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홈페이지 :::


  Total : 1506 (1501 searched) , 9 / 43 pages  

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1.


<통합경전>다음 밴드에 들어가면 전체 파일 다운됩니다. 비회원 입장 가능. 다운만 받고 나와도 됩니다.
http://band.us/#!/band/61758246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1.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밀러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당시 불교, 기독교는 창씨개명을 공식화하는 친일노선을 공개화 했던 때여서 기독교의 조만식 목사마저 보천교 신도로 독립운동 군자금 전달미수사건으로 동아일보 1925년 11월 25일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보천교는 상해 김구주석의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고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에 군자금을 전달해 무기를 준비한 김좌진 장군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가 컸던 보천교 <십일전>은 압록강의 침엽수 통나무를 뗏목으로 군산항으로 가져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6백만 민족종교로 독립운동 자금 창구를 인지한 일제는 보천교 신법까지 제정해 강제해체해 경매에 부쳐 십일전 건물은 모두 뜯어져 당시 친일노선을 걸으며 조선총독부에 이쁘게 보이던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1가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합니다. 지금도 조계종에서는 조계종의 총본산인 종로 조계사 대웅전이 일제시대 보천교의 십일전을 뜯어 만든 것으로 밝히고있습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조만식 보천교 독립운동 자금 전달 미수 체포사건 동아일보 기사

차경석 교주의 차남 차용남의 1991년 1월 21일 기자 인터뷰/ “김철수(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씨도 부친께 3만원, 2만원 두차례 받았고...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등도 비밀리에 보천교 본소에 다녔으며... 송진우, 장덕수가 군자금을 비밀리에 받았고... 송진우는 당시 보천교 외교담장 차석으로 간부였다. 송진우는 당시 권총단(독립자금) 사건으로 옥고 치른 후 상해임정으로 돌아갔다.”‘물산장려운동’의 배후는 보천교였다.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 여운형, 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 안 재홍 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普天敎)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안 후상은 1918년 10월에 제주 중문 법정사에서 벌어진 항일봉기를 한일합방 이후 최초의 조직적 독립운동이라 말하고 3.1운동에 버금가는 독립운동이라 말한다. -단일 기미독립만세운동(1919) 직전인 1918년 10월에 지금의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에서 '항일 무장봉기'가 발생하였다. 한라산 중턱의 법정사(法井寺)라는 곳에 근거지를 둔 봉기대 약 500여 명은 중문리로 내려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 관헌들을 납치하였다. 불교계 승려와 보천교 24방주 조직이 깊이 관여한 이 사건은 경술국치 이후 처음 있는 조직적인 반일 항쟁이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도내(島內)에 대규모 군대를 상륙시켜 일대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조직원 수백 명이 체포, 수감되면서 보천교의 24방주 조직이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차 경석 역시 이때부터 수배의 긴 장정에 오르게 되었으며 교인 수천 명이 검거, 구속되었다. 검거된 이들의 형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일 사건으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 봉기였다. 구속된 간부 수십 명이 고문으로 죽었으며 수 십 명이 긴 수감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1년 대규모 검거 선풍: 제주도 봉기의 실체가 채 파악되기도 전인 1919년 3월, 동학계열의 주도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의 다음 수순은 보천교 조직의 해체였다. 당시 관련 자료가 이를 잘 말해준다. 드디어, 1921년 보천교에 대한 대규모 검거 선풍이 일어 수 천,수만 명의 교인이 구금, 구타당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각 일간지에서는 '당국에서는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재발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도하였다. 충남의 한 간부 김홍규의 집 마루 밑에서 지폐와 은화를 합쳐 약 10만 7천여 원을 넣은 항아리가 발각되었다.(1905년 경부선 건설비용 20만원, 운암댐 기초석에 1925년 운암댐 건설비가 205만원)일경은 압수와 함께 곧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최도홍, 육원익, 고편상 등 교 간부 수십 명이 구속되었으며, 구속된 이들 모두는 반란죄로 처벌되었다. 그리고 그 돈 항아리와 관련해 일경은 이렇게 밝혔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계된 돈으로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교도들로부터 모금한 자금이라고. 이외, 강원도 간부 이 주범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특히, 강원도 양양의 간부 김 홍석은 독립단을 조직하여 봉기를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 구금되기도 하였다. 경북 지방에서도 수 천 명의 교인들이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2년 전남 고흥 교도 피살사건: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교인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고문 또는 구타로 이어졌다. 따라서 조직의 활동은 위축되었지만 비밀 집회를 통하여 조직운동(국권회복을 위한 제 활동)을 더욱 공공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1.

