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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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21.부패,무능,독재의 화신 이승만과 4.19 헌법정신(반부패,반무능,반독재)에 반하는 이승만 동상 건립&방응모 친자 방재선과 양자 방우영 가문의 재산찾기 소송의 내막




다시 54년 반올림 개헌인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얘기로 돌아가 보자, 11월 27일 국회가 열리자 회의장 주변에는 고액권 지폐가 준비되어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의원에게 50만 환의 대가가 주어졌다. 136표만 얻으면 헌법개정안에 필요한 의결정족수 3분의 2에 달한다. 하지만 거액의 사탕발림 뇌물이 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135표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사회를 보고 있던 최 순주 국회 부의장은 개헌안 부결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튿날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재적의원 203 명의 3분의 2의 정확한 수치는 135.333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올림하면 136표로 가결된 것이라고 견강부회하고 먼저 부결된 것으로 발표한 것은 계산착오이므로 취소하고 가결된 것으로 번복 선포했다.

사사오입 반올림 개헌으로 재선이 가능해진 교활한 이 승만은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재선 연임을 끝으로 물러간다고 불출마 의사를 발표하는 일방, 각종 어용단체들로 하여금 관제 시위를 열게 해, 이 승만이 아니면 자결하겠다는 노동조합 대표의 촌극과 나라를 계속 지도해 주십사 요구하며 혈서를 쓰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민심을 왜곡해서라도 이 승만 출마의 빌미를 제공하도록 정국을 유도했다.

이 승만은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결국 불출마 발표 17 일만에 비록 본의가 아니지만 국민의 뜻에 의해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의사를 밝혔음은 물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부통령 후보 이 기붕과 온갖 부정과 탈법에 의해 선거유세 중 급서거한 신 익희, 장 면의 민주당과 조 봉암, 박 기출의 진보당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이때 이 승만이 504만 6437표, 조 봉암 216만 3808표, 고 신 익희 185만 표로 공식 발표되었다.

4.19의 파국이 도래하기 전, 50년대 말이 되자 미국은 자국상품을 팔아먹는 단계로 이행시키기 위해 원조를 급격히 삭감시켜 나갔으며 500환대 1달러의 환율을 650환대 1달러로 인상조치 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공생관계로 밀착한 미국과 이 승만의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했으니 경제에 대한 그들의 이러한 악수(惡手)의 결과는 경제전반을 어렵게 만들어 57년에 8.7%의 경제 성장률이 58년에는 7.0%, 59년에는 5.2%로 갈수록 주저앉았다.

이 승만은 오히려 58년 군사비를 전년에 비해 110억 환 증가시키고 전체 세금은 무려 500억 환이나 더 거두어 들였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군사기지를 위한 농지의 강제징발, 불법적인 소작료, 엄청나게 비싼 비료, 저 곡가 정책 등에 대해 항의하고 근본적인 토지개혁요구가 일어났다.

위기에 봉착한 이 승만은 40일간 대대적이고도 무자비한 반대자 소탕에 나서 1만 명의 민주인사를 체포, 투옥하고 곧 실시될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지주, 매판 자본가, 이 승만에게 아부해 감투를 얻어 살을 찌운 고급 관료 등 돈 많은 자가 아니면 국회 진출이 어렵도록 선거 입후보자에게 공탁금으로 50만 환을 내도록 했다.  

58년 4월 국회의원 선거 직전 2만 명이 체포, 투옥되었다. 대한민국의 관제 선거비리의 원조는 이 승만이므로 각종 각목사건과 자유당 깡패들의 폭력사건 및 집단 난투극, 집단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표 바꿔치기, 강요된 공개투표 등 별별 편법이 다 동원되었으므로 더 이상 언급은 잔소리가 될 것이므로 차라리 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선거 후 58년 11월 이 승만은 인권탄압 법안과 권력수호의 차원에서 국가 보안법을 개정해 남북한의 통일주장을 포함, 사형 내지는 종신형에 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키 위해 입법안을 제출해 동년 12월 24일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정부에 대한 쓸데없는 간섭을 배제시키기 위해 정부의 모든 분야에 대해 정보를 캐는 사람에 대해 이적행위로 간주 누구를 막론하고 10년의 징역에 처하고, 대통령, 국회의장, 기타 대법원장을 비방한 자에게도 불경죄라는 이름으로 10년형으로 다스리는 보안정치 시대가 개막되었다.

