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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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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 대륙상고사 유적지 탐사를 마치고(안원전) 2002.8.16


동이 대륙상고사 유적지 탐사를 마치고

이번 여행은 대륙 상고사학 유적지 탐사와 향토사료 수집이 목적이었지만 중국의 실체를 이해하는 실사구시적 차원에서 필자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준 답사여행이 되었다. 필자는 중국내륙에서 먼지와 황토가루를 너무 마셔 기관지가 약해졌고 에어컨도 없는 버스를 타고 18시간 동안 40도가 웃도는 찜통차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 여행 19일째 되던 날 몸져 누워 한국에 와서도 앓아누워야 했다.

물론 70여권이 넘는 무거운 책 보따리를 끌고 찜통 대륙을 종횡무진한 이유도 있다.  중국의 내륙은 길이 거의 닦이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한국의 건설업이 중국서부 내륙의 도로정비만 맡아도 어마어마할 것이란 생각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중국 인민들도 황토가루 뒤집어쓰고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버스보다는 기차를 선호한다. 그러나 필자가 찾은 고고학 유적지는 대부분 기차노선이 없는 오지였다.

90년도 북경 아시안 게임이 열렸을 때 중국은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참전국에 중국의 빗장을 열고 관광객을 맞이했다. 그때 필자는 대륙의 산하는 기가 모두 빠져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러나 그 원인을 그 때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20여일 간 30여 개 소도시를 돌면서 본 홈페이지 포토앨범에 소개하고 있는 대륙고고학의 송토(松土:황토)의 진면목을 알 수 있었다.(필자는 유럽의 130여 개도시를 돌아다닌 바 있고 넓은 대륙 곳곳의 80여 곳을 둘러보았지만 대륙이 유럽보다도 훨씬 막강하게 넓어서 도대체 어딜 가 보았다고 할 엄두가 전혀 나지않음을 느꼈으며 수 백 곳을 훑어도 수박 겉핥기임을 깨달은 바 있다)



필자가 점심식사를 끝내고 잠깐 일행을 한 컷 찍은 섬서성의 황토고파와 원가촌

서부내륙을 가면 황토 고파(高坡:고파는 나무가 없는 산이라 보면 된다), 황토 고원 곳곳에 굴을 파놓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륙의 송토는 말 그대로 푸석푸석한 황토여서 야전용 삽 한자루만 있으면 누구든지 한 두어시간이면 굴 하나를 팔 수 있다. 그래서인지 시골에서는 아예 굴을 파고 들어가 사는 사람도 적지 않게 보았다. 필자가 섬서성의 연안(延安)아래 시안(西安)위 중간에 있는 황링(黃陵:황제릉)을 다녀오면서 식사를 한 바 있는 원가촌(袁家村:원소의 후예라 들었다)도 바로 굴을 파서 만든 마을이었다.

이 황토는 대륙의 토양을 특징지워 주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이게 건조하면 바람만 조금 불어도 엄청난 황토바람으로 변하지만 비가 조금만 와도 완전히 발이 쑥쑥 들어가는 뻘흙탕으로 변한다. 지나 대륙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 등으로부터 모래바람이 끊이지 않고 불고 있고 가장 심각한 것은 황토로 뒤덮인 대륙전체로부터 황사바람이 언제나 가득해 그야말로 거대한 먼지구덩이라는 사실이다.

근자의 보도에 의하면 베이징 시 크기의 넓이가 해마다 건조한 사막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라 하니 황토바람과 건조한 사막바람의 위용이 얼마나 막강한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지나 대륙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딱 잘라 거대한 먼지 구덩이라고 단언한다. 토양이라는 것은 토층 분화가 적절히 잘되어야 하고 양수분의 보유력이 뛰어나고 토양양분의 균형이 적당해야 한다.

대륙의 송토(松土)는 이러한 유기적 시스템과 토층분화가 안되어 물이 제대로 걸러지지 않아 석회성분이 많아 지나 대륙인의 앞니는 대부분 불량하다. 독자여러분은 동북 3성의 조선족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 그들의 치아가 대부분 누렇거나 새까맣게 변색되어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륙 내지인의 치아상태는 그보다 훨씬 더 불량하다. 동북 3성의 조선족의 환경이 그나마 나은 것을 알 수 있다. 물이 나쁘고 환경이 나쁘다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요소가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 대륙의 물이 안 좋아서 나온 문화가 바로 차(茶) 문화이다. 우리에게 차(茶)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지극히 기호적인 측면이 강한 의례성 문화이다. 그러나 대륙인에게 차(茶)가 없으면 그것은 사망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지나 대륙인은 다른 것은 몰라도 차(茶)를 담은 물병을 꼭 가슴에 차고 다닌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물 문화는 우리가 아무리 정수기를 사용한다 해도 급하면 수돗물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같은 대륙인일지라도 외지에 갈때면 함부로 그곳의 물을 먹으면 풍토병에 걸려 죽기때문에 차를 담은 물병만은 꼭 챙긴다. 조선인도 예로부터 중국에 갈때면 조선 홍삼을 가지고 가 그곳 식수에 한번 담갔다 먹어야 풍토병을 막을 수 있었으니 대륙의 물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황토먼지(샤츤빠오)는 전대륙을 통해 엄청난 위력을 늘 발휘하여 중국인은 먼지구덩이에서 사는 삶이 일상화되어있어 보였다. 그들이 오래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대륙의 산하는 기가 빠져있을 수밖에 없다. 숲과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해야 하는데 나무와 숲은 항상 먼지에 덮여있다. 그러니 늘 시들할 수밖에 없다. 총총하게 살아날때는 비왔을 때 잠깐이다.

그러나 해가 내리쬘 정도로 맑으면 언제 그러냐싶을 정도로 황사먼지는 잠깐 사이에 나무와 숲을 순식간에 뒤덮고 만다. 중국의 황토는 순식간에 젖어서 뻘흙탕을 만들다가도 언제 그랬냐싶게 물이 쑥 빠져 금방 건조해 조그마한 바람에도 풀풀 날린다. 필자는 동이족 주류가 한반도로 밀고 들어간 데에는 인류구원의 간(艮) 방위 대기를 꼭 말하지 않아도 아! 이건 자손들 데리고 공기좋고 물좋고 4계절 뚜렷한 그야말로 금수강산 한반도로들어가 먼지먹지말고 자손보존하며 후천시대 개막때까지 자손만대를 보하라는 상제님의 사명임을 알았다.

우리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을 못 느끼겠지만 중국대륙의 먼지를 마시다가 입국하니 우리의 공기와 산하가 이렇게 맑고 깨끗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투명하다. 숲도 살아있고 나무도 살아있고 그곳에서 살아 숨쉬는 사람도 깨끗하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한반도는 바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오리지날 가나안이라고. 사실 이번에 여와 신전을 찾아 다시한번 그 내용을 확인했지만 기독교의 야훼라는게 바로 모세가 장인인 이드로로부터 여와(태호복희 여동생이자 부인)를 꾸어다가  변조도입한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도 알고 보면 중동의 황량한 들판에 불과한 곳이다. 그러나 중동인에게는 그것도 소중해 팔레스타인인과 늘 싸우는 업보를 피할 수 없다.

