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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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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진표율사(眞表律師)-한국불교연구원
진표율사(眞表律師)

     <1> 진표전간(眞表傳簡)

중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목(全州牧)) 만경현(萬頃縣-혹 두내산현(豆乃山縣)이라 하고 혹 나산현(那山縣)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경 옛 이름이 두내산현이다. 관녕전(貫寧傳)에 중 □의 향리라 하고 금산현인(金山縣人)이라 하였으니, 절 이름과 현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 사람이다. 아버지는 진내말(眞乃末)이요, 어머니는 길보랑(吉寶娘), 성은 정씨(井氏)다.12세에 금산사(金山寺) 숭제법사(崇濟法師)의 문하에 가서 삭발하고 수업을 청했다. 법사가 이르되 "내가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수업한 후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서 오계를 받았다" 하였다. 진표가 아뢰되 "얼마나 부지런히 수행하면 계를 얻습니까" 하니, 숭제는 "정성만 지극하면 1년을 넘지 않느니라" 하였다. 진표는 법사의 말을 듣고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러 삼업(三業)을 수련하여, 망신참(亡身懺)으로 □□□했다. 처음에는 일곱 밤 기한하고 몸을 땅에 메쳤더니 무릎과 팔꿈치가 모두 깨어지고, 피가 빗물처럼 바위에 흘렀는데, 아무런 영험이 없는 것 같아 몸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다시 7일을 기한하여 그 칠일을 마치니 마침내 나타난 지장보살(地藏菩薩)로부터 정계(淨戒)를 받았다. 그것이 개원(開元) 28년 경진(庚辰) 3월 15일이요, 그때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그의 뜻은 자씨(慈氏)에 있었으므로 감히 중지하지 못하고 이어 영산사(靈山寺-일명 변산(邊山) 또는 능가산( 伽山)이라 한다)로 옮겨가서 여전히 정진하였다. 과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감응하여 나타나 [점찰경(占察經)] 두 권(이 경은 진(陳).수(隋) 때에 외국에서 번역된 것으로 지금의 것은 처음 나온 것은 아닌데, 자씨(慈氏)가 이 경을 주었다는 말이다)을 주고, 아울러 증과(證果)하는 간자(簡子) 189개를 주며 이르되 "이 중의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더 얻는 구계(具戒)를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것인데, 모든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네가 이것으로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제도하는 도구로 삼아라" 하였다.
진표가 성인의 기별(記 )을 받고 금산사(金山寺)에 가 있으면서 해마다 법좌(法座)를 열어 널리 법시(法施)를 베푸니, 단석(壇席)의 엄정함이 세상에 다시 없었다. 교화가 이미 두루 미치자 유람하여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이르니 고기들이 섬 사이에 다리를 이루어 수궁으로 맞아들이는지라. 법을 강설하고 계를 주었다. 그것은 천보(天寶) 11년 임진(壬辰) 2월 보름이었다. 어떤 책에 원화(元和) 6년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원화는 헌덕왕(憲德王-성[경]덕왕 때와 거의 70년이나 상거한다) 때에 해당한다.
경덕왕이 듣고 진표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벼 77,000 석을 보시하였으며, 황후와 궁녀들도 모두 계품(戒品)을 받고 비단 500 단과 황금 50 냥을 보시하였다. 모두 받아 여러 절에 나눠주어 불사를 널리 일으키게 하였다. 진표의 사리(舍利)는 지금 발연사(鉢淵寺)에 있으니, 곧 바다 물고기류를 위해 계를 연설한 곳이다.진표에게서 법을 얻은 영수(領袖)로는 영심(永深) . 보종(寶宗) . 신방(信芳) . 체진(體珍) . 진해(珍海) . 진선(眞善) . 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山門)의 조사(祖師)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의 간자(簡子)를 전해받고 속리산에 살아 법을 이어받을 만하게 되었다. 단(壇)을 꾸미는 법은 [점찰경] 육륜(六輪)과 약간 달랐으나, 수행은 산중에 전하는 본규(本規)와 같았다.
[당승전(唐僧傳)]을 살피건대, 개황(開皇) 13년에 광주(廣州)의 어떤 중이 참법(懺法)을 행하는데, 가죽으로 첩자(帖子)  둘을 만들어 선.악 두 글자를 써서 사람들에게 던져 선자를 얻으면 길하다 하고, 또 자박참법(自撲懺法)을 행하여 죄를 멸하게 한다하여 남녀가 서로 모여앉아 망령되이 받아 은밀히 행하므로, 청주(靑州)에까지 영향이 있어 관리들이 검색해 보고서는 요망한 짓이라 하니, 저들은 이 탑참법(搭懺法)은 [점찰경]에 의한 것이고, 박참법(撲懺法)은 모든 경 중의 오체투지(五體投地)함이 큰 산이 무너짐과 같다는 것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이 사실을 조정에 아뢰니 내사시랑(內史侍郞) 이원찬(李元撰)에게 명하여 대흥사(大興寺)에 가서 여러 대덕에게 물어보게 하였는데, 큰스님 법경(法經) . 언종(彦琮)이 대답하되 "점찰경]은 두 권이 있는데 제목에 보살등(菩薩燈)이라 한 것은 외국에서 번역한 것으로 근래에 나온 것 같으며, 또 사본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으나 여러 기록을 조사해 보아도 바른 이름 . 번역자 . 연대 . 장소가 없고, 탑참은 여러 경과 또 다르니 그대로 행할 수 없는 것이
라" 하였다. 그래서 칙령으로 금하게 했다.이제 시험삼아 논하건대, 청주 거사 등의 탑참 따위의 사건은 마치 대유(大有)들이 시서(詩書)로 발총(發塚)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가위 범을 그리다가 개가 된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의 예방은 바로 이런 것을 위한 것인데, 관악 [점찰경]이 번역자나 시대 .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의심스럽다 하면 이 역시 삼(麻)을 취하고 금을 버린 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 경문을 자세히 보면, 실단(悉檀)을 깊이 살펴 더러움을 씻어버리고 게으른 자를 격앙시킴에 이 책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승참(大乘懺)이라고도 하며, 또한 육근취(六根聚) 중에서 나왔다고도 한다.개원(開元) . 정원(貞元) 때에 나온 두 석교록(釋敎錄) 중에도 정장(正藏)으로 편집된 것이니, 비록 성종(性宗)에는 제외되었을지라도 상교대승(相敎大乘)이 되기는 넉넉할 것이다. 어찌 탑 . 박 두 참과 똑같이 말할 것이랴. 저 사리불문경(舍利佛問經)에 부처님이 장자자(長者子) 빈야다라( 若多羅)에게 이르시되 "너는 7일 7야에 네 전생의 죄를 뉘우쳐 모두 청정하게 하라" 하니, 빈야다라가 가르침을 받들어 밤낮으로 슬퍼하는데, 5일째 되는 날 저녁에 방 안에 여러 가지 물건이 떨어졌다. 손수건 . 머리수건 . 불자(拂子) . 비 . 칼 . 송곳 . 도끼 등이 눈 앞에 떨어졌다. 빈야다라가 기뻐서 부처님께 물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것은 속세를 떠날 상이니, 끊어버릴 물건이다" 하셨다.