국가보안법 개정은 이 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워밍업 단계로 이 승만 반대 시위와 정부비판 기사가 연일 게재되었고 이 와중에서 경향신문은 폐간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승만 스스로 무덤으로 판 역사적인 3.15 대통령 부정선거가 막이 올랐다.

이 승만은 부정선거 자금을 총력을 기울여 긁어모았고 온갖 부정, 탈법이 총출연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로 치루어진 이 선거에서 민주당 조 병옥 후보는 신  익희 후보의 전례처럼 선거직전 사망했다.

부정선거의 결과 이 승만은 총 투표수의 97%를 획득해 북한 김 일성의 공개투표에 못지 않았다.  부정선거의 원단이자 그랑프리 격인 3.15 부정선거를 치룰 때까지 이 승만을 포기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미국은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우려해 마침내 충직한 개 이 승만 카드를 버리기로 최종 단안을 내리고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는 등 전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사태는 4.19 혁명으로 미국도 되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는데 매카나기 주한미 대사는 원조중단의 위협적인 카드를 들고 이 승만을 찾아 가 직접 사임을 요구했다. 미국을 숭배의 대상을 넘어 자유와 민주의 조국이자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로 여기는 친미 사대주의자 이 승만은 마침내 4월 26일 국민의 뜻이라면 대통령직을 물러난다고 그럴싸하게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으며 사임의사를 발표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말이 좋아 사임이지 엄밀히 말해서 그는 국민의 뜻 그것도 반부패, 반무능, 반독재라는 기치를 내걸고 일어난 4.19라는 민중의 힘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것이다. 겉으로는 민주와 자유의 미국을 아버지처럼 신봉했으면서도 자신은 정작 권력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루마니아의 챠우셰스크보다 더 고약한 공포의 보안정치로 일제 식민지 굴레 속에서 갓 해방된 불쌍한 백성들을 친일 매국노, 친일 지주, 매판자본가들과 힘을 모아 가차없이 짓밟고 뭉갰으며 민주와 자유를 유린한 독재자로서 행동한 철저한 이중인격자였다.

4.19 민중혁명의 타도대상에 위치해서 챠우셰스크 처럼 처형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 그가  80 노구에 뼈저리게 교훈을 삼아야 했던 말은 바로 독립 외교론을 주장한 자신과 독립 준비론을 주장한 도산 안창호에게 경고한 다음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었을 것이다.

무 정신의 민족, 무 국가 민족의 암흑시대에 있어 역사 혼의 등불을 치켜세워 민족의 길을 제시했던 단재는 대부분의 무장독립군이 그러했던 것처럼 돈 없고 무기 없는 모든 농민, 노동자들이 일치 단결하여 조선민중을 억압, 착취하고 있던 식민지적 제 기구와 그 앞잡이들을 무장폭력으로 타도할 것을 주장했다.    

「외교론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다른 나라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설령 우리나라가 외교에 의하여 독립을 보장받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외교 상대국의 의견을 존중하여야 하며, 또 그 나라가 일본과 같은 침략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더구나 외교를 통하여 독립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한 객관적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의 일차적 수단을 외교에 둔다면 자기 민족의 주체적 독립운동을 약화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외세의 침략이 더 심할수록 우리의 부족한 것이 점점 증가하여 그 준비의 범위가 전쟁이외에까지 확대되어 교육도 진흥하고 상공업도 발전시키고 기타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 되었다. 경술 이후 각 지사들이 경향각지에 출몰하여 목이 터지도록 준비! 준비!를 외쳤지만 그 소득은 불과 몇 개의 불완전한 학교와 실력없는 단체뿐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정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로는 그 주장의 착오 때문이라. 강도 일본이 정치, 경제적으로 착취를 자행하여 경제가 날로 쇠퇴하고 생산기관이 전부 박탈되어 먹고 입을 방책도 어렵게 된 때에 무엇으로 어떻게 산업을 발전시키며 교육을 진흥하며 더구나 어디서 얼마나 군인을 양성하며, 설혹 양성한들 일본 전투력의 100분의 1이라도 되겠는가. 실로 한바탕의 잠꼬대가 될 뿐이다.」  

민족사학의 거목이자 정통 무장항쟁 독립주의자인 단재 신 채호 선생은 이 승만의 외교 독립론과 민족주의자인 然하며 조선총독부와 밀월관계를 즐기고 있는 국내의 김 성수 등 친일파와 도산 안 창호의 준비론에 대해 모두 잠꼬대 같은 소리라 일축하고 오직 민중이 자각해 직접 혁명대열에 참여해 무장해서 투쟁해야만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즉 호지명의 월맹 베트콩이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한국, 미국의 최 정예 부대와 풍부한 군수물자, 막강한 첨단 무기를 무력화시키고 끝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떠나 민과 하나가 되어 외세와 끈질기게 투쟁한 베트콩 게릴라들의 백절불굴의 무장 투쟁정신 때문이었지 결코 격에 맞지도 않는 외교주의나 힘을 키우는 준비론 때문이 아니었다.

