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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링크 #1    http://my.dreamwiz.com/vic1290/sea.htm
제 목    성혈과 성배-예수결혼의 비의
http://my.dreamwiz.com/vic1290/sea.htm

예수의 결혼

복음서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의 의도는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복음서들을 식별해 내려고 했을 뿐이다. 즉 가능성 또는 타당성 있는 진리의 어떤 단편들을 발견해 내어 그 단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장식적인 틀로부터 그 진리의 단편들을 골라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아주 정확한 성질의 단편들, 즉 예수와 막달라라는 여인과의 결혼을 입증해 줄 수 있는 단편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한 증거들은 명백하지 않을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증거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글에 나타난 것 이외의 것을 알아내야 하며, 어떤 괴리들을 채워야 하며, 어떤 휴식과 생략을 설명해야 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생략된 것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풍자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며 애매한 언급들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의 증거를 찾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우리는 결혼에 도움을 주었을 수 있는 상황들에 대한 증거도 찾아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탐구에는 명백히 구별되지만 밀접하게 관련된 수많은 질문들이 포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질문들 중에서 가장 분명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복음서속에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간에 예수가 실제로 결혼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물론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어떤 진술도 없다. 반대로 명확하게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진술도 없다. 이것은 언뜻 보기보다는 더 흥미있고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게자 베머스(Geza Vermes) 박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예수의 결혼에 관해서는 복음서들이 완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대 유대 사회에 있어서 그러한 태도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더 탐구해 볼 만하다.


복음서들은 제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면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것을 진술해 주고 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예수 자신은 독신생활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반대로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19:4~5) 이러한 진술은 독신생활에 대한 명령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예수가 독신 생활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았다면 그가 독신생활을 했다고 추측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 당시 유대의 관습에 따르면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떤 공동체에 속한 일부의 엣세네파 사람들을 제외하면 독신생활은 강한 비난의 대상이었다. 1세기 후반의 어떤 유대교 작가는 고의적인 독신생활을 살인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 하나 뿐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대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위해 부인을 찾아주는 것은 그의 아들이 할례를 받았음을 보증하는 것만큼이나 의무화되어 있었다.


만일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 사실은 대단히 이채로왔을 것이다. 그 사실은 주목거리가 되었을 것이며 그리하여 예수를 특징짓고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데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로 인하여 그는 어떤 중대한 의미에서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소외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록들 중에 적어도 하나는 그처럼 두드러진 관습으로부터의 이탈을 다소라도 언급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만일 예수가 실제로 후세의 전승이 주장하는 것처럼 독신주의자 였다면 그러한 독신생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독신생활에 관한한 예수가 그 당시의 전통과 문화에 따랐음을, 즉 간단히 말해서 그가 결혼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복음서들이 그 문제에 침묵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것이다. 그 논쟁은 한 존경받는 현대의 신학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런 문화적 배경이 확실하다고 볼 때 예수가 그의 포교를 시작하기 전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만일 그가 독신생활을 강조했다면 하나의 소동, 즉 거부 반응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흔적은 다소나마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서속에 예수의 결혼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결혼 가설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하는 강한 논증이 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의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독신생활을 하거나 그를 옹호하는 것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따라서 그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남아있었을것이다.


결혼 가설은 복음서속에서 예수에게 빈번히 적용된 '랍비(Rabbi)'라는 칭호에 의하여 훨씬 더 확고하게 된다. 물론 이 용어가 가장 넓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단순히 자칭 교사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수준--예를 들면 그가 성전에서 장로들에게 그의 지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칭 교사 이상의 사람이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으로 보아 그는 모종의 공식적인 랍비 훈련을 받았으며 공식적으로 랍비로서 인정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수를 엄격한 의미에서의 교사로서 묘사하고 있는 전승에 부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엄격한 의미에서의 랍비였다면 결혼은 개연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하였을 것이다. 유대교의 미슈나 율법은 그 문제에 관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라고 상당히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서 보면 결혼과 관련된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이 사실은 예수 자신의 결혼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사건은 가나의 혼인잔치이며 대단히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친숙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두드러진 문제들이 수반되고, 그 문제들은 모두 정당한 이유가 있다.


제4 복음서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가나의 결혼잔치는 검소한 시골 예식, 즉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시골 결혼식인 것처럼 보인다. 이 결혼 잔치에 예수가 특별히 초대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기이하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도 사실상 그의 포교를 시작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훨씬 더 기이한 것은 예수의 어머니가 바로 그 잔치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참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그의 아들에게 포도주를 보충해 달라고 귀띔할 뿐만 아니라 사실은 그에게 명령하고 있다. 그녀는 마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에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요2:3~4) 그러나 마리아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그 아들의 항변을 무시한다.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하라 하니라](5) 그리고 그 하인들은 마치 그들이 마리아와 예수로부터 명령 받는데에 익숙해 있기나 한 것처럼 즉시 따르고 있다.


그녀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려는 예수의 명백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그를 설복시킨다. 그리고 예수는 그의 첫번재 이적, 즉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을 행한다. 복음서에 관한한 그는 그때까지는 그의 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의 그런 이적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 타당성이 없는 일이다. 설령 타당성이 있다 할지라도 왜 그러한 독특하고 거룩한 재능을 그처럼 일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했는가? 왜 마리아가 그의 아들에게 그러한 요청을 했는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왜 결혼 잔치에 참석한 두 명의 '손님들'이 음식장만을 책임져야 했는가? 그것은 관습상 주인의 책임인 것이다. 당연히 가나의 혼인 잔치는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이다. 그렇다면 포도주를 준비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책임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실제로 예수 자신의 혼인 잔치였다는 그 이상의 증거도 있다. 그 이적이 행해진 직후에 연회장(예식 감독자)이 새로 내 온 포도주를 맛보았다.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요2:9~10) 이 말들은 분명히 예수에게 한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말을 '신랑'에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분명한 결론은 예수와 '신랑'이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아내

만일 예수가 결혼했다면 복음서속에는 그의 부인에 관해 어떤 암시들이 있는가?


언뜻 볼 때 두 명의 가능한 후보자들, 즉 그의 어머니 이외에 복음서속에서 그의 측근자들로 거듭하여 언급되고 있는 두 명의 여인들이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들중 첫번째 여인은 막달라, 즉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갈릴리의 미그달(Migdarl) 또는 막달라(Magdala)라는 마을 출신의 마리아이다.

네 복음서 모두에서 이 여인의 역할은 대단히 모호하며 고의로 불명료하게 다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록에서 보면 그녀는 상당히 후에 가서야 비로소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그녀가 등장하는 것은 십자가 처형 당시 유대에서이다.

그리고 그녀는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 포함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 보면 그녀는 예수가 아직 갈릴리에서 전도하고 있을 때인 예수 사역의 비교적 초기에 등장한다. 따라서 그녀는 갈릴리에서 유대까지 예수를 따라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 두 지방 사이를 예수의 시녀처럼 따라다니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것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와 결혼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인이 동행도 없이 여행하는 것은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어떤 종교적 교사와 그의 측근인이 동행하지 않고 여행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전승들은 이런 곤란한 사실을 잠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때로 막달라는 예수의 제자 중 누구인가와 결혼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예수와 그녀의 특별한 관계 및 예수에 대한 그녀의 친밀성 때문에 그들은 둘 다 간음의 혐의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고소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전승과는 달리 막달라는 복음서의 어디에서도 창녀로 언급된 바가 없다. 그녀가 누가복음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을때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렸던'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예수가 행한 일종의 귀신 축출을 언급하는 것으로, 막달라가 '귀신 들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절은 동시에 모종의 종교의식이나 또는 의식적 입회식을 언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들면 이스타르(Ishtar) 또는 아스타트(Astarte)의 제사의식은 일곱 단계의 입회식을 포함하고 있었다. 예수와 만나기 이전에 그녀는 그러한 제사의식과 관련을 맺고 있었을 수도 있다.

