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Total : 538 (537 searched) , 1 / 16 pages  

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23. 불과 한개의 변수인 "민주화"만으로 재단하는 진보수정주의 사관으로 보는 박정희 사관은 잘못된 것






당시 공화당 활동 자금으로 받은 돈 2천 만 불은 논외로 한다고 해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자금으로 즉석에서 받은 돈 1억 3천 만 불과 베트남 해외파병으로 벌어들인 17억불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도로, 철로, 항만, 댐건설 등 기간산업 건설과 한국 경제근대화를 위한 기초자본금이 되었다. 베트남 해외파병자금에 대한 문제는 언젠가 객관적으로 밝혀질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그 때에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그 누구도 배부른 자의 정치논리로 그러한 상황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설사 지금에 와서 그것이 우리에게 엄청나게 불리한 회담이었으며 한일합방 배상액으로 유상 무상으로 받은 돈도 턱없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당시 한일 국교도 트이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그러한 돈과 월남파병으로 축적한 총 17억 달러로 오늘날 우리의 경제를 일으키는데 기초 자본금이 된 것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대신 당시 불이익 받은 것에 대한 후속 협상은 차기 정부들이 해결해야 할 몫으로 남게 된 것이다.

다 알다시피 65년 8월 13일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을 다루던 국회 본회의에서 월남파병 동의안이 가결되어 그 해 첫 해에만 처음으로 한국 기술자 1000여명이 투입되어 이후 한국 건설업이 해외로 진출해 가는 발판을 마련했음과 동시에 60년대 하반기에 유입된 달러만 6-7억불이 되었다. 월남 파병 동의안 가결 이듬해 정부는 험프리 미 부통령과의 회담을 통해 AID 차관 1억 5000만 달러를 끌어들여 경제건설의 기초자본금으로 쓰게 되었다.  

당시에는 대부분의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려서 박대통령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구걸하다시피 해 PL 잉여농산물을 무상 원조로 끌어당겨 굶주림을 면하게 했던 절박한 시절이었는데, 당시 60년대는 북한이 우리보다 더 GNP가 높은 때라 월북하는 사람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입을 것도 없어서 대부분의 국민들이 무상원조로 들여온 PL 잉여 농산물 마직 쌀부대 가마를 검은 색, 청색으로 물들여 입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이어 월남파병을 통해  이렇게 저렇게 백성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한 박대통령이 조국근대화와 고도의 경제건설을 위해 초가집과 주방을 개량하는 새마을 운동과  수 차례의 경제개발 계획을 지속적으로 성공시킨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영단이었다.

이에 대해 키신저 전 美국무장관은 "한국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그가 영웅이었다는 평가와 독재자였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면서 "인권정책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유례 없는 성장 책으로 타 국가 경제개발의 모델이 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의 마무리  과정까지 해보겠다는 정치적인 욕심이 과도한 국민억압과 유신을 만들어내고 급기야 부마사태와 비극의 10.26사태로 비화하게 된 것은 민족 모두에게 불행한 현대사가 아닐 수 없다. 박대통령 당시 유신치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탄압 받은 사람은 당연히 그를 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프던 백성을 그나마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해주고 오늘날의 남부럽지 않은 세계 속의 대한민국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바로 한국의 비스마르크 박정희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월간조선』 일 만 명의 여론조사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필자는 민주화라는 정치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국내 진보 수정주의 사관이 단재 신 채호, 백암 박 은식, 장  도빈, 복초 최 인, 최 동, 문 정창, 이 유립, 박 성수, 임균택, 이중재, 오 재성 등으로 이어지는 재야 민족사학자들과 해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박정희를 끌어안는 사관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엄밀주의에 입각하면 한국의 정치발전 과정에서 현시된 민주화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구성하는데 있어 지극히 협소한 베리어블(Variable:변수)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과정에 지극히 파편적이고 현상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하나로 사관을 좌지우지하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Click here!

