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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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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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담론95. 발해북안 홍산문화, 고조선이 요보다 시기상의 우위 중원점령한 동이 9이족 -탄허스님


다음은 KBS 역사스페셜(http://www.kbs.co.kr/history/) 자료인 모양인데 사운더라는 아이디 명으로 모 인터넷 사이트에 인용 게시된 자료이다. 최신의 고고학 현황자료로 정리가 아주 깔끔하게 잘되어 있다.

기원전

7500경  배리강문화. *1Click here!*2Click here!*3Click here!*4Click here!*5Click here!*6Click here!
7000경  자산문화, 대지만 1기 문화. *1Click here!*2Click here!*1Click here!
6000경  하모도문화. *1Click here!*2Click here!*3Click here!*4Click here!*5Click here!*6Click here!*7Click here!*8Click here!*9Click here!

5000경  앙소문화(반파유형). *1Click here!*2Click here!*3Click here!*4Click here!*5Click here!
*裴李崗文化是少典氏文化,仰韶文化的早期是神農時代,中晚期是黃帝時代,龍山早中期是顓頊、帝嚳、堯、舜時代,龍山文化晚期已進入夏禹立國前後。

동이족의 폭넓은 상고사 활동영역의 맥을 짚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 출처를 그대로 옮긴다. 이 내용은 추후 임혜상과 서량지 그리고 신 채호,  문정창, 등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인용] 홍산문화 발견의 파장 2001. 2. 23. 사운더

「환단고기」, 「규원사화」을 논의하는데 있어 "홍산문화"가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인용해 놓습니다. 인용에 대하여 사전양해 받지 못한 점 "사학과"님의 깊은 양해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출처] KBS 역사스페셜(http://www.kbs.co.kr/history/) -> 제안 및 시청소감 2000/12/24 (04:07) Article Number : 2862 글쓴이 : 사학과 홍산 문화 발견의 파장 .

이 게시판에 홍산 문화에 대한 주장이 있어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발해 북안의 신석기 문화 중 가장 주목할 문화가 <홍산문화>입니다. 이 홍산 문화는 실로 엄청난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발굴하므로 인해서 중국은 황하중심 문화 전파론을 지양하고 이른 바 '다중심문화론'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산동 반도에서 발견되는 북신문화-대문구-용산문화가 바로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문화가 바로 고조선 중심지였다고 우리나라에서도 공식화되고 있는 요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중국학자 부사년이 주장하였던 이하동서설의 주인공인 夷가 바로 고조선인이거나 그 선조였다는 이론으로까지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에서도 이 문화를 가지고 고조선이 실제로 기원전 2333 년에 건국이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고조선의 중심이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이 문화는 또한 환단고기를 중심으로 하여 꾸준히 강단 사학계를 한반도 중심의 식민사관이라고 비판했던 재야사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황하문명 보다도 빨리 고대 국가를 형성한 유적이 보이며 성곽이나 왕궁터등이 발견되어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이미 고대국가의 발판을 만들었다는 재야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까지 되었습니다.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배달국이 바로 홍산 문화(B.C.4500∼B.C.2500), 더 나아가 홍산 문화의 전신인 흥륭화 문화,신락 문화(B.C.6000∼B.C.5000)를 기반으로 세워졌다는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매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산 문화는 요녕 지역과 내몽고동부 지역에 광범하게 전개된 6천년(B.C.4,000)의 신석기시대중기에 해당하는 2단계 신석기문화로 인식됩니다.

홍산 문화는 앙소 문화의 채도와 이전 단계의 연속 고선문계 토기와 세석기 등을 융합하여 한 단계 발전하여 전개되었는데 후에 이 지역 하가점하층문화에 연결되고 중국 황하유역과 산동 반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東夷族'의 활동지역을 문헌상으로 보면, 하북성 동북부와 산동 일대, 양자강하류 유역 등입니다.

산동 지역에서 가장 앞서는 신석기문화유적은 북신 문화인데, 북신 문화는 7천년 전까지 소급되어지고 황하의 자산, 배리강 문화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한 B.C. 4500년경의 이지역 대문구 문화와도 직접적인 연원관계에 있습니다. 대문구문화는 하남성 서쪽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써 東夷系 문화로 추정되고 있고 이후의 용산문화에 연결됩니다.

홍산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석묘계(石墓系) 돌무덤입니다.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돌 판을 잘라 묘실 벽을 짜는 석관묘(石棺墓-돌널무덤)가 대능하상류 역 요녕성 우하량 유적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가 묘장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이야말로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 은 이전에는 땅을 파서 묘실을 만들고 시신과 유물을 안장하는 토광묘가 유행하고 있고 주대(周代)에 들어와서야 나무로 곽을 짜서 묘실을 만드는 목관묘가 유행합니다.

