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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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5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7-토가족 문화생태, 동이 묘족(苗族) 문화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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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가족 문화생태






한 민족이 형성된 후 그 문화발전의 진행과정 및 그 내용 특질의 변화는 그 문화의 생태와 매우 큰 관계가 있다. 세계민족 발전의 역사에서 종종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한 민족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이동을 겪고 원래의 민족은 결국 몇 갈래로 나누어지며 이동후의 인문생태가 변화됨에 따라 이 몇 갈래 군중 문화의 발전 방향은 각기 달라지게 된다. 따라서 민족문화 발전 과정 중의 규율과 특성을 고찰하려면 반드시 그 문화 생태환경의 고찰에 신경을 써야한다. 토가족이 형성된 후 그 문화발전 과정 중에 출현한 몇몇의 특성은 그 문화생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토가족 문화 생태의 현저한 특징은 다민족이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토가족 생활구역 내에서 한족, 묘족, 동족(侗族), 요족(瑤族) 등의 민족이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다민족 혼합 거주의 문화생태환경은 토가족 문화의 생성과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물론, 이 구역의 기타민족 문화에 대해서도 영향을 주었다.) 토가족 생활구역 내에 토가족을 제외하고는 한족, 묘족이 가장 많기 때문에 우리는 아래에서 묘, 한문화가 토가족 문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 보겠다.



(一) 묘족(苗族) 문화의 영향



오늘날 토가족 지역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모두 동이 묘족이 생활하고 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묘족 선민 ‘반호만(盤虎蠻)’ 및 그 후예가 이곳에서 활동하였고 역사의 발전에 따라 원래 토가족 지역에서 생활하지 않던 몇몇 묘족도 토가족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왔는데, 예를 들어 명청 이후에 호남, 귀주 지역의 적지 않은 묘족 인구가 토가족 지역으로 진입했다. 이렇게 대대로 이곳에 거주하는 묘족인과 후에 이주해온 토가족이 공동으로 동일한 구역에서 생활하여 토가족 문화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 고대 토가족 지역의 동이 묘족(苗族) 생활 상황



선진시기에는, 지금의 토가족 지역에 수많은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묘족의 선민이 포함된다. 진한(秦漢)시기에 무릉만(武陵蠻)은 토가족 지역에서 매우 활약이 컸는데 이 시기의 무릉만은 다민족 복합체였고 그 중에 토가족 선민인 ‘늠군종(廩君種)’이 있었으며 묘족의 선민인 ‘반호종(盤虎種:신농의 후예)’도 포함하고 있었다.

위진 남북조 시기에, 토가족 지역의 묘족 활동이 빈번했는데 이 시기의 묘족은 ‘형옹주만(荊擁州蠻)’ 속에 포함되었다. 형옹주만은 한 소수민족의 총칭으로 여기에는 토가족 선민도 있었고 묘족 선민도 있었다. 《송서 만전(宋書 蠻傳)》에는 형옹주만을 ‘반호의 후예’로 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남사 이맥전하(南史 夷貊傳下)》에는 “형옹주만은 반호의 후예로 부락은 여러 군현에 배치되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사》의 견해 역시 부정확한 것이다.

수당(隋唐)이후에 토가족 지역은 기주로(夔州路)에 속했고, 한족은 이 지역의 소수민족을 청강만(淸江蠻), 팽수만(彭水蠻), 계주만(溪州蠻)이라 불렀는데 사실 팽수만, 계주만도 이 지역 소수민족의 총칭으로 이것은 토가족 선민인 늠군종을 포괄할 뿐 아니라 묘요(苗瑤)의 선민 반호종도 포괄했다. 그들의 풍속에 대해서는 《수서 지리지(隋書 地理志)》에 다른 기록이 있다.

묘족 선민의 ‘중서(重婿)’, ‘습골(拾骨)’, ‘자북두(刺北斗)’ 등의 풍속에 대해서 《수서(隋書)》에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장례의 기록을 보면,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웃통을 벗고 뛰지 않았고, 다만 큰소리로 외쳐 울부짖을 줄만 알았다. 처음에 죽으면 바로 시체를 중정(中庭)으로 빼내어 실내에 두었다. 이것을 마친 후에는 산 속으로 옮겼는데 13년을 기한으로 했다. 먼저 길일을 택해 작은 관으로 옮겨 넣는데 이를 대골(擡骨)이라 불렀다. 대골은 반드시 사위가 해야 했다. 만(蠻)은 사위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위탁한 것이다. 대골을 하는 사람은 살을 제거하고 뼈만을 취했는데 그 중에서도 작은 것은 버리고 큰 것만 취했다.

