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홈페이지 :::


  Total : 2097 (2092 searched) , 6 / 60 pages  

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탄허스님 부친 보천교 간부 김홍규의 독립운동자금 규모
불교계 법보신문에 공개된 탄허스님 부친 보천교 간부 김홍규의 독립운동자금 규모



*관련글 보천교 독립운동자금 안원전 담론Click here!

탄허 대선사      





 1983년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의 방산굴. 제자가 막 임종을 앞둔 스승에게 물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그럼, 여여하지.”

 “마지막으로 한 말씀 남겨 주십시오.”

 “할 말이 하나도 없어.”



 이날, 탄허(呑虛)는 이렇게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접었다. 화엄학을 집대성하여 수록한 금자탑이라 평가를 받는 `신화엄경합론(新華嚴經合論)' 을 출간하는 등 많은 저술과 번역으로 대위업을 이룬 그가 할 말이 하나도 없다고 한 까닭이라니! 이미 할 말을 다 마쳤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말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후학들이 말에 떨어져 버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배려였을까. 이는 마치 `나는 이제까지 한 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는 부처님의 열반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이니, 탄허가 남기고 간 70여년의 살림살이가 간단치 않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라 할 것이었다.



 1934년 초가을 어느날, 이제 막 갓스물을 넘긴 듯한 한 잘 생긴 청년이 삿갓을 눌러쓴 채 부지런히 오대산으로 올랐다. 이미 오랫동안 서신을 통해 문답을 나누어 왔지만 한암화상을 찾아가는 청년 김탁(金鐸 : 탄허의 속명)의 표정엔 약간의 긴장감마저 배어 나왔다. 오대산에 오기 이전에 이미 한암화상에게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으니 도를 구하는 바른 지침을 알려 달라는 서신을 보냈고, 또 자상한 답신을 받은 터였지만 사랑하는 처자식을 버리고 산문을 향하는 마음이 어찌 평정할 수가 있으리. 청년은 잠시 후 있을 화상과의 만남을 위해 답신 내용을 가만히 떠올렸다.


 “장년의 호걸스러운 기운이 넘쳐서 업을 지음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도 모를 때에 능히 장부의 뜻을 세워 위없는 도를 배우고자 하니 숙세(宿世)에 심은 선근(善根)이 깊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으리오. 축하하고 축하하노라. 그러나 도가 본래 천진하면 방소(方所)가 없어서 실로 가히 배울 게 없다. 만일 도를 배운다는 생각이 있다면 문득 도를 미(迷)함이 되나니, 다만 그 사람의 한 생각 진실됨에 있을 뿐이다.”

 이미 출가 이전에 부친으로부터 한문학(漢文學)의 전 과정을 배워 마쳤고, 기호학파의 맥을 이은 토정의 후예 이극종 선생으로부터 유학 및 도교학을 수학, 학문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나 있었지만 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순간 가슴은 설렘으로 몹시 두근거렸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던 청년은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듯 다시 화상의 답신 내용을 떠올렸다.



 “반드시 시끄럽다고 고요한 것을 구하거나, 속됨을 버리고 참됨을 향하지 말지니라. 매양 시끄러운 데서 고요함을 구하고 속됨 속에서 참됨을 찾아 구하고 찾는 것이 가히 구하고 찾음 없는데 도달하면, 시끄러움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요, 고요함이 고요한 것이 아니며, 속됨이 속된 것이 아니요, 참됨도 참된 것이 아니니라. 부르면 꺾어지고 고함 지르면 끊어지느니라. 이러한 시절을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른바 한 사람이 허(虛)를 전함에 만 사람이 실(實)을 전하는 도리니라. 간절히 바라노니, 잘못 알지 말지어다.”


 당대의 선지식 한암화상과 청년 탄허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나눈 3년에 걸친 서신 교환,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이상적인 사제 관계의 기틀을 다진 것이었으니 이날 한암과 탄허의 해후는 한국불교사에 기록될 하나의 서건이라 할 것이었다.

