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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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218중국 측의 고대사서는 공자의 사서삼경에 의해 그 중추가 부러지고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허리가 잘려나가 그 이후의 중국 측의 대부분의 사료들이 마치 레미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며 반복해서 돌려댔다

국내의 어뱅이 같은 일부 식민 강단사학자의 주장과는 달리 「환단고기」가 위대하고 명확한 것은 고대 사서를 들여다보면 증명이 된다. 중국 측의 고대사서는 공자의 사서삼경에 의해 그 중추가 부러지고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허리가 잘려나가 그 이후의 중국 측의 대부분의 사료들이 마치 레미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며 반복해서 돌려댔다.

따라서 역으로 대륙 상고사의 주도민족인 우리 구려 백성의 「환단고기」를 준거로 해 중국 측의 사료 속에서 공통점을 뽑아내면 사관정립을 하기도 쉽고 줄거리를 파악하기도 훨씬 쉽다. 그리고 파면 팔수록 사사건건 위서 시비를 벌이는 설익은 매국사가의 주장과는 달리 적지 않은 새로운 사실이 주렁주렁 매달려 나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최 태영 옹과 최 재인,「실증 환단고기」의 저자 이 일봉 등은 필자가 보기에 아직은 첫 출발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실마리를 풀어 나아가려는 여러 선구자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가령 중원의 군주가 덕을 잃고 도의 정치를 펴지 못하면 반드시 동이(東夷), 구이(九夷)로부터 응징받은 사실(후한서 동이전의 “하(夏)나라 태강(太康)이 덕을 잃자 동이들이 반란하기 시작했고 사이(四夷)들이 배반했다”는 기록)에 대해 「서경」과 「사기」는 “하나라 중강 때에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는 희(羲)씨와 화(和)씨가 술에 빠져 직분을 수행하지 않자 계절과 절기가 어지러워졌으므로 중강이 이들을 토멸했다” 하고,

「환단고기」<단군세기>에는 하나라에서 방물을 바치고 신서를 구해갔다고 하는 내용과 중강의 사후 정치가 문란해지자 4세 단군 오사구가 람(藍), 진(眞), 번(番)의 군사를 파견하여 제후국에 불과한 하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게 한 일이라든가, 소강(少康)이 사신을 보내와 신년하례를 올렸다는 「환단고기」<태백일사>의 기록은 기록의 정묘함을 보태주는 예이다.

그리하여 제곡고신의 부인 간적(簡狄)이 목욕할 때 하늘에서 현조(玄鳥)가 내려와 알을 먹고 태어났다는 은의 시조 성탕의 뿌리인 설(契)에 대해, <고사변(古史辯)>에서 양관(楊寬)은 “현조는 은나라 사람과 동이의 조상(玄鳥是殷人 東夷的祖先神)”,“동이는 은나라 사람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고 하여 현조가 동이족의 조 도등(부대의 깃발로고)으로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발셋 달린 까마귀)로 탕왕의 성씨가 북방 검정색을 상징하는 子로 정한 이유가 되며, 중국인들이 삼황오제의 신화로 둔갑시킨 상고역사가 모두 동이족에서 갈려나간 지엽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고구려 문화 유물에는 태양(해) 안에 세발까마귀를 넣은그림이나 조각이 여러 점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진파리 7호 무덤에서 나온 ‘해뚫음무늬 금동장식품(日光透彫金銅裝飾品)’을 들 수 있다. 이는 왕의 장식품으로 추정되는데 중앙의 구슬을 박은 두 겹의 태양 동그라미 속에 황금빛 ‘세발까마귀’를 불타오르듯 절묘하게 넣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북한에서 국보를 빌려 서울에서 전시하고 있다.‘세발까마귀 태양’(또는 ‘태양 세발까마귀’·太陽三足烏)은 이 밖에도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각저총(角抵塚), 오회분(五회墳) 4호묘, 덕화리 1, 2호분에도 그려져 있다.》&동이족 국가 초나라가 있었던 호남성 장사의 마왕퇴의 삼족오





