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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 담론 385.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4-진나라 제왕의 위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위염(魏冉)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85.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 4-진나라 제왕의 위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위염(魏冉)




楚文化代表屈原像.

哪些是荆楚名胜?http://jingchu.baike.com/article-123954.html

楚文化的發展階段  
www.HB.xinhuanet.com  2005-03-03 17:58:16   
    楚文化是在漫長的歷史歲月中,不斷發展壯大的。按楚文化不同時期的特點,可把楚文化劃分為濫觴期、勃興期、鼎盛期和轉變期4個階段。
    楚人建國丹陽至周平王三十一年(公元前740年)是楚文化的濫觴期。在這一時期,楚國完成了由原始社會向奴隸社會的轉變,在兼採華夏文化和蠻夷文化之長的基礎上,開始創造自己的特色文化。總的來說,此時的楚文化與華夏文化尚沒有明顯而重大的區別,尤其是陶器、青銅器等物質文化方面,但楚文化又畢竟顯示出了一些自己的特性。崇火崇鳳好巫、開拓進取、不拘禮法、愛標新立異等特點為後來楚文化的發展奠定了基礎。
    春秋時期是楚文化的勃興期。這個時期,楚文化開始呈現出自己鮮明的特點,表現在各個方面。從社會形態上看,農奴制布滿了楚國各個縣邑,奴隸制相反沒有得到充分的發展。在民族政策上,楚人把自己定位于夷夏之間,實行撫夷屬夏的國策。對于所滅之國,楚人的作法是遷其公室,存其宗廟,縣其疆土,撫其臣民,用其賢能,而不以俘掠奴隸為好。從官制上看,楚官多稱尹,從中央到地方,少有例外;從行政建制上,楚國首創縣制,後為各國效倣;在兵制上,稱謂、建制也與中原多異。這些大的文化背景已經充分昭示了楚文化的個性與氣魄,楚文化也由此成熟起來。
    楚民族風俗獨樹一幟。楚人尚赤,建築服飾器物均以赤為貴。各地楚墓出土的黑底朱彩漆器就是例證。楚人尚東,生之坐向、死之墓向均印為榮;與周人的面南背北、頭北腳南迥然不同。楚人尚左,也與周俗尚右不同。楚人念祖、愛國、忠君比之周人更為突出,他們習慣于用原有地名命名新地,丹陽、郢數次遷移不改其名就是為了緬懷先祖。楚人由于歷盡艱辛而建國稱霸,民族自豪感和民族自尊心異常強烈,鐘儀南冠面晉,南音不改,屈原成為第一個偉大的愛國詩人都是典型的例子。
    楚國的物質文化開始顯示出自已的獨特風格。樂器中楚人最愛鐘,並視之為國家權力的象徵。楚鐘不僅音色絕佳,而旦造型獨到,甬鐘、鈕拯都有從大到小不可顛倒的組合關係,因而稱為編鐘。眾所周知,編鐘是楚國音樂藝術的傑出代表。臺謝建築也有楚人的獨創,楚人築臺追求高峻,以縱目遠望,楚人修榭追求空靈,以澄懷遠目,而且在建造中還有層臺累榭的特點,這一點為後來的南方園林所繼承。此外,楚國修城不建池也有別于北方而顯示出自己的個性。     戰國時期是楚文化的鼎盛期。此時,銅器生產登峰造極,鐵器普遍推廣,絲織刺繡興旺發達,漆器木器應運而生,城市建設欣欣向榮,物質文化可算是達到了頂點。與勃興期明顯不同的是,鼎盛期的楚國精神文化大放異彩,給予後世巨大的啟迪,從哲學到文學,從字畫到樂舞,無不獨風騷,彪炳千秋,更為主要的是,楚人的政治社會體制、民族文化心理,日常生活方式等趨于成熟定型,使楚文化真正成了獨特的"這一個",千百年來為人們津津樂道。     秦漢之際為楚文化的轉變期。秦國滅掉了楚國,並排斥楚文化,使楚文化遭受重大打擊。但楚文化的精神因素方面遠比物質因素方面根深蒂固,因此楚文化被打而不倒,秦末,楚人劉邦、項羽大興楚文化,使楚文化有復蘇之勢,但離開了物質文化根基的楚文化終究是不可能沿著自己的道路發展下去了。漢武帝獨尊儒術後,自成體係的楚文化不復存在,但楚文化的某些因子卻與傳統中原文化一樣,成為新的漢文化的組成部分。至此,南北文化相互交融,彼此促進,共同創造著中華民族的燦爛文明








百家讲坛:吕不韦为情铸大错 秦皇灭亲树威


 







*참고...Attention!!

대륙향토 사료인 본 글-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 시리즈를 이곳에 소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음 글을 이해못하면 본문을 그냥 덮어도 좋다.
핵심키워드;동이족. 회이족 후예. 우리와 같은 곰토템 웅영족.동이족 특징 봉황을 숭상. 단군성조 상징하는 동황태일 모심. 동이족 민족의식 강한 굴원이 산동성의 전통적 동이족 제나라와 외교할 것을 주장하다 실권하여 자살. 萊夷族 齊人 呂불위 친자 진시황(동이족)의 秦나라 건국공신 대부분과 劉邦(楚人)이 건설한 漢나라 건국공신 대부분 楚人.따라서 秦漢 문화의 핵심주류는 동이족 楚文化.

*동황태일 참고;

굴원이 지은 「초사(楚辭)」의 9가(九歌)의 첫 시가는 다름 아닌 "동황태일(東皇太一:단군성조)"이라는 제목의 시이다.위당 정인보가 이것을 그냥 흘려보질 않고 다음과 같은 사자후를 토했다.(見 「정인보의 조선사 연구」 박성수 편역 48쪽) '중국의 정사인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를 보면 삼신(三神)의 태일(太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의 태일은 예필본어태일(禮必本於太一)(『재기예운(載記禮運)』의 태일이 아니라 동황태일(東皇太一)의 태일이다. 이처럼 태일을 동황으로 올린 것은 시문을 짓는 사람의 일시적인 조작일 리 없다. 더욱이 굴(굴원)씨의 서언에 보면 "무가(巫歌)를 빌려 자감(自感:자기감정)을 나타냈으니 동황 두 자가 물론 심상(尋常:범상)한 것은 아니지만 봉선(封禪:천제의 祭)의 대제는 삼신(三神)을 주로 하되 태일(太一), 천일(天一), 지일(地一) 가운데 태일이 가장 귀하다고 한 말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연(燕)나라나 아니면 제(齊)나라에서 왔을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봉선의 근거지는 곧 태산(泰山)이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고조선인이 진출하였다는 회대(淮垈)지방의 대산(垈山)이 바로 태산이었다. 동이족 천자(환웅)가 봉선대제(천제)를 지낸 태산(구 垈山)은 치우천자의 영역 중하나인 산동성, 산서성, 하북성 가운데에서도 동이족 근거지인 산동성에 있다.  이만해도 삼신(三神) 고제(古祭)가 중국 땅에 들어가 있던 고조선인의 행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인은 어디를 가든지 자기를 잃지 않고 자기를 지킬 줄 알았던 것이다.'


