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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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22. 박정희 정권의 핵심은 부패,무능 이 승만의 산업건설전무의 조국을 개발독재한 것



우선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핵심만 간단히 설명한다면 식색은 성야라 한 바와 같이 먹고사는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이것은 무슨 이데올로기고 민주화고 사상을 떠나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먹고사는 것이 해결 안되면 사상,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백성을 먹이기 위해 국가도 전쟁을 하는 것이 바로 역사다.Click here!

4.19 와 5.16 당시 한국경제는 90년대 내전으로 국민전체가 기아와 질병으로 수  백 만 명이 사망한 소말리아나 르완다와 거의 비슷한 절망적 상황이었다. 이것이 공산주의 타도를 외치면서도 주한미군에만 전적으로 의존해 전투기는 고사하고 경비행기 몇 대 밖에 없었던 이승만 국방정책의 실체였고 미국의 원조물자와 이 승만으로 검은 커넥션을 이룬 소수 매판 자본가를 제외하면, 고속도로나 제철소를 비롯 비료공장이나 시멘트 공장 등은 물론, 국가 기간산업 치고 무엇하나 제대로 갖춘 것이 전무했던 실로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이승만 경제정책의 실체였다.

이 승만의 북진 통일론에 자극 받은 미국은 한국군이 북침을 시도할까 두려워 해 한국군의 강성 무장화을 원치 않았다. 이는 당시 UN군 극동지구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자명해진다.

'당시 남한 군은 38선을 따라 4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군인들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으며 매우 용감했고 애국심도 투철했다. 그러나 그들은 장비와 조직 면에서 전투 가능한 군대가 아니라 전투경찰대 정도의 무력밖에 없었다. 공중이나 해상의 지원은 전혀 없었고, 장비는 모두 경 장비뿐이었으며, 탱크나 포대 등 기본적으로 필요한 장비 역시 너무나 초라한 상태였다.

이렇게 남한 군을 초라하게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미국무성이었다. 이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남한이 북한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재미있는 근시안적인 이유로 북한이 남한을 침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 보면 박 정희는 군부 혁명가로 장기 집권 독재자이자 민주화를 저해한 폭군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 혁명정부는 이승만이 이루어놓은 경제실적이 전무했기 때문에 8.15 해방의 원점에서 재출발해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는데,

빠찡꼬 사건을 비롯 4대 의혹사건과 심지어 이 병철의 삼성과 공모해 사기밀수까지 무릅쓰는 악역을 기꺼이 감내하면서 까지 경제건설을 하기 위해 정치생명을 걸어야 했다. 미국의 방해로 도중에 중단되어 그랬지만 경제개발을 넘어서서 자주국방을 위해 원자탄까지 가지려했던 영웅이었다.

7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77)은 한국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99.10.25)

'포드대통령 시절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차례 만났었고 국무장관에서 퇴임한 후인 79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강인한 지도자의 인상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박대통령에 대해서는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그가 영웅이었다는 평가와 독재자였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는 인권정책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유례없는 경제 성장책으로 타 국가 경제개발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둘 다 맞는 평가가 아닐까요.'  

다음은 월간조선에 연재했던 이광요에 대한 평가라는 글이다.

-박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지도자는 그와 가장 닮은 사람이었다. 싱가포르 수상 리콴유(이광요). 리수상은 1979년10월16일에 방한했다.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수행장관'이란 유례가 없는 직함을 가지 고 리수상의 안내를 맡아 1박2일간 경주 일대를 돌았다. 박대통령이 리 콴유를 초청한 데는 '내가 건설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한번 보여주겠다' 는 의욕이 있었다. 리수상은 처음에는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 국 허드슨 연구소 소장 허먼 칸 박사는 리수상과 친했다. 김성진이 칸 박사를 초청하여 박대통령을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하여 말꽃을 피웠다. 칸박사는 그 뒤 리콴유를 만나자 "박정희란 인물이 간단치 않은 사람이니 꼭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리수상에게 자신의 작품인 포항 종합제철을 보여주고 싶어 했으나 자존심이 강한 리콴유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보겠다고 했다. 외무 부에서는 리콴유가 포항공항에서 내려 경주로 향할 때 포철을 관통하는 도로를 주행하여 가도록 짰다. 리수상의 옆자리에 타고 있던 김성진 장관이 보니 리콴유는 벌써 눈치를 채고는 차창 밖으로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다.