특히 서량지는 고고학적인 차원에서 길방, 토방, 인방, 귀방 등으로 갑골문 주변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는데 갑골문은 은나라가 동족인 귀방(鬼方)을 정벌했다 하고 <후한서>나 <단군세기>에도 이러한 기록이 보여 정묘함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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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토방에 대해;1)동 호 족(東 胡 族)-동호족이란 명칭은 도하(屠何) 토방(土方) 혹은 도하(徒何)라고도 한다. 역사서에서는 항상 호(胡) 맥( )을 함께 칭하였다. 춘추시기에 이르러 북융(北戎)이나 산융(山戎)을 총칭하였으며, 전국 말기에 비로소 "동호"라는 명칭이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호족(胡族)은 본래 여우를 숭배하는 씨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찍이 중국 북방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후에 호족은 동쪽과 서쪽으로 이주하여 살게 됨에 따라 동호와 서호(西胡)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동호는 지금의 서요하(西遼河) 유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산돼지를 숭배하던 씨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진한(秦漢) 이후에 이르러 동호인들은 산돼지 숭배 씨족 속에 융화되어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동호인들의 경제 생활은 목축을 주업으로 하고(돼지 개 말 양 등의 사육), 수렵을 부업으로 하였으며(사슴 여우 토끼 등의 사냥), 농업생산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주로 방직과 고기잡이 활동 등에 종사하였다. 그들은 항상 중원 화하(華夏)의 여러 종족들과 상품 교역을 하였는데, 주로 말 모피 각궁(角宮) 등으로써 중원의 비단 포목 대추 밤 등을 교환해 갔다.동호족은 규모가 비교적 큰 고대 민족으로 일찍이 폭넓은 어족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자는 없었다. 풍속 습관은 대체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과 거의 같다. 그들은 "호복(胡服)"을 입고 허리띠에 많은 장식품을 달았는데 매우 정교하였으며, 가죽으로 음식물과 물을 담는 각종 용구를 만들었다. 그들은 각종 귀신을 신봉하면서 고정된 제사 활동을 가졌다.
2)은(殷)왕조는 개조인 탕왕 이래로 여러 차례 도읍을 옮겼으나 20대의 왕 반경(盤庚)이 은허로 옮긴 이후 31대의 주왕(紂王:帝辛)이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할 때까 지 은허에 정주하였다. 최근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각지에서 은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는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유적 중에 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허난성 얼리터우[二里頭]의 유적이다. 이 유적은 이보다 앞선 허난성 신석기시대 룽산문화[龍山文化]의 영향을 받아, 은대의 최전기(最前期)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 유적들은 허난성 중부에서 산시성[陝西省]에 이르는 황허강[黃河] 연변의 황토지대에 분포되어 있다. 중기의 유적 분포지역은 이 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그 대표는 허난성 정저우[鄭州]의 유적이다. 후기에 이르면 서쪽은 산시성 치산현[岐山縣]에서 동쪽은 산둥성[山東省]의 지난[濟南], 북쪽은 허베이성[河北省]·산시성[山西省]에서 화이허강[淮河] 유역에 걸치는 화북평원의 거의 전부와 양쯔강[揚子江] 중류에까지 확대되었다. 요컨대 은허시대의 은문화 는 이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은왕조는 약 1,700 m의 토벽으로 둘러싸인 정저우를 중심으로 하여 대도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서는 청동기·도기(陶器)·골기(骨器)를 만드는 장인의 공장과 주거가 발굴되었다. 반경이 은허로 천도한 이후, 귀갑과 우골에 새겨진 점복문(占卜文), 즉 갑골문자의 기사(記事)와 궁전·묘능의 유적과 유물에 의하여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졌다. 은의 여러 왕은 타이항산맥[太行山脈]에서 동방으로 흘러가는 위안허강[洹河]의 굴 곡진 지점에, 하안(河岸)의 단애(斷崖)를 북·동쪽으로 업고, 서쪽으로는 도랑을 파서 북서의 유목민에 대비하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샤오툰촌 북쪽의 대지 중앙 에는 토단(土壇)을 쌓아 올려, 위에 종묘(宗廟)·궁전을 건축하였다.제왕이 죽으면 그 시체는 위안허강의 북안 허우자좡[侯家莊]의 지하 13 m에 200 m2 이상의 큰 널방[墓室]을 만들고, 생전에 애용했던 거대하고 정교한 청동기를 비롯하여, 옥기(玉器)·석기 등을 껴묻거리[副葬品]로 함께 매장하였다. 호화로운 청동기는 고대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예술품이지만, 그보다도 이 널방의 안팎으로 산재해 있는 다수의 인골군(人骨群)이 고고학자를 놀라게 하였다. 이 들은 소수의 시종(侍從)·시녀는 있지만 대부분은 병사(兵士)로서, 왕에게 순사(殉死)한 것이며, 그 수는 한 왕묘에 500명에서 1,000명에 달하였다. 은의 왕은 점 복(占卜)으로 신의(神意)를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원수(元首)였다. 또한 이민족을 정복하여, 그들을 노예나 병사로 삼았던 것 같다. 이민족 가운데 북 서의 고방(苦方)·토방(土方)이라 불렸던 유목민이, 은허로 옮긴 당초의 무정왕시대(武丁王時代)의 강적이었다. 그리고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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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해자」를 보면, 본래 이(夷)는 동쪽 사람으로 대궁(大弓)으로 이루어진 글자라고 했다. 혹 대(大)는 화살(矢)이 잘못 바뀐 것이라 말하고 있으나, 호시․석촉의 단궁을 쓰기 전 비록 군자국과 대인국을 별도의 나라로 기록하고는 있지만 「산해경」에 조선국을 대인국으로 칭하고 삼신각을 대인당(大人堂)으로 칭한 것으로 보아 대궁(大弓)을 사용한 동이 조선국을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잘 보면 대인국과 군자국이 나라만 두 쪽이지 모두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임을 안다)

