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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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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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담론197.동이(東夷), 서하(西夏)적 용봉 2원 연맹-이하(夷夏)일가의 중국민족 구성과 전통문화 탄생의 원시적 기초&화샤(華夏)족의 형성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 제3’에 판천 전쟁에서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조급하게 공을 세우려다가 불행하게도 전쟁터에서 전사했다고 했다. 서량지는 이 뒤로 염제족과 황제족 사이에 소강상태가 이루어져 황제는 소위 동서방족 융합정책의 부족연맹에 의해 지나족의 정형화 과정인 서이(西夷)에서 서하(西夏), 서하(西夏)에서 화하(華夏), 화하(華夏)에서 다시 한(漢)족으로 가는 기초를 닦은 것에 대해 ‘중국 신석기 말기에 동서연맹이 성립된 것은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한 바탕은 동이(東夷), 서하(西夏)적 용봉 2원 연맹이었으니 이것이 곧 후일 이하(夷夏)일가의 중국민족 구성과 전통문화 탄생의 원시적 기초다’라고 말하여 동방족의 봉 도등(깃발로고)족과 서방족의 용 도등 족이 용봉도등을 만들어 동서방 공동의 부락맹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상고문화예술 유산으로부터 용, 봉을 토템휘명으로 삼은 상고 문화족단이 창조한 문화체계 곧, 인류의 본진(本眞)을 터득했다고 자칭하는 왕대유(王大有)는 「용봉문화원류」에서 이러한 동서방 용봉도등 연맹집단의 종주영수를 전욱이라 말하고 1987년 5월 하남성 복양 서수파 앙소문화 유적지에서 6천년전의 <용호묘>의 주인이 바로 전욱이라 말한다.

서량지는  남근석이 은허의 출토물로 발견된 것을 증거로 해 전욱 때에 이미 남근 숭배사상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동이족이 전욱 이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다고 말한다.  참고로 서량지는 이러한 남근석 신앙은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발상지이자 원시 동이족의 발상지인 패가리호(바이칼호)에서 곧바로 동몽고를 거쳐 은허(殷墟)의 안양(安陽)에 이르러 두루 퍼져 있었다고 보고, 이들 석제 남근석들이 바이칼호 서안의 안가납하(安加拉河:Angara River) 유역의 신석기 시대 장묘에 순장되어 발굴되었다고 말한다.

이미 낙빈기도 그의 저서 「금문신고」에서 섬서성 서안 황제릉 자료관에 도조(陶祖)라 이름 붙여진흙으로 구운 남근도기가 진열된 예와 함께,  일찍이 조(祖)의 어원이 되는 且는 남근 성기의 귀두까지 자세히 묘사한 상형문자로 제사(祀)를 지냄을 의미하는 示자에 且자를 보태 남근숭배사상의 본질을 보여준 바 있다.

대륙의 상고 사료를 들여다 보면, 태호시절에는 동이족이 대륙을 다 말아먹었기 때문에 아와 비아의 구분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제라는 이단자가 나타났다. 이단자라 함은 그도 역시 동이족이었다는 뜻이고 그에 대해서는 앞서 거론한 바 있고 뒤에서 다시 거론할 예정이므로 여기서 새삼 거론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염제신농의 후예인 염제 유망이 염제 부락국가의 쇠망을 가져오자 황제가 이를 통합했는데, 후일의 공자와 사마천, 한(漢)대의 유안(劉安:「淮南子」 저자)이 보니 이것이 바로 한(漢)족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화하(華夏)족의 출발점으로 보였다.

사실 알고 보면 한(漢)족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동이 제 족을 동이, 서융, 남만, 북적으로 만들고 춘추 화하사관의 뼈대를 세우는 분탕질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사마천이 황제(黃帝)를 한(漢)족 역사의 시조로 만들자매 그 상대역인 치우나 창조설화상 그 위의 복희는 언급해도 그 이상의 역사는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면 그 뿌리가 다 들통나기 때문이었다. 황제부락이 모여 거주한 지방에 대한 역사기재 역시 각기 한결같지 않다. 이는 이러한 뿌리왜곡의 일환으로 알고 보면 당연한 결과다. 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다시 한번 핵심만 뽑아 제시해 보기로 한다.

