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TOTAL : 449 , PAGE : 2 / 13 , CONNECT : 0 회원가입 로그인
   안원전
   http://www.cheramia.net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1. 돼지(豚)에서 유래한 우리말 돈의 기원

돼지(豚)에서 유래한 우리말 돈의 기원  






화폐명칭 “돈”의 기원과 유래

돈의 기원은 쌀, 보리, 밀, 등의 “곡식화폐”라는 주장에서 출발해 월급쟁이(salaried man)의 어원으로 보아 소금(salt)이라는 그럴싸한 설명부터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담배, 조개껍질, 카카오콩 이라는 설명도 있고 그리스 로마의 청동화폐 케자르 인물조각된 코인과 알렉산더 시대의 코인 고대 바빌로니아의 코인등 다양하다.

서양의 경우 돈(Money) 어원은 여신주노(juno Moneta)이름 모네타(Moneta)에서 유래된 것이 가장 설득력있는데, BC 269 년 로마인이 그녀의 사원에서 최초 주화인 동전(coin)을 만든 것이 화폐의 유래이다.

우리의 경우 지금까지 종래의 학설은 엽전 1냥을 10돈쭝(돈중:錢重)이라고 하는데 왔다는 설과 믿거나 말거나 '화폐는 돌고 돈다'는 의미에서 '돈'이 되었다는 학설아닌 학설이 있다.

물론 필자가 여기에서 알아보려는 것은 대륙고고학적인 의미에서 돈의 기원과 유래를 보다 확실히 밝히려 하는 것이다. 그냥 동이 한민족의 고고학적 의미로 돈의 기원과 유래를 밝힌다고 해야 하는데 굳이 대륙고고학이라 함은 동이족 고고학 발굴지의 장소가 한반도가 아니라 모두 대륙에 있음에서이다. 또한 목하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한족(漢族)의 기원(起源)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연대를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이전의 대륙을 장악한 수많은 상이한 왕조 이름 내지 소수민족은 바로 동이(東夷) 9려족(黎族)이 세월의 흐름과 정치적 격동에 따라 그 부침을 달리해가며 서로 혼융하고 침식당하며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화폐란 물물경제 이후 공동체 부락을 이루면서 갖고자하는 실물의 구매력을 실질적으로 담보하는 대체적 상징물로 등장했다. 본 글은 이런 전제하에 출발하려 한다. 화폐에 대해 검색해 보니 화폐자료실에 있는 글이 있어 참고의 글로 소개하고 시작하려 한다. 핵심은 주한(周漢) 때의 도전(刀錢)에서 기원한 것이라 소개하고 명도전(明刀錢)의 칼 한 자루 사진을 싣고 있는데 이것은 아니라 보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http://cafe.naver.com/pgmcollector.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618

먼저 한민족의 글에는 음체(陰體)와 양체(陽體)의 두 가지가 있다.  소리글인 韓契체계(陽體)와 상형 뜻글인 漢文(陰體) 두 가지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문은 중국의 문자로 대부분 알고 있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 무지함으로 인해 맹목적 민족의식에서 한글전용론자의 무식함이 드러나고 있어 그 폐해가 더욱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자체계가 우리의 문자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본 글의 주제에 맞는 부분만 몇 가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장 화수 교수는 단군의 '천부경'이 나올 때, 우리 민족들은 음의 문자(한문 전신)와 양의 문자(한글 전신)가 함께 사용되었는데 중국은 양의 땅이라 음체인 한문만을 사용하게 되었고 양체는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남게 되었노라 말한다.

한글도 본래 3대 가륵단군이 삼랑 을보륵에 명해 만든 가림토(加臨土) 문자, 가림다(加臨多) 문자가 효시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이 결코 아니다.

김 시습(金時習)은 훈민정음 28자가 신라인 박 제상(朴提上)이 쓴 「징심록(澄心錄)」에서 취본 한 것이라 말하고 있다.

보문전(寶文殿) 태학사(太學士)로 많은 사서를 열람한 것으로 생각되는 박 제상은 상고사에 관한 한, 「환단고기(桓檀古記)」와 쌍벽을 이루는「부도지(符都誌)」를 쓴 사람이다.(안원전 담론96 우리민족의 양체와 음체 한글과 한문(장화수 교수)중에서),

*흰 빛을 숭상해 상사(喪事)에 한낮에 염습하고 흰 말을 타며 흰 빛의 희생(犧牲) 만 사용했다는(「예기」단궁 상) 동이족의 국가 은나라 때 씌어진 갑골문은 중화족의 것이 아니라 우리 동이족의 글자이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중국 25사라든가 동이족의 역사 핵심을 알면 곧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을 전공하는 학자도 중화족의 것으로 안다. 이는 그들이 대만이나 중국으로 유학 가서 그들의 사관으로 투영해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아주 한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갑골문이 발견된 게 얼마 되지 않아서 학문이 年淺(연천)하다. 사관조차 정립되지 않아서 중화족의 문자로 일방 통행되어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의하면 주양(朱襄)이 옛 문자 그대로 비로소 6서(書)를 전했다고 나온다(朱襄 仍舊文字而始傳六書)

국내의 한글학자 마저 한문이 중국의 글자라고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골빈 민족주의가 주장되고 있는 터에 더 이상 무엇을 말하리. 한글을 너무 사랑해서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반쪼가리 애국자들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잉글리쉬를 그냥 영어라 하지 굳이 미국어라 하지 않음과 동시에 영국의 전통에 근거해 형성된 단어들을 구태여 마다하지 않는 사실과, 마치 우리의 한문단어와 같이 영어의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그리스, 로마, 스페인 어근과 접두어, 접미어 및 그들 단어들을 마다 않고 영어와 섞어 풍요롭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글과 한자 그리고 일본 가나문제 등에 얽힌 다양한 문제를 심도있게 이해하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 고고학으로부터 상고사에 드리워진 역사의 실체를 이해해야 문자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간 지루하더라도 핵심만 뽑아서 제시하겠다.

  

*중국 하남성 주구점에서 세계최초의 갑골문자가 거북점을 치던 형태로 발견되어 황하의 은허(殷墟)문명이 고 아시아족인 9이(夷)족에 의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황하문명의 주역이 우리 동이족 조상이었다는 말이다. 은허문명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전설로만 여겨졌던 은상(殷商)의 실체와 하(夏)나라의 존재 마저 실체임이 밝혀진 것은 물론이다. (안원전 담론 93 중에서)
*전하는 바로는 묘(苗), 요(瑤), 여(畲), 고산(高山), 려(黎), 이(彛), 합니(哈尼), 납기(拉基), 아창(阿昌), 보미(普米), 속속(僳僳), 노(怒), 붕룡(崩龍), 경파(景頗), 포랑(布郞) 등 신농씨의 성인 강족(羌族) 계열에서 나온 소수민족 중에는 아직까지 화전경작의 여섯 단계 경작방식을 계속해서 전승하고 있으며 동시에 산을 태워 황무지를 개간할 때 화전경작의 여섯 가지 과정의 동작을 모방한 답가(踏歌)로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하광악(何光岳)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 강서교육출판사, 1992년판 제112쪽.<안원전 담론중>   http://www.cheramia.net/board/zboard.php?id=bbs9&page=6&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subject&desc=desc&no=558


*서량지의 「중국사전사화」를 보면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복희에서 신농으로 이어지는 세석기 문화 부족은 최초의 거주지인 시베리아 바이칼 호(貝加爾湖) 부근이었다.(細石器文化部族 最初乃居住今西伯利亞的貝加爾湖附近 他們乃中國傳說中的炎帝神農氏的本族)


중국인 학자의 시각으로 본 것이긴 하지만 다시 이들 우리 조상이 갈라져 분화해 우공(禹貢)의 도이(島夷), 우이( 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석지(析支), 직피(織皮), 복사(卜辭)의 이방(夷方), 토방(土方:산서서북-섬서동북,북부-하투(河套)동북, 설방(舌方:산서 서북-섬서 동북부-하투(河套:오르도스) 가운데와 남부 일대로 은도(殷都)서북), 귀방(鬼方:지금의 섬서와 병롱(  )사이), 강방(羌方:강수는 지금의 白江이니 감숙 임담현(臨潭縣) 남서 경산(傾山))이 되었으며 주(周) 대의 이적(夷狄), 험윤(  )이 되었고, 진한(秦漢) 시대의 호족(胡族), 맥족( 族), 흉노족(匈奴族)이 되었으며, 위진(魏晉) 시대에는 오환(烏桓), 선비(鮮卑)의 원 씨족이 되었다.
이상의 강역 만 찾아보아도 우리 조상의 활동 영역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갑골문에서 4위(圍)의 나라를 길방(吉方), 토방(土方), 인방(人方), 귀방(鬼?이라 하고 동이족이 사는 산동성을 인방(人方)이라 하고 동이족인 은나라가 같은 동족인 귀방(鬼方)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대국적인 대륙사를 모르면 상고대륙사를 수없이 공부해도 말짱 도루묵이다. 아와 비아의 구분도 안될 뿐 아니라 어디서 어디까지가 동족이고 이족(異族)인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게 됨은 당연한 것이다.