이에 의거하건대, [점찰경]에 윤(輪)을 던져 상을 얻는 일이 어찌 다르랴. 이에 진표가 참회를 부지런히 하여 간자를 얻었으며, 법을 듣고 부처님을 뵈었으니 가위 속임이 없다 할 수 있다. 하물며 이 경이 거짓이라 하면 자씨(慈氏)가 어찌 이것을 친히 진표사에게 주었겠는가. 또 이 경을 금할 것이라면 [사리불문경] 또한 금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언종의 무리는 가위 금만 움키고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이니, 읽는 사람은 자세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찬한다. 말세에 현신하여 귀먹고 어리석은 자 일깨우니 영악(靈岳)과 선계산(仙溪山)에 감응이 통했다. 은근히 탑참을 전했다 이르지 말라. 어룡도 감화하여 동해에 다리를 놓았다.

출전: 일연(김영수 옮김), [삼국유사 2], 1990, 서울, 일신서적출판사, pp. 324 - 328.

<2>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
(이 기문(記文)은 사주(寺主) 영잠(瑩岑)이 지은 것으로 승안(承安) 4년에 비석을 세웠다.)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全州)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12세에 출가할 뜻을 갖자 아버지가 허락하여, 율사는 금산수(金山藪) 순제법사(順濟法師)의 처소에 가서 중이 되었다. 순제가 사미계법을 주고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전해 주며 말하기를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 지장 두 보살 앞에서 지성으로 참회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서 세상에 펴라" 하였다. 율사는 가르침을 받고 물러나와 두루 명산을 돌아다녔다. 나이 이미 27세가 되니, 상원(上元) 원년 경자(庚子)에 쌀 스무 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保安縣)으로 가서,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하루의 식량을 다섯 홉으로 정하고 그 중의 한 홉을 쥐를 먹였다. 율사가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지만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분한 마음에 바위 아래로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아서 돌 위에 놓았다. 율사는 다시 발원하여 삼칠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하였다. 돌을 치며 참회하기 3일에 손과 팔뚝이 부러졌다. 7일째 밤이 되자 지장보살이 손으로 금석(金錫)을 흔들며 와서 가호를 하니, 손과 팔뚝이 전처럼 되고, 보살은 가사와 바리때를 주었다. 율사는 그 영험에 감격하여 갑절 더 정진하였다. 삼칠일이 차자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兜率天)의 무리가 와서 예를 드리는 광경을 보았다. 이에 지장보살과 자씨보살이 앞에 나타나, 법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르되 "장하다 대장부야, 이렇듯 계를 구해 몸을 아끼지 않고 지성으로 참회하는구나"하고, 지장보살은 계본(戒本)을 주고, 자씨보살은 다시 두 간자(簡子)를 주었다. 그 하나는 구(九)라 썼고, 또 하나는 팔(八)이라 썼는데 자씨보살은 율사에게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인데 시(始) . 본(本)의 두 깨달음에 비유한 것이다. 또 구(九)란 것은 법이요, 팔(八)이란 것은 새로 훈목한 부처를 이루는 종자이니, 이것으로 과보를 알 것이다. 네가 이 몸을 버리면 큰 나라의 왕의 몸을 받고, 그 후에는 도솔천궁에 날 것이다" 하였다. 말을 마치자 두 성인은 사라졌는데, 이때가 임인 4월 27일 이었다. 법사가 교법을 받고는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하려고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홀연 용왕이 나와서 옥가사를 바치고, 8만의 권속을 데리고 금산수(金山藪)로 오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와 며칠이 안되어 완성하였다. 다시 자씨보살(慈氏菩薩)이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법사에게 계법을 주는 것을 감득하였다. 이에 율사가 불도들을 권하여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주성(鑄成)하였으며, 다시 계법을 주던 위용을 금당(金堂)의 남쪽 벽에 그렸다. 갑진 6월 9일에 주성하여 병오 5월 1일에 금당에 안치하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이었다.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俗離山)으로 가다가 길에서 소 수레를 타고 오는 이를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수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내려와서 묻되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화상을 보고 웁니까, 화상은 어디서 오십니까" 하니, 율사가 대답하기를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중이오.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가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서 계법 진생(眞 )을 받고 절을 창건하여 길이 수도할 곳을 찾고자 가는 길이오. 이 소들이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현명하여 내가 계법 받은 것을 알고 법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오" 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짐승도 이렇듯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가 사람이 되어 어찌 신심이 없겠는가" 하고서는 곧 스스로 낫으로 두발(頭髮)을 잘랐다. 율사가 다시 비심(悲心)으로 그의 머리를 깎고 계를 주었다.속리산에 이르러 골짜기에 길상초(吉祥草)가 나 있는 곳을 보고, 표시해 두고 다시 명주(溟州 - 강릉)로 향하여 바닷가를 천천히 걷는데 물고기와 자라들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에 육지처럼 몸을 연이었다. 율사가 그 위를 밟고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 계법을 외어주고 도로 나와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렀다.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에 들어가 발연수(鉢淵藪)를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어 7년간을 머물렀다. 그때 명주 경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율사가 그들을 위하여 계법을 강설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간직하고 삼보(三寶)를 공경하였다. 얼마 뒤 고성 해변에 무수한 고기들이 저절로 죽어 나와 백성들이 이것을 팔아 양식을 장만하여 죽기를 면했다. 