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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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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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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3.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1.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김 영두(金英斗)는 두 마음을 안에 품은지 이미 오랜지라 홍규 수금(구금)된 소식을 듣고 웃어 가로대 홍규가 졸연간(빨리) 출옥치 못하리니 이때를 틈타서 홍규의 보관한 교금을 훔치리라(盜得) 하다. 이때에 김 홍규는 교금을 그 친족 공칠(公七)에게 맡겨 보관하였는데 신실(信實)한 교인이므로 이관치 아니하였다. 영두가 그 내용을 상세히 알고 후폐(厚幣:후한예물)로써 공칠과 친사(親査:친척사돈)를 맺은 후에 중앙 교장(中央敎章:보천교 본부 인장)을 위조하야 송금증을 작성하고 그 동생 민두(民斗)와 더불어 공칠의 집에 가서 교주의 친명(親命)이라 하고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봉치금(封置金) 11만 3천 7백 3십 원을 전부 훔쳐(盜得) 4만 3천 7백 3십 원은 정읍군 내장면 월성리 그 친부(親父)의 집에 나누어 보관하고 나머지 돈은 지참하고 와서 자기의 친근한 방주와 근지(近地) 교도의 인심을 암암리에 매수하니 방주 중 김 성두(金晟斗), 한 상용(韓相庸), 김 동식(金東植), 권 민화(權珉和), 서 만식(徐萬植), 주 시하(周時夏)와 목(木)방 6임 신 현철(申鉉喆)이 모두 영두에게 귀순하야 음모를 내도(內圖)하고 각처에 심복 인을 파송하야 인심을 매수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에 신 현철(申鉉喆)이 경성에 와서 손(巽)방주 임 치삼(林致三)을 유인하니 임 치삼이 그 사실내용을 상세히 탐지하고 이 상호로 하여금 교주에게 품고하니 교주가 김 영두를 소환하사 교금 옮긴 것을 물으니 영두 가로대 김 홍규가 체포 수금 중에 금전이 발각될까 염려되어 가지고 왔다 하고 난연(赧然:붉은)한 안색으로 금전을 봉헌하겠다 고(告)하니 교주 질책해 깨우쳐 가로대 군(君)이 나와 합심만 되면 제일이오, 금전은 보관자가 있으니 홍규와 협의하라 하시다. 이때에 곁에 있던 자는 이 상호(李祥昊) 이 교상(李敎祥) 임 학선(林鶴善)이라. 교주께서 임 학선으로 하여금 홍규에게 이 말을 전달하라 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최초 김 영두가 금전을 도적질할 시(時) 계획은 김 홍규가 이미 붙잡혔으니 적어도 이삼년 내에난 출옥치 못하리라. 내가 이 금전으로 인심을 서서히 매수하되 교주를 급속히 배반하면 인심이 따르지 않을 터이니 차라리 교주를 시위(尸位)로 위하야 인심을 수습하난 자료를 삼고 교중 전권을 독점하야 차차 인심이 다 복종된 후에 교주를 폐하고 내의 교(敎)를 만들리라는 야심으로 비밀리에 행동하다가 의외에 홍규가 석방되고 교주가 금전 도득(盜得)함을 이미 알아 비밀이 탄로되었으니 부득불 교주를 배반아니할 수 없고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만일 교주를 관청에 고발하야 포착이 되면 자기의 도적질한 금전이 압수되여 자기경영이 불성립하겠음으로 차라리 교주를 위혁(威嚇:위협)하야 이 땅(此地)을 떠나도록 하리라는 생각으로 금전을 많이 흩어 조선인 관리를 비밀리 연결하야 교주 수색한다 칭하고 교주 거하는 처소에 인근가옥까지 수색 위혁(위협)하며 혹 관청에 자현(自現:자수)하려 간다고 공갈하되 교주는 영두의 심간(心肝)을 