만일 터럭만도 못한 정치 이데올로기 하나로 역사를 재단하려 한다면, 그 시대 시대마다 당대를 횡행하던 정치 이데올로기가 있을 것이므로 기존의 역사도 모조리 새로 써야 한다. 역사는 경제 발전사나 정치 발전사 만도 아니요, 인간이 숨쉬고 웃고 찡그리고 모이고 헤치며 고뇌하고 사색하며 만들어 놓은 종합적인 의, 식, 주의 사회 문화사이다.(민주주의는 프리메이슨이 중세 기독교 전제군주를 타도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만일 민주화의 개념으로 역사를 감별, 재단한다면 우선 세계사는 그만두고라도 한민족사의 모든 왕정제도의 군주 심지어 성군까지도 폭군으로 매도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정당한가?)

그런 면에서 민주화의 파편적 이데올로기로만 파악하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근대사의 진보 수정주의 사관의 재정립은 고려해야 하며 반 민주화 세력의 타겟트는 오히려 건국정부 이승만으로 올려 잡아야 하는 것이다.

본래 민중, 민주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는 카발리스트인 프리메이슨들이 카톨릭 군주 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도입한 혁명 이데올로기로 프랑스 혁명에 처음 도입된 것이다.(서양사에서 후술)

카발리스트인 영국의 처어칠도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제도가 아직 없기 때문에 인류가 이 제도를 쓴다 한 것이지 결코 민주주의 제도가 절대 완벽한 제도여서 쓴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플라톤은 신정정치인 철인정치를 말했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는 과두 귀족정치를 말하기도 했다. 고래로 동양에서는 군주에 의한 위민덕화(爲民德化)의 도덕정치를 말해 왔다.

역사는 황(皇), 제(帝), 왕(王), 패(覇) 시대를 거쳐 오늘날의 선천 말대 금수시대로 흘러내려 왔다. 우주원리로 보면 금수시대는 카발리스트의 정치 이데올로기인 민주화 개념으로 비빔밥처럼 비벼진 황금 만능의 난법(亂法) 자본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군불군(君不君)으로 나랏님이 나랏님답지 못하고, 사불사(師不師)로 스승이 스승답지 못하며, 부불부(父不父)로 어버이가 어버이답지 못한 시대에 당도했다. 요(要)는 어느 시대의 역사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고대 그리스의 오라클(Oracle) 신정정치도, 분서갱유를 불러일으킨 상앙의 법가의 정치 이데올로기도, 서양 중세의 카톨릭 봉건 군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도, 그리고 카톨릭 세력과 힘을 합해 식민지 제국주의의 죄악을 저지른 카발리스트들의 정치 이데올로기 등의 단선적 시각만으로 박정희 역사를 재단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필자도 직접 들은 이야기지만 10.26이 일어나자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이런 말을 했다. 박정희가 경제건설을 해 모두 잘살게 되었다지만 만일 다른 사람이 맡았다면 민주화도 더 잘 되었을 거고 경제건설도 박정희보다 더욱 잘 했을 거라고.

그러나 4.19 당시의 혼란상을 그저 바라만 보며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무능하고 나약한 장면정권을 경험한 소수 식자층들은 부지불식간이나마 당시 강력한 군부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러한 난국을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5.16 이전에 수 차례에 걸쳐 식자층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던 군부 쿠데타 설이 이를 잘 반증해 주고 있다.

미국은 비록 장 면이 친일 행적을 가진 바 있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  승만과 같이 부정부패를 일삼긴 했지만 자신들에게 지극히 협조적인 무능한 장면정부를 싫어할 리는 없었기에 사회혼란이 극을 달리자 은근히 정치공작을 해 군부혁명을 은근히 부추겨 유도했는데, 이는 작전권과 군사물자를 포함해 원조물자 보급권을 손에 거머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인을 통해 우회해서 정치조작을 하는 비효율적 관리방식보다 아예 사회혼란을 틈타 정권을 장악한 군부를 직접 통제하는 것이 훨씬 낫겠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실제로 장면 정부의 제2공화국은 60%가 친일 반역자였으며 장 면 자신도 반민특위 처단 대상자였으니 참으로 엉터리 같은 근대사임에 틀림없다.

