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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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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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비난한 글을 읽고-이승만 동상 국회건립과 세종로 충무공자리 및 (당시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남산 81척(56년 이승만 81회 생일을 기념) 동상

강금실 법무, 노무현 대통령, 평검사 검찰개혁 토론회를 보고 Click here!


한겨레 비난한 글을 읽고



그래도 조중동이 한국의 여론을 오도하고 역사를 왜곡한 것 보다는 훨씬 낫다. 광주 학살 살인마 전두환을 구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글을 써대며 정권에 아부하고 조선기자출신 허문도, 최병렬을 정계 핵심에 밀어넣고 급기야 판매부수 1위의 동아를 따돌리고(동아도 친일족보임에는 예외가 없지만) 성장한 것은, 이승만이 친일거두 인촌 김성수와 손잡아 정, 부통령으로 각각 정권을 나누고, 패망한 일제가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끼리끼리 나누어 오늘날 정경유착(정경유착은 이승만이 시작)으로 친일 재벌을 만들게 하고, 조선이 이승만과 손잡아 그가 씌워준 반공주의로 친일의 딱지를 떼어냄과 동시에 그들 친일파들의 원죄를 자유언론 창달자로 (조중동)또는 명망있는 위선적 교육가로(모윤숙,김활란 이대,김성수 고려대 등) 변신하게 된 더러운 과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조선은 틈만 있으면 이승만 추켜세우기 행사와 기사를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역사를 왜곡하는 아주 추악하고 더러운 행위이다. 이승만은 결코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정권획득을 위해 현재의 헌법에서도 국통으로 삼고 있는 상해 임정의 김구를 제거하고 친일파를 자신의 정치세력 홍위병으로 내세워 반민특위를 강제해산한 것은 물론 심지어 친일파를 청산하려던 반민특위 위원을 암살지령까지 내린 인물이다.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이승만부터 시작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행헌법 전문을 다시보고 확인해 보라 또한 헌법 정신은 3.1운동 정신과 4.19정신인데 그것이 무어냐 바로 3.1 독립운동 정신과 이승만의 반부패, 반무능,반독재 아니냐. 그럼 한국의 헌법정신은 바로 한마디로 줄여 3.1 독립운동 정신과 반 이승만 정신이다.

오늘날 세종로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박정희때 그곳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을 철폐하고 세운 것인데(4.19 시위대가 현재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 자리에 세워져 있던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동상과 남산 및 파고다 공원의 이승만 동상을 무너뜨린 뒤 새끼줄로 묶어 질질 끌고 다녔는데 현재의 4.19정신을 이어받았다 한 바로 그 헌법정신은 바로 부패, 무능,독재의 상징인 이승만을 쓰러뜨린 정신인데, 박통때 바로 그 자리에 지금의 충무공을 세웠다) 이러한 민족반역의 이승만 동상을 반 이승만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헌법정신으로 뽑아놓은 국회의원이 바로 그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국회에 동상을 세웠다. 이는 시민혁명인 4.19 정신을 계승했다고 명문화한 현행 헌법정신에도 어긋나는 반 헌법적 작태일 뿐 아니라 반 4.19정신이기도 하다. 헌정사상 가장 더러운 결의”Click here! , 국회에 이승만동상이라니-민족문제연구소Click here! 그게 누군가. 바로 한나라당의 목요상이 이승만 동상건립추진위 위원장이었다 )  그 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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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자문위원회는 99년 4월28일 박준규 국회의장이 위촉한 고병익(전 서울대 총장) 채문식(전 국회의장) 김재순(전 국회의장) 이만섭(전 국회의장) 류근일(조선일보 논설위원) 송진혁(중앙일보 논설위원) 남중구(동아일보 통일연구소장) 등 7인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5월14일 10명이 모여 상 건립을 결의했다. 운영위에서 결의한 ‘공청회 개최 등 폭넓은 의견수렴’과는 거리가 먼 과정이었다. 이 건은 99년 11월26일 국회 운영위원회의 ‘만장일치’ 결의를 거쳐 본회의에 회부됐다. 당일 출석 의원은 박상천 위원장을 비롯해 이윤수 박찬주 방용석 송훈석 이훈평 이긍규 김고성 이재선 이부영 이규택 권기술 남경필 박원홍 오양순 황우려 의원 등 총 1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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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과 몇 년전 밝혀진 일이지만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참고) 6.25 당시 서울 후퇴시 전국에 수용된 보도연맹 포함 114만명을 살해했다. 그는 만주 관동군 사령부 일개 헌병 보조원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던 일제 주구 김창룡을 특무대장으로 삼아( Click here!) 당시 내무장관 조병옥도 허수아비로 따돌리고 이들 양민을 살해지령을 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군경 합동으로 무참하게 살해했다.신익희,조병옥, 최능진은 특무대장 김창룡의 수하 3인방이 죽인것Click here!