이번에 느낀 중국인에 대해 몇 마디 결론내리면 다음과 같다. 중국인에 대한 만만디 정신과 그 외의 연구는 국내에 많은 책이 나와 있지만 필자는 중국 서부내륙의 여행을 통해 있는 그대로 느낀 부분이다. 첫째 중국인은 무례하다. 공공장소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틈만 있으면 가장 기본적인 예의도 지켜지지 않는다. 가령 밀폐되어 에어컨도 잘 안 돌아가는 찜통 무더위 고속버스 속에서도 보통 10여명은 반드시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안 피우는 필자는 완전히 고문당하는 형국이다.

줄담배는 보통이고 차내 절대금연이라는 말을 가리키면 말을 해보았자 쳐다도 안본다. 화가 나 금연표지를 가리키며 노 스모킹을 외치면 얼굴에 연기를 불어댄다. 낄낄거리며 이건 내가 당한 아주 모욕적인 반응중의 하나인데 천하의 개불쌍놈들이라 결론을 내리고 돌아앉았다. 그나마 불쾌한 것이 이것 하나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기차나 버스 내에서 밥이며 라면이며 고치구이나 무슨 고기 덩어리 또는 벼라별 먹거리를 먹으며 가는데 이걸 먹고 통로에 열이면 열 모두 그냥 버린다. 심지어 그것도 좋은데 거기에 가래고 침이고 통로에 그대로 밷어버린다.

그야말로 추접하고 더러운 것이 중국인이다. 더러운 것을 말하자면 중국인은 돼지보다 더하다. 오죽하면 한중일 인간과 돼지가 같이 있는데 한국인, 일본인 다음으로 3번째로 나온 것이 더러운 중국인에게 질려서 뛰쳐나온 돼지라는 말이 나왔을까. 이는 그만큼 중국인은 더러움과 추접함 속에서 살다가 그 속에서 죽어간 삶의 전통이라 그들에게는 더럽다는 것이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Click here!중국인이 더러운 것은 시도때도 없이 부는 쌰츤빠오-황사 먼지때문이다. 아무리 옷을 멋지게 차려입어도 반나절만 되면 붉은 황사가 내려앉아 형편없는 노동자 옷으로 만든다. 그러니 내륙에서는 왠만해서 옷을 빨지도 않고 집안 청소도 잘 않는다. 이것이 숙업이 되어 중국인은 부엌이 새까맣고 더러워도 심지어 거미줄이 쳐져 있어도 결코 치우지 않는다. 심지어 화장실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중국의 농촌에서는 돼지우리나 닭장을 화장실로 그냥 사용할 정도다.

필자는 아직 접하지 않은 책이지만 오죽하면 펄벅의 대지에 결혼할때 한번 목욕하는 것이 중국인이라 했을까만 그들은 열이면 열, 벽에 거미줄이 쳐 있고 열이면 열 집 모두 새까맣게 때가 얼룩져 있어도 결코 닦지 않는다. 심지어 음식점도 그렇다. 필자가 시골의 음식점을 들르면 백이면 백 집이 모두 혐오스러울정도로 새까매서 솔직히 음식시킬 엄두도 내지 못해 굶고 다녔다.Still More? Click here!

또 날씨가 더워 그렇다지만 옷을 벗고 다니는 무례한 족속이 바로 중국인들이다. 중국내륙의 더위는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필자가 느끼기로는 한국의 더위와는 상대가 되지를 않는다. 그야말로 찜통 그 자체라 100미터 다니기가 힘들어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중국정부도 남자들이 상의를 벗고 도심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묵인하고 있다. 옷을 벗고 다니니 예의가 있을리 없다. 동이족 국가 초나라의 중심도시였던 무한(武漢)이라는 도시는 양자강 중류의 거대도시인데 한구와 한양, 무창이라는 세 도시를 합해 무한으로 통합한 도시다.

필자는 무한의 한 음식점에서 꽤 지식인을 자처하는 중국인과 대화를 하는데 이를 지적하니 개발도상국이라 그렇다는 말만 들었다. 나는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서는 아무리 더워도 공공장소에서 대낮에 절대로 옷을 함부로 안벗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친구 아무말도 안한다. 문화가 이러한 몰염치의 문화로 되다보니 화장실 구조도 개방적이어서 서로 칸막이 없이 엉덩이를 서로까고 맞대고 볼일 보는 금수같은 족속이 된 것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인육을 먹는 광동성 지나인 Click here!

그것이 비단 오늘어제의 일이 아닐진대 분명히 금수의 문화가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21일간 중국 곳곳을 다니며 중국의 밑바닥을 보니 중국인은 늙은이고 젊은이고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모두 도둑놈, 사기꾼에 더럽고 추접한 기본심성을 바닥에 깔고 있음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는 공산주의 국가 중국이 등소평의 백묘흑묘론을 명분으로 개혁개방을 하다보니 공산당식 통일전술전략을 달러버는 자본주의적 개념으로 잘못 변질된 원인탓도 있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막스웨버가 말하는 소위 자본주의의 기본윤리와 도덕이 있다. 그러나 중국에는 공산당식 통일전술전략적 차원의 돈버는 것이라면 마누라 새끼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돈에  환장한 분위기다. 중국정부는 지금 이 모든 것을 개혁하려 하고 있으니 과연 얼마나 바뀌는지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그렇게 더럽게 산 민족의 기본 베이직이 어디로 가랴 싶다.

아무튼 이러한 판단에 대해 필자보고 전 대륙을 보지 못한 것이라 하는 사람은 역으로 필자가 보기에는 대도시에서만 화이트 칼라를 상대하는 사람이거나 중국의 밑바닥 사정까지 아직 못 본 사람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흔히 동정호를 중심으로 이북에 있는 것이 호북성 이남에 있으면 호남성 하듯이 황토고원이 얼마나 발달해 있으면 황하중류의 황토고원 중부에 있는 섬서성(陝西省)의 이름이 황토고원 중부라는 섬원(陝原)의 이서(以西)에 있다는 뜻으로 섬서라는 이름을 얻었을까보냐. 춘추시기엔는 진(秦)의 땅이어서 섬(陝) 혹은 진(秦)이라는 이름은 이래서 나온 것이다.

서안의 화청지는 당고조 이연, 당태종 이세민으로부터 건륭제, 광서제에 이르기까지 역대 중국의 왕들이 목욕을 한 곳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당현종 이융기(李隆基)와 양귀비 양옥환(楊玉環)이 목욕한 곳과 당태종이 목욕한 진성탕(辰星湯)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화청지 앞에는 양귀비의 석고상을 크게 건축해 놓아 그때의 상황을 재현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곳에는 1936년 12월에 벌어진 서안사변(西安事變)의 중심무대인 장개석의 5칸방 집무실이 양귀비 목욕탕 바로 옆에 그대로 보존되고 있고 장슈에량(長學良) 등 측근이 새벽에 장개석의 집무실로 쳐들어가 총격전을 벌여 장개석을 납치구금한 역사적 장소다.