-한글의 원형으로 보이는 문자가 규칙적으로 중앙에 불로 지진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견갑골은 상(商:殷)나라 때의 것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눈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사진 오른쪽에 갑골문으로 해석을 달았는데, '상대(商代)의 왕족이 돼지, 개등을 조상에게 바치고 제사지냈다'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상의 전조(前朝) 하(夏)나라가 멸망할 때, 상나라 성탕을 도와준 상나라의 재상 이윤(伊尹)은 왕조가 다 할 때까지 최고의 권력자로서 제사를 주관했다.

이윤은 고조선의 대학자 유위자(有爲者)의 제자로 곧 동이 출신이라는게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 상, 즉 은나라는 거북의 등껍데기와 동물의 뼈 등에 새긴 갑골문으로 인해 그 유적지가 발굴됐는데, 이는 은나라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단군세기〉등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특히 갑골문은 주변의 다른 나라를 길방(吉方)·토방(土方)·인방(人方)·귀방(鬼方)등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인방은 조선을 가리킨다. 그것은 중국에서 발행한 《역사지도집》에서 고조선의 핵심 강역이었던 산동성을 인방으로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갑골문은 "은나라가 귀방을 정벌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후한서》뿐 아니라 〈단군 세기〉에도 기록되어 있어 두 문화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은나라에서 사용한 갑골문은 한자의 모태어이다. 따라서 한자 역시 동이족에 의해서 만들어진 문자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갑골문을 연구한 중국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중국학자 필장복은 《중국인종북래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문자가 만들어진 것은 필시 중국 중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계통은 멀리 추운 북방에서 시작된 것을 계승한 것이다. (中國文字之制作 必非始于中國中原 而係遠始于寒冷的北方)

중국의 권위 있는 학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학자들은 아직도 우리 역사와 문자의 뿌리를 모조리 중국에서만 찾고 있으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갑골문의 형태를 보아도 동이족의 작품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한 증거들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자. 7)동녘 동(東)의 전서체를 보고서 학자들은 나무에 해가 걸린 모양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은나라의 유적지에서 갑골문이 발견됨으로써 이 글자의 원래 의미가 밝혀지게 되었다. 갑골문에 나타난 동(東)자의 원래 모습은 물건을 단단하게 동여매 묶어놓은 형상을 하고 있다. … 결국 동(東)자는 '동여매어 묶는다'는 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이며, 묶는 줄이나 끈을 '동앗줄'이라고 하는 것 역시 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집 가(家)'자에 왜 '돼지 시(豕)'자가 들어 있는지 동이족이 아니면 모른다. 갓머리(宀)밑에 돼지 시(豕)가 들어 있는 것은 고대 동북아시아의 집 구조가 그러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변소 밑에 돼지를 키우고 있으며, 이는 고대에는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집 밑에 뱀(독사)의 천적인 돼지를 키우고 집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이는 쌀 문화권의 특징이며, 중국의 한족(漢族)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중국의 학자들도 왜 갓머리 밑에 돼지 시(豕)가 들어가 '집 가(家)'자를 형성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밖에도 패를 이룬 무리를 뜻하는 '동아리'와, 원(圓)을 뜻하는 '동그라미'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남원의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집 밑에 돼지를 키우고 있다. -조영언.《노스트라트 어원여행》중에서-(안원전의 담론 189 중에서)


*양자강 하류 상해 항주 소흥 부근의 동이족 유적지인 하모도 유적지의 간란식 방옥 구조도. 중국 고고학계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목구조 목구조 건축물이라 자랑한다. 양자강 하류는 하천이 그물처럼 얽힌 습한 지대로 아래는 돼지 등 가축을 기르고 사람은 위에서 생활했다.

섬서성 서안의 동이족 고고학 반파유적지를 비롯한 대륙내 고고학 유적지는 돼지를 순장한 묘장문화를 선보인다. 문자학자는 집 家를 보면 집 안에 돼지를 키운 뜻을 가지고 있는데(돼지 시(豕)) 돼지를 집안에 키운 민족은 동이족밖에 없으므로 漢字가 동이족 것이라 말한다. 원래 漢族은 돼지고기를 먹지않았다.  또한 漢族은 돼지를  돈(豚)이라 일상적으로 칭하지않고 별도로 저(猪)라 칭하여 "쮸"라 발음한다. 돼지는 습한 지방에서 뱀을 막기 위한 이유와 식용으로 길렀다. 돼지는 생활에 유용하여 동이족간에는 화폐구실을 하여 지금의 돈이 되었다.

돈은 원래 동이족 간의 돼지(亥)인 돈(豚)을 말하는 것이다. 건축은 기후와 풍토를 반영하므로 지금의 한반도 건축 습성과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길이가 23미터이므로 70평 이상의 대단히 큰 가옥이다. 福祿誠敬信 福을 비는 것은 祿을 구하는 것. 祿자에는 제사를 지내는 의미의 제단인 示자에 돼지주둥이 췌자가 들어있다. 돼지를 기르는 민족 동이족. 명지대학교의 진 태하(陣泰夏) 한문학자-집家 자에서 집에 돼지 기르는 민족이 동이족으로 한자는 동이족 문자라 함.

고대 동이족 상고문화 유적지에 돼지를 순장했고 습지의 주거형태가 干欄(양자강 하류 상해 항주 소흥 부근의 동이족 유적지인 하모도 유적지의 간란식 방옥 구조도)인데 뱀을 피하기 위해 아래층에 돼지 기름. 상고시대 돼지는 재산. 돈(豚) 돈의 기원은 동이족 돈(豚)에서 나온것. 저금통장이 돼지저금통장인 이유-多産이 이유라면 쥐가 한 수 위다. 따라서 돼지는 근원이 화폐-돈(豚)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굿을 하거나 제사를 지내는데 조상신의 복을 구하려면 돼지(豚)의 머리를 놓고 기원하는데 이는 돈(Money)은 곧 돈(豚)이요 곧 녹(祿)이기 때문이다. 녹(祿)자를 보면 돼지주둥이 췌자가 들어있다. 반면 보다 큰 국가적 복을 빌 때는 돼지를 안 쓰고 소를 쓴다.

장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 하모도(河姆渡)유적지는 전형적인 동이족의 유적지이다. 당시의 취락은 지면 위에 대형으로 건축한 것과 반 지혈식 소형 건축이 있어서, 취락지 외부에는 둥근 해자(도랑)와 담장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야수들이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방어했으니, 이는 선사시대 성(城) 담의 맹아이다. 취락내의 건축은 반 지혈식, 지면식 및 방패 울타리식인 간란식(干欄式)으로 건축했다. 

 간란식 방옥은 길이가 수 십 미터에 달했는데, 이들 일부 약간을 나누어 기본 단위 개체가 주거했으며, 작은 방에는 통상 개개 소 가정이 입주하고, 동일 건축내에 일개 가족 혹 씨족 단위가 주거했다. 일개 촌락은 곧 이러한 모습의 약간의 방옥이 합한 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씨족 집단이었다. 이러한 류의 간란식(干欄式)  건축은 20세기 50년대까지 곧바로 이어져 중국 해남도(海南島) 동이족인 여(黎)족 거주지구에서  거듭 볼 수 있다.

