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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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Homepage    http://www.cheramia.net
제 목    담론14.공채팔아먹고 미국무부에 신탁통치 요구하고 허위로 가짜 대통령 명함돌리고 하와이 박용만 독립군 재산 네다바이 하다 임정에서 탄핵된 이승만의 죄악


일제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무조건 항복하자 중국정부와 미군사령부 사이에서는 김구의 임정문제에 대한 환국문제에 대해 공적자격으로의 입국이냐 개인자격의 환국이냐 하는 논란으로 많은 대화들이 있었다.

중국전구에 속했던 한반도는 종전이 되자 태평양전구로 이관된 이유로 임정의 귀국문제는 한미합작 군사작전으로 임정과 우호관계에 있던 중국전구 사령관 웨드마이어 장군의 권한 밖으로 밀려나 늦어졌다.

장개석은 이 문제로 맥아더 사령부와 미 대사를 통해 여러차례 협의했으나 '이미 남한군정이 실시되고 있으므로 임정환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맥아더 사령부의 대답을 받았고 장개석은 임정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임정은 긴급국무회의를 열어 개인자격이라도 환국하되 혼란을 막기 위해 각 당은 활동을 중지하고 공식발언은 대변인을 통해서만 하기로 하고 각자 개인적으로 입국했다.


단국대학 설립(1948년)을 기념하며
(뒷줄 맨 왼쪽) 장도빈 선생, (앞줄 맨 왼쪽) 김 구 선생  
<독립기념관 제공>  



이리하여 임정요원은 미군정의 견제정책에 의해 원천 배제되어 과거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뿔뿔이 들어왔으며 김구가 입국했던 11월 23일은 미군정이 자신들을 제외한 일체의 정당에 대해 철퇴를 내린 지 40 여일이나 지난 뒤였으므로 김구 역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미군정을 곱게 보지 않았으며 김구의 한독당 역시 이미 한민당 일색으로 이루어진 인의 장막에 의해 둘러쳐져 있는 미군정에 의해 사실상 고립되었다.

게다가 김구를 비롯해 임정요인 가운데 영어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미군정과의 관계가 복원되지 못한 이유가 된다면 이유가 될 수 있었던 취약점이 되었다.  
  
여운형과는 달리 국내 정치세력이 전무했던 이 승만은 본래 미국에서 한국으로 직접 오려 한 것이 아니라 마닐라로 가서 맥아더를 만나고 중경의 장개석을 만나 정치적, 외교적 후광을 업은 뒤 입국하려 했었다는 학계(이 원설)의 주장도 있다.

그런 그가 직접 입국하게 된 이유는 임정을 지지하던 장개석이 김구를 자기보다 먼저 입국시키면 국내정치의 대권경쟁에서 정통성과 주도권을 빼앗길까봐 임정 보다 한 발 앞서 입국한 것이다.

당시 해방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여 운형을 견제할 인물을 찾고 있던 미군정의 후원을 확신한 이 승만은 입국 시에 여 운형의 합작제의를 일언지하에 뿌리치고 '대한독립 촉성 중앙협의회(촉성회) '를 구성해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는 말로 친일 매국노까지 품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는데 친일파 일색의 한민당은 초록은 동색인지라 친일세력을 포용하려는 이 승만과 기꺼이 손을 잡고 자신들을 포함한 친일 민족반역자들을 쳐 없애려는 민족진영, 좌익과 정면대결 했다.  

만일 단재 신 채호 선생이 타계하지 않고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세력 포용과 한민당과의 결탁 그리고 친일 잔재청산의 사명을 맡은 반민특위 해체를 보았다면 묘청의 난에 이은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 2대 사건이라 정의했을지도 모를 만큼 이 승만은 해방직후 근대사의 첫 장에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흠집을 남겼다.  

