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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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210.왕성강(王城崗) 유적지의 발굴을 하(夏) 문화 탐색의 중요 수확으로 여기고 있다.
<국어(國語)․주어(周語)>, 청(淸) 대 홍이훤(洪頤煊)의 <균헌문초(筠軒文鈔)>에 <우거양성고(禹居陽城考)>가 있어, 아주 풍부하게 논술하고 있다. 근년래에 양성(陽城) 땅에 속하면서 양성을 멀리 내다보는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경내에 대륙에서 가장 이른 성보(城堡) 중의 하나인 “왕성강(王城崗) 성보(城堡)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한 군데 도읍지를 확정할 필요가 있으며, 무엇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하(夏) 문화의 문제로 하(夏) 문화를 확립해야만 비로소 하(夏) 문화의 범위를 집중탐색 할 수 있다.

40년대 초기에, 학자들은 앙소(仰韶)문화를 하(夏)문화로 여겼는데, 용산(龍山) 문화도 하(夏) 문화로 여겼다. 단지 당시에 누적된 고고학 자료의 한계로 인해서 연구자는 단지 일반적인 추측 만 할 수밖에 없었다.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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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사오문화 [仰韶文化])]
1921년에 J.G.안데르손이 허난성[河南省] 민츠현[池縣] 양사오 부근에서 신석기시대의 대취락지를 발견하였다. 화북(華北)에서 일어난 최초의 농경문화를 양사오문화라고 하는 것은, 이 유적의 이름에 연유한다. 채도가 특색이어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하며, 간석기 ·뗀석기 및 양날이 있는 돌식칼과 구멍이 한 개 뚫린 돌식칼로 수확한 것, 돌을 갈거나 흙을 구워 만든 팔찌를 애용한 것 등도 특색으로 들 수 있다.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은 주로 조를 재배하였으며 돼지 ·개 등을 사육하였다. 유적은 허난성 서부, 산시성[山西省] 남부, 산시성[陝西省] 중부에 널리 분포하는데, 그것들은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반포[半坡]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형의 문화와, 허난성 산셴[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형의 문화가 있다. 전자(前者)는 채도가 적고 토기의 무늬는 단순한 동물무늬 등이 특색이며, 후자(後者)는 채도가 비교적 많고 토기의 무늬는 기하학무늬를 주로 하여 변화가 많다. 양자의 전후관계에 대하여는 아직 정설이 없다.

룽산문화 [龍山文化(용산문화룽산문화라는 명칭은 유적의 소재지인 룽산전에서 따온 것이다. 1930∼1931년의 발굴시 상 ·하 2층 구조의 유적 중 하층에서 칠흑빛이 나는 일군의 검은간토기[黑陶]와 다수의 석기 ·골각기 ·패기 등이 출토되었다. 이 문화는 검은간토기로 대표되기 때문에 흑도문화라고도 한다. 검은간토기는 채도(彩陶)와 더불어 황허강[黃河] 유역의 중요한 선사토기인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검은간토기는 항아리[壺] ·솥[鼎] ·잔 ·접시 ·주발 등 여러 가지이며, 그 분포지역은 산시[陝西] ·산시[山西] ·허난[河南] ·허베이[河北] ·산둥[山東]의 황허강 하류 ·중류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되고, 그 외에 양쯔강[揚子江] 하류 지역과 랴오둥[遼東]반도 ·한반도 등의 지역에까지 미친다. 간쑤성[甘肅省]에 전파된 것은 치자기[齊家期]라고 부르며, 장쑤성[江蘇省]의 칭롄강문화[靑蓮崗文化]나 후베이성[湖北省]의 취자링문화[屈家嶺文化]는 룽산문화의 영향이 미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룽산문화의 기본토기는 세니질(細泥質)의 검은간토기, 이질(泥質)의 회도(灰陶), 사질(砂質)의 회도로, 그 원류(源流)는 양샤오문화[仰韶文化]이며, 양샤오문화의 이질 채도와 사질 채도가 혼합되어 있다.