조선이 이승만을 추켜세우는 이유는 무엇이냐? 조선 사주 방응모의 친일전력으로 보아 드골정부 같으면 신문사 폐쇄조치에 재산몰수, 공민권박탈, 종신형 내지 교수형의 신세가 되었을 조선일보가 이승만의 친일파 옹호로 정치 홍위병화의 전략에 서로 부응해 이승만의 반공주의에 의해 자유언론창달자로 변신하여 온존하게 되었으니 결초보은으로도 모자라는 각골난망의 은혜때문이다.



이승만은 이제부터 역사를 다시 써 다시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는 한마디로 살인마다. 조선일보는 그러한 그를 경복궁에서 이승만전을 개최하여 민족의 애국자로 치켜 세운다. 이승만이 누군가. 임정때 있지도 않은 직제의 대통령직을 사칭하며 명함을 미국조야에 돌리고 다니고, 소위 임정에서 인정도 않은 구미위원회를 직하에 두고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의 미 국방성에 신탁통치를 주청하여 무장항쟁주의 임정의 분노를 산 자다. 그리하여 고뇌에 싸인 임정의 독립운동가들이 세계의 위신을 고려해 그의 대통령 사칭을 억지춘향으로 추인한 다음 임정 공채까지 발행해 편취하는 지경까지 이르자 임정에서 불러들여 탄핵해 제거한 자다. 식민지 제국시대에 식민지경영에 열올리던 일본과 동일한 입장에 있던 미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바랐던 그의 독불장군식의 외교주의와 불의를 본 상해 임정 무장항쟁주의파 주류 신채호는 무어라 했는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도 팔아먹을 역적같은 놈이라 했다.



단재 신채호와 같이 무장항쟁운동을 벌인 독립투사로서 성대 초대 총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은 이승만을 보고 무어라 했는가. 이승만이는 서양에 가서 무쟁항쟁을 방해하고 외국년 엉덩이만 만지다 온 놈이라고 까지 극언을 한 매국노였다. 현재 미국은 독일의 참회를 촉구하고 비난은 해도 일본이 한국에 참회하거나 과거청산에 대한 문제는 별로 언급조차 하려 하지 않고 있다. 왜냐고? 지금은 점쟎게 인권을 외치고 있는 과거의 미국은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한 대신 일본으로부터 필리핀에서의 지배권을 서로 보장 받은 더러운 인종사냥의 제국주의 경력이 있기때문이다.

  

이것이 원죄가 되어 일본에 대해서는 위안부 문제가 나와도 과거청산에 대한 프로그램 문제가 수없이 한국인 사이에서 터져도 본체 만체 한다. 이승만이 과거 미국이 제국주의 하던 시절 이미 카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대세가 넘어간 상황에 외교전을 전개하고 다니면서 정통파 임정 무장항쟁주의를 방해하고 다녔다. 김구가 거지 헐랭이 옷을 입고 보천교에서 받은 독립자금으로 폭탄을 사서 숨기고 다니던 시절 송재 서재필이 송재일기에서 고백하듯 이씨 왕실의 후손이라 해서 자기가 보아도 그 사치와 방종이 도를 더했다 표현했듯이 임정으로 가야 할 미국의 독립운동자금을 거두어 가로채 썼다.  