1936년 12월 동북군벌 장쭈어린(장작림)의 아들 장슈에량(장학량)이 이곳 화청지의 장쩨쓰(장개석)의 5칸방을 무력점령하여 국공합작을 일으킨 역사적 장소다. 방은 아주 작고 방안은 장개석이가 쓰던 거의 야전용 수준 침구며 탁자 책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연안 골짜기 토굴부대에 숨어 소비에트 빨치산 운동을 벌인 모택동은 절대열세의 상황을 장개석의 부하때문에 반전의 기회로 삼아 끝내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천지공사의 금강산 공사내용 이념이 들어있다.


증산도 천지공사의 핵인 금강산 문제를 풀려면 이북의 공산화와 모택동의 공산당 대장정과 연안의 공산당 투쟁과정을 보아야 하고 일본의 대동아 전쟁과 서안의 장개석 국민당 정부와 연안의 모택동이 서로 대립하는 과정에서 장슈에량(長學良)이 일으킨 서안사변(西安事變)에 의한 국공합작이 엄청난 국면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 뿌리는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에 있고 그 핵심은 프리메이슨 혁명(러시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프리메이슨 세력이 가톨릭 전제군주국을 쳐 없애기 위해 프리메이슨 유대인들이 주도가 되어 일으킨 민주주의 혁명이다.

서안사변이 왜 중요한가 하면 1936년 12월 서안 사변이전의 상황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세력이 막강해서 모택동은 연안의 계곡에 있는 양가령 혁명기지(후일 자원 혁명기지 보탑산 혁명기지를 전전한다)에 숨어 국민당군의 폭격이 심해 머리를 감히 들지 못할때였다. 모택동은 장개석에게 제공권을 빼앗긴데다  군사적 역량이 절대 열세에 있었을 뿐 아니라 외교권까지도 열세에 있어 지금도 당시 유일한 서방 여기자가 인터뷰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다. 섬서성이 황토고원이므로 계곡의 산을 파 토굴로 수없는 방을 만들어 거의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놓은 양가령 혁명기지는 당시 상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필자는 이곳을 가 보고 과연 장개석이 당시의 공군 전력으로 이 곳을 폭격하려 해도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때 모택동이 한 유명한 말이 바로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종이호랑이(노호지)라는 공갈용 메시지였는데 이 말은 혁명이 끝나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양가령 혁명기지 시절 모택동의 불굴의 의지를 가장 잘 표현한 말로 등장하곤 한다.



화청지 뒷산 리산을 하산하는 길에

1936년 서안사변때 장학량은 12월 모일 이른 새벽, 군대를 화청지로 몰고와 총격전을 벌이며 장개석의 5칸방에 들이닥쳤다. 장개석은 바로 뒤의 리산 중턱 바위 틈에 숨어있다가 수색조에 의해 잡혀나와 수하장군 장학량의 요구- 즉, 모택동의 공산당과의 싸움을 중지하고 모택동과 손잡고 일본군을 먼저 물리친다는 소위 국공합작에 서명하기로 역사적인 결단을 내린다. 물론 이것으로 장은 자신이 교장으로 있었던 황포군관학교의 제자로 모택동의 한신 대장군에 해당하는 임표(林彪)에게 패배하고 대만으로 내 몰린다. 보다시피 장개석이 숨은 바위틈은 경사가 가파른 바위 위로 10여미터를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바위 틈위는 한 사람이 겨우 숨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경사가  너무 가파르기때문에 지금은 쇠사슬을 설치해 관광객으로 하여금 한번씩 올라가 보도록 배려하고 있다. 쇠사슬을 잡고 올라가는 관광객이 보인다. 필자도  쇠사슬을 잡고 겨우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당시  쇠사슬없이 어떻게 올라갔을까 생각해 보니 뒤에 총을 들고 있으면 분명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긴 했다. 공산화가 되어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난 지금, 장개석의 입장에서 보면, 모택동을 먼저 몰아내야 했다는 장개석의 정치적 판단은 무척 옳았다. 그러나  증산도의 천지공사 내용이념으로 보면, 남북대치에 의한 휴전선 태극 설정과 금강산의  이북 의탁 공사를 생각할 것 같으면, 모택동의 대륙 공산화는 대국적인 순리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마르크스,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은 유대인 프리메이슨이 주도 했으므로 사실상 세운의 일꾼으로 프리메이슨이 그 핵의 자리로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모택동이 세운공사의 대국적 바탕마련 사명을 맡았기때문에 장개석은 모에게 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로보면, 서안사변은 천지공사 내용이념으로 보아도 한반도 문제에 있어 중대한 방향 전환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국민당의 장개석 휘하의 장군 하나가 국민당 자체내 혁명을 해서 모택동과 손잡고 일본군 몰아내기 위해 국공합작을 하게 했으니 모택동은 일본군을 치는데는 국민당 세력을 이용해 소진시키는 일방 절대열세에 있던 공산당 군사역량을 조용히 배가시키는 반전의 기회로 역이용한다. 결국 이러한 모택동에게 중국천하를 거의 다 장악했던 장개석이 쫓겨갔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는가.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게 금강산 공사라는 천지공사 세운이념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택동은 세상에 활짝 나오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 일은 밖에서부터 욱여져 안으로 들어온다는 증산 상제님의 말씀과 시루는 밖에서부터 익기 시작해 안으로 익으면 떡이 다 익는다는 말씀을 이해 할 수 있다. 금강산 이북의탁 공사를 이루기 위해 모택동과 장개석의 한판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판세를 역전시킨 서안사변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건이었다.

공산당의 출현을 위해서는 마르크스, 레닌의 출현과 프리메이슨에 의한 러시아 혁명이 필요했으며 다시 이는 프랑스 혁명의 첫 기획이 필요했음을 전제로 한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중세의 프랑스 미남 군주 르벨 4세의 프리메이슨 집단인 템플기사단의 영수 그랜드 마스터 처형과 템플기사단의 박멸에 대한 복수가 그 기원이다. 결국은 이 원한을 갚기 위해 프랑스의 심장 중의 심장이라 할 프랑스 전제군주의 타도아래 민주주의 혁명이 튀쳐나오게 되었지만 아무튼 원한과 해원이라는 두 이념은 선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원동력임을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민주주의는 대중의 힘을 얻기 위해 프리메이슨 세력이 바로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을 걸고 혁명해 인류에게 선사한 것인데 러시아 혁명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의 97%는 러시아식 이름 이면에 유대인 이름을 별도로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는 정치학자들도 잘 알지 못하는 프리메이슨 역사에만 나오는 정보다. 자유는 무언가. 절대군주에 예속된 중세 봉건절대왕정은 루이 16세에서 루이 18세에 이르면 짐이 곧 신이라는 왕권신수설이 강력한 봉건왕권의 절대권력을 정당화하여 인민은 절대권력의 일개 봉이요 노예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인민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 그래서 제1의 모토가 자유가 되었다. 평등은 무엇인가. 역시 유럽의 중세 봉건 왕정제도하의 인민은 철저한 계급사회로 신분의 차별이 엄청났다. 노예는 노예로, 기사는 기사로, 젠트리라는 귀족은 귀족대로 수없는 계급을 이루고 사는 사회가 바로 중세 장원경제의 농노와 기사, 상공업자, 귀족들의 차별적 신분사회다.