다음 문서는 일제하 600만 보천교 정사인 보천교 연혁사로 범증산계 통합경전에 실린 본문 내용으로 이 곳에 처음 밝힙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에서 조선통치 백서 3부를 간행했는데 당시 2000만 인구에 비밀교단 보천교 6백 만이라 보고하고 있으며 이 기록은 미 국방성 비밀 보고서와 일치합니다. 당시 불교와 함께 친일정책의 창씨개명을 공식화 한 기독교는 불과 20만이던 시절입니다.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포교 4 년 임자년 ( 道紀 42, 1912) 에 부안인 이 치복 ( 李致福 ), 채 사윤 ( 蔡士允 ) 이 문하에 배종 ( 陪從 ) 하여 포교에 노력하다 . 포교 5 년 계축년 ( 道紀 43, 1913) 금구인 김 형렬이 내알하여 문하에 원종 ( 願從 ) 하다 . 교인이 다수 출입함을 견 ( 見 ) 하고 사욕 ( 私慾 ) 을 품어 ( 潛懷 ) 분수를 알지 못하고 배사 ( 背師 ) 독립코저 하여 수개월 후에 교도 몇몇 인을 유인하여 탈퇴하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포교 6 년 갑인년 ( 道紀 44, 1914) 매월 삭망에 교주께옵서 창생을 위하사 재계목욕하시고 천지에 치성하시니 이로부터 성명 ( 聲名 ) 이 원근에 분명하게 나타나다 . 동년 5 월 초에 본리 ( 대흥리 ) 에 거주하는 헌병 보조원 신 성학 ( 申成學 ) 과 단곡리 ( 丹谷里 ) 장 성원 ( 張成元 ) 양인이 소장에게 무고하되 대흥리 차 모 ( 某 ) 는 신도묘술 ( 神道妙術 ) 이 있어 공중을 향하여 금전을 부르면 청구하는대로 떨어져 내리고 대사상 ( 大思想 ) 이 있어 매월 삭망 ( 朔望 : 음력 초하루 ) 마다 음식을 풍성히 준비하고 부자를 회집 ( 會集 ) 하니 매월 14 일과 그믐날 밤에 그 집에 가보면 실증 ( 實證 ) 이 있으리라 하니 정읍 , 고부 , 천원 3 거리 4 처 헌병이 14 일 밤에 연합하여 본소를 포위하고 동정을 정찰한 즉 등촉이 빛이 없고 인적이 쓸쓸 ( 寥寥 ) 한지라 마침 그날 밤에 본소에서 치성제 ( 致誠祭 ) 를 거행치 아니하였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헌병이 본소에 들어가 가족전부와 일하는 장정 ( 役丁 ) 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씩 각각 끌고 가 ( 曳去 ) 난타 신문하다가 교주와 교주의 친동생 윤덕 ( 輪德 ) 을 붙잡아 교주는 정읍에 구금하였다가 그 다음날에 석방하고 윤덕은 고부에 구금하였다가 9 일 만에 석방하다 . 차후에도 양인의 무고로 인하여 헌병소장이 혹 심야에 수색하고 신문한 적이 누차 있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포교 7 년 을묘년 ( 道紀 45, 1915) 앞서 금구인 김 송환 ( 金松煥 ) 이 그 처와 더불어 와서 문하에 의탁하기를 청하거늘 교주께서 허락하였더니 그 후에 차차 그 부모와 가족 전부가 이사해 와 일가족과 같이 동거할 새 여름 간에 그 처가 태아가 죽음으로 인하여 사경에 이르렀는데 교주께서 의약으로 극력 치료하여 소생된 일도 있다 . 그런데 송환은 포교한다 칭하고 외출하였다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옷가지 및 호화사치품을 다수 사가지고 오니 그 행동은 가증하나 그 성질이 본시 악독한 줄을 알기로 어찌할 바 없어 1 년간 경과하다가 교주도 역시 재산이 없는지라 그 허다 권솔 ( 가느린 식솔 ) 을 종시 입히고 먹일 수 없어 김제군 유력자 나 기중 ( 羅基中 ) 에게 위탁하여 농토와 가옥을 대부 ( 貸付 ) 하라 하니 송환은 김제로 이사하여 좋은 집에 놀며 먹고 입는 것을 원하다가 수백원의 손해를 끼쳐주었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하루는 그 부친으로 하여금 교주에게 서찰 ( 편지 ) 을 전하였는데 그 서신의 뜻은 금전 천원을 지급해 주기를 허락하라 . 