 사실 탄허는 불문(佛門)의 도(道)를 공부하는데 짧으면 3년 길어야 5년이라는 생각으로 오대산에 찾아 들었다. 그러나 한암화상의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영영 탈속의 길을 걸었던 것이니, 탄허라고 하는 한국 현대불교사의 거목은 한암이라는 거대한 그늘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탄허부친 보천교 간부(증산도 60방주 중 1인) 김홍규 독립운동 자금 규모를 밝힌 부분

10만원은 천문학적인 거액, 그 당시 건설된 경부선 철도의 총 공사비가 20만원

 

탄허는 전라도 김제군 만경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김홍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홍규씨는 독립군에게 수십만원의 자금을 대 주었을 정도로 당대의 부호. 그러나 10만원의 독립자금을 추가로 전달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1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전북 김제군 만경면에 사는 김홍규가 10만원의 독립자금을 전달하려다가 발각됐다.”고 당시의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당시의 10만원은 천문학적인 거액. 그 당시 건설된 경부선 철도의 총 공사비가 20만원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탄허는 비용이 없어 출판을 하지 못하고 있던 신화엄경합론 원고를 6000만엔에 팔라는 일본 불교계의 제안을 `출판을 못하더라도 일본인에게 원고를 팔지 않는다'고 단호히 거절을 했는데, 이런 배경에는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1921년 10. 29일자 동아일보 "10만원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상해로 보내려 했다"는 등 차경석 보천교 교주를 독립운동의 두목으로 대서특필해 보도.
*1921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 "육군참위출신 김홍식 백담구와 상의해 수만의 교도와 수백원의 돈을 모아 독립운동을 일으키다 발각 체포된 기사.
*"장덕수,안재홍,신석우 등 보천교 비밀교도.보천교에 가입한 분들 가운데 당시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많았다. 당시 조선인으로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수주 변영로, 동아일보를 인촌과 함께 만든 고하 송진우, 4.19직후 과도정부 수반을 지낸 허정, 해방정국 주역중 한사람인 안재홍,백관수 등 전라도 인물은 물론이고 당시 독립을 열망했던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직.간접적으로 보천교와 인연을 맺은 비밀교도들이었다.그러나 상해 임정과 독립군에 군자금을 보낸 사건들로 보천교가 계속 탄압과 조사를 받았고 교도들이 수없이 가택수색을 당하던 시절이라 보호차원에서 이들의 명단을 철저하게 숨긴 것이다. 일제때 보천교만큼 투철한 항일의지를 갖고 투쟁한 종교가 없다는 사실이 미구에 밝혀질 것이다. 결국 일제가 보천교를 놔두고는 조선을 통치할 수 없어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박살낸 것이다. 국내에서 친일하지않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월곡 차경석 보천교 교주 아들 차용남 증언)

 탄허는 출가를 한 후 3년 동안 일체의 말을 하지 않는 묵언정진에 들어갔다. 실로 세속의 모든 악습을 깨끗이 떨쳐 버리고 불제자로서 거듭나는 피나는 수행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3년간의 묵언수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그는 15년 동안 한암화상을 모시고 오대산 상원사에 머물며 불교내전(佛敎內典)과 선학(禪學)의 일체를 수학했다. `이미 다 배우고 들어와 더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소리를 들었을 만큼 한학의 기초가 튼튼했고, 또 천재라고 불릴 만큼 워낙 영리했던 터라 공부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한암화상이 이를 크게 기뻐했을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 `한암일발록(漢巖一鉢錄)'에 실린 한암의 서신 내용은 화상의 탄허를 대하는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보내온 글을 두 번 세 번 읽어 보니 참으로 좋은 일단의 문장이요, 필법이라. 구 학문이 파괴되는 때를 당해서 그 문장의 기권(機權)과 의미가 어찌나도 부처님 글처럼 매력이 넘치던지 먼저 보내온 글과 함께 산중의 보장(寶藏)으로 여기겠노라. 공(公)의 재주와 덕행은 비록 옛 성현이 나오더라도 반드시 찬미하여 마지않을 것이니 있어도 없는 듯하고, 차 있어도 비어 있는 듯이 어느 누가 그 고풍(高風)을 경앙(景仰)하지 않겠는가.”


 한암화상의 탄허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대단했다. 평소에 탄허를 일러 `나의 아난'이라고 칭찬을 하곤 했다. 강의를 할 때에도 탄허를 내세워 강의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뒤에 앉아 증명을 하거나 논의가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문하에 보문(普門), 난암(暖庵)과 같은 지행과 학덕이 뛰어난 제자가 있었지만, 화상은 주저하지 않고 탄허에게 자신의 법을 전했다. 이를 두고 주위에서 `한암화상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는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었지만 화상은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문이 파계사에서 요절(夭折)을 하고, 난암은 일본으로 건너가 조총련의 두목이 되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한암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세속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탄허는 한암의 유촉을 받아 역경 작업에 전념했다.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는 일은 유불도(儒佛道)에 통달해 있지 않으면 누구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전례가 없던 초유의 대역사. 이 때부터 탄허의 생활은 눈물겨운 고행과 수행의 연속이었다. 초저녁이라고 할 수 있는 9시에 잠을 자고 자정에 일어나 정진을 하고 원고를 작성하는 초인적인 작업을 계속했다. 절 살림도 어려워 옥수수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원고지와 잉크가 떨어지면 탁발을 해야 했다. 방대한 작업이었기에 원고가 완성되더라도 언제 출판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난했지만 잉크는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외제를 사용했다.