해남도(海南島) 동이족인 묘(苗)족 치우부락 고각란(高脚欄)

이러한 간란식 건축은 지면 위에 당시 거주민이 고각란(高脚欄)이라 부르는 높은 시렁을 걸어놓아 위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아래에는 가금(家禽)이나 가축을 사육하는데 이는 양자강의 온습 다우한 환경에 적합하다. 이러한 거주습성이 한반도에서 가장 유사한 것이 바로 온습다우한 제주도인데 제주도에서도 아래층이나 화장실에 토종 돼지를 키웠다.(보통 똥돼지라 한다)
(http://www.cheramia.net/board/zboard.php?id=bbs9&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간란&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23)
잔소리-대륙의 구석기 신석기 시대는 모두 동이족이 열었으니 이들 문화는 모두 동이족 문화다.  


*명지대학교의 진 태하(陣泰夏) 교수는 한자의 형성과정에 우리 민족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자료를 제시하여 국내 언어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그 근거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첫째, 집 가(家) 자는 집 면(宀) 자 안에 사람 인(人) 자가 들어가 있어야 당연한데도 돼지 시(豕) 자가 들어가 있다. 왜 그럴까. 중국학자들도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獵? 고대 한 민족은 뱀이나 해충을 피하기 위하여 집안에 돼지를 키웠다. 제주도의 재래종 돼지의 사육도 그런 습속이 변형된 형태이다. 따라서 집 가(家) 자는 집 안에 돼지를 키웠던 민족, 즉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글자이다.

둘째, 날 일(日) 자는 해 모양에서 비롯되었다. 해는 둥글게 그리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해 안에 까마귀 그림이 들어있다. 수 천 년 전부터 해 가운데 금 까마귀(三足烏)가 있다는 신화가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문자를 만든 민족은 그런 금 까마귀 신화를 가진 민족이다. 날 일(日) 자가 만들어지기 이전 수 만 년 전부터 그러한 신화를 전하여 오는 适렝?한 민족밖에 없다. 그러므로 날 일(日) 자 역시 우리 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이다.

셋째, 클 하(夏) 자는 사람이 정장을 하고 서 있는 모습에서 나왔다. 만물이 크는 것은 여름이므로 '여름'의 뜻으로 바뀌었다. 중국 상대 하(夏)나라의 하(夏) 자는 여름의 의미가 아니고 '크다'는 뜻이다.

문제는 중국에서는 '크다'는 의미로 하(夏)라는 글자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민족만이 크다는 의미의 하(夏) 자를 사용한다. 따라서 클 하(夏)자 역시 한민족이 만든 표의문자이다.

넷째, 다할 진(盡) 자는 손으로 부젓가락을 이용하여 화로 속의 불을 휘휘 젓는 모습에서 나왔다. 불을 휘저으면 꺼지기 때문에 원래는 '꺼지다'는 의미였다. 옛날에는 불이 꺼지면 모두 끝이기 때문에 '다할 진'이 되었다. 화로 속에 불씨를 담아서 그것을 보존하는 생활습속이 면면히 내려오는 민족은 한민족이다. 그러므로 다할 진(盡) 자 역시 우리 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이다.

다섯째, 중국에서는 종자를 나타낼 때 '씨(氏)'라고 쓰지 않고, '씨(氏)'는 그런 의미도 아니다. 오직 성씨만을 '씨(氏)'라고 한다. 그런데도 성씨를 나타낼 때 쓰는 '씨(氏)'자는 씨앗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트는 모습에서 출발하였다. 한족(漢族)이 이 말을 만들었다면 종자를 '씨(氏)'라고 표현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우리말의 '씨(氏)'는 종자와 성씨 모두에 사용된다. '씨(氏)'자 역시 한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문자이다.

진태하 교수는 이상과 같이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자(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옛 한글 혹은 동방문자"라고 불러야 옳다고 하였다. 진 교수는 "젊은 세대들은 특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여야 할 시점이다.(진태하 교수 동영상: http://www.hanja-edu.com/moonja.html);안원전 담론 105 중에서)



  

*돼지머리형 옥패(猪首形玉珮):돼지는 당시 주요한 가축의 하나로, 사람들은 돼지를 사람이 죽으면 같이 묻는 배장(陪葬)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옥장식 제조 또한 돼지를 애용해 주제로 삼았다.



종교적 의의(意義)를 갖는 옥기(玉器)



홍산(紅山)문화의 옥기는 특별히 그 늦은 시기의 작품이 아주 발달하여, 보통의 취락 유적지조차 정교하고 뛰어난 옥기가 출토된다. 이들 옥기는 구멍이 많이 있으니,  마땅히 이는 패물장식으로,  동물형상과 장식품 등 두 종류가 흔히 보인다. 홍산(紅山)문화 옥기는 제사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종교적 의미가 많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돼지,용의 형상, 구운형(勾云形)의 장식패옥 등은 비교적 복잡한 옥기로, 상당히 광범위한 범?안에 있으며, 조형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데. 이는 일정한 규격으로 원시 예기(禮器)를 만든 것에 따른 것이다. 특별한 것은 산 정상 중심에 있는 대묘(大墓)의 묘 주인 손에서 옥구(玉龜)가 쥐어진 채 발굴되었는데, 이는 당시 씨족 구성원의 등급분화가 이미 매우 명확하게 드러났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집단 수령이 이미 출현하여 옥기(玉器)가 특수한 의미로 주어졌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정성이 가득 찬 조소예술



홍산(紅山) 문화 제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동갠欲?인물의 진흙 소상(塑像)이 있는데 이들은 채색그림을 그려 넣은 돼지, 용, 큰 새의 잔체(殘體) 등이다. 그 가운데, 우하량(牛河梁)과 동산취(東山嘴) 제사 유적지 가운데는, 전신 인물 소상(塑像)이 출토되고, 우하량(牛河梁)에서 출토된 가장 큰 인물 소상(塑像)은 실재 사람의 세 배 크기에 근접하는 것으로 추산되어 그 완전한 입상(立像)은 마땅히 4-5M높이에 달한다. 이 인물상은 비록 다수가 손상되어 잔해만 남아 있지만, 건장하고 풍체좋은 허우대, 사지는, 거듭 고박(古朴)하고 조확(粗獷), 순후(淳厚)한 미가 있으니, 가히 이는 대륙에서 가장 이른 인체 조형 예술품으로 추산된다. 홍산(紅山)문화의 진흙 소상(塑像)은, 말할 것 없이 菅?또는 동물로 한결같이 그 비례가 적당하여 가장 높은 예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요하(遼河)유역의 제사(祭祀)중심-홍산(紅山)문화의 옥기와 조소예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진 것을 상징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제단과 묘장(墓葬) 원방각의 문화는 동이족의 대표적인 문화다. 천원지방의 묘장은 동이족의 문화로 홍산문화는 대표적인 동이족의 문화다. 홍산문화에서는 다양한 옥기가 출토되고 있는데 동이족의 상징인 호시, 석촉, 실크, 옥 중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새삼 신기한 것이 아니다. 대륙을 말아먹은 동이족의 상고 문화를 감안하면 대륙 곳곳의 상고문화 유적지에서 옥기류가 출토되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 가운데 별도로 눈을 번쩍 깨게 하는 유적지는 섬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 한 기다. 이들은 돌로 성채와 담장을 쌓고, 돌로 묘를 쌓았으며, 돌로 정상을 북돋았다. 적석총은 네모형(방형)과 원형 2 종류가 있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관념과 합치한다. 이들 금자탑식의 높고 큰 적석총과 제단은 같지 않은 규격의 묘장이 있어 상호 유기적으로 조성되었다. 이 같은  종교성지 곳곳의 장관은 계층분화된 인상과 흔적을 보여주고 있으며, 방형(方形)제단은 문명시대의 서광이 뻗쳐 옴을 보여준다.  

우하량(牛河梁) 유적지의 묘장은 규모와 부장품의 수량 등에 따라 대, 중, 소 3 종류로 나뉘어, 당시 사회조직 내에 이미 삼엄한 등급차별이 출현했음을 체현하고 있다. 대형 묘(墓)는 왕왕 적석총의 중앙부위에 자리 잡고 있고, 또 묘실면적은 크고, 부장품은 많고 좋다. 중형묘는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고, 소형 묘 역시 그 다음을 차지하고 있다. 대형과 중형묘는 일반적으로 모두 옥기(玉器) 등의 부장품이 있으며, 부장품들의 종류와 배열방식은 농후(濃厚)한 종교색채를 띠고 있다. 소형묘장의 수량은 중다(衆多)한데, 부장품으로는 옥기가 적게 보이고 있으며, 중형묘, 대형묘보다 부장품의 수량이 비교적 적으며, 하나같이 부장품이 없다.