일제 하 조선총독부의 허가아래 신문이나 잡지를 내며 나름대로 민족을 위해 문화운동을 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는 이들에게 단재 신 채호는 일본강도 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짖는 자가 도대체 어떠한 부류의 인간들이냐고(동아냐, 조선이냐) 호통치고,

  약탈경제 제도하에서 생존권이 박탈된 민족은 그 종족의 보존도 의문스러운데 하물며 문화발전의 가능성이 있겠느냐고 통박하며 해방이후 민족자본가내지 반공 인사로 변신한 일제하의 친일 매판자본가를 준엄하게 다그친다.

그는 또 그러한 문화운동은 식민지 지배권에 반대하여 힘있게 투쟁하지 못하고 단지 식민지 지배세력에 의해 주어진 한계에 순응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결국 식민통치에 봉사하는 매국행위에 불과하다며 춘추필법의 역사정신으로 준엄하게 선을 그었다. 종전 후, 프랑스 드골 정부가 독일 괴뢰정부 비시정권 하에서 단 3일간 신문을 발행했어도 사주를 종신형 아니면 사형에 처하고 전 재산을 몰수한 것은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4.19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승만의 경제무능과 끝간데 없이 속속들이 썩은 부패, 챠우셰스크 이상가는 보안정치와 독재에 지친 민중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조선일보 전 사장 방 우영도 자신의 회고록「조선일보와 45년」에서 이 승만 치켜세우기의 일환으로 한 미국 기자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이 승만에 대한 인물평과 일화를 소개한 바  있지만 그의 인용은 결과적으로 이승만을 치켜세우기보다는 이승만의 추악한 면만을 부각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 '<일본일기>를 저술하여 유명해진 '시카고 선'의 주일 특파원 마크 게인이라는 기자는 이 승만을 가리켜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쓴 노회한 봉건망령이 정권을 휘어잡고 백성을 농락하고있다" 라고  비난했다' -

이 승만의 정치적 농단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6.25 전쟁 후, 전 국토는 잿더미로 변해 황폐해진데다 물자도 귀하고 식량도 귀해 온 백성은 그야말로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이런 와중에도 장기집권의 노망으로 이 기붕을 내세워 불법 사사오입개헌이네, 3.15부정선거네 하며 국민을 기만하고 정권욕에만 몰두하다 4.19에 의해 강제로 쫓겨난 것이다.

우리 역사에 이 승만과 같은 해악한 인물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되기에 대대손손 영원히 잊지 말자고 반 이승만 정신인 4.19 정신을 헌법전문에 새겨 넣었다.  

적어도 3.1 정신과 4.19 정신을 계승했다는 헌법정신에 의거한다면, 그리고 그 헌법 테두리 내에서 법을 만든다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문제의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하는 정신나간 일부 국회의원들의 주장은 분명히 전후모순이자 자가당착적인 궤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얼빠진 국회의원들을 모조리 바꿔치우기 위해 가수 이 정현의 바꿔! 라는 노래가 정국을 강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승만의 무능과 독재에 항거해 그를 축출시킨 4.19 정신을 계승한 헌법과 그 정부의 법을 만드는 바로 그 입법관들이 그것도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버젓이 이승만의 동상을 세우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반 헌법적 작태이기 때문이다.

만일 동상을 굳이 세운다면 이승만을 쫓아낸 4.19정신의 계승조항을 헌법에서 삭제시키고 강행하든지 아니면 그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의 국회의원자리를 내놓아야만 하든지 택일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목 요상이 누구인지 한번도 본 바 없으며 박 준규라는 사람도 일 면식조차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가질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이 승만 동상건립은 97년 10월 한나라당 목 요상 의원 등 얼빠진 64명의 추천으로 '이 승만 기념사업회'의 건립추천서가 국회에 제출되어 필자가 본 파트를 다 쓴 뒤인 99년 12월 국회 본회의에 통과하여 동상건립 소식이 들리매 다시 첨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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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건립 제막식에서 박 준규 국회의장이 "의회민주주의 52 년 만에야 지도자 동상을 세우게 되니 머뭇거린 우리의 어리석음과 사관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고 소회(所懷)를 피력한 한 중앙일간지의 보도를 접하고 필자는 해방이후 역사정립이 안된 것이 참으로 무서운 사실임을 재삼 확인하게 되었다.