역사상에서 홍산 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므로 고조선의 전 단계인 홍산 문화는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그래서 힘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축조하는 방식이 고조선이후 부여, 고구려에도 계속하여 전승되는 고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고전이나 사서에 나오는 황제헌원과 대결을 벌였던 치우의 세력근거지로도 지적이 되기도 하는데 황제헌원과 결전을 벌이며 하북과 산동 일대를 개척하여 청구국을 세웠다는 기록은 [사기]에 더 자세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홍산 문화 이후 하가점 하층문화(B.C.2000∼B.C.1300)가 그 지역에 보다 광범하게 확산되어 등장하는데 홍산 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로 이어졌고 하가점하층 문화는 바로 고조선의 문화였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홍산(紅山) 문화는 소하연(小河沿) 문화를 거쳐 하가점하층 문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중국학계에서 거의 공식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소하연 문화에 이어지는 하가점하층 문화, 구체적으로 풍하(豊下)문화에서 고조선의 건국연대보다 조금 앞서는 서기전 2천4백년 경으로 보이는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면 화살촉, 칼, 창 등도 발굴되어 기원 전 2333년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요동, 요서 일대에 발굴된 이 청동기 유물은 황하유역에서 발굴되는 청동기 유물보다 연대가 훨씬 빨라 중국동부지역에 발견되는 청동기에도 상당한 영향 을 주었을 것으로 예상되기까지 합니다.

이 홍산 문화의 발견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대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파장이 실로 큽니다. 중국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의 앙소 문화와 대비되는 문화로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로 보았었는데 홍산 문화를 발견한 이후로 이 대문구 문화와 용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홍산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즉 홍산 문화의 주인공을 고조선이나 그 선조로 파악하였을 경우에는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한민족의 선조였다는 근거가 됩니다. 또한 북신 문화-대문구 문화-용산 문화-악석 문화로 이어지는 산동 문화와 흥륭화 문화, 신락 문화-홍산 문화-하가점하층 문화(풍하문화)로 이어지는 요령문화의 주인공이 한민족의 선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학자들도 산동 문화의 주인공인 동이족이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을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민족이었나를 밝히기를 꺼려하고 전백찬같은 중국학자의 일부가 사적 상에 보이는 辰國(고조선?)이 동이족의 중심지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홍산 문화는 고조선인의 선조가 일으킨 문명일까?

분명한 것은 중국학계에서도 은나라 때까지 화하 족이 하북 성과 산동 성을 넘어오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홍산 문화의 주인공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중국학계가 인정하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 동이족이 과연 고조선인이냐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학계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을 예전의 평양에서 요서, 요동 등 요녕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민족의 기원도 그곳에서 발생하여 한반도로 이주를 해왔다는 이론이 점차로 신빙성을 더해 가고 있기 때문에 홍산 문화의 주인공 나아가서 중국의 문화의 중요한 획을 그었던 세력이 누구냐 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을 떠나서 분명한 것은 이 문화가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1.B.C.6000~B.C.5000 황하유역(화하족) - 자산문화,배리강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북신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흥륭화문화,신락문화
2.B.C.4500∼B.C.2500 황하유역(화하족) - 앙소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대문구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홍산문화
3.B.C.2000∼B.C.1300 황하유역(화하족) - 이리두문화
산동지역(동이족) - 용산문화
요녕지역(동이족) - 하가점하층문화 -

중국 작가협회 회원이자 소주(蘇州)시 산문학회 부회장 겸 강소성 곤산(昆山)시 문화국 부국장 진익(陳益)은 치우의 정체에 대해 중국인의 선조는 치우이고 치우의 선조는 바로 오월(吳越)의 조상이라 말한다. 오월은 임혜상이 바로 동이족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그는 사료에 흔적만 겨우 보이는 희미, 모호한  하(夏) 이전의 시대를 만장(漫長:뭐가 뭔지 모르는 시대) 시대라 하고, 중국의 역사가 3황이니 5제니 하여 역사를 덮어버렸으나, 오월문화는 세세대대 (양자강)강남의 땅에 토착한 사람들이니, 그들이 곧 오월의 조상, 선조라 말한다.

일찍이 그들이 창조한 찬란한 문화는 만장(漫長) 시대 중, 돌로 병기를 제작한 송택(崧澤)문화(5500-6000년전)와 옥으로 병기를 제작한 양저(良渚)문화(4000-5500년전)와 동(銅)으로 병기를 제작한 마교(馬橋) 문화(3000-4000년전)가 있다. 「월절서(越絶書)」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헌원(軒轅), 신농(神農), 혁서(赫胥) 시대에, 돌로 병기를 제작하고 수목을 잘라 궁실을 짓고 죽으면 용장(龍藏)으로 치룬다.  황제시대에 이르러, 옥으로 병기를 만들고, 수목을 벌채해 착지(鑿地)에 궁실을 지었다. 죽으면 용장(龍藏)으로 치룬다. 우혈(禹穴) 시대에 청동으로 병기를 만들고, 착(鑿)으로 대궐을 삼고, 용문(龍門)을 통과해, 동해에서 결강이하(決江異河) 동쪽에 물을 대었다.-

헌원, 신농, 혁서 등 3황 시대는 이미 각종 신석기 도구를 만들어 쓴 시대였으며, 황제시대인 황제,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의 5제 시대는 옥기(玉器) 시대였다. 하우(夏禹) 시대로 진입하면 이미 청동기가 주류를 이룬 청동기 시대였다.

3황5제 시대를 볼 것 같으면, 태호(太湖) 유역은 하이브리드화된 화하(華夏)족이 칭하기를 만이융적(蠻夷戎狄)의 땅이라 하였다. 당시 이곳의 만이(蠻夷)인들 사이에는 허다한 씨족 부락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산해경 등 고서에 기재되어 등장하고 있는 착치민(鑿齒民), 나국민(裸國民), 조제(雕題), 우민(羽民), 왕망(汪芒)씨 등이었다.