미그달 또는 막달라는 '비둘기 마을'이었다. 그리고 제사용 비둘기들이 실제로 그곳에서 사육되었다는 어떤 증거가 있다. 그런데 비둘기는 아스타트의 거룩한 상징이었다.


막달라에 관하여 말하기 전의 한 장에서 누가는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은 한 여인을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에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여인이 기름을 붓는 유사한 사건이 있다. 누가도 마가도 이 여인을 막달라와 분명하게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가는 그녀가 '타락한 여인' 곧 '죄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의 주석자들은 막달라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죄인이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근거하여 볼 때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과 막달라는 동일인물로 간주 되어졌다.

사실 그 둘은 동일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만일 막달라가 비교적 제사의식에 관련을 맺고 있었다면 그것 때문에 누가 뿐만 아니라 보다 이후의 필자들도 역시 그녀를 '죄인'으로 간주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만일 막달라가 '죄인'이었다면 그녀는 일반적인 전승의 '창녀'이상의 어떤 인물이기도 하였음이 아주 명백하다. 그녀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예를 들면 누가는 그녀의 친구들 중에는 헤롯 궁중의 고관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재원으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지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도 역시 보통 여인이 아니었다. 마가복음에는 그 의식이 수행되는데 사용된 향유의 귀중함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기름부음 사건 전체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왜 그 사건은 복음서속에서 그처럼 강조되었는가?

그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일시적인 충동 표현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은 주의깊게 미리 계획된 의식인 것이다. 우리는 기름을 붓는 것은 왕들의 전통적인 특권이며 '기름부음 받은자'를 의미하는 '정당한 메시아'의 전통적인 특권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볼 때 예수는 그의 기름부음에 의하여 진정한 메시아가 된다는 결론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장엄한 역할로 그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막달라가 예수 사역의 말기에는 극히 중요한 인물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세권의 공관복음서속에서 보면 그녀의 이름은 언제나 예수를 따른 여인들의 명단 맨 앞에 나타난다. 이는 시몬 베드로가 남자 제자들의 명단 맨 앞에 나오는 것과 똑같다. 분명 그녀는 십자가 처형 후에 빈 무덤을 목격한 최초의 증인이었다. 모든 예수의 신봉자들 가운데서도 예수가 그의 부활을 최초로 드러내 보여준 것은 막달라에게서였다.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보면 예수는 막달라를 독특하고 우선적인 태도로 대하고 있다. 그러한 대우는 다른 제자들에게 시기심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후대의 전승은 막달라의 배경을 추하게 만들고자 했음이 아주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를 창녀로 묘사한 것은 예수와의 관계가 그들 자신의 관계보다 더 밀접했던 어떤 여인의 명성을 공격하고자 하여 지나치게 인간적인 시기심이 발동한 어느 좋지 못한 추종자의 지나친 보복이었을 수도 있다.

예수의 생존 동안이건 그 후이건간에 다른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영적 지도자와 막달라와의 독특한 결속을 시기했다면 후세의 눈에 그녀가 좋지 않게 보이도록 의도했을 수도 있다. 그녀가 하잘것 없는 여자로 격하된 데는 이의가 없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녀를 창녀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에는 창녀들의 집을 '막달라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복음서 자체는 그녀의 이름이 이러한 창녀로 낙인 찍힐 아무런 이유도 없음을 증언해 주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막달라의 지위가 무엇이든간에 그녀만이 예수의 부인이 될 후보자는 아니다. 제4 복음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베다니의 마리아, 즉 마르다와 나사로의 누이와 동일시될 수 있는 또 다른 여인이 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예수와 대단히 친숙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부자 이기도하여 예수와 그의 측근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집을 예루살렘 근교에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나사로 사건은 이집에는 개인 무덤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개인 무덤은 당시로서는 사치한 장식이었으며, 부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귀족적 혈통을 입증해 주는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모든 현대의 도시에서처럼 성서시대의 예루살렘에서도 땅은 아주 귀하였다. 그래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사유 묘지를 가질 수 있었다.


제4 복음서에 보면 나사로가 병이 걸렸을 때 예수는 몇일동안 베다니를 떠나 그의 제자들과 함께 요단강에 머물고 있었다. 나사로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는 이틀을 더 지체한 후--이 것은 참으로 기이한 반응이다--베다니로 되돌아 왔다.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후였다.

그가 도착하자 마르다가 그를 맞으러 뛰어나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요 11:21)라고 울부 짖었다. 도대체 왜 예수의 몸이 그곳에 있었다면 그 남자가 죽지 않았을 것인가? 그것은 난처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중요성은 마르다가 예수를 맞으러 나올 때 그녀가 혼자였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도 그녀와 함께 있었으리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집에 앉아 있었으며 예수가 그녀에게 나오라고 명하기까지 그녀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가 집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유대의 관습에 따라 그녀는 상복을 입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왜 그녀는 예수가 돌아 올 때 마르다와 함께 맞으러 뛰어 나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명백히 설명될 수 있다. 그 당시 유대교의 율법에 의하면 상복을 입고 있는 여인은 그녀의 남편이 명령할 때 이외엔 그 집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건에서 예수와 베다니의 마리아의 행동은 유대의 남편과 부인의 전통적인 처신에 부합된다.
예수와 베다니의 마리아가 결혼했을 가능성에 대해 추가할만한 증거가 있다. 그 사건은 누가복음에서 다소 그릇되게 나타나고 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며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 10:38)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 10:39)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눅 10:40)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누나.(눅 10:41)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


마르다의 간청으로 볼 때 예수가 마리아에 대하여 모종의 권위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예수의 대답이다. 어떤 다른 문맥에서라면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 대답을 결혼에 대한 암시라고 해석할 것이다. 어쨋든 그것은 베다니의 마리아가 막달라 만큼이나 열성적인 제자였음을 암시함이 분명하다.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과 막달라를 하나의 동일 인물로 간주하는 데에는 확고한 이유가 있다. 이 인물이 나사로와 마르다의 누이인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 인물일 수는 없을까? 복음서 속에서 서로 다른 3개의 문맥에 나타나는 이 세 여인들이 실제로는 단일 인물일 수는 없을까?

중세의 교회는 그들을 단일 인물로 생각했음이 분명하며 일반적인 전승도 그렇게 생각했다. 많은 성서학자들도 오늘날 일치하고 있다. 그러한 결론을 지지하는 많은 증거가 있다.


