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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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72. 20여년 전에 민족주의란 타이틀아래 제목없이 쓴 원고1



*다음은 20여년 전에 써 둔 민족주의란 타이틀아래 제목없이 쓴 원고를 몇군데 손 본 것임을 밝힌다.


중국하남 박물원에 소개된 “동이”-> 하남성 개봉시에 위치함(1927년 개원)
하남박물원(河南博物院)
夷人是中民族先民的主干部分 동이인(東夷人)은 중화민족 조상의 주요한 줄기부분(主幹)이다.

在《夷人及其文化》〈《社科刊》2001年第2期〉一文中???夷文化
范的存遍布燕山南北,包括阜新海文化,沈新文化,山大汶口文化,河姆渡文化
以及其后的、隆、牛河梁及殷商文化,夷文化以,不是一的文化系,
而是有以生活在地先民的泛,以祖,繁衍以各子的北方的
夷先民,都是在燕山山夷文化圈中展起的。伏羲到夏商二代,起主作用的也是夷文化。
夷族人明了羽毛弓箭,造了文字,制作器冶,制造舟、,展治水。
中民族文化的展和推,起到了和定性作用,夏文明是后裔融合而后共同造的。

[번역]장발영(張發潁)의 저서 <봉황토템 동이인 및 그 문화의 공헌>- <시회과학집간>2001년 2기- 에서 동이문화의 유적분포는
- 연산(燕山)의 남북과 료녕(遼寧)의 부신사해문화(阜新海文化)를 포함해서 심양(沈陽)의 신락문화(新樂文化),  산동의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와 그 후의 - 조보구(趙寶溝), 흥륭와(興隆?), 우하량(牛河梁) 및  은상문화(殷商文化)까지
동이문화는 봉황(鳳凰)을 토템으로 하였다. 통일된 문화체계는 아니지만 문헌에 기록된 이후의 생활은 이 지구(地區)의 조상들의 범칭(광범위한 동이문화)이다. 봉황을 모(母)토템으로 삼고 각종 새들을 자(子)토템으로 하는 북방 봉황토템 동이의 조상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산산맥(燕山山脈)의 동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복희(伏羲)에서 하상(夏商) 2대까지 동이문화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온 것이다.동이족 사람들은 - 깃털달린 활과 화살을 발명했으며,  문자를 창조했으며, 청동기를 제작하고, 철을 단련했으며,  배(舟)와 수레(車)를 만들었고,  농업을 발전시키고 치수(治水)를 하였다.동이족이 중화민족의 발전과 진보를 위하여 주된 역할과 결정적 작용을 하여 화하문명(華夏文明)은 용봉(龍鳳)이 융합되어(화하족의 용과 동이족의 봉문화가 융합되어)공동으로 창조된 것이다.


백암 박은식은 「몽배금태조」에서 넋빠진 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타한 바 있는 데 이 말이 어찌 역사회복이 안 된 지금에 그대로 적용이 안되겠는가.

-조선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 여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의 조선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처음 배우는 교과가 이러한 즉, 어릴 때에 벌써 머리 속에 노예정신이 깊게 뿌리 박혀 평생의 학문이 모두 노예의 학문이고 평생사상이 모두 노예의 사상이다. 이와 같이 비열한 사회에 처하여 소위 영웅자가 누구이며 소위 유현자(儒賢者)가 누구이며 소위 충신자가 누구이며 소위 공신자가 누구이며 소위 명류(名流)자가 누구인가? 필경 노예의 지위일 것이다.-

한편 얼의 역사를 제창한 위당 정인보는 얼빠진 조선 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5천 년간 조선의 얼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렵다 하여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극히 외람된 줄을 알면서도 5 천년 역사를 오가면서 그 척추가 무엇인지 찾고 우리 역사가 왜 비바람을 맞았는가 그 까닭을 알아보고 왜 이 나라가 성하고 쇠했는가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한다. 언젠가 진(眞)은 살아남고 가(假)는 사라지는 법이니 행여나 한사람이라도 포기하지 말지어다. 일체의 책임이 나 한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통감해야 한다.

누구나 어릿어릿하는 사람을 보면 얼빠졌다고 한다.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을 보면 얼 하나 없다고 한다. 이렇게 알기 쉬운 것이 얼이다. 알기만 쉬운 것이 아니라 얼은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다 있는 그 얼을 우리 조선 사람들이 누구나 지니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되찾는 일이 급선무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시 누구나 얼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서 량지의 「중국사전사화」와 임 혜상의 「중국민족사」는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규원사화」, 「부도지」 등의 민족사서에서 보이고 있는 대륙사관을 가장 체계적이고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이론적으로 뒷받침해 주고 아우르는 가장 종합적인 책으로, 한국에는 별반 알려져 있지도 않은 책이며 설혹 요행으로 접했다 해도 반도사관에 붙잡힌 자에게는 자신들의 기존을 학설을 뒤집어엎고 밥줄을 끊는 것이므로 목차만 보고 덮기가 십상인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의 역사학자가 해야 할 일을 정작 지나 학자가 모두 다 이루어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방대하고 체계적이다. 아마 망국의 한을 품고 중원을 헤매며 기발한 사서를 만나지 못함을 아쉬워했던 단재가 만일 이 책을 보았다면, 이를 한 차원 더 업그레이드시켜 한국 고대사 연구의 신기원을 여는 새로운 사자후를 토(吐)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대륙 전체가 우리 동이 족의 역사였음과 사마천이 중화족 황별의 시조로 내세운 황제헌원이 웅족인 유웅씨 족이었다가 서이(西夷)화하여 마침내 서하(西夏)족해 나아간 과정을 포함해 그간 한국학자들이 무시해 온 수많은 고고학적 문헌사적 발자취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십 수 년 전에(입력시 기준으로 년대 바꿈) 한번은 서울대 역사학과 학생들이 「환단고기」 필사본을 들고 김 철준과 함께 이 병도 학맥의 제자로 알려진 역사학과 노 태돈 교수를  찾아갔다 한다. 그랬더니  「환단고기」의 표현방법이 후대의 것이라 일언지하에 위작이라 무시했다 한다. 표현방법이 후대의 것이라는 말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제 황국사관의 충견노릇을 확실히 하려면 일본 사학자들이 아시아의 비사라 한 대목을 흘려 들어서야 되겠는가?  「환단고기」는 본래 계 연수라는 사람이 1911년에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 4권의 기존 사서를 하나로 묶어 편찬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서가 다 그렇듯이 필사본을 하나로 묶는 과정에서 다소의 첨삭과 표현의 변용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제자백가서에 대한  다음의 사료적 인식에 대한 예화는 부족하나마 이를 어느 정도 잘 설명해 주리라 생각한다.