장례를 치르는 날 저녁에 사위 혹은 삼 수십 명이 종장(宗長)의 집에 모여 억새풀로 울타리를 이었는데 이를 모수(茅綏)라 했다. 길이가 1장(丈) 가량 되고 위로 3, 4척(尺) 가량 올라간 대나무 장대를 각각 드는데 마치 나뭇가지와 잎이 달린 것 같았다. 그 행렬의 진퇴는 모두 리듬이 있었고 노래하며 읊조리고 소리치며 부르는 장곡(章曲)이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반고(盤刳)가 막 죽었을 때 맞은편에 안치하고  대나무로 그 아래를 찔러 이것을 오늘날까지 이어받아 풍속으로 인정했다. 이 일을 꺼리어 숨기고 북점(北卜)을 찌른다고 했다. 장례에 제사를 모실 때는 친하든지 친하지 않든지 모두 울었고, 다 울고 나면 가족들이 이르렀는데 기쁘게 마시고 돌아와 다시는 제사 때 울지 않았다.            

토가족 선민의 장례 풍속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그 좌인(左人)은 또 달라서 쇠약해지지 않고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처음에 죽으면 시체를 관사(館舍)에 안치하고 동네 소년들이 각기 활과 화살을 들고 시체를 돌면서 노래 부르며, 화살을 활에 끼우는 것이 관건이다. 노래의 가사는 평생의 기쁜 일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이며 대체로 지금의 만가(挽歌)와 비슷하다. 노래는 수십 수가 모자라는데, 수의와 침구를 관에 모아 산림으로 보내어 별도의 숙사에 관을 안치했다. 마을 옆에 매장했다가 2, 30명 정도 상(喪)을 치루기를 기다려 함께 석굴에 매장했다.

당(唐)대에, 묘족이 지금의 호북 토가족 지역에서 활동한 상황에 관해서 단락으로 된 형식의 《유양잡조(酉陽雜俎)》권 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협중(峽中)의 풍속은 이풍(夷風)이 변하지 않고 무녕만(武寧蠻) 억새풀을 이었는데 이것을 수(綏)라 했다. 숭(崇)은 벼로써 시대를 기록했다. 장례 때는 비녀(笄)로 하늘을 향했는데 이것을 자북두(刺北斗)라고 했으며, 전하기를 반호(盤瓠)가 막 죽어 나무에 안치하고 비녀로 그 아래를 찔렀는데 이 후에 이것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번작의 《만서(蠻書)》권10에도 지금 토가족 지역의 묘족 활동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검임(黔任) 파하(巴夏) 사묘(四苗)의 마을에 많다.” “함통(咸通) 5년 6월에, 좌수(左授) 기주(夔州) 도독부(都督府) 장사(長史)가 만이(蠻夷) 파하(巴夏) 사묘(四苗)의 근원을 물었더니 기록에 의해 알게 되었는데……지금 파동(巴東)의 성씨인 전(田), 뢰(雷), 재(再: 冉의 오자―필자 주), 향(向), 몽(蒙), 숙손씨(叔孫氏)도……반호(盤瓠)의 피골(皮骨)을 오늘날 검중(黔中)의 전씨, 뢰씨 등의 집안에서 볼 수 있고 정해진 기간이 되면 제사를 지냈다.”


《태평어람(太平御覽)》권785에 《당서(唐書)》를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황국공(黃國公) 염안창자(冉安昌者)는 반호의 묘족 후예로 대대로 파동의 만사(蠻師)가 되었고, 전(田), 이(李), 향(向), 등(鄧)과 각각 반호의 몸이 되어 대대로 그 가죽(皮)을 전하여 금상자에 담아 사계절마다 제사를 지냈다.”


5대 시기에 묘족은 지금의 토가족 지역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활동을 했다. 《구오대사 당서 명종기(舊五代史 唐書 明宗紀)》에 기록하고 있다. ““황제는 수(隋), 등(鄧), 복(復), 영(郢), 균(均), 방(房)의 백성들에게 듣기를 부모와 혈육이 병이 있으면 장대로 죽을 멀리 보내어 음식을 대접하면 시집간 여자는 시댁에 질병을 옮겨 오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중의 ‘장대로 죽을 멀리 보내어 음식을 대접’하는 풍속은 반호 숭배에서 전해진 풍속이다.


원(元)에서 청(淸) 초에, 중앙정부는 토가족 지역에 토사(土司)제도를 시행했다. 토사시기에 토가족 지역의 묘족은 적지 않았고 그들은 토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역사서에 자주 언급되는 이 지역의 동만(洞蠻)은 실제로 토가족, 묘족의 총칭이다. 이 시기 묘족의 상황과 관련된 것은 각종 사적에 모두 반영되어 있다.