예를들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모두 막달라를 십자가 사건에 참석하고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들 중 어느 것도 베다니의 마리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처럼 헌신적인 제자였다면 그녀가 참석하지 않은 것은 나태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녀가--그녀의 오라비 나사로는 말할 것도 없고--예수 생애의 절정의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함이 믿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러한 생략은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분명 그녀는 참석했는데 복음서에 의해서는 막달라란 이름의 사람으로 인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막달라와 베다니의 마리아가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면 베다니의 마리아가 십자가 사건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막달라는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시 될 수 있다. 막달라는 또한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과 동일시 될 수 있다. 제4 복음서는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을 베다니의 마리아와 동일시하고 있다. 실제로 제4 복음서의 필자는 그 문제를 상당히 명백하게 다루고 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요 11:1)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요 11:2)

다시 한 장 뒤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요 12:1)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요 11:2)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수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따라서 베다니의 마리아와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여인은 동일 여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명백하게 동일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이 여인이 또한 막달라이기도 하다는 것은 확실히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만일 예수가 실제로 결혼했다면, 그의 부인에는 단 하나의 후보자 즉 복음서들에서 서로 다른 명칭들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며 거듭해서 나타나는 한 여인만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1

물론 우리는 우리의 각본이 기존의 기독교적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이 연구하면 할수록 수세기에 걸쳐 유래된 그 가르침들은 고도의 발췌 편집으로 그럴듯하게 삭제되고 개정되었음이 그만큼 더 명백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서는 예수와 그의 시대를 어떤 특권층 즉, 기 문제에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그리고 아직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어떤 그룹들과 개인들의 필요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손상시키거나 난처하게 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은-- 예를 들면 마가의 '비밀 복음서'처럼-- 당연하게 삭제되었다. 사실 너무나 많은 것이 삭제되어 일종의 빈 공간이 생겨났다. 이 빈 공간에서는 추측이 정당하고 필연적이다.

만일 예수가 합법적인 왕권 소유자였다면 그는 비교적 소수의 대중 즉 갈릴리의 그의 직계 가족, 그 자신의 귀족적 사회 계급에 속한 어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유대와 예루살렘에 전략적으로 베치된 몇몇 대표자들에 의해 지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한 추종자들은 탁월하기는 했지만 그의 목적 실현을 보장하기에는, 즉 왕좌를 차지하려는 그의 노력을 성사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다른 계급들로부터 보다 확고한 추종자들을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보니 왕자 찰 리가 이전의 지위를 추구하지 위해 1745년에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대규모의 추종자들을 모집할 수 있는가?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의도된 메시지를 전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메시지는 현대의 정치가들의 메시지처럼 냉소적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고상하고 강력한 이상을 곁들인 선한 신앙의 형태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종교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현대의 정치가들의 목적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짓밟히고 고통받고 약탈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약속의 메시지였다.

만일 오늘날의 독자가 그 문제에 관해 편견과 선입관을 버린다면 그는 현대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수법, 즉 대의명분으로 백성들을 규합하고--언제나 그랬듯이--독재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는 수법과 아주 유사한 점을 간파해 냈을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윤리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메시지는 정치적 동기에 따라 특수층의 대중에게 지향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대규모의 추종자들을 모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억압받고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고통받는 자들 가운데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복에 굴복하였던 사두개인들은 역사상의 모든 사두개인들만큼이나 그들의 소유를 나누어 주기 싫어했으며 그들의 안전과 안정이 위협받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복음서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메시지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독특한 것도 아니다. 예수 자신은 바리세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는 바리새적 교리의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해 두루마리들이 입증해 주고 있듯이 그의 가르침속에는 엣세네의 중요한 사상적 측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 자체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은 독창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자신은 대단히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병을 치유하고 , 그런 유의 다른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는 생생한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재능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의 청중은 전혀 세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예수는 그이 엣세네파 선배들과는 달리 메시아의 강림을 예고하는 데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그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휠씬 더 권위가 있었을 것이며 그의 말에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무렵 예수는 이미 추종다들을 다 모집해 놓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추종자들은 그들의 관심이 서로 상충되는 다른 두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에는 소수의 핵심적인 추종자들, 즉 직계 가족과 다른 귀족 회원들 및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지지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주요 목적은 그들의 지지자가 왕좌에 즉위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보다 많은 '일반 백성' 즉 그 운동의 대오(隊俉)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그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포함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이들 두 파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왕좌에 앉게 하려는 목적은 동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들은 근본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그 거사가 완전히 실패하자 이들 두파 즉 '메시지 지지자들'과 '가족 지지자들' 사이의 부자연스런 결속은 붕괴되었을 것이다. 붕괴와 임박한 학살의 위험에 직면하자 그 가족은 오래 전부터 왕가에 가장 중요하였던 하나의 요소, 즉 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필요하다면 도망하여서라도 혈통을 보존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지 지지자들'에게는 그 가족의 미래는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혈통 보존은 이차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 메시지를 영속화시키며 전파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첫 몇세기 동안 전개되어 드디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수된 기독교는 '메시지 지지자들'의 산물이다. 기독교의 보급과 발전과정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대단히 광범위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과 함께 '그 메시지'는 이미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이 형태는 기독교의 전체 신학체계가 근거한 토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북음서들이 작성될 무렵에 그 새로운 종교의 교리는 사실상 완결되었다.

그 새로운 종교는 무엇보다도 로마의 청중 또는 로마화된 청중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따리서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의 로마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미화되었으며 책임은 유대인들에게로 전가되었다.

그러나 로마 세계에 맞도록 사건들을 왜곡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로마 세계는 그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이저는 이미 공식적으로 신으로 취임했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예수도 신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바울에 의해 그는 신격화되었다.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로마와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새로운 종교는 먼저 그 지역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종교는 기존의 신조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것을 고수할 수 있어야 했다.

간단히 말해 그 새로운 신은 힘과 권위와 기적들의 목록에 있어서 그가 대치하고자 하는 신들에 필적해야만 했다. 만일 예수가 당시의 로마화된 세계에서 지반을 다지고자 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완전한 신이 되어야 했다.

옛날 의미에서의 메시아가 아니고 제사장적 왕이 아니라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의 고전적인 신들처럼 지하계와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고 봄과 함께 다시 소생한 성육신한 하나님이 되어야 했다. 부활에 관한 사상이 최초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으며, 대단히 명백한 이유 때문이었다.

즉 예수를 타무스, 아도니스, 아티스, 오시리스 그리고 그들 시대의 세계와 의식을 모두 섭렵한, 소멸하고 소생하는 모든 다른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 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처녀탄생의 교리도 선포되었다. 죽음과 부활의 축제인 부활절 축제는 당시의 다른 종파들과 신비교의 봄의식에 일치하게 되었다.

하나의 신을 선포할 필요가 생기게 되자 그'신'의 실제적인 육신상의 가족과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정치적이고 왕조적인 요소들은 불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편성의 주장을 더 촉진시키기 위해 모든 정치적·왕조적 요소들은 예수의 전기에서 엄격하게 삭제되었다.

따라서 열성당원들과 엣세네파에 대한 모든 돤계들도 역시 신중하게 제거되었다. 그러한 관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처하게 하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이 복잡하고 일시적인 정치적·왕조적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온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복음서들에 수록된 것 이외의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복음서속에 로마에 의해 점령된 1세기의 팔레스타인에서 단지 우연히 일어나 엄격하고 신화적인 얘기만 기록되었다.

'그 메시지'는 이러한 형태롤 발전되었지만 그 가족과 그 지지자들은 근거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1세기의 작가 울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예수의 살아남은 친척들이 유대 귀족들의 족보를 파괴하여 왕좌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모든 증거들 제거한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친척들은 A.D. 66년과 77년 사이의 반란기간 동안 문서 파괴를 겨우 모면하고 남아 있던 어떤 족보들을 가지고 전세계에 흩어졌다고 한다.