룽산문화의 특질을 요약하면, 검은간토기를 많이 사용한 점과 간석기의 보급,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부엌용 반월형 돌칼과 돌낫의 출현, 식칼 ·톱 ·낫 등의 패기(貝器)의 사용, 골점(骨占)을 행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화기는 농경과 목축의 병용기로서 양샤오문화기에 비하여 농경기술이 진보하고, 가축의 수도 증가하였지만, 사회형태는 계급차이가 현저히 발달하지 못한 단계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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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강(王城崗) 유적지의 발굴을 하(夏) 문화 탐색의 중요 수확으로 여기고 있다.


1959년에 진행된 “하허(夏墟:하나라 유적터)” 조사로부터, 겨우 하(夏) 문화의 탐색, 토론이 정식으로 전개하여, 하(夏)왕조의 강역인 하남(河南) 경내의 예중(豫中), 예서(豫西), 산서(山西) 경내의 분하(汾河) 중 하류, 특별히 분(汾), 회(澮), 속(涑) 및 심(沁), 단수(丹水) 유역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진일보했다.

근년 들어 고고학 자료의 부단한 누적으로 말미암아 학자들도 대담한 탐구와 검토를 하여, 하남 용산문화 말기와 이리두(二里頭) 문화 1,2기가 하(夏) 문화 유적지라는 연구 논문을 제출하고, 어떤 이는 이리두(二里頭) 문화 1,2기가 하(夏) 문화 유적지라 하고, 또 이리두(二里頭) 문화 1기에서 4기까지가 하(夏) 문화 유적지라 하고 있다.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왕성강(王城崗) 성보(城堡) 유적지” 발굴은, 소위 우(禹)가 양성에 거주했다는 우거양성(禹居陽城)이 오늘날 왕성강(王城崗)과 더불어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며, 아울러 왕성강(王城崗) 유적지의 발굴을 하(夏) 문화 탐색의 중요 수확으로 여기고 있다.

<인민일보>, <광명일보>, <북경일보>, <하남일보> 및 기타 간행물은 왕성강(王城崗) 유적지의 발굴의 정황을 앞뒤로 보도하고, 아울러 왕성강(王城崗) 유적지가 하(夏) 대의 중요 성터(城址)라 여기고 있다. 문헌에 기재된 가운데의 우(禹)와 양성(陽城)의 관계는 밀접한 것으로, 왕성강(王城崗) 유적지가 소재한 위치는 문헌에 기재된 하도(夏都) 양성(陽城)의 주변전망과 기본적으로 딱 들어맞아 부합한다.

그러나, 일개문화의 확립, 특별히 노예제 왕국 도성(都城) 한 곳의 확립은, 모두 마땅히 사람들을 설득할 만한 재료를 갖추어야 한다. 하내(夏鼐:가마솥 내, 여기서는 인명) 선생은 하도(夏都) 문제에 관해, “일반적인 탐구 탐색 과정 중에, 이는 모(某) 한 왕조에 속하는 유적지를 먼저 확정한 연후, 이 왕조의 경도(京都)를 재 확정하는” 것으로 여긴다.

또 말하기를, “만일 이 유적지가 하(夏) 문화에 속한다 해도 거듭 도성인지 아닌지의 문제가 남아있다.”, “따라서 이 곳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하(夏) 문화 문제다(하내(夏鼐):<하문화의 몇 개 문제를 담담 탐구탐색함(談談探討夏文化的幾介問題)>,<하남문박통신(河南文博通迅)> 1978년 1期), 일단 하(夏) 문화가 해결되었으므로, 하 유적터(夏墟)의 미스테리도 곧 어렵지 않게 풀릴 것으로 보인다.