용미(容美) 토사 전민(田旻)이 조정에 올린 상서 중에서 말하길, 용미(容美)와 천성(川省)을 잇는 경계에 있는 율곡패(栗谷壩) 등지는 “신조(臣祖)에 의해 배치된 태생은 그 주민이 토가족과 묘로 배치되었다.” “지금의 사로대군(四路大軍)이 변방의 길에 있어 반드시 토만(土蠻)을 흥분하게 하여 반역의 죄를 물어 복종시켰다.”  

동치(同治) 《래봉현지 풍속지(來鳳縣志 風俗志)》에는 ““ “래봉 지역은 후미지고 산이 깊어 주민이 이(夷)와 료(僚)가 섞여 토사(土司)의 옛 풍속에 따랐고……마을의 서남쪽 변경 지방은 토족, 묘족과 섞여서 거주하여 풍속은 특히 우직하고 소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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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同治): 《래봉현지(來鳳縣志)》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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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방비람(苗防備覽)》에는 명청 시기의 지금의 상서 토가족 지역 묘족과 토가족이 뒤섞여 살던 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있다. 《묘방비람 험요하(苗防備覽 險要下)》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순현(永順縣) 우유산(牛乳山), 성의 동남쪽 120리에 “……깊은 산 은밀한 계곡이 토, 묘가 뒤섞여 살던 곳이다.”  귀계(鬼界)는 옛 장평(丈坪) 동쪽 20여리에 “겹겹이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는 깊숙하고 조용한 깊은 요새에 묘족과 토족이 섞여 거주한다.” 왕가동(王家洞)은 성(城)의 서남쪽 100여리에 “토가인의 마을은 민풍(民風)이 힘 있고 용감했는데 묘족을 두려워했다.” 보정현(保靖縣) 어당(魚塘)은 성(城)의 동쪽 51리에 “영보(永保)와 인접한 곳에서 토가족과 묘족이 섞여 거주했다.” 제계사(提溪司)는 성(城)의 남쪽에 “산이 어지럽게 둘러싸여 있고 시냇물이 서로 비추는 곳에 묘족과 토가족이 섞여 거주한다.”

《묘방비람 험요(苗防備覽 險要)》에서 말하길, 수산(秀山) 야저평(野猪坪)은 현(縣)과 성(城)의 동북 70리에 “평(坪)의 남쪽에는 토인이 거주하고 북쪽에는 묘인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귀주(貴州) 송도(松桃)와 수산(秀山)의 교차지역의 상하 백죽산(白竹山)은 “산위에는 묘인이 거주하고 산을 내려와 모평(茅坪)에 이르면 토가인의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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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여익(嚴如熤): 《묘방비람 도로상사(苗防備覽 道路上四)》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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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청(乾州廳) 서북은 “모두 묘족이 생활하는 마을인데 울타리 끝까지 백성들이 사는 촌(村)이 매우 적어, 보이는 묘족 마을은 10-30가구뿐이었고 토가인, 흘요(仡佬)와 섞여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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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여익(嚴如熤): 《묘방비람 풍속하(苗防備覽 風俗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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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과 영보(永保)에 인접한 것은 지역이 조금 광활하여 토(土), 흘(仡), 숙묘(熟苗)와 섞여 거주하여 백성들의 마을이 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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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여익(嚴如熤): 《묘방비람 촌채하(苗防備覽 村寨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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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魏源)의 《성무기(聖武記)》에서 투동(渝東)의 수산(秀山), 귀주, 호남 접경지역의 묘민 봉기를 언급할 때 말했다. “묘족이 반역할 때 오로지 변경의 토만(土蠻)만이 따라서 난을 일으키지 않았으므로 토만은 토사(土司)의 유민(遺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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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魏源): 《성무기(聖武記)》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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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할 만한 것은 명청 시기에 기타 지역에 거주하던 묘족 인구도 적잖이 토가족 지역으로 진입했다는 것이다. 호북 건시(建始) 용씨(龍氏) 묘족은 명나라 초기에 호남으로부터 이주해 들어왔다. 원말 명초 군웅의 분쟁은 용씨가 “우리 선조는 난리를 피해 달아나  서강(西江)에서 호북 시남(施南) 건시(建始)의 대홍(大洪) 마을로 이주했다.” ‘아홉 세대를 거주’한 후 명말 청초에 운남으로 이주하여 남명(南明)정권이 청에 대항함에 따라 ‘강희(康熙) 후에 다시 건시(建始) 장수리(長壽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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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胡北) 건시현(建始縣) 《용씨족보(龍氏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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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巴東) 연도하(沿渡河) 반씨(潘氏) 묘족은 명대에 강서(江西)로부터 이주해 들어왔다. . 《호당반씨속보(毫塘潘氏續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조 반응린(潘應麟)은 명대 영락제(永樂帝) 2년에 강서 주화현(奏和縣)으로부터 보경부(寶慶府)로 적을 옮겼다. 제10대 반원령(潘元令)은 옹정(擁正) 2년……4월 29일 기시(己時) 상방현(湘方縣: 지금의 상서(湘西), 쌍봉(雙峰), 연원현(連源縣)) 호당구(毫塘口) 생으로, 건륭 42년 무술(戊戌)에 처와 함께 아들 개문(開聞), 개빈(開斌), 며느리 심씨(沈氏), 모씨(毛氏), 손자 문휘(紋暉), 문광(紋光)을 데리고 호북성 의창부(宜昌府) 파동현(巴東縣) 원(袁(沿)) 도하(渡河)까지 왔다.……”