착치민은 강남(양자강) 오월 조상, 선조이다. 앞 이빨 두 개를 뽑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았다. 이들은 일찍이 동이(東夷)의 예( )와 더불어 전쟁을 하기도 했는데 이 기록은 「산해경」에도 보인다. 예가 활과 화살을 잡고 착치민이 방패를 잡았다 하니 그들의 무기가 이미 비교적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나국민(裸國民)은 단발문신을 했으며 나체위에 문신으로 장식을 한 조상, 선조이다. 하우씨가 치수를 하기 위해 양자강 중, 하류인 나국(裸國)에 당도했을 적에(그러니까 상류에서 왔다), 현지인의 습속을 따라 문신을 했다 하니 이는 마테오릿치 신부가 명의 습속에 따라 유학자의 의복을 걸친 것과 같다 하겠다. 나국(裸國)은 옛 오(吳)나라의 땅이니 오늘날의 경치좋은 동양의 베네치아 소주(蘇州) 일대이다.    

조제(雕題)는 다시 말해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검은 물감으로 물들여(雕題黑齒:굴원의 「초사」와 「예기」에 보임), 조제교지(雕題交趾:베트남으로 한무제가 남월을 정복해 교지로 삼음)라 하니, 습속은 나국(裸國)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이들 부락사람들은 뿔로 만든 현판에 꽃 장식을 조각해 넣고, 소라고둥과 방합 먹는 것을 즐겨하고 아이누족 처럼 치아를 검게 한다.

조상 제사를 지낼 때 인육을 사용하며 인골로 해장( 醬:젓갈)을 담근다. 우민(羽民)은 지금의 절강성 천목산(天目山) 이동에서 연해(沿海)지구에 사는데, 전설중에 우민국은 불사지향(鄕)이라 불렸으며, 산야에 귀혈이 많아 이것이 화하여 단석(丹石)이 되고 마침내 마노(瑪瑙)가 된다 했다.

사람들은 마노로 항아리를 만들어 감로를 받아 씨족 수령에게 바친다. 왕망(汪芒) 씨는 우민국의 일개 남방부락으로 씨족수령의 신체가 유달리 커서 사람들이 칭하기를 방풍씨(防風氏)라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은 왕망국을 장인국(長人國), 장이국(長夷國), 대인국 등등으로 불렀다. 굴원은 일찍이 천문(天問)에서 방풍(防風)씨를 장인(長人)이라 부르고 "장인하수(長人何守)?"라 묻고 있다.

이들 전기적 색채로 충만한 남방 씨족 부락들은 1, 2대 단군과 동시대 인물인 우(禹)임금 때 동이족 지리 역사서 「산해경(山海經)」에서도 그 기록을 볼 수 있듯이  단발, 문신, 조제, 착치 등 서로 같은 습속을 보이고 있다. 왜곡기록이긴 해도 하(夏) 소강(少康)이 그의 서자를 월군(越君)으로 봉할 때

하(夏) 나라 소강(少康)은 자신의 서자(庶子)를 월군(越君)으로 봉하는데, 그에게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바로 월의 풍습에 맞게 단발, 문신한다는 조건이었다. 단발, 문신은 무언가.

문신은 바로 요즘의 조폭들이 팔뚝에 "일심" 혹은 "차카게 살자"라는 문구를 새겨 넣는 것처럼 신체의 피부에 각종 신성한 도안을 새겨 넣는 소위 타투(Tatoo)를 말하는 것이며, 단발은 머리 4 주위를 밀어버리고 머리 뒤 쪽 한가운데만을 남겨놓아 상투를 틀어 올려 한가운데의 구멍 사이에 병( :대나무 비녀)을 꽂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동이족인 만주족의 변발하고도 약간 비슷하고(만주족과 깎는 것은 같고 상투는 다르다) 우리의 상투와 비슷하다는 점에서는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으니 우리 조상 선조들의 흡사한 전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새로 임명된 군주는 여기에 덧붙여 앞니 두개를 뽑아내는 착치를 해야 함을 요구받았으며, 또한  씨족 내부에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이마 위에 먹으로 꽃무늬를 새겨 넣는 조제(雕題)를 요구받았다.

당시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은 위수(渭水) 유역으로부터 태호(太湖) 일대에 이르기까지 포진하고 있던 동이족 형만인(荊蠻人)의 단발, 문신의 풍속을 따라 패션의 아름다움을 드러냈으니, 실제 20세기 말 21 세기초의 강남(江南:양자강) 수향(水鄕)의 농민들은 아직도 착치의 고통은 두 번 다시 재현하지 않고 있지만, 금박 입힌 이빨을 즐겨하고 예의 단발을 즐겨 한다.

그럼 동이족인 오월(吳越) 선조들의 단발 문신은 어떠했을까. 이들 문화현상에 대해서는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장식설, 존영설(尊榮說), 무술설(巫述說) 등 갖가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고힐강(顧 剛)은 태호(太湖) 유역은 자고로 울창한 고목의 숲을 이루어 토지가 낮고 습하여 인류가 용사(龍蛇)와 함께 동거하여 피해를 많이 입었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당시 오월인(吳越人)들은 이들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단발, 문신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동물세계의 보호색상과 동일한 것이다.  도등(圖騰) 씨족의 문신을 보면, 대표 도등 조상선조의 존재는 이에서 발생하는 보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문신의 원초적 의의는 본래 성인예식(成人禮)의 표시였는데 후에 점점 각종 관념, 의식, 습속이 첨가되어 일종의 종합적 원시예술과 도등(圖騰)숭배 의식을 이루었다.
성인의례는 원래 원시 사회에서 청춘남녀들이 혼인을 하기 위해 성 관계를 거행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이러한 의식이 거행되는 동시에 모종의 부호가 만들어져 결혼한 두 남녀가 이미 성인이 되었음을 증명함으로써 비로소 부락 구성원으로 아이를 기르고 아내와의 성관계 권력을 포함 일체의 권력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부호는 씨족, 부족, 지구단위에 따라 동일하지 않았으며 구별이 있었다. 생식기 표피를 잘라내는 할례, 이를 뽑는 발치(발아), 이마에 먹으로 그려넣는 조제, 얼굴에 그림을 그려넣는 회면, 문신, 이를 염색하는 염치, 유두(梳頭), 가관(加冠), 가병(可 :비녀올리기) 등 모두는 모두 성인의례를 표시하는 부호라는데 의의가 있다.