-제자백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진짜와 가짜(僞書)를 구별해야 한다. 골동품일수록 가짜가 많다. 가짜를 가지고 평생을 연구해 보아야 얻은 결론은 뻔하지 않겠는가? 중국에서는 변위학(辨僞學)이라 하여 전문적으로 가짜 책을 가려내는 학문이 있는 것도 워낙에 가짜 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이다. 특히 제자백가의 서적을 대상으로 가짜를 구별하는 방법에서 주의할 점은 다음과 같다.

① 책 속에 기록된 어떤 사실을 가지고 진위(眞僞)를 판단하려 해서는 곤란하다. 이를 테면 《관자管子․소칭편小稱篇》에 관자(管子)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이 책을 써? 이건 가짜야' 하고 속단할 수는 없다는 뜻. (그 이유는 아래 있음)
② 책 속에 사용된 용어를 가지고 진위를 판정하려 해서는 곤란하다. 《노자老子》에 편장군偏將軍․상장군上將軍 등의 용어가 나온다고 '이건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관직이므로 《노자》는 전국시대의 책이다'고 속단할 수 없다는 뜻.

물론 위 두가지 사항이 어느 정도는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결정적인 기준으로 삼게되면 실수를 많이 한다는 의미다. 왜 그럴까?

제자백가의 저술이란 후세의 문집(文集)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선진(先秦) 제자백가들은 대체적으로 말해서 스스로 저술을 한 예는 거의 없었다. 제자백가의 학설은 일반적으로 해당분야를 추종하던 제자들이 편집한 것이며, 특히 우리가 현재 보는 제자백가의 서적은 훨씬 후의 추종자들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조(元祖)가 설파했던 주장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도 하고, 또한 후세의 편집자가 해당 학설에 별 조예가 없을 수도 있다. 따라서 비슷한 학설들을 취합하여 서적으로 만들고, 그 학파의 가장 유명한 사람(대개 원조)을 책 제목으로 하여 무슨 무슨 [~子]라 이름 붙이게 된다. 따라서 책 이름이 [~子]라 하면 해당 학파 전체를 지칭한다고 보아야지 특정한 아무개의 학설이라고 단정해서는 곤란하다. 이것은 후세의 문집(文集)과는 성격상 다른 것이다.

이태백집(李太白集)이다 하면 물론 전부 이태백의 작품이다. 두공부집(杜工部集)이다 하면 여기에 실린 작품은 모두 두보(杜甫)의 작품이다. 그러나 제자백가의 서적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뜻. 그러므로 제자백가에 실려있는 내용 중에 그 사람이 죽은 후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아주 오래된 문장 스타일이 있는가 하면 훨씬 후세의 문장 스타일도 혼재되어 있을 수 있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이를 테면 《장자莊子》에 공자가 도척을 만나 변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이 대목을 쓴 작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주장(絶聖棄智)을 공자와 도척을 빌어 설명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우화인 셈이다. 제자백가의 등장인물은 십중 팔구 우화적인 인물이라도 봐도 무방하다. 특히 도가道家 계열과 법가法家 계열에 이런 경향이 대단히 농후하다. 이런 대목을 근거로 역사 이야기를 해서는 당연히 오류를 범하게 된다. 또한 이런 대목을 가지고 《장자莊子》니 《한비자韓非子》가 위서(僞書)라고 단정해서도 곤란하다.제자백가 서적 중의 역사적 사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문장 스타일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옛 사람들이 자신의 학설을 제자에게 전수할 때, 단지 그 학설의 핵심만을 전수하는 경우와 문장까지 전수하는 두 가지 케이스가 있다. 문장까지 전수하는 경우는 그 학설을 기록한 서적이 외우기 좋게 운문으로 되어있거나 혹은 구결(口訣)로 되어 있다.

구결이 뭐야요? 일종의 주문같은 것이지요. 우리가 태양계의 행성을 외우기 좋게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렇게 하지 않았던가요? 그리고 조선시대 왕 이름을 외운답시고... 태종태세문단세... 이러지 않았던가요? 이게 구결이예요.