문헌상에 기재된 것을 근거해 보면, 하(夏) 왕조의 도성은 상조(商朝)의 그것과 더불어 일찍이 여러 차례 옮겨다녔는데, 단 하(夏) 왕조의 도성은 시종 하남 서북부와 산서 서남부 두 곳을 중심으로 띠처럼 두르고 있음을 가히 볼 수 있다.

전자는 청(淸) 대 홍이훤(洪頤煊)의 <균헌문초(筠軒文鈔)>에 <우도양성고(禹都陽城考)>에서 가히 상세히 볼 수 있으며, 후자는 사서 가운데에도 비교적 많이 기재되어 있다.

「좌전(左傳)」 정공(定公) 4년 두예주(杜預注)에:“하의 유적터(夏墟), 대하(大夏)는, 지금의 태원(太原:산서성 省都) 진양(晋陽)이다”. 정공(定公) 4년, “<당고(唐誥):서경의 편명>로 명하여, 하허(夏墟:하 유적지)에 봉하다” 이로 말미암아 하허(夏墟) 위치가 “진중태원(晋中太原)”설과 “진서남(晋西南)”설이 생겨났다.

사서 가운데 하허(夏墟)로 추정하는 기사가 비교적 분산된 것으로 말미암아 전설이 비교적 많을 뿐만 아니라 하(夏) 문화 유적지의 분포도 비교적 널리 퍼져있는 이유로 하나로 집중해 모이는 연구자료가 아주 결핍되어있는 상황이다.

하(夏) 왕조의 활동의 중심과  하(夏) 왕조의 통치구역은 마땅히 나누어져 있으므로, 하(夏) 유적지를 탐색함에 있어 마땅히 큰 범위를 집중 탐사해 중심 방면에 도달해야 한다.

우(禹)가 양성(陽城)에서 맡아 다스리지 않고, 혹 양적(陽翟), 혹 안읍(安邑), 혹 진양(晋陽)에 거해 다스렸다는 것은 모두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지만, 우(禹)가 거주한 지방은 일정치 않았으니 이것이 곧 하조(夏朝)의 도성이다.

별도로 그 외에 하(夏) 왕조는 이 건도(建都)에 있지 않았으며, 또 유무대형 혹 하(夏) 문화 유적지의 재료와 더불어 마땅히 상호 인증(印證)한다.

이상 서술한 바를 종합해, 하허(夏墟) 문제를 탐색하면, 단지 하대(夏代) 활동의 지역 범위 내에서 능히, 문헌 기록을 근거해, 고고학 발굴을 결합하면, 하(夏) 문화의 연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으니, 그의 사회발전 단계, 장악한 지역의 분포범위와 시간의 단대(斷代)를 이해하여, 세밀한 분석과 연구를 진행해, 이 문제는 곧 가히 순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고고학 사업의 신속발전과 고고학자료의 부단한 축적에 따라, 하허(夏墟)의 미스테리는 풀릴 것이니 이러한 때는 멀지 않았다.(王吉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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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엠파스 > 뉴스 > 국제 > 종합 >    

"中 최초 하왕조 수도는 二里頭"  
(베이징=연합뉴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최근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왕조의 수도는 허난(河南)성의 유적지 어리터우(二里頭)라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考古)연구소의 두진펑 연구원은 29일 하왕조 수도의 위치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견일치를 보았다면서 이로써 지난 40년 이상 계속된논쟁에 종지부를 지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두 연구원은 지금까지 기록부족으로 하왕조 역사가 분명하지 않았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중국의 두번째 왕조인 상(商)왕조의 유물과 어리터우 유적에서 출토된 후기 하왕조의 유물간에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음이 밝혀졌다고 설명했다.