새로운 신화의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이 가족의 존재는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존재는 언젠가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일을 직접 증명할 수 있었던 그 가족은 그 신화에 대한 위험스런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가족은 직접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그 신화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태에 관한 일체의 언급이 억압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태의 냉소적 현실이 인정되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는 그 가족 자체는 가능하다면 제거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 가족측에서는 극도의 비밀이 요구되었다. 초대 교회교부들은 그들이 부과하고자 했던 정통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묵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반유대주의적 기원들 중의 하나가 생겨났을 것이다. 결국 '메시지 지지자들'과 신화의 선전자들은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로마인들을 무죄로 함으로써 이중적인 목적을 성취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신화와 '메시지'를 로마의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 유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가족의 신뢰를 비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유발시킨 반유대적 감정으로 인하여 그들의 목적은 휠씬 더 촉진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 가족이 로마 제국내에 있는 어떤 유대 공동체로 도망했다면 당시에 널리 행해지고 있던 일반적인 박해로 인하여 위험스런 증언들이 간단하게 침묵되었을 것이다.

로마 청중의 비위을 맞춰주고 예수를 신격화하며 유대인들을 희생제물로 삼아, 그 후기독교적 정통주의가 된 새 신화의 보급은 성공이 보장되었다. 이런 정통주의의 입장은 주로 A.D. 180년경의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나이우스에 의하여 2세기에 결정적으로 견고하게 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레나이우스는 어떤 초대 교부들보다도 더 기독교 신학에 확고하고 일관성 있는 형태를 부여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단 반박(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이라는 방대한 책에 의하여 이를 이룩했다. 그의 철저한 저서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정통주의에서 빗나간 모든 것들을 열거하여 그것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단을 한탄하면서 그는 오직 하나의 확고한 교회가 있을 뿐이며 그 교회 이외에는 어떤 구원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단언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단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따라서 축출되고 가능하다면 멸종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초대교회의 많은 이단들 중에서도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가장 신랄하게 공격받은 것은 영지주의였다. 영지주의는 게인적인 경험 즉 신과의 개인적인 영합에 의존하였다. 이레나이우스가 볼 때 이러한 영지주의는 자연적으로 성직자들과 주교들의 권위를 손상시켰으며 통일성을 지향하려는 노력에 방해가 되었다. 결국 그의 영지주의를 제거하는데 몰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공상을 금지시키고 고정된 도그마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또한 신학적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개인에 의한 어떤 해석도 용납하지 않는 법전화된 교리 체계가 필요로 되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지식에 대한 반대로 이레나이우스는 사도적 기초와 계승에 의존하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를 고집하였다.

그러한 교회의 창시를 보충하기 위해 이레나이우스는 명확한 정경(政經) 즉 권위있는 저서들의 고정된 목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는 책들을 발췌하여 어떤 것은 포함시키고 어떤 것은 배제함으로써 그러한 정경을 편집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오늘날의 정경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신약성서 정경을 편집한 최초의 인물이다.

물론 그러한 조치들이 초기 이단들의 확장을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이단들은 점점 더 융성하였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와 함께 '메시지 지지자들'에 위해 선포된 기독교 유형인 정통주의는 일관성있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후 계속 잔존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레나이우스가 콘스탄틴누스 황제 통치기간과 그 직후에 발생했던 일을 위해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콘스탄틴누스황제의 보호하에 로마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제국이 되었다.

기독교의 역사와 발전에 있어서의 콘스탄틴누스 황제의 역할은 위조 되었으며 잘못 제시되었으며 오해되어 왔다. 9장에서 논의된 8세기의 가짜 '콘스탄틴누스의 기증'은 후대의 작가들이 보기에 문제를 휠씬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지지자들'의 결정적인 승리는 때로 콘스탄틴누스의 공으로 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부당한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니는 그들 더 철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돌려진 보다 환상적이고 그럴 듯한 업적들 중 어떤 것을 배제해야 한다.

후대의 교회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동정적인 입장을 물려받았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처음에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인들의 수효는 상당히 많았으며 콘스탄틴은 그의 왕좌를 노리는 막센티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도움이라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A.D. 213년 막센티우스는 '물비안다리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따라서 콘스탄틴의 왕좌는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 결정적인 교전이 있기 직전에 콘스탄틴은 하늘에 걸려있는 빛나는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 환상은 후에 예언자적인 꿈에 의해 재강조되었다. 그 십자가를 가로질러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In Hoc Signo Vinces(이 징표를 사용하면 승리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이러한 하늘의 징조를 쫓아 군병들의 방패에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징표, 즉 Xpcotos라는 단어의 첫 머리인 Xp를 장식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몰비안다리에서의 막센티우스에 대한 콘스탄틴의 승리는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기적적인 승리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콘스탄틴이 종종「로마제국을 기독교화시켰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근거하는 일반적인 기독교 전승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콘스탄틴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가 행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하게 짚어보기 위해 우리는 그 증거를 보다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첫째, 콘스탄틴의 '개종--이 단어가 적절하다면 --은 결코 기독교적인 개종이 아니라 이교적인 개종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보스게스(Vosges) 또는 아우툰(Autun) 근처에 있는 이교적인 아폴로 신적의 경내에서 모종의 환상을 보았거나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신 콘스탄틴 군대를 따라간 어떤 목격자에 따르면 그 환상은 즉 「무적의 태양(Sol lnvictus)」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어떤 종파가 숭배하는 신인 태양신의 환상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틴이 환상을 보기 직전 솔 '인빅투스'의 의식에 참석했었다는 증거가 있다. 어쨌든 원로원은 물비안 다리의 전투 이후 콜로세움에 승리의 문을 세웠다.

이 문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승리는 「그 신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 신은 예수는 아니었다. 그 신은 이교의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였다.

전승과는 달리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적인 국교로 삼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 통치하에서 로마의 국교는 이교적인 태양신 숭배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일생동안 그 태양신 숭배 의식의 제사장으로 활동했다. 실제로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솔 인빅투스'는 제국국기와 화폐를 포함한 모든 곳에 등장하였다.

콘스탄틴이 열렬한 기독교 개종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콘스탄틴 자신은 337년까지 세례조차 받지 않았다. 그때 그는 임종 직전이었으며 너무 허약하고 너무 무감각하여 세례를 거부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Xp라는 징표를 사용한 것도 그의 공로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징표를 가지고 있는 한 비문이 폼페이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틴보다 250년 전에 기원된 것이다.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시리아에서 기원되었으며 콘스탄틴보다 100년 전에 로마 황제들에 의해 그들의 신하들에게 숭배하도록 명령되어졌다. 그 의식에는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래 단일신론적인 의식이었다.

결국 그 제의식은 태양신을 모두 다른 신들의 모든 속성들을 다 가진 총화로서 간주하였다. 이리하여 그 제의식은 아직 발달하지 않은 모든 제의식들을 포용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역시 널리 행해지고 있었으며 태양 숭배를 내포하기도 했던 미드라스(Mithras)와도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볼 때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편리한 방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정치, 종교 그리고 영토에 있어서의 통일이었다. 모든 다른 제의식들을 내포하고 있는 제의식 즉 국가종교는 이러한 목적에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은 '솔 인빅투스' 제의식의 후원하에서 였다.

기독교적 정통주의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솔 인비투스 제의식의 묵인하에 방해를 받지 않고 번성할 수 있었다. 솔 인빅투스 제의식은 본래 단일신론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단일신론을 위한 길을 닦아 놓았다.

그리고 솔 인빅투스 제의식은 다른 측면들 즉 기독교의 전파를 변경시킨 동시에 용이하게 하였다는 측면에서도 역시 편리하였다. 예를들면 A.D. 321년에 선포된 칙령에 의하여 콘스탄틴은 「신성한 일요일」에는 법정이 쉬도롤 명령했으며 이 날을 휴일로 선포하였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의 안식일 즉 토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켰었다.

그러나 그후 콘스탄틴의 칙령에 따라 기독교는 신성한 날을 일요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는 기존 정부와 조화를 이루게 됐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기원에서 더 멀어지게 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4세기까지는 예수의 출생일이 1월 6일에 지켜져 왔었다.