마치 봉사 점쟁이들이 점술책을 눈감고 제자들에게 전수하듯이 말이다. 이런 경우, 수천년이 지나도 문장의 스타일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학설의 핵심만을 전하는 경우는 이렇지 않다. 내가 여러분에게 강의를 하듯, 이런 저런 뜻이다 하면 여러분들은 이런 저런 뜻이구나 하고 받아들이지 결코 내가 했던 말 한마디 토씨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들이 다시 선생이 되어 제자들을 가르친다고 했을 때 여러분의 말투와 문장 스타일로 가르치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게 되면 학설의 요점이야 그리 심하게 변하지 않겠지만 문장 스타일은 판이하게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자백가의 문장 스타일을 가지고 진위(眞僞)를 판별하려고 해서는 오류를 범하기 쉽상이란 뜻이다. 제자백가는 대개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게 되면, 제자백가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반드시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이라 오해하지 않을 것이며, 내용에 일관성이 떨어진다든가 문장 스타일이 다소 불규칙적이라고 해서 한 마디로 위서(僞書)라 단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제자백가를 보는 관점은 어느 일개인의 학설이라고 보아서는 안되고, 어느 학파의 학설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제자백가를 공부하거나 연구할 때, 사람으로 나누기 보다는 학파로 나누는 것이 맥(脈)을 집는 요령이라고 하겠다.또 한가지 주의할 점은 제자박가의 학문은 당시로서는 일종의 [전가지학專家之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춘추전국 시대에 지금처럼 대학(university)이 여기 저기에 있고, 똑같은 학문을 이 교수 저 교수가 가르쳤던 것이 아니다. 맘만 먹으면 누구나가 학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 시절이 잘 되어있던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학문은 일정한 학문을 관장하는 문하門下(학파學派)에 들어가서 배우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A 대학에 가도 중국문학과 중국어를 배울 수 있고, B 대학을 가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어느 학문을 가르치는 문하門下로 들어가 그 학문만을 죽자 사자 배우는 것이 당연하였고, 또 그것이 일종의 전통이었다. 그래서 전문가의 학문이란 뜻으로 전가지학(專家之學)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전가(專家)란 현대 중국어에서의 의미 '어느 방면에 도통한 전문가'의 뜻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일정한 학문분야를 장악하고 있던 학파(學派)란 의미. 기억하시라. 중국의 모든 학문은 초창기 정부 관할이었다. 학문을 관장하던 관리가 있어, 이 관리와 이 관리를 계승할 사람이 아니면 학문을 할 수가 없었다. 공자도 그런 관리의 한 사람이었다. 즉 학문은 귀족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던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고급 정보는 정부의 정보기관이 쥐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던 것이 세상이 뒤죽박죽 되니까 어제의 귀족이 오늘의 노예가 될 수도 있고, 어제의 관리가 오늘의 평민이 될 수도 있다. 신분이 엉망진창이 되다보니 정부의 손아귀에 있던 학문이 민간에 서서히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선발주자가 공자였다. 중국 최초의 사립학교 교장선생님이 공자다.

그러므로 후세의 경우처럼 각종 학문을 섭렵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묵자(墨子)는 유가(儒家)의 학문을 배우다 맘에 안들어 박차고 나와 노골적으로 묵가(墨家)를 창립했으며(《장자莊子》에 보임)....진상(陳相)은 허행(許行)을 만나 그의 학문에 빠져 그전에 추종했던 진량(陳良)의 학문을 가차없이 버렸던 것이다.(《맹자孟子》에 보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각 학파의 학설에 모두 장단점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각 학파의 장점만을 추려 하나의 학파를 만든 소위 잡가(雜家)도 어엿한 하나의 학파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잡가(雜家)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에는 이런 저런 학파를 겸해서 연구할 수 없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춘추전국 시대야 그러했지만, 후세로 가면 이른바 잡가(雜家)가 쐬고 쐬게 된다. 그만큼 학문이 보편화되었다는 뜻이다. 대중화되었다는 뜻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이렇다.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연구하는 요령은, 첫째, 각 학파 별로 그 학파 학설의 요점이 무엇인가 파악한다. 인물 별로 연구하기 보다 학파 별로 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 공자를 대표로 유가를 연구하고 노자 장자를 도가를 연구하는 따위는 무방. 대개 그 학설을 계승 발전시켰으므로. 둘째, 학설의 요지에 주안점을 두어야지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실존인물 여기거나 기록된 사건을 역사상 실재했던 사실(史實)로 단정해서는 오해다.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 즉 우언이나 우화로 간주한다. 셋째, 옛 학설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바라본다. 지나친 이상주의적 경향이라 비웃을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발휘한다.

위 세 가지를 충실히 행한 다음 그래도 여유가 있다면 다음 문제를 꼭 한 번 생각해 본다. 후세 중국과 동양권, 특히 한국에도 영향을 끼친 바 있는 제자백가의 사상이 오늘날 어떻게 현대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는지..... 이점에 대해서도 한번 정도 생각해 본다.(http://web.hanyang.ac.kr)-

<삼성기>는 신라의 승려인 안 함로와 행적이 확실치 않은 원동중이 쓴 것을 각각 상, 하권으로 구분하여 합친 것으로 환인 천제, 환웅 천왕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서량지가 밝히고 있는 인류의 시원지, 바이칼호로부터 시작해 우리 민족의 시발인 환국시대의  3301년간의 7세 환인으로부터 신시시대의 커발환(倍達) 환웅으로부터 18세 거불단(居弗檀) 환웅까지 1565년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다. 하권엔 <신시 역대기>가 첨부되어 있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에 살았던 행촌(杏村) 선생 이암 문정공(文貞公)이 전한 책으로,  초대 단군 왕검으로부터 47 대 단군 고열가(古列加)까지 2096년 동안 각 단군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주요한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해 놓았다.

<북부여기>는 고려 말의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이 전한 책으로, 상권, 하권, 가섭원 부여기로 구성되어있으며 ,시조 해모수로부터 6세 고무서까지의 204 년과 가섭원 부여 108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태백일사>는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이 전한 책으로, 환국, 신시시대로부터 고려에 이르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즉 여기엔 <삼신오제 본기>, <환국 본기>, <신시 본기>, <삼한관경 본기>, <소도경전 본훈>, <고구려국 본기>, <대진국(발해) 본기>, <고려국 본기>가 포함되어 있으며, <삼한관경 본기>엔 마한세가 상, 하와 번한세가 상, 하가 담겨있다.

엮은이 계 연수는 이 책이 해학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자신이 고쳐가며 바로잡았다고 했으니 만일 표현상의 문제나 잘못이 있다면 위서를 논하기에 앞서 개정하고 고친 엮은이 계 연수의 탓일 것이다. 계 연수는 소도경전 본훈에 실린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낭가(郎家)의 대학이나 중용이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위서시비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먼저 「환단고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배경은 어떠한지 잠시 알아보자.

