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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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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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담론11.조봉암,조용수의 사법살인과 제주 4.3 항쟁의 비극




안원전의 21세기 담론11.조봉암,조용수의 사법살인과 제주 4.3 항쟁의 비극


 현대사에 있어 가장 큰 과오와 비극은 이승만에 의한 조 봉암 사법살인 사건과 제주 4.3 민중항쟁 및 5.16혁명정부에 의해 희생된 혁신지 민족일보 조 용수 사장 사법살인 사건이다.

필자가 보기에 제주 4.3 민중항쟁의 진행과정은 처음의 순수한 애국적인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 지휘부가 점차 빨치산화 되어갔다는 점에서 좌파 혁명의 누명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한계와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 없이 학살당한 수 없는 제주도민들과 같은 민초들의 애꿎은 희생만은 신원이 되어야겠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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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1948.4)제주 4.3사건으로 소개된 어린아이와 부녀들 누가 보아도 양민이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전문(신동아)-피가 튀고 살이 찢긴 광란의 살육극… 2만5000 생죽음 육성증언Click here!


1947년 3월 1일 미군정 시절  제주도 읍민 3만 군중이 진정한 민족해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가 미군경찰의 사격으로 6명이 피살되고 8 명이 피습 부상한 불행한 일이 우리 현대사에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제주도 읍민의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3.1 시위 후, 전 제주 읍민은 총파업했으며 이러한 상황악화는 미군정의 경찰파견과 서북청년단을 파견해 2500명을 검거해 3명이 고문치사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명살상과 민간인 학살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4.3 민중항쟁으로 도화선이 이어졌다.

당시 사회적인 흐름으로 보면 정부의 무차별적 진압은 양민의 봉기로 하여금 보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투쟁을 위해 그 지도부가 남로당의 지휘부에 예속되어 대(對) 정부 빨치산 투쟁화 되어가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빨갱이로 엮여져 4만에서 8만 명의 양민이 학살된 것은 실로 민족의 비극이요 현대사의 굴절된 역사라 아니할 수 없다.

정부측이 제시한 자료만 해도 한국편람(1956년)에는 4만명이, 1960년 국회의원 김성숙이 제출한 제주도 양민 학살 건의안에는 5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고 1963년 제주도 당국이 발행한 제주도 제 8호에는 80,065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4.3폭동은 조직적 투쟁으로는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최초로 발생한 반미 무장투쟁으로서 J.Merrill은 4.3폭동을 평가하여 2차 세계대전 후에 식민지적 구조를 재부과하려는 (제국주의 국가의) 시도에 대항하는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아시아 민족주의 운동의 한 갈래라고 쓰고있다.

1948년 4월 3일 게릴라들에 의해 제주도 전역에 살포된 2종의 호소문과 전술적 구호의 핵심인  ① 매국 단선을 반대하며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족해방을 달성하고 동시에 미제를 축출하고, 그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는 반미구국투쟁과 ② 제주도민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제거함에 있다고 주장하며 무장항쟁에 뛰어들었다.

이를 진압하고 검거하는 과정에서 숨바꼭질의 대치 끝에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사건이 6년 6개월 동안 계속되어 물경 사망자 수가 최소 4만에서 8만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항쟁에 가담한 순수 민간인도 남로당 주도층의 우산에 덮여 적어도 명목상 빨치산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써야 했다.

제주 4.3사태 관련의 한 사이트에서는 미군정 당시 적용한 '국방경비법'이 불법이라 말한다. 이 부근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특히 군경토벌대의 초토화작전기간 동안인 48년 10월에서 49년 3월 사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이름 아래 학살되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 중 3,000여명이 국방 경비법 위반(32조 이적죄, 33조 간첩죄)이라는 죄명으로 부산, 마산, 대구, 마포, 인천 등의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국방경비법"으로 이름 붙은 법령은 지금까지 미군정 당시에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한 법률로 간주되어 적용되어 왔고 각종 법령집에는 "1948.7.5 공포(또는 공포지시), 같은 해 8.4 효력발생"으로 기재되어 왔다.

그러나 국방 경비법은 미군정 당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군정청에 의해서도 제정, 공포된 일이 없다. 이 법은 군정법령이 아니며, 어떠한 명목으로도 법률의 효력을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국방 경비법에 의한 재판은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존재하지도 않았던 국방 경비법에 의하여 재판을 받고 형을 복역한 사람과 복역 중 사망한 사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이 대두된다.-










http://blog.daum.net/philook/15720154


이덕구의 죽음(1949.6).(이성광, 민중의 역사, 열사람, 1989, 118 ; 우리교육 1990년 4월호,15 합성)

한라산 유격대 총사령이었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7일 교래리 근처 오름에서 경찰의 총에 사살되었다.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시체가 전시됐다. 때묻은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웃도리 주머니에는 수저가 꽂혀 있었다. 입가에는 피를 흘리고헝클어진 머리에 둥근형의 얽은 얼굴, 형틀 옆에 내걸린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는 글이 그가 누구인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이자는 공비의 수괴 이덕구로서 대한민국 국시를 범한 반역자이다"는 포고가 걸려있었다. '제주 4.3항쟁'의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장두가 효수돼 내걸렸던 바로 그곳에 전시됨으로써 장두의 운명을 따랐다. 이덕구는 1920년 조천읍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입명관대학 경제학과 4학년 재학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1945년 귀향하여 1946년 조천중학원 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해 '4.3' 발발 직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된 인민유격대의 '3.1지대장'을 맡았다. 48년 7-8월 사이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이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을 맡기고 제주도를 빠져나감으로서 그가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제주 4.3항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어린이들 사이에선 '몸이 날래 지붕을 휙휙 넘어다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제주를 떠나버린 1대 사령관 김달삼과 대비하여 동경을 받기도 한다. 조천중학원에서 학생들은 인기높은 역사.지리 선생 이덕구를 "박박 얽은 그 얼굴 / 덕구 덕구 이덕구 / 장래 대장가심(감)"이라고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경찰쪽은 "사살했다"고 밝혔으나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일족도 비극적인 길을 걸어, 부인 양후상과 5살짜리 아들 진우, 2살짜리 딸도 죽었다. 주민들은 당시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이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해 산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뒤에서 쏘아 쓰러뜨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큰현 호구의 부인과 아들딸, 둘째형 좌구의 부인과 아들, 사촌동생 신구.성구 등도 경찰에 의해 죽었다. (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3).자료:(
http://www.ihs21.org/photo/ga3-16.htm)



제주의 참혹한 양민 학살에 대해서는 6.25 후퇴시 보도연맹을 비롯 114만의 양민을 을 처형한 이승만과 노근리 학살사건을 일으킨 미국이 책임져야 되지 않을까?