1박2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서로 돌아갈 때도 포철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김장관이 "두번이나 그렇게 하면 실례가 되니 경주에서 대구공항으로 가도록 노선을 변경해달라"고 했다. 경호실에서 "안 된다"고 제동 을 거는 것이었다. 김장관은 최광수 의전 수석을 통해서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냈다.

경주에서 대구로 달리는 길 양쪽은 화려한 가을날씨 속에서 풍요로운 농촌풍경이 황금물결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누런 벼이 삭, 지붕개량을 끝낸 깔끔한 농가, 지붕위에 널린 빨간 고추. 리수상은 비로소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가끔 시계를 보았다. 이런 농촌이 어디까지 계속되는지를 재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부러움과 오기가 뒤섞인 표정으로 상기되었다. 대구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에 탑승한 그는 이륙한 뒤에 김장관을 바라보고 말문을 뗐다.
"귀국의 농촌은 아주 실속 있게 잘 사는군요.".

그리고 나서 리콴유는 "이러한 발전의 비결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김장관은 박정희의 지도력과 외국에 나가 있던 우수한 두뇌들을 귀국시켜 국내의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하도록 한 정책을 들었다.

최형섭 과기처 장관이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찾아가서 애국심에 호소하고 좋은 연구시설과 대우를 약속하여 귀국시킨 사례들을 설명했다. 리 콴유 수상은 진지하게 경청하더니 비행기가 서울에 닿을 때까지 사색에 잠기는 것이었다.

10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환영만찬에서 리콴유는 박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데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 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시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성진은 1991년에는 주 싱가포르 대사를 지내면서 그와 재회하게 된다. 1994년1월19일 김성진(당시 대우그룹 부회장)은 월간조선을 위하여 리수상과 인터뷰할 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등소평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일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 두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 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 습니다.".

--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리콴유(당시는 수상직에서 은퇴)는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들어갈만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와 전정권, 특히 군사정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 었다.

아시아의 3대 지도자에 현직 대통령이 싫어하는 박정희를 포함시 켜서 괜히 한국-싱가포르 관계에 악영향을 주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리 콴유가 그 김영삼 대통령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박정희와 리콴유는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혹은 사대적) 추종을 거부하고 개발도상국의 현실과 동양문화의 토양에 적합한 자주적 정치체 제를 만들려고 했던 점에서 같다.

리콴유는 개인을 기초단위로 하는 서구사회에서 자라난 민주주의는 가족을 기초단위로 하는 동양사회에 그대 로 이식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권을 구현하는 방법에도 서구적 민주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적인 길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미국이 인권을 무기로 삼아 한국 중국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을 압박하는 것은 "다른 부문에서는 동양에 뒤지니까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인권을 들고 나 와서 괴롭히는 것일 뿐이다"고 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의 변호사이기도 한 리콴유는 서구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논리로써 당당하게, 공격적으로 서구 우월의식을 공격 하고 있다는 점에서 방어적이었던 박정희와 차이가 있다. 싱가포르에서 자동차를 손괴한 미국인 소년에게 태형을 가하자 미국 언론은 비판적이 었으나 미국인들 중에서는 "잘했다"는 여론이 더 높았다.

박정희가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리콴유는 서구민주주의 자체의 보편성을 부정한 데 대하여 그는 자유 민주주의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 한시적 유보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63년에 이렇게 쓴 적이 있었다.

[엄격한 의미로서 혁명의 본질은 본시 근본적인 정치사상의 대체와 사회정치구조의 변혁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점에 있어 한계가 제약되어 있고 그 혁명의 추진에 각양의 제동작용이 수반되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는 벗어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그것은 매우 힘이들고 어려운 길이다.]