필자가 「환단고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환단고기」 번역본이 나오기 전인 81년 말부터 83년 초이다. 필자 측의 인물이었던 라 윤준, 김남용 및 몇몇이 한암당 이 유립이라는 재야 사학자와 함께 「환단고기」 필사본의 정체를 알게 되어 필사본을 접한 뒤 5-6명이 강화도로 들락거리며 당시 연탄하나 없이 어렵게 살던 한암당의 집에 연탄을 넣어주는 등 조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당시 회장을 맡고 있었던 전 형배를 비롯한 고려대 학생들로 구성된 이 유립의 “단단학회” 소속 써클 회원들과 알게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979년, 이 유립은 스승 계 연수가 1980년에 「환단고기」란 책을 세상에 공개하라 했다면서 세상에 내어놓는다. 이 책이 공개된 직후는 많은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일본학자 가시마가 천황의 뿌리를 설명하기 위해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에 도입하면서부터 관심을 끌어 한국에 수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책이 현재 이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환단고기」의 위서 시비에 대한 학계의 활발한 학문적 의견개진은 아직 거의 없는 편이고 단지 권위를 빌려 위서라고 주장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비교적 중도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이덕일, 이희근 박사의 공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48, 49쪽 에서 인용해 소개한다.  

-「환단고기」는 서문에 의하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대종교도(大倧敎徒) 계연수(桂宴壽)가 1911년 《삼성기(三聖紀)》 상․하, 《단군세기(檀君世記)》,《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각기 다른 네 종류의 책을 묶어 하나로 만든 다음, 해학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아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한 후 인쇄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편저자인 계 연수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이때 계 연수는 한 간지(干支) 후인 다음 경신년(1980)에 발표하라고 제자 이유립(李裕笠 : 1907~1986)에게 유언했다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환단고기》는 1979년에 수 십 부가 영인되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일본인 가시마 노보루(鹿島昇)가 이 영인본을 일본으로 가져가서 1982년에 일역(日譯)과 원문을 함께 실어 출판했는데, 이 책이 다시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커다란 반향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전하는 《환단고기》는 1982년 판 발문에 의하면, 이유립의 부탁에 따라, 1949년 오형기(吳炯基)가 강화도 마니산에서 정서(正書)한 것을 가지마가 출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 쓴 책이 일본에서 먼저 출판된 후 다시 국내로 역수입되어 반향을 일으킨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출판 경로의 이례성보다 《환단고기》에 담긴 내용인데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는 위서로 규정하여 많은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의 상당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에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자구(子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 고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들이나 옛날에는 알 수 없던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는 청나라 시조 전설과 관련하여 청나라 때에야 사용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들어 후세의 위작이라고 단정짓는 식이다. 이런 예는 적지 않은데 연개소문의 조부의 이름인 '자유(子游)'를 적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자유'가 연개소문의 조부라는 사실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 묘비인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가 발견된 이후에 알려진 사실인데 《환단고기》에 이런 내용이 실린 것은 후세의 위작임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 각혼, 생혼의 성삼품설(聖三品說)이란 용어는 명나라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기독교 교리를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실의》에서 사용한 것인데 《환단고기》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것 등이 지적되고 있다.

사실 《환단고기》는 20세기 이후에야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들을 때때로 사용하고 있는데 <단군세기>에서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문화는 서구의 'culture'라는 개념이 20세기 초 일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으로서 고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이며, 'nation'에 해당하는 '국가(國家)'라는 용어와, '인류(人類)', '전세계(全世界)', '세계만방(世界萬邦)', '남녀평권(男女平權)', '부권(父權)' 등의 용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환단고기》에서는 1915년에 출판된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通史)》 기사를 인용한 것을 생각되는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다. 형(形)이 혼(魂)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런 점들이 《환단고기》를 후세의 위작으로 비판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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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식(朴殷植)은 『한국통사』(1915)「서언(緖言)」에서
대개 나라는 形이고 역사는 신(神)이다. 지금 한국의 형(形)은 허물어졌으나 신(神)만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저술하는 까닭이다. 신(神)이 존속하여 멸하지 않으면 형(形)은 부활할 때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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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세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환단고기》의 내용 전부를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후세에 가필(加筆)되었다는 '한정적' 증거는 될지언정 이 책의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되었다는 '보편적'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환단고기》의 각 권 내용을 검토해 보자. <삼성기>는 원래 안 함로(安含老)가 지은 것과 원 동중(元董仲)이 지은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하는데 계 연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은 안 함로의 저작이었다. 이 가운데 안 함로 저작의 책을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 태천의 진사 백 관묵(白寬黙)에게 얻어 원 동중이 저술한 것을 하편으로 엮어 <삼성기전>을 구성한 것이다. 삼성(三聖)이란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말하는데 <삼성기>는 《세조실록》3년(1457) 5월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1457년 이전에 작성된 책이거나 이 책을 보고 지은 책이란 답이 나온다.

<단군세기>도 고려말 이암(李嵓)이 공민왕12년(1363)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는 47대 2096년에 이르는 단군조선의 임금 이름과 재위기간 및 치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북부여기>는 이암과 같은 시대를 산 범장(范樟)이 지은 것으로, 해모수부터 고주몽까지의 북부여 역사를 다룬 것인데, 여기에는 동부여의 역사를 쓴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가 붙어 있다.

<태백일사>는 이맥(李陌:조선 단종~중종)이 지은 것으로, 이 책은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환국본기(桓國本紀)>, <신시본기(神市本紀)>,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소도경전본훈(蘇途經典本訓)>,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로 구성되어 있다. <삼신오제본기>는 주로 우주 생성, <환국본기>는 환인이 다스렸다는 환국의 역사, <신시본기>는 환웅이 다스렸다는 신시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삼한관경본기>는 진한(진조선), 마한(막조선), 번한(번조선) 가운데 마한과 번한의 역사가 실려 있다.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대진국본기>는 발해, <고려국본기>는 고려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소도경전본훈>은 단군신앙과 관련된 경전, 교리를 다루고 있다.

<태백일사>는 고기류(古記類)를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세조가 8도 관찰사에 명하여 거두어들이게 한 20여종의 비기(秘記) 참서(讖書) 중 <표훈천사(表訓天詞)>, <대변경(大辨經)>,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등이 들어 있는데, 이는 《환단고기》가 조선초까지 전했던 여러 서적들을 참고한 책이라는 점과 선교(仙敎) 계통의 서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성립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선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선교는 최치원이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한 풍류도(風流道)의 계승이라 할 만하다. 최치원은 풍류도가 유불도(儒佛道)의 3교와 결합하여 작용하였다고 할 정도로 유불도보다 상위에 둔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이다. 즉 외래사상인 유교, 불교, 도교보다 먼저 존재했던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사상인 것이다.