그러나 솔 인빅투스에 있어서는 일년의 결정적인 날이 12월 25일이었다. 그날은 태양의 탄생(또는 재탄생)을 기념하는 나탈리스 인빅투스 축일로 낮의 길이가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이 점에서도 역시 기독교는 정부와 기존의 국교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다행히도 미드라스의 제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그 둘이 때로는 서로 혼동될 정도였다. 그 둘은 모두 태양의 지위를 강조했으며 일요일을 신성한 날로 지켰고 중요한 탄생 축일를 12월 25일에 거행했다. 결국 기독교도 미드라스의 제의식과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기독교는 미드라스 제의식이 영혼불멸, 미래의 심판,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강조했던 것보다 더 그것들을 강조했다.

통일을 위하여 콘스탄틴은 기독교, 미드라스 제의식 그리고 솔 인빅투스 사이의 차이점을 조정하고자 했다. 즉 그들 사이의 어떤 모순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신격화된 예수를 솔인비투스의 지상적 현현으로 생각하여 묵인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교회를 세웠을 것이며 동시에 시벨레(cybele)여신의 동상과 태양신 솔 인빅투스의 동상도 세웠을 것이다. 솔 인빅투스는 콘스탄틴의 형상으로 그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절충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조치들 속에서 우리는 통일성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콘스탄틴에게 있어서 신앙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통일성에 도움이 되는 신앙은 어떤 것이든 인내를 가지고 처리되었다.

그러므로 콘스탄틴은 후대의 전승이 묘사하고 있는 '선한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통일과 일률성이라는 명목으로 기독교적 정통주의의 입장을 견고하게 해 주었다. 예를들면 A.D. 325년에 그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부활절의 날짜가 확정되었고 주교들의 권위를 명백히 규정하여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힘의 집중을 예비해 준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니케아 공의회가 예수는 하나의 유한한 예언자가 아니라 신이었다는 것을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다시 콘스탄틴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경건이 아니라 통일성과 정치적 방편이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으로서의 예수는 솔 인비투스와 쉽게 조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유한한 예언자로서의 예수는 적응시키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적 정통주의는 그 공식적인 국가종교와 정치적으로 바람직하게 혼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콘스탄틴은 기독교적 정통주의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니케아 공의회 1년 후에 콘스탄틴은 정통주의적 가르침들에 도전하는 모든 저서를 즉 '이단적인' 기독교인들의 저서들은 물론이고 예수에 관해 언급하는 이교적 저자들의 핵도 몰수하고 소멸시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또한 교회에 고정된 수입이 할당되도록 조치하기도 했으며 로마의 주교를 라테란 궁에 취임시켰다. 그후 A.D. 331년에 그는 새로운 성서 사본들을 만들도록 위탁하였으며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들 중의 하나였으며 기독교적 정통주의 즉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미증유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4반세기 전인 303년에는 이교적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눈에 띄는 모든 기독교 서적들을 파괴했다. 결국 기독교적 문서들, 특히 로마에 있는 기독교 문서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이들 문서들의 새로운 판들을 위탁했을 때 정통주의의 후원자들은 그들의 자료를 그들의 교리에 따라 적절하다고 생각한 대로 개정하고 편집하고 재집필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에 있는 결정적인 변형독본들 중의 대부분은 이때에 만들어졌을 것이며, 예수가 그후 지금까지 알려져 온 대로의 독특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도 이 때이다. 콘스탄틴의 위탁이 가지는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5천 개의 현존하는 초기 신약성서 사본들 중에서 4세기 이전의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늘날의 신약성서는 본질적으로 4세기의 편집자들과 작가들을 보호하는데 기득권을 가진 정통주의 지지자들 곧 '메시지 지지자들'의 산물이다.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2

** 열성단원들 **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 정통주의가 걸어온 길은 대단히 잘 알려져 있으며 훌룡하게 문서화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길은 '메시지 지지자들'의 최종적인 승리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서구 문명의 지침적이고 주도적인 원리로 수용되기는 했지만 전혀 도전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몰래 도망쳤을 때부터 이미 그 가족의 주장들 및 그 가족의 존재는 강력한 호소를 발휘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호소력은 로마의 정통주의를 크게 위협했다.

로마의 정통주의는 근본적으로 신약성서의 책들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 신약성서 자체는 4세기에 기원된 초기 기독교 문서들의 한 발췌일 뿐이다. 현재의 신약성서보다 더 먼저 씌어진 대단히 많은 다른 작품들도 있는데. 그중 어떤 것들은 공인된 기록보다 의미있고 때로는 논쟁적인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예를 들면 이단적이라 해서 성서에서 제외된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에는 오늘날 외경이라고 알려진 편집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경들에 있는 어떤 책들은 후대의 것으로 6세기에 기원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책들은 이미 2세기에도 널리 보급되어 있던 책들이며 따라서 원래의 복음서들 자체만큼이나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책들 중의 하나가 <베드로 복음서>인데 그 책의 한 복사본이 1886년에 나일강 상류의 한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 책은 A.D. 180년에 안디옥의 주교에 의해 언급되고 있는 책이다. 그 '외경적' 복음서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은 본디오 빌라도의 친한 친구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십자가 처형이 눈속임이었을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베드로 복음서도 역시 예수가 묻힌 무덤은 '요셉의 동산'이라고 불리우는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한 최후의 말, 즉 「나의 능력이여 나의 능력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 특히 주목을 끌고 있다.

또 다른 흥미있는 외경서는 2세기 중에 기원되었으며 그보다 더 이전에 기원되었을 수도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아복음서>이다.

이 책을 보면 예수는 뛰어나기는 했지만 대단히 인간적인 어린이로 묘사되어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격렬하고 다루기 어려웠으며 성질을 마구 부리며 그의 힘을 대단히 무책임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번은 그가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을 때려 죽였다.

어떤 독재적인 스승도 이와 유사한 경우를 당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그가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신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당시에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어린시절에 예수가 한 좋지 못한 행위들 이외에도 유아복음서에는 하나의 기묘하고 중요한 단편이 있다. 예수가 할례받았을 때 그의 양피는 어떤 알 수 없는 노인에 의해 도난되었는데 그 노인을 그 양피를 희고 매끄러운 향유상자에 넣어 보존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죄인 마리아가 입수하여 기름을 담았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었던 바로 그 상자이다」

그런데 공인된 복음서들에서처럼 여기에도 일반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도유식 즉 어떤 중대한 의식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도유식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그 도유식이 오래전에 미리 예견되어졌고 준비되어 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건 전체는 비록 모호하고 뒤얽힌 사건이기는 하지만 예수가 30세 때 포교를 시작하기 오래전에 이미 막달라와 예수가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부모가 예수의 양피를 요구하는 그 첫 번째 노인에게 그것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비록 그렇게 기괴한 요구에는 비정상적인 어떤 점이 없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 노인은 중요한 어떤 사람이거나 또는 예수의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어떤 사람임이 틀림없다.

막달라가 그후 그 기괴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것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막달라와 그 노인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또다시 우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였던 어떤 점을 희미하게나마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경의 여러 책들에 있는 어떤 구절들은, 예를 들면 예수의 어린 시절의 탁월함을 표현하는 어떤 구절들은 후세의 정통주의를 난처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그 구절들은 오늘날의 대부분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외경들도 신약성서의 공인된 책들처럼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예수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의도로 작성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외경에는 그 '메시지'를 크게 손상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수록되어 있다고 볼 수 없다. 그 '메시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란 분명히 예수의 정치활동에 관한 어떤 언급일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의 왕조적 야심들에 관한 언급일 것이다. 그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한 증거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곳을 조사해야 한다.

