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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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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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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5.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포교14년 임술(道紀 52, 1922)이라 정월에 교주께서 임실군 고덕리(高德里)에 거하실 새 방주(方主) 몇 사람을 명해 부르사 12계명(계명)을 제작해 베끼어 교인에게 반포하라 하시다. 12계명-존상제(尊上帝) 숭도덕(崇道德) 친목동인(親睦同人) 망란음양(罔亂陰陽) 이재공정(理財公正) 절용후생(節用厚生) 불유탄망(不有誕妄) 무위자존(無爲自尊) 막회탐욕(莫懷貪慾) 신물시투(愼勿猜妬) 정직불아(正直不阿) 물훼타인(勿毁他人) 이상의 계명을 범하면 징계해 출교를 내린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에 한 규숙 노 좌대가 내알할 새 함양인 권 석두(權錫斗)가 따라왔다. 이때에 교주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수산(聖壽山)에 들어가 기도막을 지으라 하였더니 준공을 고하므로 교주께서 고덕리를 떠나 왕방리(王方里) 김성옥(金成玉) 가(家)로 옮기사 성수산 막에 들어가실새 권 석두로 동행하야 그 산막입구에서 고별한 후 가고 김 정곤(金正坤), 전 해우(全海宇), 이 달호(李 達濠) 3인은 산막을 보고 가기 위하야 교주와 함께 들어갔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백설은 온 산에 가득한대 산막 방안에난 맑은 하늘이 비추어 보이고 4벽 틈에 한풍이 쏟아져 들어오니(射入) 거처키 불능한지라 김 정곤 등이 김 복기 감독을 잘하지 못했음을 크게 질책하고 교주 출산(出山)을 강권하므로 교주난 3인의 청에 의하야 어둠을 타 산에서 나와 왕방리(王方里) 김성옥(金成玉) 가(家)에 계속 머무시고 그때 수행인 상월리 백 은중(白殷中)을 상월리(上月里)로 보내여 부근 산중에 기도장(祈禱場)을 보아 설비하고 오라 하시고 백 은중(白殷中)의 회보(回報)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권 석두(權錫斗)난 본시 함양 경찰서에서 5백 원 기밀비를 받아먹고 교주 잡아주기로 스스로 떠맡고(自擔) 사처로 두루 돌아다니며(周遊) 종적을 탐사 중 이 날에 한 규숙, 노 좌대 2인을 길 한가운데에서 만나 내심 스스로 기뻐하되 이 두 사람은 교주의 심복인이라 이 두 사람을 따라 가면 교주를 보리라 하고 온화한 말씨와 순한 언사로 동행을 청구하니 한 규숙, 노 좌대는 석두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고 흔쾌히 동행해 오니 이런 연고로 의심이 없는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일에 교주가 성수산(聖壽山) 산막에 들어감을 보고 함양경찰서에 직접 달려가 고발하야 일선인(日鮮人) 순사를 대동하고 성수산 부근 동고지 주재소 순사의 응원을 얻어 성수산 산막에 들어갈 새 지나는 길(歷路)에 김 성옥(金成玉) 가(家)에 들어가면 혹 소식이 새어나가(走泄) 교주가 도망갈까 염려하야 김 성옥도 알지 못하게 성수산으로 직접 들어가 동정을 관찰할 새 산막부근 암석 사이에 은신하고 종일 인적을 몰래 관찰하야 맑은 새벽(淸晨)에 산에 오르고 어두운 밤에 하산하기를 무릇 4일간이라. 