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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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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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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nd.us/#!/band/61758246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4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제천 단 장소를 덕유산 산기슭(內麓) 황석산(黃石山)에 정하고 산비탈(山坂) 수백 평을 평평히 깎아(鑿平) 오좌자향(午坐子向)으로 제단을 쌓을새 단이 9층에 높이가 7척 2촌이요, 넓이가 최상층은 사방이 9척이요, 하층은 사방이 15척이라. 매 층에 넓이가 3촌씩 축소하고 제 6층은 9촌을 축소함. 면포(白木)를 연폭하야 사면으로 휘장천막(帳幔)을 두르고(圍繞) 동서남북에 출입문만 개방하고 공중에 삼실로 만든 줄(麻繩)을 종횡하야 우물 정(井) 자로 구성하고 백랍으로 정제한 등촉을 28수(宿)로 높이 걸고 60방주(方主)와 360군 포장(布長) 매 인 아래 등촉 하나씩 내걸고 큰 화톳불(巨燎)에 불을 지피니 화광이 하늘에 이어지더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제수는 매 품목(每品)에 높이가 1척 9촌이요, 제기(祭器)를 새로 주조할 시에 각종 물품 담을 기구(器具) 개수를 계산하야 사방 9척 제상(祭床)에 꼭 맞도록 신조(新造)하였고 단상에 월병(月屛:병풍)을 세우고 위목(位目:한지에 붓글씨로 쓴 神位 목록)은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삼태칠성응감지위(三台七星應感之位)라고 크게 써서 3위(位)를 설(設)하고 ·제 3층 1면(面)으로 예배석을 설(設)하고 신유년(道紀 51, 1921) 추(秋) 9월 24일 경신(庚申) 신(申)시에 교주께서 3층 단상에 오르사 제례(祭禮)를 봉행하실 새 분향세작(焚香洗酌)하시니 이때에 흑운이 하늘에 가득이다가 삼태칠성이 홀연 현출(現出)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방주(方主), 포장(布長), 정리(正理)를 차례대로 열 지어 세우게 하니 사람 수는 천 명에 달한지라 초헌(初獻) 후 독축(讀祝:축문을 읽음)하사 교명(敎名)을 하늘에 고(告天)하시니 가로대 보화(普化)라 하다. 9헌(獻)에 이른 후에 폐백을 봉번(奉燔:불에 사르는 의식)하니 가는 비단 면속(細緞綿屬)이 만여 원 가액이오, 지물(紙物)도 부지기수라. 이에 사신(辭神)하사 제례를 마치시고 비어있는 방주(方主) 7인을 보결(補缺)하니 계(癸) 차윤덕(車輪德), 대한(大寒) 김수권(金秀權), 백로(白露) 박래필(朴來弼), 상강(霜降) 김현환(金顯桓), 추분(秋分) 김후기(金후琪), 우수(雨水) 김두성(金斗成), 소만(小滿) 고정환(高貞煥) 7인이 피임되고 전 추분주 한규숙은 북주(北主)로 전 소만주 정진구는 술주(戌主)로 승급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일 밤에 교주께서 설유(說諭)해 가로대 금번 제향(祭享)에 교명(敎名)을 고천(告天)하였으니 고사(告事)는 이미 끝났음이라. 지금으로부터 각도(各道)에 집리(執理:재정책임자) 1인씩 지정하고 교도에게 의금(義金)으로 봄 1 원 가을 1 원의 규모를 정하야 빠짐없이 거두라(收合) 하신 후 교리를 설명하시다. 