그들이 해방이후 역사왜곡의 틈바구니에서 민족혼이 무엇인지 모르는 불쌍한 백성을 담보로 권력을 얻어 정치적으로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역사정신의 정맥과 민족정사의 본령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후세에 준엄한 역사의 단죄를 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그들이 일 국의 선량이요, 국회의장이라는 신분으로 발언하고 행동한 점에서 그 책임을 가볍게 물을 수 없을 것이며, 좋으나 싫으나 현실적으로 전 국민의 가치관 척도의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그 죄가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무책임하게 내뱉은 그러한 젊쟎은 말 한마디가 은연중 사회 저변에 던지는 가공할 만한 악영향이 백주 대낮에 날뛰는 살인마보다 수 백 배, 수 천 배 큰 것임을 감안하면 그 죄가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죄질 역시 이들 조무래기 살인마보다 양호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의 중추를 왜곡시킴은 물론 민족사의 조타수 역할은 그만두고라도 오히려 민족혼을 오도시킨 그들이 민족정기를 말살시키고도 죄의식조차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볼 때, 이들 얼빠지고 혼 빠진 반민족적 망령들이  반 4.19 정신, 반 이 승만 정신에 기초하고 있는 헌법전문에 역행하는 반국가적인, 반민족적인 발언이란 점에서 지탄받아 마땅하다.

무릇 군자는 올바른 민족정사와 민족정기인 천명을 두려워하거니와(君子畏天命) 소인은 자신의 이름 석자가 역사에 더럽혀진다는 개인적인 천명조차 알지 못해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小人 不知天命而 不畏也)고 했다.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혼의 준엄함을 모르는 이들 반 헌법적, 반국가적, 반  역사적, 반 민족적 인물들에 대해 후세의 사가들은 반드시 춘추필법의 필봉을 휘둘러 마치 오만무도하기 짝이 없던 진양지난(晉陽之難)의 주인공 지양자(智襄子)가 어육지경 신세로 3족의 멸문지화를 당했듯이 일도지하에 민족사적 심판을 내려 후세의 반면(反面 )스승으로 삼게 할 것이다.

또 후세의 사가들은, 단재 신채호가 소위 민족의 반역자라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한 인물로 정통 독립운동가들을 애먹였으며, 친일매국노들을 품에 넣고 보호함은 물론 그들과 손을 잡고 정권을 나누어 먹었으며,

친일 잔재청산을 방해해 반민특위를 해체했는가 하면, 6.25 당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한 살인마로 수많은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부정선거로 정권연장을 도모하다 쫒겨 난 이 승만을 옹호하기 위해, 반 이승만 정신인 4.19 정신으로 건국정신을 삼은 헌법정신을 깡그리 뭉개고 국회의사당에 이 승만 동상을 세운 천하의 날 건달들을 친일망령이 스며든 사적(史賊)이라 평할 것이다.