초학기 9권에서 귀장계서에서 인용한바에 의해(初學記卷九引歸藏啓筮云),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3권에 의하면,

“해주의 염택은 소금색깔이 검붉다. 세상사람들은 치우의 피라고 말했다. 즉 해주는 비록 노사에서 말하는 중기와 반드시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후세에는 치우가 피살된 곳이 그곳이라는 신화로 굳어져있다. 치우가 피살된 곳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 중에서 기주의 들이 탁록의 언덕이라는 것이 가장 정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흉여토구는 응용이 사는 땅으로, 반드시 치우와 과보가 피살된 곳은 아닐 것이다. 황제가 응용을 시켜 치우를 이 언덕에서 죽였다고 하는 것은, 경문의 오독으로 인해 생겨났을 것이다.(沈括夢溪筆談卷三云…解州鹽澤,  色正赤, 俚俗謂之, 蚩尤血. 則解州雖不必如路史所附會之中冀, 後世固亦有蚩尤被殺於其地之神話也. 蚩尤被殺之地, 於不同之諸說中, 要以冀州之野卽 鹿之阿爲近正. 至此經之凶犁土丘固應龍所居之地, 未必卽蚩尤 父被殺之地, 云黃帝使應龍殺蚩尤於此丘者, 亦由誤讀經文而生之附會.)”이라 한 바와 같이 치우는 전쟁에서 진 적이 없는 무신(武神)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족도 이러한 불패의 신화를 지닌 치우신을 모셔왔던 것이다.  다음의 인민일보 기사가 전하고 있는 것처럼 치우는 비교적 일찍이 청동기 문명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황제는 석기시대 문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 무장한 철 기마병을 보면 도망만 다녀야 했다. 이래서 치우는 고대 대륙 사에서 무신(武神)으로 유명하게 된 것이다.

黃帝文化遠及南方(황제문화 멀리 남방에까지 미치다)<인민일보>

   -新華社杭州2 月19日電(記者愼海雄)我國的歷史敎科書中,一提起5000年前的黃帝文化,指的都是北方黃河流域文化 其實,黃帝的活動與黃帝文化的范圍決不囿于北方 我國歷史文化硏究工作者經過多年的考證認爲,黃帝文化的范圍應該包括中國南方一些地區 (기존의 교과서에 보이듯이 5천년전의 황제문화의 범위가 북방황하 유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남방 일부까지 포함하고 있다)

  黃帝被公認爲中華民族的祖先 据史料記載,黃帝號軒轅氏,是我國原始社會部落聯盟的領袖,曾打敗炎帝和蚩尤,統一了中原, 浙江師范大學敎授洪波等傳家認爲,從史料硏究和實地考證看,南方長江流域也有黃帝活動的足迹,幷積淀着深層次 多層面的黃帝文化(중국민족의 선조로 공인받은 황제(호는 헌원)는 원시사회 부락연맹의 영수로 염제와 치우를 쳐부수고 중원을 통일했는데, 절강 사범대학 교수 홍파 등 전문가는 사료연구와 실지고증을 통해 남방 양자강 유역이 황제가 활동한 발자취라 보고 있다)

    傳家認爲,根据史料 傳說和實地考察的情況分析,5000年前黃帝曾經在浙江永康的石城山生活過,幷且以石城山爲中心,足迹遍及浙江的金華山, 仙華山, 仙都山,安徽黃山, 江西廬山 廣東鼎湖山等地,在南中國撒播了華夏文明的種子(전문가는 근거사료를 통해 전설과 실지고증의 정황분석을 통해 5천년전의 황제가 일찍이 절강 영강의 석성산에서 생활했으며 석성산을 중심으로 절강의 금화산, 선화산, 선도산, 안휘 황산, 강서 여산, 광동 정호산 등지 등 남중국에 화하문명의 종자를 두루 뿌리고 족적을 고루 미쳤다고 인정한다)  