예수 당시의 성지에는 대단히 많은 서로 다른 유대교적 그룹들, 당파들, 종파들 그리고 소종파들이 있었다. 복음서들에는 이들 중 오직 두 파만이, 즉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두 파는 모두 악한 역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악역은 로마 정부와 협력했던 사두개파에게만 적용되어야 했을 것이다. 바리새파는 계속 로마에 강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실제로 바리새인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근본에서는 바리새적 전통 안에서 활동했다.

로마화된 청중에게 호소하기 위해 복음서들은 로마를 무죄로 취급하고 유대인들을 모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잘못 전달되어져야 했으며, 왜 사두개인들과 함께 의도적으로 낙인찍혀야 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왜 복음서속에는 열성당원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는가?

열성당원들이야말로 로마인들이 철저히 악당들로 간주했을 호전적인 민족주의자 '자유투사들'이었으며 혁명가들이었다. 복음서속에서 그들이 생략된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예수는 그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연관은 부인될 수 없었을 것이며 단지 그럴 듯하게 꾸며저 은닉될 수밖에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브랜던(Brandon)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복음서들이 열성당원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예수와 이들 국수주의자들 사이의 관계를 암시해 주고 있음이 분명한데,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관계를 밝히려 들지 않았다.」

열성당원들과 예수의 관련이 무엇이든간에 그가 열성당원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그 두 사람은 '레스타이'라고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알려져 있던 열성당원들에 대한 칭호였다.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복음서속에서 때때로 열성당원들과 아주 유사한 공격적인 군국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유명한 한 구절에서 그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주검을 주러」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그는 검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추종자들에게 검을 사라고 지시하고 있다.(눅 22:36). 그 후 그는 유월절 음식을 마친 후에 그들이 검으로 무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눅 22:38). 제4복음서를 보면 시몬 베드로는 예수가 체포될 때 실제로 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언급들을 전통적이고 온화하고 평화주의적인 구세주 상과 조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러한 구세주가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특히 그가 그 위에 자기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한 사랑하는 제자가 검을 소지하는 것을 허락했단 말인가?

예수 자신이 열성당원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복음서들의 외적으로 나타나는 바와는 달리 예수와 열성당과의 관련성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예수와 바라바를 관련시킬 수 있는 설득력있는 증거가 있다. 그리고 바라바도 역시 '레스타이(도적)'로 묘사되어 있다.

야고보, 요한 그리고 베드로는 모두 그들이 열성당과 연루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열성당에 동조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칭호들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권위있는 학자들에 따르면 가롯 유다(Judas Iscariot)라는 이름은 '시카리 유다(Judas Sicarii)'라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시카리'는 '레스타이'대신 사용될 수 있었던 열성당의 또다른 용어였다. 실제로 시카리는 열성당 계열에 속하는 하나의 엘리크로 직업적인 암살자였던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는 제자가 있다. 히랍어 마가복음 성서을 보면 시몬은 '카나나이오스'라고 불리워지는데 이것은 열성당에 대한 아랍어의 음역이다.

KJB성서에서 보면 그, 희랍어 단어가 잘못 번역되어 시몬이 '가나안 사람 시몬(Simon the Ganaanite)'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몬은 분명히 열성당원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KJB성서조차도 그를 '열성당 시몬'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의 열성당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는 논란의 여기자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복음서속에 열성당원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면 엣세네파가 둥장하지 안흔 것도 역시 그렇다. 예수 당신의 성지에서는 엣세네파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만큼이나 중요한 종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가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그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 세례 요한은 엣세네파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엣세네파에 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한 것은 열성당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했던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엣세네파와 예수의 관련성은 열성당과 그의 관련성처럼 너무나 밀접하고 너무나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부정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관련성은 그럴 듯하게 꾸며져 은닉됐을 뿐이다.

당시의 역사가들과 연대기 저자들의 기록에서 보면 엣세네파는 성지전역에 공동체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곳에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B.C. 150년경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구약성서을 사용했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는 실제적인 역사적 사실로서보다는 비유적인 것으로서 취급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교를 반박하고 태양숭배와 피타고라스적 사상의 요소들을 혼합했던 것처럼 보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을 지지했다. 그들은 입고 있는 백색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되었다.

그 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쿰란에서 발견된 유명한 사해 두루마리들이 본질적으로 엣세네파의 문서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쿰란에 살고 있던 그 금욕주의적 종파가 엣세네파의 사상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엣세네파의 가르침처럼 사해 두루마리들도 이원론적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다윗의 혈통을 가진 메시아, 즉 '도유식을 받은 자'의 출현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들은 또한 특수한 역법(曆法)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역법에 따르면 유월절 의식은 금요일이 아니라 수요일에 거행되었다.

이는 제4복음서에 나타나는 유월절 의시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많은 중요한 점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가 가르친의 어떤 것과 일치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가르침을 그들과 일치시켰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해 두루마리 전문가에 의하면 그 두루마리들은 「신약성서에 있는 많은 사건들이 단순히 메시아에 관해 기대되었던 것들을 예수 자신의 역사 속에다 투시시킨 것들임을 믿게 해주는 추가적인 근거라고」한다.

쿰란 종파가 정확하게 엣세네파였건 아니었건간에 예수는 비록 그가 공식적인 엣세네파의 훈련을 받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엣세네파의 사상에 정통하여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많은 가르침들은 엣세네파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유 능력도 마찬가지로 어떤 엣세네파적 영향력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엣세네파는 예수의 경력에 휠씬 더 중요하게 관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엣세네파 사람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휜 옷에 의해 쉽게 구분될 수 있었다. 그러한 복장은 그림과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당시 성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널리 통용되고 있지는 않았다.

삭제된 '비밀' 마가복음에서 보면 휜 베옷은 중요한 의식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후세의 공인 성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만일 예수가 베다니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신비교의 입회식을 행하고 있었다면, 그 휜 베옷은 이 의식들이 엣세네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더구나 휜 베옷에 관한 주제는 후에 네 권의 복음서속에 다 나타나고 있다. 십자가 처형 후 예수의 시체는 '기적적으로' 무덤에서 자취를 감추며 대신 적어도 한 명의 휜 옷 입은 인물이 그 무덤을 지키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그 인물은 「눈처럼 흰 옷을 입고 있는」 천사이다(마28:3). 마가복음에서 보면 「흰 옷을 입은 청년」이다(막 16:5). 누가복음은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하여 (눅 24:4), 제4복음서는 「흰 옷을 입은 두 천사」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요 20:12)

이 기록들 중 두 곳을 보면 그 무덤에 있는 인물 또는 인물들에게는 아무런 초자연적 지위도 부여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인물들은 제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그렇게 보인다--철저하게 유한적인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이 엣세네파의 신유 능력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가정은 휠씬 더 타당성이 있게 된다. 만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옮겨졌을 때 그저도 살아 있었다면 신양요법을 아는 자들의 도움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가 이미 숨이 끊어져 가망이 없었다 해도 역시 그들은 참석했을 것이다.

우리의 각본에 따르면 예수의 몇몇 지지자들이 빌라도와 결탁하여 개인 소유지에서 거짓 십자가처형을 꾸몄다. 특히 그 처형은 메시지 지지자들에 의해 꾸며졌다기보다, 혈통 지지자들, 다시 말해 직계 가족이나 다른 귀족들, 또는 내부조직의 단원들에 의해 꾸며졌을 것이다.