교명을 고천(告天)하는 동시에 교주가 없는 것이 불가한 고로 선생께서 교주의 위치에 앉으심을 허락하시니 이때로부터 사제(師弟)의 규모가 성립되다. 제(祭)를 파한 후에 처소로 돌아가시니 밤이 이미 깊은지라 이때에 운곡리 기개 교인(幾個敎人)이 제석(祭席)에 내참(來參)하였다가 방주(方主:최고위 직책)를 주지 아니한다는 감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송정(養松亭) 주재소에 고발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양송정에서 우전(于田)까지 거리가 20리라 양송정 관리는 이 고발을 접하고 곧 바로(卽地) 출발하야 우전(于田)에 저도(抵到:도착)하니 맑은 첫새벽(淸晨)이 되었는지라. 동구에서 마침 한 여자를 만났는데(逢著) 겨드랑이 아래 주머니에 싼 물건이 있거날 경관이 조사한 즉 떡과 구운 고기, 생선 등 의 음식이라. 경관이 따져 물으니(詰問)하니 그 여자가 답해 가로대 이 동리에 우리 친척이 있어 어제 혼인예를 행함으로 왔다가 약간 음식을 얻어서 금일 귀가하노라. 경관은 단서를 얻었음으로 그 여자를 앞서 인도케 하야 혼인집으로 가자 하니 그 여자가 부득이 앞서 인도하야 한 집을 들어가니 그 집에 마침 박 경환(朴敬煥)이 있는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우전리(于田里) 한 마을에난 집집마다 빈객이 가득찼다. 박 경환(朴敬煥)은 경관을 발견하고 귀에 대고 몇 마디 하니(附耳數語)하니 일인 순사가 한 마을 수색을 강요하거늘 박 경환이 크게 노하야 순사를 꾸짖고 인솔하야 양송정에 가다. 이날에 김 교훈(金敎燻) 노 병희(盧柄熙) 2인이 교주에게 들어가 친견하고 양해사(諒解事:총독부에 교주의 정체를 공개하고 단체를 세상에 공개하는 건)를 물어보니 교주 가로대 교(敎)난 한 사람의 교(敎)가 아니오 많은 사람(衆人)의 교(敎)이거늘 중론(衆論)을 듣지 아니하고 내가 홀로이 처단할 수 없다. 교안은 경상도가 제일 많고 그 중에 두령자난 김 정곤(金正坤) 전 해우(全海宇) 등인대 그 사람이 완강히 거부 불응하면 나 역시 어찌할 바 없는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군(君) 등이 그 사람 등을 면대(面對)하야 타협함이 가하다 하니 김 교훈(金敎燻) 노 병희(盧柄熙) 2인이 물러나와 김 정곤(金正坤)을 보고 양해를 언급하되 교주께서 우리 양인으로 하여금 형(兄)에게 타협하라 하니 형의 의견은 어떠시오. 김 정곤(金正坤)이 답해 가로대 교(敎)난 자유라 의뢰할 것이 없고 또한 신앙 여부는 개인의 마음에 있거날 내가 어찌 중인의 마음을 알아 가볍게(輕儇) 허락하리오. 2인이 또 전 해우(全海宇)를 보고 또 양해를 권하니 해우의 말도 또한 정곤과 같은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교주께서는 사태(事機)가 시시각각 위험함을 보고 부득불 처소를 옮겨야 하겠다 하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가로대 박 경환(朴敬煥)이 아직 오지 아니하고 이목이 번잡하니 부득불 처소를 정해 옮기고 박 경환에게 기별을 전해(通寄) 매사를 의논(酬議)하리라 하시고 9월 25일 밤에 노 재대(盧在大) 한 규숙(韓圭淑)으로 더불어 당월리(當月里) 한 종환(韓鍾煥)의 집으로 가실새 이날 밤에 마른 번개(乾電氣)가 치다(閃輝). 각 방주 장리 포장 등은 교주 이거함을 듣고 그날 밤에 각각 흩어져 가니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김 교훈(金敎燻), 노 병희(盧柄熙), 이 기만(李基晩) 등은 교주 탈출(脫去) 소식을 듣고 또한 박 경환(朴敬煥)에게 장차 통지(通寄)한다는 말을 들으니 자기가 계획한 바가 수포(落空)라 크게 성내어 교주를 체포하리라 하고 김 교훈(金敎燻)은 우전리에 체류(滯在)하고 노 병희(盧柄熙), 이 기만(李基晩)은 경성으로 직접 가서 정복(正服) 관리를 대동하고 와서 사면으로 수색할 작정이었다. 