    据民間傳說, 黃帝在與蚩尤的戰爭中, 曾一度失利,原因是蚩尤部落較早掌握了靑銅器,而黃帝使用的仍然是石器 爲了改變這一不利局面,黃帝派部落成員四處尋覓可以冶煉兵器的礦源,終于在永康發現了寶藏,從此黃帝的一支在這里扎根(민간전설에 근거하면, 황제는 치우와의 전쟁중에 일찍이 전술적 잇점를 결정적으로 빼앗겼으니 그 원인은 바로 치우부락은 비교적 일찍이 청동기 문명을 장악했으나 황제는 석기만을 사용한 데 있었다. 이 불리한 국면을 바꾸기 위해 황제부락 구성원은 사방으로 흩어져 병장기를 야련할 광산 자원을 찾았으며, 마침내 영강에 숨겨진 보물들을 발견하여 황제의 한 지파는 이 곳에서 혈연의 뿌리를 구축하게 되었다.)-이 구절을 보면 역설적으로 황제헌원이 치우를 잡아죽였다는 기록은 엉터리며 오히려 청동기 무기를 쓴 철기마병의 치우에게 돌도끼 등으로 무장한 황제의 무리가 대륙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음을 여과없이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안원전  (원문인용:「북경청년보」2002년 2.20 (책임편집:李東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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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우리는 그간 유방 등 지나족의 대표주자들 마저 불패의 무신(武神)으로 숭배받던 치우천왕이 지나사가들에 의해 황제에게 패사한 것으로 왜곡된 많은 사료들이 실상은 왜곡되었다는 지나족 언론계의 솔직한 고백과 고고학계의 뒷받침을 살펴보았다. 일부 역사 기록에 의하면, 황제는 일찍이 하북 탁록현(涿鹿縣)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곳은 역사에서 칭하기를 “탁록지야(꟔鹿之野)”로 불리는 곳이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의 부락은 지금의 하남 신정(新鄭) 일대에 거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곳은 “헌원지구(軒轅之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당시 부락은 대략 지금과 같은 완전한 붙박이식 고정 주거지가 없었으며, 항상 떠돌아다녔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황제부락은 대체로 그 활동 영역이 오늘날의 섬서성, 하남성, 하북 등 황하일대의 물가를 따라 이동했던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으로 치우에게 쫓겨 양자강 유역까지 떠돌다가 섬서성에 가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황제와 치우의 고향이 같은 산동성인데 막상 치우와 그 왕비인 견비총이 산동성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고향인 산동성에 묻히지 못하고 섬서성의 황릉(黃陵)에 묻혔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가 치우에게 패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사학자들은 그를 “황(黃)”제(帝)라 칭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회남자․천문훈」에 기록된 바에 의거해,

“동방 목(木)의 제(帝)는 태호(太皋), 그 보좌는 구망(句芒), 규(規:원을 그리는 제구)를 잡아 봄을 다스린다. 남방 화(火)의 제(帝)는 염제(炎帝)로, 그 보좌는 주명(朱明) 곧 축융(祝融)으로 형(衡:저울)을 잡아 여름을 다스린다. 중앙 토의 제(帝)는 황제(黃帝)로 그 보좌는 후토(后土)로, 승(繩:먹줄)을 잡고 사방을 제어한다. 서방 금(金)의 제(帝)는 소호(少昊)로, 그 보좌는 욕수(蓐收)로 구(矩:곱자)를 잡아 가을을 다스린다. 북방 수(水)의 제(帝)는 전욱(顓頊)으로, 그 보좌는 현명(玄冥)으로, 권(權:저울추)을 잡아 겨울을 다스린다.”