고고학적 술어로 이러한 시대를 구분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5500∼6000년 사이의 송택문화(崧澤文化)는 돌로 무기를 삼은 시기의 문화유적지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4000∼5500년 사이의 양저문화(良渚文化)는 옥으로 무기를 삼은 시기의 문화유적지이며, 지금으로부터 3000∼4000년 사이의 마교문화(馬橋文化)는 청동기로 무기를 만들던 시기의 문화 유적지이다.

일찍이 한국 최고의 학승 탄허 스님은 「천부경」이 만들어진 시기가 중국의 요순시대와 동일한 시대이기 때문에  '천부경'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하도'에 의한 '복희 8괘'가 나왔으며, 그 뒤 3 천 년이 지나서 '낙서(洛書)'에 의한 '문왕 8괘'인 주역(周易)이 만들어진 것이라 밝힌 바 있다.

뿐 만 아니라 「환단고기」를 보면 "요 임금이 단군으로부터 역관(曆官)을 모셔다가 음력을 만들었다"고 하여 요(堯)가 단군 조선의 분치 제후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은 천부경이 동이 9족인 고 아시아족이 황하문명인 은허문명을 이루고 살던 당시 쓰여졌다는 말이다. 중국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하북, 산동 등지의 동이족이 홍산 문화의 주인공으로 있고 회하의 빈기 지방에 묘계 동이족이 굳건한 뿌리를 내리던 즈음 동이 제 족의 가장 큰 동아리 주류는 단연 환웅신시개천에서 시작된 단군 조선에 있었다.

그리하여 은, 주 가 단군조에 조공을 바치고 은의 말왕 주(紂)가 구원을 요청해 도와주었다가 개전의 가능성이 없자 그만 둔 것도 바로 단군조였다.(외교사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골 빈 학자들이 사마천에 의해 왜곡된 중국의 사서만을 불변의 성전으로 맹신해 끝간데 없이 헛소리를 해대니까 당대 최고의 학승 탄허 스님은 다음같이 질타했다.

" 물론 중국의 황실 위주로 엮은 모든 역사책들은 한결같이 '요 임금'이 먼저인 것처럼 쓰여있고, 여기에 부화뇌동해서 또한 많은 고서 문헌에도 '고조선의 단군'이 한참 뒤인 것처럼 말하고도 있지요.

그러나 천지의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제후국들의 역사책에는 다같이 '고조선'의 시기상의 우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실제로 엄밀하게 고증해 본다면 본래 중원을 점령하고 살던 아홉 민족들, 즉 '9 이족'은 우리와 다 같은 동이족이 틀림없습니다."  
  
음양오행사상이 태호 복희에서 나오고 간지사상이 이미 은나라 갑골문에 쓰이고 있다는 주장이 문서로 다 나와 있는 세상이다. 곽말약(郭沫若)의 <갑골문자연구>나 낙빈기의 금고신문, 정연종의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넥서스 刊, <환단고기>만 보아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 같은 도가사서를 검증 안된 책이라 매도하는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는 자에게 필자는 '대저 우물 안의 고기와는 큰 것을 말할 수 없으니 장애(障隘)에 구애받기 때문이요, 여름의 벌레와는 추위를 말할 수 없으니 여름철에만 살기 때문이요, 도(道)의 한 굽이만 아는 사람과는 지대한 도를 이야기 할 수 없으니 세속에 구애되고 교훈에만 묶였기 때문'이라는 <회남자>의 말을 상기시켜 주는 바이며 잠시 뒤에 적절한 비유 하나를 해주겠다.

필자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환단고기>에 대한 일본인의 각주 붙인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지 그리고 국내본 이라도 완독해 본적이 있는지 <단군세기>나 <규원사화>를 대비해 꼼꼼히 한번 정도라도 읽어 본적이 있으면도 시비를 거는 것인지 반문하겠다.

갑골학의 아버지라는 동작빈(董作賓)도 갑골문이 중화족 것이라는 단정을 내린 바 없다. 사마천도 정사로 인정 안 한 '은나라'의 조직적인 문자체계가 중국인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공자 자신도 이구야은인야(而丘也殷人也)라 해서 나 공자는 95%가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이라 뿌리를 밝혔듯이 은나라는 동이족의 국가였고 은나라 문자인 갑골문은 당연히 우리 문자가 아니겠는가.