필자가 호남성 악양시 악양루에 올라 찍은 동정호 정경& 동정호내 군산 선착장 입구
*굴원과 멱라수의 근원 동정호. 동정호 남쪽이 바로 멱라수로 불린다. 동이족 국가인 초나라는 굴원의 초사에 보면 동이족 전욱고향의 후예로 동황태일(단군성조)을 모신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동황태일은  만주족 거란족도 동황태일을 신앙했다 나오며 환단고기에 그 실체가 소개되어있다. 굴원은 스스로 동이민족 핏줄임을 알고 있었다. 굴원은 같은 핏줄이어서 산동성 동이족 제나라와 연합해 진나라를 칠 것을 회왕에게 간했지만 간신들로 둘러싸인 대부분의 중신은 진나라와 연합해 제 나라를 칠 것을 주장했다. 굴원은 이를 고민해 "이소"를 쓰고 "천문"이라는 글을 통해 하늘에 호소했지만 결국 동정호 멱라수에서 자살하고 만다. 우리의 송편은 굴원이 물고기에 뜯어먹히지 말라고  동정호의 어부들이 호수에 넣기 시작하면서라고 전한다. 우리의 4대 명절은 바로 추석, 설날,한식,단오인데 굴원이 죽은 날인 단오는 바로 우리가 쇠고 있는 4대 명절 중의 하나로 굴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왠지 굴원의 초나라가 더욱 우리 동이족이라는 생각이 안드나? 우리의 상고 대륙사가 뭔지 잘못되어 있음이 느낌으로 와닿지 않나?  중국에서는 문화의 뿌리이자 비조를 굴원으로 본다. 이태백, 두보가 바로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하여 문화, 예술이 발달한 자존심 캡인 쓰촨도 굴원이 태어나 활동하다 죽은 호남성 옛 초나라의 자리까지는 차마 넘보지 못하고 바로 그 다음이라 말할 정도로 굴원은 신성시하고 있다.
*단재는 선인왕검이라 함은 3국 시대에 수두교도의 일단을 '선배'라 칭하고 선배를 이두문자로 선인(仙人) 혹은 선인(先人)이라 기록한 것이며, 선사(仙史)는 곧 왕검이 가르침을 베푼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니, 후세에 불, 유 양교가 서로 성행하면서 수두의 가르침이 쇠퇴하고 선사(仙史)도 남은 것이 없어 그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지나의 고서인 굴원의 「초사」,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에 흩어져 있는 기록을 볼 수 있다 하였다. 그리하여 「사기」<봉선서>에 "삼일신은 천일, 지일, 태일이니 삼일의 가운데 태일이 제일 귀하다" 하며 "오제(五帝)는 태일의 보좌"라 하고 <진시황본기>에 "천황, 지황, 태황(인황)의 3황중에 태황이 최귀"라 하며, 「초사」에 동황태일이라는 노래가사가 있고 「한서」<예문지>에 <태일잡자(泰一雜子)>의 서명(書名)이 있으니 3.1신과 3황은 곧 고기(古記)에 기록한 3신, 3성(聖) 등의 종류이니 3.1신을 우리 고어로 번역하면 천일은 말한이니 상제(上帝)를 의미한 것이요, 지일은 불한이니 천사(天使)를 의미한 것이요, 태일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최상이란 말이니 신한은 곧 '천상천하 유일무이'를 의미한 것이니, 말한, 불한, 신한을 이두문자로 마한(馬韓), 변한(卞韓), 진한(辰韓)이라 기록한다고 했다.우리는 이상의 사기 봉선서의 내용과 진시황 본기의 내용만 가지고도 이들 하늘의 상제님에게 천제를 지내는 동이족의 천제지자(天帝之子)의 역사 전통과 신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굴원의 초사에 등장하는 단군성조 동황태일이 현실적으로는 상제님이신 천황과 태모님 위격에 해당하는 지황 즉, 천일과 지일보다 더한층 최고로 귀한 태황(인황)이라 한 점에서 지상 최고 통치자(대두목)의 위격을 더 높이 친 인본주의 사상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산해경(山海經)」<해외서경>에 보면 웅상(雄常)이라는 나무 아래에서 성인이 대를 이어 즉위하는 숙신(肅愼)국에 대해 나온다.정재서 역주에 정 인보 ,안 재홍 제 씨는 중국 고서에서 출현하는 주신(珠申), 식신(息愼), 직신(稷愼)과 마찬가지로 조선(朝鮮)을 음사(音寫)한 별종의 표기로 파악했다 하였다. 또한 이 숙신국이 바로 단군 조선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바로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보인다. 즉, '경인 원년에 11세 단군 도해(道奚)가 5가에게 명하여 열두 명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곳을 골라 국선 수두(蘇塗)를 세우게 하였다. 수두에는 단수(檀樹)를 빽빽하게 둘러 심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환웅상(桓雄像)을 모셔 지내며 나무를 웅상(雄常)이라 이름하였다.' 「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에 '군자국이 그(대인국) 북쪽에 있다. (그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고 있으며 짐승을 잡아먹는다. ...(앞서 안원전 21세기 담론중)


