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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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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6.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동월에 시모오카 츄지(下岡忠治) 조선 정무총감(政務總監: 4대 1924.7.4~1925.11.22)으로 새로 임명되다. 동년 19일에 보천교 취지를 설명하기 위하야 문 정삼(文正三) 임 경호(林敬鎬) 양인에게 여비 금(金) 일천오백 원을 출급(出給)하사 일본에 파견하였더니 수일 후에 임 경호가 홀로 돌아왔거늘 간부 등이 그 이유를 물으니 경호 가로대 우리 2 인이 동경에 신임 조선 정무총감의 수족인 채 기두(蔡基斗)와 공히 시모오카(下岡) 총감을 면회하고 보천교의 취지와 방문한 주요 의미를 말하니 시모오카(下岡) 총감 가로대 그러면 우리 선생님을 방문하여야 될 일이라 하기에 그 선생의 성명을 물으니 곧 당시 내각총리대신으로 있는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이러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총감과 공히 수상관저에 들어가 수상을 면회하고 보천교의 취지와 주의(主義)를 진술하니 수상도 크게 웃어 가로대 조선과 일본의 사이에 대해(大海)가 사이를 떼어 옛날 선박으로는 교통이 편리하지 못한 고로 제반 문화 교육상 부동(不同)의 유감이 많으니 만일 금일과 같은 기선이 상고(上古)부터 있었으면 조선과 일본은 고래(古來)부터 단합 융화하얐을 것이라 하고 출발시기를 물어보거늘 일 이일 후에 출발할 예정이라고 답하니 가토(加藤) 수상이 크게 놀라 천장절(天長節:왜왕 생일) 축일이 수일사이에 놓여있는데 축하도 아니하고 돌아가려함은 어떤 연고인가.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축하를 마친 후에 돌아가는 것이 가하다 하기로 부득이 응락하고 물러나와 정무총감의 비서관 소하(小何)를 면회하고 일반축하의 예절을 물으니 소하(小何) 가로대 헌상품을 봉정(奉呈)하는 양식이 있다 하기로 헌상품의 정도를 물은 즉 가로대 많고 적음(多寡)의 정액(定額)은 없으나 최소한도로 3 천원 가치의 물품은 준비하여야 된다 하기로 임시 축하 헌상품을 진열한 상점을 가서 관람한 즉 헌상품은 호피(虎皮)로 포장하고 정찰(正札)을 붙였난대 최저품이 3천원이라 기록하였더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사유(思惟)하야 본즉 아마도 그 물품을 정부에 봉헌하면 정부에서는 그 물품을 상점에 반환하고 대금을 징수하는 모양인 듯하다 하고 헌상품 대금 3천원과 및 기타 교제비 천원을 청구 하거날 이러한 취지로서 교주께 고하니 교주께서 임 경호(林敬鎬)를 부르사 사실을 상세히 물어보신 후 가르침을 내려 가로대, 군(君) 등이 금번(今般) 일본에 여행함은 우리 교(敎)의 취지 선전이 목적이요, 천장절 축하장에 참열(參列)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지라. 이미 목적인을 면회하야 취지를 설명하였으면 가위 목적을 도달하였는지라, 다른 요구가 없난 바에 귀환함이 가하고, 또한 축하식장에 종교가인(宗敎家人)이 참열하난지 못하난지 알 수 없고, 여비도 부족한대 문 정삼(文正三)과 같이 오지 아니하고 네가 홀로 귀국해 금전을 청구하느냐.