그를 5방위 천제 중 중앙천제라 하여 사방의 “중앙의 수령”이라 해석해오곤 했다. 그러나 대륙의 사학자들은 “황제(黃帝)”의 명칭이 실제상에 있어서는 원시 농업문명시기에 있어 황토 토지에 대한 사람들의 숭배와  신비스런 일종의 특수감정이 이에 덧붙인 것을 반영한 것으로 여긴다. 곡진(曲辰)은 「헌원황제 사적(史迹)의 미스테리」가운데서 황제가 처한 시대가 화북 및 대부분 대륙이 이미 농경시기로 진입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농경수준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대국적인 대륙사로 보면 황제 역시 동이족이므로 동이역사의 하나일 뿐이다.

지나 사학도들이 파악하고 있는 화샤-화하(華夏)족이 어느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을까. 이는 지나사가들의 관점을 파악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그대로 알고 있는 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 문헌기록상 화샤-화하(華夏)족에 대한 칭호가 가장 먼저 보이고 있는 곳은 「좌전․양공 26년」에 “초실화하(楚失華夏)”라는 구절이다.

원시사회 말기설로부터, 하대(夏代)설, 상대(商代) 중기설, 서주(西周) 초기설, 동주(東周) 초기설, 춘추전국설 등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영향력이 큰 것은 원시사회 말기설과 하대(夏代)설이다. 지나 사학도들은 화샤(華夏)족이 원시사회 말기에 형성되었다는 것에 대해, 당시 대륙에는 3대 부락연맹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실상 동이족이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중원의 염황(炎黃)부락이 그 하나요, 태호(太皞)씨, 소호(少昊)씨, 치우(蚩尤), 후예(后羿)를 포괄하는 동방의 이인(夷人)부락이 그 둘이요, 남방의 삼묘(三苗) 집단이 그 셋이다.

이 세 가지로 분류해 본 것 중 특히 태호복희와 소호, 치우, 후예를 한 두루미에 꿰어 도매금에 처분해야 하는 분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지나 사학도들의 고충을 십분 이해 못 할 바 아니나 지나문명의 시조로 들고 있는 태호복희를 염황부락을 떼어내기 위해 걸러낼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그들의 역사분류법을 보면 누구라도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나사학도들은  이들 세 개의 모 집단, 알고 보면 세 집단 모두 동이족이지만 이들 모두를 별 개의 것으로 분리해 낸 다음 이들이 화샤(華夏) 민족을 이룬 주요 역량으로 보는 동시에, 이들이 부단히 서로 침투 융합하는 과정에서 화샤(華夏)족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임혜상이나 서량지의 사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들 시대에 더러는 이들 부족연맹들이 서로 화목하여 함께 살고 우호적으로 왕래하기도 했고  더러는 서로 침탈하고 교전하고 전쟁이후에는 전세가 역전되어 패한 자는 승리자에게 머리 숙여 명령을 받들어야 했으니 이러한 과정 속에서 종족간의 융합이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지나 사학도들은 자기들 편한대로 아전인수 역사해석으로 말한다. 현존하는 문헌을 볼 것 같으면, 상호 치고 박고 싸우던 전쟁 중에 있어, 중원지구의 염황부락이 그 중에서도 현저하게 일정한 우세를 점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화샤(華夏)족의 중견(中堅)과 핵심부분을 이루었다고. 하여 이들 3대 부락은 당시 비록 구역상으로 잠시 서로 일정지역을 각기 나누어 할거(割據)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활동범위는 서로 섞여 흩어졌다.

황제 유웅(有熊)씨는 하남 신정(新鄭)에서 거주하면서 영역을 넘나드는 정복전쟁을 수행했으니, 그 족적이 화북(華北) 평원 북쪽 연산(燕山) 남북에 도달해, 강한(江漢) 평원을 석권하고, 남쪽으로 강회(江淮)유역을 맞닥뜨리고,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임하고, 서쪽으로는 감숙에 도달했다. 황제의 손자 전욱(顓頊)은 동이(東夷)의 소호지국(少昊之國)에서 양육되어, 동이(東夷)에 남아 소호(少昊)를 보좌해 정사를 집정 장악한 것으로 본다.