이인(夷人)은 인이(人夷)로 은상(殷商) 때에는 동이족이 거하는 곳을 인방(人方)으로 불렀는데 하(夏) 때에 번성하다가 상(商)의 중엽 때  사라졌다. 유(攸), 조(條), 숙(儵), 수(修), 주(주) 등의 부족이 산동성 서부, 산서성 남부, 하남성 동부 일대에 포진했다 사라졌다.

이(夷)와 관련해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우리민족이 새를 깃발 도등으로 삼고  뚠황 막고굴의 사신도 벽화에서 보는 것처럼 모자에 꿩 깃털 두 개를 꼽는 대국적인 이유는 큰 활을 생활필수품으로 지녀 새 사냥을 능숙하게 잘 했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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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막고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삼국시대 한반도 사신을 묘사한 것으로 생각되는 이른바 조우관(鳥羽冠)을 쓴 새로운 인물 그림이 중국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에서 새로 확인됐다고 현지를 다녀온 소설가 정찬주씨가 10일 말했다.조우관이란 한반도 삼국에서만 착용했던 새 깃털을 꽂은 독특한 관으로 이번에 이를 쓴 인물도가 발견된 곳은 막고굴 제237호굴과 9호굴 두 군데라고 정씨는 덧붙였다./정씨가 공개한 이번 조우관 인물 그림은 지금까지 학계에 보고된 같은 종류의 벽화중에서도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해 삼국시대 복식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이번에 조우관 인물이 확인된 이 그림은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라 해서 중국 주변 각국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유마거사에게 설법을 청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조우관을 쓴 인물 그림이 확인된 곳은 지금까지 막고굴에서만 220호, 335호, 159호, 332호 석굴이 있고 당나라 서울 장안의 이현(李賢. 654-684) 묘와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의 아프락시압 궁전 벽화 등지에서 발견된 바 있다.막고굴 가운데 220호굴335호굴159호굴 안에 그려져 있는 <유마경변상도>에 삼국시기의 인물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국내 학계에 보고된 지 이미 오래다. 정씨는 지난 3월 둔황을 방문해 220호굴과 335호굴 이외에 <유마경변상도>가 그려져 있는 9호굴, 159호굴, 237호굴을 탐사해 그곳의 벽화에서도 삼국시기 사람으로 보이는 인물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당나라 시기의 그림에서 삼국시기 사람임을 식별하는 주요 근거는 ꡐ조우관ꡑ(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이다. 그는 특히 237호굴에 등장하는 삼국시기 사람의 조우관은 ꡒ지금까지 보아온 것 중 가장 세련된 것ꡓ이라며, ꡒ외교관이라기보다 화랑의 나이에 걸맞는 열혈 청년의 얼굴ꡓ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 인물은 통일신라의 화랑일까./먼저 237호굴의 변상도와 관련해서는 정씨가 결정적으로 놓친 점이 하나 있다. 지난해 둔황을 방문해 237호굴을 검토한 바 있는 권영필 한국예술종합대학 교수는 이 작품이 ꡒ중당기에 처음 그려진 것은 사실이나 청나라 말인 1818년(가경 23년) 다시 그렸다는 기록이 그림 옆에 남아 있다ꡓ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사료적 가치는 반감한다./조우관을 쓴 인물의 국적이 신라인가 고구려인가도 논란거리다. 조우관을 쓴 인물은 측천무후의 아들의 무덤인 이현릉에 그려진 <예빈도>에도 등장하고, 1979년 중국 시안에서 출토된 당대 말기의 은합에도 나온다. 1990년 산시성에서 출토된 옥으로 만든 정방형 사리함의 네 면에 부조된 그림에는 사리를 나눠받으러 당나라에 온 각국의 사신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도 조우관의 인물을 찾아볼 수 있다.