적석총내 대묘의 주인은 사후에 홀로 적석총 중앙에 묻혔으며. 그 생전의 혁혁한 지위와 더불어 서로 저울질했으며, 중형묘의 묘주도 마땅히 당시 사회의 상층성원이었으며, 소형묘에 이르러서는 묘주의 신분이 비교적 복잡하여, 그들은 진귀한 옥저(玉猪), 옥룡(玉龍) 등의 부장품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들의 지위가 비교적 높음을 드러내고 있으며, 부장품이 하나도 없는 것은 지위가 아주 낮은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신분이 한결같이 대형,중형 묘주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금자탑 형식의 등급의 묘장은 진일보된 것임을 설명해 주는데, 홍산(紅山)문화 후기는 말할 것 없이 종교활동 또는 상장(喪葬) 제도가 아닌 것이 없는데, 이 속에는 계층분화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
  


*옥저용(玉猪龍):홍산(紅山)문화의 선주민은 오직 옥기(玉器)만을 함께 묻었으니, 이같이 오직 옥(玉)만을 묻은 매장의 전통은 바로 홍산(紅山)문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옥저용(玉猪龍)을 매장한 주인공은 마땅히 신분이 비교적 높은 인물이다.홍산문화를 발굴 공개한 중국 공산당 정부에서 옥저룡이라 칭했으나 우리 동이족식으로 이름진다면 옥돈용(玉豚龍)이라 명칭했을 것이다.



지존신권(至尊神權)의 상징-옥예기(玉禮器)1. 북방 옥기(玉器) 중심옥기류는 동이족이 중심이 된 문화권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발달한 옥기 제조는 대륙 신석기 시대 만기(晩期)를 상징하는 표지(表志)의 하나다. 옥기는 일종의 비실용적인 그릇 종류로, 옥기시대의 개시는 곧 특수한 사회기량을 부여받아, 예기(禮器)로 충당하다가 뒤에 발전하여 왕권의 상징물이 되었다. 신권은 왕권세습이 끊어진 후, 옥기(玉器)는 하늘을 통하는 신기(神器)가 되었다.

현존하는 대륙 최고의 옥기(玉器)는 지금으로부터 약 8천 년 전의 것이니 이는 동이족의 문명권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5 6천 년 전에 출현한 것을 분별하면, 돼지 용과 종(琮:瑞玉,符信), 벽(璧:둥근옥) 중심의 두 가지 옥기(玉器) 계통이 있는 바, 이는 곧 동이족 문화인 홍산(紅山)문화와 마찬가지로 동이족 문화인 양자강 하류의 양저(良渚)문화(상해 왼쪽 소주 태호(怠湖)부근)로 이들은 대륙 선사시대의 남북의 두 가지 옥(玉)문화의 중심이다.

홍산(紅山)문화 옥기(玉器)는 정미하게 좋은(精良)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을 깊이 고찰하여 연구했으며, 대표적인 기물(器物)로는 옥(玉)으로 만든 돼지(猪), 용(龍), 삼련벽(三聯璧), 갈고리 구름형 옥패(勾云形珮) 등과 같은 것이 있고, 동 시대 기타 지구에 있어서는 아직 보이지 않고 있으니, 이는 대륙 북방의 옥기(玉器) 제조의 수준을 대표한다.대륙에서 가장 빠른 옥기(玉器)대륙에서 가장 빠른 옥기(玉器)는 가히 지금으로부터 대략 8 천 년 전의 사해(査海)문화와 흥륭애(興隆涯) 문화로 소급될 수 있는데(사해문화와 흥륭애 문화는 동이족 문화임은 밝힌 바 있다), 출토된 옥기(玉器)로는 옥결(玉玦:한쪽이 이지러진 패옥), 옥부(玉斧:옥도끼), 옥관주(玉管珠), 옥비수형 장식 등 전체 모두 투섬석(透閃石), 양기석(陽起石) 류의 연옥(軟玉)에 속하는데, 이는 진정 의의가 높은 옥기(玉器)로 현재 세상에서 가장 빠른 옥기 (玉器)이다.

이로 인해 동북 지구는 마땅히 대륙 북방 옥기의 기원지가 된다. 지금으로부터 5 천년전, 대륙 동북지구에서 홍산 (紅山)문화 옥기(玉器)가 출현해 북방 옥기 문화의 주체적인 중심이 되어, 시라무렌 강(西拉木倫河), 대릉하(大凌河) 유역 및 그 부근지구 에 분포했다.오직 옥(玉)만이  장례의 매장풍속이 되었다.홍산(紅山)문화 옥기(玉器)는 묘장(墓葬)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상등 규격의 옥기(玉器)는 대형 적석총 중심 대묘 가운데에서 많이 보인다.

이들 옥기(玉器)를 출토한 대묘(大墓)는 이를 만든 공정(工程)이 아주 커서, 기세가 웅위(雄偉)할 뿐 아니라 같이 매장된 옥기(玉器) 수량이 많고 정미한 재료를 사용해 묘 주인이 마땅히 당시 사회의 귀인임을 표명하고 있다. 이것 외에, 중형 묘지들도 항상 옥기(玉器)를 따라 매장하여, 옥기(玉器)가 홍산 문화 매장 중에서 유일한 부장품이 되었으니, 이같이 오직 옥을 매장하는 현상은 홍산문화 매장습속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 석가하 옥저룡(玉猪龍):석가하 문화에서 세 종류의 반룡(蟠龍)이 발굴되었는데 머리에는 뿔이 있고 얼굴에는 눈이 있으며 이것은 홍산(紅山)문화의 옥저룡과 앙소문화의 복양(濮陽) 방용(蚌龍)과 같은 것이며 중화 고룡(古龍)의 원형이다.


---


* 사해룡형퇴석(査海龍形堆石):중국에서 가장 빠른 용은 지금으로부터 7~8천년 전 사해(査海) 유적지 중부에서 서남쪽에서 동남에 이르는 석맥(石脈) 위에 있는데 석맥의 질과 같은 화강암 덩어리를 이용한 토우로 되어 있는데 길이가 20미터이고 머리, 몸통, 꼬리와 다리로 나눌 수 있는데 용의 형상은 비록 완전하고 명확하지 못하지만 용 문양의 기본 특징을 이미 갖추고 있다.
* 용형옥도(龍形玉刀: 용 모양 옥 칼):옥도의 앞부분은 용의 머리로 장식했다. 이 옥도는 실용적인 도구가 아니라 권력을 상징하는 예기의 특징을 갖고 있다.


② 전설 시대의 지도자: 광범위하게 분포된 신룡(神龍)의 자취




용은 자고로 중국인이 숭배하는 영물이다. 고대 전설 속에서 용은 신기한 능력과 악을 물리치고 선을 추구할 수 있는 신기한 동물이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니다. 용은 추상적인 신령으로 그것의 珂?모양 및 변화 과정은 어떠했을까? 중국 선사 고고학의 일련의 발견에 따라 신룡은 점차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최초의 용]



현재의 자료대로 말하면 원시 단계의 용의 모습은 늦게는 신석기 시대 중 말기의 조보구(趙寶溝) 문화시기(지금으로부터 6500년 전)에 이미 출현했다. 조보구 유적지에서는 용모양의 그림을 새긴 도존(陶尊)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그림 중에서 동물의 머리부분 특징을 관찰하면 용 문양과 부리가 긴 새머리, 목을 내민 사슴머리로 된 한 폭의 완전한 그림으로 용 문양은 독립되어 나타나지 않고 사슴과 새의 몸으로 되어 있는데 용, 사슴, 새 이렇게 세 개가 삼위 일체되어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조보구 문화의 원시 용보다 조금 늦은 것은 하남(河南) 복양서(濮陽西) 수파(水坡)에서 발견된 방각(蚌殼: 말씹조개 껍질) 용으로 이 묘는 아마도 장년 무사(巫師)의 묘인 것으로 보이는데 3명을 순장한 것 외에도 묘 주인의 신체의 좌우 옆에 용과 호랑이의 그림이 각각 놓여 있어 범상치 않다. 이 무사의 눈에는 용과 호랑이 모두 신기한 동물인 것이다. 하지만 신령히 여겨지는 용은 여전히 유아독존의 지위를 얻고 있다.