어리터우 유적은 40여년 전 중국의 한 고고학자가 발견한 고대 유적지로 지금까지 세계 최초의 청동 제기와 여러 고대 왕궁들이 발굴됐었다.

karllee@yonhapnews.co.kr


[중국] 3천년전 夏나라 유적 발견    
게재일 : 2000/01/18
    
중국 샨시(陝西)성 상조우(商州) 부근에서 3000여년 전 하(夏)나라 초기 유적이 발견됐다고 인민일보가 17일 보도했다.
유적이 발견된 곳은 샨시성 상조우시에서 동쪽으로 3㎞ 떨어진 단(丹)강 북쪽 언덕의 동룽산(東龍山)으로, 발굴팀은 지난 97∼98년 사이 이곳에서 주(周) 상(商) 하나라 말기 문화유적을 발견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유적지 서쪽에서 400㎡에 달하는 하나라 초기 고고문화층을 발견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 문화층에서는 돌도끼, 구멍난 돌칼, 석벽(石壁) 골기(骨器), 동(銅)제련의 흔적, 일용 도자기 등이 발견됐다.
발굴팀은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주전자, 항아리, 술잔, 삼족(三足) 항아리, 귀 달린 제기(祭器) 등 100여건의 도자기 유형과 장식무늬 등을 분석한 결과, 하문화의 대표적 유적인 허난(河南) 옌스(偃師)현 얼리토우(二里頭)촌의 것과 크게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팀은 앞서 이곳에서 발견된 하나라 말기 유적이 얼리토우 유적과 흡사한 점으로 미루어 이번에 발견된 도자기 등이 하나라 초기 유적일 가능성이 높으며, 하-상-주의 시대 구분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보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북경=조선일보 지해범기자>