율사가 발연수에서 나와 다시 부사의방에 이르렀다가, 뒤에 고향 집으로 가서 아버지를 뵙고 간혹 진문대덕방(眞門大德房)에 가 머물렀다. 그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永心)이 대덕 융종(融宗) . 불타(佛陀) 등과 함께 율사의 처소에 와서 간청하기를 "저희들이 천리를 마다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오니 원컨대 법문을 열어 주소서" 하였으나, 율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세 사람이 복숭아 나무에 올라가서 거꾸로 땅에 떨어져 용감하게 참회하니, 이에 율사가 전교 관정(灌頂)하고, 가사와 발우와 공양차제비법 1권, 일찰선악업보경(日察善惡業報經) 2권, 189 생(笙)을 주고, 다시 미륵보살의 진생(眞笙) 구(九) . 팔(八)을 주며 경계하기를 "구(九)는 법이요, 팔(八)은 새로 훈목한 부처를 이루는 종자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부탁하니 너희는 이것을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산에 길상초가 나는 곳이 있으니 거기에다 정사를 짓고 이 교법에 따라 널리 인천(人天)을 제도하고 후세에 유포하라" 하였다. 영심 등은 가르침을 받들어 바로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영심은 여기서 비로소 점찰법회를 개설하였다.율사는 아버지와 함께 다시 발연으로와서 같이 도업을 닦으며 효행을 다했다. 율사는 천화(遷化)할 때에 절의 동쪽 큰 바위에 올라가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시신을 움직이지 않고 공양하다가 뼈가 삭아 흩어지게 되자 흙으로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소나무 한그루가 돋아났다가 오랜 세월 뒤에 말라죽고, 다시 한 그루가 나고, 뒤에 또 한그루가 났는데, 그 뿌리는 하나였다. 지금까지도 두 그루가 있다. 무릇 경의를 표하는 이들이 소나무 밑에서 뼈를 찾아 얻기도 하고 못 얻기도 하였다. 내가 성골(聖骨)이 인멸할까 염려하여 정사(丁巳)년 9월에 소나무 밑에 가서 뼈를 주워 통에 담으니 세홉쯤 되었다. 바위 위의 쌍수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뼈를 봉안하였다. 이 기록에 실린 진표의 사적은 발연석기(鉢淵石記)와 같지 않은 데가 있으므로, 영잠(瑩岑)이 기록한 것을 간추려 싣는다. 뒤의 어진 사람들은 자세히 살피라. 무극(無極)은 기록한다.

출전: 일연(김영수 옮김), [삼국유사 2], 1990, 서울, 일신서적출판사, pp. 328 - 331.

<3> 진표율사의 신앙(信仰)

1. 진표율사의 생애(生涯)
진표(眞表)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진표전간(眞表傳簡)>과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 외에도 중국(中國) 문헌(文獻)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송고승전(宋高僧傳)] 중의 <백제국(百濟國) 금산사(金山寺) 진표전(眞表傳)>[신승전(神僧傳)] 중의 <진표(眞表)>[육학승전(六學僧傳)] 중의 <진표전(眞表傳)>이들 문헌(文獻) 중 서기 988년에 찬영(贊寧)이 주(主)가 되어 지은 [송고승전]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신승전]과 [육학승전]의 기록은 그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고, 또 [송고승전]의 <진표전>을 요약해서 전해주고 있으므로 문헌적(文獻的)인 가치는 적다.
[삼국유사]의 두 기록은 모두 고려후기(高麗後期)에 된 것이다. 즉 <진표전간>은 [삼국유사]의 저자(著者) 일연(一然)의 기록이고, <관동풍악발연수석기>는 발연사(鉢淵寺)의 주지(住持) 영잠(瑩岑)이 고려 신종(神宗) 2년(서기 1198)에 지은 <발연수진표율사골장입석비명(鉢淵藪眞表律師骨藏立石碑銘)>을 일연의제자 무극(無極)이 초(抄)하여 부기(附記)한 것이다.[삼국유사]의 두 기록이 [송고승전]의 그것보다 후대(後代)에 된 것이라고는 하나, 국내(國內)에서의 기록이란 점으로 볼 때 중요한 것이다. 더구나 진표(眞表)가 중국에 갔던 일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송고승전]이 연대적으로 앞선다고 해서 반드시 문헌적 가치가 높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튼 [삼국유사]의 두 기록(이하에서 [진표전간]은 [전간]으로, [관동풍악발연수석기]는 [석기]로 약칭(略稱)함)과 [송고승전]의 내용(이하에서 [백제국 금산사 진표전]을 [진표전]으로 약칭함)을 서로 참고하면서 진표의 생애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1) 출가(出家)와 수도(修道)

진표가 출생한 곳은 완산주(完山州) 벽골군(碧骨郡) 두내산현(豆乃山縣) 대정리(大井里)로서, 지금의 만경(萬頃)이다.([전간] 및 [석기] 참조) 그의 속성(俗姓)은 정씨(井氏)로 아버지 진내말(眞乃末)과 어머니 길보랑(吉寶娘) 사이에서 태어났다.([전간] 참조) 그의 가계(家系)는 향리(鄕里)에서 대대로 사냥을 하면서 살았다. 진표는 날쌔고 민첩하였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았다.([진표전] 참조) 사냥으로 생계를 꾸려온 태어난 진표는 어릴적 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하면서 자랐던 것 같다. 그의 나이 12세 되던 어느날 그에게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그는 이 일로 하여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가 출가의 뜻을 품게된 동기에 대해서 [진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개원년간(開元年間; 서기 713 - 742)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날 진표는 사냥을 나가서 짐승을 쫓다가 잠시 밭두덕에서 쉬었다.  그때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본 그는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꿰미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사냥이 끝난 뒤에 가져가기 위해 물 속에 담가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하던 그가 집으로 갈 때에는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 개구리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듬해 봄 진표는 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물속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그 물 속을 들여다 보았다. 거기에는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도 살아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지난 해의 그 일이 생각났다. 그는 잊어버리고 1년을 지났는데, 입을 꿰매인 개구리는 그때까지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곧 그 개구리를 풀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하여 그는 출가의 뜻을 품게되고, 마침내 깊은 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
이상이 [진표전]에 전해지고 있는 진표의 출가 동기다.