[반룡독존(蟠龍獨尊)]




동기와 석기 병용시대에 들어선 후, 용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하여 홍산(紅山)문화에서 출토된 옥룡(玉龍)이 간혹 대형 제자 유적 중에 출현하기도 하는데 모양은 저룡(猪龍)과 구형룡(勾形龍)의 두 종류로 나뉘며 전자는 농업 발전 후에 돼지 사육의 번성에서 야기한 것으로 돼지가 사람들과 익숙한 대상인 것과 관련이 있다. 저룡은 농후한 원시 색채를 띠고 있다. 구형의 옥룡은 비록 돼지머리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전체가 이미 돼지의 형상을 벗어나 추상화되어서 신비한 색채를 띤다. 용산문화 시대에 이르러 중원 용산문화 핵심지역의 도사(陶寺) 유적지의 대형묘 속에서 반룡(蟠龍)을 새긴 도반(陶盤: 도기 쟁반)이 매 묘당 하나씩 출토되었다. 이 채색 반룡은 모든 도반의 내벽을 차지하여 더 이상 다른 어떤 동물들과 같이 뒤엉키지 않아 그 천하의 독보적인 존귀한 지위를 드러낸다. 이 도룡반(陶龍盤)은 아마도 왕묘 속에 전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 시기의 용은 이미 가장 높은 단계의 신령한 동물로 변해 있었다.


[신룡(神龍)이 날아오르다.]




용산문화 시대에 와서 용의 형상은 이미 중원 용산 문화와 양저문화, 석가하 문화와 제가 문화 속에 광범위하게 출현한다. 신룡의 자취는 큰 강 유역의 남북으로 고루 보급되어 용은 이미 중국의 거대한 지역 내 각 민족이 공통으로 숭배하는 신령이 되었다. 용산문화 시대에 각 지역 간의 문화 교류는 전쟁을 포함한 문화 교류의 특수 형식으로 서로 이웃한 집단 간에 빈번히 이루어졌다. 이런 교류는 거대한 지역 내의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이 공통으로 숭배하는 어떤 신령한 것이 가능하게 했다. 여러 나라가 난립하던 고국시대에 매우 많은 집단 공동 숭배의 신령이 출현했는데 이는 중화민족의 민족 동질감 형성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심지어 각지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용이 출현하는 현상을 중국 고대 문명 탄생의 한 중요한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 제가(齊家)문화 부조(浮雕) 용문 홍도 항아리:항아리 위의 부조 용문양은 몸의 비늘이 용과 같고 몸에 발톱이 하나 있다. 이 부조용문은 서북 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용 문양이다.
* 벽옥룡(碧玉龍):속칭 “돼지 주둥이 옥룡”이라 하며 검은 녹색의 연한 옥으로 만든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한 체형이 가장 크고 제작법이 가장 정교하며, 형태가 가장 진짜에 가깝고 연대가 가장 오래된 벽옥룡 모양이다.
* 석가하 옥저룡(玉猪龍):석가하 문화에서 세 종류의 반룡(蟠龍)이 발굴되었는데 머리에는 뿔이 있고 얼굴에는 눈이 있으며 이것은 홍산(紅山)문화의 옥저룡과 앙소문화의 복양(濮陽) 방용(蚌龍)과 같은 것이며 중화 고룡(古龍)의 원형이다.


--


  
*흥륭애 옥패물(옥결):대륙에서 가장 이른 옥기로 현재 중국에서는 고고학상 칭호하기를"중화제일옥(中華第一玉)"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중화족이 부러워한 동이의 유명한 청석 옥이다. 옥은 바로 비단과 함께 동이족의 대표적 특산물이다.

*골적에 부호를 새겨넣은 부분

고박(古朴)한 조소품

전(前) 앙소문화에서 출토된 석조(石雕)와 도소(陶塑) 인두상. 그 중 하북 무안시(武安市) 자산(磁山)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조(石雕) 인두상은 비교적 작고 세밀해 가히 패물류의 장식품인 듯 보인다. 인물상 이외에도 동물상도 있다. 배리강(裵李崗) 유적지에서 출토된 몇 건의 돼지머리와 양 머리 도자기 소상(塑像)은 특징이 선명하고 조형이 생동감이 있다. 하모도(河姆渡) 유적지에서 유행한 조각 예술품은 벼 이삭, 집돼지, 쌍봉조양도, 비수 등 정미한 기하문이 새겨져 있으니 한결같이 보기드문 예술진품이다.

채도의 맹아

채도예술은 대륙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 예술로 그 맹아단계는 전 앙소문화시대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섬서, 감숙성 동부에는 모두 홍도기가 출토된다. 입 언저리 그림을 보면 자홍색 관대문(寬帶紋)이 그려져 있고 측면을 따라 홍색의 띠를 두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자세히 보면 일개 붉은 색으로 둥글게 그린 무늬(圈)임을 알 수 있다. 이 홍도환저발(紅陶 底鉢)의 내벽에는 기하문인 홍채화 3-4개를 사용했다. 꽃무늬는 비록 간단하지만 대륙 채도기에 있어 가장 일찍 나타난 채도로 앙소문화 채도예술의 기초가 정해지게 된 것이다.

옥기의 선성(先聲)

동북의 흥륭애 문화에서 출현한 소형옥기는 장식품에 속하는 것이 많고 개별적으로는 공구가 된다. 흥륭애 유적지와 요령(遼寧) 고신사해(皐新査海) 유적지에서 출토된 옥기는 비교적 도끼(斧), 자귀( ), 비수형 그릇, 패옥( ) 및 관주(管珠)등이 많다. 이러한 옥기의 수량과 종류는 비교적 적지만 대륙 옥기사에 있어 지극히 중요한 옥기 제작 중심으로 홍산문화 옥기보다 앞선 것으로 대륙 탁마옥기의 연대가 지금으로부터 8천년 좌우로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보물이다.
。黃帝活動遺址,最重要的有三處。太史公司馬遷《史記·五帝本紀》中的黃帝居軒轅之丘,邑于涿鹿之阿,葬于橋山。黃帝所居軒轅之丘就在我們新鄭,這是眾多的歷史文獻記載,還有近當代學者研究所得到的一個共識。當代國學大師錢穆先生有一句話說得非常肯定:“古代黃帝部落之居地,應在今河南新鄭,斷無疑矣。”黃帝所邑之涿鹿,文獻也有很多記載,但是,《史記·正義》引《括地誌》說:涿鹿是黃帝初都,很快又遷往有熊。黃帝陵也有多處,但是都不能動搖陜西黃陵縣黃帝陵的地位。這三處重要活動遺址裏,新鄭黃帝故里這個遺址有關黃帝文化的內容最為豐富。新鄭黃帝故里,既是黃帝長期活動之所在,更是其建邦立國之地,史籍記載延續不斷,斑斑可考。
  許順湛 《黃帝故里故都歷代文獻匯典》一書,有關黃帝都有熊的記載,收錄得比較全面,它包括了古代、近代及現代學者的觀點,沒有一個人與皇甫謐有分歧,說明古往今來,在學術界取得了共識。1992年中華炎黃文化研究會與河南炎黃�?#30740;究會、新鄭縣炎黃文化研究會共同舉辦的“炎黃文化與中原文明學術研討會”,對黃帝都有熊居軒轅之丘的地望,學者們認識完全一致,所以前後得出一句話:黃帝故里在新鄭。新聞媒體發了消息,地方政府在這方面做了大量的實際工作,因為黃帝故里這一桂冠戴在新鄭頭上,取得了億萬炎黃子孫的認同。黃帝故里桂冠在新鄭不能動搖。
  蔡全法(新密古城寨考古項目主持人)  裴李崗文化是少典氏文化,仰韶文化的早期是神農時代,中晚期是黃帝時代,龍山早中期是顓頊、帝嚳、堯、舜時代,龍山文化晚期已進入夏禹立國前後。新密市古城寨古城的發掘是由李伯謙、張忠培、俞偉超、嚴文明、安志敏、殷衛璋、仇士華、張學海、安金槐、許順湛、鄭傑祥、馬世之、楊肇清、李友謀、陳旭、張居中、方燕明、趙會軍、李昌韜、張松林、曹桂岑等一批考古學家參與並“確定是一座龍山文化晚期的城址”。根據《國語》、《史記》、《水經注》、람栗翕鬚벙래⇒뙈쟌?샥롯趨�境쟀간с烈鬪잴瘡⑪犧퐈?蜂ⓐ붊뇟Sc잴刹줌??蜂ⓜ�翰_`莘副堪베ы栒硏箇?膣站_Y�?#26202;期城址,在缺乏確鑿事實根據的情況下硬拉到龍山文化早期偏晚,甚至將古城寨龍山文化二期陶器變形,提前至龍山中期。這種無視客觀事實的研究必得不到同仁的支援。新密古城寨是一座晚于王城崗的城址,而又早于新密新寨城址的龍山文化晚期城址,同時,也是考古學文化的實物載體,有著不可改變的客觀性,不會因個人意願而隨意改變成黃帝故都—軒轅丘。