당시 돈 있는 자는 친일 지주, 일부 산업 및 상업자본가 즉 친일 매판자본가였는데 한민당과 마찬가지로 이 승만은 이들로부터 정치후원금을 거둔 것은 물론 식량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식민통치 기간중 일본과 결탁해 재산을 모은 실업인들을 불러모아 부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 날조 선전하고 사실상 자신과는 독립노선의 차이로 불화하며 지내 전혀 상관도 없는 갓 입국한 임시정부에게 뜬금없이 자금을 대준다는 그럴싸한 핑계로 <경제기부자협회>를 구성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백성들에게 생색을 냈다.

그는 또한 임정 당시 임정공채를 임의로 발행해 팔아먹고 몽땅 가로챈 화려한 경력에 걸맞게 17명의 돈 많은 친일 기업가들을 끌어 모아 <국가보조기금 집행위원회>를 구성케 해 돈을 긁어 모았으며 그들은 친일파 청산에 대한 면죄부성 보험으로 여겨 기꺼이 돈을 쾌척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1919.4)&상해임정 임시의정원;,*1919년 9월 17일 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촬영. 앞줄 왼쪽부터 이유필.신익희.윤현진.안창호.손정도.정인과 한 사람 건너 황진남, 둘째줄 오른쪽 김구, 다섯째줄 왼쪽 첫번째 여운형.1919년 4월 10-11일 양일간,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항일지사들 30명은 각도 대의원 자격으로 제1회 '임시의정원'을 개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선포했다. 같은해 8월 18일 개원한 제6차 임시의정원은 9월 11일 '노령국민회'를 흡수, 국내의 '한성정부'를 통일정부로 삼아 8장 56조의 개정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군무총장 노백린,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외무총장 박용만, 교통총장 문창범, 참모총장 유동열, 노동국총판 안창호로 내각을 개편하였다.,(문화일보, 백범김구의 겨레사랑,1995, 41)


이 승만은 1919년 한 해에만 25만 달러 어치의 공채(지금의 250만불이 넘음)를 팔아 챙겼으며 자발적으로 헌금을 모아 1919년 주 빠리 한국대사관 설치기금으로 2만 1219달러를 모금했고, 1922년에는 워싱턴 회의에서 1만 2천 달러를 모금하기도 하는 등 엄청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사실상 개인적인 영달과 외교론을 실천하는데 유용함으로써 상해임정으로부터 탄핵의 근거가 되었다.

사서삼경 중 <대학>에 보면 인자(仁者)는 이재발신(以財發身)하고 불인자(不仁者)는 이신발재(以身發財)한다는 말이 있다. 얼핏 보면, 어진 사람은 재물로 현달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곤고한 몸을 사용해 재물을 얻는다는 뜻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진 사람은 있는 재산 마저 남에게 베풀어 뭇 사람들로부터 뜻을 얻어 현달하지만, 어질지 못한 사람은 일신의 편안함과 영달만 중히 여겨 재물만 얻으려 하므로 마침내 이름과 명예를 더럽히고 마침내 몸도 마음도 망치고 만다는 뜻이 들어있다.

이 승만은 누가 보아도 개인의 명예욕과 권력욕에 취해 이신발재하다 국가도 그르치고 자신의 명예도 그르친 사람이지 결코 이재발신해 현달한 사람은 아니다.    

김 구와 이 승만은 각자 무장항쟁주의와 외교독립 론으로 독립노선 자체가 달라 불화하기도 했지만 직접 맞부딪치게 된 사적인 이유도 있어 불화하지 않을 수 없었는 바 상해임정에서 이 승만이 미국에 대한 신탁통치 제안을 미 국무부에 접수한 건과 구미 위원부의 독주 건 그리고 독립운동자금 독식 건 등으로 상해정부의 헌법에 의거 대통령 직에서 탄핵 추방되었을 때 김구는 탄핵 추방된 후임 주석으로 당연히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승만은 염치 없이도 3.1 운동 지도자들이 서울에서 채택한 임정의 서울헌법을 빌미 삼아 자신이 계속 임정의 주석이라고 고집 피우며 망발했다.