양한권은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 논문 <제주도 4.3폭동의 배경에 대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45년 8.15 해방으로부터 1948 년 8.15 대한민국정부 수립까지의 남한의 정치사는 신탁통치와 통일정부수립이라는 쟁점을 둘러싼 각각의 정치세력의 이합집산과 힘의 대결에서 반탁론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이 승리를 차지하는 과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통치에서 해방된 한국 민족의 운명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최초의 쟁점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이었다.

한국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 소, 영, 중의 4대국에 의한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 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결정을 둘러싸고, 남한의 정국은 신탁통치를 민족적 모멸로 간주하여 반탁을 새 출발로서의 독립운동이라고 규정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세력의 완강한 반대운동과,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한민당 세력의 유화적 태도, 그리고 남로당 등의 좌익세력의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지지 등으로 가열되어갔다.

이러한 때 한국민주임시정부 구성을 원조할 목적으로 먼저 그 적절한 방책을 연구, 조성하기 위하여 설치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의 소련과의 협상에서 난관에 봉착한 미국은 카이로선언 이래로 계속 추구해왔던 대한정책인 신탁통치안을 포기했고, 이에 따라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었다.

미국의 신탁통치안의 포기는 미, 소 양국의 한반도 점령정책에 관한 최초의 타협안이 포기되었음을 의미했으며 따라서 한반도 점령정책에 대한 미, 소의 새로운 합의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냉전의 시작이라는 국제정치상의 변화는 한반도 점령정책에 관한 미, 소의 새로운 합의를 불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결국 이 어려운 문제를 유엔에 회부함으로써 이제 문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총선거라는 형태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북한 내부의 독자적인 정치발전은 남북한총선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남한의 정국은 이승만 및 한민당 세력의 줄기찬 남한단독정부수립 공작과 김구의 임정세력 및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세력의 남북정치회담을 통한 통일 노력, 그리고 남로당 등의 좌익세력에 의한 남한 단독선거 반대투쟁이라는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하였다.

제주도 4.3폭동은 남북한 통일정부수립이라는 이러한 쟁점에 대하여 남로당의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그 시기를 같이하여 1948년 4월 3일 발발한 무장폭동이다.

매국단선의 반대와 미제축출을 주장하면서 한라산에서 하산한 500여명의 무장게릴라들과 1,000여명의 동조자들의 도내 14개소의 경찰관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으로 시작된 이 폭동은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의 5.10선거의 실시를 일차적으로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 1년여에 걸쳐서 도내의 행정과 치안을 마비시킴으로써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을 어렵게 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약 5년 간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거부력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4.3폭동은 그 발발의 경위와 발발 이후 진압되기까지의 과정에 수많은 정치집단이 복합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사건 자체의 수습을 어렵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민의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더욱 가중시킴으로써, 폭동의 결과로 나타난 제주도민의 실제적 피해와 피해의식은 그 이후의 통치질서의 수립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 4.3폭동은 사건의 중요도에 비추어 학계의 뚜렷한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종전의 군관계 자료와 좌익계의 동향에 대한 여구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던 4.3폭동에 관한 연구가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로서 4.3폭동에 관한 최근의 체계적인 연구업적으로는 김점곤, 김봉현 그리고 J.Merrill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위의 3인의 연구는 4.3폭동의 발발에서부터 종결까지의 전 과정을 다룬 것으로 이 글과 관련하여 4.3폭동의 발발원인과 배경에 관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전곤은 남로당 중앙당이 직접 4.3폭동을 계획하고 주도했다는 데 회의적인 견해를 보이면서, 4.3폭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4.3폭동은 남로당의 기본조직과 제주도의 제한된 특수환경, 그리고 미군정과 본토인, 그 중에서도 특히 경찰에 대한 경원 등의 조건과 더불어, 3.1절의 민중과 경찰과의 총격 충돌, 그리고 서북청년단 등 반공청년단체에 대한 증오감정 등이 가세된 긴장상황을 효과적으로 선동, 조직, 동원하여 이를 교묘하게 남로당의 5.10선거 반대, 저지투쟁에 합치시킴으로써 폭발된 사건이었다.

김봉현은 4.3폭동의 원인을 그 전해의 3.1절 시위사건에서 찾고 있다. 즉, 1947년의 제주도민의 3.1절 시위에 대한 미군정 경찰의 탄압과 거기에 대한 도민의 항의, 그리고 이러한 도민의 저항에 대한 미군정과 우익청년단체의 유혈적인 테러, 압살에 의하여 전도의 민주세력은 굴복하든가 저항하든가의 양자택일의 극한선상에 놓이게 되었고, 여기서 5.10선거의 실시가 포고되었던 것으로부터 통일을 바라는 애국인민이 분가함에서 4.3폭동이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

J.Merrill은 4.3폭동의 원인을 도민의 뿌리깊은 불만과 저항, 분리주의전통, 2월 총파업 이후의 (미군정 경찰의)점증하는 탄압, 그리고 (5.10선거에 따른)정치분위기의 과열에서 찾고 있으며, 또한 역사적 경험을 중시하여 1901년 농민봉기의 기억이 2세대 후의 4.3폭동에 근거를 제시하는 혁명적 신화로 작용하였음을 조심스럽게 시사하고 있다.