박정희는 남북분단과 주한미군의 존재라는 제약만 없다면 리콴유처럼 서구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우리식 정치이념을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이다. 그가 자주국방을 통해서 대미의존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궁극적 목표도 서구민주주의에 맞설 수 있는 자주적 정치제도의 창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간조선 연재 이광요의 평가 중 http://pep.postech.ac.kr/solbut/mune/chosun/01_65.htm)


이승만의 경제적 무능의 여파로 전 국민이 경제적 빈곤으로 굶주리던 5.16 혁명시절, 필자 역시 춘궁기가 생민을 괴롭히고 보릿고개가 서민을 울리던 당시의 어린 시절, 일주일에 5일은 다반사로 굶으며 울 기운조차 없이 하루하루를 참담하게 허공만 바라보고 눈물짓던 기억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평생 쓰라린 상처로 남아있다.

굶주림으로 누런 부황기가 들어 개떡 하나도 삶의 희망이 되던 시절, 남의 채마밭을 서리해 주렁주렁 매달린 고구마의 흙을 털어 내 환희의 미소를 지으며 굶주림을 채우던 그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지금은 얼마나 포근하고 달콤한 천국인가.

어떤 때는 주인 아낙내에게 들켜 두 발을 한 손에 잡힌 채 거꾸로 매달려 옷을 벗겨 내리고 죽도록 두들겨 맞은 적도 종종 있었고, 봄이면 아카시아 꽃잎과 가죽나무 이파리를 먹는 것은 기본이고, 아카시아 새순이 난 연한 가지를 껍질 벗겨 특유의 찝찌름한 맛을 느끼며 먹기도 하고, 허기에 져 위장이 저려오면 맹물에 조선간장을 타 맹장국(당시의 고난을 겪은 이는 안다)을 만들어 빈속을 채우며 눈물도 많이 흘렸는가 하면,

당시 6.25가 끝난 지 얼마 안되어 집집마다 한 개 정도는 필수품으로 있었던 야전용 소형 삽을 들고 동네 마을 어귀나 산 어귀를 샅샅이 탐색하며 돼지감자(하지감자)를 캐 연명하기도 했다. 당시 굶주리던 시절은 하지감자 하나만 발견해도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즐거워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겨울이면 담장 없는 집에 묻어놓은 김장독을 서리해 얼음으로 뒤범벅된 석박지나 양념통배추를 포기 채 들고 마을 뒷산으로 도망가 이름 모를 묘지의 석상에 올려놓고 고사리 같은 손을 호호 불며 배를 채우곤 했던 참으로 가난하고 궁핍했던 어린 시절, 그때의 처절하고 우울한 삶의 투쟁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린 시절 철이 들어가면서도 유일한 위안이 <절망은 없다>라는 방송 다큐멘타리 드라마를 들으며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승만의 무능으로 전국이 비슷했다. 비록 필자는 그와 같이 가난했던 시대 중에서도 더욱 곤고한 삶을 경험한 사람이지만 당시 시대를 산 사람으로 이런 경험을 일체 안 해 본 사람은 일제가 물러가면서 미군과 이 승만 및 한민당 일당이 통째로 가로챈 무려 남한 재산의 80 %에 이르는 적산(敵産) 가옥과 적산 부동산 등의 소위 '귀속재산'을 모종의 커넥션을 통해 불하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시대적 경제난과 무관하게 생활한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인권탄압과 서슬 퍼런 독재,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 걸친  부정부패, 총체적인 무능이 동인이 되어 일어난 4.19로 자유당 장면 정권이 들어서서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내각제로 바뀌고 나니 무한자유 방임이라는 소화불량으로 민심이 안정되기는커녕, 마치 가열된 플라스크 속의 물이 끓듯 요란하게 서로 제 몫 내라고 연일 데모 투성이로 밤을 지샜다.