;지나 한(漢) 족은 진한(秦漢) 시기에 이루어졌고 그나마 진시황도 동이족 신농씨의 후예인 산동성 여(呂) 땅에 봉해진 강태공 여상(呂尙)의 후예 삼진(三晋) 산서성 조나라 한단(邯鄲)의 대상인 동이족 여불위의 친아들이었다는 점에서 동이족 국가였으며 진(秦) 황실의 뿌리(앞서 설명) 역시 동이족 출신이었다. 또한 하은주 3대가 동이 제족이 이룩한 것임은 현재 지나 대륙 고고학사가 그대로 인정하는 바이고, 공자가 화하(華夏)사관의 벼리로 삼은 황제헌원이 동이족임은 현재 지나의 고고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이거니와 요, 순 역시 동이족의 혈손임은 요묘(堯廟), 순묘(舜廟)의 기록도 고증하는 바이니 사실상 진한 시대 이전의 모든 상고 대륙사의 주인공은 바로 동이 한겨레가 백월, 형초, 오, 맥이, 맥, 9리, 9려, 삼묘, 융이, 인방, 귀방, 강방, 훈죽, 등 아주 다양한 종족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점이다.
전욱(顓頊) 부락은 황제(黃帝)족 가운데로부터 나온 것으로, 전욱(顓頊)의 출생지는 하남(河南) 경내(境內)에 있다. 전욱(顓頊)은 초(楚)의 시조니 굴원(屈原)이 설명하기를, “(초(楚)는) 제(帝) 고양(高陽)의 묘예(苗裔)다”라고 했고, <사기(史記)․초세가(楚世家)>에도 설명하기를, “초(楚)의 선조는 제(帝) 전욱(顓頊) 고양(高陽)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국어」에 여(黎)가 (제곡)고신(高辛)씨가 되었다고 한다. 오회는 그 형과 함께 처음에 또한 중려(重黎)의 정사를 나누어 장악한 연고로,  전욱의 자손이 사는 숙사국(淑士國)의 율(栗) 광야에는 10명의 신이 있어 이름을 여와지장(女媧之腸)이라 하는데 복희와 결혼해 혼례를 제정하고 생황을 처음 제작했으며 여와보천신화가 의미하는 것처럼 지나족의 창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여와(女媧)가 죽어 숙사국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은 전욱의 후예인 숙사국이 배달민족임을 확인시키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앞 안원전 담론중)
*오월초(吳越楚)는 바로 양자강 유역의 회이(淮夷) 족이 건설한 국가다.동이족 조상선조 태호복희 풍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황제헌원의 유웅씨와 단군이 즉위하는 신목과 웅상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황제헌원은 웅(熊) 도등(圖騰:깃발상징 토템)을 숭배하여 유웅(有熊)씨가 되고 그가 거주한 곳을 웅산(熊山)이라 불렀다 하며 높은 수레(高車)를 발명한 것으로 인해 헌원(軒轅)씨가 되었다 하니 황제 헌원의 유웅씨 역시 황웅씨(黃熊氏)의 태호복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황웅족 곰족의 후예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 묘요(苗猺) 신화와 더불어 그 이동 경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뒤의 담론부분에서 이들이 대륙의 다사다난한 동이 제 족간의 쟁패과정과 이합집산과정에 의해 양자강 유역의 회이족(淮夷族)-초민족(楚民族)인 웅영족(熊盈族)으로 변신해 나아갔음을...(담론중)
*일찌기 20세기 20년대 말에 곽말약이 <중국고대사회연구>라는 서책에서  "초는 본래 만이(蠻夷)니, 곧 회이(淮夷)"라 생각한다고 했다. 회이(淮夷)는 즉 초인(楚人)이니 즉 만형(蠻荊)이다.  ...회이,서이,형만은 널리 퍼져 매양 관련지어져 말하니, 이들 계열은 반드시 같은 동족일 뿐 아니라, 은(殷:동이족 95% ;임혜상)의 동일 맹족(혈족적으로 느슨한 동일족)이 된다. 후일, <은주청동기명문고석>,<금문총고> 등 책중에 초인은 곧 "웅영족(熊盈族:곰토템족)임을 명확히 인정한다. 초(楚)의  조상들이 회수(淮水) 아래 떠돌며 살았으며 엄인(奄人), 서인(徐人)등과 더불어 함께 동방국(東國)에 속했다.   ....웅영(熊盈)은 마땅히 곧 육웅(鬻熊:or 죽웅)이며, 영육(盈鬻)은 한가지 소리가 전음(轉音)되어 바뀐 字이다.웅영족은 주인(周人)이 압박하매 남하하기 시작해 강에 이르러, 강이 가로막아 다시 서쪽 위로 올라가 악(鄂)에 이르렀다. 호후선(胡厚宣)은 <초민족원어동방고> 한 글 가운데 진일보하여 "초의 시조는 축융(祝融)이 된다"고 주장한다. 축융(祝融)은 곧 육종(陸終)이니....즉 수인(遂人)이 곧 여(黎)족이고; 육종, 수인, 여 모두는 동방민족이다. 때문에 그후 주민족의 동방압박이 황하유역으로 미치니, 점점 상황이 변하여 동방민족이 마침내 허다히 서로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왔을 뿐 아니라, 초민족의 세력이 심히 강하여 점점 남방의 강한(江漢)유역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곽말약, 호후선 두 선생은  초민족 동방설을 인도하니 지금에 이르러 그 영향력이 거듭 심원하여, 적지않은 학자가 이 학설을 따른다 < By 安原田 譯>
* 태호복희 풍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황제헌원의 유웅씨와 단군이 즉위하는 신목과 웅상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황제헌원은 웅(熊) 도등(圖騰:깃발상징 토템)을 숭배하여 유웅(有熊)씨가 되고 그가 거주한 곳을 웅산(熊山)이라 불렀다 하며 높은 수레(高車)를 발명한 것으로 인해 헌원(軒轅)씨가 되었다 하니 황제 헌원의 유웅씨 역시 황웅씨(黃熊氏)의 태호복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황웅족 곰족의 후예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 묘요(苗猺) 신화와 더불어 그 이동 경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뒤의 담론부분에서 이들이 대륙의 다사다난한 동이 제 족간의 쟁패과정과 이합집산과정에 의해 양자강 유역의 회이족(淮夷族)-초민족(楚民族)인 웅영족(熊盈族)으로 변신해 나아갔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는 황제헌원의 유웅(有熊)씨가 그 한갈래였던 것 처럼 동이 제 족은 웅족으로 이미 그 날을 세우고 있었음을 뜻하며 단군신화중의 곰족과 호족의 쟁패신화 역시 환웅 배달국의 웅(雄)과 웅(熊)은 고대에 서로 통했기때문에 정통 웅족(배달환웅족)과 정체불명의 이족(異族)과의 한반도 간방위 유입시기의 쟁패과정을 가히 추정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곰과 호랑이 신화가 배달국 웅족의 정통후예가 대륙으로부터 북만주로부터 백두산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입되는 쟁패과정이 기록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진나라 제왕의 위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위염(魏冉)