4.3폭동의 발발원인과 배경에 관한 위의 3인의 논의는 4.3폭동에 관한 그들의 논의에서 극히 부분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으며 따라서 심층적인 연구와 체계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즉, 김점곤은 당시 제주도의 정치상황을 일정하게 규정하고 있던 미군정에 대한 분석을 소홀히 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고, 김봉현은 3.1절 시위사건 이후의 도내의 정치상황에 분석의 초점을 둠으로써, 당시 남한의 일반적 정치상황과 제주도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4.3폭동의 발발과 관련된 당시 제주도의 사회적 분위기, 경제적 상태 등을 포함한 전체적인 틀을 상정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J.Merrill은 제주도의 저항의 전통 및 미군정의 대한정책의 측면에서 4.3폭동의 원인을 규명해 나간 점에서는 선구적이고 동시에 탁월하나, 제주도의 전통적 민중운동에 대한 분석이 사건 서술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또한 당시 제주도의 사회적, 겨엦적 상태를 일회적으로 언급하는데 그쳐 그것을 생생하게 재생하는데 미흡한 감이 있으며, 3.1절 시위사건 이후 다음해 2월 총파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제주도의 좌익이 겪어야 했던 정치적 좌절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새로 밝혀진 자료-이승만, 제주4.3 가혹 탄압 지시 드러나-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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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항쟁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다음과 같다.
*제주도 4·3항쟁 연구-배경 및 성격을 중심으로 박진순 성신여대 교육대학원 석사 1996 .
*제주도 4·3 사건의 정치적 배경에 관한 연구 김대근 동의대 사학과 석사 1996 .
*제주4·3항쟁에 관한 연구-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를 중심으로 양정심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 1995  
*제주도 4·3 민중항쟁에 관한 연구 박명림 고려대 정외과 석사 1988 .
*제주도4·3폭동의 배경에 관한 연구 양한권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 1988  
*The Cheju-do Rebellion 존메릴 미국 하버드대 석사, 출저 : 『한국현대사연구 1』『Journal of Korean Studie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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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이 회창 총재가 판사시절 선고한 조 용수 사장 사법살인 사건의 전모를 한 네티즌이 올린 자료를 통해 알아본다. 현재 이 사건에 대한 재판기록은 증발된 상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공식적인 사적 자료도 사실상 없는 편이며 사건 당사자 가족과 당시 조 용수 사건을 둘러싼 민족일보 기자들의 신원운동을 통해 나오는 기록이 전부인 고로 다음의 대략적인 기록이 거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보면 좋을 것이다.  

약간 길지만 역사이면에 묻힌 사건의 하나이므로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위해 독자여러분의 양해를 먼저 구한다.

혁명재판소 이회창 판사등이 사형시킨 민족일보 조용수

현대사인물 재조명-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사건전말

98년 12월20일. 한해 내내 혼찌검이 난 한국 땅의 사람들이 제각기 불안한 시선으로 99년을 내다보며 주눅든 송년회를 갖는 가운데 맞은 세밑의 일요일. 여느 휴일보다 가라앉아 보이는 오전 서울 탑골공원 앞에 중·노년 남자들이 하나둘 수인사를 나누며 모여들었다. 추우나 더우나 불경기나 호경기나 공원 안에 진을 친, 갈 곳 마땅찮은 노인들과는 행색이 사뭇 다른 일단의 무리는 금세 40명 가까이로 늘어났다.

무슨 예상치 못한 시위라도 있을까 공원 앞 파출소 경찰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을 뿐, 특별히 이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시위대였다. 그것도 엄청난 주장과 단결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 끓어오르는 열정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회였다. 시위에 필요한 장비 하나 없고 외치는 구호 하나 없는, 그러나 아주 오래 된 침묵의 시위대였다.

이 집단은 37년간 「암약」해 왔다. 그들이 품고 있는 주의 주장이 국가 사회를 전복할 만한 파괴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로서는 소박한 요청이 이 국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

일제 강점기간에 맞먹는 그 장구한 암중모색의 세월 갈피마다 그들은 증오와 체념, 회한과 기대의 교차를 경험했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주모자」 중 상당수는 끝없는 기다림에 지쳐 홧병 비슷한 것을 안은 채 하나둘 운명을 달리했다.


남은 자들은 해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모였지만 그 수는 미미했다. 98년이 저물어가는 이날의 모임은 그들의 역사 중 사상 최대라 할 만했다. 이례적으로 마련된 버스 한 대에 올라 그들은 목적지로 향했다. 남한산성 동문 밖 금복리 야산 무덤가에 그들은 섰다.

「民族日報 社長 趙鏞壽之墓」. 1961년 12월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31세의 나이에 이승과 하직, 더 이상 늙어버릴 수가 없게 돼버린 한 젊은이의 초상을 늙어버린 옛 동료들이 무덤 앞에 놓았다.

61년 2월13일 창간호 발행 이후 5·16군사쿠데타를 맞고 불과 3개 월 여 만에 지령(紙齡) 92호로 종간된 석간신문 「민족일보」의 발행인 조 용수는 그 해 연말 사형 집행과 함께 ***공동묘지 한 귀퉁이 언 땅에 묻혔다가 수년 뒤 친지들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었다.

무슨 조화였는지 그의 형 집행은 첫 교수에서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재차 교수를 하게 돼 통상 10분 남짓 걸리는 시간을 훨씬 넘겨 18분이 소요됐고, 묘지 이장 때는 몸이 채 흙이 되지 않은 채였다.

그의 동료였거나 그와 일면식도 없이 사후 그를 추도해온 사람들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영광스런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했다. 그러나 나약한 장면 정권은 선 건설 후 통일이라는 양두구육(羊頭狗肉)을 내걸고 혁명과업의 사보타주를 일삼았다.

조 사장은 민족일보를 창간해 민족·통일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반민족 반민주 세력이 궁지에 몰리자 박정희 일파는 5·16군사쿠데타를 자행, 조 사장에게 가당찮은 누명을 씌워 희생양으로 삼았다.