아니 사관정립이 안된 무지몽매한 인간으로 넘기기에는 너무나 막중한 자리를 차지한 공인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혼의 중추를 왜곡하고 민족사를 오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백주 대로의 조무래기 살인마 강도보다 더 많은 해악을 끼치는 정치적인 사적(史賊)일 뿐이다. 뿐 만 아니라 이런 인간들이 해방이후 반세기 동안 이 강토를 좌지우지했다는 것 자체가 민족의 불행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승만을 제자로 둔 송재 서재필마저 자신의 송재일기에서 이왕가의 후손인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그 호사와 사치가 한계를 넘었다고 비판한다. 상해임정의 더러운 뒷골목을 거지헐랭이 옷을 입고 그  속에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쓰일 폭탄을 숨기고 다닌 김구(백범일지 참조)와는 천양지차로 미국에서 상해로 보내져야 할 독립운동자금을 가로채 물쓰듯 쓰며 당시로서는 미국 최고위층이나 최고 상류층 인사나 탈 수 있었던 최고가의 크라이슬러를 몰고다닌 이승만. 이승만은 한 술 더 떠 임정과는 전혀 상의 하나없이 임정의 공채까지 발행해 개인적으로 유용해 쓴 위인이며 유명한 구미위원회 사건으로 당시 일본과 함께 한반도와 필리핀에서의 상호지배를 인정한 식민지 제국주의 치하의 미 국무부에 엉뚱하게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구걸한 사대주의자다.(박용만의 하와이 독립운동단체 재산을 통째로 먹으려고 사기치다 박용만과 멱살드잡이한 일도 있다(박용만 가문은 대표적 독립운동가 가족으로 3형제가 모두 무장항쟁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생각해 보라 베트콩이 무장항쟁주의를 하여 오늘날의 월남이 되었지 이승만처럼 외교를 해서 나라를 세웠나? 베트콩이 통일 베트남을 위해 싸운것은 지구촌 제1의 패권국가 미국과 귀신잡는 해병으로 유명한 따이한이었다. 그들은 국력으로는 1000년을 가도 따이한과 미국을 잡을 수 없었지만 정신력 하나로 베트남을 통일로 이끌어냈다.(수준이 모자라는 어떤 덜떨어진 얼간이 하나가  베트콩 월남을 예로 들었다 하여 필자를 전라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정치이데올로기성 협박 이멜을 보내왔다) 이승만처럼 제국주의 치하에서 말도 안되는 외교로 승부를 본 것이 결코 아니었다.) 헌법전문에 3.1정신과 반 이승만 정신인 4.19정신을 계승한다 했지 이승만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은 없다. 이승만은 오히려 임정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무장항쟁주의 독립노선을 방해하여 외교노선으로 당시로서는 황금 자금줄인 미주의 독립자금원을 차단했고 해방이후 미군정의 시다바리로 김구마저 암살했다
*첨가(2017.12.22) 참고자료“서재필은 일제 밀정, 안중근은 고종 밀명 받고 거사”(대한제국 관련 저서 4권 출간한 황태연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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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보기에 총선 시민연대의 낙선 시민운동이 이러한 점을 언급 안한 것은 역사의식이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근자에 민족혼이 해이해진 틈을 타 이승만 세우기에 열을 올리는 조선일보가 있다.

조선일보가 이승만 세우기에 열을 올리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이는 이미 알려진 계속 후술할 내용만으로도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잠시 인내해 계속 읽어주면 고맙겠다.
여기서 잠시 방응모 아들 방재선과 현재의 조선일보 사주 장우영 일가에 대한 재산찾기 소송에 얽힌 가문을 비밀을 통해 본질에 접근해 보기로 한다. 조선일보의 가문은 이제 개인의 가문이 아니라 싫든 좋든 전 민족의 역사적 관점이 반영된 공인의 가계가 되었다. 함께 들여다 보자. 중요한 점은 친아들인 그가 부친의 친일전력을 인정해 참회하고 그 대신 조선일보를 찾으면 국민주의 형태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눈물어린 고백을 한 점이고 현재의 방우영 일가는 현재의 조선일보를 무기삼아 가문의 친일 전력을 정당화하고 왜곡한다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뿌리없는 나무에 꽃이 피었다"?
그가 '<조선>의 주인' 주장하는 이유
[심층취재] 방응모 아들 방재선 씨의 호주상속 소송
정지환 기자jhjeong@digitalmal.com
▲ 방재선 씨가 9월 18일 서울지검 기자들에게 호적등본을 보여주며 방일영 씨의 재산상속이 무효임을 주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국내신문 발행부수 1위를 자랑하는 조선일보가 '총성 없는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렸다.

지난 9월 18일. 조선일보 경영권의 적자(嫡子)임을 자처해온 방재선 '계초 방응모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58)이 방일영(79), 방상훈(54) 씨 등 현 조선일보 족벌사주 일가를 향해 '호주상속 원인무효 소송'과 '재산상속 원인무효 소송'을 동시에 제기한 것이다.

방재선씨는 이날 법원에 접수한 소장에서 "민법상 고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의 직계비속(直系卑屬)이자 장자(長子)인 내가 호주상속 제1순위인데도 호적상 양자 입적 여부조차 불분명한 방계(傍系)의 양손(養孫)에 불과한 방일영 전 회장쪽 가계가 호주를 상속하고 조선일보사 지분 등 재산을 독차지한 것은 부당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그동안 재산권 분쟁을 둘러싸고 양측 사이에 여러 차례의 다툼이 있었지만, 호주상속과 재산상속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욱이 법조계에서 '집념의 승부사'로 정평이 나 있는 인권변호사 안상운 씨가 방재선 씨 측의 변호사로 나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태평로 1가에는 심상치 않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 (태평로 1가는 조선일보사가 자리한 주소로서, 일반적으로 조선일보를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참고로 방일영 전 회장의 회갑문집 제목도 <태평로 1가>였다.)