내다보는지라(窺見)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아니라 처소를 옮기지 않고 영두의 종질 김 용범(金容範)으로 하여금 가옥을 신축하사 오랫동안 머무를 계책을 보이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년 7월 초 5일경에 영두의 부친과 그 종형 성두(晟斗)와 주 시하(周時夏)가 상의하되 교주가 이 땅을 떠나지 아니하야 위혁(위협)을 겁내지 아니하니 부득불 관청에 고발하야 체포(捕捉)할 수밖에 없은즉 일방으로는 관청에 고발하고 일방으로는 심복인을 파견하야 대황령(大篁嶺)에서 전라도로 가는 소로와 육십령(六十嶺)으로 가는 대로와 안의읍(安義邑)으로 가는 대로 세 곳만 파악해 지키면(把守) 나는 새라도 탈주치 못하리라 하야 약속을 정하고 고정리(高亭里) 주점에서 술내기 대회(置酒大會)를 할 새 주시하(周時夏)는 극구(極口:갖은 말로) 패담(悖談:욕설)으로 교주를 욕(詬辱)하고 일방으로는 사람을 보내여 교주 처소에 수직(守直:맡아 지킴)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때에 이르러 운곡리(雲谷里) 최 영준(崔泳俊)의 아들과 하 우식(河佑植) 2인이 고정리(高亭里)를 통과하니 주 시하(周時夏) 가로대 이 두 사람은 교주의 세작(細作:염탐꾼)이니 오늘밤에 지나가게 방치하면 소식이 누설되리라 하고 두 사람을 강제로 잡아(牽執) 한 방에서 유숙케 하니 두 사람이 부득이 동숙하다가 밤이 깊은 뒤에 탈출해 엎어지고 넘어지며 급히 달아나 교주에게 소식을 알리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교주께서 운곡리 최 영순(崔永舜) 가(家)에 계실 새 영순이 전율하여 가로대 만일 경관이 오면 소자가 그 고문에 어찌 감당하오릿가. 교주 가로대 내가 있는 때에 관리가 오면 내가 당할 것이오. 만일 내가 발정(發程:출발)하드래도 그대에게 책임이 돌아감(侵責)이 없게 하리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하시다. 교주께서는 영두의 행하는 바를 보면 그곳을 꼭 떠나지 아니하겠으나 최 영순(崔永舜)의 사정을 보아 부득이 떠나야 하겠다 하고 당일 밤에 최 영순으로 하여금 행장을 가지고 김 성두(金晟斗) 가(家)에만 인도하여 달라 하사 김 성두 가에 이르러 성두를 부르시니 성두는 내방(內房)에서 외출하고 외당(外堂)에난 성두파(晟斗派) 기개인(幾個人)이 유숙하다가 모두 잠자다가(睡夢) 깨어 일어나더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께서 최 영순다려 일러 가라사대 그대는 나를 성두가(晟斗家)에까지 인도하였으니 나는 성두가에서 지낼 터이니 그대는 돌아가라 하시니 최 영순이 돌아가다. 교주께서 성두다려 일러 가로대 내가 이곳을 떠나지 아니함은 너희들의 회개함을 기다림(留待)이러니 너희들이 회개치 아니하고 악독한 심리가 갈수록 더욱 근심이 되어(去益難化) 나를 관청에 고발 포박할 계획 중이라 하니 나의 명(命)이 하늘에 있거늘 너희들의 독수(毒手)에 명(命)이 달렸느냐. 관청에 고발하는 것보담 지금에 내가 스스로 왔으니 네 손으로 포박하면 도리어 용이롭지 아니한가. 네가 오늘밤에 나를 포착치 아니하면 내가 금일 밤에난 출발(發程)하겠으니 한번 떠나면 네가 나를 다시 보지 못하리니 너는 속히 착수하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성두(晟斗) 가로대 실로 옳은 일이 아니(實無是事)로소이다. 교주 크게 질책해 가로대 사람이 배은망덕하면 천벌을 받나니 하날이 두렵지 아니하냐 하시고 당일 밤(此夜)에 발정하실새 왼손으로 행장을 잡고 오른 손으로 단장을 잡으사 길을 찾아 기다시피 포복(匍匐)하시니 산중 촌길이 본시 기구험준(崎嶇險峻)한대 여름간 장마비로 사토(沙土)는 모두 흘러내리고 완석(頑石:무거운 돌)만 험준(崚嶒)이라. 하물며 교주난 이곳에 오래 살았을지라도 문밖의 길을 돌아보지 아니하니 생면강산에 동서를 분간하지 못함이오. 