조 사장이 만약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들 지금 마치 물고기가 바닷 속을 헤엄치듯 조국의 민주와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내년에는 좀더 보람 있는 보고를 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

『민족일보는 한 단체의 기관지가 아니라 민주·자주·통일 세력의 공동 신문이었다. 박정희가 미국의 성미에 맞추기 위해 제물로 바쳤다』
『판결문을 검토해 봤지만 사형으로 몰고 갈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어 사법살인임을 단정한다. 아직껏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 것에 크게 분노한다. 재심(再審) 절차를 밟아 역사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나라와 통일을 위해 죽어갔다는 사실을 정사(正史)에 남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권찬탈 과정에 계획된 사법살인」

추도식 후 참석자들은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발족했다. 민족일보 재판관련 자료를 찾아 진상을 밝히고, 국회에서 추진중인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면 재심을 청구하며, 이후 기념사업을 통해 평화 통일의 유지를 잇는 것으로 요약되는 진상규명추진위원회 발족의 의미에 대해 이날 위원 100여명의 서명을 받아 낭독된 취지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61년 소위 혁명재판소에서 자행된 민족일보에 대한 반민주적·반민족적 재판은 여전히 우리 언론사는 물론, 통일운동사에 크나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언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전례는 우리나라는 물론, 문명국임을 자처하는 나라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일보는 4·19 혁명이라는 당시 시대상황을 민족적 관점에서 가장 정확히 반영한 신문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민족일보와 조 용수 사장에게 가해진 폐간과 사형은 4·19혁명정신을 부정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말살시킨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민족일보 사건이 쿠데타를 통한 정권찬탈 과정에 계획된 사건의 하나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 민족민주열사 정신계승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진상규명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런 움직임을 주목하고 있다.

또 조 용수 사장이 목숨으로 절규했던 평화통일론이라는 통일방법론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이 수긍하는 가장 합당한 통일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그가 민족일보의 폐간과 목숨으로 바꾼 평화통일 기운은 작금의 통일 꽃?^占?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하려 한다.

그러나 민족일보 사건의 언론사적 위치와 사장 조 용수의 죽음에 대한 진상은 여전히 배타적 암흑 속에 있다. 우리는 늦었지만 민족일보 폐간과 조 용수 사장의 죽음을 재 규명할 것을 요구한다. 그 동안 민족일보사건에 대한 재평가와 진상규명 노력이 있었지만 관련자의 비 협조와 정권 당국자의 망각으로 번번이 한계에 부딪혀왔다』

20세기를 접어가는 지금, 민족일보와 조 용수는 일부 제한된 세대, 그 중에서도 일부 제한된 사람들 외에는 기억에서조차 희미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되어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사건 이후 30여 년 동안 간간이 현대사를 정리하는 과정에 몇몇 필자에 의해 단편적으로 언급돼왔고, 그간의 자료와 관계자의 증언을 종합해 95년 간행된 단행본 『민족일보 사장 조 용수 평전』(원 희복 저·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발행)에서 가장 세밀히 집대성된 바 있다.

그 사건의 전말과 왜 지금 다시 그 사건이 재론되는가를 간략히 요약해 본다면, 조 용수의 동생이자 민족일보의 기획부장 직책으로 경영 실무를 도운 바 있는 조 용준이 유족대표 자격으로 98년 12월8일 집권여당 국민회의 총재 앞으로 제출한 진상규명 탄원서의 구절처럼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조용수는 1961년 1월25일 주식회사 민족일보를 설립하고 발행인으로 취임, 소급 입법· 증거 불충분·재판과정의 불법 등 문제가 많은 재판을 통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그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제정된 특수범죄자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의해 사형이 선고됐다. 과거에는 합법이던 것을 후에 제정된 특별법을 소급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중대한 법률적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그에게 적용된 특별법 6조, 「정당 사회단체의 주요간부로 국가보안법 제1조에 규정된 반 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면서 선동 교사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는 대목은 조 용수 본인과 전혀 관계가 없는 대목이다.

그는 정당의 주요간부라는 혐의로 이 법조문의 적용을 받았는데, 조 용수의 정당활동은 1960년 7월29일 총선에 사회 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서 한번 출마해 낙선한 것이 전부이며 민족일보를 발행할 당시 어떠한 정당에도 가담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사회 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의 당수를 비롯해 주요간부 중 특별법 6조에 의거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된 사람은 없다』

혁명재판소는 조용수가 당시 일본에 있는 간첩 이영근이란 사람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4650만 환과 3810만 환을 공작금으로 받아 선거에 출마하는 한편 민족일보를 발행한 것으로 판결했었다. 이 자금 문제는 조 용수를 사형으로 몰고 간 핵심이었다. 이에 대해 탄원서는 그간의 항변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조 용수가 이 영근으로부터 이 금액을 받은 사실도 없고, 이 영근이 간첩이라는 증거도 없다. 피의자 진술 어디에도 없고 또 재판과정에 하나도 인정되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재판부는 그와 같이 판결했다. 이 영근은 조 용수 사후 국내에도 자주 왕래했으며 이 영근이 창간하고 실질적으로 운영한 「통일일보」는 국내 지사까지 설치돼 있다. 간첩이 창간하고 운영한 신문의 서울지사가 버젓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1990년 5월 이 영근이 일본에서 사망하자 우리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사라진 재판기록

혁명 재판소는 민족일보가 19개 항목의 사설, 논설, 기사 등을 통해 무정견한 중립화론이나 정치적 평화통일, 남북협상, 경제·서신·문화 교류 등을 선전 선동해 반국가단체인 북한 괴뢰집단을 고무 동조했다고 판결했다. 이에 대한 탄원서의 항변.

