上)에서 지정하야 후일 대리(代理)로 신용하되 나난 조선인으로 국장은 일본인으로 지정하야 이 자리에서 서로 인지함이 어떠하오. 중간에 수많은 사람이 여하한 말을 대리(代理)라고 전하더라도 이 지정인이 아니면 진실한 일이 아닌 것으로 약속을 정하자 하니 국장도 찬성하고 어느 사람을 지정하느냐 하기로 교주난 옆에 모시고 있는(侍側) 문 정삼(文正三)으로 정하고 국장은 다나카(田中) 고등과장으로 지정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국장이 물어 가로대 몇 시경에 귀환할 예정이냐. 답해 가로대 내일(明日) 동틀무렵(拂曉)에 출발이리라 하니 국장이 위로해 머물게 하며(慰留) 가로대 내일은 내가 사관(舍舘)에 가 노고(苦勞)를 사례할 터이니 수일간 머물러(逗留) 친절하게 담화도 하며 또 나는 교주에게 대하야 협의할 일이 하나 둘에 그치지 않는다 이르거날 교주 답해 가로대 내일 이른 아침에 출발할 예정인 바 변경키 불능하오니 만일 협의할 사건이 있으면 밤을 넘기더라도 듣기를 싫어하지 않겠다(不厭) 할 즈음 심야(深更) 12시에 달하였난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총감이 자동차로 영접인(迎人)을 보내옴으로 담화를 중지하고 관저에 다다라(赴) 총감과 인사후에 어떠한 글말 입말(言語)도 없이 묵좌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총감 가로대 무슨 일이든지 청구할 일이 있거든 사양치 말고 청구하라 하니 교주 가로대 일호(一毫)도 청구할 일이 없다 이른대 좌우인이 모두 가로대 밤이 깊으니 총감도 취침하여야 되겠다 하고 일제히 기립 퇴출하야 숙소에 왔다가 이튿날 아침에 출발귀환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돌아가는 도중에 차 안에서 신문기자 조 준호(趙俊鎬)란 자가 질문하여 가로대 경성에 즉위식 거행하기 위하야 왔드냐고 조소하고 무례한 폭언을 다하니 좌우 모시는 사람(侍側人)이 그 무례함을 질책하고 서로간 투쟁의 기분(氣分)이 팽창하거날 교주께서 이를 조정하기 위하야 조 준호(趙俊鎬)를 기차내 식당에 인도하야 부드럽게 품고 너그럽게 대접(懷柔寬待)하야 유감이 없도록 보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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