조우관(鳥羽冠) : 쌍영총,조미관(鳥尾冠) : 무용총 그림

참고자료:조우관(鳥羽冠)
관모에 조우(鳥羽)로 수식(修飾)한 것. 절풍(折風), 피관(皮冠), 나관(羅冠) 등의 관모 좌우에 2개의 새깃(鳥羽)을 꽂아 귀천(貴賤)을 가렸다. 처음에는 자연조우(自然鳥羽) 였으나, 뒤에 가서는 금(金), 은(銀)으로 조우상(鳥羽狀) 또는 녹이상(鹿耳狀:금, 은의 얇은 판을 羽狀으로 만들어 꽂은 모양)의 장식(裝飾)을 사용하였다.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의 관모에는 2개의 조우(鳥羽)를 꽂고 있는 모습이 많이 있는데, 가장 전형적(典型的)인 것이 쌍영총의 것이다. 무용총의 기마인물(騎馬人物)의 관모에서는 조우(鳥羽)대신에 다류(多類)의 조미(鳥尾)를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조우(鳥羽)와 조미(鳥尾)의 혼용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새에 따라서 꼬리가 날개보다 아름다운 경우 꼬리를 장식재료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관모에 조우(鳥羽)를 삽식하는 것은 수렵시대의 유물(遺物)로서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에도 있었으며, 당시 아시아 북방 여러 민족간에 있었던 공통된 풍습이었다. 복식사에서는 조우관(鳥羽冠)이 후에 금관(金冠)으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한국의 관모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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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궁 주몽이 그랬고 신궁 신 숭겸이 그랬지 않았던가. 이것이 우리민족의 새 토템이 정착된 이유이다. 14세 자오지(치우) 환웅이 갈로산에서 나오는 철(鐵)을 제련해 병장기를 만들면서 철기시대를 연 것은 이미 「환단고기」에 밝힌 바 있거니와 이 기록이 확실한 이유는 이 철(鐵)이라는 글자 하나만 고찰해 보아도 철의 고자(古字)가 철(銕)라는 사실에서 동이족이 철을 발견했다는 문자학적인 어원을 능히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철(銕)이라는 글자를 찾아 보라. 그러면 이 글자가 쇠 금 옆에 중화 華가 붙든지 화하 夏가 안 붙고 바로 우리의 夷가 붙어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또 이 것이 바로 鐵의 고자(古字)라고 나온다. 이것은 다름아니라  한문이 지나족의 산물이 아니고 우리 글자인 가장 확실한 실례이다. 문자의 기원보다 역사를 정확히 전해주고 있는 것은 없다.  


송준희 자료 인용

-한글의 원형으로 보이는 문자가 규칙적으로 중앙에 불로 지진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견갑골은 상(商:殷)나라 때의 것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눈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사진 오른쪽에 갑골문으로 해석을 달았는데, '상대(商代)의 왕족이 돼지, 개등을 조상에게 바치고 제사지냈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상의 전조(前朝) 하(夏)나라가 멸망할 때, 상나라 성탕을 도와준 상나라의 재상 이윤(伊尹)은 왕조가 다 할 때까지 최고의 권력자로서 제사를 주관했다. 이윤은 고조선의 대학자 유위자(有爲者)의 제자로 곧 동이 출신이라는게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상, 즉 은나라는 거북의 등껍데기와 동물의 뼈 등에 새긴 갑골문으로 인해 그 유적지가 발굴됐는데, 이는 은나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단군세기〉등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특히 갑골문은 주변의 다른 나라를 길방(吉方)·토방(土方)·인방(人方)·귀방(鬼方)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인방은 조선을 가리킨다. 그것은 중국에서 발행한 《역사지도집》에서 고조선의 핵심 강역이었던 산동성을 인방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갑골문은 "은나라가 귀방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후한서》뿐 아니라 〈단군 세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두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은나라에서 사용한 갑골문은 한자의 모태어이다. 따라서 한자 역시 동이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갑골문을 연구한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중국학자 필장복은 《중국인종북래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 而係遠始于寒冷的北方)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학자들은 아직도 우리 역사와 문자의 뿌리를 모조리 중국에서만 찾고 있으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골문의 형태를 보아도 동이족의 작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한 증거들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자. 7)동녘 동(東)의 전서체를 보고서 학자들은 나무에 해가 걸린 모양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갑골문이 발견됨으로써 이 글자의 원래 의미가 밝혀지게 되었다. 갑골문에 나타난 동(東)자의 원래 모습은 물건을 단단하게 동여매 묶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 결국 동(東)자는 '동여매어 묶는다'는 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이며, 묶는 줄이나 끈을 '동앗줄'이라고 하는 것 역시 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집 가(家)'자에 왜 '돼지 시(豕)'자가 들어 있는지 동이족이 아니면 모른다. 갓머리( )밑에 돼지 시(豕)가 들어 있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집 구조가 그러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변소 밑에 돼지를 키우고 있으며, 이는 고대에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집 밑에 뱀(독사)의 천적인 돼지를 키우고 집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는 쌀 문화권의 특징이며, 중국의 한족(漢族)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중국의 학자들도 왜 갓머리 밑에 돼지 시(豕)가 들어가 '집 가(家)'자를 형성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밖에도 패를 이룬 무리를 뜻하는 '동아리'와, 원(圓)을 뜻하는 '동그라미'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남원의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집 밑에 돼지를 키우고 있다. -조영언.《노스트라트 어원여행》중에서 -