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문 정삼(文正三)에게 전보하야 속히 돌아오도록 하라 명하시니 경호 가로대 축하식장을 배견(拜見)한 즉 관료 석과 종교가인 석의 구분이 있는데 금전부족으로 참열불능이라고 할라 한즉 조선에서 6백만 대중을 품은 종교로서 금전 없다고는 할 수 없어서 이미 총감 및 비서관에게 승낙하고 상점주와 예약을 체결한 바 문 정삼(文正三)은 일본에 체재(滯在)하고 소자(小子)는 다른 볼 일이 있는 것 같이 비밀히 돌아왔사오니 일이 돌아감(事勢)이 이와 같아 중지 불능이오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가로대 사람으로서 신용이없으면 세상에 서기 어렵거든 하물며 외국인에게 믿음을 잃으면 되겠느냐. 그러면 총정원(總正院)에 가서 협의하라 명하시다. 그런데 천장절 축일은 3일 사이로 임박해 있고  본소 금고안에는 현금 1천 9백원 밖에 없는지라. 김 정곤(金正坤), 김 홍규(金烘圭) 2인이 경북 김천군(金泉郡) 정교부(正敎部)에 출장하야 부장 이 병철(李炳喆)과 상담한 결과에 병철이 금(金) 2천원을 차입하야 임 경호를 교부금 발송(交付發送)하니 전후 합계금액이 5천 4백원이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후에 문 정삼(文正三) 임 경호(林敬鎬) 2인은 시모오카(下岡) 총감과 공히 경성에 도착하야 10여일 만에 본소에 왔다가 다시 상경하야 수일 후에 귀환하야 시모오카(下岡) 총감의 말을 전하되, 내가 보천교를 원조코저 하되 기원(紀元)이 천근(淺近)하고 아직 확실한 종교가 되지 못한 이상에 특별한 원조를 할 수 없으니, 귀교(貴敎)내에서 별도의 기관을 설립하면 극력으로 원조하겠고 따라서 보천교가 세계적 종교도 될 수 있으니 시국광구단(時局匡救團)을 설립 조직하라 하고 소하(小何) 비서관은 가로대 조선인은 대부분 매사가 유시무종(有始無終)함으로 확신할 수 없으니 광구단(匡救團)을 조직할라면 제반 설비와 및 강연비로 삼만원 금(金)을 은행에 적립하라고 이르더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가로대 광구단(匡救團)이라 자칭함은 우리 동양 도덕상으로 보면 너무 무례하지 아니한가. 현금(現今) 대세가 대동(大同)이 아니면 평화할 수 없고 더구나 서양의 세력이 점차 동양을 침노(侵)하니 이때를 당하야 동양 황인종은 상호간 대동단결로서 세력을 공고하지 아니하면 백인종의 화를 면키 어렵다. 나는 이전부터 이와 같은 대세를 추측한 고로 임술년(道紀 52, 1922) 정월도(正月度)에 12계명을 교시(敎示)하는 중에 친목동인(親睦同人) 한 구(句)가 즉 이 뜻이오. 동인(同人)은 즉 대동양동민족(大東洋同民族)을 지칭함이니 그러면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 칭하라 하시고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대동단 조직의 책임을 문 정삼(文正三) 임 경호(林敬鎬) 2인에게 위탁하사 교시(敎示)를 내려 가로대 조선 13도에 강연사(講演師)를 선정하는 방법은 매 도에 3인씩 합 39 인을 정하되 3인중에 1인은 우리 교(敎) 중 방주(方主)로부터 정하고 2안은 교외인(敎外人)으로 품행(操行)이 방정하고 신구 지식이 여유가 있고 언어에 익숙(嫺熟)한 사람을 선정하야 경성 가회동 진정원에서 입교식을 거행하고 신도가 된 후에 대동단의 주의(主義)와 우리 교(敎)의 진리를 학습하였다가 강연할 시는 준비위원이 먼저 출발하야 설비를 완료한 후에 교인중 강사가 연단에 먼저 올라 교리를 설명한 후에 외인강사는 대동단의 취지를 설명할지며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대동단 조직 후에 발회식(發會式)을 거행하난 날에난 조선, 일본, 지나 및 인도, 몽고 등에 있는 각 신문기자를 매사(每社)에 2인씩 또는 사회단체 수뇌자 외 총독부 이하 고등관 전부를 초대할지면 발회식(發會式) 거행시에난 교중간부도 다수 참석하여야 할 터이니 발회식(發會式) 