만일 주지 아니하면 제도 ( 制度 ) 와 빈객 ( 賓客 : 손님 ) 의 출입함을 내가 익히 아는 바 수만 원의 손해를 당하도록 하리니 돈 천원을 애석치 말고 이번 보낸 편에 부쳐 보내라 하였더라 . 교주께서 그 부친에게 일러 말하기를 부친이 되어 자식의 서찰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체면에 손상될 일이요 , 또한 금전을 호의로 청구하면 하사는 못해도 혹 지급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위하공갈 ( 威嚇恐喝 : 위협공갈 ) 하는 동시에는 비록 산더미같이 쌓아 놓았을지라도 한 푼도 주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 . 내 명 ( 命 ) 이 하날에 있거든 어느 놈이 감히 망언을 발설하느냐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그 부 ( 父 ) 가 변명 ( 發明 ) 해 말하기를 내가 본대 그와 같은 서신인 줄 알았으면 가지고 올 리가 없었지마는 알지 못함으로 가져왔더니 이런 미안함이 없다 하고 석양이 서산에 걸렸는데 발정 ( 發程 : 출발 ) 하거늘 교주께서 만류 부득하여 엽전 한냥을 노비까지 주어 보내니라 . 송환은 그 부친의 회보 ( 回報 ) 를 듣고 전주 헌병 대장소 ( 大將所 ) 에 직접 들어가 고해 말하기를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거주하는 차 모 ( 某 ) 의 행한 바를 헌병장이 아느냐 . 멀지 않아 조선을 독립하야 자기가 황제된다 하고 농촌 우민 ( 愚民 ) 을 유인하야 금전을 사기하며 음모를 꾀하나 ( 圖得 ) 정읍분대와 천원 ( 川原 ) 파견소는 다 그 매수한 바 되야 별일을 행하드래도 불문에 부칠 터이니 헌병대장이 만일 일찍 제거하지 않으면 정부위험의 근심이 있으리라 하니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헌병대장이 이를 듣고 크게 놀라 즉시에 정읍 분대장에게 공문을 발송하니 분대장이 공문을 접수하야 통변 ( 通辯 : 통역 ) 도 알지 못하게 큰 말을 타고 천원 ( 川原 ) 에 직접 와서 소장 ( 所長 ) 과 보조원을 소집하야 신발을 단속하라 하고 공문을 출시 ( 出示 : 제시 ) 하야 준엄하게 꾸짖고 말하되 너의 관하 ( 管下 ) 에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타처에서 먼저 발각하야 공문이 왔으니 너희들은 어떻게 된 자인가 하고 인솔하여 와서 본소 ( 대흥리 ) 를 수색하며 교주에게 질문하되 실증이 없으므로 무사히 돌아가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이해 ( 道紀 45, 1915) 에 장성인 ( 長成人 ) 김 형국 ( 金亨國 ) 이 내알하다 . 포교 8 년 병진 ( 道紀 46, 1916) 이라 이 치복 ( 李致福 ), 김 형국 ( 金亨國 ), 채 사윤 ( 蔡士允 ) 이 모두 탐욕스런 사람이라 교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많음을 보고 망령된 생각이 생겨 스스로 주인 될 길을 도모하다가 성공치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다 . 