선교는 유교 및 불교가 우리 역사의 주류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는데 고려시대에는 도교와 결합하여,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를 수립하기도 한다. 이는 기존의 유교적 역사인식에 대한 불만과 침체된 민족사에 동력을 불러 넣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역사책이 《신지비사(神誌秘詞)》로서,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삼국유사」와 「고려사」등에 단편적으로 인용된 것으로 미루어 단군조선을 다룬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신지비사」나 세조가 수압령(收押令)을 내린 20여 종의 책이름을 보면, 도참서(圖讖書)적인 색채가 강하게 풍기는데 단순한 예언서라기보다는 우리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사대주의에 대한 배척의식이 그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럼 문제가 나온 김에 또 다른 문제서 《규원사화》의 문제는 어떤가. 이 역시 중도적인 입장에서 학계의 입장을 대변한 이덕일, 이희근 박사의 공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의 판정(52~54쪽)을 인용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국내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으니까 한번 보자.

-조선시대에도 이 선교계열에서는 역사서를 저술하는데, 주목해야 할 책은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숙종 원년(1675)에 지었다는《규원사화(揆園史話)》이다. 이 책도 사학계에서는 당시 사용하지 않았던 '문화의 계발'이나 '한글․한자 병용론' 등의 용어와 사상이 기록되어 있어 20세기에 저술된 것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히 후세의 창작품으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규원사화》는 자신의 저술 동기를 밝힌 <서문(序文)>과 내용으로는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와 저자의 인생관, 역사․문화의식, 그리고 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방략을 서술한 <만설(漫設)> 등 다섯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책에 인용된 서적들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진역유기(震域遺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사문록(四聞錄)> 등 고기류와 《삼국사기》, 《고려사》, 《산해경(山海經)》, 《<사기》 등 40여 종류에 이른다. 이런 책들은 세조가 수압을 명령한 책이름에 나오거나 17세기에 저술된 <청학집(靑鶴集)>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숙종 때까지는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조판기>는 환웅이 천지를 창조하여 내려오는 과정을 그린 신화이지만, <태시기>와 <단군기>는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고증한 역사적 사실을 저술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단군기> 가운데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인용하여,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을 비롯하여 고려에 망명한 자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공후(公侯)․경상(卿相)과 강개읍혈(慷慨泣血)한 선비가 많았다"는 기사인데 이는 발해가 멸망하고 고려에 망명한 발해유민이 상당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기록이다.

선교의 역사서는 한말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의 형성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나라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때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현재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 민족의 유구성과 문화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담고 있는 선교의 역사서들은 유교와 불교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민족의 장래에 심각한 우려를 반영하였는데, 이러한 선교의 국사인식은 1909년 나철(羅喆)이 창설한 대종교로 계승된다.

사실상 1910년대에 한국사 서술을 주도한 것은 만주와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대종교였다. 대종교는 우리 고유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민족을 보존하고 독립시키려던 종교단체였는데, 역사교육을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고취가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라고 믿고 많은 역사서를 서술했다.

대종교도 계연수가 저술한 《환단고기》도 이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편찬된 책이다. 《환단고기》는 앞서 말했듯이 서문에서 1911년에 <<삼성기>> 등 네 권의 책을 하나로 묶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그간 학계의 비판은 과도한 것이란 비난을 받을 소지가 많다. 20세기에 편집했음을 서문에서 스스로 밝힌 책에 '20세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1910년대 이후 국사서 저술을 주도한 이상룡(李相龍), 박은식(朴殷植), 김교헌(金敎獻) 등이 모두 대종교도였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후대의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환단고기》를 후세에 조작된 책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룡의 《서사록(西徙錄)》과 박은식의 《동명성왕실기》가 1911년에 저술되었다고 해서 후세의 '위작'이라고 비판받지는 않는 것이 정당하다면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 이상룡, 박은식, 신채호가 그랬던 것처럼 계연수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의 하나로 선교 계열의 고서류를 참고해 《환단고기》를 저술한 것이다.

계연수는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고서류 가운데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을 수집하여 《환단고기》를 편찬했을 것이다. 이런 고서류들이 그때까지 완전한 상태로 전해졌으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무리이다.

예를 들어 1363년에 편찬된 <단군세기>는 《환단고기》가 편집되는 1911년까지 5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전란 등의 국난을 겪으면서 불탔거나 없어져 일부만 전해진 것을 여러 구전 등을 참고하여 재편집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11년 당시에 사용했던 용어들이 첨삭된 것이지 계연수가 의도적으로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또한 계연수는 이상룡이나 박은식, 김교헌이 그랬던 것처럼 《환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이상룡, 김교헌 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관에 따라 고서류를 참고하여 고대사를 서술한 것처럼 하면 되지,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교헌 등이 지은 고대사는 《환단고기》와 그 기본 논지가 일치하고 있음에도 위서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간 《환단고기》에 가해진 비난이 과도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환단고기》의 신봉, 비판 여부가 마치 전문연구가와 재야사학자를 가르는 기준으로 적용되는 듯한 현재의 폐쇄적, 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학계의 연구풍토를 개방적인 것으로 바꾸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가시마 노보루는 환단고기를 100% 인정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황제의 진(秦)국이 멸망한 후 장성(長成)과 남월(南越)에서 기씨(箕氏) 조선에 망명한 진씨는 낙랑군 제해(提奚)에서 반도남단의 진(辰:秦)한(韓)으로 도망친 후, 2회에 걸쳐 일본열도로 이동하여 동탁(銅鐸) 국가와 고분국가를 만들어 기내(畿內) 야마또(大和) 분지를 지배했다.