이 일봉은 중원의 정세가 단군조의 마음의 향배에 따라 움직였음을 다음과 같은 사례를 통해 보여주었는데 아주 좋은 예시라 생각된다. 가령, 은나라 사람이 하나라를 정벌함에 하의 걸왕이 구원을 요청하여 13세 흘단단군이 읍차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9환의 병사를 이끌고 하나라를 돕게 하니 은의 탕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했다는 「환단고기」<단군세기>의 기록에 대해,

북애자의 「규원사화」에는 하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와 도와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말량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 구해주도록 했다는 기록이 일치하고, 한(漢)나라 때 쓰여진 「설원(說苑)」<권모편>에 ‘성탕이 걸 왕을 치려 하자 이윤이 가로대 “청컨대 걸왕에게 바치는 공물을 막고 그의 행동을 살피십시오”

그러자 걸왕이 진노하여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왔다. 이윤이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도 능히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에 성탕은 사죄하고 다시 공물을 바쳤다. 이듬해에 탕왕이 다시 공물을 끊어버리자 걸왕이 노하여 다시 구이(九夷)의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구이의 군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윤이 말하기를 “됐습니다” 탕왕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잔당을 징벌하니 걸왕은 남소(南巢)씨의 땅으로 도망했다.’

이에 대해 <단군세기>에는

‘ 읍차 말량에게 군사를 되돌리라 명하였으나 걸이 이를 저지하겠다고 군사들을 보내어 말량의 길을 막으며 금맹을 깨려 하므로 단군 흘달(屹達)은 드디어 은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걸(桀)을 쳤다. 그리고 비밀리에 신지 우량(于亮)을 보내어 견(畎)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낙랑(樂浪)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과 빈기(邠岐)의 땅을 점령하고 관제(官制)를 만들었다’

하였고, 「규원사화」에는 ‘그 후 왕이 또 다시 군사를 보내달라고 하니 그의 무도함을 꾸짖고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여 그 일치성을 보이고 있다.

비록 왜곡된 바 없지 않으나 지나 학자들의 기록을 보면 본래 상(商) 중엽에서 말기에 이르기까지 이방(夷方)이 번성하고 그 힘이 강대하여 상(商) 왕조는 수 백 년 동안 끊임없이 동이를 정벌했다고 말한다. 실제 상 왕조의 마지막 왕 제신(帝辛) 주(紂)가 이방(夷方)을 점령해도 되는지의 여부를 점쳤다는 복사(卜辭) 기록이 현존하고 있다.

또 「좌전」에 상(商) 주(紂) 왕이 백성을 잡아가자 동이가 배반했다 했는데, 상의 주(紂) 왕은 노예를 뺏기 위해 동이를 침략했으며, 요녀 달기와 함께 황음에 빠진 채 가렴주구로 나라가 쇠약해진 자신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궁실을 비운 채 강성한 동이를 너무도 깊숙이 정벌한 나머지, 때만 바라보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무왕과 주공단에게 허를 찔려 망하고 말았다. (담론218 끝) 다음은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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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기(妲己) 그림

고서에서는 달기의 미모를 이렇게 형용하고 있다.