이처럼 진표의 출가에는 한 절실한 계기가 있었다. 울음우는 개구리의 고통을 통해서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는 아픔,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12세 소년은 구도(求道)의 먼 길을 떠나고자 결심했다.아버지로부터 출가를 허락받은 진표는 금산사(金山寺) 순제법사(順濟法師;[전간]에는 숭제법사(崇濟法師)로 되어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수없다)의 강하(講下)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석기] 참조) 순제법사는 일찍이 당(唐)나라에 유학하여 선도삼장(善道三藏)에게 수업(受業)하였고, 그 후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감응(感應)으로 오계(五戒)를 받기도 했던 사람이었다.([전간] 참조) 어느날 스승 순제법사는 진표에게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주고, [공양차제법(供養次第法)] 1권(卷)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전해주면서, "너는 이 계법(戒法)을 지니고 미륵(彌勒)과 지장(地藏)의 양성(兩聖) 앞에서 간절히 구하고 참회(懺悔)하여 친히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고 하였다. 이에 진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물러나와 두루 명산(名山)을 편력(遍歷)하였다. 이상은 [석기(石記)]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석기]에서는 계속해서 진표가 참법수행(懺法修行)을 통해 지장. 미륵 두 보살로부터 수기(授記)를 받은 일에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율사(律師)의 나이 27세 되던 상원(上元) 원년(元年; 경덕왕(景德王) 19년, 서기 760년) 경자(庚子)에, 쌀 20말을 쪄서 말린 양식을 가지고, 보안현(保安縣)의 변산(邊山)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들어갔다. 쌀 다섯 홉을 하룻동안의 양식으로 삼고, 한 홉 쌀은 덜어내어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계법을 부지런히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를 받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한 그는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바위위에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뜻을 발해 3.7일을 기약하고 온 몸을 바위에 두들기듯 참회를 밤낮으로 근수(勤修)했다. 3일째 되던 날은 손과 발이 부러져 떨어졌다. 7일째 되던 밤에는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며 와서 그를 가호하여 손과 팔이 전과같이 되었다. 지장보살이 드디어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주었으므로 율사는 그 신령(神靈)스런 감응(感應)에 감동하여 더욱 수도(修道)에 정진했다. 꼭 3.7일이 되던 날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형상을 보았다.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율사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잘 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와같이 계를 구하다니.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 참회하는구나." 지장은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도 두 개의 목간자(木簡子)를 주었는데, 하나는 제구간자(第九簡子)라 씌었고, 다른 하나는 제팔간자(第八簡子)라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은 율사에게 "이 두 간자(簡子)는 내 손가락 뼈로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유한 것이다. 또 구자(九者)는 법이(法爾)이고, 팔자(八者)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과보(果報)를 알 것이다. 너는 이 몸을 버려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훗날 도솔천(兜率天)에 나게될 것이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 두 보살은 숨어버렸다. 때는 임인(경덕왕 21년, 서기 672년) 4월 27일이었다.
이상이 [석기]에 기록된 진표가 미륵보살로부터 수기를 받기까지의 수도생활(修道生活)이다. 이 [석기]의 기록과 [전간] 및 [진표전]의 그것과를 비교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진표가 참회를 시작한 해와 지장.미륵 양성(兩聖)으로부터 계법을 받은 해에 대해 [전간]에서는 23세에 시작하여 14일만에 증득(證得)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27세에 시작하여 3년만에 계법을 받았다는 앞의 [석기]의 내용과 다르다. 그리고 미륵으로부터 삼법의(三法衣)와 와발(瓦鉢), 그리고 진표라는 법명(法名)까지 받았으며 108첨(籤)의 참법(懺法)을 부촉(咐囑) 받았다는 [진표전]의 기록과 [전간]의 그것과도 차이가 있다.뿐만아니라 [간전]과 [석기]의 두 기록에는 진표의 출생년대(出生年代) 또한 각각 다르다. 즉 서기 762년에 진표의 나이 27세였다는 [석기]에 의하면 그의 출생년대는 서기 736년(성덕왕(聖德王) 35년)이 되고, 서기 740년에 23세였다고 한 [전간]에 의하면 진표의 출생은 서기 718년(성덕왕 17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기(傳記) 기록상의 상이점(相異點)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의 출생은 성덕왕(서기 702 - 736) 때의 일이고, 수도에 전념하던 시기는 경덕왕(서기 742 - 764) 때에 해당하는 것이며, 또한 그는 지장과 미륵으로부터 계법을 받았다는 등의 사실만을 알아도 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표의 수행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망신참(亡身懺)이나, 미륵보살로부터 간자(簡子)를 전해받는 등의 이야기는 [점찰경(占察經)]에서 설(說)하는 바 내용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2) 교화(敎化)와 전법(傳法)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교법을 전해받은 진표는 산에서 내려왔다. 