인류최초의 문자인 녹도문에 대해서는 많은 사서에 보이고 있으니 새삼 거론하고 싶지도 않지만 천부경과 관련해 최치원이 해석한 바 있어 지인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수많은 동양고서를 통해 음으로 양으로 많이 접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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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문화 참고자료

작성자 : 탈아입구  

중국문명은 식인문명  

중국의 식인문화   백과사전 참조 :  중국

얼핏 중국 문명하면, 찬란하고, 발달된 문명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난 얼마 전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냈다. 그 찬란하고 문명이 발달했던 중국에서는 근대까지 식인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타잔'이라는 영화나 여러 모험가들의 오지 모험기를 보고 들으면서 미개한 야만족들은 식인 풍습을 가졌던 종족들이 많았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중국같은 문명국에서도 식인 풍습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건 그들은 인육을 장에서 내다 팔 정도이며, 아무럼 거리낌없이 인육을 즐겼던 것이었다. 중국 은나라 때는 해라는 끔찍한 형벌이 있었다고 한다. 죄수의 살점을 도려내어 다른 죄수에게 먹이는 형벌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도 그런 형벌을 당했다고 한다(얼마전 TV에서 방영된 '공자전'이라는 만화에서도 나온 바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자로가 해가 되어, 자신의 밥상에 올라오자 크나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젓갈을 모조리 엎어버렸다고 한다( 해라는 음식은 인육으로 만든 일종의 젓갈 종류이다). 수호지(이문열氏가 번역한 10권짜리 수호지)에서도 중국의 식인 풍습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1권 끝 부분에 가면 한지흘률이란 별호를 가진 양산박의 주귀란 자가 자기들 양산박의 법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숨어 있다가 부자가 오면 뛰쳐나와 잡아 재산을 빼앗고 그 살은 고기로 먹고 기름은 등잔불을 밝히는 데 씁니다."란 구절이 나온다. 즉, 의적이란 양산박 무리들은 사실은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고 그 고기를 먹는 극악 무도한 악인들이란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송강의 아우인 흑선풍 이규는 사람을 죽이고 나서 그 인육을 먹었다. 나중에는 너무 많이 인육을 먹어서인지 눈알이 붉게 충혈되었다고 한다. 무송이 유배가는 과정에서 들른 주막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죽여 그 고기로 만두를 해서 파는 끔찍한 주점이었다(그런걸 흑점이라고 한다. 최근에 중국 정부에서 폐지 하기까지 그런 곳이 많았다고 한다).

또 동양이 서양보다 우수한 99가지 이유 라는 책에 이런 고사가 있다. 나이든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착한 며느리가 살았는데, 때마침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는 일이 생겼다. 그때 며느리는 시부모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는 말을 듣고, 놀란 나머지 친정으로 도망을 친다. 그러자 친정 아버지는 "아니. 누구 딸을 마음대로 잡아먹어!" 라고 분개했다. 하지만 그 딸을 잡아먹은 건 친정 아버지였다(참고로 중국의 경우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상당히 무관심하다고 한다. 딸을 시집보 내는게 아니라 돈 받고 파는 것이다. 중국의 여인이 전족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사타구니의 근육이 발달해 성교시 남성에게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비싼 값에 딸을 팔려고 하는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 때는 식인 문화의 절정기였다. 장에서는 인육을 팔았고(두발 달린 양고기라 불리우며, 팔렸고, 인육이 너무 많이 돌아 다른 고기의 값이 폭락할 정도였다고 한다)철경록, 조야첨재에 나오는 친구를 해로 만들어 먹은 설진, 첩을 삶아먹은 고찬, 병중에 자기 노비의 고기를 먹은 독고장 등이 모두 측천무후 시기의 인물들이었다.

황소의 난 때는 인육을 가공하는 기계를 끌고 다녔고, 절도사의 군대는 마을을 종종 습격해 절도사의 군대가 휩쓴 곳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명나라 말기의 명장 원숭환 장군은 청나라 ?조의 계략으로 처형당한 뒤 군중들이 몰려 와 그 살점을 발라가는 바람에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려 온 사람들은 그 뼈밖에 수거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자치통감 '당기'편에 보면 악질관리였던 내준신이 식인형을 당했다고 하는데 민중 들이 다투어 내준신의 고기를 산채로 잘라 먹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동이 났다. 눈 알을 도려내고 안면의 가죽을 벗겼으며 배를 찢고 심장을 끌어내니 마침내 진흙 같은 찌꺼기만 남았다 라고 전해진다. 참으로 끔찍한 사실이 아닐수 없다. 그밖에 인육은 납취, 인신매매 등으로 공급이 되었다고 한다. 또 죄수들을 인육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당시 상황으로봐서 상당히 불평등하며, 억울하게 인육이 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여자의 경우 외모가 아름다우면 기루로 팔려가지만, 얼굴이 변변치 못하고, 일을 할만 큼 튼튼하지 못하면, 인육이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으나 생략하겠다. 이런 야만적인 중국의 식인 문화는 문화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중국의 식인문화는 5천년을 관통하며 지속되고 있고 이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왜 중국인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모자식간에서 배신을 하는가? 왜 중국인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가? 왜 중국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주의가 발달했는가 등등.. 이 모든 것이 식인문화와 관련이 깊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인문화로 인한 폐해와 중국인들의 사고에 미친 악영향을 노신은 광인일기를 써서 정면으로 비판했죠. 중국사람이 아닌 외국인이 중국의 식인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를 한 사람들은 바로 일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식인문화 연구를 통해 중국인의 특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대중국 전략을 짜는데 기본지식으로 활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옆나라에 살면서도 중국의 식인문화가 존재했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것이 중국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가 아닐까요?