『그러나 당시 국내 신문 중 유독 민족일보만 이러한 기사를 게재한 것이 아니라 기타 신문에서도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과격한 기사를 많이 게재했다. 재판부는 민족일보 사설과 논설의 전반적인 기조인 대한민국의 민주발전 촉구와 북한체제에 대한 비난은 간과하고 부분적인 것만 문제삼아 막연히 북한에 동조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것은 유독 민족일보를 겨냥한 판결로밖에 볼 수 없으며, 어떻게든 조 용수를 희생양으로 삼겠다는 군사정권의 치밀한 계획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다.
평화통일, 남북협상교류는 현재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통일방안의 기본적 이념이다. 조 용수가 민족을 생각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다는 방증이 될지언정 범죄행위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같은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고 또 혐의를 받았던 사람들은 그 후 정부 요직에 기용되거나 훈장을 받기도 했지만 사형이 집행된 조 용수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적 복권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조 용수 사후 유족들은 이전에도 두 차례 당국에 진정서를 낸 바 있다. 1966년과 1993년 각각 제출된 이 진정서는 1998년의 그것과는 달리 거의 「읍소」에 가까운 호소를 담고 있었다. 문민정부하의 93년 10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의 요지.

『신한국 창조에 매진하고 있는 대통령 각하. 본인은 1961년 5월 군사쿠데타에 의해 단죄됐던 민족일보 사장 조 용수의 친동생 조 용준이라고 합니다. 창간된 민족일보는 장면 정권에서 인쇄중지라는 결정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으로 계셨던 각하께서는 「이승만 정권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언론탄압이다. 민족일보가 장 총리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인쇄중지 결정을 내린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이 승만 정권이 폐간했던 경향신문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씀으로 민주적 언론관과 의지를 보여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저의 형에 대하여 새로운 주장을 한다고 해도 죽은 형이 살아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 가문은 30여 년 간 죄인 아닌 죄인으로 살아왔고, 연로한 아버님은 가장 기대했던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아직까지 고생하고 계십니다.

저희 집안은 경남 함안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저희 외삼촌이 2, 3, 4대 민의원을 지냈던 하 만복입니다. 새로운 문민시대를 맞아 저희 집안에서는 조 용수의 삶을 정리해 우리 가문의 명예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하고 있습니다.

그 중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관계 서류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정부기록보존소를 비롯한 각종 기관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재판관련 자료를 수소문해 본 결과, 그 서류는 영구보관 문서로 분류되어 서울지방검찰청 자료관리실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지방검찰청 자료관리과에서는 이미 30년이 지난 재판관계 서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부디 그 당시의 기록을 열람, 등사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청와대로부터는 민원을 서울지검에 보냈다는 회신이 왔으나 서울지검에서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이후 확인한 바로는 민족일보 재판관계 기록이 없다는 것이었다. 혁명 검찰부 보존기록 순위 1번인 이 기록은 영구보관 규정과는 달리 오래 전부터 엉뚱한 곳에서 잠자고 있거나 아니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좌익학생 협박받고 중학 자퇴

이보다 훨씬 앞서 1966년 조 용수의 아버지가 집권여당 민주공화당 의장 앞으로 보낸 진정서는 눈물겨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수년 전 고인이 됐다.

『김종필 민주공화당 의장 귀하. 정사다망하신 귀하에게 이러한 일로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죄송합니다. 넓게 용서하여 주시고 관대하신 통촉을 바랍니다. 본인은 소위 민족일보사 사건으로 인하여 사형을 당한 조 용수의 아버지이오며 현재 민족일보사의 청산에 대한 법정대리인입니다.

그 당시에 자식을 가장 불명예스럽게 잃어버리고 겹쳐서 전 재산을 치안국에 압수당하였던 바, 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시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범죄자는 처형하였더라도 그 재산만은 환부하라는 발표도 있었고, 검찰총장으로부터 재산은 몰수치 않으며 법정대리인을 선정해 재산 압수 환부신청을 제출하라는 통고에 의하여 변호사를 선정하여 신청서를 제출하였던 바, 대검찰청에서 치안국장에게 그 재산을 환부하라는 지시명령서를 발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산은 5·16혁명 직후부터 사실상 중앙 정보부 유 대위가 강압 몰수하여 2대의 승용 지프를 비롯하여 압수물 일체를 사용해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치안국은 부득이 검찰청 지시명령서의 뜻을 중앙 정보부에 통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후 중앙 정보부 경리계장인 이 대위가 법정대리인을 방문하여 구구한 말을 하면서 한달 남짓 시간적 여유를 주면 꼭 환부하겠다고 하여 부득이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기간이 경과하도록 약속을 이행치 않기에 다시 독촉통고를 하니 다시 한 번 더 연기하여주기를 간청했는데 뜻밖에 중앙 정보부에서는 그 재산을 처분했다는 것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이 재산이 과연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압수된 것인지, 지금까지 국고에 보관돼 있는지 혹은 개인이 착복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본인은 혁명 당초부터 이런 사유로 돌연 무일푼의 가련한 신세가 된 데다 겸하여 불구의 몸으로 13명의 노유(老幼)가족을 거느리고 실로 인간 이하의 비참한 형태 속에서 모진 목숨을 이어왔습니다』

12대 할아버지가 세자의 스승을 지낸 것을 가문의 영예로 삼고 있는 완고한 양반가문 함안 조씨 태생이었던 조 용수의 아버지는 서부 경남의 만석꾼으로 통하던 진양의 하 진사댁 큰딸과 혼인, 네 아들을 두었다. 동경의 예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결혼 직후 신행길에 입은 다리 부상으로 평생 불구로 지냈으며 사진작가로 활동, 국전에서 국무총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목을 빼고 모이를 다투는 병아리들을 찍은 그 출품작은 국회에서 의원들이 서로 공명을 다투는 모양새를 비유한 것이라 했다. 그의 큰형은 경남 도의원을 지낸 조  찬규였고, 둘째 형은 일제시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경성제대 산부인과 의사로 근무하다 대구신보·시사신보 사장을 지낸 뒤 2, 3, 4대 국회의원 및 자유당 원내총무를 두 차례 지낸 조 경규였다.