당시 미국 층이나 군부를 포함해 식자층이나 모든 정치인 사이에서는 극에 다른 사회적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강력한 군부가 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지불식간에 서로 알고 있었으며 군부 내부에서 왈가왈부 혁명가능성에 대한 말이 많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혁명주역인 박 정희 조차도 혁명 거사 D-데이를 앞당겨야 했을 만큼 새로운 혁명에의 기대가 은근히 사회저변에 깔려 있었다.    

게다가 광주 민주항쟁 사태를 일으키고 국록을 사취한 전두환, 노태우를 겪어보고, IMF를 초래한 김영삼을 겪어본 지금, 단지 민주화라는 단순 논리적 시각으로 박정희를 독재자로 매도했던 사람들은 결국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박정희의 공과 허물 중에서 유독 허물만을 부각시켰던 민주인사들 조차 몇 명의 대통령을 겪고 나면서 상대 평가할 수 있는 눈이 생겨 비로소 경제적 치적을 긍정적으로 종합 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게 바로 앞서 말한 일 만 명 여론조사다. 박정희 여론조사Click here!

사람들은 자조 섞인 말로 말한다. 박정희가 맛있는 쌀밥 지어 상 차려 놓으니 전, 노가 먹어치우고, 김영삼이 밥상 엎어놓으니 김대중이 궂은일 맡아 설거지한다고. 물론 김대중도 허물과 한계가 있을 것이고 그의 공과는 임기를 마치고 해도 늦지 않다.

그게 역사의 유장함이며 엄정함이다. 해마다 명절이면 천안 망향휴게소에서 벌어지는 진풍경이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 경부 고속도로 확장공사 완공으로 많이 나아졌지만 서울에서 대전까지 12시간 정도 걸리던 요 근래  몇 년 전, 서울에서 한시간도 채 안 걸리는 천안 망향휴게소에 무려 8시간이나 걸려 피로와 짜증으로 파김치가 되어 도착한 시민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 시민편의를 위해 주차장 야외 밖에까지 간이텐트를 치고 파는 우동이며 라면, 국수 등을 한참씩이나 줄서서 한 그릇 사서 선 채로 먹고 있었다. 북새통을 이루며 먹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뒤에서 내뱉는 육두문자 섞인 거친 말이 있었다.

."에이 씨벌, 개새끼들, 처먹지들 말고 그 돈으로 박통(박정희)처럼 새 길을 만들던지 고속도로 확장만 했어도 명절 때만 되면 전 국민이 아우성쳐대며 매번 이러지는 않을텐데, 대통령만 되면 줄줄이 처먹어 대기만 해대니."

차가운 날씨에 다들 움추리며 라면, 우동 등으로 속을 덥히던 사람들은 국록을 꿀꺽한 역대 전 두환, 노 태우에 대한 말인 줄 모두 알아듣고 다들 먹다말고 뒤돌아보며 백 번 맞는 소리라며 가가대소를 했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을 개진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박정희 전대통령 시절의 경제정책에 대한 소고-라는 제하로 <바로잡아야 할 역사>에 게시한 아이디명 칸의 글을 잠시 보기로 하자.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의 흐름

현재 일각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정책으로 우리나라가 절대빈곤을 탈피하고 현재 민주화의 길을 걸을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감히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우리의 상황은 누가 보더라도 절대빈곤층이 다수를 이루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시행하여 최악의 상황을 탈피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어느 정도 동의를 해줄 의향이 있으나 그것이 보편적인 발전이나 흐름 혹은 국민구성원의 노력이 아니라 박정희 영웅사관으로 이어지거나 혹은 그것을 업적으로 미화하여 부당하게 박정희 전대통령의 집권을 합리화하는 것이라면 분명 역사의 흐름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최악의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시행하여 최악의 상황을 탈피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어느 정도 동의를 해줄 의향이 있다"는 점에서 인용문의 논객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분명 필자는 소위 카일라일의 영웅사관으로 박정희를 본 것이고 이 논객은 아무런 이유없이(아마도 독재정권의 레테르 내지 치적의 능률성이나 경제발전의 효율성 등 몇가지의 변수만으로 비판하는 듯 하다)  영웅사관으로 집권을 합리화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 지적했다.