중국의 식인문화는 미개종족의 식인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극심한 기아와 원수에 대한 복수로서의 식인문화라면 타국에도 그 예가 있고 바로 우리민족에게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임진왜란 당시 권율장군과 정기룡 장군은 왜군의 생간을 내어 씹어 먹는 것으로 유명했지요. 한데 중국의 식인문화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역사와 정치,문화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왜 중국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부모자식간에도 안믿는지.. 식인문화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예를 외치면서도 같은 입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의 심리상태토 이해가 가실 겁니다. 중국의 식인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원을 둘러싼 격한 쟁투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과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되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 점과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잦은 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낙후로 인한 식량 부족 등이 한대 맞물리면서 확산되었다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민중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 등은 "잡아 먹히는 인육"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 것도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와 인의를 강조하는 유교도 이에 한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왜냐면, 공자 역시 정당한 복수를 칭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왜 유교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식인문화와 관련 깊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 중에 하나가 "만일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은 그만큼 식인문화가 널리퍼져 있었고 모든 중국인이 사람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분위기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예"와 "도덕"이 강조 되어질수 밖에 없었고 그런 사회분위기 하에서 유교가 발달 했습니다.

1)중국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문화의 전파는 그 족적이 일치한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어 식인문화는 중국문화의 전파에 따라 남하하여 회화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으로 파급되어 집니다. 그 파급경로는 중국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즉 중국인이 많이 이주하면 인구가 급증하고 과잉개발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어져 기근이 발생하고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 부터 흥평원년에 이르는 400년 도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명의 시작인 황하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 황하일대에서도 발생하고 강남, 광동, 복건성에서 식인현상이 나타는 것은 중국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가 됩니다.
2)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한다. 식인현상은 대부분 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해서 발생합니다.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 과밀 개발지역에서 출현합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 등의 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정치환경변화와의 인과관계가 있다. 노신은 고대 중국국가 성립 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 자멸해 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 것입니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합니다.

# 중국 정사에 나타난 식인의 시초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 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 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 중국의 식인풍습(퍼온글)

식인풍습.

영화 <신장개업>을 보면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아방궁이라는 ‘중국집’은 자장면 맛이 일품이다. 그 원인은? 경쟁업체에서 추적하여 알아보니 인육, 즉 사람고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집’으로 불리는 중화요리 식당은 음식 맛이 좋을 때 흔히 ‘인육을 쓴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인들은 청조 말까지 인육을 시장에서 거래했고,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직후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었다!

공자도 인육을 즐겨 먹었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 ,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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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풍습은 5천여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행해졌습니다. 불과 얼마전 홍위병이 날뛰던 시기에도 중국전역에 광범위하게 식인풍습이 실존했으며 신용문객잔으로 대표되는 흑점이 존재했던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나이 30-40대에 속하는 층 일부는 그당시에 태어났을테고 그런 사회분위기 및 오랜전통이 그들 사고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하고 나름대로 분석한 것인데요. 광인일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과대망상증은 노신이 정신병자를 묘사한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실제상황을 그대로 전하려했다는 점을 상기하시면 이해가 쉬우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주인공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살해하여 잡아먹으려한다는 피해망상증환자로 나옵니다.) 노신이 아큐근성과 식인풍습이 중국을 망치는 2대악으로 보고 이것을 근절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를 짐작할수 있겠습니다.

중국인의 왜 남을 믿지 못하는가? 왜 돈을 중시하는가? 왜 먹는것에 집착하는가 왜 돈앞에선 적전분열하는가? 왜 눈앞에서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도 여러사람이 주변에 삥둘러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조치를 취하지 않는 그 특유의 무관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왜 중국의 대가족제도는 3대뿐아니라 주변 친인척이 한집에서 모여사는가? 왜 부모자식간에도 못믿는가? 그 엄청난 인내심의 근거는 무엇인가? 중국계 기업의 조직문화는 왜 친인척위주인가(그래서 중국계기업의 수명은 다른나라 기업에 비해 짧습니다.) 등등의 문제 저변엔 식인풍습으로 인한 중국인이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큰 작용을 했다라고 봅니다. (노신은 중국인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부연설명이 없어서 이해가 잘되실지 모르지만 짧게 짧게 몇가지만 대충 추려말씀드리자면 오랜기간의 식인풍습은 노신의 말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만들고 신의라는것 자체를 없에 버렷습니다. 중국인들이 신의를 말할때면 그들이 가장 위기에 몰렸을때입니다. 그때만 예나 도덕 신의등이 나옵니다. 식인풍습 즉 약육강식의 단순한 논리는 그들의 특징적인 속성..즉 강자앞에선 토끼가 되고 약자 앞에선 무서운 맹수가 되어버리는..을 잘 설명해주는 근거가 아닐까요? 일단 전쟁, 기근으로 식인풍습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면 잡아먹히는 인간의 종류와 순서에 일정한 법칙이 있었습니다. 일단 유괴하기 쉬운 어린이를 시작으로 여행자, 독신자 및 독거노인등으로 순서가 옮겨갑니다.