뭇 짐승들이 그의 걸음 앞에 엎드리고, "보살이 산에서 내려왔는데 어찌 영접하지 않는가"라는 공중(空中)의 외침을 듣고 나온 마을의 남녀 백성들이 정성을 다해 그를 맞이했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풀어서, 또 어떤 사람은 옷을 벗어서,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모포를 펴서 그의 가는 길에 진흙과 먼지가 묻지 않도록 할 정도의 대단한 정성이었다.([진표전] 참조)그리고 그는 대연진(大淵津)에서 나타난 용왕(龍王)으로부터 옥(玉)과 가사(袈裟)를 받기도 하고, 그 용왕의 8만 권속(眷屬)의 도움으로 금산사(金山寺)의 중창(重創)을 이루기도 했다.([석기] 참조) 이때부터 그는 금산사에 머물며 해마다 개단(開壇)하고 교화를 폈다.([전간] 참조) 그 뒤 진표는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俗離山)을 거쳐 강릉(江陵)으로, 다시 강릉을 지나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기면서 중생을 교화했다.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던 도중, 그는 수레를 끌던 소와 그 수레에 탓던 사람의 귀의(歸依)를 받고 계를 주었다. 또 그가 속리산으로부터 명주(溟州) 해변(海邊)에 이르렀을 때 바다로부터 몰려나온 고기떼를 위해 그는 계법을 설해 주기도 했다.([석기] 참조)이처럼 진표의 교화는 사람은 물론 짐승과 고기떼에 이르기까지 미쳤다. 이 때문에 높아진 그의 명성은 왕실(王室)에까지 전해졌다. 경덕왕은 그를 궁중(宮中)으로 맞아들여 보살계(菩薩戒)를 받고, 조(租) 칠만칠천석(石)을 내렸고, 또한 왕실(王室) 종친(宗親)이 모두 계품(戒品)을 받고 명주 500단(端)과 황금 50양(兩)을 보시(布施)했다. 진표는 그 시물(施物)을 여러 사찰(寺刹)에 나누어 많은 불사(佛事)를 일으켰다.([전간] 참조)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간 진표는 발연사(鉢淵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면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이때 그는 흉년으로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주기도 했다. 발연사를 나온 진표는 지난날 그가 신명(身命)을 돌보지않고 수행하던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렀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찾아뵙기도 했다.이무렵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 세 사람의 대덕(大德)이 속리산으로부터 그를 찾아와 용맹스러운 참회로써 계법을 구했다. 진표는 그들에게 의발과 [공양차제비법] 및 [점찰선악업보경], 그리고 189개의 간자와 미륵의 두 간자를 전해주면서 다음과 같이 교법의 유포(流布)를 부촉(咐囑)했다.
제구간자(第九簡子)는 법이(法爾)이고 제팔간자(第八簡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인데,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이 있을 것이니, 거기에 새 절을 세우고 이 교법에 따라 널리 인간계(人間界)와 천상계(天上界)의 중생을 제도하고, 후세에까지 유포(流布)시키도록 하라.
속리산으로 돌아간 영심(永深) 등은 스승이 일러준 곳을 찾아 길상사(吉祥寺)를 세우고, 점찰법회로써 진표의 법통(法統)을 이었다.([석기] 참조) 진표에게는 이들 세 사람 외에도 보종(寶宗).신방(神方).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어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開祖)가 되었다.([전간] 참조) 이미 그이 교법을 제자들에게 전해 준 말년의 진표는 아버지를 모시고 발연사에서 함께 도업(道業)을 닦음으로써 효도(孝道)를 다했다. 그는 발연사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入寂)했다. 제자들은 그 시체를 옮기지 않은 채 공양(供養)하다가 해골이 흩어져 떨어짐에 흙을 덮어 무덤으로 삼았다.

2. 진표(眞表)의 점찰경(占察經) 신앙

우리는 진표의 행적(行蹟)을 더듬어 보면서, 그의 신앙이 [점찰경]의 교설(敎說)에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었음을 알게되었다. 그가 스승 순제[順(崇)濟]로부터 [점찰경]을 전해받고, 그 [점찰경]이 가르치고 있는 교훈에 따라 참회(懺悔)를 수행(修行)하여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을 받고, 그 계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던 사실이나, 또 그의 제자 영심(永深)에게 [점찰경]으로 인천(人天)을 제도(濟度)할 것을 부촉한 점 등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점찰경]의 전체적인 교설과 점찰법(占察法)의 내용을 살펴보고, 진표의 본(本) 경(經)에 대한 신앙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1) 점찰경의 전역(傳譯)과 교설(敎說)