세계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동네인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와 돼지의 관계도 흥미롭다. 아직 뉴욕이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던 시절, 지금의 월스트리트는 바로 돼지 떼를 방목하는 곳이었다. 이 돼지 떼가 주거지로 오는 것을 막고자 사람들은 길게 벽(wall)을 세웠다. 바로 이 벽을 따라 거리가 닦였고, 바로 이 거리에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예전에 돼지 떼가 뒹굴었던 곳에서 세상의 모든 돈을 삼켜도 허기진 이들이 24시간 눈에 불을 켜놓고 살아 간다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흔히 우리는 유난히 탐욕스러운 이들을 보면서 '돼지보다도 못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한 때 월스트리트를 누볐을 돼지와 월스트리트의 경제인 중 누가 더 기분이 나쁠까?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70216170928



*기독 성경

동아시아의 돼지 사육에 있다. 돼지는 인간이 먹지 못하는 각종 찌꺼기를 먹여서 얼마든지 키울 수 있었다. 돼지를 키우는데는 숲과 더불어 물이 필수적이므로 팔레스타인 지역이 돼지 사육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 營퓽訣嗤? 지역에 따라 돼지를 사육했다는 여러 증거가 나타난다(Houston, 1993: 89). 더불어 신약 성경 역시 거라사 돼지떼 수몰 사건(막 5:11)과 돌아온 탕자 이야기(눅 15:16) 등에서 당시의 돼지 사육의 증거를 보여준다

*돼지는 멧돼지에서 기원하였다.  돼지가 사람에 의하여 길 들여진 시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아직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8,000~6,000년전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 조상들은 신석기시대부터 벌써 멧돼지를 잡아 먹으면서 집돼지로 만들어 기르기 시작하였다.  구석기 유적에서 나온 돼지뼈 가운데는 집돼지뼈가 3.7% 정도였으나 청동기시대층에서 나온 돼지뼈에는 집돼지의 뼈가 43.1%로 많아졌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멧돼지를 잡아 먹었으며 그것을 길 들여 집돼지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http://jdm0777.com/jdm/dwaeji.htm
---
  
하광악
2006年7月25日夜,何光岳先生说,他支持“中国人是猪的传人”一信仰事实,在古代社会,人为了取暖,和动物混居在一起,因此人和猪也经常混居在一起。人不但用猪皮做衣服,还用猪脂膏涂身保暖。在典籍中有一个民族叫“豨韦氏”,他们就是崇拜猪的民族,“豨韦氏”开天辟地,是中国人的祖先。后来一支迁到北方,一支迁到南方。迁徙到北方的那一支,又称“室韦”,后来演变为蒙古族的祖先。古代崇拜猪的民族很多,《山海经》里记载很多。  中国人み훗潾溢친?#24182;不鄙视猪。在先秦时代,猪是勇武的象征。在中国人心目中,猪全身是宝,是“乌金”,象征着福气。 中国古人家、猪不分,无猪不成家,这是中国文化的显著特征。    (暂时节略,何光岳先生在成熟时候将有评论)      何光岳简介:    来源于:网络    何光岳,1939年生,湖南岳阳人,历史学家,少年丧父,小学辍学后因家贫为人牧牛,自学历史地理、古典文学及古文字学等多种学科。1956年调任岳阳县农业技术员,1958年发明双季晚稻“倒种春”,升农技站长。1970年调岳阳市北区秘书。1977年任市文化馆干事。1978年调湖南省历史研究所古代史研究人员。1979年任全国青年常委。1985年获全国总工会自学成才金牌奖。1986年获“国家级有突出贡献的专家”,1987年获“湖南省先进科技工作者”铜牌奖,1998年获“湖南省优秀社会科学专家”称号,任副所长、副研究员。现任炎黄文化研究所所长、研究员及湖南省炎黄文化研究会会长,湖南中国古代史研究会副理事长、中国汉民族学会副会长。1993年,中央电视台《东方之子》首次推出的全国40位科学家访谈系列中,何光岳被排在第8位。何之前是白春礼、樊纲、何祚庥,之后是周光召、朱光亚等人。在20世纪70年代,何光岳还曾被选为全国青联常委。     已出版《炎黄源流史》、《商源流史》、《秦赵源流史》、《夏源流史》、《南蛮源流史》、《东夷源流史》、《百越源流史》、《楚源流史》、《中原古国源流史》、《周源流史》、《汉源流史》、《楚灭国考》等。合著《岳阳楼志》,主编《中国帝王大全》、《中华姓氏通书》。自著出版21部学术专著,发表论文350篇,达两千万余字。1993年傅朗云、杨阳等30我位教授在长春成立“东北何光岳研究会(筹)”,并写有《农民史学家何光岳》一书。1998年11月2日梁文忠、罗石贤、余三定、柳仁祥等260多人获批准成立“湖南省何光岳研究会”,并出版《史学奇才何光岳》一书。





*반파유적지&모계씨족사회였음을 상징하는 여체 모형의 파빌리언

* 앙소문화에 속하는 섬서성 서안시 근교의 서안 반파유적지는 풍부한 소장품과 독특한 품격의 진열을 한 중국 유일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약 6천년전) 박물관으로 전 세계 학자들을 포함 년 1백만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명소다. 30년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던 이곳 반포촌은 화려한 선사시대 유적이 밝혀지면서 세상사람에게 널리 유명해졌다. 서안 반파 유적지에서 발견된 동물의 우리와 뼈를 보면 당시 사육했던 주요 가축은 돼지와 개다.http://www.cheramia.net/board/zboard.php?id=bbs9&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반파%20유적지&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65