이들은 엣세네파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으며 또은 엣세네파 단원들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추종자들의 '대오'를 이루고 있던 '말씀 지지자들'--시몬 베드로가 그 대표적인 인물임--에게는 그 책략이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으로 옮겨지자 예수는 의약적인 치료가 필요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엣세네파의 신앙요법사가 초빙되었을 것이다. 그후 그 무덤이 빈 것으로 발견됐을 때 '대오'를 이루고 있는 제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 명의 사자가 다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 사자는 의심하지 않는 메시지 지지자들을 격려해야 했을 것이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중개인으로서 행동해야 했을 것이며, 로마인들이 무덤을 도굴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도록 미리 조치해야 했을 것이다. 이 소문이 알려지면 위험스런 시민적 소요가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각본이 정확하건 정확하지 않건간에 예수가 열성당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만큼이나 엣세네파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언뜻 보면 이것은 약간 기묘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열성당과 엣세네파는 종종 서로 양립할 수 없다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열성당은 공격적이고 격렬하며 호전적이고 암살과 폭동도 꺼리지 않았다. 반대로 엣세네파는 대체로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경건하고 평화적이며 점잖은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열성당원들 가운데는 많은 엣세네파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열성당은 하나의 종파가 아니라 정치적 당파였기 때문이다. 정치적 당파로서 그들은 반로마적인 바르새파로부터 지지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들만큼이나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엣세네파로 부터도 지지되었다.

열성당과 엣세네파의 연합은 당시의 팔레스타인에 관해 많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요세푸스의 기록들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요셉 벤 맛디아(Joseph ben Matthias)는 A.D. 37년에 유대의 귀족으로 태어났다. A.D. 66년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갈릴리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배치된 군대를 지휘했다.

군사적 지휘관으로서의 그는 아주 무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곧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사로잡혔다. 거기서 그는 퀴슬링(Quisling)으로 갔다. 플라비우스 요셉푸스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로마 시민이 되었고, 그의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의 공주와 결혼했으며 황제로부터 후한 선물을 받았다.

그 선물 중에는 황제의 궁전에 있는 개인저택과 성지에 있는 유대인들로부터 몰수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죽을 무렵인 A.D. 100년에는 그 시대에 관한 그의 방대한 역사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전쟁>에서 요세푸스는 A.D. 66년과 74년 사이의 반란에 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그 후의 역사가들은 그 비참한 반란, 예루살렘의 약탈, 그리고 성전의 파괴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을 요세푸스의 글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작에는 사해 남서부에 위치해 있던 마사다 요새가 A.D. 74년에 함락된 것이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약 120년 후의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도 후에 전혀 승산이 없는 불굴의 의지, 용맹, 그리고 헌신을 상징하게 되었다. 몽세귀르처럼 마사다로 다른 모든 조직적인 저항이 실제로 종식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해서 침략자에 저항했다. 여타의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의 맹공으로 붕괴되었지만 마사다는 여전히 함락되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러다 A.D. 74년에야 그 요새는 함락되었다. 강력한 공격 무기를 가지고 계속해서 포격을 가한 끝에 로마인들은 사다리를 설치하여 그 방어 진지를 무너뜨리기에 이르렀다. 4 월 15일 밤에 그들은 대공세를 준비했다. 같은 날 밤에 그 요새에 있던 960명의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집단으로 자살하였다. 다음날 아침 로마인들이 성문을 부수었을 때 거기에는 불타다만 시체들만이 뒹글고 있었다.

요세푸스는 4 월 16일 아침에 마사다성으로 진군해 들어간 로마군병들을 따라갔었다. 그리고 그 시체더미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으며 그 중 세 명의 생존자들을 만나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한 명의 여인과 두 명의 아이들로서, 나머지 수비대들이 자살하는 동안 성채 밑에 있는 하수도에 숨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요세푸스는 이 생존자들로부터 전날밤에 일어났던 일을 자세리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 수비대의 대장은 엘르아잘(Eleazar)이란 사람이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이름은 나사로의 별명이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이 그런 무서운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은 그의 설득력있고 카르스마적인 웅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는 그의 역사책에서 세 명의 생존자들에게서 들었다고 하는 엘르아잘의 연설을 되풀이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연설은 퍽 흥미가 있다.

역사에 의하면 마사다는 호전적인 열성당에 의해 방어되었다. 요세푸스도 '열성당(Zealots)'과 '시카리(Sicarii)'라는 말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엘르아잘의 연설은 전통의 유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엣세네적, 즉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가깝다. 그의 연설은 이렇다.


원시인이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우리의 조상들의 행동과 정신에 의해 지지된 신들의 말씀은 한결같이 삶은 인간의 불행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며 어떤 불행도 맛보지 않을, 그들 자신의 순수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그 영혼들이 유한한 육체에 갇혀 육체의 슬픔을 나눠가지는 동안은, 엄격한 의미에서, 그 영혼들은 죽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유한한 육체와 결합되어 있는 것은 가장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육체에 갇혀 있을 때애도 커다란 일을 할 수 있기는 합니다.

확실히 그렀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감각기관입니다. 영혼은 자유로이 움직이며 유한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땅에 매이게 하는 짐을 벗어버리고 그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실로 영혼은 축복된 힘과 전혀 얽매이지 않는 힘을 소유하게 되며 하나님처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영혼이 육체 안에 들어오며 보이지 않게 떠납니다. 영혼은 불멸의 존재가 되지만 육체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살고 꽃을 피웁니다. 영혼이 떠난 것은 무엇이든 말라 죽습니다. 영혼은 그처럼 엄청난 불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명을 자연에게 바쳐야 할 일종의 봉사로 간주하여, 주저하지 않고 영혼을 육체의 속박에서 풀어주는 사람들은 진정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불행도 그 영혼들을 억누르거나 쫓아내지 못합니다. 불멸의 삶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를 때 영혼은 오히려 친구인 육체를 떠나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한 어떤 학자도 이 연설에 관해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연설들은 많은 자극적인 의문을 야기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느 점에서도 정통적인 유대교는 '영혼'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며 영혼의 불멸성에 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 영혼이라는 개념과 불멸성이라는 개념은 유대교적 전통과 사상의 주류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물질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일치, 그리고 삶을 악한 것이라고 저주하는 것 등도 역시 유대교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들은 신비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런 태도들은 분명히 영지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이다. 그리고 마사다와 같은 상황에서는 엣세네파적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물론 이러한 태도가운데 어떤 것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적'이라고 묘사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그후 편집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말은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 예를들면 제4복음서에서 죽음에 의해 나사로와 일치하고자 한 추종자들에게 적용되었을 수도 있다. 마사다의 수비대원들 중에는 예수의 혈통을 지지하는 몇몇 지지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A.D. 66에서 74년까지의 반란기간 동안에는 유대인들만큼이나 격렬하게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싸운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사실 많은 열성당원들은 오늘날 '초기 기독교인들'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얼마가 마사다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요세푸스는 이런 점에 관하여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제시했다 할지라도 후세의 편집자들은 그것을 삭제했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요세푸스에게서 예수에 관한 어떤 언급을 기대하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편집한 요세푸스의 작품속에는 그러한 언급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언급들은 이미 확립된 정통주의가 제시하는 대로 예수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언급들은 콘스탄틴 시대보다 더 이르지 않은 때에 생긴 그럴 듯한 가필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에 요세푸스의 저작이 러시아어로 번역된 그 본문 자체는 대략 1261년경에 기원되었다. 그 본문을 베낀 사람은 정통적인 유대인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전 기독교적' 언급들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세푸스의 이 역본에 있는 예수는 인간적인 존재로서 묘사되어 있으며 하나의 정치적인 혁명가로 묘사되어 있고 '통치하지 않는 왕'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또한 「나실인들의 관례대로 그의 머리 중앙에 하나의 계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많은 정력을 기울여 오늘날 「슬라브어 요세푸스」라고 불리우는 것의 진정성 여부를 논의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이 다소 진실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었다. 즉 그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문서 파괴에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으며 콘스탄틴 통치하에서 회복된 정통주의의 편집망을 피한 요세푸스의 한 사본 또는 사본들로부터 번역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결론짓는 데에는 많은 타당성 있는 이유들이 있다. 예를들면 만일 슬라브어 요세푸스가 위조품이었다면 그것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위조되었을 것인가?