이승만을 제자로 둔 송재 서재필마저 자신의 송재일기에서 이왕가의 후손인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그 호사와 사치가 한계를 넘었다고 비판한다. 상해임정의 더러운 뒷골목을 거지헐랭이 옷을 입고 그  속에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쓰일 폭탄을 숨기고 다닌 김구(백범일지 참조)와는 천양지차로 미국에서 상해로 보내져야 할 독립운동자금을 가로채 물쓰듯 쓰며 당시로서는 미국 최고위층이나 최고 상류층 인사나 탈 수 있었던 최고가의 크라이슬러를 몰고다닌 이승만. 이승만은 한 술 더 떠 임정과는 전혀 상의 하나없이 임정의 공채까지 발행해 개인적으로 유용해 쓴 위인이며 유명한 구미위원회 사건으로 당시 일본과 함께 한반도와 필리핀에서의 상호지배를 인정한 식민지 제국주의 치하의 미 국무부에 엉뚱하게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구걸한 사대주의자다.(박용만의 하와이 독립운동단체 재산을 통째로 먹으려고 사기치다 박용만과 멱살드잡이한 일도 있다(박용만 가문은 대표적 독립운동가 가족으로 3형제가 모두 무장항쟁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생각해 보라 베트콩이 무장항쟁주의를 하여 오늘날의 월남이 되었지 이승만처럼 외교를 해서 나라를 세웠나? 베트콩이 통일 베트남을 위해 싸운것은 지구촌 제1의 패권국가 미국과 귀신잡는 해병으로 유명한 따이한이었다. 그들은 국력으로는 1000년을 가도 따이한과 미국을 잡을 수 없었지만 정신력 하나로 베트남을 통일로 이끌어냈다.(수준이 모자라는 어떤 덜떨어진 얼간이 하나가  베트콩 월맹(월남)을 예로 들었다 하여 필자를 전라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정치이데올로기성 협박 이멜을 보내왔다) 이승만처럼 제국주의 치하에서 말도 안되는 외교로 승부를 본 것이 결코 아니었다.) 헌법전문에 3.1정신과 반 이승만 정신인 4.19정신을 계승한다 했지 이승만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은 없다. 이승만은 오히려 임정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무장항쟁주의 독립노선을 방해하여 외교노선으로 당시로서는 황금 자금줄인 미주의 독립자금원을 차단했고 해방이후 미군정의 시다바리로 김구마저 암살했다


그런데 막상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을 독립시켜주겠다는 선언을 명문화하게 만든 것은 누구였는가. 외교론을 주장한 이승만의 공로인가. 그의 공로로 우리 대한민국이 독립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나? 아니다. 바로 이봉창의거 윤봉길 홍코우 공원 의거를 보고 일본 제국주의가 간담이 서늘해 진 것을 본 장개석이 6억 중국인민도 못 이룬 쾌거를 2000만의 조선민중이 이룬 것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김구를 흠모하게 되어 김구주석에게 대한독립의 명문화를 약속한 것이고 장개석은 충칭(중경)으로 도망갔을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같이 따라오게 배려하여 중경 임정시대가 열렸다.

조선일보는 때만 되면 친미 사대주의자 서재필을 이승만의 스승이라 하여 추켜 세우고친일 매판자본가 출신의 송진우 장덕수Click here! 등까지도 애국자로 왜곡하는 신문이다.서재필은 독립신문마저 팔아치우려 했던 자다. 단재 신채호는 그랬다. 독립운동이라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 무산자와  나라를 뺏은 일제 유산자와의 투쟁이라고 그런데 일제하에서 유산자로 해외로 나가 박사를 받았다면(이승만의 오른팔 장덕수:에딘버러대 등) 그건 일제에 붙어 협력한 친일 매판자본가라고 일축했다.

실제 인촌 김성수의 소위 한민당 떨거지들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기 바로 직전 오끼나와 미군기지에게 일제가 무사히 귀국하는 과정에서 일제를 지켜줄 친일 인사로 명단을 작성해 과도정부 행정내각의 명단의 장본인들이었다. 왜냐고? 그들은 조선총독부와 협조 공생관계를 유지하여 친일의 온갖 단물을 빨며 온갖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취한 친일주구, 소위 친일매판 자본가로 자리잡았기때문이었다.

친일이라는 범주에 줄서있는 조중동보다야 한겨레가 훨씬 낫다. 친일 수구가 판치는 곳에 새로운 국민주 형태의 대안 언론 한겨레가 나온 것은 수구파들의 문제제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를 비판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정치적인 입장을 내세우지만 개인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친일의 가정적 뿌리를 가진 자라 아니할 수 없다.  

조동중을 끼고돌며 한나라당과 한 패를 이루었던 친일 수구파들이 이제는 시민사회단체 속에 끼어들어가 시민운동을 가장하고 앤티조선을 반대하고 있다.바른사회 시민회의가 명계남 문성근의 인터넷 시민운동을 조폭운동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당시 장안에서 최고의 인기주가를 자랑하던 애국지사 최능진은 동대문구에서 이승만과 같이 출마했다. 그는 이승만의 국회진출이 어렵게 되자 단독출마를 희망하는 이승만 측근에 의해 제거되어 이승만 치하 사법살인1호로 기록된다. 2호는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반대하여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죽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3호 사법살인은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다. 최능진은 친일비호 거두 해방후 친일비호 이승만 아래서 충성을 한 친일경찰 비호세력 장택상과 조병옥과 싸우다 제거되었다.