거행일을 미리(豫) 본소에 보고할지며 또난 대동단 취지서를 내가 검열한 후에라야 인쇄할 터이니 원고를 작성하거든 곧 본소에 부송(付送)할지어다 명하시고 발회식(發會式) 준비비, 취지서 인쇄비, 신문기자 및 관리 초대비, 연회비(演會費), 강연 여비 등을 정산(精算)하야 금 3만원을 출급(出給)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 때에 이 달호(李達濠)가 경성 진정원장으로 재임 중인 바 문 정삼(文正三) 임 경호(林敬鎬)가 일본으로부터 경성에 온 후로는 임 경호(林敬鎬)의 사저(私邸)인 경성부 냉동(冷洞)에 잠복하고 진정원에난 내왕이 없으므로 의심이 생겨 두 사람의 동경서 한 행동과 및 비용내용을 탐사하니, 정삼(正三)은 이로 인해 병이 생겨 10여 일 간 신음하다가 본소에 돌아가고, 경호(敬鎬)는 채 기두(蔡基斗)와 공모하야 보천교의 흥망은 돌아보지 않고 금전만 편취할 뿐이며, 또난 보천교 대중을 배경하고 당국의 친밀과 신용을 얻기 위하야 교묘한 수단으로써 이 달호(李達濠)를 뇌회(賂賄) 매수하야, 3인이 한 몸이 되야 중앙명령도 돌아보지 않고, 발회식(發會式) 일자도 통지하지 아니하며, 취지서도 검열을 받지 않고 인쇄하며, 강사(講師) 등도 교(敎) 간부 중에는 한 사람도 채용치 않고 저의 단원 중으로 임의 선정하며, 각지 강연 일정(講演日割)도 보고치 않고, 본소 명의를 도용하야 각지에 통지를 발(發)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 같은 행동을 본소에서는 전연 알지 못하고 경성으로부터 여하한 보고가 있을까를 나날이 고대하든 바 경북지방에 신도를 둔 간부 등이 포교차로 대구 진정원에 도착한 즉 교도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지라. 집회에 모인(集合) 이유를 물은 즉 내일(明日)은 시국대동단 강사가 대구에서 강연하는 일정(日割)인 고로 각지 교도가 강연을 듣기 위하야 모였다 함으로, 본소에서 출발한 간부 등은 불가사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즈음에, 타지방으로부터 강연을 들은 교도가 자동차를 대절하여 진정원에 와서 간부에게 질문하여 가로대 금번(今般) 강연에 대동단 주의난 터럭도 없고 십일단체 연맹(十一團體聯盟)의 강연을 함은 무슨 연고냐.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간부 답해 가로대 간부 등이 십일연맹의 강연을 할진댄 그 해당 강연장에서 어찌 내쫓지(放逐) 못하였느냐 하니 교도 등이 분개한 공기가 긴장하야 강사 등이 대구역에 하차할 즈음에 구타(毆打)의 장면을 연출하니 강사 등은 경관이 보호하야 일본인이 경영하는 다나카(田中) 여관에 들어감으로 교도 등은 여관을 포위하고 강사를 호출하니 강사 등이 전율하야 여관주로 하여금 진정원에 통지하되 교도의 공기가 험악하야 임의로 출입하기 불능하니 우리도 금후로난 전일(前日)과 같은 말(言論)을 하지 않고 대동단의 본주의(本主義)로 선전할 터이니 교도를 위로해 어루만져(慰撫) 진정원 왕래의 편의를 주어달라고 요구함으로 당시 경북 진정원장 민 영성(閔泳晟)이 강사를 불러들여 기만(欺瞞)의 죄를 꾸짖고 다음날 강연을 순조롭게 거행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12월 말에 각지에 순회 강연한 강사 등과 및 임 경호, 이 달호가 본소에 회합하니 교주께서 임 경호를 불러들여 전일(前日) 기만한 죄를 질책하신대 경호 가로대 그때에 소하(小河:정무총감 비서관)가 말하되 이제(現今) 제국의회(帝國議會)의 임기마감이 닥쳤으니 귀교(貴敎)에서 대동단 강연을 속히 거행하면 금번 국회에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이 조선 총독으로 오를(陞任) 징조가 있다. 