호북 학봉현(鶴峰縣)은 청대에 수많은 호남, 귀주지역의 묘족이 이주해 들어왔다. 청 건가(乾嘉) 묘민 봉기 후에 적지 않은 묘민이 진압을 피해 용미(容美)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호북 래봉현 묘채구(苗寨溝)의 진성(陳姓) 묘족은 귀주 동인(銅仁) ‘영타(岭朶)’에서 왔다. 그 중의 묘비에는 진원승(陳遠勝)은 “강희(康熙) 정묘년 10월에 태어나, 귀주 동인현의 영타에서 갑오년까지 성장하고 호북 시남 래봉의 묘채구로 이주하여 거주했다.”고 되어 있다. 호북 함풍현(咸豊縣) 소촌향(小村鄕) 묘족 백씨(白氏)는 건륭 11년(1746년)에 귀주 안화(安化)에서 함풍 묘아계(猫兒溪)로 이주해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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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자건(龍子建)이 주편한 《호북묘족(胡北苗族)》, 민족출판사 1999년판, 제6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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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묘족 문화의 토가족에 대한 영향



*참고:현재 대륙의 고대 신화 학자들은 반호왕(盤瓠王), 반왕의 신화를 반고신화의 뿌리로 본다.
-범문란(范文瀾) 선생은 《중국통사(中國通史)》에서 “삼국시대에 서정(徐整)은 《삼오력기(三五歷紀)》를 지어 반호(盤瓠)를 흡수하여, 한족 신화로 들어가 반호(盤瓠)는 천지를 개벽한 반고씨(盤古氏)가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반고(盤古)’는 ‘반호(盤瓠)’에서 기원한 것이다. 원가(袁珂) 선생이 《중국고대신화(中國古代神話)》에서 한 말에 따르면 “삼국시대에 서정(徐整)은 《삼오력기(三五歷紀)》를 지어 남방 소수민족 중의 ‘반호’ 혹은 ‘반고’의 전설을 흡수했고 고대 경전 속의 철리(哲理) 성분과 자신의 상상을 첨가해 천지를 개벽한 반고를 창조해 천지개벽 전 혼돈 시대의 공백을 메워 중화인민의 공통된 조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반호’ ‘반고’에 관한 이야기는 묘요어(苗瑤語) 계통의 민족 중에 광범위하게 존재하여 경건하고 정성스레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반호’를 ‘반왕(盤王)’이라고 칭하여 사람들의 생사(生死)와 빈천(貧賤)을 모두 ‘반왕’이 주관한다고 생각했다. 날이 가물 때 사람들은 반왕상(盤王象)을 논밭에 올려놓고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묘족에는 《반왕서(盤王書)》가 있어 부족 사람들에게 구전되어 불려왔다. 서족(畬族)에도 《구황가(狗皇歌)》가 있다.<묘족 향토사료《호북묘족)》>-이로보면 지금까지 정체불명의 소수민족 서족(써족)이 바로 동이계열의 묘요계와 그 근원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야오)족 신화의 신농씨 딸 가가공주 신화도 동일신화임을 안다면 묘족과 요족 그리고 서족의 신화가 정확히 동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고 그 민족내원이 한 뿌리임을 새삼 알 수 있다(안원전)
* 성씨 원류:인류 성씨의 근원은 고대의 토테미즘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야오족(瑤族)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Pan(盤)씨성은 야오족의 주된 성씨로 고대의 Pan hu(盤瓠)후예로 판후(盤瓠)는 용견(龍犬)의 화신이다. 최초의 인류가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믿는 야오족은 머리는 개이고, 몸은 사람인 용견(龍犬)을 선조로 숭배하는데 후에 완전한 인간으로 변해 Pan(盤)씨성의 Pan wang(盤王)이 되었고 야오족(瑤族)은 Pan wang(盤王)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장자는 아버지를 따라 Pan(盤)씨가 된다. ▩ 작명 방법:이름을 지어주는 방식이 시대성이나 지역의 특성을 담고 있지만 종교적인 색채를 띄어 신에게 보호를 받고자 하는 다분히 미신적인 면이 있다. 1) 젖먹이 이름(幼名);태어난 지 3개월 또는 백일후 아버지나 족장 또는 촌로가 출생순서에 따라 비교적 신중하게 이름을 지어준다.남자아이의 경우, 맏이는 '라오가오', 둘째는 '더나이(德耐)', 셋째는 '리우판(六番)', 네째는 '리우페이(六費)', 막내는 '두안만(端漫)'이다.