예수를 왕으로 묘사한 것은 13세기의 유대교 독자들에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인간으로 묘사한 것도 13세기의 기독교도들을 조금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3세기 초에 저작 활동을 한 교부 오리게네스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부인하는 요세푸스의 한 역본을 암시해 주고 있다. 원래는 진정한 '표준'역본이었을 수 있는 이 역본이「슬라브어 요세푸스」의 본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3

** 영지주의적 저술들  **

A.D. 64∼74년의 반란이 있은지 약60년 후인 132∼135년에는 두 번째의 중요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요의 결과로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되었으며 예루살렘은 로마의 도시가 되었다. 그런 첫 번째 반란이 일어났을 때조차도 성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후 200년 동안은 실제로 아무런 기록도 없는 셈이다.

실제로 그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소위 '암흑기'의 유럽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밖엣이긴 하지만 그 나라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그랬다. 또 에비온이라고 불리우는 유대 구역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유한한 존재인 예수를 예언자로서 존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와 기독교의 실질적인 정신은 성지에서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임 주민의 대다수는 약 700년 전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되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로 즉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고올, 영국, 북아프리카 등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A.D. 33년에 그 무렵에 일어났던 일에 관해 크게 모순되지 않은 기록들이 문명 세계의 도처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조자들에 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록들은 '이단'이라고 공식적으로 낙인이 찍히었지만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그들 중에 어떤 것들은 경건한 유대인들 및 에비온파와 같은 집단들--에비온파는 이러저러한 형태로 기독교로 개종된 유대교 개종자들이었다--에 의하여 보존된 모종의 직접 지식에서 유래되었음이 분명하다.

다른 기록들은 전설과 소문에 의존하였으며 이집트적·희랍적·그리고 미드라적 신비주의 전통과 같이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들을 혼합한 것에 의존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독특한 자료들이 무엇이었든지간에 그들은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즉 위치를 다지고자 하는 정통주의자들에게 많은 불안을 안겨주었다.

초기 '이단들'에 관한 정보는 빈약하다. 그들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은 주로 그들의 적대자들이 행한 공격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그 지식은 자연히 게쉬타포 문서들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프랑스 혁명의 모습처럼 하나의 왜곡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예수는 초기의 '이단자들'에 의해 둘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완전히 신으로 생각하여 인간적인 속성이 거이 없는--설령 있다손 치더라도--존재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본질에 있어서 불타나 500년 후의 모하멧과 다르지 않은 하나의 유한한 인간적 예언자로 보았다.

초기 이단의 시조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생의 후반부를(A.D. 136∼65) 로마에서 보낸 발렌티누스였다. 그당시 발렌티누스는 대단히 영향력있는 인물이었는데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프톨레미우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의 '비밀 가르침들'의 본체를 터득하고 있다고 주장한 그는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인격적 지식이 어떤 외적인 지위보다도 더 앞선다고 단언했다. 당연히 발렌티누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레나이우스를 진노케 했을 것이다.

또다른 공격 대상은 마르키온이었다. 그는 부유한 선박왕이자 주교로 140년경 로마에 도착하여 4 년 후에 파문되었다. 마르키온은 '율법'과 '사랑'을 철저히 구분했는데 전자를 구약성서에 연관시켰으며 후자을 신약성서와 관련시켰다. 이들 마르키온적 사상들중 어떤 것은 1천년 후<펠레스보>와 같은 어떤 책속에서 나타났다.

마르키온은 성서의 정경 목록을 최초로 작성한 인물이었는데 그의 정경목록에는 구약성서 전체가 제외되어 있다. 이레나이우스가 그의 정경목록을 작성한 것은 마르키온에 대한 즉각적인 웅수에서 였는데 그 목록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의 기초가 되었다.

세 번째 중요한 이단 창시자로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흥미있는 사람은 A.D. 120과 130년 사이에 글을 쓴 알렉산드리아 학자 바실리데스였다. 바실리데스는 희브리어 성서들과 기독교 복음서들을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이집트와 헬레니즘적 사상에도 심취되어 있었다.

그는 24개에 달하는 복음서 주석들을 썼다고 추정된다. 이레나이우스에 따르면 그는 가장 가증스런 이단을 전파했다. 바실리데스는 십자가 처형이 사기였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고, 키레네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은 괴이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대단히 끈질기고 강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7세기경 코란도 정확하게 이와 동일한 주장을 하였다. 즉 어떤 대리인이--전하는 바로는 키레네 시몬이라고 알려져 있음--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제 1장에서 논의된 문제의 편지를 쓴 사제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 편지는 대리 십자가 사건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에 대해서 언급했다.

초기 이단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집트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알렉산드리아였다. 그곳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학식있고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으며 로마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대단히 다양한 신앙, 교훈, 그리고 전승의 집산지였다. 유대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반란 이후 이집트는 유대교의 도망자들과 기독교 도망자들 모두에게 있어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안식처임이 입증되었다.

그 도망자들의 대부분이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우리의 가정을 지지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증거는 소위 '영지주의 복음서들' 더 정확하게 말해 '나그 하마디 문서들(Nag Hammadi Scrolls)'에 수록되어 있었다.

1945년 12월 고지 이집트에 있는 나그 하마디란 마을 근처에서 부드럽고 비옥한 땅을 파던 한 이집트의 농부가 붉은 토기 항아리를 발견했다. 그 항아리에는 가죽으로 제본된 13개의 사본들 즉 파피루스 책들 또는 두루마리드이 들어 있었다.

그 발굴물의 증요성을 알지 못한 그 농부와 그 가족이 그 사본들중 일부를 불 지피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드디어 나머지가 전문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어 그중 하나가 이집트에서 밀반출되어 암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융 파운데이션(C.G. Jung Foundation)에 의해 구입된 이 사본의 일부에는 오늘날 잘 알려진 '도마복음'이 수록되어 있었다.

한편 이집트 정부는 나그 하마디 총서의 나머지 부분을 1952년에 국유화하였다. 그러나 1961년에야 비로소 국제적인 학자들의 모임이 소집되어 그 자료 전체를 복사하고 번역했다. 1972년에는 사진판의 제 1권이 출판되었고 1977년에는 두루마리 전체가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나그 하마디 문서는 본질상 영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성서본문 전체를 담고 있다. 그 문서는 4세기 후반이나 5세기 초에 즉 A.D. 400년경에 기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두루마리들은 사본들이다. 딸서 그것들이 베껴진 원본들은 휠씬 더 이전에 기록되었다.

그들 중 예를들면 도마복음, 진리복음, 이집트복음 등과 같은 것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콜레멘스, 이레나이우스, 그리고 오리게네스와 같은 최초의 교부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두루마리들에 있는 본문들의 대부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약간은 A.D. 15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확정지었다.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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