이때 교주난 성수산 사태 변화(事變)는 알지 못하고 백 은중(白殷中)의 회보(回報)를 따라 상월리로 거처를 옮겼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관리는 4-5일 맡아서 지킴(守直)에도 동정없이 완료함(了無動靜)으로 왕방리(王方里) 김성옥(金成玉) 가(家)를 수색하니 교주가 거처를 옮겨간 이튿날이러라. 김 성옥을 포박하야 산 계곡 시내 냉수로 벌을 씌우며 난타고문하야 교주 소재처를 신문하였다. 동년 2월 1일에 경성부 창신동에 보천교(普天敎) 진정원(眞正院) 간판을 걸고 우물 정(井)자 교기를 제조하야 기념 및 치성일에 게양하다. 동월에 본소내현(本所內現) 성전건축을 시작하다. 동년 3월경에 교주께서 임실군 도덕동(道德洞) 산중에 산막(山幕)을 완성하고 49일 기도하기 위하야 입산하다. 이때에 산 아래 사는 교도 등이 혹 음식 혹 채소를 교주께 봉헌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는 그 간곡한 정(情曲)을 생각하고 춘궁기(春窮)에 다소간 구제코저 하나 수중에 현금이 없음으로 정읍 본소에 기별(通奇)하여 현금 천원을 보내라 하고 있는 중, 밤중 꿈에 한 여자가 와서 문을 반쯤 열고 말해 가로대 관리가 이 산을 포위하였으니 깊이 양찰(深諒:깊이 생각)하라 하고 인하여 홀연히 모습이 보이지 아니하였다. 3월 18일에 문 치도(文致道)가 정읍으로부터 현금 천원을 가져 오고, 산하동(山下洞)에 누가 오도록 허락한지 알지 못하는 나무꾼(樵夫) 한사람이 와서 가지 않고 머물거늘 교주께서 공양주(供養主)로 하여금 점심(午飯)을 주고, 교주난 산 아래 교도에게 정곡(情曲)에 따라 금전을 나누어 주니 8백 8십 원이오. 잔금 1백 20원은 미처 수습치 아니하였던 차에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저녁 식사 후 황혼인대 공양주의 친 동생이 문을 열고 교주께서 밖으로 나가시기를 재촉하거늘, 교주가 뒷문을 열고 산기슭(山麓)에 나갔다가 깊이 생각한 즉 행낭 보퉁이가 방에 있는지라. 도로 들어가서 행낭 보퉁이를 가지고 방에 등화를 끄라 하시고 산막 가장자리의 산기슭에 나가시다. 원래 교주가 여자의 현몽 후로부터 위급을 염려하야 몸에 따르는 여러 기구와 관망(冠網)과 짚신 한 족을 한 보자기 주머니에 함께 넣어 거처하는 벽 위에 매달아 놓았다가 위급할 때에난 이 보퉁이만 가지고 나가기로 준비한 것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수행한 여러 사람이 각자의 행장을 수습하기 위하야 방에 들어가 등화를 다시 밝혔더니, 이때 경관은 산하동(山下洞)에 와서 촌아이(村童)로 길을 안내하게 하고 산막에 올 새 산막안에 등화가 없음으로 사람 없는 빈집인가 하야 주저하던 차에, 방안에 등화가 켜지는 것을 보고 호각을 불으면서 기습해 오니(襲來), 여러 사람도 몸을 빼어 도망해 교주를 따르는대 나무꾼(樵夫)도 역시 그 중에 있더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교주가 소재한 산기슭(山麓)은 민생등(민둥산)이라 수목도 없고 수행인은 6-7인이오, 날씨청명(天氣淸明)에 밝은 달(晧月)이 산위 뜰 새 검은 구름 한 층이 밝은 달을 뒤덮어 올라(籠升) 다른 곳은 밝으나(明朗) 산기슭은 암흑하니 이런 연고로 경관이 보지 못함이라. 교주난 산에 올라 산 뒤로 타 넘어갈(踰去) 새 어지러운 가시덩굴(亂棘藤稍)에 촌보도 행보하기 어려움이라. 