여자는 맏이는 '두메이(督昧)', 둘째는 '메이나이(梅耐)', 셋째는 매이환(梅番), 네째는 매이훼이(梅費), 막내는 '메이만(梅滿)', '메이라이(梅賴)', '메이랴오(梅了)'등으로 부른다. 2) 성년이름(배분명);지식있는 장로를 택해 세대의 정해진 배열을 따라 가보를 이어 짓는다. 3) 법명(法名);일종의 도교(道敎)의식으로 청년이 수계(受戒)시에 사부가 지어주는 이름으로 취득할 때에는 매우 정중하게 치른다. 4) 부자연명(父子連命);아버지이름을 자녀의 머리음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당(唐)씨성에, 아버지의 이름이 용자사(龍者四)이고 첫아들이 일귀(一貴)이면 당용자사일귀(唐龍者四一貴)라고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풍부하고 다양한 민족 문화예술을 일구어 왔는데, 그중에 민요, 민간 설화, 자수, 나염기술, 음악, 춤등에 특색을 이루고 있다. 사람마다 노래부르기를 즐겨하며 그안에는 삶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어 남녀간의 애정을 담은 '정가(情歌)', 서로의 지혜를 겨루는 '반가(盤歌)', 장례때의 '상가(喪歌)', 제사 지낼 때의 '제신가(祭神歌)', 일할 때의 '산가(山歌)'등 다양하다. 인류기원을 담은 '용견반호(龍犬槃瓠)'와 타민족과 교제하는 내용인 바이쿠 야오족의 '사수신(射樹神)', 칭쿠(청고)야오족의 '함암(喊岩)'등이 있다. 민족 천이(遷移)의 역사를 담은 판(盤)야오족의 '표양과해(飄洋過海)'등의 전설도 있다. 바이쿠 야오족에 성행하는 수지염(樹脂染)은 일종의 아교질 수지를 부착제로 삼아 꽃무늬를 염색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와 경축의 의미를 담아 표현하는데 바이쿠 야오족의 '동고무(銅鼓舞)', '후고무'와 '장고무(長鼓舞)', 칭쿠 야오족의 '타렵무(打獵舞)', 홍(紅)야오족의 '로생무(蘆笙舞)', 판(盤)야오족의 '도계무(度戒舞)'등 다양하다. '후고무'를 출 때에는 무대에 여러개의 동고를 걸어 놓고 모두가 돌아가면서 북을 치며 흥을 돋운다. 무대 중앙에는 큰 나무북 하나를 세워 놓고 고수는 마치 원숭이의 동작을 흉내내며 쉬지 않고 북을 친다. 사람들은 북장단에 맞추어 온 몸을 흔들며 흥에 취한다. 주로 일할 때나 나무북을 만들 때등 경축행사때에 추는데 무용수는 홍포를 북 양단에 느려 오른 손으로 잡고, 왼손으로는 죽편(竹片)을 들고 북 양쪽을 두두리면서 '동비(冬比)'를 계속 외치는데 장고무(長鼓舞) 나머지 사람들은 2열 또는 4열로 나누어 북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폭풍우가 몰아치는 듯이 북을 세차게 치며 춤동작이 수렵하는 장면을 생동감있게 표현해 활력이 넘치는데 칭쿠 야오족의 민족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타렵무(打獵舞)는 집단무용의 총칭으로서 곰, 멧돼지, 산양, 원숭이등을 잡는다는 뜻이 담겨져 있고 일찍이 수렵활동에 그 기원이 있다. 매년 춘절(春節), 청명절(淸明節), 묘절(卯節)등 중요한 민속명절에 남자는 노소를 물론하고 참여하여 함께 즐기며 행한다. 무용수는 두손에 곤봉을 들고 교차해 뛰어 오르며 곤봉을 두두리면서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를 지른다. 곰, 멧돼지등 동물에 따라 잡는 기술이 틀린 것처럼 춤과 오른손에 있는 곤봉의 박자가 다르다. '여파'현 부이족(布依族)의 곤봉무(棍棒舞)와 칭쿠 야오족의 타렵무는 형식상 여러 면에서 비슷하나 타렵무가 훨씬 활기가 있어 용감한 민족적 특성을 잘 나타낸다.
*풍(風)씨 성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씨에 대해 밝히면, 「제왕세기」에 ‘여와(女媧)씨는 풍성(風姓)이다. 포희(庖犧)제도를 계승했다’ 하고, 또 「풍속통(風俗通)」에 ‘여와(女媧)는 복희(伏希:羲,希는 고대에 통용됐음 여희의 희도 복희의 희와 서로 통용되어 쓰였음을 알 수 있다)의 누이(妹)다’ 했고, 또 위(僞) 「3분(三墳)」에 여와(女媧)는 복희의 후(后)가 되었다 하니 한결같이 복희와 여와는 형매(兄妹)지간임을 증명한다. 당시 복희 수도는 양자강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동이 묘요족 바로 좌상의 쓰촨(사천성) 유역에 있었는데 이곳은 복희 도등인 뱀과 유사한 도깨비 도등을 상징한 파촉(巴蜀) 땅이었으며 수도는 지금의 회양현(淮陽縣)인 진(陳)이니 하남(河南) 진주(陳州)였다.(「상서(尙書」<목서(牧誓)>에 촉(蜀)과 모(髦:운남성에 사천성에서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 모족이 있음)가 나오는데 그 주석에 모두 파촉의 나라이름이라 했다) 더욱 위(僞) 「3분(三墳)」은 두 사람이 형매(兄妹)혼인을 한 것을 인정하니, 이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 묘요(苗猺) 신화와 더불어 절합(切合:잘려진 채 합한 것)된 것이며, 혹 작자는 곧 이들의 신화 영향을 받았거나 또한 서정(徐整)이 지은 「삼오역기(三五歷記)」조차 반호(槃瓠)가 반고(盤古)가 되었다 하니 곧 요인(猺人)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중풍(風)씨 성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씨에 대해-풍(風)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반호)Click here!>
제곡 고신왕(高辛王)의 세째딸과 부마 반왕(盤王)의 전설 [동이 요족(瑤族)] Click here!