조병옥이 같은 친일세력 비호세력으로 있다가 이승만의 장기독재에 들고 일어나 민주당을 세우고 대통령후보로 있다 죽은일이 그리 장한 일은 못된다.(이승만에게 정확히는 김창룡 휘하 특무대 CIC 3총사에게 독살되었다) 게다가 민주당 계보의 박순천, 장면 등이 모두 친일파였다. 독립촉성회 당을 이끈 이승만이 손잡은 친일 매판 모리배가 바로 인촌 김성수의 한민당이다.

한민당은 일제가 안전귀국을 위해 일본의 오끼나와 맥아더 사령부에 일본인의 안전귀국을 담보할 믿을만한 친일인사로 지적해 내민 조선 총독부의 과도적 행정내각 인사였다) 단재는 독립운동은 무산자 조선인민과 유산자 일제 착취자와의 싸움이었으니 일제하 단물을 빨며 기업을 키우고 세력을 점한 자는 일제와 협조공생관계에 있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다 하였다. 역사는 분명한 선이 있어야 한다.

한나라당은 일제매판자본이 키운 재벌옹호당이고 조중동과 삼성을 비롯한 수많은 재벌과 혼맥을 공유한 더러운 피를 가진 집단이다. 그러니 친일진상규명 특별법을 사생결단하고 막을 수밖에 없다.(안원전21세기담론)

*참고 친일 재벌의 경제 공과는 역사적 관점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본 사이트는 역사적 관점이라는 원론적 측면에서 조명한 것이다. 역사적 관점과 평가는 실용주의적 측면인 경제적 측면과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령 친일 매판재본이 친일 청산이 안된 상황에서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의 경제성장의 발판노릇을 해왔다 하여 친일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신 자유주의 이론에 의한 국제 투기자본에 대항하는 측면에서 민족자본이라 편입시켜줄 수 있다. 전경련 산하 모 경제문제연구소에서 친일매판자본의 하나인 한국의 재벌자본이 신자유주의적 약탈자본(투기자본)에 맞서는 민족자본이라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틀린 말이 아니다. 이는 가족과 마을 도시 국가 세계로 업그레이드되어 나아갈때 에스칼레이팅되는 아와 비아의 자연스런 가름원리이다. 이런 원리로 보면 친일문제와 남북의 이념문제는  한일간의 이민족 문제와 남북 동족문제라는 점에서 작은 차원은 큰차원 앞에 하나가 되고 작은 차원은 큰 차원 앞에 양보된다는 원리 앞에서 친일 청산문제는 남북의 이념문제 즉 반공문제보다 우선시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부싸움도 옆집과 다툼이 있게 되면 부부가 일치되어 나서는것과 같다. 친일청산문제가 나올때마다 이념전으로 뒷다리를 걸고 친일진상규명법 제정문제가 나올때마다 좌익문제를 걸고 넘어지는건 친일파를 비호한 이승만에 의해 친일청산을 하지못한 이시대 한민족의 최대 아이러니와 최고의 희극이다. 더욱이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의 주역인 김희선 의원의 흠집을 내려는 조중동에 의한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타겟보도는 친일수구들의 가장 추악하고 악질적인 물귀신작전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앙정보부 창립멤버 조웅 목사의 현대사 X파일 ;백범 살해 사건에 개입된 이승만 정권 권력 실세들이‘비밀 유지’를 위해 김창룡, 이기붕의 지시를 받는 암살 공작단 3인방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가공할 주장이 나왔다. 채병덕,장은산, 신성모, 이기붕일가가 이들에 의해 살해됐다는 것./김지형(민족21 기자) “대통령 후보 신익희 조병옥도 이승만 정권‘암살 청부업자들’에 살해당했다” 조웅목사의 현대사 증언 2탄 역시 이승만 정권기 ‘암살커넥션’이다. 이승만과 맞섰던 역대 대통령 후보들인 신익희, 조병옥과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최능진, 이용문 등도 이승만 정권에게 살해 당했다는 가공할 주장이 또다시 조 목사의 입에서 나왔다. 게다가 이승만 암살미수사건, 장면 저격사건, 서민호 총격사건 등도 이른바 CIC 삼총사가 일으킨 자체 조작사건 또는 배후 조종사건이라는 주장이다.
* 중앙정보부 창립멤버 조웅 목사의 현대사 X파일(1)-백범 암살 배후 신성모, 채병덕, 장은산, 이기붕 일가 이승만 정권‘암살 청부업자’에 살해됐다  Click here!
*중앙정보부 창립멤버 조웅 목사의 현대사 X파일(2)-대통령 후보 신익희 조병옥,최능진도 이승만 정권‘암살 청부업자들’에 살해당했다 Click here!
* 중앙정보부창립멤버조웅(본명 조병규)목사의현대사X 파일3탄->“나는 왜 황태성 사건을 미국에 고발했나?” Click here!