필자는 포카스를 기존의 부패된 이승만 정권의 연장선에 맞추고 문제의 본질을 대하고 있지만 이 논객은 마치 서양의 실존철학이 한 사람의 인간을 해부해 들어가는데 있어 한 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적 환경, 가령 가정문제라든가, 학교문제나 직장문제라든가, 종교문제나 가치관 문제 등등 수많은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주위와 완전히 고립된 실험실 위에 올려놓고 해부하듯 한다는 점에서 다소의 입장차이가 있다.

필자는 박정희 정권이 독재라는 과오와 경제적인 업적을 저울로 재면 독재의 추를 네 댓 개정도 올려놓아도 이승만의 독재와 부패를 따라 갈 수 없으며 박정희 정권이 키신저와 리콴유의 지적대로 혁혁한 경제건설의 치적을 남겼다고 보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이승만의 노망한 집권욕은 미군정의 하수인이 되어 정통 무장독립운동가 세력인 한독당을 따돌리고 친일매국배를 앞잡이로 내세워 반공애국자로 변신시켜 권력을 나누고 정통 반공이데올로기 하나만으로도 능히 무고한 양민을 113만명을 학살한 살인마가 아니었던가?-

한일협정

박정희 전대통령이 집권한 후 경제를 부흥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필요조건이 있었다. 그 하나는 경제개발에 관한 마스터플랜과 또하나는 경제개발의 재원이었다. 우선 경제개발의 총체적 계획은 당시 미비한 상태였고 2공화국때 400억원 규모의 국토건설사업과 경제개발계획등 초등적인 수준의 계획만이 있었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의 탄생 후 좀더 나은 방향으로 손질이 되고 발전이 되었다면 현재와 같은 논란도 필요치 않았을것이나 불행히도 박정희 전대통령의 집권기 동안 진행된 정책은 2공화국 당시의 계획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로 졸속 진행되고 만다.

다음 현실적 문제점으로 경제개발의 재원확보라는 두터운 장벽을 만나게 된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은 재원확보를 위하여 일본과 협정을 체결하게 되고 그로 인해 30억달러의 일부무상원조를 받게 된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제치하기간동안의 상처에 비하여 너무나 터무니 없는 보상으로 민중들의 피해는 모조리 덮혀 졌고, 더욱이 일본은 과거에 대한 일말의 사과나 반성도 없이 단순히 경제협력기금이라는 이름의 자선적 의미만을 강조하며 협정을 체결하였다는 점이며 가장 황당한 것은 당시 한일협정의 성사 댓가로 김종필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하여 공화당의 창당기금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당시의 한치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않고 국민들의 피해에 대한 조사도 없이 집권수뇌부의 일방적 의사에 의하여 체결된 이 협상으로 인하여 현재까지도 일본정부는 과거의 모든 사건들이 한일협정체결로 인하여 해결되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구체적인 사과나 반성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피해보상금이라는 뜻에서 대일청구권자금이라고 부르는 이 자금이 일본에서는 경제협력기금이라는 불우이웃돕기 성금과 유사한 의미로 일컬어진다는 분통터지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일제시대에 입은 국민들의 피해상황도 조사하지 않은 채 그들에 대한 보상책도 없이 체결된 이 협정의 성사댓가로 일본에서 지급한 정치자금을 궁극적으로 자신의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는 공화당의 창당자금으로 사용한 것이 과연 개인의 부정부패와 다른점이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 옹호론자들은 이런 사실들은 배제한 채 그 당시 그 돈이 우리 경제가 이렇게 발전하게 된 원동력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이는 국민들 개개인의 피해와 손해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위험한 전체주의적 발상이 아닐까?