 번역 작업에만 꼬박 8년이 걸리는 등 약 17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신화엄경합론 47권은 세상에 빛을 보았다. 경(經) 120권, 논(論) 150권 등 도합 270권의 원본을 옮겨 한데 엮은 것인데, 그 원고매수가 무려 60,000장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화엄의 집대성'이라는 감히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은 해낸 것이다. 신화엄경합론의 번역사업의 공로로 탄허는 제3회 인촌문화상을 받았다. 197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그 의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오늘 김탄허 스님은 화엄경에 전심전력을 바쳤던 만큼 그 미치는 영향과 여운은 헛되지 않아 많은 대중사회로 하여금 화엄공덕의 우로(雨露)에 젖도록 한다는 것이 앞으로 국가 사회를 정화시키고 기강을 바로 잡는데 있어 이 이상의 올바른 발원과 유종의 미가 없을 줄 안다.”


 1953년 강원도 종무원 원장과 월정사 조실을 맡은 스님은 오대산에 수도원을 세우고 동국대 대학선원 및 대전 자광사 등지를 오가며 수행과 공부에 전념했다.

 유불선에 통달을 한데다가 치열한 수행이 바탕이 돼 거침이 없는 경계를 이룬 탄허가 주석하는 오대산 월정사에 많은 학자와 언론인, 수행자들이 수시로 찾아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수행자와 학인들이 찾아와 법을 묻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의 개인적인 세계관이나 교단의 미래, 나라의 현실과 장래문제를 묻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동양사상은 물론이고 기독교 등 서양의 사상까지 두루 섭렵한데서 나오는 특유의 예지적 통찰은 피동적이면서 피해망상적이었던 우리의 역사 인식에 새로운 긍정과 용기를 불어 넣는 역할을 했다. 오대산 깊은 산자락에 주석하였지만 우주의 운행을 꿰뚫는 격물치지의 혜안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의 원동력을 제공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탄허가 입적하자 정부는 국민문화훈장 은관장을 추서했으니, 고인이 훈장을 받기로는 그가 처음이었다.

 최고의 불교 경전인 화엄을 통달할 정도로 당대의 최고 불교학자이자, 노장(老莊)의 권위자였던 탄허에게 수많은 일화가 있었음은 당연한 일, 그러나 그가 무엇이든 남기기를 꺼려했던 터라 그 재미있고 교훈적인 일화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거나 남아있지 않다.

 왜 그 혼자 저서나 기록을 남기지 않느냐는 주위의 물음에 탄허는 늘 `공자도 자신의 말을 남기지 않았고(孔子無言), 부처님도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釋迦無說)'는 점을 들어, 옛 성현과 철인들이 다 남긴 말들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속이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물리치곤 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저서 한 권 남기지 않았다.

 결국 탄허의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그의 살림살이를 지켜 보았던 이들에게서 듣는 단편적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토대로 일상에서 문득문득 보였던 그의 진면목을 미루어 가늠해 볼 밖에 다른 수단이 없는 것이다.
  
 출가하기 전 결혼한 탄허의 아내는 토정 이지함의 16대 종손으로 학문과 덕망을 고루 갖춘 뼈대있는 선비 집안의 규수였다. 어릴 적 남자 복장을 하고 글방에 다니며 탄허보다 먼저 중국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뗐을 정도로 한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탄허도 출가 전의 자신의 내자(內子)를 일러 `부부라기 보다는 훌륭한 수학도반'으로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남편인 탄허의 출가를,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말릴 수 없었던 이유가 있다.