각 부락 연맹은 점점 더 융합되어가는 추세였는데, 그 중에서도 염황 부락간의 전쟁인 “판천(阪泉)” 전투, 염황 부락(서량지는 용봉도등연맹으로 말한다)과 치우부락간의 “탁록(꟔鹿)의 전(戰)”, 중원과 삼묘(三苗) 집단의 수차례 전역(戰役)은 화샤 (華夏)족 형성의 중요 관건이 된 사건으로 본다. 화샤(華夏)족은 염황 부락 연맹이 주체가 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으며, 동이(東夷)집단 일부분과 삼묘(三苗) 집단이 융합해 형성된 것으로, 이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영구적인 부락연맹의 형성과정은, 원시사회 부계 씨족사회가 발전, 흥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화샤(華夏)족의 형성이 하대(夏代)에 이루어졌음을 견지하는 설명 곧 국가형성을 설명하는 학자들은 조기(早期) 민족적 특점을 근거해 원시사회 말기 화샤(華夏)족 형성의 관점을 부인한다. 그들은 원시사회의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구성성분이 주로 가족, 씨족, 포족(胞族)과 부락으로 이들 일체가 혈연 유대적이라 말한다. 하여 일개 민족의 형성은 씨족과 부락을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혈연개념을 묽게 하는 것이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부락외혼제(部落外婚制)의 출현은, 서로 다른 부족사람이 잡거하게 하여, 순수한 혈연관계가 없어지게 했으니, 이에 지역성의 단체가 이를 대신해 일어났다.

국가형성은 비로소 혈연유대를 깨고 계급사회의 각개 지역성 군체(群體)로 진입해 새로운 공동체를 포괄했다. 국가가 형성되자 민족이 바야흐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민족공동체의 형성과 하대(夏代) 국가의 건립은 한걸음에 내디딘 역사진정(進程)이었다. 하(夏) 계(啓:禹의 아들로 백익을 치고 빼앗긴 제위를 재탈취)는 부위(父位) 세습을 계승했으며, 가족의 세습제가 씨족내부의 군사민주제-선양제(禪讓制)를 대체해 개시되어, 가족이 사회의 기본세포가 되었다.

이전의 “씨(氏)”(마치 소호(少昊)씨, 유교(有蟜)씨, 유웅(有熊)씨처럼)는 마치 사(姒) 성, 자(子) 성, 희(姬) 성, 강(姜) 성처럼 “성(姓)”이 대체한 바 되어, 씨족은 와해되기 시작되었다. 이에 대신해 일어난 것은 일종의 부락연맹으로, 다시금 확고한 광범위한 연맹이 되어 인류의 자연스런 번성은 공동체를 자연 분열시켜 변동시켰으니, 이에서 평온하고 안정적인 고대민족이 형성되었다.

이 이외에도, 학술계는 하(夏), 상(商), 주(周) 3대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화샤(華夏)족 형성의 시간에 관해 상대(商代) 중기, 서주(西周)초기, 동주(東周) 초기설 등이 있다. 학자들은 하(夏), 상(商), 주(周)가 동일한 일 개 민족 하의 3개 왕족(王族)으로 여긴다.

단일민족을 구성하는 조건은 공동언어, 공동문화, 공동의 민족심리 소질(민족의 자각의식 포괄)이 되기 때문에, 하(夏), 상(商), 주(周) 3대는 이들 방면에 있어 큰 구별이 없으며, 그들은 정신상, 물질상 일맥상통한 공동 전통을 갖추고 있다. 반대자는 3대가 비록 완전히 다른 민족이라 해도 그들의 종교관, 천도관(天道觀), 음식, 기거, 복식, 상장, 제의습관 등 정신과 문화방면의 특징이 상당히 환하게 드러난다고 여긴다.