*시황제의 진(秦)국은 실은 박트리아의 대진국(大秦國)의 식민지로 시황제는 그레꼬 박트리아 왕 디오도토스이다. 「궁하문서(宮下文書)」의 계도(系圖)에 의하면 그 핏줄은 남조(南朝) 유다의 자손이 되고 또 시황제가 매장해 죽인 유자(儒者)도 유대인으로 유다인 랍비였다. 진(秦)이 위(魏)를 쳐부쉈기 때문에, 제철기지였던 남양(南陽:宛)의 철부족의 서씨(徐氏)는 요하(遼河) 유역으로 도망가 예(濊)국을 만들고, 후에 부여(夫餘)에 합쳤지만 그 왕은 페니키아 계의 니기하야히 왕가이고, 그 수군(水軍)은 <북왜(北倭)>였다. 진(秦)은 왕가의 계도(系圖) 은폐를 목적으로(만일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동이족의 계도를 은폐하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안원전) 분서(焚書)를 행하고 결국 산와(山窩:와는 움집, 여기서는 종족명) 출신자의 풍신수길은 자분(自分)의 계도(系圖)를 전한 북산성(北山城)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모두 죽여 출신을 은폐했다고 한다. 또한, 히틀러의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도 유대계라는 스스로의 출신을 말살하기 위한 수속 수준이었다고 한다. 역사가 위조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서(焚書)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종족학살)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허구를 바로잡고,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일한(日韓) 양 민족의 창세기(創世記)라고 할 수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여기 공개되는 것의 의의는 실로 크다.

*「원경(元經)」진(晋) 태원 7년의 조는 ‘왕통(王通)이 9월 동이 5국에 와 조공하다’고 기록하고 그 설목(薛牧)의 전(傳)은 ‘동이 5국이란 부여, 3한, 숙신(肅愼), 왜인, 비리(裨離)이다. 현토(玄菟)의 동북에 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발해의 시대 흑룡강의 유역에는, 흑수물길부(黑水勿吉部)가 있고, 물길 7부족 가운데 가장 정예롭고 강하다(精强)고 한다. 흑수부는 후에 고려의 망명자를 왕으로 하여 거란(요)을 멸하고 금(金)국을 세웠다. 「산해경」이 쓴 북왜는 이 흑수부나 백산부(白山部)에 섞여 들어간 것(混入)이 아닌가. 이 백산부가 우리 예다(穢多:えた)의 뿌리인 것 같다.

*본서(「환단고기」)에도 등장하지만 고려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요(거란)의 성종(聖宗)이 소손녕에 명하여 고려를 공격시켰기 때문에, 고려의 성종(成宗) 문의(文懿)대왕의 신하 서희(徐熙)가 사절이 됐다. 그때, 소손녕이 ‘너희나라는, 신라의 땅에 흥한 것이다. 고구려의 땅은 내가 갖는다. 운운’ 하고 말한 것에 대하여, 서희가, ‘아니다. 아국 고려는 즉, 고구려의 후예다. 그래서 고려라 한다.’고 대답했다는 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가 요(遼)에 대항하여, 고구려의 계승권을 주장하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遼)의 야율우지(耶律羽之)가 편찬한 「왜인흥망사」도, 신화편 뒤에 태조왕 시대의 고구려 역사를 기록하고, 요가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와 요의 견해는 어느 것이 옳은가. 옛날부터 대진국(大震國:발해)이라는 국가가 있어, 처음 “후 고구려”라 칭했지만, 요(遼)는 이것을 멸하여 “동단국(東丹國)”이라 하고, 후에 합병해 버렸다. 따라서 발해를 흡수한 요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도 결코 엉터리는 아니다. 이와 같이 말하자면, 본가쟁탈을 위한 사서조작이기 때문에, 고려의 수사(修史:역사편찬)는 그 위기탈출이기도 하고, 또한 형세의 나쁜 부분을 말소하는 작업도 했다.

* 한반도사의 고전적 텍스트로 여겨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로서도, 반드시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삼국유사」의 원문에 ‘옛날에 환국이 있다(昔有桓國:昔桓國あ り)’고 한 것을 경대장본(京大藏本)에서는 그것이 먹(墨)으로 지워지고 ‘옛날에 환인이 있다(昔桓因あり)’로 글자가 고쳐져(改竄) 있는 사실이다. 또한 「삼국사기」를 읽으면, 백제 본기 가운데, 누누이 흠락된(欠落:빠지고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이 「일본서기」의 허구-백제사의 번역을 입증하는 듯한 부분에 많은 것은 왜일까.

메이지(명치) 정부의 위조자들은, 「유사」와 함께 「사기」의 내용도 개찬한 것은 아닌가.
*이 시대 일본 제국의 생명선이 압록강에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의 북위 38도선에 비교하면, 역사의 흐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일러전쟁이 끝난 후, 일본이 한 편이었던 한국의 국토를 약탈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일본이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싸운 것은 2회의 대전(大戰)에서 독일과 싸운 미합중국의 입장과 닮아있지만, 미국은 동맹국 영국으로부터 국토를 뺏기지 않았다. 이 차이는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미국인에 대해 영국이 모국인 것처럼 일본인에 있어서도 한반도는 모국(母國)였다. 그러나 미국인은 이주의 역사를 자각하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지만, 일본인은 그 역사를 말살하고, 반도인을 경멸했다. 이것이 명암 2 양상의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닐까.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결코 일본열도의 사서가 아니고, 그 실체는 백제사를 빌린 천황가의 주술에 불과한 것이, 대부분의 왜인이 북왜이고 반도 이주자였기때문에, 이러한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메이지(明治) 정권은 이른바 성공한 아즈테카이고, 성공한 호메이니 정권였다. 그러나 만일 천황가의 조지(祖地) 인 한반도에서 정당한 사서가 발견되었다면 천황 샤머니즘은 일순간에 붕괴하는게 약점이다.

천황가에는 위조문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필두로 한 「육국사(六國史)」 외에, 문외불출(門外不出)의 사서가 있고, 천황가가 조선반도로부터 망명해온 역사를 몰래 전하고, 메이지 이래 한반도로부터 고래의 사서가 출현한 것을 무척 두려워 한 게 아닐까. 「서기(書紀)」의 허구을 유지하지 않으면 천황 샤머니즘은 존속 못하고, 통일 국가도 붕괴된다는 심각한 위기감에 의해 메이지(明治) 정부는 반도 전(全) 사료의 약탈을 계획하고 흑판승미(黑板勝美), 금서룡(今西龍)의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악명높은 위사(僞史) 신디케이트-역사 마피아를 조직시켰다.