[점찰경]은 [점찰선악업보경]의 약칭(略稱)이다.(또 이 경(經)은 [지장보살업보경(地藏菩薩業報經)], [지장보살경(地藏菩薩經)], [대승실의경(大乘實義經)], [참리경( 利經)] 등으로도 불린다) 상하(上下) 2권으로 된 이 경의 역자(譯者)는 천축(天竺) 삼장(三藏) 보리등(菩提燈)으로 알려지고 있다.수(隋)의 [법경록(法經錄)],.[언종록(彦悰錄)],.장방록(長房錄)] 등에 처음으로 경명(經名)이 보이기 시작하는 본 경은 이보다 앞선 장경목록(藏經目錄)에는 없던 경이다. [법경록]과 [언종록]에서는 [점찰경]을 진위(眞僞)를 알 수 없는 경으로 취급했고, [장방록]에서는 근대(近代;수대(隋代))에 나온 것 같다고 했다.이처럼 본 경은 그 경명(經名)이 장경목록에 나타나던 수대(隋代)부터 진경(眞經)이냐 위경(僞經)이냐 하는 문제로 논란(論難)이 되었던 경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것을 위경으로 생각하고 있다. 역자(譯者) 보리등(菩提燈)의 전기(傳記)가 미상(未詳)이며, 번역이 이루어진 시기와 장소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한 목륜상(木輪相)으로 길흉을 점친다는 점찰법의 내용은 중국에서 고안된 것 같다는 것이 그 중요한 이유이다.이러한 학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점찰경]의 교설을 받드는 점찰법회는 중국과 우리나라 등지의 민간(民間)에서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다.지장보살이 견정신보살(堅靜信菩薩)의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는 [점찰경]은 상권(上卷)에서 목륜상으로 숙세선악(宿世善惡)의 업(業)과 현재 고락길흉(苦樂吉凶) 등을 점찰하는 법을, 그리고 하권(下卷)에서는 대승(大乘)의 실의(實義)를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한때에 부처님께서 왕금성(王金城)의 기사굴산(耆 ?山)에서 심심(甚深)한 법문(法文)을 설하고 계셨다. 그때 견정신보살이 근기(根機)가 둔하고 믿음이 적은 말세(末世)의 중생들을 어떠한 방편(方便)으로 교화.인도(引導)할 것인가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지장보살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였다. 그때 지장보살은 가지가지의 장애(障碍)로 고통을 겪는 사람은 목륜법상(木輪法相)으로 과거의 선악업(善惡業)과 현재의 고락길흉(苦樂吉凶)을 점찰하여, 의심스러운 일에 결단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지장보살은 삼종(三種)의 목륜상 점찰법을 설하고, 만약 악업(惡業)이 많고 두터운 이라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배우기에 앞서 참회의 법을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권(下卷)에서 견정신보살은 대승(大乘)을 구하는 사람에게 무슨 방편을 열어보일 것인가고 물었다. 이에 지장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대승으로 향하고자 하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일실경계(一實境界)에 의지하여 신해(信解)를 닦아야 한다. 그리고 신해를 닦고자하는 사람 중에서도 좋은 근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진여실관(眞如實觀)을 배우고, 둔한 근기의 사람이라면 심유식관(心唯識觀)을 배워야 한다.  또 견정신보살은 지장보살에게 그대는 어떠한 방법으로 깊은 법을 설해 중생들로 하여금 겁약(怯弱)을 여읠 수 있게 할 것인가고 물었다. 이에 지장보살은 나는 항상 방편에 의해 실의(實義)를 선양(宣揚)하여 초발심자(初發心者)로 하여금 겁약을 떠나게 한다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견정신보살은 부처님을 향해 이와같은 말씀을 무슨 법문(法門)이라 하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이 경은 끝나고 있다.
이 법문은 선악업보를 점찰하는 것이며(점찰선악업보(占察善惡業報)), 모든 장애를 제거하여 깨끗한 믿음을 키우는 것이며(소제제장(消除諸障) 증장정신(增長淨信)), 대승을 구하는 사람에게 나아갈 방편을 열어보여 심심(甚深)한 구경(究境)의 실의를 나타내는 것이며(개시구향대승진취방편현출구경심심실의(開示求向大乘進就方便顯出究境甚深實義)), 安慰하는 교설로서 속히 겁약을 떠나 견고하고 決定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法門이라고 한다.

2) 점찰법과 그 의의

견정신보살은 지장보살에게 어떤 방편으로써 말세중생을 교화.인도하여 가지가지의 장애(障 )를 버리고, 견고한 믿음을 얻게 하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지장보살은 가지가지의 장애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목륜상법(木輪相法)으로써 과거의 선악업(善惡業)과 현재의 고락길흉(苦樂吉凶)을 점쳐 스스로의 마음을 일깨워 달래고, 의심스러운 일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지장보살은 목륜(木輪)을 만드는 방법과 윤상(輪相)의 종류, 또 그 목륜(木輪)으로써 점치는 방법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목륜상(木輪相)의 종류와 그 제작법(製作法)
목륜상이란 던져서 잘 구를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점대를 의미한다. 즉 새끼 손가락 정도의 한 치가 좀 못되는 길이로 잘라, 한가운데는 사면(四面)이 반듯하게 하고, 양 끝을 향해서는 비스듬히 기울게 점차로 깎아 만든 것이다. 이것을 윤(輪)이라고 하는 까닭은 던져서 쉽게 구를 수 있는 때문이며, 이 윤상(輪相)에 의해 중생의 사(邪)된 견해와 의혹을 깨뜨려 바른 길로 나아가 안온한 곳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때문이다.
목륜상에는 과거세(過去世)에 지은 업의 선악차별(善惡差別)을 점치는 십륜상(十輪相), 과거세에 지은 업의 구근(久近).강약(强弱).대소(大小)의 차별을 점치는 삼륜상(三輪相), 과거.현재.미래 삼세(三世) 중에서 받는 과보(果報)의 차별을 점치는 육륜상(六輪相) 등의 세 가지가 있다.십륜상은 10개의 윤(輪) 각 1면(面)에 십선(十善)의 명(名)을 하나씩 쓰고, 그 반대편에 십악(十惡)의 명(名)을 하나씩 기록한다. 이것은 십선과 십악이 모든 선과 악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삼륜상은 3개의 윤(輪)에 각각 신(身) . 구(口) . 의(意) 중 한 자씩을 쓰되, 윤(輪)의 4면(面) 중 1면(面)에 한 획씩 슨다. 제1면은 굵고 길어 끝에까지 닿도록 쓰고, 제2면은 가늘고 짧아 끝에까지 이르지 않게 쓰며, 제3면은 굵고 깊은 획을 새긴다.
굵고 길게 쓴 획은 선(善)을 쌓음이 오래며 행한 업(業)이 이로와 지은 바가 성(盛)하였음을 뜻하고, 가늘고 짧게 쓴 획은 적선(積善)이 오래지 않고 닦아 익힘이 둔하여 지은 바가 미미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굵고 깊게 새긴 거슨 악(惡)을 익힌지 오래이고 지은 바가 성(盛)하여 남은 재앙 또한 두터운 것을 의미하고, 가늘고 얕게 새긴 것은 선(善)으로부터 물러남이 오래지 않고 악법(惡法)을 익힘이 오래지 않아 지은 바 업(業)이 성(盛)하지는 않은 것을 뜻한다.