그래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외피적 명분으로(당시 프리메이슨의 지상과제는  기독교 신권국가를 붕궤시키는 거였음을 주지하라) 계급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 하여 평등이 제 2의 혁명 목표가 되었다. 당시 유럽의 신분사회는 피라밋구조로 되어있어 생산에 종사하는 일반 농민과 자유 상공업자들이 절대 다수인데다, 정치적 발전으로 인해 대박을 터뜨린 상공업자들이 의회에 진출해 득세를 하다보니 민권이 신장되어 있는 상태이므로 프리메이슨 지도부는 이들 절대다수인 농민 자유 상공업자 등의 평민에게 자유라는 멋진 선물과 함께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한표씩 행사할 수 있는 평등한 표결권를 주어 국민의 대표를 뽑을 수 있는 투표제 즉, 레퍼랜덤 제도를 도입하면 혁명을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다시말해 철옹성같은 유럽의 기독교 절대왕정국가를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 억눌린 민심을 터뜨리는 기폭제가 바로 절대왕정에서 벗어나 신분의 자유를 찾는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표의 공정성인 평등과 신분의 자유였고 기독교 신권국가의 기독교 도그마인 사랑(박애)를 살며시 립서비스성 웃기로 끼워넣어 자유, 평등, 박애로 프랑스 혁명의 기조로 삼았던 것이다. 물론 이는 해원의 이념적 우주원리를 타고 내가 세상을 비빔밥으로 만들리라는 성구말씀대로 그대로 적중했다. 비빔밥이란 다 똑같이 고추장과 양념이 비벼져 자기동일성을 갖는 것을 말한다. 신분의 차별이 없고 신분의 차별로 인한 질곡이 있을 수 없는 자기동일성의 민주시대가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비로소 역사위에 활짝 개막된 것이다.

박애는 성서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군주국 서양에서 가장 보편적인 이념이니까 이건 보자기로 싸서 멋지게 패션을 낸 가장 두리뭉실한  모토다. 3대 이념은 프리메이슨 지도부에 의해 이렇게 만들어져  프리메이슨의 가오마담 쟈코방당의 거두 로베스삐에르, 마라, 당통의 손에 써빙되어 1789년 혁명가 라 마르세이즈를 외치며 혁명의 깃발을 올리게 된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상징적 역사인물은 쟌다르크다.  프리메이슨 지도부가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 사제들의 권력에 좌지우지되던 중세 기독교 신권국가들은 수백만의 죄없는 여성들을 단지 기독교 사제의 권력행사에 정치적으로 장애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전례없는 "마녀심판"이라는 모자를 씌워 혹독하게 참형시켰다.

쟌다르크 역시 영국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프랑스판 여성 이순신 장군으로 구국영웅이었으나 당시 신정국가를 움직이는 사제들의 정치적 파워게임의 희생자로 마녀심판으로 단죄되어 처형된 인물이다. 프리메이슨이 그녀를 프랑스혁명의 상징적 인물로 삼은 것은 중세 기독교 신정국가의 돌이킬 수 없는  "마녀심판"이란 오점을 분명하게 제기할 목적을 가진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14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異端)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諡聖)하였다.)  




*그당시 일어난 백년전쟁으로 프랑스는 커다란 국난에 처해있었다. 영국의 침입으로 영토는 줄어들고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았다. 1424년 어느날 잔 다르크는 자기집 뒷마당에서 갑자기 커다란 광채를 보았고 성 미카엘 대천사의 소리를 들었다 " 그대는 이 국난의 시기에 있어서 일어나 조국을 원수의 손에서 구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1430년 5월, 잔 다르크는 당시 영국에 협력하고 있던 북프랑스의 콩피에뉴교의 부르고뉴파(派) 군대에게 사로잡히고 영국왕이 몸값을 지불, 노르망디 루앙성에 유치되었지만 샤를 7세는 침묵을 지키고 파리대학 신학과는 잔 다르크가 이단이라는 혐의를 걸어 프랑스왕국 종교재판관에 의한 종교재판을 요청했고 영국왕가측도 이에 동의하여 법정에 신병을 인도하였습니다. 재판은 31년 2월 21일을 첫날로 해서 14회의 심리를 거듭하였습니다. 이단혐의의 근거는 교회 성직자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신적 존재와 접촉했다고 주장한 일에 있었습니다. 종교재판관의 심문은 잔 다르크의 주장이 매일 보던 신적 존재의 화상(畵像)에서 촉발된 심리적 착각에서 나온 것임을 논증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만약 잔 다르크가 이를 인정한다면 그녀의 죄는 단순한 신앙의 미혹에 지나지 않고, 이단으로서의 의심도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법정은 잔 다르크를 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소녀의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심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같은 해 5월 28일 아침, 잔 다르크는 이단으로 선고받아 루앙광장에서 영국왕가의 루앙대관에게 신병이 인도되었고, 대관은 이단에 대한 관행대로 그녀를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로마교황청은 이 루앙의 판결을 아직도 취소하지 않은 가운데 1920년 잔 다르크를 성녀로 추서함으로써 잔 다르크는 이단으로서 성녀가 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 중)


쟌다르크의 사후에 그려진 라이트 갑옷을 입은 초상화


프리메이슨 세력은 중동의 마르둑크, 미트라에서 잡종교배된 조작된 기독교를 지상에서 쳐 없애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는 민주주의 혁명을 감행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프리메이슨 세력을 사탄의 종교라 매도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에서는 기독교가 본시 예수의 정체성부터 왜곡되어 있듯이-유대인은 일개 프라핏(예언자)으로만 본다-빛의 사도라는 루시페리안을(룩스는 빛이다)  기독교가 매도하기 위한 용어로 뒤바꿈해 놓았다고 말한다.