그렇다면 방재선 씨는 누구인가? 일반인들에겐 아직 낯선 이름인 그는 조선일보 전·현직 회장인 방일영, 방우영(74) 형제의 양할아버지(養祖父)인 방응모의 3남1녀 중 장남이다. (물론 조선일보사 측에서는 방재선 씨가 방응모의 서자(庶子)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왔다.) 방응모는 일제시대인 1933년 3월부터 6·25 초기인 1950년 7월 실종되기까지 17년 동안 조선일보를 인수해 경영한 인물이다.

방재선 씨는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부터 최근까지 "아버지 방응모의 양손인 방일영, 방우영 형제에게 조선일보 상속권을 강탈당했다"고 주장하면서 현 조선일보 사주 일가를 상대로 힘겨운 재산권 분쟁을 벌여왔다.

미국 테러 참사의 근본적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건국과 팔레스타인의 유랑을 둘러싼 중동의 역사를 공부해야 하듯, '조선일보 상속권과 재산권을 둘러싼 서자(庶子)와 양손(養孫)의 대결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의 가계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사주 방씨 가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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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방응모는 첫 번째 부인(승계도)과 두 번째 부인(이인숙) 사이에서 자식이 없자 42세가 되던 해인 1924년 친형인 방응곤의 차남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시켰다. 이 방재윤이 바로 현 조선일보 사주 방일영, 방우영 형제의 친아버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방재윤은 194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당시 졸지에 유복자가 된 방일영, 방우영 형제는 각각 17세와 12세였다.)

방응모는 조카를 양자로 입양한 뒤에도 친자를 얻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30년 세 번째 부인(배영옥)과 결혼한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러나 그는 외동딸(방재숙)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기어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방응모는 60세가 되던 해인 1943년 화신백화점 점원 출신의 젊은 처녀 노호용과 네 번째 결혼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방응모는 이듬해인 1944년 고대하던 첫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현재 조선일보 사주 일가와 재산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방재선 씨이다. 이후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방재효, 방재규)을 내리 더 낳았다.


▲ 계초 방응모. ⓒ <격랑육십년-방일영과 조선일보>
다음은 방재선 씨의 증언이다.

"부친은 양자 방재윤이 사망하면서 친아들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졌다고 합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부친의 뜻에 따라 둘째 어머니 이인숙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부친에게 무조건 의존했던 다른 어머니들과 달리, 둘째 어머니는 부친이 광산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창업동지였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었던 둘째 어머니에게 저를 맡겼던 것이지요."

그러던 와중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방응모는 1950년 7월 7일 넷째 부인이 있는 신당동 자택에 머물던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의 소식은 지금까지 끊긴 상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족들은 그의 실종신고를 미루었다. 혹시 포로교환이 이뤄지면 돌아올 수도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방응모는 1955년 7월 7일 생사불명 기간만료로 결국 실종처리 되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실종선고 심판이 내려진 1979년까지 조선일보 제호 밑의 발행인란에는 방응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때까지는 방응모가 법적으로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간주된 것이다.

다시 방재선 씨의 증언을 들어보자.

"아버지가 납북되던 1950년 양손인 방일영의 나이는 27세였고, 그의 이복동생인 방우영은 22세였습니다. 그러나 장남인 나는 당시 6세에 불과했지요. 자연스럽게 나이 많은 조카인 방일영이 조선일보의 관리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들로부터 '나중에 어른이 되면 장남인 네가 조선일보를 당연히 넘겨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알만큼 성장했을 땐 이미 조선일보 내에 방일영, 방우영 지배체제가 확고해진 상태였습니다."

이번에는 방재선 씨가 제기한 두 가지 소송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내용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호주상속 원인무효 소송'의 요지

"피고 방일영은 1979년 6월 10일 망(亡) 방응모의 실종선고 심판이 확정되자 3일 후인 6월 13일 방응모의 호적에 자신이 고인의 '호주대습상속인'이라며 신고를 하였으나 이는 무효임이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피고의 부(父)인 방재윤은 방응모의 가(家)에 친자 혹은 양자 등 어떤 형태로든 입적한 사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재윤의 처인 이성춘과 그의 자(子)인 피고가 방재윤의 입양에 따라 호적에 입적했다는 취지의 지(旨)는 있으나 막상 방재윤이 망 방응모의 호적에 입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재가 없습니다.