B.C. 5000년경 황하(黃河)유역에서 시작된 중국의 채색토기와 농경문화의 문화연대를 앙소문화(仰韶文化)라 한다. 그 뒤를 이어 B.C. 2700년경 회도(灰陶)의 시작과 가축문화의 다양화를 이룬 연대를 용산문화(龍山文化)라 하고 그 다음 B.C. 1600년경에 이르러 청동기문화의 융성기에 해당되는 은(殷)문화가 나타난다. 그로부터 주(周), 한(漢), 춘추(春秋), 전국(戰國)과 진(秦)나라의 천하통일로 발전하여 고대 중국의 문화적 개화기를 형성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중국 역사를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시작하여 하(夏)·상(商)·주(周)로 기술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상(夏商)을 신화시대로 구분하는 학자들이 많았지만 하왕조(夏王朝)의 실존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은허(殷墟)의 발굴로 상대(商代)의 실존이 분명해져 이젠 학계의 양상도 많이 달라졌다.  
하상(夏商)의 유적은 하남성의 정주(鄭州)와 낙양(洛陽)을 중심으로 언사(偃師)·등봉(登封)·안양(安陽)·우현(禹縣) 등에 산재해 있으며 황하 남북에서 집단을 이루고 있다. 이 일대가 한족(漢族)의 고향인 중원으로, 한족문화(漢族文化)의 발상지이며 중국문화의 고향이다. 여기서 토기와 석기·옥기·왕궁유지 등 엄청난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물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호사스러운 권력자의 모습과 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연상케 하는 파노라마다. 고고학은 이 시대를 용산문화만기(龍山文化晩期)에 나타난 이리두문화기(二里頭文化期)로 구분한다.
촉인문화(蜀人文化), 중원(中原)에도 영향 미쳐
우왕에 관한 설화 한두 가지를 참고로 소개해 두고자 한다. 우(禹)는 요(堯)로부터 명령을 받고 9년을 끌어도 치수에 성공하지 못해 죽음으로 책임을 진 곤()의 아들이다. 그가 치수에 실패한 것은 상제(上帝)의 보물인 식양(息壤)을 훔쳤기 때문이다. 식양은 한 주먹의 흙인데, 땅에 바르기만 하면 부풀어 제방이 되고 산이 되어 홍수를 막아 준다는 것이다. 곤()은 그것을 훔쳐 치수를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식양을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된 상제가 그것을 거두어 가버렸다. 그로 인해 쌓아 두었던 제방과 산이 없어져 세상이 다시 물바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상제는 축융(祝融)이라고도 하고 촉용(燭龍)이라고도 하는 인면용신(人面龍身)의 귀신을 시켜 곤()을 죽였지만 3년이 지나도 시체가 썩지 않아 칼로 몸통을 잘랐더니 그 속에서 우(禹)가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삼성퇴박물관에서 촉용이라는 청동상을 보았다. 축융과 촉용이 같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발음이 비슷하여 와전된 것이라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도 인면용신(人面龍身)·인면수신(人面獸身) 등 몇 가지 용모와 이름으로 촉용이 등장하고 있다.
촉용은 본래 삼성퇴 촉나라 사람들의 수호신이다. 그래서 그들은 촉용을 청동으로 형상화해서 신전에 모셨던 것 같다. 박물관에 진열된 촉용은 괴이한 모습의 가면으로 학자들은 얼굴이 용의 모습이라 말하고 있다. 밤과 낮을 조종한다는 그 눈은 무섭게 튀어 나왔고 안면 중간에는 대관(帶冠)이라는 긴 장식물이 붙어 있다.