화청지가 있는 서안 교외 소재 리산의 여와궁
여와묘(女媧墓):섬서성 서안(西安) 임동(臨潼) "여와사(女媧祠)"는 속칭 "노모전(老母殿)"이라 한다. 사람들은 여와를 남전현(藍田縣) 옛 옹주(雍州)에 속하는 리산(驪山) 양지바른 백록원(白鹿 :높은 평지) 경어구(鯨魚溝) 북파(北坡)에 묻었다. 말하자면 사진에서 보는 임동 "노모전(老母殿)" "여와사(女媧祠)"는 바로 기록이 증거하고 있듯이 여와가 묻힌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여와사(女媧祠)는 리산(驪山) 서수령(西  ) 제 2봉 위에 산문(山門) 전전(前殿), 후전(後殿)이 있다. 여와는 기주(冀州), 옹주(雍州)에서 돌을 연석(煉石)해 하늘을 보수했다는 지방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 곳 남전현(藍田縣) 임동(臨潼) "여와사(女媧祠)"- 속칭 "노모전(老母殿)"이 바로 옹주의 땅이다. 리산은 종남산(終南山)의 지맥으로 서안 20Km에 있다. 주봉은 임동구(臨潼區) 남산의 지세가 높이 용립한 곳으로 푸른 숲이 녹음을 이루고 있어 풍광경색이 아름다운 곳이다. 전설에 이 산은, 여와 말은 큰 5색 가라말(驪馬)이었는데, 돌의 화염에 불타 죽은 뒤 변해 가라말 산인 리산(驪山)이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리산의 지명의 유래가 바로 여와와 관계가 있게 되는 것이다.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임동(臨潼)과 남전(藍田) 민중은 여와와 리산(驪山)을 숭경해오고 있다. 여와사(女媧祠)는 당나라때 세워져서 역대에 걸쳐 개수했으며 매년 음력 6월 "여와사(女媧祠)"는 여와씨를 제사지내는 축제를 거행한다. 매년 정월 20일은 "여황절(女皇節)" 또 여와 생일을 여와보천절(女媧補天節)이라 칭하여이 명절을 당하면 집집마다 명절떡인 "보천병(補天餠)" 을 만들어 먹는다. 또 지금은  "여와사(女媧祠)"니 "노모전(老母殿)"이니 하고 부르고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진(秦), 한(漢) 시대까지만 해도 "여와궁(女媧宮)"이라 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명절을 지냈다는 사실이 현지 향토사료에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개혁 개방이 이루어지고 연 평균 9.6%라는 세계에서도 경이적인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 중국은 여와궁을 우리돈 환산으로 10억을 들여 새로 증축개수하고 있었다. 환율로 보면 우리돈 10억이면 그곳 돈 100억을 투자하는 거금이다.




결국 세운공사의 금강산 공사에 동원된 핵심 일꾼은 이리저리 근원을 캐고 캐면 프리메이슨 세력에 당도한다. 화청지(華淸池)가 있는 리산(驪山) 꼭대기에는 바로 여와(女媧) 사당이 있었다. 여와사당은  복희가 태어난 감숙성 성기(成紀) 부근인 삼국시절 읍참마속의 주인공 마속(馬謖)이 명을 어기고 패한 가정(街亭) 땅에 여와의 고향에 세워져 있고 태호 복희가 수도로 삼은 하남성 회양(懷陽)현에 복희릉에 합사되어있다. 서안사변이 일어난 주산 리산(驪山)이 바로 동이족의 조상 여와사당이 있는 곳이라면 천지공사의 금강산 공사는 결자해지의 민족적 비의를 여와기운에 담아 풀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성기는 지금의 감숙성 천수시 진성구이다. 천수시는 3개의 구로 이루어져 마치 세 개의 구가 다른 도시처럼 떨어져 있는 이상한 도시다. 그러나 천수시로 가면 바로 옛날의 성기인 진성구이다 이곳은 복희의 고리-"희황고리(복희 황제의 옛고을)"라 하여 복희사당이 있는 곳이다. 거리 곳곳에 복희에 관한 관광상품- 주로 술을 개발해 도시 곳곳에 광고해 대고 있다. 중국인 어디서나 이른 새벽 우슈를 하고 타이지취앤(태극권)을 하는데 이른 아침에 군중들이 우리의 가락인 아리랑을 노래해서 깜짝 놀랐다. 우리의 아리랑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와 70-80%가 똑같아 깜짝 놀랐다. 아마 세월에 의해 약간 변형되었을 것이지만 좌우간 놀래지 않을 수 없어 호텔 복무원에게 물어보니 남녀상열지사인 쬬시커우(走西口)라 말한다. 알고 보니 그 내용까지도 우리의 아리랑 가사와 닮아 있었다. 동이족의 조상이자 인류 성씨의 조상인 태호복희의 고향 감숙성 천수시에서 만난 우리의 아리랑은  참으로 기막혀 현지답사가 정말 중요함을 느꼈다.



이곳 화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화청지로도 유명하지만 그보다도 당고조 이연과 당태종 이세민이 목욕하기시작해 청나라 광서제까지 와서 목욕한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당의 황실은 바로 양자강 중류의 동이족 국가 초나라 출신의 노담 노자에서 성씨를 물려받은 정통 동이족 혈통이다. 반도사관으로 보면 정인지의 고려사에서 왕건은 당 숙종의 혈통이라 했으나 대륙사관으로 보면 정작 당황실은 진시황의 진 황실이 그러했듯이 동이족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리산은 이래저래 동이족의 혈맥, 기운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섬서성 서안 화청지의 양귀비& 섬서성 황제헌원 황릉현의 황제헌원 사당. 황릉은 사당 뒤 산인 교산에 따로 있다. 화청지 뒤의 리산(려산)은 장개석이 도망간 서안사변의 주무대이기도 하지만 여와궁이 있는 곳으로 한고조 유방이 강제 노동으로 동원되었다가 탈출한 곳이기도 하다.


황제헌원릉이 있는 황릉현(黃陵縣)은 서안북부 170Km이고 연안(延安)은 모택동의 혁명기지 본산인데 황릉 북쪽 160Km에 있다. 사마천 사기에 황제릉이라 안하고 "총( )"이라 되어있어 왕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고 갑골문학자 낙빈기는 황제가 왕을 한 적이 없어 갑골문에 황제의 이름이 단 한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고 결론내린 바 있다.

"황제붕(黃帝崩) 장교산(葬橋山)"라 한 <사기>의 기록대로 황제총은 陝西北部 今 黃陵縣境內 橋山之(산꼭대기 전) 에 있다. 황릉현은 옛날에 "橋國" "翟道" "陽周" "中部"라 칭했고 고칭(古稱) "古軒轅黃帝橋陵"라 한다. 환단고기에서 보듯이 황제는 치우천왕에게 패해 대륙을 떠돌며 치우천왕의 동두철액의 철 병장구에 맞설 철광을 찾아다니다가 섬서성에서 병들어 죽는다. 인민일보 기사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黄帝文化远及南方 황제문화는 멀리 남방에 미쳤다 인민일보1 Click here! ,专家考证认为黄帝文化的范围应该包括中国南方:전문가들은 황제문화 범위가 당연히 중국남방을 포괄한다고 고증한다 인민일보2 Click here!)

传说和实地考察的情况分析,5000年前黄帝曾经在浙江永康的石城山生活过,并且以石城山为中心,足迹遍及浙江的金华山、仙华山、仙都山,安徽黄山、江西庐山、广东鼎湖山等地,在南中国撒播了华夏文明的种子。-전설과 사실을 고찰해 정황분석을 하면, 5천년 전의 황제는 일찍이  절강성 영강 석성산에서 생활했으며, 석성산을 중심으로 그 족적이 절강의 금화산, 선화산, 선도산, 안휘성 황산, 광동성 정호산 등지로 두루 족적을 남겼으며, 남중국에 화샤(화하) 문명의 종자를 뿌렸다.