피고가 호주상속 신고를 한 1979년 당시 시행중이던 구 민법은 부칙 제25조 2항에서 '실종선고로 인하여 상속이 개시되는 경우에 그 실종기간이 구법 시행기간 중에 만료하는 때에도 그 상속순위, 상속분 기타 상속에 관하여는 본 법의 규정을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위 법 제984조에 의하면 호주상속에 있어서는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남자가 제1순위 호주상속인이 되며, 또 위 법 제991조에 따라 호주상속권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피고 방일영의 호주상속은 원인무효입니다. 원고 방재선이 방응모의 진정한 호주상속인임을 확인해주기 바랍니다."

▲ 방일영의 부친 방재윤과 모친 이성춘 ⓒ <격랑육십년-방일영과 조선일보>
여기서 독자들은 소장에 등장하는 '호주대습상속인'의 의미가 궁금할 듯하다. 이 용어의 의미는, 방응모의 양자인 방재윤이 죽고 없으므로 방재윤의 장자인 방일영이 '호주상속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방일영 씨가 호주상속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入籍)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다시 헷갈릴 것이다. 소장에는 분명하게 "피고 방일영의 부(父)인 방재윤은 방응모의 가(家)에 친자 혹은 양자 등 어떤 형태로든 입적한 사실이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방일영 씨의 대습상속은 원인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것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는 것은 간단하다. 방응모의 호적에 방재윤의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호적(戶籍)은 "민법상 가족의 소속원으로서의 신분관계를 기재한 사법적 의의를 가지는 문서"(동서문화 <한국세계대백과사전>)이자 "호주를 중심으로 그 집에 속하는 사람의 본적지, 성명, 생년월일 등 신분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공문서"(이숭녕 감수 <국어사전>)이다. 그러므로 호적에는 호주(戶主)의 이름을 시작으로 호주와 친족관계를 맺은 사람의 이름과 생애가 출생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 호적의 방응모와의 관계란에 방재윤의 이름이 없다.

따라서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한 것이 사실이라면, 호적 하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어야 옳다.

"방응모(호주)-승계도(방응모의 첫 부인)-방재윤(방응모의 양자)-이성춘(방재윤의 처)-방재숙(방응모의 장녀)-방일영(방재윤의 장남)-방우영(방재윤의 차남)…방재선(방응모의 장남)…."

그러나 방응모와의 관계란에 방재윤의 이름은 없었다. 호적에는 방재윤의 이름이 빠진 채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기록돼 있을 뿐이다.

"방응모-승계도-이성춘-방재숙-방일영-방우영…방재선"

사망, 분가, 출가 등으로 제적되더라도 호적에 이름은 그대로 남고 그 위에 가위표(×)를 하는 것이 호적 기록의 상식이라는 점에서 이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방재윤의 처인 이성춘의 이름 옆에 새로 칸을 만들어 작은 글씨로 적어 놓은 "가족과의 관계―방재윤의 처"가 방응모의 호적에서 발견된 방재윤과 관련된 기록의 전부다.

그렇다면 방재윤은 왜 양자로 입양되고도 양부의 호적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것일까. 다음은 방재선 씨의 증언이다.

"두 가지 추측을 해볼 수 있습니다. (1) 방응모가 방재윤을 양자로 입양하고도 당시 관습에 따라 호적에는 입적시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2) 방재윤이 양자의 권리를 상실했을 가능성입니다. 사실 양자를 두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사와 상속 아닙니까? 그런데 방재윤은 양부(養父)인 방응모보다 먼저 사망했습니다. 사망 이후에 방응모가 호적에서 제적시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방일영 씨가 조선일보를 상속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인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로 입적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재윤이 방응모의 호적에 입적됐다는 '근거'는 지금 없습니다. '사실' 자체가 처음부터 틀린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양자로 입적한 증거가 없는데도 그 아들이 대신해서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을 받은 것은 뿌리 없는 나무가 꽃을 피운 것과 마찬가지로 어불성설입니다."