魏冉亦作魏厓,即穰侯,战国时秦国大臣。原为楚国人,秦昭襄王之舅,宣太后异父同母的弟弟。从惠王时起,就任职用事。昭襄王立,他受任为将军,警卫咸阳(今陕西咸阳东),因食邑在穰(今河南省邓州市),号曰穰侯。凭着他与昭王的特殊关系在秦国独揽大权,一生四任秦相,党羽众多,深受宣太后宠信。曾保举白起为将,东向攻城略地,击败“三晋”和强楚,战绩卓著,威震诸侯,“苞河山,围大梁,使诸侯敛手而事秦”。 公元前288年10月,秦昭王派穰侯魏冉去齐国,约齐湣王与秦昭王同时称帝,秦为西帝,齐为东帝,准备联合五国攻赵,并三分赵国。当时订立了共同伐赵的盟约,但秦国这一连横策略没有成功,被苏秦的合纵破坏了。 公元前284年,秦、韩、赵、魏、燕五国,合纵破齐,他假秦国的武力专注于攻齐,夺取陶邑(今山东定陶西北),为己加封,扩大自己的势力,这是与秦孝公之后的历代秦王着眼于统一中国的战略目标背道而驰的。由于他权势赫赫,“擅权于诸侯”,“富于王室”,专权跋扈,“一夫开说”,导致人心不附,对秦王政权构成了严重威胁。前266年,被秦王罢免,由范雎代相,最后“身折势夺而以忧死”于陶邑。 魏冉,战国时代着名政治家,军事家,秦昭襄王母宣太后异父弟,原楚人,芈姓,后改姓魏;形成以封地陶居住的另一魏姓分支。司马迁在《史记·穰侯列传》中说“秦所以东益地,弱诸侯,尝称帝子天下,天下皆为两乡稽首者,穰侯之功也”。魏冉少年成名,军功显赫,为秦名将。长期掌握秦国的军权,秦国的高级将领如司马错和任鄙都出自魏冉门下。魏冉长期担任秦国相国,5次为相。着名军事家白起也是在魏冉的提拔下,取得了对东方各国作战的一系列辉煌胜利。魏冉臂力过人,豪爽猛断。武王即位后,在自己熟悉的亲戚中选拔大臣,特别重视军事人才。尽管魏冉是武王的挂名舅舅,但两人实际年龄相差不多,性情相投。且魏冉矫健力大,与好力的武王终日在一起习武。魏冉与武王的另一位重要大臣、武王的叔叔里疾的私人交情也不错。在魏冉的帮助下,里疾挤走了位在自己之上的甘茂。甘茂是惠文王和武王重用的楚籍名臣。 魏冉长期掌握秦国的军权,秦国的高级将领多出自魏冉门下。惠文王朝的司马错和武王朝的任鄙都是秦国的重要将领,也都投靠了魏冉,在与惠文后的斗争中发挥了重要作用。在魏冉提拔的大批青年将领中,白起是最出色的一个。由于魏冉的悉心培养,白起很快成为可以独挡一面的青年将领。在伊阙之站前,魏冉力荐白起为将,而昭王要重用自己的亲信向寿。魏冉说服了宣太后,昭王让白起代向寿为将。《战国七雄》游戏中将领也是各有特色的。能否知人善用,能否在战争中掌握并熟悉运用这些将领,将左右战局。 魏冉在多年地军事生涯中,早明白军事将领越是出名越是没有好下场,不是让敌人杀死,就是让自己人害死。在《战国七雄》游戏中也不要把自己放在锋头上,所谓木秀于林风必吹之,不要因为一时的虚荣,成为众矢之的。 魏冉长期主持秦国的军事工作,既有攻韩魏的大胜,也有被攻破函谷关的大败。魏冉在秦国已经是最尊贵的大臣了,到了无已复加的程度。而战争必然会有胜负,胜则无益,败则影响魏冉的声誉。于是让白起出任主将,这样标志着魏冉仍掌握军权,不必因战绩影响自己的富贵。在游戏中的你也不可能百战百胜,所谓有胜有负,有得有失。在一场战斗中获得胜利或失败,不管是胜或负从中吸取宝贵的经验才是重中之重。 在魏冉早期的国际战略构想中,是实行远交近攻。与远方的齐国结盟,攻击秦国的危险邻居们韩赵魏楚。齐国非常狡猾,表面答应秦国,暗中却将自己的策略调整为远攻近交,与韩赵魏楚结盟,挑唆他们进攻秦国,齐国成了攻击秦国的策源地。在《战国七雄》游戏中同样可以利用远交近攻策略来慢慢的使自己强大起来。




감무와 동시에 한때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던 초인으로는 또 굴개(屈盖)가 있다. 감무 이 후에는 또 楚人 향수(向壽), 위염(魏冉)과 미융(羋戎:위염동생)이 진의 재상이 되었다. 향수(向壽)는 감무를 보좌해 의양을 공격, 함락하여 후에 감무의 자리를 얻어 그를 대신했다. 그는 재위기간에 “한나라를 정벌하고 무시를 취하는(伐韓、取武始).《사기․진본기(史記․秦本紀)》
” 등의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지혜와 용기는 감무에 미치지 못하여 재위한지 얼마 안되어 면직 당했다. 위염(魏冉)은 진 소양왕(昭襄王) 시대에 장기적으로 집권하면서 적극적으로 통일 사업을 추진하여 역사의 공헌이 매우 크다.

위염은 진 소양왕의 모친 선태후(宣太后)의 첫째 동생이며 본래 초나라의 귀족이었다. 그의 누님인 선태후의 원래 이름은 미팔자(羋八子)였고, 진나라로 출가하여 지위가 높아진 후 위염 등 형제와 친척들이 대부분 잇달아 진나라로 들어왔다. 향수는 선태후의 외척으로 진의 소양왕과 함께 자랐다. 위염은 젊은 시절부터 현명하다고 이름이 났으며 진 혜문왕, 무왕시대에 이미 직무를 맡아 일을 처리했다.

무왕이 죽고 난 후 아들이 없자 여러 동생들이 왕위를 다투었다. 위염이 그 지혜를 발휘하여 소양왕을 옹립했다. 소양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아직 어리고 또 연(燕)나라에서 막 돌아와 조정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 따라서 선태후가 친히 섭정하고, 위염이 수도를 경비하는 장군의 임무를 담당했다. 진나라의 여러 공자와 대신들은 위염과 그 누나가 권력을 독점한 것이 못마땅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위염은 적시에 진압했고 반란에 참여한 자들을 전부 주살했다. 이때부터 그는 진나라의 군정의 대권을 확실히 장악했다. 오래지 않아 저리질이 죽고 그가 정식으로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대권을 장악한 위염의 집권 후 제 1대 공적은 바로 진나라의 통일사업을 추진하여 현명함을 떨쳐 능력을 전수하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동벌(東伐)의 사령관은 그의 근친인 향수였으나, 그가 측근과 정실관계에 지장을 주지 않아,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백기(白起)가 향수의 자리를 대신하여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고 형초(荊楚)를 정벌하게 했다. 백기는 과연 중책을 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원전 293년에 “이궐(지금의 하남 낙양(洛陽) 용문(龍門))에서 한, 위를 두 나라를 공격하여 24만 명을 참수하고 위의 장수인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다.

이듬해 다시 초의 완, 엽을 얻었다.(功韓、魏, 敗之伊厥, 斬首二十四万, 虜魏將公孫喜. 明年, 又取楚之宛、葉.)《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 이궐(지금의 하남 낙양(洛陽) 용문(龍門))은 중원의 중심지이고, 완(지금의 하남 남양(南陽))과 엽(지금의 하남 엽현(葉縣))은 초나라 북부의 군사요지였다. 이 두 전쟁은 한과 위의 정예부대를 멸하여 한과 위가 다시는 진나라의 북진 부대에 저항할 힘이 없게 만들었으며, 초나라 북상의 근거지를 점령하여 초나라의 천하를 쟁패하려는 마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이리하여 감무가 의향을 함락하고 쌓은 기반 위에서 전개한 통일전쟁의 첫 단계의 화려한 승리를 획득하여 진나라가 홀로 천하를 쟁패하는 형세를 확정했다.