근근이 한 갈래 길이 시야에 열려(透開) 산을 올라 달아날 새 북(北)재 말미(말니)에 도착하니 이 곳은 전주 상관(上關)에서 임실로 가는 대로가 있는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가 조금 쉴 새 이때까지도 한 덩어리 검은 구름이 달빛을 엄폐하였다. 교주께서 잠깐 다리를 쉰 후 큰 길을 횡단해 건너 전주 군(郡) 경계에 들어가니 검은 구름이 다 흩어짐에 월색이 그림같은지라. 처음 보는 도로에 미혹되어 밤이 깊도록 헤매는지라 교주가 걱정하니 나무꾼(樵夫)이 가로대 이 근처 도로와 지명 및 인가 유무를 소생이 숙지하오니 염려마소서. 교주가 나무꾼(樵夫)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라 하고 밤새워(達夜) 올새 야색(夜色)이 장차 밝아옴에 온몸이 이슬에 젖은지라(沾露).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부득불 인가에 들어가서 낮에는 숨고 밤에 움직일(晝伏夜行) 터인대 서로 아는 사람이 없더니 나무꾼(樵夫) 가로대 이 곳 모 산중에 묘각(墓閣) 하나가 있어 심히 한적(殊甚閒寂)하니 그 집에 들어가기를 청하소서. 교주가 허락하고 초부를 따라 묘각에 들어가니 주인이 놀라 의심하거늘 교주가 좋은 말로써 위로해 진정시키고(慰撫) 당일에 편안히 쉼이러니 이 밤에 비가 내려 부득이 출발이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문  치도(文致道)로 하여금 전주역에 나가 첫 번째 떠나는 열차를 타고 오전에 정읍에 도착하였다가 오후에 출발하야 태인(泰仁) 산외(山外) 반정(半程)으로 오라하고 주인의 아들(子)을 전주역까지 동행하였다가 소식을 전하고 오라 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곳에서 전주역이 30리라. 밭두렁(千頃)에서 다녀온 주인 아들이 회보하되 전주역에서 제 일발 첫 차를 타고 갔다 하더라. 당일 밤에 출발하야 소곰재를 넘어 염재 밑에서 반정인(半程人) 문 치도(文致道), 안 도명(安道明) 2 인을 만나 같이 염재를 넘어서 평사리(平沙里) 모(某) 인의 집에 들어가다. 다음날에 주인이 놀라 물어 가로대 지난밤에 관리가 야간 순찰을 돌다가 염재에서 소도둑 한 사람을 사로잡았다 하든대 어찌 능히 이들과 맞닥뜨리지 않았는가 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날에 편히 쉬고 당일 밤에 출발코저 하니 주인이 만류해 가로대 지난밤에 사로잡은 소도둑을 주재소에 수금(囚禁)하고 소난 주재소 마당에 매어두고 금일에 전근 가는 순사 전별연(餞別宴:송별연)이 있어 경관 전부가 날이 다하도록 유쾌하게 놀다가 돌아와 본 즉 소도둑이 판자를 떼고 도주하였는대 소까지 몰고 갔음으로 순사는 이를 절도가 아니라 강도의 담이라 하야 각처 주재소에 전화하고 야경 순경에 경계망(戒網)이 심히 엄하니 금일 밤에는 출발이 불가하나이다. 교주 가로대 그러니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염려말라 하시고 당일 밤에 출발하야 정읍에 돌아가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5월 15일에 신건축하든 현성전이 준공되야 낙성 치성식을 성전 내에서 거행할 새 천지일월성(天地日月星) 3단을 을 봉안하다. 교령(敎令)으로써 임주(壬主) 고 주경(高周景)과 경칩주 강 기돈(姜琦暾)이 방임(方任)을 교환하다. 동년 7월 20일에 대사모(大師母) 곤례식(袞禮式) 정읍군 정읍면 삼산리(三山里) 고 직동(庫直洞) 촌변에 거행할 새 회집한 교도가 10만여 명에 달하다. 