-필자가 거론하고 있는 포인트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복잡계의 그물망사이 연계관계를 주로 보는 사관인데 비해 이 글의 논객은 구체적인 상황을 적시해 비판하고 있다. 그물망의 연계보다는 사안 하나하나의 시시비비를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정치적인 측면에서 박정희 정권의 잘못된 점은 솔직히 지적한 바 있어 이 글의 논객이 지적하는 미시상황이 다른 입장이라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당시 공화당 창당기금에 실제 그 돈이 쓰였다면 구체적으로 얼마만큼 쓰였다는 구체적인 자료나 근거를 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성의 문화적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특정 사건의 미시분석은 대국적인 역사의 틀을 놓칠 수있다는 점에서 관점차이가 노정된다. -

경부고속도로와 모딜리아니 이론

사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불가능한 사업을 가능하게 함으로 우리 경제에 자신감을 불러넣은 일대의 사건이다. 당시 정부 1년치 예산 보다도 많은 돈이 들어가는 대규모의 사업이었으며 당시 한국에 차관을 지급하던 국제금융기구들마저 반대하였고 국내의 경제학자들 야당정치인들 모두가 반대한 사업이었다. 당시 이 사업에 반대하였던 정치인들을 요즘 와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권력욕에만 눈이 멀었던 사람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결국 자기 당착에 빠지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당시의 이런 반대여론속에서 일본주도로 만들어진 아시아개발기금의 원조를 받아서 경부고속도로는 만들어졌다.

이 성공은 이후 대한민국경제성장의 출발점으로 자리잡으며 현대의 50만톤급 유조선 건조, 대우그룹의 탄생 신화등으로 이어나가게 된다. 이런 급성장의 이면에는 과감한 차입으로 인한 경영의 팽창을 이루어내는 이론적 근거가 있었다. 바로 1957년 이탈리아계 미국 경제학자 모딜리아니 박사가 주창한 차입경영이론이다. 이 이론은 1960년대 세계적인 규모의 대출 붐의 경제적 지원 이론이 되고 많은 기업들이 자본의 차입으로 규모를 확장하고 확장 규모에서 발생하는 이윤으로 금융비용을 부담하고 다시 확장자산을 은행에 담보하여 자본을 차입하는 구조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차입경영이론을 바탕으로 한 기업들의 규모확장과 베트남전을 통한 미국의 경제호황으로 인하여 60년대 서방은 엄청난 10년 호황을 누리게 된다. 이후 이 이론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서강학파를 중심으로 연구되면서 불균형발전이론의 토대가 되어 해외 특히 일본에서의 대규모 차관을 유치하여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게 된다. 이런 국가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현재 이야기하는 많은 재벌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국가시책에 부흥하여 탄생한 재벌들은 빠른 속도로 권력과 결탁해가게 된다.

이후 이런 대규모 투자는 국내수요를 폭발적으로 일으켰고 1973년 이후 석유파동을 만나면서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킨다. 때마침 불어닥친 중동 건설붐으로 인하여 대규모 유입된 달러와 중화학 공업 육성이라는 명목으로 풀린 투자 자금까지 합세하여 총통화관리가 유명무실해지고 이런 상황속에서 자산가치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 부동산에 급격하게 자금이 유입되어 복부인으로 통칭되는 투기꾼들을 양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한국경제는 건전한 성장과는 거리가 먼 비균형적이고 기형적인 성장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상황속에서 1979년 OPEC의 2차 석유류 감산이 시행되고 1배럴에 36달러까지 가격이 오르면서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한 많은 양의 유류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산업생산성은 급격히 하락하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미만으로까지 떨어지게 된다. 물론 많은 기업들이 일거에 도산하고 도산하지 않은 기업도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도입한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서 채무로 채무를 갚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 1979년 말 180억 달러였던 외채는 1985년 500달러수준까지 증가하는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1984년 말에는 모라토리움 선언 상황까지 직면하게 되고(사실 이때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정책의 결과를 보는 시점이었으며 이후는 그 경제정책들이 악영향들로 경제구조가 비정상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이다.) 당시 전두환 전대통령은 일본을 긴급방문하여 60억달러 규모의 융자를 요청하게 된다. 당시 박정희 전대통령의 중화학 공업 육성으로 성장한 현재 대재벌들의 대주주로 일본 기업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통하여 무리한 투자에 대한 제동이 들어와서 금융공황의 상태까지 가지않았으며 또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으로 부터의 60억 달러 융자도 가능했다.