기원전 289년 잠시 면직되었다가 다시 복직하여 양후(穰侯)로 봉해진 위염은 친히 재상과 장수를 겸하여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가 하동 땅 400리를 헌납하였고 위나라의 하내를 점령하여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얻어(攻魏, 魏獻河東方四百里, 拔魏之河內, 取城大小六十余)《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 위나라도 한나라처럼 진나라의 도마위의 고기가 되었다. 기원전 288년 위염은 진나라가 제(帝)로 불릴 시기가 이미 도래했다고 생각하여 ‘진나라를 제로 칭하길 바랬으나(欲立秦爲帝)《한비자․내저설하(韓非子․內儲說下)》
’ 당시에 아직 진나라와 맞설 수 있던 제(齊)나라의 반대에 부딪혔다.

위염은 진나라가 단독으로 제(帝)라 칭하게 되면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 제나라를 따라 진나라를 공격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원교근공(遠交近功: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함)책을 채택하여 “제나라를 동제(東帝)로 세우고(因請立齊爲東帝)《한비자․내저설하(韓非子․內儲說下)》
” 직접 제나라로 가 제나라 왕을 제(帝)로 칭할 것을 권고하고, 진나라가 제(帝)로 높여 부르는 것에 미혹된 제나라는 진나라와 “조(趙)나라를 정벌하기로 약속했다.”

이때 진나라는 비록 중원에 용감히 나아가 한과 위를 정벌했지만, 조나라를 빼앗지는 못했었다. 군주가 현명하고 신하는 어질며 군사는 강하고 장수는 현명하던 조나라는 “진이 그 욕망을 채울 수 없게(秦不能得所欲)《전국책․조책(戰國策․趙策)》
”하여 진나라가 중원을 겸병하는데 큰 적수가 되었다.

위염의 이러한 계책은 확실히 통일의 묘책으로 “지혜롭고 정사에 능한(智而習于事)《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 그의 뛰어난 모략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계책이 만약 실현될 수 있다면 삼진을 속히 멸하고 천하는 일찌감치 안정되었을 것이다.(*삼진;춘추 시대(春秋時代) 강국의 하나였던 진(晉)나라가 분리되어 세워진 한(韓)・위(魏)・조(趙)의 세 나라. 진나라의 삼경(三卿)이었던 문후(文侯) 위사(魏斯)・열후(烈侯) 조적(趙籍)・경후(景侯) 한건(韓虔)의 3가(家)가 기원전 453년에 쇠약해진 진나라를 분할하여 각각 나라를 세웠는데, 이때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됨)



魏 冉 冢    
魏冉冢呈丘状,高5米,周长42米,据《明嘉靖南阳府志校注》载:“穰侯墓在州城东门外,世传 秦丞相穰侯魏冉葬此。”《明统志》载:“穰侯墓在邓州新城东。”
魏冉,战国时著名的政治家和军事家《史记、穰侯列传》载:冉乃秦昭襄王母宣太后之弟,昭襄王年幼即位、宣太后临朝决政冉深得宣太后的信任,用魏冉为丞相,并摄国政、秦照襄王十六年(公元前291年)封魏冉于穰邑(今市区东南),后又封陶,号为穰候。昭襄王三十六年(公元前271年)秦王从范睢说,免去魏冉丞相之职,使旧其封邑,后“率于陶;而因葬焉。”
我国古代的历史学家司马迁对魏冉有相当高的评价,他在《史记•穰侯列传》中说“秦所以东益地,弱诸侯,尝称帝子天下,天下皆为两乡稽首者,穰侯之功也”。可见魏冉这位封建社会地主阶级的政治家,在完成秦王朝统一中国的事业中所起的作用。魏冉冢位于邓州市大东门外苗圃内, 207国道与焦枝铁路途经此处,交通便利,位于武汉—西安—郑州大三角和南阳—襄樊—十堰小三角中心。东距南阳诸葛亮躬耕地卧龙岗50公里,南距襄樊隆中60公里,西距亚洲第一人工湖、丹江口水库150公里,距南水北调中线工程渠首40公里,西南距道教圣地武当山150公里,西北距历史文化名城西安300公里,北距佛教圣地嵩山少林寺200公里并与邓州市编外雷锋团展览馆、福胜寺塔、宣圣庙景区、花洲书院形成了一个不足5公里远的游览环线。魏冉冢现保存完好,为邓州市市级文物保护单位,并树保护标志碑。为防止冢封土流失,于冢表种植草皮,种植常青树进行绿化,设有专职文物保护员负责看护、维护。





뜻밖에도 “진 소왕이 서제(西帝)가 되고 제나라가 동제(東帝)가 되어 양제(兩帝)가 조나라를 정벌할 약속을 세워(秦昭王爲西帝, 齊爲東帝, 兩帝立約伐趙)마비백(馬非百)《진집사․위염전(秦集史․魏冉傳)》, 중화서국(中華書局), 1982년 제1판, 제175쪽
” 모략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제왕(齊王)이 옆에서 일러주는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진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먼저 제(帝)의 칭호를 취소하고 “약속을 깨고 진나라를 배척했다(背約擯秦).” 진 소양왕은 사정이 달라진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제(帝)의 칭호를 포기했다. 위염의 진왕을 제(帝)로 세우려는 계책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의 이러한 조치는 진나라의 패업(覇業) 추구를 명확히 추진하여 제업(帝業)을 창립하여 진나라의 통일전쟁이 새로운 발전 단계로 진입한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리하여 위염은 다시는 진나라의 제호(帝號)의 허명(虛名)을 추구하지 않고 진나라의 실제의 제업만을 추구하게 되어 통일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기원전 278년 위염은 “백기에게 초나라의 영(郢)을 점령하게 하고 진나라는 남군(南郡)을 두었다(使白起拔楚之郢, 秦置南郡)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 초인은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경영해 오던 강한(江漢)의 기업을 상실하고 급히 동천하여 자신을 보존하였으나 그 국세는 이때부터 날로 약화되어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진인은 장강, 한수지역의 산림의 풍부함과 강남지역의 금석(金錫)의 풍부함을 얻음으로써 제왕의 위업을 초보적으로 이루었다. 기원전 275년 위염은 친히 장병을 이끌고 백기와 위나라를 정벌하여 읍과 성을 함락하고 그 도성인 대량(大梁: 지금의 하남 개봉(開封))을 포위하고 단번의 시도로 위나라를 멸하여 “산동의 종친의 허리를 끊었다(絶山東從(縱)親之腰).”

