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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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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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3.《서경잡기(西京雜記)》의 작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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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잡기(西京雜記)》의 작자는 누구인가?


중국 진(晉)나라의 갈홍(葛洪)이 전한(前漢) 시대의 잡사(雜事)를 기록한 저서
6권. 전한 말의 유흠(劉歆)이 원저자라고도 하나 분명하지는 않다. 내용은 전한의 천자·후비·유명인사들의 일화, 궁실의 제도와 풍습, 원지(苑池)·비보(秘寶) 등에 관하여 잡다하게 수록하였다. 수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지리풍속·사건·제도, 특히 천자가 상주한 미앙궁(未央宮), 궁중의 천자 원지인 상림원(上林苑)·곤명지(昆明池) 등의 기사는 매우 상세하며, 정사(正史)를 보충하는 사료로 쓰인다. 이 책은 옛날부터 시인들의 시작(詩作) 재료로 많이 이용되었다.





《서경잡기(西京雜記)》는 “문장을 매우 풍부하게 수집하여 편찬한”, “《한서(漢書)》의 결함을 보충할 수 있는” 일정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잡사(雜史) 저작이다.

서한(西漢)의 훗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일화들, 이를테면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여 미담으로 전해지는 “소군출새(昭君出塞)” 즉 궁녀 왕장(王嬙)이 화친 정책의 일환으로 멀리 흉노(匈奴)에게 시집간 이야기, “탁문군(卓文君)이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도망친” 이야기,

“남월왕(南粤王) 조타(趙佗)가 남해도(南海島)의 작은 섬을 바치고 산호를 장안(長安)에 심은” 이야기 등 미묘한 운치가 넘치는 많은 고사들이 모두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나왔고, 또한 후세 사람들의 시문(時文)에서 전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누가 이 책의 진정한 작자인지는 아직까지 미결로 남아 있다.

역사학자 고힐강(高頡剛)은 《중국사학입문(中國史學入門)》에서 《서경잡기》는 “한대의 수많은 고사를 이야기 하였다. 책의 작자가 누구인지는 정설이 없다.

어떤 이는 유흠(劉歆)이라 하고 어떤 이는 진(晋)의 갈홍(葛洪)이라 하며” 심지어는 오균(吳均)이 편찬했다는 설도 있다고 명확히 지적했다.

《서경잡기》는 원래 2권이었으나 후에 6권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6권의 판본은 서명이 매우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명말 판각본과 재판 《사부총간(四部叢刊)》본 영인판 서명은 (진) 갈홍 편찬이라 되어 있고, 건륭(乾隆)기간의 청 각판본과 《사부총간》본 영인판은 오히려 (한) 유흠 편찬이라 되어 있다. 2권본 역시 이와 같다.

예를 들어 섬서(陝西) 통지관(通志館) 민국(民國) 23년의 활판 인쇄 판본은 하나는 서명이 (한) 유흠 편찬이라 되어 있고, 하나는 오히려 (진) 갈홍 편찬이라 되어 있다. 시기가 더욱 이른 몇몇 판본도 근거가 부족한 제멋대로인 서명으로 되어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 이는 모두 연구 작업에 극대한 어려움을 가져다준다.

수당(隋唐) 즈음에 특히 당 태종(太宗)이 왕위를 계승한 후, 역사로써 나라를 보좌하고 옛것으로써 현재의 귀감을 삼아 역사를 편수하는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당시의 사관들은 “사적을 널리 취하였고(博采歷史)”(《전당문 제범서(全唐文 帝范書)》조정에서도 “천하의 책을 계산하라 명하고(命天下計書)”,

“특이한 책을 수집하고 조사하며(搜訪異本)”, “그 도서와 고적을 전부 거두어들이도록(盡收其圖書古籍)”(《수서 경적지서(隋書 經籍志序)》)했지만, 위정(魏征) 등이 빠짐없이 뒤지고 샅샅이 찾아 편찬한 《수서 경적지(隋書 經籍志)》에는 오히려 《서경잡기》의 진짜 작자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지은 사람을 저술하지 않았다.