나중엔 비교적 소규모의 가족단위를 이루는..즉 처치하기 쉬운 가정을 다음차례가 되고 비슷한 규모의 가족단위간에는 관에 줄이있어 파벌에 속한자가 속한 가정이 그렇지 못한 가정을 잡아먹고.. 맨 마지막 단계에 가면 부모가 자식을.. 남편이 아내를.. 형이 동생을 잡아먹었습니다. 중국 특유의 대가족제도는 제가 보기엔 결국 식인풍습으로 부터 자기자신과 가족을 지켜내려는 눈물겨운 제도이며 여러명이 뭉쳐서 숫적우위를 바탕으로 잡아먹힐 확률을 낮추고 생존확률을 높이려는데 주목적이 있다는것입니다. 잡아먹히는 순서상 쪽수가 많은 가정이 맨 나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인내력에 대해 살펴보면..그들의 인내력을 임어당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어당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 삼대뿐아니라 외삼촌가족 숙부가족 고모가족 등등 그 많은 수의 가족이 한 가옥내에 살면서 여러사람과 부딛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참아내면서 그들의 인내력이 성장했다고 말을하였습니다. 즉 식인풍습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제도를 만들어내고 대가족제도는 구성원에게 매우큰 인내를 강요했습니다. 식인풍습이 발생하게 된 명분은 제가 말하대로 고대중국부터 형벌의 하나로 성문법화 된것 이외에 중국 특유의 황제제도, 식인의 미화, 등이 있었겠지만 가장 큰 직접원인은 식량부족이었습니다. 그당시 식량이란것은 지금의 식량이란 가치나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즉..식량=목숨이란 공식이 성립하였을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현대에 들어서 농업기술이 발달하고난 이후에 그 당시의 식량과 현재의 식량과는 다른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당시의 식량과 동일한 가치를 갖는것을 현대에서 찾자면 그건 바로 "돈"이 아닐까요?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은 날때부터 장사꾼이라 돈을 밝힌다라고 합니다만 저는 그들이 "돈때문에 장사꾼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오랜 전통의 식인풍습은 그들로 하여금 절박한 생존본능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그 본능은 대대로 유전되었으며 세대가 지날수록 더욱더 강력해졌을것입니다. 불과 30-40여년전까지 홍위병이 날뛰던 문화혁명기에 농촌이 붕괴되자 여기저기서 서로 잡아먹는 식인풍습이 존재했던 중국이라면 그 본성과 본능은 지금 세대의 주축을 이루는 30-40대의 핏속에 생생히 살아있을것이고 세상이 바뀌어 식량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거 그들이 서로 잡아먹게 만들었던 그 "식량"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돈"에 그토록 무섭게 집착하는 이유를 식인풍습과 연계시킨다면 너무 무리한 확대해석일까요?

식인순서의 맨마지막은 부모자식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잡아먹는 순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과거 식인풍습이 난무하던 시대의 식량과 같은 의미를 갖는 "돈"앞에서 부모자식간, 형제간, 부부간에 서로 믿지 않는 그들의 사고가 전 이해가 아주 잘되는데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중국인은 일제침략과 내전 그리고 문화혁명등의 혼란기를 겪어서 그렇게 서로 믿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분들이 있습니다.한가지 묻죠.. 우리나라는 일제침략이 없었나요? 중국은 절반만 먹혔지만 우리는 아예 35년동안 수탈을 당했습니다. 바로 이어 동족상잔의 비극 6.25사변이 터졌고 또 그이후 4.19... 5.16...장기간의 군사파쇼독재 등등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민족은 그들과 다른가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들이 그지경까지 된것은 우리가 겪은것과는 분명히 강도나 내용이 다른 뭔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제가 생각한바가 유치할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가지 중국인의 속성을 식인문화와 관련지어 나름대로 분석해낸바를 간단히 정리하여 짧게 올렸습니다. 일단 그다지 학문적이지못하고 자의적인 해석일수 있으며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것을 설명하려는데 무리가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식인풍습 한가지로 모든것을 해석하려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어령님이 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란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겁니다. 과거 일본이 잘나가던 시절에 많은 서구인들은 일본인들을 매우 궁금해했고 나름대로 연구하여 국화와 칼등의 저서를 통해 접근하려 했지만 모두다 그들의 속성을 설명하는데는 분명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어령씨는 일본인의 사고, 문화, 언어습관, 조직의 특징등 모든것을 "무엇이든 축소하여 간단 명료화"시키는 단 한가지 명제를 가지고 그것들을 설명했습니다. 그책을 읽은 서구인들은 경탄을 마지 않았고 일본지식인들도 경탄을 금치 못했던걸로 기억합니다. 한 민족의 문화와 사고를 그토록 예리하게 판단한것이 단 한가지 명제였다는데 무척 놀랐고 그 당사자가 일본인이 아닌 외국인이였다는 사실에 또한번 놀랐고 일부 일본 지식인은 "무섭다"라는 표현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책을 중학교 2학년때 읽었으며 강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을 이해할수 없다고 합니다. 과거 서구인,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보고 했던 말과 같죠? 도저히 이해할수 없다..제가 식인문화를 중국인을 파악하는데 사용한 "단일명제"로 이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식인풍습은 중국에서 5천년간 합법적으로 존재했고 그 대상은 황제부터 일반 민초 백성까지 였으며 노신이 그토록 박멸하고 싶어 혼신의 힘을다해 책을 썼을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 아무런 저항감없이 널리 퍼져 사람을 "즐겨"먹는것이 중국인들에겐 아무런 흥미거리조차 되지 못했다는것을 상기 하면 이는 분명코 간단히 보아 넘길수 없는 범상치 않는 중국만이 갖는 독특한 문화이며 이는 이어령씨가 일본인들을 분석할때 사용한 일본인만이 갖는 독특한 축소지향의 풍습과 같은 정도의 중요성과 가치를 갖는 중국민족 특유의 풍속이라 생각되어지고 따라서 축소지향의 풍습과 식인풍습은 같은 용도로 사용되어 질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러 책을 읽으며 노신과 오유 그리고 황문웅등이 말한바 "식인풍습은 중국 5천년사를 관통하며 이를 모르고 중국인에 대해 말한다는것은 가소로운 일이다" "중국역사는 식인의 역사다" 라는 말은 저로 하여금 더 큰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의 사고를 이해하는데는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더 간단명료한 방법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 지식이 짧고 경험이 없어 더욱더 학술적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할수 없었던점은 유감입니다. 하지만 중국을 나름대로 분석하기 시작한지 몇년 안되는 기간에 나름대로 이정도로 판단할수 있는 사고를 갖었다는데는 나름대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식인문화와 관련해 보신탕에 대한 기사를 보면 참고로 다음과 같다.