촉용을 시켜 우왕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은 촉나라 토템이 중원으로 확산된 것을 설명해 준다. 촉나라 문화가 중원으로 침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민족이나 부족에 따라 상이한 문화가 대동한 것을 중심으로 재구성되면서 확산되어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문화적 변동은 한두 분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제사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법이다. 의식과 제물과 제복 등 제사의 형식적인 내용에서도 왕이 다른 민족이나 부족을 정복하라는 ‘천명(天命)’을 받는 의식도 있었고, 천명에 따르는 맹서를 창출하는 의식도 있었다. 그리고 거둔 전과를 수호신에게 보고하는 의식도 있었다. 이 의식에서는 제물이 달라질 수 있으며 술과 차를 의식에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대에는 차자(茶字) 없어 도자(字) 통용
여기서 일단 해명을 하고 넘어 가야 할 문제가 있다. 앞에서 인용한 신농씨의 『식경』에 차를 ‘도명(茗)’이라 했다는 부분이다. 우선 수천년 전에 읊었다는 『시경(詩經)』에 나타난 차의 명칭부터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의 면()에는 ‘주나라 넓은 들이 비옥하여 쓴 나물 씀바귀도 엿처럼 달다(周原 菫繁如飴)’고 한 구절이 있고, 국풍(國風)편의 곡풍(谷風)에는 ‘누가 씀바귀를 쓰다 했나뇨, 내 처지엔 냉이보다 달아요(誰謂盃苦 其甘如薺)’라고 읊은 구절이 있다. 여기 나온 도()와 『식경』에서 인용했다는 도()는 동일한 글자이며 모두 ‘씀바귀(苦菜) 도’로 읽는다. 그러나 중국의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 한어대사전출판사)』은 차(茶)의 고자(古字)라 했다. 일본의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 諸橋轍次著)』은 두 번째 뜻으로 ‘특히 잎을 빨리 딴 것을 도()라 한다. 늦게 딴 것은 명(茗)이라 한다. 차(茶)와 같다’고 하였다. 육우도 이 두 글자를 혼용했다.
‘도’가 ‘차'의 옛 글자라는 데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차가 생산되기 전에 ‘도’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씀바귀’를 지칭하는 것이며 당대(唐代)를 전후하여 차(茶)라는 글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을 해석하면 당나라 전후에 비로소 차(茶)라는 글자가 생겼으니 그 이전에는 도()라는 글자가 차의 글자로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나라 이전에 이미 차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차는 글자(茶)가 있기 전에 존재했다. 운남성(雲南省)에 야생 차나무가 아직도 거목으로 생존하고 있으니 차의 뿌리를 캐기에는 다행한 일이다. 여러 문헌과 기록을 살펴 본 바로는 고대 중국 사람들은 차(茶)자가 생길 때까지 도()자를 차(茶)의 뜻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또 하나의 근거는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이란 날짜가 기록된 ‘동약(約)’이라는 노예문서에 나오는 도()자다. 신작 3년이면 B.C. 59년, 기원전 1세기다. ‘동약(約)’은 촉나라 문인 왕포(王褒)가 편료(便了)라는 노예를 매입하여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백 가지 사역을 계약서로 만든 것이다. ‘종 동()’에 ‘맺을 약(約)’이니 문자 그대로다. 그 종이 해야 하는 사역 가운데 도()에 관한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포별팽도(鱉烹)’ 다른 하나는 ‘무양매도(武陽買)’다. 즉 ‘자라를 통째로 굽고 “도”를 삶는 것’과 ‘무양에 가서 “도”를 사 오는 것’이다. ‘씀바귀를 삶는다’는 것도 그렇지만 ‘무양까지 가서 씀바귀를 사 오라’는 것은 정황에 맞지 않는다. 무양은 지금의 사천성 팽산현(彭山縣)이다. 성도(成都)에서 아미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 그곳은 옛날부터 차의 집산지다. 차의 기원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약’에 나오는 도()를 차(茶)의 뜻으로 인용하고 있다.