닭이 이미 울음에 밤이 장차 밝아오는지라 부득이 산밑 소로로 들어가 운곡리(雲谷里)를 우회하야 다시 운곡리(雲谷里) 상촌(上村) 김 재명(金在明) 가(家)에 들어가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당일 밤에 성두(晟斗)난 교주 출발함을 보고 양송정(養松亭) 주재소(駐在所)에 고발하되 교주가 방금 운곡리(雲谷里)를 떠났난대 갈만한 곳은 우전리(于田里) 한 규숙(韓圭淑)의 가(家) 뿐이니 포착하라 한대 관리가 즉시 총을 메고 검을 차고 우전리에 곧바로 달려 한 마을을 수색하되 목적을 달치 못한지라. 초 6일래 영두(英斗)의 부(父)가 그 소식을 듣고 성두(晟斗)와 상의해 가로대 교주가 우전리에 부재하면 타처에난 갈 곳이 없으니 분명히 운곡리를 다시 들어온 것이로다 하고 여자를 네 파(派)로 나누어 상하촌을 가가마다 비밀리 정탐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는 당일 김 재명(金在明) 가(家)에서 저녁을 마치신 후에 교도 수인과 더불어 운곡리(雲谷里)를 출발하야 우전리(于田里)를 향하시다. 우전리(于田里) 이 인태(李仁泰)라 하는 사람은 한 동리 가운데 권세가 있는 자요 특히 오교(吾敎:보천교)에 대하야 반대 무쌍 자이라. 교주가 속으로 생각하되(暗思) 이 사람을 잘 교제하면 이 동리에 거주하기 편리하겠다 하시고 개울가에 앉으사 사람을 시켜 이 인태(李仁泰)를 청해 와 초면인사후 몇 마디 주고받으시니 이 인태(李仁泰)가 흔연히 허락하고 자기의 자부(며느리) 방을 빌려 수리하야 거(居)하시게 하니 이러한 연고로 운곡리 사람이 교주의 거처를 알지 못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그 후에 김 영두(金英斗) 도금(盜金) 사건이 관청에 알려져(聽聞) 경기도 경찰부 촉탁(囑託) 박 경환(朴敬煥)이 영두의 친부 가(親父家)를 수색한 결과 4 만 3천 7백 3십 원이 발견되야 관청에 보관하다. 신 현철(申鉉喆)은 영두와 공모하고 경기인 장궁만(張弓挽)을 연락하야 태을교(太乙敎) 본부라는 간판을 경성에 걸고 당국에 무고하야 60방주(方主)와 6임까지는 몰수(沒數) 체포하고 전 조선 교도를 태을교 간판하에 귀의케 하도록 백방으로 주선하야 먼저 이 상호(李祥昊)를 체포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께서 이해 구시월경에 교명(敎名) 고천제(告天祭)를 거행하기 위하야 전년부터 그 제수용 과품(果品)을 각기 그 생산지 교인에게 미리부탁(豫託)하야 지극히 정결하게 따도록(摘取) 단속하고 백미 및 일반 곡류는 산중에 가서 전답을 새로 개간하되 농구를 전부 새것으로 매득하며 비료도 분변(糞便) 및 불결한 물(物)은 일체 금하고 흰소금(白鹽)으로 하게하며 파종 및 개간 시로부터 수확 시까지 일꾼(役丁)이 대소변 후에난 필히 깨끗이 목욕해 씻으며 침과 가래 및 일체 바르지 못한 종류가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며 밭가는 소의 분뇨도 전답 중에 방락(放落)치 못하도록 큰 빈 그릇(大空器)으로 받아(承受) 타처에 던져 버리도록(抛棄) 하며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포목도 실을 풀을 때부터 직물을 이룰 때까지 손가락 끝(指端)에 침을 섞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목욕하고 깨끗이 씻어 일체 바르지 못한 종류가 물들지 못하도록 주의하며 효복(孝服:喪服) 및 불결한 부인을 기(忌)하도록 단속하시고 양초에 사용되는 백랍(白蠟)은 교인이 적취 시(摘取時)에 반드시 목욕재계한 후 적취하도록 하며 기타 변두유기(籩豆鍮器) 및 기타 응용기구를 전부 새롭게 주조하며 솥을 익힐(熟鼎) 가옥과 절구질하는 용실(舂室)까지 전부 새로 건축하고 운곡리(雲谷里)에서 대제(大祭)를 거행하기로 경영하였더니 김 영두(金英斗)가 배반한 후에 장소난 불가불 변경이고 물품은 각지 교인처(敎人處)에 분담하였음으로 김영두 파당은 상하 40리 허(許:장소)에 촌촌이 