이 승만의 독립운동 자금 독식과 전용 그리고 그의 외교독립 론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서울대 대학원 윤 대원 박사학위 논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운영과 독립방략의 분화>를 보면 상해 임정당시 이 승만에 대한 내용과 당시 임정의 내막을 이해할만한 내용이 축약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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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 이른바 해방전 친미 사대주의 외교론자로 무장항쟁주의의 독립운동 자금을 가로챈 매국노 겸 해방후 친일파 매국노였던 이승만과 소극적 독립운동가로 점진주의자 였던 안창호.  이승만의 중국인 복장은 미국에서 임정 직제에도 없는 대통령 명함을 돌리고 임정을 따돌려 미국의 신탁통치를 요구한 구미위원회 사건 이후 상해로 돌아와 임정의 탄핵을 받기 바로 이전 모습이다. 이승만이 탄핵된 후 백암 박은식 선생이 대통령에 임명되었으나 대통령 직함으로 서거해 임정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루었다.


"임시정부는 출발부터 위임통치문제와 미주의 재정권을 장악한 李 承晩의 전횡, 그리고 공식적인 국무회의보다는 安 昌浩, 李 東輝의 개인.비밀주의적인 내각 운영의 파행성으로 내분에 휩싸였고, 그것은 기호파와 서북파의 지방 열로 표면화되었다.

1920년 2월 이후 차장들과 총장들을 중심으로 임정개혁운동이 전개되었으나,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이 승만 등 기호파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1921년 1월 이후 이 동휘, 안 창호 등이 임정을 떠남으로써 임정은 통합정부로서의 위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임정이 이 같은 위기를 맞이한 데는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서 보다는 정부기구로서의 기능이 더 강조된 조직 자체의 문제점도 있었다. 특히 애국 금과 같은 부정기적인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재정의 구조적 취약성도 임정의 위기를 앞당기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1920년 3월 독립전쟁을 시정방침으로 확정한 임정은, 취약한 국민적 기반과 지역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독립전쟁을 실현할 목적으로 국내외를 대상으로 '내정 통일책'과 在滿독립군단체와의 정치적 연대를 꾀했다. 그러나 임정의 이 같은 정책은 국내 및 재만 독립군 단체의 실제를 고려하지 못하여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여기에는 임정이 이 동휘의 친소 독립 전쟁론. 안 창호의 준비론.이 승만의 친미외교론 등 독립 방략의 차이를 극복, 통일된 독립 방략의 마련에 실패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로써 임정은 1921년 이후 간도 및 국내의 지지기반을 상실하여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는 이와 같은 임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민족의 대표성을 갖는 통일된 정치기구의 수립과 독립 방략의 통일을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개조파는 이승만의 독단과 전횡을 저지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임정을 개조할 것을 주장한 반면, 창조파는 임정의 '상해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실질적인 민족의 대표성을 갖는 '신 기관'의 건설을 주장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에서 6월까지 근 6개월 가까이 진행되었지만 결국 임정 '존폐문제'를 둘러싼 개조. 창조 양파의 의견 대립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한편 이 승만의 정부 옹호파는 한성 정부 계통론을 근거로 국민대표회의를 정부파괴운동으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국민대표회의는 좌절했지만 이것은 이후 독립 운동계에 운동의 '실제적 근거와 경험'을 중시하는 풍조를 낳았고 또한 통일된 정치기구와 관련하여 정부형태에서 '당적 형태'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뒤 임정 내에서는 개조파와 정부옹호파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임정의 '현상유지'를 주장하며 '명의' 유지에 급급한 정부 옹호파에 맞서 개조파는  정국쇄신 운동을 벌여, 마침내  1925년에 열린 제13회 임시의정원에서 이 승만 탄핵과 헌법개정을 관철시켜 임정개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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