이때에 경성인 정 학주(鄭鶴柱)와 담양인 방 응두(房應斗)가 내알하다. 응두난 신장이 7척이오, 용모가 기험(奇險)하고 육체적인 힘(膂力)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는지라 올 때에 자동차를 타고 안의(安義) 정류소에 하차하니 순경하는 관리가 교주로 의심하야 주재소에 구금 질문함으로 대제시(大祭時)에 참견치 못하였고 안의(安義) 관리는 대제(大祭) 당일 밤에 방심하였다. 힐문(詰問) 후 실증이 없음으로 석방하나 미행하니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9월 28일 야반에 교주께서 종환가(鍾煥家)를 떠나 다른 곳에 유숙(留宿)하다. 이날에 천기(날씨)가 혹한하더니 밤에 백설이 휘날려 가히 족적을 가릴 수 있음이러라. 이 기만(李基晩), 노 병희(盧柄熙)는 경성에 돌아가 사유를 고하니 김 태식(金泰湜)이 크게 성내어 총맨 관리를 인솔하고 오다가 일기가 갑자기 한랭하여 행보가 불능하고 게다가 밤눈까지 얼굴을 때려 얼어붙어 걷기조차 어려워 부득이 고정리(高亭里) 주점에 유숙(留宿)할새 혹 소식이 새나갈까 염려하야 근린주점 주인 남녀 물론하고 호출하여 같은 방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날이 밝기 전에 우전(于田)에 도달하니 이때 김 교훈(金敎燻)은 상인(喪人)이라 기쁘고 마음이 급해(喜且心急) 상건(喪巾)만 착용하고 관리를 인솔하야 종환가를 포위하고 엄밀 수색하되 교주가 없는지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한 규숙, 노 좌대, 문 정삼, 민 태호 등이 종환가에 있었으나 관리는 교주 포착에 열심하야 타인에게는 손댈 여가가 없는지라, 한 규숙 등에게는 꼼짝하지 말라는 경계만 하고 한 마을을 가가마다 수색할 새 이날은 일기가 온화한지라. 교주는 다른 동(洞)에 있다가 당월리(堂月里)에 관리가 들어옴을 보고 뒷산으로 은신하고 한 규숙, 노 좌대 등은 관리없는 틈을 타서 역시 뒷산으로 도피하였난지라. 관리는 한 마을을 수색하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종환가에 와서 본 즉 모든 사람이 역시 부재한지라, 한 종환(韓鍾煥)과 우전리 이 인태(李仁泰)를 다리고 경성으로 돌아가다. 이때에 교주난 산 위에서 관리 물러감을 볼 새 문 정삼(文正三) 등이 계속 와서 모이다(陸續來會).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날 밤에 교주난 이 사람들을 인솔하고 함양읍 뒤 죽곡리(竹谷里) 민 태호(閔泰鎬) 가(家)로 올새 수십 리를 행하다가 교주께서 허기가 심하여 촌보도 불가능하고 평리동(坪里洞) 뒷산에 앉아있으니 추종인 중 문 치도(文治道)가 산 아래 마을에 가서 남은 밥을 구하여 보리라 하고 산 아래로 내려가니 이때에 이미 밤은 깊었더라. 오래지 않아 문치도가 밥 한 그릇과 나물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말해 가로대 내가 일가(一家)를 찾아 문을 두드린 즉 외당(外堂)에 늙은 주인이 있는지라. 고해 가로대 모(某:자기를 겸칭하는 말)는 상인인데 물건을 지고 가다가 허기가 생겨 한걸음도 걷기 불능하오니 혹 남은 밥이 있으면 허기를 달래게 조금만 주소서.