 하루는 주역을 구해 보고 싶어하는 남편(탄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송아지를 팔아 주역책을 구해 주었다. 주역책을 본 남편이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을 받아 가지고 그대로 글방으로 달려 가더라는 것. 가만히 뒤따라가 문틈으로 남편의 모습을 살펴 보니, 한 손에 책을 들고 읽으며 기쁨을 참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때 이미 남편은 부부의 연(緣)보다는 공부에 연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탄허는 말년에 운모를 갈아 장복(長服)한 것이 탈이 나 적잖이 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모를 먹게 된 연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바로 거기에 그의 시주은혜를 두려워하는 정신이 온전히 담겨 있다. 탄허는 시주은혜를 무섭게 여기지 않으면 수행자로서 자격이 없음을 항상 강조했다. 농부가 뙤약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짓는 농산물을, 중이랍시고 공부를 한다며 그늘에 앉아 편안히 얻어먹는 것을 몹시 부담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농부인데도 굶는 이가 많고, 손이 부르트라 길쌈질을 하는 아낙네도 헤진 옷을 입고 사는데 어찌 중이 되어서 촌각을 헛트게 쓸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 탄허의 지론이었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무섭게 정진과 공부를 했던 것도 시주은혜에 대한 이같은 각별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리라.

 어느날 탄허는 시은(施恩)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월 초하루와 자신의 생일, 그리고 매월 보름에는 밥을 먹지 않고, 운모를 갈아 그 가루를 먹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를 실천했다. 시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탄허는 절 살림을 하는데도 독특한 면을 보였다. 가람불사를 하는데도 대웅전이라는 말 보다는 도봉산 적조암에서 보이듯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나가실(那迦室) 또는 나가원(那迦院)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 주석하고 계신 적정한 성소라는 의미로 대적광전(大寂廣殿)이라는 말을 더 좋아했다. 지금의 월정사 법당이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도 현판은 대적광전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또 종각의 이름도 범종각 보다는, 칠 때는 움직이고 치지 않을 때는 고요하다는 의미로 동정각(動靜閣)이라고 불렀고, 불기도 3,000년대를 고집해 사용했다.



 탄허는 곧잘 `우주가 내 뱃속에 있으니 내 아들 아닌 사람이 없다'는 농(弄)을 즐겼다. 농이긴 하지만 스케일만큼은 범 우주적인 수준이었다. 실제 그의 배포는 온 우주와 허공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대단했다.

 불교는 물론이요, 유교와 도교 등 동양사상 전반에 정통했고, 특히 화엄경과 주역에 대해서는 최고의 경지에 올라 있었으니 그의 스케일이 범 우주적 차원에 이르렀을 것은 짐작이 가는 일. 게다가 한암이라는 걸출한 스승의 지도 아래 철저한 수학과 수행까지 거듭했으니 그의 예지력이 남달랐을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탄허의 예지력은 보통 예언가들의 막연한 추론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의 예지력은 언제나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다. 1999년에 지구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해 그는 종말 이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없는 등 체계적이지 못하고 이론적인 뒷받침이 허술하다는 이유로 `근거 없는 추측'이라고 일축했다. 실제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7월 지구 종말설'은 근거 없는 예언으로 판명이 난 상태다.
  

 탄허는 5.16 군사쿠테타 이후 막 대통령이 된 박정희의 자문에 응해 세 가지의 중요한 정책방안을 제시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를 가까이서 시봉했던 서우담(도서출판 그림 대표)에 따르면 청와대에 초청받아 박대통령과 마주한 그는 거침없이 나라의 기간(基幹)이 될 정책방향을 이야기했다.

 “앞으로 산업사회가 되면서 점점 물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지하수를 뽑아 쓰게 될 것이고, 결국 식수난이 닥쳐 옵니다. `물쓰듯 한다'는 말이 있지만 언제나 남아돌 때 부족함을 알아야 하고, 부족한 것은 남는 것이라는 이치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물에 대한 국가 차원의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탄허가 우선 제안한 것은 `물의 고갈문제'였다. 그리고 나서 나라의 동량이 될만한 인재가 줄어들고 있으므로 인재난에 대비할 것, 머지 않아 세계적으로 식량난이 닥쳐오게 될 것이니 철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 등을 역설했다. 박대통령은 이같은 탄허의 자문을 모두 받아들여 댐 건설과, 정신문화원의 설립, 절대농지법 제정이라는 국가정책을 수립했다. 탄허의 자문 내용들이 모두 미래를 꿰뚫어보는 혜안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으로서도 전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후에도 박대통령은 탄허의 말을 경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박대통령과의 인연은, 경영의 난맥상이 드러나 관선이사가 파견되는 등 다른 재단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한 동국학원을 종립학교로 지켜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믿기지 않을만큼 그의 예지력은 정확했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패퇴할 것이라는 것, 동서 양극간의 냉전체제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소멸될 것이며, 북극 빙하가 녹아내려 세상의 대변혁이 다가올 것이고, 분단 독일은 극과 극의 대립이 아닌 동서간의 반목이므로 얼마 가지 않아 통일을 이룰 것이며,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나라는 극과 극의 대립이라 통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느 순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일을 이루게 될 것 등 그가 언급한 것들은 대개가 적중했거나 그 방향대로 진행되는 중이니 참으로 신이(神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장철학에 있어서 당대의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탄허는 1955년 경 서울 남산에 있던 한국대학(지금은 폐쇄)의 요청으로 `장자의 강의'를 했다. 처음에는 1주일 예정으로 강의를 시작했지만 `천하의 명강'이라는 소문이 나돌며 수강생들의 열띤 요청으로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면서 무려 두 달간 지속했다.