4백여 년 후, 송나라 사람 황백사(黃伯思)는 《동관여론(東觀餘論)》에서 절충된 견해를 채택하여, 《서경잡기》의 사건들은 모두 유흠이 말한 것이고 갈홍이 이를 채택하였다고 말했는데 아직 그 근거는 알 수 없다.(《사원(辭源)》권4 참고)

후진(後晋)의 유구(劉昫) 등이 편찬한 《당서 경적지(唐書 經籍志)》에는 서명이 갈홍 편찬이라 되어 있다. 청나라 말년, 고증류의 저작이 한바탕 출판되었다.

예를 들어 장종원(章宗源)의 《수서경적지고증(隋書 經籍志考證)》, 요진종(姚振宗)의 《수서경적지고증》, 장붕일(張鵬一)의 《수경적지보(隋經籍志補)》 등이다.

그러나 고증자는 《서경잡기》의 진짜 작자에 대해 고증한 항목이 없으며 단서조차 내놓지 못했다.

근현대학자와 전문가의 몇몇 저작 중에 누가 맞고 누가 틀리는지에 대해서도 각자 자신의 설을 고집하며 심지어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종업(李宗鄴)은 《중국역사요적개소(中國歷史要籍介紹)》에서 말하길,

“《서경잡기》2권집은 유흠이 편찬하였으며 《당서 경적지》에는 잘못하여 서명이 갈홍이 되었다”

고 하였으나 김소영(金少英)이 서북 사범대학교 역사과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요적선독(中國歷史要籍選讀)》에서 갈홍이 편찬했다는 것을 긍정했다.

노신(魯迅)은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의 《금소견한인소설편(今所見漢人小說篇)》에서 《서경잡기》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고증을 했다. 그는 인간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엮어 기록한 것으로 말하면, 《서경잡기》가 있는데 원래는 2권이었다가 지금의 6권은 송나라 사람이 나눈 것이다.

마지막에 갈홍의 발문이 있는데 이르길, “유흠의 《한서》 1백 권이 있는데 반고가 지은 것과 비교하여 조사하면 대체로 모두가 유씨의 것을 취하고 있고 약간의 차이만 있으며 반고가 취하지 않은 것은 2만여 자에 불과하다. 지금 2권을 색출하여 《한서》의 결함을 보충한다(其家有劉歆《漢書》一百卷, 考校班固所作, 殆是全取劉氏, 小有異同, 固所不取, 不過二萬許言. 今抄出爲二卷, 以補《漢書》之闕)”고 하였다.

《수지(隋志)》에는 작자가 기술되지 않았고, 《당지(唐志)》에는 갈홍의 저작이라 말하고 있어 당시에는 모두 유흠에게서 나왔다는 설을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단성식(段成式)은 《서유잡조 어자편(西酉雜俎 語資篇)》에서 말하길, “유신이 시를 지을 때 《서경잡기》의 일을 이용하여 돌려 고쳐 말하기를 ‘이 오균의 말은 아마도 쓰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고 했다(庾信作詩, 用《西京雜記》事, 旋自追改曰, ‘此吳均語, 恐不足用’)”라고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로 인해 오균의 작품이라 여겼다. 그러나 소위 오균의 말이라는 것은 아마도 글귀를 가리키는 것이지 《서경잡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양 무제는 은운(殷芸)이 엮은 소설은 모두 고서의 요점을 간추린 것이고 이미 《서경잡기》를 매우 많이 인용하여 양나라 초기에 이미 세간에 유행하였다고 경계하였으므로 갈홍이 지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혹은 문장 중 유향을 가친으로 칭한 것으로써 갈홍의 작이 아니라고 의심하였으나 유흠의 이름을 사칭하고 유흠의 언어를 모방하였으므로 그 이치와 형세가 지극하다.

책에 기록하길, 바로 황성증(黃省曾)의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대략 네 개가 있는데 용속하여 생략할 수 있고 한가롭고 냉담하여 귀속될 곳이 없어 묘연한 정취를 주어 의심스럽고 꺼리는 느낌이 들어 금기시해야 한다(大約有四, 則猥瑣可略, 閑慢無歸, 與夫杳味而難憑, 觸忌而須諱者)”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역사 기록으로 판단하여 문장을 논하면 이는 고소설 중에 단호히 의사를 표현하고 정서가 남달리 훌륭하여 문필이 볼만하다.