산재하야 제수용 물품 내거(왕래)를 주목하야 교주 소재처를 조사할 예정이었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께서는 이 인태(李仁泰) 가(家)에 머무를 새 천제(天祭) 일자를 9월 24일로 정하시고 각도(各道) 정리(正理)를 독촉하사 각군(各郡) 포장(布長)을 속히 선정하야 천제(天祭)시에 빠짐없이 참석케 하라 하시고 천제장소를 황석산(黃石山)에 정망(定望:마음속으로 薦望)하시니 각 방주(方主)가 고(告)해 가로대 이곳은 죽동(竹洞)과 같은 깊은 골짜기로 좌우난 고산이 하늘과 닿고 중간에 한 길만 통하였는데 60리 사이에 다른 통로는 없고 영두의 당이 일일 감시하야 종적을 탐사하거늘 이곳에서 천제를 거행하심은 지각(知覺:깨달음)이 아니오니 다른 장소로 정함이 가하다 한 대 교주 가로대 나난 소시자천(所恃者天)이라 제군은 염려치 말라 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하루는 교주께서 침방에 홀로 머물 새 깊이 잠든(濃宿)중에 홀연히 쥐 한 마리가 손가락을 깨물거늘(嚙) 깜짝 놀라 깨어 바라보니 혈흔이 있는지라 심상(尋常:평범)하게 이를 바라보시고 다시 취침이러니 잠이 바야흐로 깊이 듬에(睡方著) 또 손가락을 깨무는지라. 깜짝 놀라 이를 바라보니 피가 흐르는 것이 마치 실(縷)과 같은지라 또 심상하게 이를 바라보시고 또 취침하시니 또 쥐가 깨무는지라 일어나 방 가운데를 바라봄에 장판(壯板)과 진흙 벽(塗壁)이 신선한대 쥐의 출입구멍도 없는지라. 교주께서 이를 생각한 즉 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징조라 하야 나로 하여금 이 방을 옮기라는 것이로다 하시고 닭이 운 뒤에 주인에게 언급치 아니하고 다른 곳에 이주하였더니 그 다음날에 이 인태(李仁泰) 가(家) 외당(外堂)에 집달리(執達吏)가 왔다고 이른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원래 이 인태가 8백 원 채무가 있는데 이 기회를 타 집달리를 불러오고 교주에게 청구하면 교주는 바야흐로 대사(大事)를 경영 중에 불가불 들어주리라 생각하고 그 아들로 하여금 채무자에게 운동하야 집 달리를 보내도록 약속함이러라. 당일에 집 달리를 외당(外堂)에 청해 들어오고 내당에 들어와 본 즉 교주가 부재한지라, 한 규숙(韓圭淑)에게 언급하고 8백원 차입금(借金)을 청구하니 규숙이 교주께 고한대 교주께서 출급(出給)하라 명하시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 경성에 동광회(東光會)가 있는데 조선인으로 경시(警視) 된 김 태식(金泰湜)이 조직한 일등 친일파이다. 김 영두(金英斗) 도금(盜金)이 발각됨으로부터 전 조선에 대주목(大注目)을 야기하야 동광회에서 생각하되 교주난 체포키 불능할 것이요, 또는 그 교인과 교재(敎財)를 우리 동광회에 부속(附屬)시키자면 교주를 체포하는 것 보담 교주를 권유하야 세상에 노출시키고 그를 이용하야 인권과 재권(財權)을 농락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야 여름사이로부터 이 교훈(李敎燻), 노 병희(盧柄熙) 2인을 파송하야 모 방주(方主)의 소개로 교주를 면회한 후 양해하기를 권유하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교주 가로대 양해를 얻어 세상에 현출(現出)하자면 대가옥이 있어야 할 터이니 죽동(竹洞) 별궁(別宮)같은 집은 매수할 수 없겠느냐. 두 사람이 가로대 달포 전에 그 집이 매도되였난대  때를 맞추어(趁時) 알지 못한 것이 한(恨)이로다. 경비난 매삭(每朔) 만 원  가량이면 되겠느냐. 두 사람이 가로대 만 원 가량이면 풍족합니다. 교주난 방주 회집(會集)시에 결의하기로 연기하였다. 동년 8월 14일에 목주(木主) 김홍규(金洪圭)가 김영두(金英斗) 자금 도난사건(盜金)으로 검거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동시에 체포인은 최 일문(崔逸文) 이 용하(李容河) 김 혁중(金赫中) 강 태규(康泰奎) 목 원익(睦源益) 고 주경(高周景) 윤 상언(尹相彦) 등이라. 