같은 문화구역 내에 두 민족이 공존하면 피차간에 필연적으로 문화의 교류가 발생한다. 토가족 지역은 토가족과 묘족이 공존하여 토가문화와 묘문화는 서로 동일시하는데, 동일시하는 과정 중에 쌍방의 문화를 서로 흡수하여 토가족문화는 적지 않은 묘족 문화의 요소를 흡수했다.

봉건통치자의 반동정책으로 인해 토가족과 묘족의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와 우호적인 왕래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 명확한 증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토가인과 묘민(苗民)이 혼인하는 것이다. “정덕(正德)이래로부터 변방에 여러 가지 사건이 있어 토관(土官)이 (백성을) 징용하는데 모두들 묘족을 청해 선봉에 서게 하기로 하여 적을 이겨 강하다는 명성을 들었다. 근년에 와서 토관이 원한을 맺어 각기 묘를 유인하여 도움으로써 공로를 약화시켰다.……이 때문에 토가인과 묘는 서로 결혼하여 친족이 되어 정을 쌓으면서 서로 견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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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정효(鄭曉): 《금언(今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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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토가인과 묘민이 봉건투쟁에 반항하는 중에 서로 지지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명(明) 가정(嘉靖) 연간에 “토관 전흥작(田興爵)이 죄를 지어 진주(辰州) 감옥에 갔는데 여러 묘족이 뇌물을 주어 그를 석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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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유록(罪惟錄)》권 24 《진계용허보전(鎭溪龍許保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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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주(乾州) 묘민 용허보(龍許保), 오흑묘(吳黑苗)가 봉건통치에 반항하여 유양(酉陽) 토사 염원(冉元)의 지지를 얻었다. 따라서 묘민은 “재차 일어나 강성(江城)을 공격했다.”  토가와 묘족이 장기간 함께 공존함으로 인해 토가족 사람들은 적지 않은 묘족문화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아래와 같이 표현되었다.:

(1) 죽왕(竹王)을 신봉했다. 죽왕의 전설은 《화양국지 남중지(華陽國志 南中志)》의 총 서술에 보이는데, 서남 민족 중에 광범위하게 유행했고 그중  동이 묘요계 민족에 비교적 보편적으로 유행했다. 토가족이 묘족과 한 문화구역에 함께 살면서 문화가 장기간 서로 익숙해짐으로 인해 토가족 사람들도 죽왕 신앙을 받아들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권66의 기록에 의하면, 시주(施州) 위(韋)지역 내의 사람들도 죽왕을 신봉했다고 한다. 죽왕 사당은 “위성(韋城) 동남쪽 동문산(東門山) 아래, 즉 야랑후(夜郞侯) 사당이다.……송(宋) 숭녕(崇寧) 때 묘액(廟額)에 영혜(靈惠)라는 말을 하사했다.” 상술한 기록은 송대의 악서 토가족 지역에서도 죽왕을 제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2) 토가와 묘족의 생산기술이 피차 동일하다. 토가와 묘족은 각기 독특한 생산 기술이 있는데, 장기간의 생산생활 중에 두 민족의 백성들은 서로 학습하여 생산기술이 비슷한 점이 수없이 많다. 《묘방비람 풍속하(苗防備覽 風俗下)》에는 “묘족은 의복을 쪽빛 염료를 많이 사용하여 검게 물들이는데 이것은 여전히 토만(土蠻)이 간직하고 있다.”

(3) 청초귀(靑草鬼)에게 제사지낸다. 묘족 사람들은 청초귀에게 제사지낸다. “묘민은 성질이 용맹스러워……청초귀에게 제사지내 청초(靑草)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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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乾隆): 《영순부지 풍속지(永順府志 風俗志)》권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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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가족도 묘가족과 공존하는 중에 점차 청초귀를 믿게 되었다. 《묘강풍속고(苗疆風俗考)》에는 “청초귀에게 제사지낼 때는 청초를 가지고 입실하는 것을 꺼렸고 대나무에 피로 믿음의 맹세를 새겼는데 만과 묘가 원래 구별이 없다.”

(4) 복식이 비슷해지는 추세이다. 토가족과 묘족의 복식은 원래 같지 않았지만, 피차 서로 익숙해져 몇몇 지방에는 토가족과 묘족의 복식이 비슷해지는 추세에 있다. 역사의 기록에는 “복식은 마땅히 남녀가 구분이 되어야 한다. 토사의 지역을 조사해보면 만산(萬山) 속에 있고 경계가 여러 묘족과 이어져있으며 남녀의 복식이 모두 같아 머리에는 꽃무늬를 수놓은 두건을 쓰고 옷과 치마는 전부 꽃무늬를 수놓은 테두리를 둘러 여러 묘족과 다른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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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同治): 《보정현지(保靖縣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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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가족의 묘족화에 관해서는 예와 증거가 아직도 많다. 중남(中南)민족학원 동락(董珞) 교수는 호남 소피촌(小陂村) 토가족의 묘족화 현상에 대해 조사했는데 현지 묘족의 향성(向姓)은 원래 토가족이었으나 후에 점차 묘족화 된 것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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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락(董珞): 《파 풍토의 정취―토가족문화 원류 해석(巴風土韻―土家族文化源流解析)》, 무한대학출판사(武漢大學出版社) 1999년 판, 제 281-283쪽 참조.

    

중국 묘족 축제


>> 춤과 음악이 살아있는 중국 묘족 축제!!

한족을 제외한 무려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 중국!!
서남부 지역인 귀주성에는 오래 전 한족의 핍박을 피해 산간지대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묘족 사람들이 있다. 매년 11월이 되면 1년에 3번이나 되는
설 축제 중 마지막으로 맞는 묘족 최대의 축제가 펼쳐지는데...
한국 무용을 전공하고 있는 여대생 김하진과 이진영!
재기발랄한 그들이 한국의 전통춤을 선보이겠다며 중국으로 날아갔다.
행사를 위해 술을 빚고 음식을 장만하는 등 부족 최대의 행사를 맞아
축제 준비에 여념이 없는 묘족 사람들! 그 와중에도 축제 때 선보일
전통춤 연습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데... 묘족의 전통춤과 노래를 익히는 것은
물론, 물긷기에서 가축 돌보기까지! 소수부족 묘족의 독특한 삶 속에 뛰어든
대학생 김하진과 이진영! 그들이 선보이는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이 공개된다.