육륜상은 먼저 6개의 목륜을 만든다. 그 목륜 1개의 4면 중 3면에 1.2.3의 숫자를 차례로 기록한다. 다음 목륜은 4.5.6을 기록한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6개의 목륜에 18까지의 숫자를 기록한다. 이러한 숫자들은 모두 한 숫자를 따라 일어난 것으로, 그 근본(根本)은 1이다.이와같은 숫자의 모습은 일체중생의 육근취(六根聚)가 모두 여래장(如來藏)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일실경계(一實境界)로부터 일어나므로, 일실경계에 의지하여 근본으로 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목륜상의 점찰법
과거세에 지은 선악업을 알고자 원하는 사람이면, 십륜상으로 점찰한다. 먼저 십방(十方)에 있는 일체의 제불(諸佛).법장(法藏).현성(賢聖)에게 지심(至心)으로 예경(禮敬)한 다음 향화(香華) 등으로 공양(供養)한다. 다음에 "나무지장보살마하살(南無地藏菩薩摩訶薩)"을 송념(誦念).칭명(稱名)하여 천 번을 채운다. 그리고 "지장보살마하살이시여, 대자대비(大慈大悲)로서 오직 이 원을 호념(護念)하옵소서. 나와 일체중생이 모든 장애를 속히 제거하고 정심(淨心)을 키워 지금 관찰하고 칭명하는 바가 진실로 상응(相應)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고, 손으로 목륜을 쥐고 정물(淨物)에 던져 선악의 업종(業種)을 점친다.만약 그 나타난 바가 현재에 겪고있는 고락길흉 등과 서로 맞지 않을 경우, 이것은 지심(至心)이 못된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의심하지 말고 뉘우쳐 선을 닦는 일로부터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또한 그 결과가 뜻에 맞을지라도 결코 방일(放逸)해서는 안되며,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선을 닦도록 한다.이러한 십륜상의 점찰로써 과거에 지은 업의 선악을 알수 있지만 그 업의 구근(久近).대소(大小).강약(强弱)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삼륜법상에 의하여야 한다. 삼륜상의 점찰법은 3개의 윤상을 한꺼번에 던지는 것이 아니다. 십륜법상에 의해 나타난 업에따라 그것이 신업(身業)에 속한 것이었으면 신륜상(身輪相)을, 구업(口業)에 관한 것이었으면 구륜상(口輪相)을, 의업(意業)에 대한 것이었다면 의륜상(意輪相)을 던져서 점찰한다.만약 중생들이 발심(發心)하여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얻으려 한다면 반드시 과거에 지은 바 악업(惡業)의 다소경중(多少輕重)을 먼저 관찰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악업이 많고 무거운 사람이라면 반드시 참회의 법을 닦아야 한다. 참회하여 그 악업을 씻지 않고서는 선정과 지혜를 닦아도 장애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세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삼세(三世) 중에 받는 바 과보에 관한 의혹을 버리고자 한다면, 마땅히 십륜상을 세 번 던져 합한 수에 의해 선악을 결정해야 한다.  이와같이 하여 관찰할 수 있는 삼세 과보의 선악상(善惡相)에는 모두 189종이 있다. 이것을 <백팔십구종선악과보차별지상(百八十九種善惡果報差別之相)>이라 한다.
점찰법의 의의(意義)
우리는 이상에서 목륜상과 그 제작법, 그리고 점찰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목륜상에 의한 점찰법이 말세의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장보살은 목륜상에 의한 점찰법은 세간(世間)의 복서점상(卜筮占相)과는 다름을 강조하고, 세간의 복서(卜筮)에 탐착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세간의 복서가 단순히 길흉을 점치는데 그 주된 목적이 있다면, 목륜상에 의한 점찰법의 목적은 의혹 많은 중생들에게 확신을 주고자 함에 있으며, 죄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그 죄를 참회하게 하는데 있으며, 두려움 많은 중생에게 안온함을 주고자 함에 있다.
이 까닭에 경에서는 악업이 많고 두터운 사람에게 지심으로 참회할 것을 걷ㅂ 강조한다. 지심(至心)에는 처음 배워 익히기를 원하는 지극한 마음(초시학습구원지심(初始學習求願至心))과, 뜻을 모아 오로지 용맹정진(勇猛精進) 함으로써 상응(相應)을 성취하고자 하는 지극한 마음(섭의전정성취용맹상응지심(攝意專精成就勇猛相應至心))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그리고 둘째번의 지심(至心)에는 다시 일심(一心), 용맹심(勇猛心), 심심(深心)의 세 가지가 있다. 일심이란 생각이 어지럽지 않게 함으로써 똑똑히 깨어있는 마음을 뜻하며, 용맹심이란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오로지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심심이란 진리와 더불어 상응하여 마침내 물러남이 없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경에서는 참회법에 대하여 예경과 수희(隨喜)와 회향(廻向)과 발원(發願)으로써 참회법을 수(修)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처럼 점찰법의 의의는 말세의 중생들이 지심으로 참회하여 대승의 일실경계(一實境界)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3. 진표(眞表)의 점찰경(占察經) 신앙

지금까지 [점찰경]의 교설을 살펴본 것은 진표의 [점찰경] 신앙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였다.[점찰경]에 의한 신앙은 진표 이전에도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평왕(眞平王; 서기 579-631) 때의 원광(圓光)은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써 우매한 중생을 깨우치고자 하여 그가 머물던 가슬갑(嘉瑟岬)에 점찰보(占察寶)를 설치하고 상규(常規)로 삼았다(권 4, 원광서학 4조). 그리고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는 매년 춘추(春秋)로 안흥사(安興寺)에 선남선녀를 모아 10일 동안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시행하였는데, 역시 진평왕 때의 일이다(권 5, 선도성모 수희불사 조). 이와같이 일찍부터 신라(新羅) 사회에 유포(流布)되기 시작한 [점찰경] 신앙은 통일신라 시대에도 그대로 계승(繼承)되고 있었다. 죽은 사복(蛇福)과 그의 모(母)를 위하여 세워졌던 도량사(道場寺)에서 매년 3월 14일 항례적(恒例的)으로 실시되던 점찰회(占察會; 권 4, 蛇福不言 조)와 신문왕(神文王; 서기 681-691)때 흥륜사(興輪寺)에서 열렸던 육륜회(六輪會; 권 5, 大聖孝二世父母 조) 등이 이런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처럼 [점찰경]의 교설에 따른 신앙은 진표가 활동하기 이전의 신라 사회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  사회에서의 [점찰경] 신앙이 민간에 널리 확대되고, 사상적으로 심화되기 위해서는 신라하대(新羅下代) 진표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진표는 그의 전생애(全生涯)를 [점찰경]에서 설하는 바에 따라 수행하고 교화하였으며, 또한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된 [점찰경] 신앙은 금산사 . 법주사 . 동화사(棟華寺) 등지에서 널리 전파되고 있었다. 이 까닭에 진표를 점찰교법(占察敎法)의 확립자(確立者)며, 참회불교(懺悔佛敎)의 집대성자(集大成者)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진태, [신라 점찰법회와 진표의 교법 연구], 불교학보 9집, p. 128.)