어찌된 연고냐 하면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이 부임한지 수개월에 600만 대중을 껴안은 보천교(普天敎)와 악수하야 조선 민심을 안정하겠다는 까닭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총감이 총독만 되면 보천교도 장래 유리하리라 하기에 생각(思惟)하건댄 교리(敎理) 강의하기를 결정한 바에 일정(日割)을 속히 정하야 강연하난 것이 피차에 유리하겠기로 발회식(發會式) 일자와 및 강연일정(日割)도 보고치 못하고 대동단 취지서 원고의 검열도 받을 여가가 없어 그리되였습니다 하고 전일에 대동단 설립 및 강연비로 내준(拂渡) 금 3만원 지출한 결산서를 보고하기로 그 내역을 검열하니 모호한 점이 많으나 이미 소비한 것을 어찌할 수 없으므로 방치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포교 17년 을축(道紀55, 1925) 이라 정월 14일에 교주께서 간부 3인과 대동단원 9인으로 보천교 교리 및 대동단 취지를 선전하기 위하야 일본에 파송할 새 여비로 5천원은 임 경호(林敬鎬)에게 기타 비상 예비비로 금 2만원은 김 홍규(金烘圭)에게 각히 보관하라 하시고 교주께서 친히 모든 이(諸人)에게 훈시하시되 제군의 금번(今般) 여행은 우리 교에 대하야 중대한 책임을 짊어졌으니 제군은 마땅히 신중한 태도와 공명정대한 언동으로 외국인에게 수치를 사지 말며 또는 소리(小利)를 보고 대의(大義)를 잊지 말며 재정(財政)의 권리를 상호 침해치 말며 쓸데없는 물품을 함부로 사지말며 만일에 서로 합의치 못한 일이 있드라도 서로 양보하고 참아 화평의 뜻(旨)으로 용무를 완전히 보고 속히 돌아오라 명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런데 동경에 도착하야 대동단원 9인과 및  임 경호(林敬鎬) 등이 김 홍규의 보관금 전부를 분배하야 가지자는 의사로 김 홍규를 협박하나 홍규는 이를 응해 따르지 아니하니 저들은 매일 4, 5 회씩 식당에 출입하여 금전만 소비할 의사뿐이오, 용무진행은 염두에 두지 아니하니 이 달호가 중간에 매개자로 서서 조화(調和)한다 하고 각인에게 나누어 지급하야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권유함으로 부득이 그들의 요구대로 채 기두(蔡基斗) 3천 5백 원, 고 희준(高羲駿) 1천 5백 원, 김 창환(金昌煥) 오 태환(吳台煥) 각 1천 3백 원, 이 풍재(李豊載) 은 성하(殷成河) 각 1천 2 백 원, 그 외 6인은 각각 7 백 원씩으로 분배하니 합계금 1만 4천 2백 원이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시 조선 내에 일반사회는 우리 교(敎)를 친일파라 지목하야 공격이 비상하고 관청의 단속(取締)은 더욱 엄중함으로 이 상황도 통지하기 위하며 또는 일본 조선에는 이미 주의(主義)를 선전하였으니 만주 및 몽고 등지에도 주의(主義) 강연하기를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과 협의하기 위하야 본소로부터 간부 전 병덕(田炳悳)을 동경에 파송한 바 비상 예비금을 분배 소비하고 용무진행상 지장이 적지 아니함을 목격하고 본소에 돌아와 말하되 만주 강연 일은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의 말이 수 삭(朔) 후에 귀임할 터이니 그때 협의하자 하드라 하고 금 1 만원을 은행 화폐교환(爲替)으로 다시 송부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시 대의사(代議士:일본 중의원(衆議院) 의원(議員)) 수백 명을 두 차례(兩度) 초대하고 연회석상(宴會席上)에서 보천교 취지와 및 대동단 주의를 강연하니 대의사(代議士) 등도 면면히 보천교(普天敎) 및 