필자는 어린 시절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로 변모했지만 모교인 대전고와 대전중학 담 옆의 진흙도랑을 따라 쫓고 쫓기는 투석전들이 4.19 혁명의 소용돌이인 줄도 모르고 도기공장의 도자기 빚는 옆에 서서 그저 신기한 듯이 구경한 바 있다.  (당시 대전고 교문은 5거리쪽에 나있어 수위실이 헌병초소처럼 지키고 있었고 대전고와 대전중 중간 남쪽 담에 문이 나 있어 담밖은 뻘흙개천 길이 보문산쪽으로 나있고 학교안으로는 2단 계단과 풀밭 둔덕으로 이루어져 계단 밑에는 테니스장이 나 있었다. 지금은 그리도 커 보였던 초등학교 교정이 조막만 해졌듯이 지금은 그리도 어려보이는 대전고 고교생이(지금 계산하면 13-15년 선배 동문인듯) 군사훈련을 하고 고싸움을 하는 것을 보면 왜그리 어른스러웠는지도 아스라 하다. 지금은 대전고 교문을 비롯해 강당이 서있는 곳에서 대전고 운동장  반 쪽이 미군부대여서 우리 굶주린 5-6세 꼬마들은 대전중 운동장을 가로질러 미군부대 철조망에 다가가 핼로 껌! 을 외치며 구걸하던 기억은 새삼 시대의 질곡을 느끼게 한다. 필자는 대흥초등학교 1학년 다니던 시절부터 당시도 나름대로 가장 번화했던 은행동 대전극장통 극장앞 고려당에서 당시 용어로 소위 아이스케끼를 받아다 본인 몸보다 더 커 보였던 아이스케끼통을 매고 다니며 팔던 아픈 기억이 있다. 하여 못사는 제 3세계 가령 베트남이나 필리핀의 어린 학동들이 길거리에서 무엇을 파는 모습을 보면 연민의 정을  온 몸으로 느낀다. 심지어 당시 전국의 국민학교에는 오전 오후반이 있어 본인은 오후반인줄 알고 아이스케끼 통을 교문앞에 깔고앉아 팔고 있었는데 같은 반 아이들과 여자 담임 선생(이명주)이 우르르 교문밖으로 몰려 나와 황당해 했던 기억이 있다. 알고 보니 오후반이 아닌 오전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데모는 장면내각이 4.19로 폭발된 민중의 기대치와 요구에 턱없이 함량미달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장면이 친일 매국전력으로 비난받아온 사실과 함께(임 정 국무위원 김승학이 金 九 지시로 작성한-친일파 263명 ‘반민특위’처단  殺生簿 초안에 장면이 들어있다) 당시 민주당 의원의 40% 이상이 친일지주 계급의 자식이었으며 그들 중 4분의 1은 직접 조선 총독부 관리였다는 사실은 백성들의 요구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민주당 내무, 국방장관 현 석호는 총독부 충남 광공부장 출신이고, 상공부 장관 이 태용 역시 농상국 사무관 출신이었으며, 내무차관 정 진동은 충북 광공과장 출신이며, 치안국장 박 주식은 일제하 마포경찰서장 출신, 재무장관 김 영선은 진도군수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 김 성용은 일본 군수성 관리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 이 석기는 아산군수 등 다 늘어놓기도 힘들 정도였으니 이 승만 자유당 정부 때의 인물들과 합하면 어느 정도인지 가히 실정을 알만하다 하겠다.

해방이후 비로소 처음 만끽해보는 자유다운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되는지 조차 몰라 어디서 어디까지가 자유의 한계인지를 모르고 우왕좌왕한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우리민족의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밤낮 가리지 않고 유감없이 선보인 때가 바로 이때이다.

4.19때는 우스개 소리로 초등학생도 데모를 한다고 할 정도로 집단이기주의가 극성을 부린 때이다.