방재선 씨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자격미달 선수의 승리는 나중에라도 원천무효입니다. 캐나다의 육상선수 벤 존슨도 88년 서울올림픽 당시 1백m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사후검사에서 약물중독으로 밝혀져 금메달을 박탈당하지 않았습니까? 방재윤이 방응모의 양자라는 근거가 사라진 가운데 진행된 방일영의 호주상속과 재산상속은 마땅히 취소되어야 합니다."


(2) '재산상속 원인무효 소송'의 요지

"피고 방일영은 1979년 6월 13일 호주상속 신고를 하였고, 그해 12월 20일 별지 제1목록, 제2목록 기재 부동산에 대하여 재산상속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 이전등기 절차를 마쳤고, 그 후인 1988년 이 부동산과 (주)조선일보사의 주식은 장남인 방상훈에게, 코리아나호텔은 차남인 방용훈에게 증여 등의 방법으로 처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호주상속 자체가 원인무효이므로 위의 재산상속도 모두 원인무효임이 명백합니다.
한편 망 방응모가 피랍된 직후인 1953년 당시 주식회사 조선일보사의 총 발행주식 15만주 중 망인이 12만3천6백주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피고 방일영이 단독으로 상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피고가 이를 상속할 권한이 없을 뿐 아니라 원고 방재선의 상속지분인 15분의 6(전체의 40%)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원인무효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피고 방일영과 방상훈은 위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 이전등기의 말소등기 절차를 이행하고, 피고 방일영은 원고 방재선에게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발행의 주식 12만3천6백주를 인도해야 합니다."
방재선 씨는 소장에서 "호주상속 자체가 원인무효이기 때문에 재산상속도 자연스럽게 원인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방재선 씨는 1977년 방일영 씨에게 자신의 상속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제출한 바 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제 와서 소송을 제기한 것일까. 이에 대한 방재선 씨의 해명이다.

"당시 나는 미국에 유학 중이었는데, 방일영 씨 측에서 상속세 부담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하여 일단 방일영 자신 앞으로 상속재산을 몰아주면 상속문제를 조용히 처리한 뒤 우리 3형제에게 그 30%를 나눠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우리 3형제의 법정상속지분은 전체의 63%에 달했지만 방일영 씨가 조선일보를 경영해온 노고를 생각해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포기각서를 써준 것입니다.

또한 방일영 씨는 내 아버지 방응모에 대한 실종선고가 내려지기도 전인데도 아버지 명의의 부동산 등 많은 재산을 처분해 버리는 등 사실상 모든 재산을 관리해 와서 우리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가 해달라는 대로 상속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그들로부터 받은 돈은 26억원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 액수의 돈에 조선일보 법정상속 1순위자로서의 내 권리를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방재선 씨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상속권 포기각서를 써준 것은 1977년이었고, 아버지 방응모의 실종선고 심판이 확정된 것은 1979년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의 법정사망 시기는 1979년이 됩니다. 그런데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호주상속이든, 재산상속이든 간에 부모가 사망하기 전에 한 상속포기 의사표시는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 방재선씨 "조선일보가 과거 친일, 친독재의 부끄러운 과거에서 벗어나 언론의 정도를 걷도록 하겠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왜 이런 문제를 좀 더 일찍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방응모가 납북되던 당시 나는 너무 어렸습니다. 조카 방일영, 방우영 형제가 역대 정권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감히 상속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지요. 1960∼70년대에 이후락을 매개로 한 박정희와 방일영의 친분관계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1982년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만 믿고 전두환에게 탄원서를 냈다가 도리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만 치렀던 적이 있습니다."

- 신문사를 이끌어온 방일영 형제의 기여도를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방씨 형제의 경영능력을 인정하나, 그들은 역사와 국가 앞에 너무나 오만했습니다. 조선일보는 권언유착과 색깔논쟁을 통해 자기 취향대로 대통령을 만들어 왔지요. 현 경영진은 계초 방응모 선생의 유훈인 소유와 경영의 분리와 편집권 독립을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싸우는 목적은 고대광실을 원해서가 아닙니다. 계초의 정신을 계승해 조선일보를 참된 언론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겠다는 마음뿐입니다."

-만약 조선일보를 되찾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내 재산은 국민주 전환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고 조선일보사를 국민주 기업으로 변모시킬 생각입니다. 그래서 조선일보가 과거 친일, 친독재의 부끄러운 과거에서 벗어나 언론의 정도를 걷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일보 상속권과 재산권을 둘러싼 서자(庶子)와 양손(養孫)의 대결. 서자의 선제공격에 양손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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