한국사람 개고기 먹는 것은 문명의 자랑(시평)


한국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것은 인류 문명사를 살펴보면 당연하며 자랑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기사는 동아일보 2002.12.4일자 기사이다. 개의 원산지는 바로 우리 동이 민족이 살던 동아시아이며 15000년 전 부터 가축화되기 시작했다는 기사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고대로 부터 개를 애완용으로 보질 않고 야생 동물로 보고 식육용 가운데 가장 단백질이 많은 동물로 보았기 때문에 다른 야생동물들과 같이 잡아 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역사가 길지 않은 서양사람들은 개가 애완용일 된 이후부터 즉 가축에서 애완용이 된 이후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개고기 먹는 것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식용 개를 狗(구)라 하고 인격화 된 고귀한 개를 犬(견)이라 하여 엄연히 구별하고 있으며 단군신화에서도 환웅과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벼슬 자리 5개 가운데 개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중국인들 마저 개고기를 안 먹는 것을 보면 우리 문명보다 훨씬 뒤진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서양인들이 개고기 먹는 것 운운하는 것은 이 번 연구 결과로 증명되었다. 미트라콘드리아는 유전인자 속에서 생명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어서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최근 '아프리카 이브' 즉 세계 최초 여성은 아프리칸이란 사실도 이를 통해 증명되었다. 서양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물론 한국인들의 개고기 먹는 것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연구 결과를 우리 문명 이해 수단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개고기를 함부로 먹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서양이 문화 편견을 가지고 자기들 잣대로 다른 문화를 잴려고 하는 제국주의적 망상은 버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기사) 2002.12.4
“개의 원산지는 동아시아, 1만5000년전부터 가축화”

지구의 모든 개는 동아시아가 원산지이며, 1만5000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연구가 나왔다.

스웨덴 왕립기술연구소 피터 사볼라이넨 박사와 중국과학원 징 류 박사는 “654종의 개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개의 조상은 1만5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살았다”고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11월 22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이 개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동아시아의 개들이 유전적으로 가장 다양했으며 이곳의 개에서만 발견되는 DNA 조각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동아시아에 개의 조상이 살았고, 이후 유럽, 아메리카로 이동했다는 것을 뜻한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또 미국과 스웨덴 연구팀의 유전자 조사 결과 약 1만2000∼1만4000년 전 인류가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베링 해협을 건너면서 개를 함께 데려간 것으로 나타났다.

개는 처음에 인간에게서 먹이를 얻어먹으며 친해지다가 동물 중 처음으로 인간과 함께 살게 됐다. 이후 집 지키기, 양 몰기, 사냥, 운반 등에 사용되면서 인간과 가장 친한 동물이 된 것으로 과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이번 연구가 확실하지 않다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어 앞으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한편 미국 하버드대 브라이언 헤어 박사는 개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진 이유는 사람의 신호를 잘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사이언스’지에 함께 발표했다. 연구팀은 개, 강아지, 늑대, 침팬지를 대상으로 먹이가 든 상자와 빈 상자를 놓고 사람이 눈짓이나 손짓 등 갖가지 신호를 보낸 결과 개와 강아지가 먹이가 든 상자를 더 잘 구별했다고 밝혔다.


김상연 동아사이언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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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해보면.

신선한 태반이 있으면 얼리지 않는게 좋다. 리 박사가 우리에게 말하길 외지에서 직장을 구하러 온 두부부가 있는데 그들은 임신8개월된 여아가 있는데 그 태반을 먹고 싶으면 빨리 낳게 해서 먹을수도 있다.기자는 그말에 반신반의해서 그말를 믿지 않았는데 몇일이 지나서 왕가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받았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몇사람이 먹을려 한다는 소리를...그들은 기자를 데리고 타이산에 있는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더니 그곳 주방장이 희귀한 것들를 구경 시켜 주었다.

도마위에 있는고양이보다 작은 5개월된 아이가 있었는데 주방장이 말하길 너무 작아서 미안 하다고 말했다.주방장의 말에 의하면 시골에서 친구가 구해 왔는데 가격은 태반의 크기 개월수에 따라 틀린데 가격은 아직 말 하지 않았다고 했다. 왕가가 말하길 한 그릇에 3500원(인민폐)라고 하면서 기타에 대해서는 상관 안한다고 했다. 기자가 그들이 말하는 중에서 유산 됐거나 죽은 태아를 가져 올때는 산파에게 몇백원씩 주고 가져 오는데 막 출산한 아이를 가져 올때는 양육 한다고 2500원 주고 가져 온다고 했다.그런데 가져오는 도중에 생사의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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