그래서 충실한 학노(學奴)들은, 반도를 샅샅이 수색하여 전(全) 사료를 약탈하고 더욱이 대마(對馬)의 종가(宗家) 문서까지도 매수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 흑판(黑板)은 후에 암파문고(岩波文庫)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내용까지 개찬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행했다. 앞서 메이지(明治) 천황은 멀리 압록강 북방의 고구려의 영주(英主) 광개토 대왕의 석비(石碑)를 손괴시켰다. 위사(僞史) 공작의 증거는 극히 명확하다. 위사(僞史) 신디케이트는 더욱이 「육국사(六國史」의 허구를 사수하기 위하여, 천황가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야마또(大和) 고분군을 폐쇄했다. 이보다 앞서, 정부는 몰래 인덕(仁德) 능(陵) 등의 내부를 조사하여, 이때 정부고관이 도굴한 출토품은, 오늘날 보스톤 박물관에 진열되어있다. 그들은 그것이 인덕(仁德)천황과 상관없는 능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의 부장품을 훔친 것이다.

반복해 말하지만, 이들 놀랄만한 역사의 진상은, 만약 조선 반도로부터 한 권의 사서가 발견되었다면 모두 명백해지고, 샤머니즘의 허구는 일순간에 붕괴되어 버린다. 그래서 메이지(明治) 정부는 필사적이 되어 반도의 사서를 약탈했지만, 더욱이 이른바, “조선인 차별”을 행하여, 이렇게 조선인을 열등시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조선망명자일리가 없다-고 강조해 보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악몽같은 일한(日韓)병합도 본래의 목적은 샤머니즘의 허구를 지키기 위한 사서 약탈에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천황가가 조선반도에서 도래한 사실은, 오늘날에는 이른바 상식으로서 인정되고 있지만, 전전(戰前)에는 최대의 타부(금기)였다. 메이지(明治) 이후의 국사학자의 사명은 이 타부를 지키는 것에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들의 주목적은 단 하나, 천황가가 조선에서 이주했다는 사실을 감추는 것인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실로 그 진상을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학노(學奴)들에 대해 가장 위험한 텍스트였다. 이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포함하여, 태백교도가 목숨걸고 지킨 텍스트를, 이유립(李裕岦)씨와 박창암(朴蒼岩)씨로부터 받은 것은 소화(昭和:히로히토 연호) 54년 가을였다. 이렇게 하여 성스러운 사서는 말살하기 위해서가 아닌 공개하기 위해 조선해협을 건넜다. 그리고 순식간에 3년의 세월이 흘러 겨우 여기에 완역 「환단고기」를 상재(上梓)하게 되었다.

*시로코고르프는 ‘퉁구스는 예전부터 양자강의 남쪽에 있었다’고 논했다. 또한 「위서(魏書)」는 ‘부여의 기로(耆老)는 스스로 옛날의 망인(亡人)으로 칭했다’고 서술하고, 전부터 중원에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단군 조선이 중원을 지배했다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실로 사마천의 「사기」는 이와 같은 한민족의 실크로드 중국지배를 감추기 위한 대대적인 위조였다. 대저 한(漢)민족의 이름도 한(韓)의 이름을 빌린 것에 불과하다.

*만주에 있었던 북왜인의 자손의 거란민족의 사서인 「왜인흥망사」 제 31장에는, ‘완(宛)의 서(徐), 바다를 건너, 박진(舶臻)하고, 은(殷:箕氏朝鮮)에 의해, 완난(宛難)에 거(居)해, 땅을 열기를 수천리, 현모달(弦牟達)에 세우고, 곤막성(昆莫城)이라 칭하고, 나라를 서가은(徐珂殷)이라 하다’ 했다. 여기서 “완(宛)”이라는 것은 남양(南陽)의 제철기지여서, 「사기」와 합치면 완(宛)의 서(徐)는 위(魏)의 제철부족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가은(徐珂殷)이란, 서(徐)씨의 예국(濊國)인데, 「왜인흥망사」는 예국(濊國)은 후에 부여(夫餘)가 되었다고 쓰여있다.

「환단고기」<삼신오제본기>에는 ‘옛부터 부여(夫餘)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라 되어있고, 「위지(魏志)」에는, ‘마한(馬韓)은 말 타지 않고’ 또한 ‘왜는 소, 말이…없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부여를 시작으로 마한도 왜도, 결코 기마민족이 아니다. 말을 타기때문에 기마민족이라 한다면, 아메리카 인디안도 기마민족이 되겠지. 여기서, 마지막에 서(徐)의 의미지만, 카르데아인의 “지아”는 아닐까. 그렇다면, 역시 니기하야히는  카르데아인의 자손인 페니키아왕으로, 이 일족은 말레이 반도에서 하남성(河南省)에 들어가고,  진(秦)에 져서 후에 만주로 이주하고, 거기서 예국(濊國)-북부여를 세운 후, 남하하여 왜왕이 선 것이다.

*<북부여기 상> 시조 해모수 19년 조에, ‘기(箕)가 훙(薨:제후의 죽음)하지 않고, 자준(子準)을 공격하다. 봉(封)하여 번조선(番朝鮮)의 왕이 되다’로 되어있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이 번한(番韓)을 계승한 것으로 되는데, 기씨조선도 원래는 (동이족) 은인(殷人)이 세운 국가였다. 졸저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서술했지만 은(殷)이란 국가는 이신에 종속된 해인(海人)의 카르데아인이 말레이 반도를 중계기지로 하여 중국을 침략한 때의 식민지여서, 은(殷)도 기씨조선도 카르데아인 후의 페니키아인였다. 나는 “기자(箕子)”라고 얘기하고 싶은 페니키아 왕의 한역(漢譯)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왜 부여사(夫餘史)의 대부분을 말살했을까. 본서 「환단고기」의 <북부여기 상,하>와  <가섭원(迦葉原) 부여기>를 읽으면,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다. 환단고기와 「왜인흥망사」제 38장과 조합(照合)하면 고진(高辰)은 흉노(匈奴) 고령부(高令部)의 왕이라는 얘기가 된다. 협보(陜父)란 것은 앞서 나온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의 자손이지만, 후에 남하하여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기 때문에, 그것이 「고사기(古事記)」의 “니기하야히”로 여겨지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에서 말하는 부여왕 의라(依羅)가 남하하여 왜왕이 됐다. 이것이 숭신(崇神)이지만, 그의 아들 수인(垂仁)이 백제왕이 되어 경행(景行)이라고 칭했다.