차(茶)자가 만들어진 것은 8세기
나는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아미산(峨眉山)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들렀다. 대로변만을 스쳤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여기가 무양이구나’ 생각하며 아미산 명차들이 여기서 시장을 이루었겠다고 생각했다. 팽산을 지나고 소식(蘇軾)의 고향 미산(眉山)을 지나서 낙산(樂山)에 이르렀다. 삼성퇴 고대 촉나라를 요새화 시켰던 민강(岷江)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대도하(大渡河)와 청의강(靑衣江)이 낙산에서 민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물살이 거세고 홍수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나라 때인 개원(開元) 원년(713)에 그 곳 산을 깎아 미륵좌상을 건조하기 시작하여 90년만에 완성했다. 높이가 71미터에 강물을 밟고 있는 듯이 앉아 있는 미륵불의 발등 위에 100명의 사람이 올라 설 수 있을 정도로 크다. 부처님이 안치되고 나서는 강물로 인한 수재가 줄어들고 천하명승지가 되어 일거양득의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자랑이었다.  
이 ‘도()’자를 ‘차’(茶)로 읽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고증학(考證學)의 개조인 청나라 고염무(顧炎武)다. 17세기 사람인 그는 ‘도()’자로부터 ‘차(茶)’자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 8세기경의 당나라 때였으며 차를 마시는 것은 촉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무양까지 가서 씀바귀를 사 오라’는 동약의 기록은 ‘무양에 가서 차를 사 오라(武陽買茶)’로 읽는 것이 옳다고 했다.
삼성퇴를 중심한 촉나라 이야기는 여기서 일단 매듭을 지으려 한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도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중국차는 오묘하다. 맛과 향과 멋이 오묘하지만 그 역사와 발전 과정은 더욱 오묘하다. 사천성(四川省)에 정착한 촉나라 사람들이 차를 마신 시조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보다 훨씬 오래 전에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유역에서, 그리고 운남성(雲南省)을 비롯한 중국의 남방지역에서도 차를 마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글: 이 원 홍<(사)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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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8. 8仙人 중 유일 女선인 하선고(何仙姑)  안원전   2009/01/31  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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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담론198.「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 “소전(少典)의 비(妃)는 안등(安登)이니, 화양(華陽)에 유(遊)할쎄, 「예기」 <제법정의>에 이르기를 여산(厲山)씨는 염제라&중동지역이나 이집트의 도자기가 기원전 4-5천년 이전의 중국대륙의 도자기보다 뒤진다  안원전   2002/11/28  7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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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담론201.홍도와 회도문화는 한가지로 패가리호(貝加爾湖:바이칼호)에서 나와 구석기 말기에 대륙으로 나누어 들어가 발전한 동이족 부족,“야랑자대(夜郞自大)”의 고사  안원전   2002/12/26  6178
320    담론 202. 채도문화와 황제 도읍지 및 제요(帝堯) 도당(陶唐)의 활동공간/’왕래하여 옮겨다니되 일정한 곳이 없으니, 군사들로 에워싸 지키면 곧 도읍지였다(遷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 좁아터진 분치 제후국 제요  안원전   2002/12/30  7841
319    담론203.<제왕세기>에 요(堯)의 도읍지는 산서 임분현(臨汾縣) 남쪽평양(平陽),「죽서기년」 요(堯)가 지금의 섬서성 오른쪽 산서성 기(冀)에 거함  안원전   2003/01/07  6765
318    담론 204. 요의 웅거지 산서성 임분:「묵자」 절용중편, 「한비자」 십과편 및 「순자」 왕패편, 양(楊) 주(注) 시자(尸子),5적(狄)은 하나 왈, 월지(月支), 둘 왈, 예맥(濊貊), 셋 왈, 흉노, 넷 왈, 선우(單于), 다섯 왈, 백옥(白屋)이라 하였다.  안원전   2003/01/08  7816
317    담론205요(堯)의 어머니는 바로 동이족 염제 신농씨 가문 진봉(陳鋒)씨의 따님인 경도(慶都)라는 아가씨로 동이족 염제의 7세손  안원전   2003/01/13  6314
316    담론 206. 서량지의 동이족 전욱의 출자& 사마천의 역사왜곡에 대한 정강성과 왕숙, 장자의 직필, 요의 혈통적 배경과 모친 경도로부터의 신비화 작업  안원전   2003/01/13  6290
315    담론207. 제요 방훈시기는 원시사회의 부계씨족 사회 말기단계로, 도처에 부락 규모의 국가가 숲처럼 가득 들어찬“부락방국임립지시(部落方國林立之時)”의 시기  안원전   2003/01/21  6101