대동단의 장래를 축복하고 대의사(代議士) 중 아라카와고로(荒川五郞)는 연설하야 가로대 일찍이 조선 내에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정객과 접촉하면 반드시 요구 또는 욕망하는 바가 있더니 지금에 보천교의 취지와 대동단의 주의에 대하야 연일 탐문하여도 구하는 것도 욕심도 없고(無求無欲) 휘지도 굽히지도 않고 꿋꿋히 나가니(不撓不屈) 이같은 단체와 악수 제휴하야 일선(日鮮) 문제를 해결치 못하면 조선과 일본은 영원히 분리(分離)할 줄로 확신하노니 모임에 참석한(會席中) 여러 제현(諸彦=諸賢)들은 특히 주의하야 보천교와 악수하야 일선(日鮮) 문제 해결의 신념을 확립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동경에 체재하는 중 전 총리대신 기요우라 게이고(清浦奎吾:1924.1.7-1924.6.11), 전 조선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1919.8.12-1922.6.12), 전 조선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전 대만 경무국장 시노즈카 히데오(篠塚秀雄) 외 수인의 발기로 우리 교 특파원 등을 초대하난 만찬회를 3월 1일에 개최한다는 선전지 수천 매를 인쇄 살포하는대 선전문 내용은 보천교와 악수하야 일선(日鮮)문제를 해결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각에는 영원히 해결 불능하겠다 생각하노니 뜻있는 모든 사람은 참여 회비 7원을 휴대하고 참석하기를 바라노라 하였더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런데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은 이를 저지(防遏)하여 초대를 받음이 불가하다 이르거날 김 홍규(金烘圭)가 그 의미를 물어보니 시모오카(下岡) 가로대 만일 그 만찬 초대를 받으면 헌정회(憲政會)와는 동정(同情)이 없으리니 잘 생각하야(熟量) 처리하라 함으로 여관에 돌아와 홍규는 일행을 대하야 가로대 우리의 주요 취지는 일방적인 동정을 얻자는 목적이 아니오, 대동양 대동주의(大同主義)를 목표하난 바 어떤 정당은 악수하고 어떤 정당은 배척할 필요가 없는 즉 초대에 응하난 것이 가할 듯하다 이르니 대동단 일행은 전부 불가를 주장하고 시모오카(下岡) 총감(總監)도 또한 극력으로 참석을 제지함으로 하는 수 없어 생각한 즉 3월 1일까지 동경에 머물고서(滯在) 불응하면 실례가 되기 때문에 2월 29일에 동경을 출발하야 본소에 귀환하니 전후 비용이 3만 5천원이라. 그 후에 채 기두(蔡基斗) 등은 경성 황금정(黃金町) 시국대동단 간판아래 사무 집행한다는 구실로 교중 금전을 다액의 소비를 내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런데 시국대동단 선전하는 동시에 전선(全鮮) 사회와 및 일반 민중은 보천교(普天敎)를 친일파라 지명하야 각지 강연장에서는 비상(非常)한 모욕도 하며 교(敎)의 간판을 파기(破棄)도 하며 혹은 교도를 무례하게 구타하여도 경관은 금지치 않고 도로혀 교사(敎唆)도 하며 혹은 청년배가 교도와 충돌하는 시에 경관은 교도만 억제하고 암암리(暗映)에 그들을 원조하야 무한한 난타를 받게 하고 유혈이 낭자(塗地)하여 찰나 간에 무법천지로 화하난 일이 있으니 이로 보건대 관청과 사회인이 서로 악수하야 보천교(普天敎)를 박멸하는 정책이 현실상 노출하니 가위 한심한 처사라. 각지에 발생한 사실을 낱낱이 들어(枚擧) 말하기 불가능하나  그 한둘의 예를 들자면 부산과 제주도에서 다음 기록과 같은 실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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