노신은 기왕 《서경잡기》를 《금소견한인소설편》에 집어넣고 ‘목차’에 ‘유흠의 《서경잡기》’라고 분류해놓은 김에 갈홍을 부정했다. 몇몇 고증 문장에도 《서경잡기》는 필기류의 잡사에 속하며 《한서》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진(晋)나라 사람 갈홍이 어찌 한(漢) 왕조의 일을 알았겠는가?

요컨대, 갈홍을 부정하는 설은 결코 적지 않지만, 《사해》에는 오히려 “옛 평론에는 서한의 유흠이 편찬하였다고 하였는데, 고증을 통하여 작자는 실재로 진의 갈홍이다(舊題西漢劉歆撰, 經考證作者實爲晋葛洪)”라고 하였다. 근거가 무엇인가? 사서에 인용되지 않았으므로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상술한 원인으로 인해서 최근에 출판된 몇몇 도서, 예를 들어 1984년 중국청년출판사에서 출판한 장순휘(張舜徽)가 주편한 《중국사학명저제해(中國史學名著題解)》에는 책 중에 역대 잡사와 필기류의 서적 명칭이 수십 종이 넘게 열거되어 있지만 《서경잡기》는 없다.

1985년 북경출판사에서 출판한 시덕갱(柴德賡)이 저술한 《사적거요(史籍擧要)》더더욱 열거하지 않았다. 기타 몇몇 문학 서적, 더 나아가서 공구서 또한 모두 다르다. 누가 맞고 누가 그른지는 정설이 없다. 선인이 아직 하지 못한 업적을 후대인이 진일보 연구하기를 기대한다. (임진하(任振河))안원전의 21세기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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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유흠 저, 임동석 번역, 〔서경잡기〕, 동문선, 1998)에서 인용.


〔서경잡기〕중에서.




*내가 잘 아는 국도룡은 환술에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일찍이 나에게 옛날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털어놓았다.

“동해사람 황공은 어려서부터 술수를 배워 능히 뱀이나 호랑이를 제어할 수 있었다. 그는 적금도를 차고 강증(絳繒:붉은 비단)으로 머리를 묶고 서서는 운무를 일으키고 앉아서는 산하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늙고 쇠하여 기력이 쇠잔해진데다가 술을 지나치게 마셔 그 술수를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진나라 말기에 백호(白虎)가 동해 땅에 나타나자 황공이 이에 적도를 가지고 가서 제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술수가 먹혀들지 않아 도리어 그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삼보 땅 사람들이 이를 풍속의 무희로 만들어 전승하였고, 한나라가 들어서서도 황제들이 이 고사를 가지고 <각저희>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그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회남왕은 방사(方士)를 좋아하였고, 방사들 모두도 각각의 술수가 있어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어떤 이는 땅을 그려 강이나 물을 만들어 내었고, 흙을 모아 산이나 멧부리를 만들어 내었다. 그런가 하면 호흡으로 추위나 더위를 만들어 내었고, 물을 뿜어 비나 안개를 만들어 내었다.”

회남왕 역시 최후에는 예의 방사들과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다.




*내 어릴 적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평릉 땅의 조창은 오장의 문하생이었는데, 이따금 남의 과실을 질책하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어떤 이가 그를 경박히 여기자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를 그런 인물로 치부해 버렸다.

훗날 오장이 왕망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나, 누구 하나 감히 그를 거두어 장례를 치러 주는 이가 없었다. 제자들마저도 모두 그 성명을 바꾸고 다른 스승을 따랐다.

조창은 당시 사도연이었는데, 홀로 오장의 제자라 밝히고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밝고 곧은 자란 용렬한 무리 속에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평릉 땅 사람들이 조창이 살아 있을 때 그 사실을 비석에 새겨 오장의 무덤 옆에 세워 주었는데 용수산 남쪽의 막령에 있다.




*광릉왕 유서는 용력(勇力:힘으로 해결하려는 용맹)이 있어 따로 우리를 만들어 놓고서 늘 곰의 격투를 모방하여 익히곤 하였다. 뒤에 드디어 빈손으로도 능히 곰을 쳐 이길 수 있게 되자 어느 곰 하나 그에게 목이 부러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짐승에게 부상을 당해 뇌가 함몰되어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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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西京雜記 - 서한 사회에 관한 132편의 견문록
저자 : 유흠
편자 : 갈홍
역자 : 김장환
서지 : 예문서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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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드물게 만나보는 어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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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잡기에서 밝히는 양초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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