6.25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에서 육 여사와 갓 결혼해 신접살림을 차리고 있을 무렵, 김 종필의 찝차를 얻어 타고 대구까지 피난길에 올라 박 정희 신접 살림집의 건넌방에 신세지고 산 인연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5.16혁명 참여와(김 종필과 함께 광명 인쇄소에서 혁명발표 원고, 혁명 공약문 인쇄 담당, 국가 재건최고회의 경제고문) 박 정희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필한 전 공화당 원내총무 7선 의원 출신 김 용태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참고로 그는 울산공단을 처음 기획해 오늘의 울산이 있게 한 장본인이자, 20 대 시절 충무공 기념사업회에 잠시 몸담고 있던 인연으로 현충사 성역화를 처음 건의한 장본인이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처음 기획, 건의한 장본인이면서도 삼선개헌 반대로 공화당에서 제명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김 용태로부터 경부고속도로 건설기획을 보고 받은 박 정희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독일 방문 시 아우토반을 직접 달려본 뒤 비로소 크게 느낀 바 있어 마침내 김 용태의 건의를 받아들여 선거공약으로 채택한 뒤 한국경제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그 외에도 그는 검도협회, 경제인 협회를 만들고 국악학교를 지었으며 오늘날 프레스센터의 전신인 신문회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직전, 나라형편은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방불케 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어린이들의 어린이 데모, 경찰 공무원들의 경찰관 데모, 깡패. 양아치들의 폭거 난동, 백주의 살인 방화, 교원노조의 결성, 학생들은 판문점에서 남북협상을 하겠다고 나섰다. 치안은 마비되고,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사회는 완전히 무법천지가 되어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이르고 만 것이다.(『김 용태 자서록』집문당 刊) '  

우리민족이 왜 이토록 개인 이기주의와 집단 이기주의가 발달했는지는 차차 설명하겠다. 아뭏든 우리는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를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노사의 불화를 통해 수없이 지켜본 바 있다.

하다 못해 부실기업 기아의 김선홍 전 회장이 그렇게 시간을 끌지 않았어도 IMF가 그리 빨리 오진 않았을 거라고 자조 섞인 말로 신문지상에서 떠들었겠는가. (그 이면에는 IMF를을 초래한 삼성의 기아차 인수공작이 있다는 설이 있다.-삼성캐피탈 등 삼성의 금융계열사들이 빌려주었던 4000억원을 급작스레 회수하는 바람에 재정난에 봉착해 파산위기에 몰렸다는 주장-) Click here!

어찌되었건 기아의 노조도 결국은 김회장의 유임을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다. 오죽하면 대우 자동차를 인수하려 했던 모 외국 기업이 무슨 놈의 한국 근로자들은 경영권까지 간섭하느냐며 한국 근로자들이 몹시 다루기 힘든 존재임을 피력했을라고.

암이 커지면 목숨까지 빼앗는 것 같이 척결되지 않은 불의, 부정한 세력은 세월과 함께 자신의 몸체인 암세포를 키워 집단 이기주의인 암 덩어리로 변해 민족을 뿌리 채 뽑아낼 수 있는 건 당연지사다.

대국적으로 보면 5.16 혁명은 마치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한 동학혁명이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 굶주림에 대항해 일어났듯이 사회의 구조적인 암 덩어리를 뽑기 위해 그리고 6.25 전쟁을 치른 이 나라 백성의 굶주림을 면하게 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결국 이상의 두 가지 목표 중에서 역사관 정립을 통한 국민의 도덕질서 함양과 부의 공정 분배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사회정의실현 등의 측면에 입각, 사회의 구조적인 암 덩어리는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으나 민생고와 경제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목표를 다했다고 긍정평가 할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은 부패, 무능으로 산업건설을 전혀 이루지 못한 이승만의 나라 살림을 물려받아 강력한 군부의 개발독재로 산업근대화를 이룩한 공로에 그 초점이 있다. 물론 그의 일제 만주 군관학교 출신 전력과 빨갱이 전력 등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다시 한번 받을 기회가 있겠지만 정치적 허물과 경제건설의 공로를 비교하면 경제건설의 공로가 정치적 허물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치적을 분명히 남겼다.

특히 한국인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창조적인 두뇌를 소유한 비상한 민족이므로 역설적으로 그 어느 민족보다도 이기적이어서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영도자가 강권을 가지고 밀어부치지 않으면 제각각 생각이 다르고 이기적인 이 백성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기가 아주 어렵다.