*성무(聖武)의 왕조가 명을 받아 일본이 건국(開基)했다는 것은, 전부터, 신라 문무왕의 손(孫) 김양림(金良琳)이 구주(九州)에서 나니와(難波:오오사카)로 옮겨,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하고, 신라 문무(文武)왕의 이름을 세습하여 문무(文武) 천황이라 칭하고, 독립을 지향한 것을 말한다. 발해사의 후반부에 왜 부여(夫餘)왕 의려(依慮)가 나오는가 하면, ‘의려왕이 도망가 바다에 들어가고…아들들(子弟)이 도망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바다를 건너, 결국 왜인을 평정하여 왕(崇神)이 되다.’와 같이, 이때 부여의 후기왕조는 2분(分)하여, 북옥저를 보존하는 것과 왜왕이 된 것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전자가 후에 발해국이 되고 후자가 일본국이 되었다. 이것을 발해국사(渤海國使)는 “본지백세(本枝百世)”라고 했다. 발해는 이와 같이 하여, 성무(聖武)때 일본에 접촉하여, 후에 누누이 일본에 반(反) 신라정책을 요청했다. 그리고, 등원광사(藤原廣嗣)의 난, 혜미압승(惠美押勝)의 난을 거쳐, 마침내 백제왕 준철(俊哲)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준철은 즉위하여 환무(桓武)가 되었다.

그럼 우리 동이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다음은 「중국민족사」에서 임 혜상이 말하는 동이족에 대한 설명인데 이 속에는 중화 족의 시각도 다소 있으나 대국적으로는 국내의 어느 학자보다 정리를 잘 해 놓은 것이므로 분별지를 가지고 일별 해 보면 대국파악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국내의 사학자는 한민족사를 대륙 사로 보지 않고 반도사관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대륙 사와 관계된 상고문헌을 보려는 기본 마인드가 안되어 있는데다가 한학에 정통해 있는 학자마저 부족해 임 혜상이나 서 량지 만큼 고금의 사료를 섭렵한 이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필자가 길 안내하는 대로 이들이 제시하는 방대한 사료를 보고 객관적인 판단을 독자 스스로 내려주길 바란다. 가급적 한문을 안 쓰려 노력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꼭 써야 할 말은 괄호에 넣어 썼다. 그러나 신세대 젊은이 독자들은 별 볼일 없는 한문에 놀래지 말고 의미파악만 해주면 고맙겠다.

단 다음과 같은 지나족 특유의 화하 중심적 주관주의로 과대포장한 지뢰사관이 아주 종종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읽었으면 한다. 상내약외(詳內略外)로 지나사는 상세히 기술하되 주변국은 간략히 처리하고,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로 지나에게 수치스런 역사는 덮어버리는 서술방식이 우리가 그들의 사료를 보는 입장에서는 지뢰사관이 되는 것이다.

가령, 숙신, 식신은 고대 중국인들이 만주지방에 살던 동북이(東北夷)를 일컫던 막연한 호칭이다(保井克己) 주대의 이러한 막연한 개념은 위(魏)의 관구검때 만주지방을 정벌하면서 읍루(挹婁)로 부르기 시작한다. 숙신이 주(周)대라면, 주신(朱申)은 전한(前漢), 읍루은 후한․삼국, 철아적(徹兒赤)은 당, 주리진(朱里眞)은 송․원, 여진․여직(女直)은 명, 노아진(奴兒眞)이라 했다. 이 지뢰로 잠복한 읍루의 정체에 대해 정인보는 말하기를,

-우선 우리는 남의 기술에서 내 사료를 가져오는 것이 많은지라 그동안 헛되이 헤메면서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다. 진수의 「삼국지」<동이열전>에 쓰인 것만 하더라도 ‘예’니 ‘예맥’이니 ‘읍루’니 ‘옥저’니 하는 것은 본래 우리 스스로가 붙인 이름으로 생각했던 것부터가 틀린 일이었다. 이들 이름은 주진(周秦) 이후 한위(漢魏:서기전 1134~265)까지의 1천년 사이에 중국사람들이 혹시 조선인에게 물어보든지 아니면 지나가다가 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그대로 지명으로 안 것이 오래되다 보니까 판에 박혀 그렇게 되고 말았던 것인데, 그들이 그 뒤 조선 땅에 들어와서 실지를 답사해 보니 지명이 엉터리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읍루(挹婁)는 본시 오루(奧婁), 압허(鴨虛)라는 송화강 이름이었는데 뒤에 그 물가에 사는 주민들을 가리키는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중국인의 수첩에 그 이름이 적히고 나면 그 곳의 주민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 나라이름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위(漢魏) 이후의 왕조 사기(史記)에 꼭 동이전(東夷傳)이라는 항목을 붙이고 보니 읍루가 잘못된 채 그대로 기록되어 내려왔으며, ‘옥저’의 경우도 본시 그것이 와지(窩地) 즉 삼림지대란 뜻이었는데 그것이 나라이름으로 잘못 알아 그대로 전해 내려왔던 것이다.

예의 경우는 더욱 맹랑하다. 예는 고(故)의 역(譯)인 예(濊)이다. 가령 낙랑이나 현토와 같은 사군에서는 원주민을 이주해 들어온 한(漢)인과 구별하여 마치 원시인처럼 이름을 예라고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란 고시(故時)의 원주민이란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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