이해 가을로부터 문 정삼 ( 文正三 ), 김 형규 ( 金炯奎 ) 두 사람이 본소에 간부로 업무보다 . 동년 11 월 28 일 계사 ( 즉 동지 ) 에 교체 ( 敎体 ) 조직화를 시작할 새 24 인을 선정하야 천지에 이름을 고해 서약하고 24 방 ( 方 ) 이름으로 인장 ( 印章 : 도장 ) 을 하사 ( 頒給 ) 하사 교무 ( 敎務 ) 를 분장 ( 分掌 : 나누어 처리 ) 하니 선임된 사람은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채 규일 ( 蔡奎壹 ) 김 홍규 ( 金烘圭 ) 채 선묵 ( 蔡善黙 ) 조 만원 ( 趙晩元 ) 최 일문 ( 崔逸文 ) 김 명옥 ( 金明玉 ) 한 영진 ( 韓永鎭 ) 송 영대 ( 宋永大 ) 송 명희 ( 宋明熙 ) 채 규철 ( 蔡奎喆 ) 이 원유 ( 李元有 ) 박 종식 ( 朴鍾植 ) 문 정삼 ( 文正三 ) 유 종상 ( 柳鍾相 ) 박 종하 ( 朴鍾河 ) 김 형규 ( 金炯奎 ) 김 영두 ( 金永斗 ) 김 천종 ( 金千鍾 ) 신 기섭 ( 申其燮 ) 이 기호 ( 李基浩 ) 김 혁중 ( 金爀中 ) 이 두현 ( 李斗鉉 ) 이 용하 ( 李容河 ) 김 철환 ( 金喆煥 ) 이요 . 이 상호 ( 李祥昊 ) 백 윤기 ( 白潤基 ) 이 치상 ( 李致祥 ) 3 인은 당분간 선임되지 못하얏으나 24 인에게 부속치 말고 단독으로 교무를 집행하라 하시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포교 9 년 정사 ( 道紀 47, 1917) 라 정월에 경북 고령군 사람 김 정곤 ( 金正坤 ) 김 병희 ( 金昞熙 ) 와 경남 합천군 사람 이 영조 ( 李英兆 ) 3 인이 뜬소문을 듣고 와서 교주에게 심복하고 수일 머물고 귀가할 즈음에 교주에게 청하여 가로대 경상남북도에 교인은 많으오나 아직 사문 ( 師門 ) 에 출입이 없사와 진리를 알지 못하오나 우리 3 인이 돌아가 듣고 본 바로 말로 설유 ( 說諭 : 타이름 ) 할지라도 이웃무당 ( 隣巫 ) 과 같아도 우리교인은 망동치 말게 하라 하시고 남북도에 집리 ( 執理 : 재무책임자 ) 2 인을 택정하사 천지에 고축 ( 告祝 ) 하시고 단체의 재무 ( 敎財 ) 를 믿고 맡기시니 남집리 ( 南執理 ) 는 채 규철 ( 蔡奎喆 ) 이오 , 북집리 ( 北執理 ) 는 김 홍규 ( 金烘圭 ) 가 피임되고 남북도 교인을 단속하고 설유 ( 說諭 ) 하는 책임은 김형규 ( 金炯奎 ) 문 정삼 ( 文正三 ) 2 인에게 위임하시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또 친동생 윤칠 ( 輪七 ) 을 부르사 경계해 가로대 군 ( 君 ) 은 성품이 너무 과격한지라 사람의 성격 ( 性 ) 이 너무 강하면 수한 ( 壽限 ) 이 부족하나니 군은 반드시 스스로 관대하고 스스로 용서하여 타일 ( 他日 ) 내가 돌아올 시에 유감이 없도록 하난 것이 군의 도리라 하시고 또 친동생 윤덕 ( 輪德 ) 을 부르사 경계해 가로대 지금으로부터 집안일은 군 ( 君 ) 에게 전적으로 맡기노니 잘 처리하라 하시고 겨울 10 월 초 4 일 갑자에 출발하시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김 형규 ( 金炯奎 ) 가 본래 탐욕한 사람으로 교주 외유함을 타서 위엄있는 명령을 임의로 행하며 금전을 남용하고 매사에 필히 교주가 친히 맡긴 것 ( 親託 ) 이라 하니 타인은 감히 항의치 못하되 문 정삼 ( 文正三 ) 이 불평의 마음을 품고 간간 충돌이 유 ( 有 ) 하다 . 한 영진 ( 韓永鎭 ), 김 철환 ( 金喆煥 ) 2 인은 채 규일 ( 蔡奎壹 ) 에게 불평이 생겨 탈퇴하다 . 