구름처럼 검게 드리운 머리카락, 살구 같은 얼굴에 복숭아 같은 뺨, 봄날의 산처럼 옅고 가는 눈썹, 가을 파도처럼 둥근 눈동자, 풍만한 가슴과 갸냘픈 허리, 풍성한 엉덩이와 널씬한 다리, 햇빛에 취한 해당화나 비에 젖은 배꽃보다도 아름다워라.달기는 상(商)나라 유소(有蘇: 지금의 해남 海南 온현 溫縣) 부락 출신으로 후에 폭군으로 악명 높은 주왕(紂王)의 비가 되었으며, 우리에게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로 잘 알려진 여인이다. 달기는 중국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녀의 악명은 중국인들의 언어생활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속어로 "달기정(妲己精: da ji jing)"이라 하면, 그것은 "달기같은 년", "여우같은 년(狐狸精)"이란 뜻으로 음흉하고 음탕한 여인을 욕하는 말이 된다. 달기는 상(商)의 주왕(紂王)을 유혹하여 잔혹한 형벌로 생사람을 다 죽게 만들어 놓고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성욕을 자극시켰다. 그녀의 이러한 흉악하면서도 음탕한 행위는 바로 변태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기와 주왕에 대한 이야기는 유명한 역사연의(歷史演義) ≪봉신방(封神榜)≫에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기원전 11세기에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수백년 이전에 있었던 하(夏) 걸왕(桀王)과 말희(妺喜)의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하다. 달기와 주왕이 상(商)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면 걸왕과 말희는 하(夏)나라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아홉 마리 소를 뒤로 잡아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며, 그의 눈과 귀도 매우 예민하여 상당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특히 그는 달기를 왕비로 맞은 후부터 그러한 성격이 더욱 심하게 드러나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상왕조를 파멸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달기는 주왕의 제후 소호(蘇護)의 딸로 빼어난 용모와 몸매를 갖춘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소호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왕은 막강한 병력을 파견하여 그것을 진압하자, 소호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의 딸 달기를 주왕에게 바치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그러나 야사에서는 단지 그녀의 미모와 몸매 때문에 주왕이 그토록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질 수는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즉, 그녀에게는 자신의 외형적인 미모를 훨씬 능가하는 다른 어떤 성적 매력이 있었으며, 그 성적 매력의 비밀은 바로 그녀의 성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녀의 성기는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질은 겹겹의 주름으로 이루어져 있어, 남자의 성기가 그 안에 들어오면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액체를 분비하여 꿈틀거리면서 빨아들이고, 성기를 천천히 빨아들이면서 부드럽게 꽉 죄기 때문에 주왕은 쾌감이 극에 달하여 세상의 일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야사의 기록에 따른다면 달기의 성기는 그야말로 보기드문 "명기(名器)" 중의 명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봉신방≫의 작자는 달기가 단지 미모만으로 그렇게 간단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않았을 것이고, 반드시 그녀만의 특수한 침실에서의 섹스 비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주왕이 여와궁(女媧宮)에서 참배를 하면서 여와의 뛰어난 풍채를 보고 음탕한 마음이 일어 신을 모독하는 시를 지었다. 이에 여와는 크게 노하여 구미호를 내려보내 주왕을 현혹시켜 그의 조정을 파멸시키고자 하였다. 구미호는 소호가 딸 달기를 주왕에게 바치기 위해 경성 조가(朝歌)로 가는 도중에 달기의 영혼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달기는 비로소 사람을 유혹하는 비법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주왕은 달기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여 기다릴 것도 없이 그녀를 침대로 데려갔으며, 달기의 특수한 신체적 구조는 주왕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날 이후부터 주왕은 다른 궁녀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사도 팽개친 채 오직 달기에게만 정신이 빠져 있었다. 달기는 왕비에 책봉된 후에 주왕이 자기의 미색에 현혹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서서히 그녀의 황음무도한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먼저 주왕에게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새로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모든 난간과 기둥은 아름다운 마노와 옥으로 장식하게 하였다.

주왕은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경비를 조달하고, 10만여명의 장인들을 불러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7년이란 세월이 걸려 길이 3리(里) 높이 천 척(尺), 대궁전 100여개, 소궁전 72개에 이르는 호화로운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녹대(鹿台)"이다. 주왕과 달기는 밤낮으로 이 "녹대"에서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마음껏 유희를 즐겼다. 심지어 그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연월일을 잊어 버릴 정도였기에 사관은 그것을 "장야음(長夜飮: 밤새 술마시며 논다는 뜻)"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상황을 본 대신 기자(箕子)는 "대왕의 측근들 조차 모두 왕조의 멸망을 모르지만 나만은 그것을 안다. 나의 처지가 실로 너무 위태롭구나!"라고 한탄하였다.