더욱이 각 3대의 기원이 서로 다른 지구로 본래 일 계통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단지 이들 3대가 완전히 융합되어 일체가 되었을 때 진정한 화샤(華夏)족이 비로소 형성된 것으로 본다. 화샤(華夏)족 형성을 춘추시대나 전국시대로 보는 두 가지 시각은 하(夏), 상(商), 주(周) 3대가 진정으로 융합 통일된 시대가 진행되는 구체적 연구이다. 고대민족의 개념이 한결같지 않은 이해로 말미암아 민족공동체에 대한 서로다른 관점은 화샤(華夏)족 형성의 시간에 대한 의견을 다르게 하니 고대민족 형성에 대한 이론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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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8. 8仙人 중 유일 女선인 하선고(何仙姑)  안원전   2009/01/31  5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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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담론 204. 요의 웅거지 산서성 임분:「묵자」 절용중편, 「한비자」 십과편 및 「순자」 왕패편, 양(楊) 주(注) 시자(尸子),5적(狄)은 하나 왈, 월지(月支), 둘 왈, 예맥(濊貊), 셋 왈, 흉노, 넷 왈, 선우(單于), 다섯 왈, 백옥(白屋)이라 하였다.  안원전   2003/01/08  7816
317    담론205요(堯)의 어머니는 바로 동이족 염제 신농씨 가문 진봉(陳鋒)씨의 따님인 경도(慶都)라는 아가씨로 동이족 염제의 7세손  안원전   2003/01/13  6314
316    담론 206. 서량지의 동이족 전욱의 출자& 사마천의 역사왜곡에 대한 정강성과 왕숙, 장자의 직필, 요의 혈통적 배경과 모친 경도로부터의 신비화 작업  안원전   2003/01/13  6290
315    담론207. 제요 방훈시기는 원시사회의 부계씨족 사회 말기단계로, 도처에 부락 규모의 국가가 숲처럼 가득 들어찬“부락방국임립지시(部落方國林立之時)”의 시기  안원전   2003/01/21  6101
314    담론 208. 한무제 유철과 황후가 된, 요(堯)의 고향이자 도읍지 산서성 임분 출생의 일개 기녀, "위자부(衛子夫)"의 러브로망  안원전   2003/01/27  6464
313    담론 209.우 임금 시절에 대한 실루엣-서쪽으로 하남(河南) 서부와 산서(山西) 서남부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지금의 하남(河南), 하북(河北) 산동(山東) 3성(省)의 경계지방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 호북(湖北)에 접하고 북으로는 하북(河北)으로 들어가-  안원전   2003/01/27  5936
312    담론210.왕성강(王城崗) 유적지의 발굴을 하(夏) 문화 탐색의 중요 수확으로 여기고 있다.  안원전   2003/01/27  6268
311    담론212.악사(樂師)였던 고수(瞽瞍) 「죽서기년」 원본과 「환단고기」<태백일사>의 요순 선양실체-옛날에 요의 덕이 쇠하니 순이 (요를) 가둔 바 되었다.(昔堯德衰爲舜所囚也  안원전   2003/02/12  6794
310    담론213.대륙의 지나사학도들이 바라보고 있는 요순(堯舜) 선양(禪讓)의 실체-  안원전   2003/02/18  7868
309    담론211.「죽서기년」에 「초어(楚語:초나라가 동이 9족의 국가라는 것은 앞서 밝혔다)」에 이르기를 삼묘(三苗)가 구려(九黎:우리 동이족)의 덕을 거듭 실천하고, 요(堯)가 다시 중려(重黎)의 후예를 길렀는데 옛사람을 잊지 못했다 [1]  안원전   2003/02/21  6581
308    담론163.파촉(巴蜀) 땅은 일찍이 이들 복희씨의 사(蛇) 도등(圖騰) 족이 웅거하여 상고시절에 이름을 얻은 지역이니 파촉의 파(巴:大蛇)는 큰 뱀을 의미하여 「설문(說文)」에 '파(巴)는 충(蟲:동물의 총칭), 혹은 코끼리를 먹는 뱀' [1]  안원전   2003/02/25  6151