채 규일은 전남 무안군 비금면 사람이라 , 이때 남집리는 채 규철 ( 蔡奎喆 ) 이나 교주 출발 후에 집리 ( 執理 : 재무책임자 ) 실권 ( 內容權 ) 은 채 규일 ( 蔡奎壹 ) 이 점령한지라 상기 ( 右 ) 2 인은 선천적 습관으로 지덕 ( 地德 ) 이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섬사람에게 지휘를 받을 수 없다는 까닭이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동년 12 월에 교주께서 장전 ( 長箭 ) 항에 도착하시니 한 광인이 와서 물어 가로대 선생이 어찌하여 여기에 오셨소 . 교주 답해 가로대 외국을 유람코저 하노라 그 사람이 가로대 본댁으로 환귀하야 송판과 철정 ( 鐵釘 ) 으로 단단히 봉쇄하고 나와 공히 외국에 들어가자 이르거늘 교주께서 이 말을 이상히 들으사 경성에 돌아가시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포교 10 년 무오 ( 道紀 48, 1918) 라 정월 초 4 일에 조만원 ( 趙晩元 ) 김 경언 ( 金敬彦 ) 2 인으로 하여금 문 정삼 ( 文正三 ) 채 규철 ( 蔡奎喆 ) 차 윤덕 ( 車輪德 ) 김 형규 ( 金炯奎 ) 김 홍규 ( 金洪圭 ) 임 효선 ( 林孝善 ) 백 윤기 ( 白潤基 ) 김 혁중 ( 金赫中 ) 유 복일 ( 柳福壹 ) 제인 ( 諸人 ) 을 부르시니 초 5 일에 제인 ( 諸人 ) 이 경성에 갈 새 김 형규 ( 金炯奎 ) 가 무리지은 사람이 함께 옴을 보고 그 죄를 스스로 숙지하야 교주를 보지 ( 拜見 ) 아니하고 야반도주하니 많은 사람 ( 衆人 ) 이 교주에게 형규의 사실을 고하다 . 형규난 이로 인하야 스스로 물러나니라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동년 11 월에 제주교인이 성금을 거두어 ( 收合 ) 면화 나팔 ( 棉花叭 ) 에 동봉하야 목포항에 하륙하다가 경관에게 발견되야 조사한 결과에 교금 ( 敎金 ) 으로 판명된지라 . 경관이 박 종하 ( 朴鍾河 ) 를 붙잡아 엄중 취조하니 박종하의 구술로 인하야 방주 ( 方主 ) 급 교인 중 두령자가 다수 체포되다 . 이때 수금된 사람은 박 종하 , 차 윤칠 , 신 기섭 , 채 규철 , 채 선묵 , 송 영대 , 이 원유 , 이 기호 , 손 길언 , 송 범규 , 이 극선 , 박 성배 , 박 선일 , 조 학우 , 김 문진이라 . 경관의 엄한 형과 고문은 가히 형언하지 못함이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그 중 윤칠은 더욱이 교주의 친동생이므로 교주의 거처를 조사함에 형독 ( 刑毒 ) 이 더욱 심하고 채 규철은 남도 집리 ( 執理 : 재무책임자 ) 이므로 금전의 용처를 조사함에 악형이 무수하야 죽음에 이른 지 여러 회 ( 回 ) 오 , 감옥 4 면에 귀곡성이 어지러히 일어난지라 마침내 실증이 없음으로 12 월 그믐경에 석방하였으나 교주 체포령은 각별 엄중하다 . 김 문진 ( 金文振 ) 은 출옥 후 몇 달에 형독으로 사망하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포교 11 년 기미 ( 道紀 49, 1919) 라 . 정월에 교주가 금강산으로부터 경성에 돌아 오사 송대선 ( 宋大善 ) 으로 하여금 차 윤덕 김 홍규 채 규철을 명하여 부르시니 이때에 채 규철은 목포 형독으로 와병 중이오 , 김 홍규난 경남지방에 피신중임으로 차 윤덕이 홀로가서 배알하니 교주 가로대 나 한사람의 몸으로 화가 여러 사람에게 미쳤노라 이르니 심히 불안한 마음이로다 . 