이후 우리 경제는 계속적으로 건전한 생태를 갖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형태의 경제구조를 안착화 하고 부동산 투기로 인한 재벌 규모의 확대가 발생했으며 이런 부실구조로 인하여 결국 IMF사태까지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차입경영이론을 바탕으로 한 한국경제 발전의 개관이다.이를 보면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정책은 모딜리아니 박사의 차입경영이론을 바탕으로 한 서강학파의 불균형개발이론의 시행으로 채무로 인한 투자를 통하여 결과적으로 그 채무를 변제하기 위하여 국민개개인이 고통을 분담하고야 마는 상황을 살펴보았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정책에 관한 판단은 절대 긍정이나 절대 부정으로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박정희 전대통령 집권시절 간절히 요망되던 경제부흥이라는 현실적 목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투자재원의 확보가 절실히 요구되었고 이를 차관의 도입으로 빠른 시간안에 현실화 한 것은 피할수 없는 현실적 선택이었다고 보여진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차관도입으로 인한 투자재원의 확보라는 부분은 결코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싶지도 않고 현실적으로도 대안이 없다고 보여진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 정책이 초기 차관도입과 외자유치로 급격한 팽창을 이룩하고 일정 수준이 되었을때 즉 1973년 경 국내에 인플레이션 조짐이 시작될 때 통화 조절을 통하여 국내의 자본을 관리하고 차관과 채무를 변제하면서 일정수준으로 유지하여 국내 경제를 공고히 하였다면 분명코 오일쇼크로 인한 국내 생산성의 급격한 몰락은 방지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국내 통화 조절로 자산의 가치 하락을 완화 할 수만 있었다면 폭발적인 부동산 투기 붐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며 기업들의 비정상적 부동산 투기 형태로 없었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급격한 부의 편중현상도 일정정도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정부 주도적인 시장을 일정 수준에서 시장경제원리에 맡겼더라면 경제규모의 팽창우선주의 경제 정책으로 탄생한 재벌들과 정치계가 그렇게 유착되지 않았을 것이고 IMF전후에 우리가 보았던 재벌들과 정치권의 부정한 거래관계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졸속으로 일본과 협정을 맺으면서 일제강점기의 피해보상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못한점, 경제규모의 확대에만 급급한 나머지 많은 자금의 유통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여 자본의 부동산 유입을 막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부동산투자를 부추켜서 자본의 기업유입을 일정수준 차단한 점, 모딜리아니 이론의 적용으로 차관을 도입하면서 외국시장의 상황을 너무 등한시 하여 외국자본의 흐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채무관리에 실패하여 2차오일파동을 겪을때 많은 부채를 부담으로 작용하게 한 점, 팽창우선주의 경제정책 과정에서 생성된 재벌그룹들과 정치가 너무나 밀접하게 유착하게 하여 향후 부정부패의 시발점을 이룬점 등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IMF의 원인을 대는 부분은 이미 필자가 언급했듯이 통화조절의 문제가 핵심이 아니고 미군정 치하시절 일제 적산재산을 불하할적 에 친일매판세력가 위주로 끼리끼리 작당해 먹은 이승만 부패정권의 먹이사슬부터 이미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고착화된 이러한 정경유착의 끈이 박정희 정권 무렵에도 완전 개혁이 안되고 부패고리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해방이후 이렇다할 기업이 별무한 속에서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막상 해야 할 일은 경제건설이었지 기업사냥의 타이밍이 아니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구조적 모순 속에서 기존재벌의 문어발식 선단경영과 무차별적 차입경영 그리고 경상이익순서가 전혀 아닌 정부의 총 매출액 순서 재벌순위가 불러온 갖가지 수의계약 및 특혜, 고질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정경유착이 급기야 개발붐에 맞물려 부동산 거품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며, 이러한 국가경제의 모순적 한계상황에서 터진 것이 바로 IMF다 -


민주화 문제는 논외로 하고 박정희 대통령 때 경제 근대화에 의해 국가 기간산업을 잘 닦아 그나마 그런 대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자 신흥 경제 공업군 닉스(NICS)에도 속하고 선진국 대열에도 진입할 자격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기적인 사람과 무질서한 사람들의 천국으로 변한 것은 바로 근대사의 첫 단추를 올바로 끼우지 않은 상황에서 선진국과 비교해 해방이후 비로소 시작된 짧은 연륜의 근대적 시민의식 때문이다.