             도전! 지구탐험대 (KBS 2TV) 12월 14일 방송분
                
      






292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55-상원부인(上元夫人)과 종요  안원전   2004/03/22  6065
291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54-수신(水神) 공공(共工)의 아들 토지신(土地神)과 주원장  안원전   2004/03/22  6895
290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53-조왕신(竈君)의 기원,삼국시대 위(魏)나라 세양(細陽) 사람 장단(張單)  안원전   2004/03/16  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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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7 동이족 복희(伏羲)와 여와(女媧)가 낳은 딸 낙신(洛神) 신화  안원전   2004/03/11  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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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5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7-토가족 문화생태, 동이 묘족(苗族) 문화의 영향  안원전   2004/02/16  7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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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3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5-중원 동이족 문화의 영향  안원전   2004/02/05  9612
279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2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4-파문화의 토가족 문화에 대한 영향  안원전   2004/01/27  7761
278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1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3-토가족 족원(族源) 및 선민(先民)문화  안원전   2004/01/27  7283
277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40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2-기후,지형과 지모(地貌) 및 식생과 동물 [1]  안원전   2004/01/27  7209
27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239 국내 최초 소개 특별기획 시리즈- 대륙 향토사료로 뿌리가 동이계인 동이 토가족을 들여다 본다.1-토가족(土家族) 문화의 생성메커니즘  안원전   2004/01/27  7841
275     안원전의 21세기 담론238. 호남성 염릉현 염제릉 참배 및 향토사료 3  안원전   2004/01/18  7200
274     안원전의 21세기 담론237. 호남성 염릉현 염제릉 참배 및 향토사료 2  안원전   2004/01/18  6355
273     안원전의 21세기 담론236. 호남성 염릉현 염제릉 참배 및 향토사료 1  안원전   2004/01/18  6336
272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35.상고 대륙사에 있어 동이 한겨레의 봉황(鳳凰) 토템(圖騰)에 대해 말한다  안원전   2003/12/19  7870
271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34. 황제헌원과 용의 미스터리-동이(東夷), 서하(西夏)적 용봉 2원 연맹  안원전   2003/12/03  7868
270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33. 용숭배는 실제로 뱀숭배, 동북아, 모스코우(墨西哥), 에티오피아(埃塞俄比亞), 희랍(希腊), 남아프리카(南非), 미주(美洲)에 있는 씨족의 뱀숭배&“영사(迎蛇)”일의 “뱀맞이 굿모임(迎蛇賽會)”  안원전   2003/12/01  7162
269    담론 232.초(楚)의 선족(先族)은 동이족 축융씨(祝融氏)와 「상서요전」에 등장하는 ‘주호웅비(朱虎熊羆:큰 곰 비)’의 이면적 실체, 흑호(黑虎)씨족의 쓰촨(四川) 냉산(冷山) 이(彛)족은 동이족 신화 반왕(盤王)< 高辛王 세째딸과 부마 반왕(盤王)의 전설>가짐  안원전   2003/11/19  8238
268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31순(舜)은 동이 인을 데리고 흑도 문화를 창조했으며, 이들은 동이 인으로 흑도 문화를 계승해 이어받았으니 이것이 바로 ‘초궁초득(楚弓楚得)'  안원전   2003/11/10  7954
267    담론230. 대하(大夏)인이 전파한 채도문화&채도문화는 동이민족의 기반 위에서 혼혈과정에 뿌리내린 것. (은(殷)말 주(周)초 서하(西夏)와 한고조 유방의 한족 실마리(왕국유) 상족(商族)의 기원,서북방(전통적) 동방(근대) 기원설  안원전   2003/10/28  7893
266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33-천신(天神)의 아수(啞水: 마시면 벙어리가 되는 물)-동물이 말을 못하게 된 기원 [이족(彝族)]  안원전   2003/10/02  8394
265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32-호랑이의 전설 [나시족(納西族)]  안원전   2003/09/29  7030
264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31-도기 제작과 면화 재배의 기원 [한족(漢族)]  안원전   2003/09/25  6513
263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30-노황(蘆笙: 갈대로 만든 생황, 묘족과 동족(侗族)이 주로 쓰는 취관 악기의 일종) [묘족(苗族)]  안원전   2003/09/25  6858
262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29-신의(神醫) 시사의(侍司懿) [묘족(苗族)]  안원전   2003/09/25  5993
261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28-닭, 오리, 거위의 유래 [묘족(苗族)]  안원전   2003/09/22  6663
260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27-사지고미(沙地古咪)가 찾은 식량의 종자(糧種)  안원전   2003/09/22  6272
259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26-우(禹)의 탄생 신화[동이족)]  안원전   2003/09/19  6547
258    안원전 21세기 담론 특별기획-환단시대 중국 대륙을 석권한 상고 동이 제족의 유사 신화25-하우의 부친 곤왕(鯀王)의 치수  안원전   2003/09/19  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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