동년 8월경으로부터 각 방주 공실(公室)을 건축하기 시작하다. 교인의 성의금(誠義金)을 등급을 따라 기재하고 갑을병정무의 포성장(褒誠狀)을 인쇄하야 성력(誠力)이 특수한 교인에게 등급을 따라 급여(給與)하다. 포교 15년 계해(道紀53, 1923)라 정월 3월에 진정원을 각 중요도시에 설치하라는 교령(敎令)이 유(有)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2월 19일에 경성 복심(覆審)법원에서 11만원 사건의 공판이 개정(開廷)되야 제령(制令) 위반으로 김 홍규(金烘圭) 1년 6개월, 최 일문(崔逸文) 1개년 징역, 김 혁중(金赫中), 강 태규(康泰奎), 목 원익(睦源益) 3인은 각 10개월에 3년간 집행유예의 언도가 있고 이용하(李容河)는 무죄로 방면되고 압수금 4만 3천 7백 3십 원은 국고로 편입하다. 김 홍규(金烘圭)등은 이를 불복하고 상고하다. 동년 4월 2일에 김 홍규(金烘圭) 등 상고는 기각되다. 동월 5일에 경남 진정원(眞正院)을 진주 성내에 건축하든 중 준공이 되야 개원식을 거행하고, 동월 15일에 평남(平南) 진정원 개원식이 유(有)하고, 동월 26일에 제주 진정원 개원식이 유(有)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보광사(普光社) 인쇄소를 경성 진정원 내에 병설하고 보광(普光) 잡지를 발간하다. 동년 8월 22일 경북진정원을 대구부(大邱府)에 신축하고 개원식을 거행하다. 동년 9월 20일에 본소 내에 총정(總正) 총령(總領) 양원(兩院)을 설치하고 총정원장은 채 선묵(蔡善黙), 총령원장은 이 상호(李祥昊)가 피임되다. 동년 10월 20일에 전북 진정원을 전주군 완산정(完山町)에 신축하고 개원식을 거행하며 동월 26일에 충남 진정원을 대전군 춘일정(春日町)에 설립하야 개원식이 (有)하다. 동월 29일에 강원도 진정원을 춘천군에 설립하고 개원식이 (有)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11월경에 소한주 채 경대(蔡慶大)가 탈퇴하다. 채 경대는 전남 무안군 비금면 인이요, 채 규일(蔡奎壹)의 친동생이라. 제주교도에게 교금 2만여 원을 받아 낭비하였고 간음사(姦淫事)가 있음으로 교주께서 경계해 깨우침이 있으시나 이를 불복하고 탈퇴하다. 그 후에 고부 객망리에서 삼성교주(三聖敎主)라 자칭하고 광음난무(狂飮亂舞)로 도통한다 하야 보천교인을 유인하는 중이다. 동월 20일에 부인방위(婦人方位)를 조직하다.(임명은 남자와 同함) 각방 6임중 공적이 우수한 자는 방주와 동등으로 채용하사 선화사(宣化師)에 임명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2월19일에 목주 김 홍규(金烘圭)가 만기 출감하다. 동년 3월 초 7일에 축주 노좌대(盧左大)가 병으로 사망하다. 교주께서 심히 애통히 슬퍼(痛惜)하사 장의제구를 친히 감독하사 후히 장의하시다. 동년 5월 초 7일에 전남 진정원을 광주읍에 신축하고 개원식이 유(有)하다. 동년에 함남 진정원을 함흥읍에 건축중이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6월에 이상호가 경성으로부터 와서 말하되,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가 현재(現今) 자금이 부족하야 폐업의 지경에 빠졌으니 교중에서 금 2만원을 출자하야 이를 속간하면 피아간에 좋은 방침이 있다 이르므로 교중에서는 사회사업 기관의 실패됨을 애석(愛惜)하야 차후 계속할 사람이 있기까지 원조 부지(扶持)하도록 하리라는 공공심(公共心)으로 우(右) 금액을 출자하였더니 이 상호는 그 동생 성영(成英)을 편집국장으로 총독부에 문서로 보고(屆出)하야 허가를 얻은 바 이 상호(李祥昊), 이 종익(李鍾翊), 이 성영(李成英), 임 경호(林敬鎬)가 각자 당군(黨群)을 지어 누구는 사장(社長)  누구는 중임(重任)을 탐하야 신문사 기관의 전권을 점거코저 서로 간 쟁투함으로 실패에 이르다. 