경제성장에 가치관과 질서의식 및 도덕관이 채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경제가 급성장되다 보니 가치관의 혼란기가 온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해방 후 첫 발을 내디딘 건국 정부가 집안 식구들의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를 가르쳐줘야 했는데 그걸 못했다.

왜냐하면 독립운동 과정에서 정통성을 이을만한 인재는 이리 저리 다 사라지고 이승만같이 기본적인 정치마인드가 잘못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모든 독립운동지사가 추구했던 무력항쟁주의의 임정노선에 반대하여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임정으로 갈 가장 큰 독립운동 자금원인 구미 독립자금을 가로챘는가 하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하나만 믿고 당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무단강점을 각자 교차승인한 미일간의 카쓰라수상-윌리엄 하워드 테프트 국방장관사이의 소위 카쓰라-태프트 밀약의 핵심과 1905년 오이스터 베이에서 루즈벨트 주재하에 일본 고무라와 러시아 위트간에 맺은 포츠머드 조약의 핵심내용-일본은 한반도에서 그 우월성을 갖는다는 의미도 읽을 줄 모르는 몰상식한 외교주의자였다.

오죽하면 천신만고 끝에 승마복을 입은 루즈벨트를 어거지로 만나 냉대 당하고 도움을 요청한 장로교 교회 목사 루이스 T 햄린 박사로부터 대통령을 위시한 미국 정부의 모든 고관이 일본편이니 외교운동을 단념하는 게 낫다는 소리를 들었겠는가.

대부분의 임정요인과 정통파 무장항쟁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국제정세를 결코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제국주의적 약육강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의 주류를 무장항쟁주의로 채택해서 나아갔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이 강훈 著>에 보면  독선적인 이 승만이  보기 싫어 신채호를 비롯 대부분의 주요 임정요인들이 임정사무실과 회의에 참여하기를 꺼려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나오고 있다.

'임시정부 내부의 문제는 사실 임정 수립 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난 날 이미 재미동포 사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외교를 주로 하고 직접행동을 가볍게 여기는 이 승만과 독립전쟁을 강조하던 박 용만, 실력양성을 강조하던 안 창호로 구분되던 시기가 있었는데 이와 같은 의견의 차이는 재경 동포사회에서 시일이 경과하는 동안 분파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파당 싸움은 임시정부 수립 후에도 영향을 미쳐 임시정부 활동을 더욱 쇠퇴시킨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선임된 박 용만이 취임하지 않았던 것은 미국에 있던 당시부터 이 승만과 법정투쟁 및 난투극까지 벌인 감정대립이 주된 이유였고,

그 다음의 이유는 군무총장을 결정하지 아니한 것이었다. 박 용만이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을 건설하여 무력으로 행패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군을 무력으로 대결하려고 준비에 서둘렀던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