조웅 목사는 본지 2 0 0 2년 1 2월호를 통해 이승만 정권이 암살 청부업자들을 동원해 백범살해사건에 개입된 신성모 채병덕 장은산 이기붕일가 등을 보복살해 했다는 주장을 편 바있다.그 후 다시 만난 조웅목사.그는 이번에도 이른바‘이승만 정권기 암살커넥션’과 관련해 또 다시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털어 놓았다.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등도 암살청부업자들에게 희생됐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첫 증언때와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기 방첩대(CIC) 3총사라고 불리던 최0, 조00, 엄0 0의 증언에 기초한 것이다.열차안 판매원 매수, 해공 독살-해공은 1 9 5 6년 제3대 대통령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 선거 유세차 호남으로 향하던 중 열차안에서 돌연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한 조목사의 주장이다.“경무대(현 청와대) 비서실장 이기붕이 엄0 0과 최 0을 통해 김지웅으로 하여금 해공선생을 제거토록 한 것입니다. 이 세사람은 해공이 탄 열차에 같이 있었습니다. 엄과 최가 김지웅을 시켜 열차안에서 먹을 것을 파는 장사꾼을 매수해서 해공에게 독을 탄 물을 마시게 하는 수법으로 암살했습니다.”

19 5 6년 제3대대통령선거후보로 출마했던 해공신익희가 급서, 국민장으로장래식을치르는장면.

충격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해공이 독살당했다는 주장이 새로운 건 아니다. 해공 사망 직후 학생들을 비롯한 해공의 지지자들이 경무대 앞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후 이들은‘5·5동지회(회장 유치송)’를 결성해 활동해 왔다. 사건 직후 해공이 독살 당했다는 입소문이 퍼지기도 했지만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껏 사망원인이 뇌일혈이라는 둥 심장마비라는 둥 분분한 상태다. 계속되는 조목사의 설명이다.“해공이 죽은 때가 5월인데 그렇게 더울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해공의 부인에 따르면 이틀만에 창자가 완전히 썩었다는 거예요. 독약을 마셨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겁니다.”

조목사의 주장은 해공의 사인과 관련해 새로운 논란을 불러 일으킬 만하다. 특히‘암살’의 배후인물과 실행자를 명확히 하고 있는 점이 새롭다. 그렇다면 그가 밝힌 실행자라는‘김지웅’은 어떤 인물인가.김지웅은 평북 용천 출신으로 일제시기 만주 관동군의 헌병 통역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후 귀국하여 왕금산장군을 자처하면서 고급 정보 브로커 노릇을 하던 자로서 실체가 모호한 인물이다. 극우 성향의 반공주의자인 그는 이승만 정권기 굵직한 시국사건에 연루된 인물로 묘사돼 왔다. 다만 백범 암살사건의 각본을 짠 인물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의혹 속에 가려진 정치 브로커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자가 해공 암살의 실행자라는 주장은 처음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 이기붕과CIC 삼총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조 목사가 폭로하는 암살 커넥션의 또 다른 희생자는 조병옥이다. 이승만 시절 내무장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1 9 5 4년 야당인 민주당을 조직하면서이승만의 정적으로 급부상한 유석 조병옥.


[빗속에치러진 조병옥의 장례식 장면]

1 9 6 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여 자유당 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대결하던 중 신병치료차 미국 월터리드육군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으나 그해 2월 1 5일 월터리드 병원에서 운명했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암살 청부업자들의 손길이 미쳤다니.