이러한 내력의 집안에 차남으로 태어난 조 용수는 대구에 정착한 가족과 떨어져 어릴 때부터 자식이 없는 진주의 외삼촌 집에서 성장했다. 외삼촌 하 만복은 과도정부 입법의원, 반민특위 위원, 그리고 국회의원을 지낸 재력가이자 명망가였다. 방학이 되면 가족들이 진주 외가로 놀러왔고 조 용수는 가족을 따라 대구를 다녀오곤 했다.

조 용수의 아버지는 처가의 재정지원에 힘입어 별다른 생활고 없이 대구에 사진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예술가 혹은 한량으로 지냈다. 어린 시절 조 용수와 그의 동생은 가수 백 년설 등 연예인들이 아버지의 스튜디오에 놀러와 기타 치며 노래부르고 노는 것을 보기도 했다.

진주에서 초등학교와 중학을 다니면서 거의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조 용수는 광복 다음해인 중학 3년 때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진 좌우익 노선대결의 와중에 우익 입장을 취해 좌익학생들로부터 협박을 받고 자퇴, 대구로 전학했다. 대구 대륜중학 동기동창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그를 「공부 잘하고 원칙과 집념, 그리고 명예욕이 강했던 친구」로 기억한다.

삼촌과 외삼촌 모두가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인지 정치에 민감했던 조 용수는 1950년 연희전문 정경학부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부산에 내려가 외삼촌 하 만복의원의 경호비서로 일했다. 전쟁통의 아수라 정치판은 그를 오래 붙들지 못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더 넓은 곳에서 학업을 닦으라는 주변 권고를 받아들여 51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 정경학부 2학년에 편 입학했다. 이때부터 꿈과 혈기 가득한 20대 전체를 그는 사실상 일본에서 보냈다. 4·19가 그를 부르기 전까지는.

동경 대에 다닐 때 조 용수와 함께 하숙을 하며 가까이 지냈고 이후 이 영근 밑에서 통일일보 편집장을 맡기도 해 지금까지 조 용수 개인 및 조 용수 사건과 관련한 핵심적 증언을 해온 윤 숙일에 따르면, 당시 조 용수는 치열한 좌우익 논쟁이 벌어질 때면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사고나 행동에 있어서 자유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53년 재일본 한국학생동맹 문화위원으로 선출됐다. 한편으로 그는 민단 기관지인 민주신문사 등에서 언론인 자질도 닦았다. 이 시기 그는 학비와 생활비 대부분을 고향에서 인편을 통해 오는 돈과 클래식음악 잡지에 음악평을 기고하는 등 아르바이트로 벌충해 해결했다.

졸업 후 그는 한국 거류민단 중앙총본부 차장으로 선임되는 한편, 민주신문의 상임논설위원으로 위촉됐다. 그는 일찍부터 정치감각 외에도 문필가적 재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신격호 등 재일 한국인 청년 실업가들과도 친분을 쌓아나갔다.

조봉암 구명·재일동포 북송 반대

그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1959년 찾아왔다. 59년은 되돌아보면 그의 운명의 서곡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해이기도 했다. 그해 2월 이승만의 오랜 정적 조 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본국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기가 쉽지 않은 민단이지만 일각에서 조 봉암 구명위원회가 조직됐다. 이 일에 열성적으로 뛰어든 조 용수는 22만 명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에게 전달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맡았다.

그 해 7월 조봉암의 사형은 집행됐고 민단 내부도 친정부 일색으로 물갈이됐다. 조 용수는 8월 조 봉암 추도회까지 앞장서 마무리했다.

이 일로 그는 조 봉암의 비서출신인 이 영근을 만나게 됐다. 이 영근은 조 봉암의 진보당 사건에 연루됐다 병 보석으로 풀려난 틈에 일본으로 망명, 동경에서 「통일조선신문」을 만들며 반 이승만 운동을 벌이고 있던 참이었다. 이 영근은 조 봉암이 공산주의자였을 때 함께 공산주의자였고, 조 봉암이 전향했을 때 역시 전향했으며, 조 봉암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농림부장관을 할 때 과장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였다.












진보당 사건 - 공판정의 조봉암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98) 1958년 1월 13일 조봉암 진보당 당수가 시경으로 자진 출두하는 도중 보안법 혐의로 검거되었다. 사진은 2심 공판정에서 한복을 입고 앉아 있는 조봉암.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가 급서한 뒤 야당 대통령 후보는 진보당의 조봉암으로 단일화 됐고, 진보당의 부통령 후보였던 박기출이 자진사퇴해 야당의 부통령 후보는 민주당 장면으로 단일화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핵심 주도 세력인 조병옥 김준연 등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은 지원할지언정 조봉암을 지원할 수 없다", "야당 세력에 조봉암을 가담시킬 수 없다"는 강경론을 폈다.
조봉암은 58년 1월 12일 진보당 간부인 윤길중 김세룡 박기출 등과 거물 간첩 양명산이 체포된 다음날인 1월 13일 구속되었다. 조봉암과 양명산은 1심에서 각각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극우 단체들의 법원.판사집 난입과 정권측의 거센 항의 뒤에 열린 2심에서 둘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59년 7월 30일 대법원은 이들의 재심청구를 기각했고, 이정권은 7월 31일 두 사람의 사형을 신속하게 집행하였다. '이승만의 장기 집권은 용인할지언정 죽산을 지원할 수는 없다'는 야당의 냉전적 사고방식 속에서 조봉암 제거의 역사적 음모는 가능했다.(자료인용;
http://www.ihs21.org/photo/ga3-19.htm근현대사진)