537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를 집필하며  안원전   2002/01/10  9772
536    역사의 대국적인 틀  안원전   2002/01/10  7146
535    담론1.새로운 패러다임-X세대를 구세대로 만든 N세대  안원전   2002/01/16  5806
534    담론 2. 아날로그 일본, 디지털 한국  안원전   2002/01/16  6635
533    담론 3. 세계는 목하 IT 전쟁  안원전   2002/01/16  6559
532    담론4. 이제는 문화와 관광이다  안원전   2002/01/16  6970
531    담론5.라스베가스와 아비뇽과 빠리 샹젤리제 [2]  안원전   2002/01/16  7453
530    담론6. 아비뇽 등 테마도시와 문화예술의 위력  안원전   2002/01/16  6836
529    담론7. 무용, 한복&이면우식 최신식 디자인  안원전   2002/01/16  7308
528    담론8. 사극과 문화산업의 발상의 전환  안원전   2002/01/18  6287
527    담론9.한심한 관광정책, 어문정책과 질서문화 실종  안원전   2002/01/18  6585
526    담론10. 무질서의 문화사적 역사기원을 추적해 본다.  안원전   2002/01/18  5666
525    담론11.조봉암,조용수의 사법살인과 제주 4.3 항쟁의 비극  안원전   2002/01/18  7202
524    담론12. 이승만이 손잡은 친일매판 세력 김성수 한민당과 해방정국의 내막  안원전   2002/01/18  6764
523    담론13.일제 끄나풀 인촌 김성수의 미군정 장악&"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놈이다"신채호 선생 [1]  안원전   2002/01/18  7231
522    담론14.공채팔아먹고 미국무부에 신탁통치 요구하고 허위로 가짜 대통령 명함돌리고 하와이 박용만 독립군 재산 네다바이 하다 임정에서 탄핵된 이승만의 죄악 [1]  안원전   2002/01/18  6487
521    담론15.한국의 드골 김구와 매국 비시수반 뻬땡격 이승만 [1]  안원전   2002/01/18  6298
520    담론16.미군정 입법의원 차지한 친일 한민당과 친일파가 장악한 단독총선 의정 [1]  안원전   2002/01/18  5841
519    담론17. 이승만의 허구적 북진통일론과 그 부산물 6.25 및 보도연맹을 비롯한 113만 무고양민 학살 기록 [1]  안원전   2002/01/18  9103
518    담론18.일제하 최대의 독립운동자금원 겸 물산장려운동의 주체인 비밀교단 민족종교 보천교(증산도) [1]  안원전   2002/01/18  7275
517    담론19.적산(敵産) 재산 요리한 이승만, 김성수와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의 망언  안원전   2002/01/18  5937
516    담론20. 무장항쟁주의 김구의 상해임정의 외교승리인 카이로 선언과 이승만 외교노선의 허황됨  안원전   2002/01/18  5198
515    담론21.부패,무능,독재의 화신 이승만과 4.19 헌법정신(반부패,반무능,반독재)에 반하는 이승만 동상 건립&방응모 친자 방재선과 양자 방우영 가문의 재산찾기 소송의 내막  안원전   2002/01/18  5911
514    담론22. 박정희 정권의 핵심은 부패,무능 이 승만의 산업건설전무의 조국을 개발독재한 것  안원전   2002/01/18  5667
   담론23. 불과 한개의 변수인 "민주화"만으로 재단하는 진보수정주의 사관으로 보는 박정희 사관은 잘못된 것  안원전   2002/01/18  5356
512    담론24. 이승만의 추태와 매국노라 지탄한 박용만, 이승만을 비난하고 국무총리를 사퇴한 이동휘& 신채호, 김창숙의 분노와 성토및 탄핵  안원전   2002/01/18  5468
511    담론25. 상해 임시정부의 이승만의 탄핵축출과 민족 자주사학의 기초를 왜곡한 이승만  안원전   2002/01/18  5418
510    담론26. 제자 이승만에 대한 서재필의 날카로운 비판-애국을 빙자한 사욕,사재축적한 매국노  안원전   2002/01/20  5485
509    담론27. 국민회를 와해공작,박용만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이중인격 이승만과 송건호의 비판  안원전   2002/01/20  5204
508    담론28. 성균관대 초대 총장 심산 김창숙의 이승만 비판과 이승만 동상건립  안원전   2002/01/20  5578
507    종통.추수말복 진법의 상씨름 <<상씨름! 이제 시작 되었을 뿐! has just begun!!! 1> > By 慧光 大仙師  안원전   2020/02/24  1239
506    담론29.악이 선위에 군림하다. 친일지 동아,조선의 원죄  안원전   2002/01/20  5397
505    담론30. 친일언론 조선의 원죄와 장준하의 민주언론치죄  안원전   2002/01/20  5311
504    담론31.해방후 현대사 왜곡의 원죄 이승만과 고 백강 조경한 광복회 회장의 역사왜곡 한탄과 천대받는 국조단군  안원전   2002/01/20  7027
503    담론32 드골주의와 드골식 전후청산  안원전   2002/01/20  5508

1 [2][3][4][5][6][7][8][9][10]..[16] [NEXT]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