나 역시 북쪽 유람을 마쳤으니 장차 남쪽을 유람할 뿐이라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그러나 인산 ( 因山 : 고종 國葬 , 19 년 고종 국장으로 3.1 운동이 일어나고 26 년 순종 국장으로 6.10 만세 일어남 ) 이 멀지 아니하니 내 부조 ( 父祖 ) 이상으로부터 수백 년간 국민이오 , 또 영결식 날이 몇 날 여지가 없는지라 즉 나 또한 인산 ( 因山 ) 의 발인을 보고 고군 ( 孤君 : 고종 ) 의 영혼을 위로해 송별하고 곧바로 향남방해 출발할 것을 작정할 뿐이라 하시고 발인 후 곧 여정에 오르사 경북 봉화 등지에 가시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동년 ( 道紀 49, 1919) 4 월에 송 대선 ( 宋大善 ) 으로 하여금 채 규일 ( 蔡奎壹 ) 김 홍규 ( 金洪圭 ) 를 명해 부르사 말씀하시기를 바야흐로 지금 세상사가 위험하니 군 ( 君 ) 등은 교도를 경계하야 망동치 못하게 하라 하시고 경고문을 지으사 부여하시며 가로대 이글을 교도에게 광포해 널리 알리라 하시니 그 글에 가로대 『 무릇 천지의 대운은 ( 夫天地之大運 ) 그 사람이 아니면 명하지 않고 ( 非其人不命 ) 인간의 대업은 ( 人間之大業 ) 그 명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노니 ( 非其命不成 ) 사람은 그 사람이 있고 ( 人有其人 ) 운에도 그 운이 있어 ( 運有其運 ) 그의 행하는 바 ( 其之所謂 ) 또한 그 때가 있을 뿐이니 ( 亦有其時 ) 이 같은 대창 ( 大創 ) 을 어찌 쉽사리 말하리오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오호라 시대마다의 허다한 영웅이 모두 그 마음이 없음이 없고 그 강성함을 탐하지 않음이 없음이니 그 뜻을 얻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시종일관 끝까지 미치나니 유일무이한 그 하나가 마침내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니 가로대 덕 ( 德 ) 이라 . 덕이란 만 생명의 근원이요 만사의 성질이라 , 그런고로 자고로 덕에 순응하는 성웅은 흥하고 덕에 거스르는 자는 망하였노니 , 흥망의 경계 ( 구분 ) 는 그 덕이 있는지 없는지 존부존 여하를 돌아볼 뿐이라 . 그러나 덕은 도에 있고 ( 德在於道 ) 조화는 덕에 있으니 ( 化在於德 ) 도도 없고 덕도 없이 태어난 자는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 도가 있으면 덕이 있고 덕이 있으면 조화가 있으니 이는 천리의 확고한 인사 ( 人事 ) 의 원기 ( 元氣 ) 라 .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대장부 일거에 나쁜 소행 ( 所業 ) 을 버리는 것은 무엇으로써 하는 것인가 . 그러므로 불가불 도덕으로써 하는 것이니라 . 오직 내가 가르치는 바는 본래 옛 성인이 서로 전한 도덕이라 . 물이 스스로 솟아나오는 자정원 ( 自井源 ) 이 사해에 가득차니 그의 광대함을 무엇으로 감히 말하리오 . 무릇 사람이 도 ( 道 ) 안에 존재함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과 같으며 ( 人之爭如魚之在水 ) 물을 얻으면 살고 ( 得水而生 ) 물을 잃으면 죽나니 ( 失水而死 ) 가련 창생 큰 연못 속의 물고기가 마치 큰 가뭄의 목마른 재앙을 만난 것 같아서 그 형세와 사정이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니 이는 주인인 우물 ( 井主 ) 이 이미 통제의 권력이 있음이 되노라 . 제군이 만약 조그마한 세력도 이끌 힘이 없을진대 창생을 구제하는 기운을 무엇으로 달성하리오 . 오직 나의 제군은 따로 전일 ( 前日 ) 의 힘을 더 ( 加 ) 하여 죽음에 직면한 대중을 구제하기를 산과 바다에 앙축 ( 仰祝 : 우러러 빔 ) 하노라 . 』