  달기는 음욕을 즐기는 것 외에도 잔혹한 형벌로써 생사람을 학살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녀는 주왕과 함께 여러 가지 새로운 무시무시한 형벌들을 고안해내었다.처음에 상나라의 창시자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형법이 너무도 잔혹하여 그것을 폐지하고 비교적 경미한 형벌로써 죄인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주왕은 선왕들의 법제가 너무 가볍다고 여기고 특별히 대형 청동 인두를 제조하였다. 그리고는 형을 받은 죄수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붉게 달아오른 인두를 자신의 벌거벗은 몸위에 놓고 지지게 했다.이렇게 잔혹한 형벌도 달기는 너무 시시하다 여기고 주왕에게 대형 청동 기둥을 주조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리고는 시뻘겋게 타오르는 숯불을 그 안에 넣고 죄수를 벌거벗은 채로 숯불 위에 서서 붉게 달아오른 청동 기둥을 꽉 붙잡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포락(炮烙: 통째로 굽는다는 뜻)"이란 형이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을 보고 달기는 오히려 그것을 즐기면서 그녀의 변태적 성욕을 자극시켰다. 한 사람의 죄수가 "포락'의 형을 받고 팔딱팔딱 뛰면서 재로 변할 때마다 그녀는 성에 굶주린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주왕의 품에 달라붙어 몸부림쳤다. 그녀는 일종의 사디슴(sadism: 이성을 학대함으로써 성적 만족과 쾌감을 얻는 변태증)적 변태 성욕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본 후에 섹스를 하면 그녀의 천부적인 성기능은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주왕에게 더욱 강렬한 만족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주왕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이 형벌로써 자주 달기의 성욕을 자극하였다. 짧은 1~2년 사이에 이 형벌로 죽어간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이 "포락"의 형을 즐기는 것도 점차 지겨워지자 달기는 다시 고심 끝에 "돈분(躉盆)"이란 형을 고안해냈다. 그녀는 먼저 주왕에게 녹대 부근에 넓고 깊은 구덩이를 하나 파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수많은 독사와 전갈을 그 안에 집어넣은 다음 죄수들을 발가벗겨서 안으로 밀어넣게 하였다. 달기는 주왕과 함께 녹대 위에서 잔치상을 차려놓고 그 구덩이 안에서 독사와 전갈에 잡아먹히면서 몸부림치는 장면을 구경하면서 그것을 즐겼다. 주왕은 잔치상 바로 옆에 침실을 마련해두었다가 일단 달기의 성욕이 발동하면 언제든지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서 무한한 환락에 빠져들곤 하였다.