오죽하면 전 두환, 노 태우, 김 영삼 시대를 차례대로 겪고 난 사람들이 비록 삼청 교육대나 광주 사태 등으로 호되게 당했기는 했어도 전 두환 정권 때가 그래도 가장 강력하게 밀어부쳤기 때문에 저희들끼리야 리베이트니 뭐니 수 천억 씩 해 먹었어도 경제는 제일 나았다는 우스갯소리를 했겠는가.

2000년 들어 전 세계의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와중에도 중국만이 7%이상의 고도성장을 유지하는 이유는 강력한 통제사회여서이지 민주화가 되어서가 결코 아니다. 중국에 갑자기 민주화가 닥치고 노조가 횡행하고 사회 곳곳에서 제 몫찾기 데모와 스트라이크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중국의 고도성장은 참으로 요원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이 상해의 중심 구역이나 북경의 주요도로 왕부정 가 주위를 강력하게 차단하여 차없는 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 역시 강력한 중앙통제 국가인 탓에 일사분란하게 국민들이 따라주는 것이지 민주화된 사회라면 갑론을박 치고박고 시간만 하세월일 것이 분명하다.

만약 우리의 종로를 통제해 차 없는 도로를 만든다고 해보라. 언론이 가만있고 시민단체가 가만있고 각종 사회 압력단체들과 정당 의회가 가만있겠나. 민주주의도 이같이 때론 낭비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란 걸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적인 상황에서 개발독재는 한국인의 문화특성상 가장 효율적이었다고 생각된다. 프랑스의 드골 정부도 2차 대전 종전 후 개발독재를 통해 세계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지 않았던가.

그런 면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설립에 즈음해 단국대 김 유혁 명예 교수가 '그의 치적이 시사하는 바는 아시아적 빈곤과 후진성의 뿌리를 뽑아내는 교과서적인 길잡이임을 의미'한다고 전제하고 경제개발, 자주국방, 국토개발 등 근대화 성취 면에서 크게 공헌했으며 20세기 아시아의 인물로 손꼽히는 그에 대한 인식도로 보아 대승적 견지에서 이 사업의 추진이나 정부지원은 적절하다고 한 말은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전쟁 중 대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접살림 집 건넌방에 더부살이로 함께 살면서 가장 측근에서 박대통령을 지켜보기도 했고 지근에서 국가 경제개발에 깊숙이 관여한 김 용태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우리 나라는 그 동안 오랜 가난으로 나라가 황폐해졌고 국민들은 헐벗고 살아왔다. 일제시대에는 굶주림에 견디지 못한 동포들이 만주, 일본으로 먹을 것을 찿아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기도 했다.

해마다 봄철이 되면 연중행사처럼 찿아 오는 춘궁기다 보릿고개다 하여 백성들은 부황이 들고 허기로 숨져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처럼 가난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인 양 굶주리며 살아왔던 것이 1960년대의 상황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50년 6.25 전쟁 때 대구에서 " 민족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정신을 개혁하여 새로운 민족상을 가다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에서 군부조직이 그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후세의 사가들이 <5.16 군사혁명>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든 상관없이 다만 그때 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로서는 국기(國基)를 바로잡고 <빈곤타파>라고 하는 혁명의 목표를 성취하였으니 그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 (『김용태 자서록』)

실제로 다음의 5.16 혁명공약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제 1조. 반공을 제 1의 국시로 삼고...제 3조.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제 4조.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다한다.