*채도주발(彩陶鉢): 이 채도주발의 장식 무늬는 사각형 격자무늬로, 반?半坡:섬서성 서안) 유적지 유형의 무늬 장식 특징이다.
*앙소(仰韶)문화 반파(半坡:중국현지에서는 반포라 발음한다) 유형의 전형적 기물(器物)의 하나. 물고기 무늬(魚紋)는 반파 유형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채도 문양이다. 물고기는 반파 씨족들의 상징 도등(圖騰):씨족 부대깃발 로고)이라고 인정되며, 반파 유적지의 채도는 물고기 문양을 주요 제재로 삼았는데, 어업이 당시 경제생활에 중요한 지위를 가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고고학적 관점에서의 유형(類型)이란 동시대를 대표해 일정 구역내 일정 지방에 집중적으로 특징을 갖는 유적지와 유물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의 공동체는 공동의 성격을 지닌 하나의 특정적 사회집단에 속한다. 동일 공동체의 유적과 유물 가운데는 그래도 사소한 차이가 있어, 가히 고고학 문화의 갈래를 형성할 수 있으며, 고고학 유형이라 칭한다)  
*앙소문화 전기 고고학 문화 분포도:앙소문화 전기에 각지의 문화는 부湺?발전하여, 북쪽 하북성 발해만에는 동이족 환웅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산(紅山) 문화가 있고(1번), 동쪽으로 산동반도 바로 위의 후강(后岡) 1기 문화(2번) 및 동이족 은나라의 유적지로 청구 배달국의 후예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족이 건설한 대문구(大汶口) 문화가 있고(4번), 남쪽 장강 중류의 동이족의 초나라 지역에는 대계(大溪) 문화 유적지가 있고(6번), 양자강 하류의 전통적 동이 제 족의 웅거지에는 마가빈(馬家濱) 문화와 하모도(河姆渡) 유적지가 있다.(5번) 앙소문화의 반파(半坡)유적지가 있는 섬서성은 3번의 지역이다. 이들 유적지 중에서 앙소문화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4번의 대문구 문화와 6번의 대계문화 유적지이다.
(참고:장강(양자강) 중하류 지구 신석기 시대 중기 문화 분포도;장강 상류인 호남성 동정호의 팽두산(彭頭山)과 동이족인 묘족(苗族)과 같은 동이족인 월족(越族)이 밀집해 웅거한 장강 하류의 절강성 상해일대(양저문화)와 샤오싱(소흥)부근의 하모도(河姆渡)에 밀집되어있음을 본다. 장강 유역은 동이 9려족과 동이 묘족(苗族) 및 동이 백월족(百越族), 동이 형오족(荊吳族) 등이 살던 웅거지이다. 이 곳은 중국 고대문헌 중에 일찍이 원시, 낙후된 미개지 땅으로 묘사 서술되어 있곤 했다. 그러나 장강 유역의 신석기 시대 문화 출현의 고고학적인 발견은 그 출현 연대가 황하유역에 비해 늦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문화발전 수준 역시 결코 북방 동이족의 황하유역보다 낮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원전 5000년 내지 3300년 전의 하모도(河姆渡) 문화의 형상은 수공?및 농업이 한결같이 고도의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동이족이 웅거한 상고시기의 장강 유역의 정황은 지나 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도 그 요람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참고로 하모도 유적지를 가면 태양신의 유적지라 칭하는데 이는 역시 태호복희와 태양신으로 추앙되덤 염제 신농의 농경문화 덕으로 볼 수 있다. 고고학자들은 어망을 만든 수렵문화의 복희와 농기구를 만든 염제를 두고 수렵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수공업 진보와 채도의 휘황(輝煌)



앙소문화 시기에 제작된 석기는, 비교적 공들여 만들어 배합한 형상으로, 설형(舌形) 대패(金+産)를 보면 전체를 갈아서 광을 내고, 돌 대패에 어깨가 있으며, 석도(石刀)에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러한 새로운 공구는 농경과 축목, 어렵에 사용되어 생산효율을 제고시켰는데, 일부 사람으로 하여금 생산활동으로부터 이탈시켜 수공업에 종사하게 하여 수공업을 번영케 하는 조건이 되었다.당시 원시적인 방직과 편직 공예가 출현하고, 또 도자기 제조업의 성취가 최대가 되어 도질(陶質), 조형, 장식으로부터 용소(溶燒) 기술이 상당히 성숙했다. 제조방법은 그릇의 형태에 따라 달라 소형 기물은 반죽하는 날제법(捏制法), 비교적 큰 기물은 니조 반축법(泥條盤築法)과 윤제법(輪制法)을 사용했다. 생산한 바의 도기는 가히 취사용 그릇, 물그릇, 식기, 성저기(盛貯器),와 예제기(禮祭器) 등으로 나뉘는데, 이는 생활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되는 그릇이다. 도기 표면은 아직도  채회도안(彩繪圖案)이 그려져 있으니, 앙소문화에 있어 가장 저명한 채도(彩陶)를 형성한다. 이른 시기의 채도(彩陶)는 모두 홍도 흑채다. 후기에는 도자기 상罐?그림으로 감싸기 시작해, 채색 그림을 가미하여, 쌍색( 色) 도안을 입혔다. 앙소문화는 대량으로 제작한 아름답고 정교한 채도로 말미암아 "채도문화"라는 칭호를 획득했다.

앙소(仰韶) 선주민(先民)의 생활과 동반자



태호 복희와 여와의 동족으로 보이는 황하 중상류의 앙소 선주민(先民)은 동방의 황하 하류지역에서 용산문화, 대문구 문화를 일군  산동 지구 동이족 굽岺括?사는 곳과 남방의 장강(양자강) 유역의 고대 동이족과 밀접한 내왕관계를 가졌다. 이들 세 개의 동아리는 거대한 3각형의 격국을 구성했는데, 그 중에서도 앙소문화지역이 가장 크고 실력 또한 가장 웅후(雄厚)했다. 대륙의 상고사에 지나족의 것은 없다. 그 핵심에는 동이 제 족의 고고학 발자취만이 있을 뿐이다.

蔡全法(新密古城寨考古項目主持人)  裴李崗文化是少典氏文化,仰韶文化的早期是神農時代,中晚期是黃帝時代,龍山早中期是顓頊、帝嚳、堯、舜時代,龍山文化晚期已進入夏禹立國前後。新密市古城寨古城的發掘是由李伯謙、張忠培、俞偉超、嚴文明、安志敏、殷衛璋、仇士華、張學海、安金槐、許順湛、鄭傑祥、馬世之、楊肇清、李友謀、陳旭、張居中、方燕明、趙會軍、李昌韜、張松林、曹桂岑等一批考古學家參與並“確定是一座龍山文化晚期的城址”。根據《國語》、《史記》、《水經注》、《通鑒外紀》、《括地誌》等文獻記載,新鄭是有熊之墟、黃帝故都。但是有個別持黃帝文化龍山說的學者,將新密古城寨龍山文化晚期城址,在缺乏確鑿事實根據的情況下硬拉到龍山文化早期偏晚,甚至將古城寨龍山文化二期陶器變形,提前至龍山中期。這種無墾仝붸잣閤?#30740;究必得不到同仁的支援。新密古城寨是一座晚于王城崗的城址,而又早于新密新寨城址的龍山文化晚期城址,同時,也是考古學文化的實物載體,有著不可改變的客觀性,不會因個人意願而隨意改變成黃帝故都—軒轅丘。


사기상의 3황5제 명칭

5제시대 중국 고고학 문화구계(文化區系)


① 전설시대의 수령(首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행방을 쫓아서

중국은 자고로 “삼황오제”의 전설이 전해 내려와 그들을 중화문명의 주된 창시자이며 그 연대는 4~5천년 전의 원시사회 말기에 해당하는 고국이 국가로 향하는 과도기에 나타난 지도자라고 여긴다. 유가학설을 정통사상으로 하는 몇몇 서적은 그 시대에 대해 충분하고 세밀하며 과장된 묘사를 하고 그것을 인애, 평등, 번영이 충만한 사회 단계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이상적인 대동세계로 생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시대에 대해 끝없이 파고 들어가 “삼황오제”에 대해 특별히 숭상하고 수많은 지식인과 사대부들이 사회의 이상 실현을 평생 추구하는 가장 큰 이상으로 만들었다.




[삼황오제의 이상세계]



고대 전설 속의 “삼황오제”는 도대체 누구인가? 역사상 줄곧 정설은 없었다. 특히 “삼황”은 그 의견이 여섯, 일곱가지도 더 되며 “오제”는 현재 <사기>의 기록이 가장 통용되고 있는데 황제,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의 5명이다. 그들과 기본적으로 같은 시대에 있던 유명한 인물과 부락은 또 신농씨(神俸?, 치우(蚩尤), 축융(祝融), 공공(共工) 등이 있고 후대 사람들은 덧붙혀서 하(夏), 상(商), 주(周) 삼대의 선조가 모두 오제와 관련있는 중요한 인물이며 심지어는 바로 오제의 “후예”라고 말할 것이다. 신화 전설 중에는 삼황오제 시기에 천하에는 만개의 나라가 있었는데(이것이 바로 방국입립지시인 마을국가시대의 왕들로 모두 환국의 후예들인 동이 제족의 후예들이다)

*지나사가들은 이 때가 원시사회의 부계씨족 사회 말기단계로 보고, 도처에 부락 규모의 국가가 숲처럼 가득 들어찬 “부락방국임립지시(部落方國林立之時)”의 시기로 보고 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사마천이 비록 요를 천자로 장식했다 하더라도 그 실은 고만고만한 부락으로 조성된 부락방국(部落方國)의 하나쯤으로밖에는 여기지 않고 있다. Click here!)