이 때에 마루야마(丸山) 국장은 내각 개조관계로 사직귀국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8월에 이르러 교중(敎中)에서는 상호(祥昊) 등의 야심을 탐지하고 중벌(重罰)의 과(科)에 붙였다.  상호(祥昊)는 본시 사회에서 내쫓긴 자(社會出脚者)로 교(敎)를 위하는 공공심(公共心)은 없고 자기를 살찌우려는 마음(肥己心)이 많은 사람이라. 경성 양해시(諒解時)에도 교주에 대한 체포령(逮捕令)과 각 방주(方主)의 체포장(逮捕狀)은 취소하도록 주선한 것이 없고 자신만 활동하기 편의(便宜)하도록 주선하였으며, 김 홍규 등 체포 수금(囚擒) 사건에도 하등의 주선력이 없이 한도 밖에 방치하였고, 교중 공금 4 만여 원 압수 사건에도 하등의 주선력이 없다가 필경 국고로 편입이 되었고, 또 경성(京城) 가회동(嘉會洞)과 창신동(昌信洞) 진정원(眞正院) 가옥 및 대지(垈地)를 저의 단독명의로 증명권(證明權)을 총독부에 제출 등록(屆出)하야 소유를 만들었으며, 또 망령되게 교주 법통 계승(繼統)을 몽상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전후소행이 모두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다가 이 기회(此際)를 틈타 경쟁(逐)해 반역자로 화하야 보천교 혁신인이라 자칭하고 교주를 성토하며 방주(方主)를 능욕하고 사회단체와 악수하야 교주 성토문과 및 혁신 이유의 선언서를 인쇄하야 전 조선(全鮮) 교도에게 발송 선포하야 인심을 난동(亂動)하고 사람으로 감히 행하지 못하는 바를 감행함으로 교중에서는 이 상호(李祥昊) 토죄문(討罪文)을 전 조선(全鮮) 교도에게 발부하고 간부 수인이 상경하야 이 상호를 정중히 질책한 즉 저들(彼等)은 유도 숙련인과 역사(力士)를 모집하였다가 간부 등을 난타하야 사경(死境)에 이르므로 인근 파출소에 급히 고발하니 경관이 웃어 가로대 종교가(宗敎家)에 투쟁함은 고래(古來)로부터 그러한 일이 많이 있다 하고 냉정히 물리쳤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진정원(眞正院)의 건물 대지(垈地) 및 비품 등 수 만원의 재산은 보천교(普天敎) 소유임에도 불구하고 무관계한 혁신파가 점거함으로 이를 돌려받기(取戾) 위하여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에 형사고소를 제기하였더니 검사국에서는 죄상을 취조(取調)도 아니하고 마침내 기소중지의 처분을 하였다. 그 후에 이 상호(李祥昊)는 교중에서 횡령한 금전을 다 소비하고 지나(支那)지방으로 망명하다. 동시에 이 성영(李成英)은 보광사(普光社) 인쇄기 및 활자를 매각하야 지나(支那)로 동행해 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시에 간주(艮主) 이 종정(李鍾鼎)과 경성 진정원장 이 종익(李鍾翊)이 혁신에 동모(同謀)하였기로 이를 함께 면임(免任)하고 출교(黜敎)하다. 이 달호(李達濠)로 경성 진정원장에 임명하시다. 간방 포감(胞監) 한 효식(韓孝植)으로 간주(艮主) 계통(繼統)에 임명하시다. 이때에 임 경호(林敬鎬)는 이상호 혁신 반란을 먼저 통지해 주었으므로 해주(亥主) 겸 총령원장(總領院長)에 임명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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