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노인이 미처 답하기 전에 집 안(內堂) 작은 방에서 한 젊은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와 노인에게 말해 가로대 남은 밥은 없으나 속히 새로 지을 터이니 손님을 방으로 인도하시오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려 하거늘 내가 대답해 가로대 새로 지어 먹을 여가가 없사오니 남은 밥이 없으면 그만두시오 하니 그 젊은 부인이 유숙(留宿)하기를 청하기로 답해 이르기를 나 한사람 뿐 아니요, 동행이 있으니 지어먹을 수 없다 하니 젊은 부인이 동행까지 다리고 와서 유숙(留宿)하기를 간곡히 청하되 내가 고사(固辭)하니 젊은 부인 가로대 그러면 이웃집(隣家)에 가서 남은 밥을 구하여 오리니 잠시 기다리라 하고 이웃집에 가서 남은 밥을 구해 와서 주기로 가지고 왔사오니 참 이상하다 하더라. 교주는 따르는 사람들과 더불어 음식을 나눈 후 당일 밤에 민 태호(閔泰鎬) 가(家)에 도착하였다가 며칠 후에 웅곡리(熊谷里) 김 명일(金明一) 가(家)에 거처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10월에 이 상호(李祥昊)가 경성으로부터 내알하다. 이 해 음력 8월에 이 상호가 경성에서 체포됨은 위에서 이미 설명했거니와 10월에 이 상호가 의외에 내알하야 체포된 사실과 및 구금(囚禁) 중의 상황을 고하되 그때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였다가 경기도 경찰부로 이송되였는데 후지모토(藤本) 고등과장이 소자(小子)를 선생으로 대우하고 간절히 타일러(曉喩) 가로대 선생의 말을 들은 즉, 종교를 선포하는 사람인대 어찌하여 음지에 숨어(陰隱) 포교하느냐고 물어보므로 답해 가로대 관청에서 우리 교(敎)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도처에 만나는 것이 단속(取締)이고 주야수색이 부지런하야(不怠) 압박이 심하므로 부득이 몸을 숨겨 도피하며 포교(隱逃布敎)하노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과장 가로대 종교난 동서를 물론하고 누가 감히 사랑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선생의 행동은 음지에 숨어 암중행사하니 관청에서도 여하한 사정이 있는지 알지 못하여 혐의를 받았으나 지금으로부터 선생이 공명정대한 행동을 한 번 거행하야 관청의 양해를 얻어 노골적으로 포교하면 관청에서도 또한 후원할 터이니 의향이 어떠하오. 소자(小子) 답해 가로대 나는 60방주(方主) 중 1인이라 단독으로 처리하는 권한이 없으니 의사가 있드래도 불가능이오, 더구나 도주(道主)는 먼 지방(遠方)에 있어 회담의 기회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과장 가로대 만약 선생을 석방하면 가능한 길이 있겠느냐. 답해 가로대 도주(道主)난 쉽게(容易) 면회가 불능하나 60방주(方主)와는 협의할 수 있다. 그러나 60방주난 활을 겁내는 새(驚弓之鳥)와 같으니 지금에 나의 귀로에 미행을 붙이지 말라 하고 석방을 얻어 왔으니 만일 약속을 위반하면 소자는 감히 이 땅에 거처하지 못하고 국경을 넘어 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께서 출판물 허가와 관청 양해 얻음을 재가(裁可)하시다. 이후에 이 상호(李祥昊)난 관청 양해를 얻었다 칭하고 교중(敎中) 공금으로써 경성 동대문 밖 창신동(昌信洞)에 보천교(普天敎) 진정원(眞正院)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진정원을 설립한 후에도 관청의 취체(단속)난 각 지방에서 여전히 불변(依然不變)할 뿐에 그치지 않다. 동년 11월 겨울 전(全) 치성제(致誠祭)를 거행할 시에 총독부 통역관 니시무라 신타로(西村眞太郞:일제 때 총독부 조선어 통역가 겸 번역가)가 경무국 및 전북 경찰부 및 정읍 경찰서원(警察署員) 등 50여 명을 인솔하야 각각 권총을 휴대하고 자동차를 탑승하고 맹화열풍(猛火烈風)과 같이 불의에 본소를 쇄도하야 교주를 체포할 목적으로 본소를 전부 수색하였으나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후에 보천교 간부 6-7인이 총독부에 가서 경무국장 마루야마 츠루키치(丸山鶴吉)씨에게 질문해 가로대 관청에서난 보천교를 양해한다는 사기(詭詐)를 희롱하야 교주 체포할 술책을 사용하는가. 