조 봉암 구명운동의 파문으로 조 용수는 민단에서 견책을 받고 동경 외곽 소도시의 부단장으로 좌천됐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는 또 다른 과업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일 동포 북송 반대 투쟁이었다. 1956년부터 일본과 북한의 국교정상화 노력의 일환으로 논의된 북송방침이 일본 각의에 의해 59년 2월 정식 결정된 이래 한국 정부와 재일 거류민단의 반대움직임이 날로 거세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 해 12월11일 조 용수를 비롯한 민단의 청년 결사대원 500여명은 동경 신주쿠 역에 집결, 북송작업이 이뤄지는 역 구내 철로에 누워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 광경은 조 용수의 모습이 선명히 부각된 채 당시 중앙 공보부에 의해 촬영돼 영화관 뉴스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 자료는 이후 조 용수가 조총련계와 얼마나 거리가 먼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증거의 하나로 제시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 차례 정치행동에서 좌절을 겪은 조 용수는 1960년 3월 재일 동포 2세와 결혼했으나 4·19혁명 두 달 후인 6월 급거 귀국했다. 7·29총선에 사회 대중당 후보로 문중이 많이 사는 경북 청송에 출마한 그는 앞으로의 정당정치가 보수와 혁신의 양당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지금의 빈곤이 광복 후 보수 정객들만의 절름발이 정당정치와 반공이라는 구실 하에 혁신 정객을 탄압한 결과』라며 『보수정당과 혁신정당을 상호 육성하여 이념적 대결의 정당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3위로 낙선했다. 그는 고국에서 다시 좌절을 맛보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혁신적이라고 불려도 좋다』

선거 과정을 통해 조 용수는 혁신 계에 대한 일반의 과잉경계 및 혁신 계 내부의 분열 상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통일을 갈망하는 세력들을 하나로 결집하는 문제에 나름대로 골몰하던 그는 이 영근과 대화하던 중 신문 창간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낸 것으로 전해진다. 조 용수는 이 영근을 통해 당시 재일동포 사회에서 제1의 재력가로 통하던 박 용구라는 인물을 소개받았다.

고리대금과 부동산업을 기반으로 일본 정재 계에 막강한 인맥을 갖고 있던 박 용구는 민단 내에서 혁신 계로 분류되는 사람이었다. 조 용수는 박 용구로부터 자금지원을 약속 받는 한편, 이 영근의 소개로 때마침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전 조선일보 편집국장 송지영을 만나는 등 신문창간에 참가할 인사들을 구상한 뒤 60년 12월 귀국, 혁신 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차례로 접촉했다.

4면 짜리 신문 창간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61년 1월19일 조 용수는 일간 신문 광고를 통해 민족일보 창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며 이 새로운 신문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전 민족의 비원인 이 나라의 통일 문제는 민족일보가 가장 정력을 바치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 간에 유혈의 전쟁을 고취하고 평화적 통일을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장 준엄한 비판자가 될 것이며, 조국의 통일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민주적 애국지사들에게는 가장 열정적인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민족일보는 혁신적이라고 불려도 좋다는 것입니다』

창간호 발행 직후부터 과감한 논조와 신선한 편집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민족일보는 곧 유력 대중지에 육박하는 발행부수를 기록했다. 민족일보는 때마침 「굴욕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던 한미경제협정문제 등을 이슈로 장면정권을 혹독하게 몰아붙였고, 장면 정부는 이에 대응해 서울신문이 대행해 주고 있던 민족일보 인쇄작업을 중단시켰다.

게다가 민족일보 창간 전부터 이미 국회에서는 「조총련계 자금줄이 있다」는 논란이 일어난 바 있다. 당시 신민당 소속 민의원 김영삼(金泳三)은 신문탄압의 공통점을 들어 장면정부의 폭거를 이승만 정부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싸잡아 매도했고, 여당인 민주당 대변인 김대중(金大中)은 『우리 당으로서는 그 해약지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또한 정부와 민주당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고 해명했다.

당시 언론계 동향을 알리는 『신문평론』은 창간 3주일이 된 민족일보를 이렇게 평했다. 『민족일보가 펜대만 들고나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한 차림으로 발족했지만 5만 부를 발행하게 된 것은 어용지 보수 지의 장난에 증오감을 느끼기 시작한 국민들의 감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혁신 계 신문의 발간을 기성 신문도 집권당이나 보수정파와 똑같은 이해타산으로 백안시하고 있다. 민주당 정부가 자기 무능과 부패성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결의가 없고, 기성 언론계가 낡고 썩은 보수에 도취하여 장단을 맞추고 있는 한 혁신 계 신문은 국민의 편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나갈 것이다. 민족일보는 그 첫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조 용수는 사장 신분으로 직접 사설을 쓰고 장면 정부가 추진중인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별법」 등 2대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연사로 거리에 나서기도 했다.

그리고 남북교류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갖고 신문제작에 임했다. 민족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집중 비난에 김대중 민주당대변인은 『이 반공임시특별법의 입법취지가 언론이나 혁신세력의 탄압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조 용수는 어디론가를 향해 분명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듯 보였다. 그 행로의 초반에 운명을 조기에 결정해버린 것은 5·16이었다. 혁명 과업 수행에 영광 있기를』 5월16일 오후 조 용수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청취하던 중 「한때 좌익 경험 유」 부분에서 나름대로 안도했다.

진보적 성향의 인물이 정권을 잡으면 민족일보도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이 있었다. 더구나 대구폭동 당시 남로당 구 미군 책으로 경찰에 사살됐던 박 상희의 딸과 결혼했고, 얼마 전 군 하극상 사건으로 예편한 김종필이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은 왠지 그를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그가 쓴 5월17일자 사설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끝으로 우방제국에 일언을 부치노니, 이 군사혁명이 발생된 원인을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우호를 베풀어주기를 진심으로 희구해 마지않는다. 우리는 거듭 내치 외교에 획기적인 일신이 있고 민주적인 조명이 있기를 강조함으로써 이 획기적인 군사위원회의 혁명과업 수행에 더 많은 영광 있기를 바라는 바다』

다음날인 18일 아침 조 용수는 일본에 있는 이 영근과 통화, 일본으로 잠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자신의 거취를 상의했으나 『민족일보와는 아무 상관없는 쿠데타인 것 같으니 걱정 말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날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연행됐다. 곧 풀려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나흘 만인 22일 치안국은 「민족일보와 동사 사장 조 용수 일당들의 죄상 및 배후관계」를 발표했다. 3년 6개월까지 소급 적용키로 하고 만든 특별법에 근거한 혁명재판에서 합리적인 법리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제대로 기능하지도 못했다.