“조병옥이 병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갈때 엄0 0의 진두지휘 하에 김지웅을 비롯해 4∼5명이 갔다고 해요. 여성도 한 명 동행했다고 합디다. 월터리드 병원에서 일하는 흑인 여성 한 명을 돈으로 매수해서 수술 후 경과가 좋았다고 하는 조병옥을 암살한 거죠. 김지웅은 일본어와 중국어는 물론 영어도 능통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엄0 0에게 직접들은 이야기입니다.”

이승만이 출마한 대통령 선거전에 야당후보로 대결한 신익희, 조병옥 등이 모두 이승만 정권의 암살 청부업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능진도 우리 손에서 보냈다”최능진Click here!

조웅 목사는 이승만의 정적들이 비명횡사한 또 다른 사례로서 최능진을 들었다. 이른바 CIC 삼총사가“최능진도 우리손에서 보냈다”라고 실토했다는 것이다. 일석 최능진. 평남 출신인 그는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에 참여했다.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 치안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곧 월남해 미군정 산하 경무국수사과장으로 경찰계에 입문한 후‘친일경찰청산’에 발벗고 나섰다. 그러나 그의 경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경찰책임자인 조병옥,장택상 등과 친일경찰 청산문제로 대립한 후 옷을 벗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승만과 대립한 것은 이 때만이 아니다. 1948년 5·10 단독선거가 강행되자 최능진은 이승만의 정권 장악을 염려, 그가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극우 친위대 노릇을 하던 서북청년단 소속의 괴한들에게 입후보 관련서류를 탈취 당해 좌절됐다. 결국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되고 말았다.

이 때문이었을까. 정부수립 후 한 달 보름만에 그는 이른바‘인민해방군사건’에 연루돼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러나 1 9 5 0년 6·25 전쟁이 나자 극적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유엔군의 서울점령 후 서서히 정계인사들과 만나던 그는 그 해 1 1월 다시 구속됐다.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였던 군경검 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의 지시에 따른 결과였다. 군사법정에서는 사형을 선고, 전쟁이 한창이던 1 9 5 1년 2월 운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조 목사에 따르면 이렇게 희생된 최능진이 바로 김창룡의 심복들이던 CIC 삼총사의‘손에서’나온 결과였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6·25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 9 5 3년 6월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사망한 이용문장군도 음모에 의한 암살사건이라는 게 조웅 목사의 주장이다. 이용문은 현 한나라당 이건개 의원의 부친이다. 6·25 당시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직속 작전국장이던 이용문은 1 9 5 2년 이승만을 몰아내기 위한 미국 주도의 쿠데타를 계획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 목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부산정치파동’당시 이승만이 이종찬에게 계엄선포를 위해 병력 동원을 요구했으나 전시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이 일로 이종찬은 무릎을 꿇은 채 이승만에게 사표를 내야 했어요. 이종찬 밑에 있던 정보국장 김종평 장군은 이 때의 일로 생식기를 못쓰게 될 정도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용문도 작전참모부에서 강등당해 남원에 주둔하던 남쪽경비사령부(남경사)로 배치돼 공비토벌 사령관임무를 맡아 사지로 내몰렸죠. 이승만 정권은 이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회의를 소집해 놓고 삼총사를 동원해서 그가 탈헬리콥터기장을 매수해 휘발유를 적게 넣은 채 비행하다가 고의로 추락사고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 역시 삼총사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장면 암살 미수의 배후 최훈 = 삼총사 일원 최 0?

이 뿐만이 아니다. 이승만정권기 크고 작은 암살미수사건에 CIC 삼총사가 관여 돼 있다는 주장이다. 1952년 이승만 암살미수사건도 최 0 등 삼총사가 관련된 자체조작사건이라는 것이다. 6·25 2주년 기념식장에 참석한 이승만은 항일 독립운동단체의 열단 출신인 나재하의 권총 세례를 받았다. 이승만 등 뒤 2미터 거리에서 방아쇠를 당겼지만 무슨 일인지‘찰칵’하는 소리만 난 채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또 한번 방아쇠를 당겼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발이었다.

나재하는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이후 또 한명의 공범이 드러났는데 역시 독립운동가출신인 김시현 옹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 조사 결과 나이 일흔살을 넘긴 김시현옹이 권총을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 목사에 따르면 최모 등 삼총사가 김시현 옹에게 권총과 총알을 건넸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왜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총알이 발사됐다면 큰일나는 것 아닙니까? 최 0이 이들과 접촉해서 한 달 동안 물에 담궈둔 권총알을 제공해 고의로 불발사건을 일으키고 이승만권력을 한층강화하는데 이용한것이죠.”