    据民间传说,黄帝在与蚩尤的战争中,曾一度失利,原因是蚩尤部落较早掌握了青铜器,而黄帝使用的仍然是石器。为了改变这一不利局面,黄帝派部落成员四处寻觅可以冶炼兵器的矿源,终于在永康发现了宝藏,从此黄帝的一支在这里扎根。
-민간 전설에 의하면, 황제는 치우와 더불어 전쟁중 일찍이 전세가 불리해졌는데 이는 치우부락이 일찍 청동기를 장악하고 황제는 거듭 석기 무기를 사용했기때문이었다. 이러한 불리한 국면을 만회해 전세를 뒤집기 위해 황제는 부락성원을 4처로 파견해 병기를 야련할 광원을 찾게 했는데, 마침내 절강 영강에 매장된 광원을 발굴하게 되니  이로부터 황제의 혈손지맥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게 되었다.(이상 인민일보)

黄帝文化远及南方
  
    新华社杭州2 月19日电(记者慎海雄)我国的历史教科书中,一提起5000年前的黄帝文化,指的都是北方黄河流域文化。其实,黄帝的活动与黄帝文化的范围决不囿于北方。我国历史文化研究工作者经过多年的考证认为,黄帝文化的范围应该包括中国南方一些地区。

    黄帝被公认为中华民族的祖先。据史料记载,黄帝号轩辕氏,是我国原始社会部落联盟的领袖,曾打败炎帝和蚩尤,统一了中原。浙江师范大学教授洪波等专家认为,从史料研究和实地考证看,南方长江流域也有黄帝活动的足迹,并积淀着深层次、多层面的黄帝文化。

    专家认为,根据史料、传说和实地考察的情况分析,5000年前黄帝曾经在浙江永康的石城山生活过,并且以石城山为中心,足迹遍及浙江的金华山、仙华山、仙都山,安徽黄山、江西庐山、广东鼎湖山等地,在南中国撒播了华夏文明的种子。

    据民间传说,黄帝在与蚩尤的战争中,曾一度失利,原因是蚩尤部落较早掌握了青铜器,而黄帝使用的仍然是石器。为了改变这一不利局面,黄帝派部落成员四处寻觅可以冶炼兵器的矿源,终于在永康发现了宝藏,从此黄帝的一支在这里扎根。

来源:《北京青年报》 2002年2月20日  (责任编辑:李东帅)  

황제는 4인의 여자가 있는데 정실부인은 누조( 祖)로 동이족 후손답게 근로 총명하고 양잠을 가르치고 직조제의했다하며 후인이 "先蠶娘娘"이라 불렀다 하며 나머지 3인은 방뢰(方雷), 동어( 魚), 모모( 母)다. 모모( 母)는 얼굴 모습이 가장 추했으나 심지가 선량하고 가장 현덕했다 한다. 자식은 모두 25인으로 14인이 새 성씨를 가졌다. 황제는 어머니는 서교(西橋)씨의 여자인 부보(附寶)로 부보는 24개월만에 황제를 낳은 것으로 사료상 되어 있으나 역시 신비화하기 위해 왜곡된 것이다.

원래 여와사당은 여와궁이라 하여 진한시대까지 여와궁의 형태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존재했다. 이번에 화청지가 있는 서안 리산(驪山) 정상의 여와사당을 가니 우리 돈으로 약 10억을 들여 여와궁을 복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필자는 리산(驪山)에 여와사당이 있다는 기록을 찾아 하루종일 이 산 저산을 찾아 헤매리라 생각하고 떠났는데 막상 화청지의 리산에 가서 탐문을 하니 화청지의 삭도(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바로 여와사당이라는 간단한 대답을 들었다.

중국에서는 뉘와묘라 발음한다. 여와사당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장개석이 서안사변을 만나 총격전을 피해 산중으로 피한 바위산을 볼 수 있었다. 의도하지 않게 서안사변과 연루된 유적지를 모두 살피게 된 것이다. 천지공사 내용이념으로 보면 모택동은 나와야 할 인물이었지만 장개석의 입장으로 보면 선 공산당 제거 후 일본군 대처가 가장 현명한 정국대처였음을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장개석 입장에서는 일본은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지만 공산당은 때를 놓치면 물리치기 어렵다고 본 것은 장쉐량(長學良)의 국공합작의 쿠데타로 말미암아 모택동이 힘을 길러 장개석을 대만으로 쫓아낸 것을 보면 정확하게 정국을 판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숙성의 천수(天水)시는 원래 3개의 구(區)로 이루어진 도시다. 그런데 천수(天水) 시는 아주 묘해서 이 3개의 구가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서로 다른 도시처럼 떨어져 있다. 서안(西安)에서 신농씨가 태어난 고향 바오지(寶鷄) 시를 지나면 깐쑤(감숙성)의 관문 태호복희 고향 천수(天水)시에 도착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천수(天水)시라는 곳은 천수시의 3개 구 중의 한 개 구인 진성구(秦城區)임을 알 수 있고 이 진성구(秦城區)의 옛 이름이 태호 복희천자의 옛 탄생지인 성기(成紀)임을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중국현지에 가면 해당유적지를 찾을 수나 있을까 걱정하곤 하지만 막상 현지엘 가면 해당 유적지로 먹고 사는 사람들처럼 요란뻐근하게 광고를 하고있음을 알고 깜짝놀라곤 한다.

천수시 진성구도 마찬가지여서 도시 전체는 복희고리(故里)라 하여 엄청난 광고를 해대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복희고 복희명주를 만들어 거리를 도배를 해 놓고 광고판도 태호복희를 우려먹고 사는 도시였다. 또 이 도시 인근에는 복희 성인이 8괘를 받았다는 괘대산(卦臺山)이 있다. 간체를 써서 卦台山이라 쓰고 읽기는 괘태산으로 읽는다. 중국발음은 臺와 台를 공히 태로 발음하므로 우리식으로 괘대산으로 하든 중국식으로 괘태산으로 하든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괘태산 정상을 올라가니 정상에 복희기념관이 우뚝 서있다.

감숙성 천수 교외에 위치한 태호복희 유적지 괘태(대)사

뉘와묘를 찾아나선 코스는 우선 천수시에서 농성( 城)을 향해 가되 중간 기착지 진안(秦安)까지 58킬로를 가서 진안에서 다시 연화(蓮花)까지 50여 킬로를 가고 다시 태호복희시절의 상고 유적지격인 대지만(大地灣) 고대 유적지까지 가서 20여킬로를 더 들어가는 오지다.



이곳이 바로 삼국시절 제갈량이 전쟁을 벌인 가정(街亭)이다 가정 삼거리에서 200미터만 가면 바로 여와 고리(故里)가 나오고 그곳에 여와 사당이 서있다. 그러나 마을은 제갈량 시절보다도 더 낙후된 모습을 하고 있다. 외지인도 아마 필자가 처음인 듯 다들 신기해 하는 표정들이다. 여와고향의 여와사당 비문에 적힌 것을 일부 옮기면 다음과 같다.