307    담론214.(속)요순선양. “요순선양(堯舜禪讓)”설이 실은 전국시대 초기의 묵가(墨家)가 창조한 것  안원전   2003/02/28  7052
306    담론215(속)요순선양,「한비자(韓非子)」 <식사(飾邪)>에 방풍(防風)씨의 군(君)이 늦게 도착하자, 우(禹)가 그를 참(斬)했다”  안원전   2003/02/28  6552
공지    한겨레 비난한 글을 읽고-이승만 동상 국회건립과 세종로 충무공자리 및 (당시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남산 81척(56년 이승만 81회 생일을 기념) 동상  안원전   2003/03/06  21833
304    담론216. 단군왕검은 우순에게 명해(天王乃命虞舜) 토지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分土而治) 군사를 보내어 주둔하여(遣兵而屯) 함께 당요를 정벌하기로 약속하자(約以共伐唐堯) 요의 세력이 곧 꺾여 순에게 의지해서(堯乃力屈 依舜而保命以國讓>  안원전   2003/03/25  6904
303    담론217 단군조선을 비롯한 동이 제족이 하나라를 장악하다-설원(說苑)」<권모편>에 걸왕이 구이(九夷)의 군사를 빌어 쳐들어오자 이윤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잘못이 우리에게...  안원전   2003/04/11  9142
302    담론218중국 측의 고대사서는 공자의 사서삼경에 의해 그 중추가 부러지고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허리가 잘려나가 그 이후의 중국 측의 대부분의 사료들이 마치 레미콘처럼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며 반복해서 돌려댔다  안원전   2003/04/11  5484
공지    동이 대륙상고사 유적지 탐사를 마치고(안원전) 2002.8.16  안원전   2003/04/15  15485
300    담론 219 하 왕조 임금이 덕망을 잃자 이(夷)족이 배반, 걸 왕이 모질게 굴자 여러 이(夷) 족들이 쳐들어 오고, 상 왕조가 쇠약해지자 동이는 중원을 차지  안원전   2003/04/24  6231
299    담론220 춘추와 비춘추, 갑골문에서 말하는 4위(圍)의 정체와 흉노의 정체  안원전   2003/04/24  7252
298    담론221.풍(風)씨 성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씨에 대해-풍(風)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  안원전   2003/04/29  7312
297    담론222. 음악과 예는 모두 동이족의 종교적 의식에서 나온 것, 예악(禮樂)을 만든 이(夷)족이 융(戎), 하(夏)족과 융합하여 화하 집단을 만들고 오늘날의 한(漢)족을 만든 것  안원전   2003/05/10  6793
공지     특집기획. 웅장한 동이 대륙사 홍산문화(紅山文化) 대문구(大汶口) 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의 놀라운 고고학적 실체 국내 최초 완전 공개! [4]  안원전   2003/05/12  23157
295    담론223.요(堯)의 신하로 있다가 순에 의해 유주(幽州)로 귀양을 간 공공(共工)은 한민족 혈통,엄(奄)국과 서(徐) 모두는 영(嬴)씨 성을 가진 소호(少昊)의 후손 백익(伯益)의 후예  안원전   2003/05/21  7167
294    담론224,치우(蚩尤), 공공(共工), 백이(伯夷)는 어떤 민족정신과 민족문명을 수립했는가,주나라 문왕의 시조도 동이족이지만 태공망과 주(周) 왕조와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주공단에 대한 기록 주 왕실- 동이족의 혈통을 계승했음  안원전   2003/06/02  5888
293     담론225.<사기>,<한서> 등의 사적에 전하는 산동성의 제지(齊地), 제국(齊國)의 “팔주(八主)”라고도 불리는 “팔신(八神)” 제사 옛 풍속 [1]  안원전   2003/06/10  6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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