서량지는 이를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요의 천자설을 일축하고 있다. 당시는 결코 한 곳에 정착해 나라를 이룰만한 시기도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모권제 유습이 그대로 남은 농목축 사회의 하나로 지금의 칸셉인 국가를 이룬다는 것은 문명사적으로 어림없는 일이며 그 뿌리 또한 동이 제족의 바운더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삼황”과 “오제” 모두 인민 민주를 제창하던 덕이 높은 지도자였으며, 그들이 보위에 있을 때 인민과 함께 “덕의 정치”를 구현했다 지나사가는 치우에게 쫓겨 패망한 황제를 벼리로 삼기위해 황제가 남쪽의 치우(蚩尤)를 전쟁으로 타파하고 통일된 각 부락마다 사람들을 이끌?오지를 문명사회로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그들이 늙자 선양의 방식으로 지도자의 위치를 걸출한 후임자에게 내 주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통치한 기간에 천하가 공정하고 말이 믿을 만하고 화목하여 사람마다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진실한 “삼황오제”를 찾아서]



“삼황” 시대는 비교적 빨라 모계 씨족 사회의 흔적을 포함하며, “오제”는 이미 원시사회 말기에 진입하여 모계 씨족 공동 사회의 부락연맹이 와해되어 갔으며 고국의 지위에도 동요가 생겨 아직 국가가 진정으로 건립되지 않은 특수한 역사 단계다. 중원의 삼황오제 시대는 배달 환웅시대와 단군조선의 예속기였다. 그러나 지나 사학도들은 묵가때 요순 선양으로 변조된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여(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참조Click here!)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제”는 모두 군사 민주제 아래의 부계 씨족 부락의 수장 혹은 군사 지도자로, 원시의 공유제와 평등관념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직 완전히 퇴화되지 않은 원시 민주관념과 제도의 제약을 받아 선양제(禪讓制)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하(夏) 민족 부락연맹에서 매우 빨리 중대 변혁을 맞아 오제 중 하나였던 요(堯)가 지도자의 지위를 순(舜)에게 선양하고 순은 또 우(禹)에게 선양하는데 우는 오히려 다시 선양하지 않고 지위를 자신의 아들인 계(啓)에게 주어 이때부터 “부자상속, 형제상속”의 새로운 역사 단계가 시작되었다.

[“오제”와 3?집단]



다음의 3대집단을 가른 것은 지나 고고학자들의 분류인데 지나사학자의 사관을 본다는 점에서 보아주었으면 하고 동시에 확실한 한민족 대륙사관이 서 있다면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삼황오제 시대 특히 오제시대는 중국, 중화민족 및 다민족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기초가 된 시기였고 중화민족의 여러 갈래의 선조가 결합되고 다시 구성된 중요한 단계다. 중화 대지상의 다른 경제 유형과 다른 문화 전통이 분포한 제(諸)문화는 특히 앙소문화를 대표로 하고 중원 조 농작 구역을 주요 활동 범위로 하는 신농씨(神農氏) 화족 집단과 어로와 수렵을 주요 경제 활동으로 하는 유웅씨 황제 집단, 그리고 산동성의 대문구 문화와 강소성 쑤쪼우(소주) 태호의 양저문화를 대표로 하고 동남 해안의 벼 농작 구역을 주요 활동 범위로 하는 우하(虞夏)집단이 있다. 이 3대 집단은 각자의 개성을 충분히 발휘한 동시에 문화의 교류와 끊임없는 조합으로 일체가 되어 모이고 문화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을 향해 크게 전진했다. 이는 하(夏), 상(商), 주(周) 3대 문명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았고 수 천년에 걸친 끊임없는 중화문명 근원의 소재지다.

화폐명칭 “돈”의기원과 유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1 돼지(豚)에서 유래한 우리말 돈의 기원  >





  














414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4. 항주(杭州) 영은사(靈隱寺)의 승려 제공(濟公)   안원전    2011/01/03  2459
413    국가 보안법 폐지문제 KBS,MBC 대토론을 보고 난 단상(안원전) [6]   안원전    2004/09/12  8027
412    이번 사건은 가토릭 세력의 방송장악이 빚어낸 황교수 죽이기다. [67]   안원전    2006/01/10  14214
411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3. 20여년 전에 민족주의란 타이틀아래 제목없이 쓴 원고2   안원전    2010/06/24  3836
410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2. 20여년 전에 민족주의란 타이틀아래 제목없이 쓴 원고1   안원전    2010/06/24  3394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1. 돼지(豚)에서 유래한 우리말 돈의 기원   안원전    2010/03/13  5495
408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0.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인류와 만물의 기원 (백족(白族)) 下   안원전    2009/12/09  4449
407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9. 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인류와 만물의 기원 (백족(白族)) 上   안원전    2009/09/21  4796
406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8.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차파마(遮帕麻)와 차미마(遮米麻) (아창족(阿昌族))하편   안원전    2009/08/11  4681
405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7.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차파마(遮帕麻)와 차미마(遮米麻) (아창족(阿昌族))상편   안원전    2009/08/11  4088
404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6.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천지개벽 신화 천, 지, 인(신농씨 후예 합니족(哈尼族))   안원전    2009/07/13  4077
403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5.천지개벽 신화 시리즈-해륜격격(海倫格格)이 하늘을 메우다.(만족(滿族))   안원전    2009/06/01  4994
402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4. 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여신 여와(女媧) (티벳장족(藏族))   안원전    2009/05/04  4864
401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3. 천지개벽 신화 시리즈-맥덕이(麥德爾) 신녀(神女)의 천지개벽 (몽고족(蒙古族))   안원전    2009/04/14  4283
400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2. 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역알(力戞)이 하늘을 밀어 올리다.(布依族<布夷族)   안원전    2009/03/25  3495
399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1. 천지개벽 신화 시리즈-연본곽본(烟本霍本:신의 고금의 이야기)   안원전    2009/03/11  4112
398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60 수문제와 5온使者 온신(瘟神)   안원전    2009/02/18  3370
397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9 화타(華佗)   안원전    2009/02/10  4044
396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8. 8仙人 중 유일 女선인 하선고(何仙姑)   안원전    2009/01/31  3316
395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7 천지개벽 신화 시리즈 (백족(白族))-반고,반생신화와 백가성(百家姓)’의 유래   안원전    2009/01/17  4046
394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6 주전자 노인과 비장방(費長房)   안원전    2008/12/08  3431
393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5.두부의 기원은 언제인가?   안원전    2008/08/14  4459
392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4.《좌전(左傳)》은 좌구명(左丘明)이 쓴 것인가?   안원전    2008/07/20  4029
391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3. 천둥의 신 뇌공(雷公)   안원전    2008/06/30  4025
390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2. 신주(神州)의 어디에 ‘비자소(妃子笑)’가 있는가?   안원전    2008/06/23  4095
389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1. 8신선 중 일인 여동빈(呂洞賓)   안원전    2008/06/18  4739
388    안원전의 21세기 담론350. 8신선 가운데 1인 남 채화(南采和)   안원전    2008/05/18  5676
387    담론349. 묻혀 있는 비밀-진시황릉의 비밀   안원전    2008/04/12  5243
386    담론 348. 분명한 내막-서안사변(西安事變)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8/03/11  4692
385    담론347.천고의 원안(千古寃案) 진시황 ‘갱유’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8/02/26  4420
384    담론346 누가 병마용을 불태웠는가? 진(秦)나라 용(俑: 진흙인형)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8/02/03  4610
383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4. 어디에서 왔는가?(來自何方)- 초(楚)문화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6/12/31  6838
382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3.《서경잡기(西京雜記)》의 작자는 누구인가?   안원전    2006/11/22  6719
381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2.‘공자(孔子)’의 진위-‘유학(儒學)’변천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6/09/23  5966
380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41.《좌전(左傳)》의 수수께끼   안원전    2006/09/01  6147
[1] 2 [3][4][5][6][7][8][9][10]..[13] [NEXT]
Copyright 1999-2017 Zeroboard / skin by Cheram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