얼마후 달기는 다시 "돈분" 좌우로 연못을 하나 파달라고 한 다음, 연못을 피하여 왼쪽에는 술지게미를 쌓은 작은 언덕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를 심게 했다. 그 나무위에 고기덩어리를 매달아두고 그것을 "육림(肉林)"이라 하였으며, 오른쪽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워놓고 그것을 "주해(酒海)"라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궁녀와 환관들을 불러모아서 나체로 씨름을 하게 한 다음, 승자는 "주해육림(酒海肉林)"에 들어가서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고, 패자는 주왕의 존엄함을 욕되게 했다고 하여 "돈분"에 집어넣었다.당시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서백(西伯: 이후의 주나라 문왕)이라는 삼공(三公)이 있었다. 주왕은 구후의 딸이 달기에 필적할 정도로 그 용모가 아름답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를 강제로 데려와서 후궁에 앉힌 다음 그녀와 달기의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벗겨놓고 차례로 훑어보면서 비교해 보았다. 그녀의 용모에 흡족한 주왕은 그녀를 비에 책봉했으나 정숙한 구후의 딸은 그처럼 황음무도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주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잔인한 달기는 기뻐한 나머지 또다시 독랄한 형벌을 생각해냈다. 미꾸라지를 여러 마리 잡아오게 한 다음, 구후의 딸을 벌거벗겨서 사지를 큰 대자로 침대 기둥에 묶어놓고 미꾸라지를 그녀의 음부에 집어넣게 했다. 미꾸라지는 습하고 따뜻한 구멍을 좋아하는지라 그녀의 음부속으로 다투어 파고들었다. 구후의 딸은 이렇게 처참하게 죽어갔던 것이다. 그래도 주왕은 분노가 가시지 않아 다시 구후를 잡아오게 하여 살을 갈기갈기 토막내어 버렸다.악후도 몇 번이나 간언을 하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서백 희창(姬昌)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세 번 탄식한 다 기산(歧山)에서 비밀리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폭군 주왕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그러나 달기의 악랄한 위세는 날로 심해져 인명을 파리 목숨보다 가벼이 여겼다. 주왕은 오로지 그녀의 성욕을 자극시키느라 무고한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산사람을 화살 과녁으로 삼거나 호랑이 우리에 집어넣었다. 달기는 심지어 임산부의 배에 들어있는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주왕과 내기를 하고, 임산부를 잡아와서 직접 배를 갈라 확인해 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잔인한 행위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3대에 걸친 공신 비간(比干)이 죽음을 무릅쓰고 주왕에게 간언을 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자기가 심장병이 들었는데 성현의 심장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주왕은 당장 충직한 신하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기원전 1057년 서백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 후의 주나라 무왕)과 군사(軍師) 강자아(姜子牙: 강태공)가 대군을 거느리고 상나라의 수도 조가(朝歌)를 공격하였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주왕은 "녹대"에 올라가서 그 아래에 붙혀둔 불길속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달기는 강자아의 병사들에게 붙잡혔을 때,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로, "나에게는 공은 있으되 죄는 없다. 만약 내가 주왕을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이 어찌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겠느냐?"라고 외쳤다.강자아는 달기를 봉신방(封神榜)으로 끌고가서 참수를 명했다. 그런데 망나니가 칼을 뽑아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달기는 돌연히 머리를 돌려 요염한 웃음을 날리면서 그를 홀렸다. 망나니는 갑자기 넋이 빠져 달기를 멍청히 바라보다 그만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른 망나니들로 바꾸어서 계속 집형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강자아는 달기의 사람 홀리는 술책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고, 부하의 화살을 꺼내어 직접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녀의 심장을 향하여 연속해서 세 발을 쏘았다.  이로써 달기는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파란만장했던 상나라의 역사도 종말을 고하고 새로 일어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달기와 주왕에 관한 위의 이야기는 대부분 ≪봉신방≫을 근거로 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봉신방≫은 많은 야사들을 기록한 일종의 신화소설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백퍼센트 진실로 간주하기는 다소 곤란하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발견된 은허(殷墟: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安陽縣 소둔촌 小屯村)에서는 은(殷) 상(商) 시기의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에서 달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언급된 곳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상나라 시대에는 국가의 대소사를 모두 거북 껍질에 기록하여 점을 치는 형식을 통해서 결정하였는데, 주왕이 일방적으로 달기의 말에 따라 모든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지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또 달기가 주왕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면, 지금까지의 중국역사를 살펴볼 때(물론 우리나라 역사나 세계의 역사도 마찬가지 임), 그녀의 친정 세력이 충분히 권력의 중심에 들어섰을 법도 한데, 어떤 역사서에도 그녀의 일족인 유소씨(有蘇氏)의 권력 장악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점도 우리에게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달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일부 학자들은 그것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주(周)나라가 자신들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부분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전개에서 뒤에 권력을 잡은 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직전의 역사를 부정 왜곡한 예를 도처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설도 상당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주왕의 포악성과 달기의 음란함을 어느 정도 인정은 하지만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만행을 저지른 부분이 특히 왜곡된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의 추측일 뿐 아직까지 반론을 제기할 만한 확증은 나오지 않고 있다. 달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주왕이 "녹대"에서 뛰어내려 분신자살한 후에 달기는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공융(孔融)의 말을 인용하여 주나라 군대가 조가(朝歌)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주나라 군대가 조가에 진입한 이후에 더 이상 달기를 비방하는 말이 없었다는 것을 하나의 방증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달기는 뒤에 일어난 왕조에 의해 역사적으로 희생된 인물일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악녀와 요녀의 화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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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담론221.풍(風)씨 성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씨에 대해-풍(風)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  안원전   2003/04/29  7312
297    담론222. 음악과 예는 모두 동이족의 종교적 의식에서 나온 것, 예악(禮樂)을 만든 이(夷)족이 융(戎), 하(夏)족과 융합하여 화하 집단을 만들고 오늘날의 한(漢)족을 만든 것  안원전   2003/05/10  6793
공지     특집기획. 웅장한 동이 대륙사 홍산문화(紅山文化) 대문구(大汶口) 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의 놀라운 고고학적 실체 국내 최초 완전 공개! [4]  안원전   2003/05/12  23158
295    담론223.요(堯)의 신하로 있다가 순에 의해 유주(幽州)로 귀양을 간 공공(共工)은 한민족 혈통,엄(奄)국과 서(徐) 모두는 영(嬴)씨 성을 가진 소호(少昊)의 후손 백익(伯益)의 후예  안원전   2003/05/21  7167
294    담론224,치우(蚩尤), 공공(共工), 백이(伯夷)는 어떤 민족정신과 민족문명을 수립했는가,주나라 문왕의 시조도 동이족이지만 태공망과 주(周) 왕조와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주공단에 대한 기록 주 왕실- 동이족의 혈통을 계승했음  안원전   2003/06/02  5889
293     담론225.<사기>,<한서> 등의 사적에 전하는 산동성의 제지(齊地), 제국(齊國)의 “팔주(八主)”라고도 불리는 “팔신(八神)” 제사 옛 풍속 [1]  안원전   2003/06/10  6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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