314    담론 208. 한무제 유철과 황후가 된, 요(堯)의 고향이자 도읍지 산서성 임분 출생의 일개 기녀, "위자부(衛子夫)"의 러브로망  안원전   2003/01/27  6464
313    담론 209.우 임금 시절에 대한 실루엣-서쪽으로 하남(河南) 서부와 산서(山西) 서남부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지금의 하남(河南), 하북(河北) 산동(山東) 3성(省)의 경계지방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 호북(湖北)에 접하고 북으로는 하북(河北)으로 들어가-  안원전   2003/01/27  5936
   담론210.왕성강(王城崗) 유적지의 발굴을 하(夏) 문화 탐색의 중요 수확으로 여기고 있다.  안원전   2003/01/27  6268
311    담론212.악사(樂師)였던 고수(瞽瞍) 「죽서기년」 원본과 「환단고기」<태백일사>의 요순 선양실체-옛날에 요의 덕이 쇠하니 순이 (요를) 가둔 바 되었다.(昔堯德衰爲舜所囚也  안원전   2003/02/12  6795
310    담론213.대륙의 지나사학도들이 바라보고 있는 요순(堯舜) 선양(禪讓)의 실체-  안원전   2003/02/18  7869
309    담론211.「죽서기년」에 「초어(楚語:초나라가 동이 9족의 국가라는 것은 앞서 밝혔다)」에 이르기를 삼묘(三苗)가 구려(九黎:우리 동이족)의 덕을 거듭 실천하고, 요(堯)가 다시 중려(重黎)의 후예를 길렀는데 옛사람을 잊지 못했다 [1]  안원전   2003/02/21  6582
308    담론163.파촉(巴蜀) 땅은 일찍이 이들 복희씨의 사(蛇) 도등(圖騰) 족이 웅거하여 상고시절에 이름을 얻은 지역이니 파촉의 파(巴:大蛇)는 큰 뱀을 의미하여 「설문(說文)」에 '파(巴)는 충(蟲:동물의 총칭), 혹은 코끼리를 먹는 뱀' [1]  안원전   2003/02/25  6151
307    담론214.(속)요순선양. “요순선양(堯舜禪讓)”설이 실은 전국시대 초기의 묵가(墨家)가 창조한 것  안원전   2003/02/28  7052
306    담론215(속)요순선양,「한비자(韓非子)」 <식사(飾邪)>에 방풍(防風)씨의 군(君)이 늦게 도착하자, 우(禹)가 그를 참(斬)했다”  안원전   2003/02/28  6552
공지    한겨레 비난한 글을 읽고-이승만 동상 국회건립과 세종로 충무공자리 및 (당시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남산 81척(56년 이승만 81회 생일을 기념) 동상  안원전   2003/03/06  21834
304    담론216. 단군왕검은 우순에게 명해(天王乃命虞舜) 토지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分土而治) 군사를 보내어 주둔하여(遣兵而屯) 함께 당요를 정벌하기로 약속하자(約以共伐唐堯) 요의 세력이 곧 꺾여 순에게 의지해서(堯乃力屈 依舜而保命以國讓>  안원전   2003/03/25  6904
303    담론217 단군조선을 비롯한 동이 제족이 하나라를 장악하다-설원(說苑)」<권모편>에 걸왕이 구이(九夷)의 군사를 빌어 쳐들어오자 이윤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안원전   2003/04/11  9142
302    담론218중국 측의 고대사서는 공자의 사서삼경에 의해 그 중추가 부러지고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허리가 잘려나가 그 이후의 중국 측의 대부분의 사료들이 마치 레미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며 반복해서 돌려댔다  안원전   2003/04/11  5484
공지    동이 대륙상고사 유적지 탐사를 마치고(안원전) 2002.8.16  안원전   2003/04/15  15485
300    담론 219 하 왕조 임금이 덕망을 잃자 이(夷)족이 배반, 걸 왕이 모질게 굴자 여러 이(夷) 족들이 쳐들어 오고, 상 왕조가 쇠약해지자 동이는 중원을 차지  안원전   2003/04/24  6231
299    담론220 춘추와 비춘추, 갑골문에서 말하는 4위(圍)의 정체와 흉노의 정체  안원전   2003/04/24  7252
298    담론221.풍(風)씨 성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씨에 대해-풍(風)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  안원전   2003/04/29  7312
297    담론222. 음악과 예는 모두 동이족의 종교적 의식에서 나온 것, 예악(禮樂)을 만든 이(夷)족이 융(戎), 하(夏)족과 융합하여 화하 집단을 만들고 오늘날의 한(漢)족을 만든 것  안원전   2003/05/10  6793
공지     특집기획. 웅장한 동이 대륙사 홍산문화(紅山文化) 대문구(大汶口) 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의 놀라운 고고학적 실체 국내 최초 완전 공개! [4]  안원전   2003/05/12  23158
295    담론223.요(堯)의 신하로 있다가 순에 의해 유주(幽州)로 귀양을 간 공공(共工)은 한민족 혈통,엄(奄)국과 서(徐) 모두는 영(嬴)씨 성을 가진 소호(少昊)의 후손 백익(伯益)의 후예  안원전   2003/05/21  7167
294    담론224,치우(蚩尤), 공공(共工), 백이(伯夷)는 어떤 민족정신과 민족문명을 수립했는가,주나라 문왕의 시조도 동이족이지만 태공망과 주(周) 왕조와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주공단에 대한 기록 주 왕실- 동이족의 혈통을 계승했음  안원전   2003/06/02  5888
293     담론225.<사기>,<한서> 등의 사적에 전하는 산동성의 제지(齊地), 제국(齊國)의 “팔주(八主)”라고도 불리는 “팔신(八神)” 제사 옛 풍속 [1]  안원전   2003/06/10  6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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