여와황궁

重建女 大殿重塑女 聖像碑記 女 風姓生于 城風谷(농성풍곡에서 탄생)長于風台(풍태에서 장성)葬于風塋:풍영에 장사지내다)其煉石補天搏土造人之說*屬神說但化育萬物首倡婚嫁始造笙簧開倉人類文明史之功德實難磨滅故與伏羲神農竝稱三皇漢代前首建女 祠于北山

참고로 현재 경북 대구(慶北大邱)와 경기도 장단(畏湍) 및 파주(坡州)에 살고 있는 동방씨(東方氏)의 유래와 본관을 알아보면 이들이 복희씨에 연원을 대고 있음을 본다. 복희의 후예 패관임기포이사팽의 8대성이 있지만 그외의 성씨인 동방씨가 현재 우리 한반도에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동방씨는 고대 복희씨(伏羲氏)가 동방의 진(震)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동방을 성으로 삼게 되었다고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다.동방씨는 중국 제남(濟南:산동성)에 연원을 두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정조(正祖) 때 문과(文料)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낸 동방숙(東方淑)이란 사람이 우리나라 동방씨의 인뭍로 문헌에 전할 뿐이다.오늘날 동방씨는 경북 대구(慶北大邱)와 경기도 장단(畏湍) 및 파주(坡州)에 소수가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41가구에 1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 끝)

하이난 섬은 중국의 하와이라 하는 해남도로 중국의 제주도인 해남성입니다. 이 곳은 고대 동이 9려족-소위 9이족의 하나인 양자강 유역의 백월족-지금의 장족(춘추전국시대 이후 구천의 월나라를 이룬 바 있는 월족 ),묘족이 운남 사천, 인도챠이나, 해남도 등으로 밀려 내려가면서 우리 글과 비슷한 문자, 말, 색동옷(태국 치앙마이), 김치(절강성 샤오싱), 고추장(샤오싱), 고추 등 매운 음식(사천성) 등을 남긴 것입니다. 물론 월족은 우리 조상들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토가족과 치우천왕의 후손인 묘족들과 문화전통이 유사해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아간 것 으로 보입니다. 특히 홍콩 왼편의 계림이 있는 장족 광서자치구는 바로 양자강 유역의 월족들이 밀려 내려 살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며 해남성도 고대의 동이족이었던 묘족이 많이 사는 대표적인 곳입니다. 저도 아직 장족 자치구는 못 가봐서 특별한 정보는 없지만 좋은 소식이 있으면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광서 장족 자치구는 한반도보다 조금 큰 면적으로(한반도 22만 평방,광서 장족자치구 23만 평방) 4천 5백만 인구이며 3월 삼짓날이 되면 자치구 전역이 남녀노소할 것 없이 노래자랑으로 엄청나다고 하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역시 핏줄과 뿌리는 못 속이는가 봅니다. 특히 장족 광서자치구의 꾸이린(계림)을 가 보시는 분은 이러한 상고 역사의 배경을 알고 가면 한민족과의 유사성에 당황하지 않을 겁니다.

*참고
조선족 및 9려 동이족의 현황

해남도에 사는 주요종족인 동이족을 려(黎:리)족이라 하는데 고래의 9려족이 진시황이래의 한족우대정책과 소수민족 박해로 밀려난듯 보이며, 월족인 장족은 광서에서 운남,광동,귀주,호남 등에 살며(월족인 장족 주류가 양자강 유역 상해 아래의 춘추전국시대의 월나라 강토에서 완전히 밀려나 귀주,호남등으로  내몰린 것으로 보인다), 묘족은 귀주,운남,호남,중경,광서,호북에 살며, 묘족의 반쪽인 요족은 광서,호남,운남,광동,귀주 등지에 살고,토가족은 호남, 중경에 살고, 몽고족은 내몽고 요령성, 신강,흑룡강,길림,청해,하북,하남 등에 살고, 만주족은 요령, 흑룡강, 길림,하북,내몽고,북경 등에 살고, 조선족은 길림,흑룡강,요령등 동북삼성에 산다. 현재 이 종족들의 그림을 지도로 그리면 우리 핏줄들이 역사 속에서 이질화되는 과정을 거쳐 역사전통과 문화적 빛이 많이 바랬겠지만 대륙 속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는 역사적 실체를 생생히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대한어모범자전)



필자는 노신과 왕희지의 고향이자 주은래의 고장으로 유명한 샤오싱(소흥)이 과거 구천이 도읍지로 삼은 도성인 줄 처음 가보고 알았으며 이 곳에 회계산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회계산을 가 보니 무척 산이 높고 아름다왔으며 우 임금이 사천성 유도(중경)의 도산에서 5행치수법과 금간옥첩의 홈범9주를 단군왕검의 장자이자 후에 2대 단군이 되신 부루 태자로부터 전수받고 아름다운 운하도시인 제 2의 쑤쪼우(소주)인 샤오싱으로 내려가 치수사업을 한 줄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그 곳이 어디일까 항상 궁금했었는데 샤오싱을 가보니 해답이 한 번에 다 풀렸습니다.(모든 사진은 본 홈피 포토앨범에 있으니 참고할 것)

오나라 부차에게 항복한 구천은 회계산에 숨어들어 와신(상담)의 한 축을 이루고 부차를 죽여 암스테르담보다 더 아름다운 운하도시로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항주와 함께 동방의 베네치아라 칭찬해마지 않은 쑤쪼우(소주)를 접수해 수도로 삼은 바 있습니다. 샤오싱은 소주의 축소판으로 아름다운 문화도시더군요. 운하가 많아 옛날에는 치수가 가장 어려웠는지 우임금 사당의 양 옆에는 샤오싱의 치수사업에 결정적 공헌을 한 2명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은 것을 보고 우 임금이 이곳에서 병들어 죽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물론 역사기록에는 우임금도 백익에게 정권을 탈취당하고 그 아들이 산동성 안양-지금은 하남성의 우임금 사당에서 치제하는 틈을 이용해 백익에게서 정권을 다시 뺏는 것으로 나오지만 필자가 추측하기엔 우임금 사후 평생 공들여 집앞을 3번 지났어도 그냥 스쳐지나갔다 한 바로 그 샤오싱에 묻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필자는 샤오싱의 음식점에서 한국의 고추장과 똑같은 고추장이 전래되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으며 약간 다르지만 김치가 전래되고 있음을 알고 역시 한민족의 근거지였음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것은 담론 본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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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2002.8.16


모럴해저드에 빠져 있는 중국인
[주장] 차이나 익스플로어 - 감당할 수 없는 대륙인의 '야만성'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정상태(sangtee) 기자    



최근 미국이나 유럽 등지의 신문에는 중국인에 관한 기사가 심심치않게 올라온다. 그만큼 유학이든, 사업이든 아니면 관광이든 그 숫자가 상당히 많이 늘었기에 그들의 행동이 이미 눈에 띄기 시작한 탓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미국의 화장실에서 태연히 화장실 문을 열고 용변을 보다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 유럽에서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백화점에 들어서서 물건을 파는 여성 앞에서 콧구멍을 아무렇지 않게 후벼 여직원이 혼비백산했다는 이야기 등등 끝없이 가십거리가 되고 있다.

이미 영주해서 잘 살고있는 중국계 화교나 기타 외모가 거의 같은 한국계나 일본계 현지인 들의 인상마저 흐리게 하고 있다.

흔히들 중국인에 대에 하는 얘기가 있다.