그러면 진표의 [점찰경]에 대한 신앙은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에서 살펴본 진표의 행적을 통해 그는 매우 계법을 중요시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진표가 [점찰경]에서 설하고 있는 바 계법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의 스승 순제(順濟)의 영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너는 이 계법을 지니고 미륵과 지장 양성(兩聖)에게 나아가 참회로써 간절히 구하여 계법을 받아 세상에 유전(流傳) 시키라"고 하면서 [점찰경]을 전해주던 순제의 교훈에 따랐던 진표의 수행과 교화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참회 . 정진한 진표의 수행은 청정계법(淸淨戒法)을 얻고자 함이었고, 이것은 바로 [점찰경]의 교설을 따른 것이었다. [점찰경]에서는 미래세에 부처님의 제자들이 청정계법, 즉 보살의 근본중계(根本重戒)인 삼취정계(三聚淨戒; 섭률위계(攝律威戒) . 섭선법계(攝善法戒) . 섭중생계(攝衆生戒))를 구하고자 하나 좋은 계사(戒師)를 만나지 못할 경우, 마땅히 도량내(道場內)에서 지심으로 공경 . 공양한 후 십방보살(十方菩薩)에게 아뢰어 증사(證師)가 될 것을 청(請)하고, 일심으로 원(願)을 세워 계상(戒相)을 칭(稱)한다면 능히 계(戒)를 받을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이미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참회법을 먼저 수행해야 한다고 덧붙여 설하고 있다.이러한 [점찰경]의 가르침에 따라 참회법을 닦은 진표는 마침내 지장보살로 부터 정계(淨戒)를 받고, 미륵보살에게서 제8간자와 제9간자를 전해 받았다. 제8 및 제9의 간자(簡子)란 육륜상의 점찰법에 의해 관찰할 수 있는 189종의 선악과보차별지상(善惡果報差別之相) 중의 제8 소욕수득묘계(所欲受得妙戒; 받고자 원하던 바 묘계(妙戒)를 얻음)와 제9 소회수득계구(所會受得戒具; 일찍이 받았던 바 구족계(具足戒)를 다시 얻음)를 의미하고, 이것 역시 미륵보살로부터의 수계(受戒)를 의미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로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의 이각(二覺)을 비유한 것으로, 9자(者)는 법이(法爾)이고 8자(者)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다"라고 한 미륵보살의 가르침이 점찰경의 선악과보차별지상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륵보살의 설명에 의하면 제8간자란 시각(始覺)이자 신훈(新熏)이며 신득묘계(新得妙戒)이다. 이에 비해 제9간자란 본각(本覺)이자 본유(本有)이며 증득구계(增得具戒)이다.진표의 신앙대상은 지장보살이라기 보다 오히려 미륵보살이었다.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를 받은 후에도 그의 뜻은 오히려 미륵보살에게 있었고,([전간]) 또 그가 금산사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모시고 미륵보살이 계법을 주던 모습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던 것([석기]) 등으로 보아, 그에게는 미륵보살이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그런데 진표의 신앙이나 사상적 경향이 [점찰경]에 의한 것이라며, 왜 그는 [점찰경]의 설주(說主)인 지장보살 보다 [점찰경]에는 나타나지도 않는 미륵보살을 더 신앙하고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점찰경]에서 설하고있는 바 묘계가 자씨(慈氏; 미륵) 보살(菩薩) 설(說)의 [보살계본(菩薩戒本)]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달마계본(達摩戒本)] . [보살지지론(菩薩地持論)] 등으로도 불리는 [보살계본]은 미륵의 제설(諸說)을 무착(無着)이 기록했다고 하는 [유가사지론(瑜伽師持論)] 본분지(本分地) 중의 보살지(菩薩地)와 동본(同本)으로서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것이고,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가 그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점찰경]에서 설하고 있는 삼취계(三聚戒) 등은 바로 [보살계본]의 그것과 같다. 이 까닭에 미륵보살은 [점찰경]과 어떤 관계가 이루어진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욱이 진표에 있어서 미륵보살은 주로 그에게 계법(戒法)을 설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장과 미륵 두 보살로부터 계법을 얻은 후 진표의 생애는 교화로 일관하고, 그 교화는 모두 설계(說戒)에 의한 것이었다. 금산사에서 개단설법(開壇說法)하던 그는 훗날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교화했다. 경덕왕이 진표로부터 보살계를 받았고, 바다의 고기들 까지도 그의 계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진표의 전기(傳記) 기록들이 한결같이 그를 율사(律師)로 말하고 있는 것도 진표의 계법 중시 사상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진표의 계법은 대승보살계 사상에 있었다. [점찰경] 소설(所說)의 삼취정계(三聚淨戒)가 곧 대승보살계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또한 미륵보살의 설계(說戒)가 대승보살계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있는 까닭이다.
출전: 한국불교연구원, [金山寺(한국의 사찰 11)], 1990, 서울, 일지사. pp.23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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