 수강생 명단에는 당시의 대표적인 철학자와 교수 등 쟁쟁한 인물들이 두루 포함돼 있었다. 씨 함석헌도 그 당시 장자 강의 청강 1기생이었다. 이후 탄허와 가까이 하면서 장자를 마친 함석헌이 훗날 장자의 대가로 자리잡은 것은 전적으로 탄허로부터의 수학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있던 `자칭 국보' 무애 양주동은 탄허를 일러 `장자가 다시 태어나 장자 강의를 한다 해도 탄허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탄허는 강의를 할 때 교재나 메모를 펴 놓는 일이 없었다. 노장(老莊)이나 영가집(永嘉集)은 물론, 방대한 화엄경도 마치 머리 속에서 실타래를 풀어내듯 거침없이 펼쳐 나갔다.

 한번은 전강화상이 탄허의 영가집 강의를 몰래 청강하는 일이 있었다. 강의를 다 들은 후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전강은 탄허의 절을 굳이 물리치며 맞절을 고집했다. 그만큼 탄허를 인정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경봉화상도 1969년경 부산에서 있었던 한 법회에서 탄허를 가리켜 “한 300년은 살아야 할 사람”이라며 “오대산의 탄허가 가는 날 한국불교도 빛을 잃을 것”이라는 극찬을 한 적이 있다.

 이렇듯 탄허는 당대의 선지식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설법을 잘 하기로 유명한 청담화상도 탄허를 만나면 주로 듣기만 했고 금오와 효봉, 고암, 원산 등 당대의 선사들도 탄허와 교유하는 것을 매우 즐겨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탄허는 학문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일가를 이룬 명필이었다. 그가 남긴 개성있고 힘찬 서체들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한동안 잡아매는데 부족함이 없을 정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었던 선우 휘씨가, 화약폭발 사고가 났던 전북 이리지역의 이재민을 돕기 위한 서화전을 위해 20폭 병풍을 비롯해 무려 70점의 글을 2시간만에 일필휘지로 거침없이 써대는 것을 지켜보고 감탄을 한 나머지, 훗날 조선일보 문화면에 탄허와의 대담을 3일 연속 게재한 것은 한국 언론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글을 짓고 직접 글씨를 쓴 명문명필의 비문이 23점에 이르고 있는 것도 근래에는 없는 일.

 특히 주역 역서인 `주역선해'의 붓으로 쓴 서문은 천하의 명필로 일본 사람들이 이를 알아보고 10여년 전 당시 일본돈 3,000만엔에 구입하려고 시도했던 일도 있었다.



 탄허는 후학들에게 자주 `천하에 두 가지 도가 없고 성인은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라는 말을 들려줬다.

 또 묻지 않는데 말하는 것은 싱거운 짓이며, 생전의 명예보다는 백년 천년 후에 살아 있어야 하고, 시주의 은혜가 무서우니 공연히 신세를 지지 말 것을 철저히 하라고 늘 강조했다.

 그가 비교적 일찍 입적에 든 것을 두고 교분을 가졌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탄허의 입적은 한국불교의 불행'이라고 아쉬움을 표시하는 것은 그가 남긴 족적이 그만큼 뚜렷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탄허스님 연보〉

1913.1.15.  전북 김제 출생,

1931-1934.  오대산 월정사 한암대종사와 우주 및 인생의 근본이치에 대해 빈번한 서신문답

1934.9.5.  상원사에서 한암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7-1952.  한암스님을 모시고 수학정진

1953.  강원도 종무원장 및 월정사 조실

1953-1963.  한암스님의 유촉-역경사업에 전념

1972.  화엄학 연구소장

1974.  신화업경합론 전47권 간행.