이와 같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장의 답변이 평온하고 태도가 온화함으로 국장의 심리에 감복하야 좋은 낯(好顔)으로 돌아오다. 그 후에 총독부 양해는 실행되었으나 이 양해가 하급관청으로부터 상사(上司)에 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 지방관청의 호감을 얻기 불가능하고, 개인의 양해는 개인이 구해야 점차 취체(단속)을 면하나 각 지방관청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아 어떤 지방은 호감, 어떤 지방은 악감의 상태가 유(有)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에 함양 경찰서와 거창 경찰서가 연합하야 지리산과 덕유산을 대 수색하야 한 달 동안(連旬彌月)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근처 산골짜기와 각외 촌락을 수색하기로 내정하였다. 교주께서 추종인에게 일러 가로대 관리가 산 계곡을 수색하다가 만약 여의치 않으면 근처 인가를 수색할 터이니 이 마주보이는 곳에서 오래 머뭄(久留)은 지혜가 아니라. 경상도를 떠나서 전라도로 향하리라 하다. 마침 그때에 추분방(秋分方) 대리(代理) 문 홍근(文洪根)이 내알해 가로대 추분주 김 복기(金濮基)가 후미진 곳(靜僻處)을 택정(擇定)하고 소자를 여러 곳을 거쳐 보내어(替送) 선생님을 모시라(陪行) 하기로 내알합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일 밤에 교주께서 문 홍근 외 4-5인을 인솔하고 웅곡리(熊谷里)를 떠나 임실로 오실 새 산허리로 길을 나선대 층층이 바위절벽에 길 아래는 수백 척의 낭떠러지가 위험난상(危險難狀)이라. 발 하나를 잘못 디디면 생명을 보존키 어려움이오. 야색(夜色)이 이미 심하고 검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이라, 등롱(燈籠)을 예비하였다가 그곳에서 점화하고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비추기 위해 단장 끝에 매달음이러니 중로에서 등롱이 낙하하여 수백 장(丈) 위험한 벽에 굴러 떨어지니 진퇴부득하야 다만 서서 떨어져 구르는 등롱만을 완상(玩賞)할 뿐이러니 오래됨에 등롱이 구르지 아니한대 촛불의 형상(燭影)이 한결같거늘 마음이 심히 이상하야 사람으로 하여금 칡덩굴을 붙잡고 절벽에 의지하여(攀葛附壁) 아래로 내려가 본 즉 등롱이 탄 곳이 없고 촛불의 형상이 여전함이라 대중이 모두 경이(驚異)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렇게 하여 무사히 이 험한 절벽을 통과하야 전북 임실군 상월면(上月面) 상월리(上月里) 이 기양(李起陽) 가(家)에 오다. 그 후에 함양 관리는 죽곡리(竹谷里) 민태호(閔泰鎬) 가(家)와 및 근처 촌락을 대수색하니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11월 17일에 대사모(大師母) 밀양(密陽) 박씨(朴氏)가 기세(棄世)하시다. 교주께서 부음을 전해 들으시고 애통하게 슬퍼하시고 예를 넘어서시더니(哀毁踰禮) 하룻밤 꿈에 주회암(朱晦庵)이 와서 가르침 없이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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