당시에야 서로 다른 정치적인 입장과 당리당략적인 차원에서 김종필과 오오히라간의 오오히라 메모와 6.3 한일회담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굶주림에 직면한 백성을 먹이고 입혀야만 하는 당시의 절박한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할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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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과 한국경제의 근대화 (정 주 영 - 현대그룹명예회장)

나는 오늘의 우리 경제문제의 시각을 한마디로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경제의 근대화>로 말하고 싶습니다.」한국 경제사에 우뚝 솟은 인물.건설.중공업. 자동차에서부터 전자의 첨단산까지 우리 경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 정회장이 기억하는 박정희 대통령은 곧 한국경제의 근대화 였다. 통치기간 동안 나라를 어떻게 발전시켰느냐가 중요.
「2차대전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일본 사람들이 떠나간 후 극빈으로부터 탈피해야 했고 치안문제도 큰 것이었습니다. 초대 이대통령 시절은 일단 치안을 잡는데 성공했습니다. 치안이 안되면 사회가 어지러우니 자연히 치안중심의 정치였습니다. 경제발전도 하고 싶었지만 10년 통치기간 동안 결국 못했습니다. 제2공화국도 민주정치를 표명하고, 하려고 했지만 못했습니다.」어느 정치가가 민주정치를 좋아하지 않겠느냐 반문하며 2차대전 후 발전한 모든 나라들이 경제가 발전한 후 정치가 병행해서 발전했다고 강조한다. 「나는 왜 박대통령에게 정권이 넘어 갔는가를 중시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혼란, 학생운동 등 그 형편, 주어진 여건에서는 민주정치를 확립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민주정치만을 표방할 실정이 아니었죠, 그리고 정치나 사회가 국민 뜻대로 되어가지만은 않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정권을 어떻게 물려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통치를 맡은 기간동안 어떻게 했는가, 어떻게 국가를 발전시켰는가를 중시해야 한다고 정회장은 말한다.
「박대통령은 보통나라 정치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했습니다. 6.25 이후 폐허 속에서 우리나라는 기술, 자본, 근로경험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죠. 그분은 첫째 자본을 어떻게 구할까 고민하다가 차관을 구해 경제를 발전시키도록 구상하셨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어느 기업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차관을 구해올 신용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박대통령은 정부가 그 보증을 할 테니 기업이 알아서 잘해 가지고 한국산업을 근대화시키자고 하셨습니다. 」
그래서 당시 기업들은 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실패한 사람은 형무소행을 각오하고 차관을 들여와 산업근대화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박대통령이 이룩한 한국산업의 근대화는 다른 나라 정치가가 할 수 없는 차관기업의 성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빚을 들여온다고 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차관을 들여와 한국산업을 근대화하였습니다.」
88올림픽 유치신청도 박대통령이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하나도 놓지 못한 한강다리를 9개나 건설한 것만 보아도 경제발전은 획기적인 것이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들이 밀접해 있는 한강변의 반포에서 잠실까지의 제방을 쌓아 「강남」지역을 건설한 것도 박대통령이었다고 상기시킨다. 「요즈음 공산권과의 수교, 경제 교류 등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박대통령의 한국산업 근대화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88년 서울올림픽을 성대하게 마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우리 경제가 발전되지 않았으면 올림픽을 유치하지도 치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 동안 특히 소련, 동구권 나라들은 북한의 선전 때문에 우리나라를 거지나라로 알다가 올림픽 때 다녀가서는 그 실상을 알게된 것이죠.」 지금 우리나라가 소련이나 동구 등 우리와 교류가 없고 적대시까지 하던 나라들과 활발하게 정치.경제적 교류를 갖게된 것도 모두 박대통령이 이룩한 경제발전이 기틀이 되었다고 강조하는 정회장. 그가 소련과의 경제교류에 주력하는 이유를 소련을 통해 북한을 개방시켜 남북평화 통일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련에게 우리가 정직. 성실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줄 수 있으면 그 영향으로 북한도 우리를 적대시할 수 없을 것이고 경제교류로부터 이루어져 남북의 국민이 하나가 되면 정치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편다.서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바덴바덴에서도 우리나라와 최후까지 경쟁을 벌였던 일본은 우리나라를 일본에서 60억불 차관을 가져가는 가난한 나라하고 악선전하기도 했다고 올림픽 유치현장을 되새기는 정회장은 올림픽 유치신청도 이미 박대통령이 해놓은 것이라고 한마디 덧붙인다.「처음 박대통령과 만난 것이 제2한강교 건설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의 뜻은 가장 싸고, 가장 튼튼하게 되도록 빨리 다리를 놓자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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