1983.4.24.  입적(세수71, 법랍49세)



〈법보 889호(99.7.24), 891호(99.8.28), 892호(99.9.11) 연재-법보신문 519, 520호 인용〉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1917    태극도, 대순진리회 출신들이 절대 모르는 진실  안원전   2019/05/05  1682
공지    태극도, 대순진리회 출신들이 절대 모르는 진실  안원전   2021/08/27  1424
1915    태극도 대순진리회 출신 신앙인의 신앙노선이 크게 잘못된 원인과 조작된 태극진경  안원전   2018/02/18  2913
1914    태극 49 동도지공사ㅡ치천하50년공부-By 金剛 大仙師  안원전   2019/04/25  1585
1913    탄허스님의 예지 그 배경과 의의 By 김성철(동국대 불교학)  안원전   2015/04/24  2617
   탄허스님 부친 보천교 간부 김홍규의 독립운동자금 규모  안원전   2012/07/10  5024
1911    탄허 대선사 法門  안원전   2002/08/30  11011
1910    탄허 강의-세상만사(世上萬事)는 새옹지마(塞翁之馬),공자의 예언 외  안원전   2008/06/05  6323
1909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의 기원  안원전   2015/05/29  2495
1908    쿠르드족의 역사 1  안원전   2015/11/25  3140
1907    콘스탄티누스는 미트라의 숭배자였다  안원전   2015/06/06  2416
공지    코로나19 백신 관련 트럼프 대통령 치료한 닥터 젤렌코(Zelenko)의 증언 - 1 코로나19(우한폐렴)  안원전   2021/10/25  1250
공지    코로나 진실 규명 의사회 가정의학과 의사 주형돈 입니다. ccp virus(코로나) 진상규명 의사회가 14만 동료 의사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입니다.  안원전   2022/01/13  1285
공지    코로나 19사태로 배울공부 By 慧光 大仙師  안원전   2020/03/12  1198
1903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살인자를 지목한 귀신 이야기  안원전   2003/05/16  5609
1902    캐시미르는 약속의 땅인가?  안원전   2006/12/03  6537
1901    캐시미르(인도)에서의 예수행적의 증거들  안원전   2006/12/03  6556
1900    카자크(코사크)의 브레이브 허트, 스텐카 라친  안원전   2015/11/14  3539
1899    카오스와 후천개벽 사자뇌에 남긴 산성화자취  안원전   2003/08/16  6855
1898    카발리스트 비전 "창조의 서"- Sefer Yetzirah  안원전   2002/01/21  7495
공지    카발(딥스=프리메이슨=그림자정부)의 붕괴 (The Fall of THE CABAL) 10부작& 속편 카발의 붕괴 몰락 '영적 각성 17부작'  안원전   2021/03/20  2157
1896    칠현금 댓글  안원전   2015/08/28  2292
1895    칠성도군의 열매맺는신앙~By 紫霞 大仙師  안원전   2016/11/23  2541
1894    칠성도군 진법 도운 양성의 ~동지한식 백오제By 紫霞 大仙師  안원전   2017/01/10  2582
1893    칠성경 혈맥전수-우보주 수행과 칠성수행을 통해 일꾼들에게 수행공부를 하라는 말씀-金剛 大仙師  안원전   2020/05/11  937
1892    칠 현무! 오경 칠현무-金剛 大仙師  안원전   2020/05/11  856
1891    친일파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도올 김용옥) Korea & Japan&조선일보 친일 유죄선고  안원전   2012/10/05  4169
1890    치료 후 예수는 다시 동방으로 갔다.  안원전   2006/12/03  6541
1889    충청도, 전라도 축복의 또 다른 풍수여건 마이산~~  안원전   2014/09/05  3553
1888    충격적인 사실-수메르 문명의 유적 발견으로 성경의 허구가 드러나 ....... [4]  안원전   2009/01/25  7458
1887    충격공개) 묻혀진 진실!!-쿠란이 증거하는 인도 슈리나가르 구 시가의 예수의 무덤(사진)  안원전   2012/07/10  9135
1886    춘산채지가  안원전   2015/04/24  3215
공지    추수말복 진법의 상씨름 <<상씨름! 이제 시작 되었을 뿐! has just begun!!! 시리즈1 > By 慧光 大仙師  안원전   2020/02/24  1165
1884    추배도’ 60가지 예언 중 55가지 이뤄져… 종말론이 아닌 구원론 펼쳐  안원전   2013/04/28  2547
1883    최풍헌(崔風憲)&이성계 주원장 조상묘  안원전   2012/12/04  6054

[1][2][3][4][5] 6 [7][8][9][10]..[60] [NEXT]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