이 혁명재판에 심판관으로 참여한 이 회창(李會昌)은 후일 김대중 국민회의 대통령후보와 일전을 앞둔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시절, 회고 요청을 받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막 군법무관에 임관된 상태에서 혁재(혁명재판소)로부터 인원차출 지시가 왔는데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해 나이 어린순으로 차출되다 보니 세 명의 심판관 중 한 명으로 참여하게 됐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 용수의 용모는 준수했으며 심문에도 똑똑히 대답해 사형을 내리기에는 아까운 젊은이였다』

민족일보는 폐간돼 직원들은 흩어졌고 조 용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해외에서는 각종 단체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국내에서는 아무런 공개적 항의도 없었다. 12월21일 오후 조 용수는 4·19 발포책임자 최 인규와 곽 영주, 정치깡패 임 화수, 사회당 조직부장 최 백근 등과 함께 차례로 사형대에 올랐다.


미스터리의 인물, 이영근

민단 계 조총련계 양쪽에 모두 선을 대고 있던 대표적 인물인 이 영근은 재일동포 중 최고 재력가로 꼽히는 박 용구를 조 용수에게 소개했다. 정치적으로는 민단 내 좌파쯤으로 분류되고 재력으로는 국내 삼성의 이병철보다 세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박 용구는 조 용수를 조국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대변해 줄 전위대로 인식했다.

민족일보 창립자금으로 건네진 돈은 순전히 박 용구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박 용구로서는 그야말로 「포켓머니」에 불과한 소액을 달러로 1차 환전해 준 것이다. 최대의 물주였던 박 용구는 이후의 계속적인 지원계획을 조 용수에게 제시했고 돈 걱정은 하지말고 사업계획을 진행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자체 재정 기반이 없는 이 영근은 여러 채널로 조 용수에 대한 후원금을 갹출했다. 당시 재일 동포 사회의 정황과 이 영근의 독특한 양면적 입지로 미루어 민단은 물론 조총련계 동포들로부터도 개인적 성금을 받아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는 그 돈을 착복한 의혹이 짙다.

조 용수가 이 영근으로부터 구한 것은 조언과 인맥이었지, 돈은 받지도 않았고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 영근의 일본인 처는 갑자기 고가의 보석으로 치장하기 시작해 동포사회에서 화제가 됐다.

그러던 이 영근은 어느 시점부터 중간에서 제동을 걸어 박 용구의 자금지원을 차단시켰다. 민족일보는 한때 신문용지 대금을 대지 못해 허덕이는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조 용수는 이 시기 동창 등 친지들에게 백방으로 자금 지원을 호소하며 어렵게 회사를 꾸려나갔다.

이 영근은 얼굴 마담쯤으로 여겼던 조 용수가 막상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양태로 신문 필진과 논조를 꾸려나가는 데 불만을 가졌던 듯하다. 조 사장 배척을 위한 모함도 이영근에 의해 암암리에 진행됐다. 이러한 기미를 알아차린 조 용수는 그렇잖아도 각 당파가 민족일보를 각각의 당리당략에 이용하려는 풍토 속에 사장 자리를 내놓고 미국으로 유학 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경제학 교수로 있던 사촌형 조 용삼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5·16 직전이었다.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두 달째 접어들 무렵 조 용수는 동생에게 이례적으로 이 영근에 대한 인물평을 한 일이 있다. 『그는 동경에서 유능한 청년들을 가까이 불러 능란한 처세술로 사로잡는다. 웬만한 유학생은 며칠 동안 설득 당하면 혹한다. 생명을 다해 충성할 태도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한동안 애지중지하다 언젠가 내친다.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이 속출한다. 그런데 그는 1, 2년 후 그들에게 다시 접근해 더 꼼짝 못하게 당기는 이율배반적인 인품을 지니고 있다』

이 영근에 대해서는 「저울같이 기우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조 용수는 그의 내면을 어느 정도 꿰뚫고 있었던 듯 하다. 이 영근은 당시 조총련과 민단, 북한과 남한 사이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평가를 스스로에게 내리고 있었다.

조 용수 사후 이 영근은 한국을 내왕하며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통일조선신문」을 「통일일보」로 바꿔 일본 내의 대표적 친 한파 신문으로 성장시켰다.

「젊은 사자들」

조 용수 사후 통일조선신문사는 「고 조 용수 동지를 애도한다」는 추도사를 통해 『4·19로 희생된 젊은 열사들에게 바쳐진 노래로 조 용수 동지가 가장 좋아하며 부르던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백만 송이 꽃을 피우고자/한 송이의 꽃은 져 가고…져버린 꽃을 아까워하지 마라/꽃은 져야만 열매를 맺는다』는 노랫말을 인용했다.

조 용수가 숨진 12월21일 저녁 한 석간 신문은 이 소식을 「부정선거 원흉 등 5명 사형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전하면서, 『조 용수의 친동생이라는 청년이 「오늘 아침에도 면회까지 하였는데…사형을 집행하다니…」 하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고 서대문 형무소 앞 풍경을 묘사했다.

또 재일 동포 실업인 시찰단이 혁명 후 모국의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이날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혁명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에 라디오 청취자들은 전파를 타고 온 크리스마스 선물을 듬뿍 받게 될 것이다. 서울중앙방송, 국제방송, 기독교방송, 문화방송은 다같이 성탄절 특집프로를 마련, 보도 교양 오락 프로를 크리스마스 일색으로 꾸며놓고 23일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내보내며 연 3일을 성탄축하 일색으로 맞게 할 것이다』

신문의 영화광고란은 전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광증과 불합리와 허무, 그리고 부질없는 죽음을 묘사한 말론 브랜도,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할리우드 대작 「젊은 사자들」이 이날 종로 우미관에서 개봉에 들어갔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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