天長地久 申命無窮 安原田 譯

 

종통 인사문제 6,7,8 월생 부연설명


http://blog.daum.net/cheramia/15691126


종통 진주도수 *1954 갑오생 안경전이 매듭짓는 말복지도자 인물이 아니고 과도기 중복지도자인 천지공사 이유 


http://blog.daum.net/cheramia/15691200


종통1.천지공사의 최종 결론- 문왕추수 세살림 정체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8aIN&articleno=15691103&admin=


종통2. 천지공사의 최종 결론- 문왕추수 세살림 정체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8aIN&articleno=15691104&categoryId=0®dt=20161016125706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1221    배가 따뜻해야 장수...  안원전   2017/04/18  1064
1220    명리학대가 제산 박재현  안원전   2017/04/18  1307
1219    궁팔십 달팔십~~  안원전   2017/04/18  881
1218    프랑스 막달라 마리아의 영지주의 종통제거 비밀과 임제록의 본질  안원전   2017/04/10  1263
1217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무구광 동자에게의 수기  안원전   2017/04/01  1352
1216    중국사료에 나타난 東夷 고조선의 실체 “동방문화 뿌리는 漢族 아닌 韓族”-심백강  안원전   2017/03/23  966
1215     (보천교의 독립운동)함석태와 강우규, 그리고 대동단-신채호 부인 박자혜는 보천교 '부인 선포사' 단원  안원전   2017/03/17  1521
1214    천지설위 로 드러난 역의비밀~정역~~  안원전   2017/03/15  999
1213    중화경 정체와 이효진 번역 <중화경> 서문  안원전   2017/03/15  1024
1212    성경신~ 진심을 다하여야~~  안원전   2017/03/13  878
1211    ◎원평에서 의통제작 후 20년 대휴게기 선포와 이상호에 대한 성도들 반응  안원전   2017/03/05  1121
1210    ◎6.25 피난시 혼사시켜준 이정립 부부와 한강을 함께 넘은 젊은 總師首  안원전   2017/03/05  1070
1209    이정립이 왜곡한 <증산교사>의 조직은 허구, 젊은 總師首가 직접 조직한 실체  안원전   2017/03/05  1263
1208    교주제도가 아닌 목화토금수 방주제도로 운영한 8.15 해방이후 증산교 대법사  안원전   2017/03/05  908
1207    숙구지 문왕 추수사명 초,중,말복 세살림 종통의 핵심잡기  안원전   2017/03/03  1316
1206    ◎이상호 정립형제 2변 운산 총사수님 조직 접수 및 청부 살해 기도 내막  안원전   2017/03/05  1016
1205    보천교 기관지 보광의 폐간은 이 성영 스스로 <증산교사>에서 차교주에 불만한 자신이 했다고 고백  안원전   2017/03/05  972
1204    안운산安雲山 성도사聖道師님 보천교와 풍수지리 말씀  안원전   2017/03/02  898
1203    보천교 역사의 가장 큰 사건-청음 이상호, 남주 이성영(정립)의 죄악  안원전   2017/03/02  808
1202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10.  안원전   2017/02/28  1323
1201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9.  안원전   2017/02/28  1069
1200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8.  안원전   2017/02/28  1009
1199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7.  안원전   2017/02/28  1112
1198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6.  안원전   2017/02/28  978
1197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5.  안원전   2017/02/28  996
1196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4.  안원전   2017/02/28  915
1195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3.  안원전   2017/02/28  919
1194    <보천교 연혁사(普天敎 沿革史)>2.  안원전   2017/02/28  995
1193    <선정원경>이 전하는 계묘년(1903) 상제님과 곤존 태모 고수님과의 첫 만나심의 기록  안원전   2017/02/28  932
   < 보천교 연혁사 ( 普天敎 沿革史 )> 1.  안원전   2017/02/28  1059
1191    말복은 말타는 복이 아니고 금화교역의 말복  안원전   2017/02/20  910
1190    정역과 증산도  안원전   2017/02/20  1006
1189    수지지어사마소와 사마염으로 자처하는 중복책임자  안원전   2017/02/15  1170
1188    ‘천상천하불변심 안○○(天上天下不變心 安○○)’  안원전   2017/02/14  997
1187    2017 붉은닭이 소리치는 대망의 정유년 ~~~  안원전   2017/01/10  952

[1][2][3][4][5][6][7][8] 9 [10]..[43] [NEXT]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