그 후 제후 각각을 정벌했지만, 위나라가 무장한 병사 30만 명을 모조리 소집하여 전력으로 수비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기원전 273년 위염은 또다시 백기와 조나라, 위나라를 정벌하여 화양(華陽: 지금의 하남 정주시(鄭州市) 남쪽)에서 조, 위 연합군을 대파하고 15만 명을 참수하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은 후 승세를 타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계획했다.

제왕(齊王)은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고 두려워 급히 세객(說客)을 보내 위염에게 공격을 중지할 것을 은밀히 청했다. 위염도 삼진(三晋)이 아직 해결되지 않고 산동의 중추가 끊어지지 않아 멀리 제나라를 정벌하면 진나라에 불리할 것을 염려하여 군대를 돌려 귀국했다.

만년에 이르러 위염의 권력이 커져 교만해지고 연로하여 이기심이 늘었다. 기원전 271년 위염은 재차 삼진을 건너뛰어 제나라를 원정할 준비를 하여 마침내 강(剛: 지금의 산동 영양현(寧陽縣) 동북쪽)과 수(壽: 지금의 산동 동평현(東平縣) 서남쪽) 두 성을 빼앗아 자신의 영지인 도읍(陶邑)을 확장했다. 새로이 진에 들어온 위나라 사람 범수(范睢)가 기회를 틈타 진 소양왕의 면전에서 위염을 비꼬아 이야기하여, 소양왕이 깊이 숨겨온 위염이 권력을 휘둘러 군주를 가리고 왕실보다 더 부유한 것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게 했다.

그리하여 소양왕은 위염을 파면하고 진나라에서 축출하여 봉읍지로 쫓아버렸다. 찬란한 일생을 보낸 위염은 묵묵히 운명의 변고를 받아들이고 도읍(陶邑)에서 우울하게 죽어갔다. 위염을 막 장사지내고 나서 “진나라는 다시 도(陶)를 회수하여 군(郡)으로 삼았다(秦復收陶爲郡)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사마천은 말했다. “양후(穰侯)는 진 소양(昭王)의 친 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일찍이 천하에서 제(帝)라고 칭하면서 천하 사람들에게 서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게 했던 것은 모두 양후의 공 덕분이었다.(穰侯, 昭王親舅也. 而秦所印益地, 弱諸侯, 嘗稱帝于天下, 天下皆西鄕(向)稽首者, 穰侯之功也!)《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실로 이리하여 위염은 다섯 번 진의 재상을 맡아 “재상의 자리에 모두 합쳐 25년 동안 있어 진이 재상을 둔 이래 재위에 가장 오래 있던 사람이었으며, 후에도 위염보다 오래한 사람은 없었다(在相爲凡二十五年, 盖秦相之在位最久者, 未有過于冉者也)마비백(馬非百)《진집사․위염전(秦集史․魏冉傳)》평어. 중화서국(中華書局), 1982년 제1판, 제181쪽.
” 그는 재위기간에 거의 해마다 용병을 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식견이 탁월하여 “제나라를 꺾고 초나라를 교란시켰으며, 위나라를 멸하고 양나라를 포위하고(摧齊撓楚, 破魏圍梁)《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에서 사마정(司馬貞)이 “숨은 사리를 찾았다고 칭찬하며 말했다.”
” 한나라를 제거하고 조나라를 꺾어 영토를 확장하여 진나라의 제업을 시작했다. 진나라가 제후를 병탄하고 천하를 겸병할 수 있었던 것도 양후의 공에 의존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벌이고 종군을 무도하게 살육하여 진나라 전통의 패도문화를 더욱 극단으로 몰아넣었다. 진왕은 유능한 인재를 등용했는데, 이는 오직 패권주의의 위업을 위해서였으므로 절대로 어떠한 사람도 그 권력과 부귀를 함께 나누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위염은 진왕과 지친이었고 진나라에 지극히 충성했으나 결국은 정치권력을 박탈당하고 울분에 싸여 죽는 결말을 초래하였으니, 그도 결국은 전통 진문화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태사공(太司公)은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 부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한 사내가 끼어들어 말 한마디를 함으로써 실권하여 울분 속에 죽었으니, 하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서 진나라에 들어와 벼슬하던 객경에 대해서는 말할 것이 뭐 있었겠는가?(及其貴極富溢, 一夫開說, 身折勢奪而以懮死, 況于羈族之臣乎?)《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  

위염이 진나라에서 뜻을 이루었을 때, 그의 동생인 미융(羋戎)도 진나라의 높은 관직에 있었다. 미융은 일찍이 군대를 이끌고 초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하고 공로를 세워 화양군(華陽君)으로 봉해졌다. 어떤 학자는 그도 한때 진나라의 좌승상(左丞相)을 담당했었다고 주장한다.(마비백(馬非百)《진집사․미융전(秦集史․羋戎傳)》참고)
그와 위염은 하나를 잃자마자 모든 것을 잃고 동시에 진나라에서 축출 당했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양후(穰侯) 위염(魏冉)은 진소왕(秦昭王)의 모친인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이다. 양후의 선조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미씨(羋氏)다. 진무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동생이 이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소왕(昭王)이다. 원래 소왕의 모친은 미팔자(羋八子)라고 불렀으나 소왕이 즉위하자 미팔자는 선태후(宣太后)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무왕의 모친은 선태후가 아니고 혜문후(惠文侯)다. 선태후에게는 2명의 동생이 있었다. 이부(異父) 소생으로 큰 동생은 양후(穰侯) 위염이고 작은 동생은 동부(同父) 소생 미융(羋戎)으로 후에 화양군(華陽君)이다. 그리고 소왕에게는 동모제로 고양군(高陽君)과 경양군(涇陽君)이 있었다. 그 중 양후가 가장 현능했기 때문에 혜왕 때부터 무왕에 이르기 까지 진나라 조정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권력을 장악했다. 무왕이 죽자 형제들이 다툴 때, 오로지 위염만이 소왕을 왕위에 앉힐 힘을 갖고 있었다. 소왕이 죽위하자 위염은 장군이 되어 함양을 지켰다. 계군(季君)의 란을 진압하고 무왕의 비 혜문후를 친정인 위(魏)나라로 쫓아냈다. 소왕이 여러 형제들 중 반감을 갖은 자들은 모두 죽여 그 위엄이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왕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섭정을 행하던 선태후가 모든 정사를 위염에게 맡겼다.

  소왕 7년, 기원전 300년, 저리자(樗里子)가 죽고 경양군(涇陽君)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조나라 사람 루완(樓緩)이 와서 진나라의 상국이 되었으나 조나라에 불리한 일이 생기자 구액(仇液)이라는 사람을 시켜 위염을 진나라의 상국으로 삼으라는 요청을 하게 만들었다. 길을 떠나려고 하던 구액에게 그의 문객 송공(宋公)이라는 사람이 만류하며 말했다.