"중국인은 꽌시(關係)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귀기는 어렵지만 일단 사귀고 나면 의리를 지킨다. 외모는 초라해도 묻어둔 거액 현찰의 부자가 의외로 많다. 도교, 유교 등의 발생지인 만큼 동양철학에 대한 조예가 깊다" 등등의 많은 선입견들은 이미 변질된 공산 륙의 중국인 마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중국의 고대 훌륭한 전통의 맥을 연연히 잇고 있는 사람들은 300만이 넘는 재미 화교(엄밀히 말해서 華人이다)나 그 외 세계 각 국에 퍼져있는 화교, 홍콩인, 대만인, 중국계 싱가포르인 정도다.

서방세계의 중국계 화교들이 대륙중국인을 경시하는 것도 경제적인 우월감보다는 전통과 문화가 결핍된 중국 대륙인에 대한 연민과 애증의 복합적 감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대륙인들의 의식구조는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고로 중국에 머물면서 서방세계인의 눈으로 그들을 보려고 하면 중국에서의 삶은 항상 스트레스의 연속일 것이다.

대로변이나 일반 대중식당은 그들의 가래침과 아무 데나 코를 풀어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다. 또한 대로변이든, 자동차에서든 마구 던지거나 버리는 쓰레기, 식당에서도 이들의 야만성은 멈추질 않는다.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가면 거기는 중국인의 노상변소(?)다.

아무 데나 방뇨한 냄새, 더 인적이 뜸한 곳에는 여기저기 배설한 대변이 흩어져 있으며, 여름철에는 쇠파리까지 번식하여 잘못 들어갔다가는 똥 묻은 쇠파리 떼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대학가는 좀 나을까 하는 바람도 역시 기우였다. 대학가나 공공장소의 화장실에는 항상 용변 본 대변이 고여있다. 수세시설이 고장 난 게 아니다. 아니면 습관이 안 된 것도 아니다. 내가 대변 물을 안 내리고 가면 다음에 오는 사람이 무척 불쾌할 거라고 생각하는 중국인은 별로 없다. 그만큼 남을 배려하는 사상이 공산화되면서 망각되었다.

변소 문을 열어제치고 대변을 보는 것은 습관이다(공원 등 많은 공공화장실은 남녀의 구분은 엄격해도 옆 사람과의 차단용 벽이나 문이 없는 곳이 아직도 많다). 심지어는 용변도 중에 핸드폰이 울리면 바지도 안 추스른 채 밖으로 나와 전화 받는 넥타이 맨 신사 분도 여럿 목격했다.

수많은 비공산권 진영의 중국인들이 개탄한다. 경제적 상실보다 더 회복하기 어려운 이 문화와 철학의 상실은 그들의 역사적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무산계급(無産階級)인 노동자와 농민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이 부패한 자본주의 국민당을 본토에서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하여 중화민국의 시대를 1949년 9월 30일로 종말을 고하게 하고, 같은 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1958년 대약진 운동을 거치면서 지식인 정풍운동의 기치 아래 수많은 지식인들이 독재정부를 비평하는 반동분자로 처형되었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른바 5·16 지시에 따라 모든 지식인들은 사상 개조를 위하여 하방(下放)당했기 때문에 모든 학문 연구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모든 학문에 대한 저술은 무산계급이 써야 한다며 교수나 지식인들이 학술적으로 쓰는 게 아니라 공장의 노동자, 학생들이 조를 짜서 쓴 통속적으로 왜곡된 기술이 범람했다.

즉 모든 지식의 배경은 모택동 사상을 주축으로 한 무산계급, 중국공산당이 주도해야 한다는 전제가 되었다. 문혁(文革)의 10년간 중국의 지식층은 제거되고 학문연구는 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자로 몰리거나 대독초(對毒草)로 간주되었다.

정부시책에 반기를 드는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이나 처형을 면하기 위하여 낮은 포복자세로 엎드려 지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하여 가까운 사람도 밀고하여야 했다.

'남과 나는 전혀 별개의 관계다'라는 사상이 이 혼란 시대에 정립되었으며 이런 사상의 영향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재는 6000만이나 되는 충성 공산당원 중에서 나오면 되는 것이고, 일반 백성은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아무 탈없이 잘 지내는 것만이 최고의 처세법으로 여기게 되었다. 길 가던 행인이 자동차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어도 구경꾼만 되는 것은 이들이 인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괜히 남의 일에 끼어 들어 내 신상에 불이익이 될 수 있다는 관념과 상통한다.

기차역에서 애인인 듯한 여자가 남자 친구에게 머리가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울고불고 하여도, 살짝 받았다고 자전거를 타고 가던 노인의 뺨을 때리는 새파랗게 젊은 기사를 봐도 이들은 애써 무덤덤하다.

난세에서 잘못했다가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르므로 애써 태연히 모른 척 하려고 하는 이런 중국적 사회주의적 관념의 발로가 오늘날 대륙의 중국인들을 독단적 이기주의자로 만들어 왔다.

그러므로 대륙 중국인에게는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도덕관, 즉 남을 배려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깊이 생각하는 의식의 세계와는 거리가 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장애인이나 불우 이웃이나 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이런 '자원봉사'가 이들에게는 무척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기에 중국인 직원과 조화를 유지하려면 의리나 신뢰감 등을 내세우면 안 된다.

회사가 잘 되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가치관의 형성이 그들에게는 어렵다. 그러므로 직장 생활도 이합집산을 밥먹듯 하니 애사정신이 있을 리 만무하다. 회사 생산품을 도둑질 해 가도 누구 하나 뭐라고 얘기하기는커녕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회사가 잘되고 못되고는 나와 상관없다"는 사회주의식 독단적 이기주의 사고가 무섭다.

남을 타고 가든, 밟고 가든 모로 가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게 최고라는 기형적 배금주의가 현재에는 만연하고 있다. 고로 이들에게 너무 논리적인 부분을 강조하지 말고 보수에 대한 조건부터 확실히 결정한 후 이득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해야 마음이 움직인다.

또한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비해 약하고 인내심이 떨어진다. 사회주의의 사상주입식 교육의 영향으로 중국의 어느 지역을 가도 지방의 특색은 사람을 통해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미 군인처럼 획일화되었기 때문이다.

10월이 오면 추운 북쪽이나 남쪽이나 동시에 내복을 입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성들도 마찬가지다. 군대도 징병제가 아니므로 대부분 군대 생활도 안 해봤고, 중국 고유무술인 '우슈' 등도 특별한 학교나 가야 배울 수 있으므로 신체단련의 기회가 적어 체력이 약하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감기만 걸려도 링겔 주사를 처방 받는 낙후 된 의료 시스템으로 인하여 치아가 까맣게 변한 젊은 노인(?)도 많다.

21세기에 거대한 한 제국으로 다가오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중국, 우리는 그들의 지적 철학이 결여된 정신적 빈곤이나 후진성을 비평만 할 게 아니라 그들만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그 파고의 격동을 꿋꿋하게 헤치고 오늘날 당당히 국제사회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그들의 과정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막혔던 마음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보다 더 가깝게 변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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