그 후에 공주감옥으로 이감되야 고 주경 윤 상언은 불기소로 방면되고 그 나머지난 유죄로 판결되야 이를 불복하고 경성 복심(覆審)법원으로 상고(上告)하다. 동년 9월 초순경에 교주께서 인태(仁泰)다려 일러 가로대 나의 심신이 금월 16일을 염려하노니 그날을 주인도 특별 주의하라고 부탁하였다. 16일 청명한 새벽(淸晨)에 인태(仁泰)를 청하사 속히 사람을 보내여 양송정(養松亭)에 가서 관리의 동정을 보고 속히 돌아와 보고(回報)하게 하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인태 가로대 이미 사람을 보내었나이다 하다. 그러나 교주는 심신이 상쾌하지 못하야 아침식사를 재촉해 일찍 마친 다음에 단장(短杖)을 짚고 동구에 나서니 송 심옥(宋心沃), 한 규숙(韓圭淑) 수인이 바야흐로 아침식사중이라 채 끝내지 못하고 수행하다. 교주난 동구밖 우회하는 곳에 들어가 산기슭에 앉다. 이때에 영두(英斗) 의 부친과 동생이 정읍 경찰서에 고발하니 정읍 경찰서 형사 전 재춘(田在春)과 및 일본인 형사가 관리를 많이 거느리고 미복차림으로 허리아래 단도를 착용하고 양송 정(養松亭)에서 며칠 유숙(留宿)하다가 이날에 양송 정(養松亭) 관리도 알지 못하게 우전(于田)에 곧바로 와서(直來) 한 마을을 수색하되 지극히 정밀하고 엄하게 조사하여 장판과 천정지까지 찢어 보며 곡물포대 입(穀物叭袋)까지 단도로 삽입해 보다가 돌아간 후 전남 광주 관리가 또한 와서 수색하고 가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인태가 보낸 사람은 부모가 병환이 나서 약방에 가서 약까지 지어다 주고 오후에 바야흐로 돌아오니 이때 경관은 이미 볼일 다보고 돌아간 뒤러라. 이때에 7일 큰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워 각 방주(方主) 정리(正理) 포장(布長) 등이 외인의 지목없이 회집(會集)하게 되었고 타 제수(祭需) 물품도 무사히 이미 모두 도달하야 한 규숙(韓圭淑), 송 심옥(宋心沃)으로 하여금 제수를 익힐 솥 등에 관한 일을 일일이 감찰케 하고 홀로이 폐백용으로 가는 비단(細緞) 만여 원 가치 물품을 경성인 손주(巽主) 임 치삼(林致三)이 부담하였난대 치삼이 오히려 오지 못함으로 우려하다.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안의(安義)는 본래 산간 소읍으로 내왕인이 심하게 복잡하지 않은대 수일간에 안의 자동차 표가 80여 매가 발매됨으로 김천(金泉) 경관이 크게 의심하야 극도로 주목 중이었다. 23일 삼경 시에 임치삼이 도착해 가로대 김천역에 하차하야 물품을 자동차로 운반할 새 자동차가 중로(中路)에서 고장이 생겨 시간이 연착됨으로 정류소에서 대기(期待)하던 경관이 시간경과로 들어가 금번에난 한사람의 순경도 없이 취체(取締:단속)없이 운반해 왔으니 신의 도움이로다 하드라.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이때에 관복(官服) 몇 건이 자동차 정류소에 누락(漏落)되었는대 정류소 주인이 우전리(于田里) 주점으로 부쳐 보낸 일도 있다. 이때에 경기도 경찰부 후지모토(藤本) 고등과장은 박 경환(朴敬煥), 장 기홍(鄭基洪)을 파견해 보내고 경시(警視) 김  태식(金泰湜)은 김 교훈(金敎燻), 노 병희(盧柄熙), 이 기만(李基晩)을 파견해 보내 동시에 내참하다. 교주께서 양쪽에서 보낸 사람을 각각 불러 보시니(引見) 모두 양해하라는(註:차 교주 총독부에 現出하고 교단공개화) 권고요, 또 4만여 원 압수된 금전을 교주 인장(印章)으로 증서와 방주(方主) 1인을 대표로 한 가지 보내주면 국고로 편입치 아니하고 구하여 쓰게 된다(需用)는 의사를 표현하니 교주께서는 대제(大祭) 거행 후에 협의하기를 말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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