" 진나라가 공의 말을 듣지 않게 되면 루완은 틀림없이 공을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루완에게 '청컨대 공께서는 진나라에 너무 서둘러서 위염을 상국으로 삼으라고 재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조나라 사자가 위염을 상국에 임명하는 일이 급하지 않다고 청하는 것을 듣게 된 진왕은 또한 공의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공의 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루완에게는 덕을 베푼 것이 될 것이며, 반대로 일이 성사된다면 위염이 공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

그래서 구액은 그 말대로 쫓았다. 과연 진나라는 루완을 면직시키고 위염을 진나라 상국으로 삼았다.

위염이 여례(呂禮)를 죽이려고 하자 여례가 제나라로 달아났다. 진소왕 14년 기원전 293년 위염이 백기를 천거하여 상수(向壽) 대신 대장으로 삼아 한과 위 두 나라 연합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백기는 한위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군사 24만의 목을 베고 위장 공손희(公孫喜)를 사로잡았다. 다음 해인 기원전 292년 백기는 다시 초나라의 완(宛)과 엽(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 해에 위염은 몸에 병이 들어 사직을 청하여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되었다. 객경 수촉(壽燭)이 상국이 되었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291년, 수촉이 면직되고 위염이 다시 상국에 복직되고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도(陶)의 땅을 봉지에 더했다. 이로써 위염은 양후(穰侯)로 불려졌다.

  위염이 양후에 봉해진 지 4년 째 되는 해인 기원전 287년, 위염은 스스로 대장이 되어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나라가 하동의 4방 4백리에 이르는 땅을 모두 들어 진나라에 바쳤다. 위염이 점령한 당은 위나라의 하내(河內)의 땅으로써 크고 작은 성 60여개를 포함하고 있었다. 진소왕 19년 기원전 288년, 진나라가 서제(西帝)를 칭하고 제나라는 동제(東帝)를 칭했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지나 여례가 제나라의 사자로 진나라에 들어와 제와 진 두 나라는 각기 제호를 버리고 왕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유세했다. 진나라가 그 말에 따라 왕호로 돌아갔다. 위염이 다시 진나라의 상국이 되었다가 6년 후에 면직되었다. 면직 된지 2년 후에 다시 상국에 임명되었다. 위염이 상국이 된지 4년 째 되는 해에 백기를 대장으로 삼아 초나라의 도성 영(郢)을 함락시키고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그 공으로 백기는 무안군(武安君) 봉해졌다. 백기라는 사람은 양후가 천거하여 임용된 자로써 양후와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 그래서 양후의 부가 왕실보다 더 많아지게 된 것은 백기의 힘이 컸다.

  진소왕 32년 기원전 283년, 양후가 진나라의 상국의 신분으로 대장이 되어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장 망묘(芒卯)를 패주시키고 북택(北宅)으로 들어가 대량(大梁)을 포위했다. 양나라 대부 수가(須賈)가 양후를 찾아와 유세했다.

“ 제가 위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위왕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위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옛날 양혜왕(梁惠王)이 조나라를 정벌할 때 삼량(三梁)에서 조군을 이기고 한단(邯鄲)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랬음에도 조나라는 나라를 쪼개어 위나라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단은 조나라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제나라가 위(衛)나라를 공격하여 그 옛 땅을 모두 함락시키고 위(衛)나라의 대장 자량(子良)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위(衛)나라 역시 나라를 나누어 제나라에 바치지 않았습니다. 위나라 역시 후에 그 땅을 모조리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衛)나라와 조나라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다른 제후들에게 겸병을 당하지 않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난관에 부딪쳤다고 영토를 반복해서 내어주지 않고 어려움을 참고 견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정벌을 당할 때마다 영토를 떼어 준 송나라와 중산국(中山國)은 나라가 이내 망하고 말았습니다. 신은 위(衛)와 조(趙) 두 나라의 경우를 본받아 교훈으로 삼아야한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나라는 탐욕스러운 나라라 결코 친하게 지내면 안 됩니다.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위나라를 잠식하여 결국 옛날 진(晉)나라의 고토였던 하동(河東)의 땅을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한장(韓將) 포연(暴鳶)을 격파하고 위나라의 8개 현에 달하는 땅을 할양받기로 했으나 위나라가 땅을 내어주지 않자 군사를 다시 일으켜 쳐들어왔습니다. 진나라는 원하는 땅을 얻기 전에는 결코 쉽게 포기하고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다시 위장(魏將) 망묘(亡卯)를 패주시키고 진격하여 북택(北宅)에 주둔하고 있으나 곧바로 진격하여 대량성(大梁城)을 포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왕을 위협하여 많은 땅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대왕은 결코 진나라의 말을 듣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여 초와 조 두나라와의 합종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강화를 맺는 다면, 초와 조 두 나라는 노하여 위나라에 등을 돌리고 진나라를 받들려고 위나라와 다툴 것이며 진나라는 필시 두 나라와 연횡을 맺을 것입니다. 그 결과 진나라가 초와 조 두 나라 군사를 이끌고 대량성을 공격한다면 그럼에도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결코 진나라와 강화를 맺으면 안 될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대왕께서 작은 땅을 떼어 할양하면서 진나라와 강화를 맺으신다면 또한 진나라에 인질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속임을 당할 것이라고 대왕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들은 바 있는 위나라가 처한 정황입니다. 원컨대 군후께서는 이 점을 심사숙고하여 일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서(周書)에 이르기를 ' 천명은 항상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행운이라는 것은 반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군후께서 포연과의 싸움에서 이겨 위나라의 8개 현을 할양받았습니다. 이것은 군후께서 거느린 군사들이 강하고 정예한 군사들 때문도 아니고 또한 계책을 꾸며 이룩한 공이 아니라 단지 하늘이 내려준 행운에 의한 것입니다. 오늘 다시 위장 망묘(亡卯)를 패주 시키고 북택으로 진격하여 대량을 공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행운이 항상 자기와 같이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제가 듣기에 위나라는 대량성을 지키기 위해 국내 100개 현의 갑병을 모두 불렀는데 그 군사가 30만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30만의 군사로 7인(仞)1) 높이의 대량성 성벽에 의지해서 지키게 되면 상탕(商湯)이나 주무왕(周武王)이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쉽게 공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배후의 초와 조 두 나라 원병을 무시하고 7인 높이의 높은 성벽을 올라 30만에 달하는 위나라 군사들과 싸워 그 뜻을 관철한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없었던 일입니다.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하게 되면 진나라는 군사를 물리쳐야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군께서는 필시 봉읍인 도(陶)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군께서 옛날에 세운 공로를 모두 잃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위나라가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을 때 군께서는 그들의 작은 땅을 요청하시게 되면 취하실 수 있습니다. 원컨대 조와 초 두 나라의 구원병이 위나라에 당도하기 전에 위나라에 재빨리 작은 땅만을 요청하시어 위나라를 복종시키십시오.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는 위나라로써는 작은 땅을 바친다는 이득이 있음으로 틀림없이 군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에 군후님께서는 바로 원하시는 바를 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와 조 두 나라 역시 위나라가 먼저 다투어 진나라와 강화를 한 배신행위에 노하여 그들도 역시다투어 진나라를 받들려고 할 것이고 결국 삼국 사이의 합종은 와해될 것이며 군후께서는 단지 그들 중 누구를 택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더욱이 군후께서 남의 나라 땅을 얻는 데 반드시 군사롤 이용해야만 한다고 생각시는 것입니까? 옛날 당진(唐晉)의 땅을 얻을 때 진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진공시키지 않았음에도 위나라는 강성(絳城)과 안읍(安邑)의 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도(陶)에서 하서와 하동으로 통하는 두 개의 길을 뚫기 위해 옛날 송나라의 영토를 점령한다면 위협을 느낀 위(衛)나라는 필시 선보(單父)의 땅을 진나라에 바칠 것입니다. 이로써 진나라는 싸우지 않고도 원하는 땅을 얻게 되고 군후께서는 위(衛)나라를 통제하고 도(陶)를 다스릴 수 있는데 어찌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며 시도함에도 어찌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원컨대 군후께서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하시어 위태로운 일을 행하면 안 될 것입니다.:


양후가 듣고 옳다고 하며 곧바로 대량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다음 해인 기원전 282년, 위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와 합종을 맺었다. 진나라가 양후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양후는 위나라와 싸워 그 군사 4만 명의 목을 베고 위장 포연(暴鳶)을 패주시켰다. 양후는 이로써 위나라의 3개 현을 얻어 자기의 봉지 도읍(都邑)의 영지를 더욱 넓혔다.

  다시 다음 해인 기원전 281년, 양후와 백기(白起), 객경(客卿) 호양(胡陽)이 군사를 이끌고 화양(華陽)에서 한(韓), 위(魏), 조(趙) 삼국의 군대와 싸워 그 대장 망묘(亡卯)를 격파하고 그 군사 10만 명의 목을 벴다. 양후는 계속 진군하여 위나라의 권(卷), 채양(蔡陽), 장사(長社) 땅과 조나라의 관진(關津)을 점령했다. 다시 관진을 조나라에 돌려준 댓가로 조나라로부터 원병을 얻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양왕(齊襄王)이 두려워하여 소대(蘇代)를 사자로 보내 제나라를 위해 양후에게 은밀히 자기의 서신을 전하도록 했다. 양후를 접견한 소대가 말했다.

" 제가 이곳에 오는 도중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 진나라가 장차 조나라의 중무장한 갑병 4만 명을 지원군으로 받아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는 중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제왕이 ' 현명한 진나라 왕은 계책을 세우는데 심사숙고하고 지혜로운 양후는 일을 행하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조나라의 중무장 갑병 4만 명을 지원받아 제나라를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몰래 들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위조(韓魏趙) 삼진(三晋)이 서로 친하게 되어 단결하면 그것은 바로 진나라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는 가장 큰 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백 번 배반하면 백 번 속이면 되지만, 그들이 신의를 깨지 않으면 도의를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제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조나라를 살찌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와 진 두 나라는 원래 원한이 깊은 나라이기 때문에 조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은 진나라에게는 해로운 일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의 책략가들은 ‘ 제나라를 파하고 삼진과 초나라를 피로하게 만든다.라고 틀림없이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이미 피폐해진 나라입니다. 그런 제나라를 천하의 여러 나라들이 마치 천균(千鈞)의 힘을 가진 강력한 쇠뇌로 종기를 쏴서 종기를 터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제나라는 틀림없이 망하고 말 것입니다. 어찌 삼진과 초나라를 지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 두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삼진과 초는 진나라를 믿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많은 수의 군사를 출동시키면 그들은 진나라에 의해 제압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의 대군을 두려워한 제나라는 진나라에 붙지 않고 삼진과 초나라에 붙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진나라가 점령한 제나라의 땅으로써 삼진과 초를 회유하게 되면, 삼진은 그 창끝을 진나라에게 돌려 진나라는 오히려 강대해진 적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이유입니다. 삼진과 초나라가 진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제나라를 도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진나라를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삼진과 초나라는 지혜롭고, 진과 제는 어리석단 말입니까? 이것이 다섯입니다. 그래서 이치를 따져 안읍을 얻는다면 그것 역시 후환이 없게 될 것이며, 그 결과 한나라는 필시 황하 이북의 땅과 통하는 길이 끊기게 되어 상당군을 잃게 될 것이니다. 상당군은 천하로 말하면 그 복심(腹心)에 해당하기 때문에 조나라의 군사의 지원을 얻어 출병한다면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 중 어떤 것이 진나라에 이익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진왕은 총명하여 계책을 세우는데 능하고 양후는 지혜로워 일을 성사시키는데 능숙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조나라의 중무장한 4만 명의 갑병을 물리치고 제나라를 정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양후는 조나라에 제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소양왕 36년 기원전 271년 상국 양후가 객경 조(竈)에게 명하여 제나라의 강(剛), 수(壽)을 점령하여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히도록 했다. 그때 위나라 사람 범수(范睢)가 스스로 장록(張祿) 선생이라고 칭하며 삼진(三晋)의 경계를 넘어 제나라를 정벌하려는 양후를 비난하며 기회를 보마 진소왕에게 유세했다. 이로써 진소왕은 범수를 등용했다. 범수는 선태후(宣太后)가 왕대신 진나라를 다스리고, 양후는 제후들에게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며,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에 속하는 무리들은 너무 사치하고 그들의 부는 왕실보다 더 많다고 했다. 진소왕이 깨닫고 양후를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시키고 경양군 등의 무리들은 관 밖의 봉지로 쫓아냈다. 양후도 함곡관을 나가는데 그의 재물을 싫은 치중은 천여 대가 넘었다.

양후는 결국 도읍에서 죽고 그 곳에 장사지냈다. 진나라는 도읍의 땅을 환수하여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으로 삼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 양후(穰侯)는 진소왕의 친외삼촌이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그 영토를 더욱 넓혀가고 제후들을 약화시키며 일찍이 천하에 제왕(帝王)을 칭하자 천하는 모두 서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받들었다. 그것은 모두 양후의 공이다. 이어서 그 신분이 지극히 귀하게 되고 부는 더욱 넘쳐났으나, 한 사람의 선비가 진나라에 들어와 유세를 행하자 몸은 꺾이고 세력은 빼앗겨 가슴에 울분을 머금고 죽었다. 어찌 타국에서 벼슬살이하는 기려지신(羈旅之臣)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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