조목사는 최 0, 엄0 0이“그 사건은 쇼였으며, 우리 손에 한 번 들어오면 꼼짝 못한다”고 했다는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사건으로 삼총사의 직속 상관인 김창룡은 별은 하나더 달았다고 하면서 자기들끼리 논공행상을 하더라는 것이다. 1 9 5 6년 당시 부통령이던 운석 장면저격사건의 배후에도 삼총사가 있었다고 한다. 고령의 이승만이 유고시, 승계권을 갖고 있던 장면을 부담스럽게 여긴 이승만측근들이 삼총사를 움직여 암살을 기도한 사건이라는 얘기다.

“삼총사중 한 명인 엄0 0에 따르면 운석에게 시공관행사(민주당전당대회)에‘나가지말라’는 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운석이 우리말까지도 안 들었다’는 얘기를 했어요. 그 사건은 중부경찰서경위가 총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또 자금은 임흥순이 댔다는 거예요. 이익흥 내무장관, 김종원 치안국장도 관련이 있답니다. 엄 0 0은‘총알이 손에 맞은 게 다행’이라는 얘기를 하더군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암살범김상붕이쏜총에맞은장면부통령

장면 저격사건(담당 검사 이홍규)의 범인은 이북출신의 김상붕이었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처음에는 단독범행을 주장하다가 경찰이 약속과는 달리 자신을 용공 혐의자로 몰고 가려하자 이기붕 부통령, 이익흥 내무장관, 김종원 치안국장, 이기붕의 최측근 임흥순으로 이어지는 배후세력을 털어 놓아 경악시켰다.

조목사가 전하는 엄0 0의 증언은 지난 1 9 9 8년 M B C의 8·15 특집물〈잃어버린 공화국 - 장면과 민주주의〉에서 인터뷰한 범인의 증언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1 5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그는“자유당 비밀당원 최훈을 통해 접선되었는데 최훈의 배후에 자유당 정책위원이며 자유당내 강경파의 일원으로 이기붕의 측근이던 임흥순이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따라서 그의 증언으로 볼 때‘자유당의 비밀당원 최훈’은 바로 조 목사가 주장하는 삼총사의 일원인 최모일 가능성이 짙다.

“독재자의 이용물이 된 딱한 청년”

이밖에 1 9 5 2년 4월 발생한 서민호의원 총격사건도 삼총사의 공작에 따른 결과라는 주장이다. 월파 서민호는 일제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바 있는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사건당시 그는 제2대 국회의원이자 내무분과장으로 있으면서 전쟁기 발생한 국군에의한 거창 양민학살사건과 제2 국민병으로 조직된 수십만의 국민방위군을 기아와 동상으로 희생시킨사건을 집중성토함으로써 당시 이승만 정권의‘눈에 가시’와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해 추진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앞장서서 반대한 인물로서 그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반감은 극에 달했다는 평가다.

그러던 차에 그가 우연히 말다툼 중에서 창선 대위를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서대위가 먼저 쏘자 다급해진 서 의원이 피하면서 소지하고 있던 모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 사건으로 ‘정당방위’라는말이 널리유행하게 됐다. 월파는 훗날《이래서 되겠는가》(1970, 환문사)라는 책에서 그때의 사건을 소상히 회상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사고당일 부산에서 순천으로 내려갈 때부터 괴한들이 미행하기 시작했으며 순천에 도착한 후 급기야밤중에 군인복장을 한사람등이 찾아와 자신의 일행과 일부러 말다툼을 하면서“서민호나오라. 쏜다”고 악을쓰며 권총을 빼들고 설쳤다는 것.

바로 그 순간 월파는‘저들이야 말로 나를 여태껏 미행해 온 계획적인 공작대원일 것’이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그의 예감은 결국 사람이 죽는 커다란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는 회고록에 서서 창선대위에 대해 언급하며“독재자의 이용물이 된 딱한 청년”으로 묘사했다. 사건 당시부터 배후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조웅 목사는 이 사건이 바로“삼총사가 서창선을 배후에서 조종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삼총사와 서창선이 어떤 관계이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후조종을 한 것인지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증언은 없었다.

아직까지 서민호총격 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번 증언은 그 배후의 단초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묘한 정국 하에서 발생한 돌출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의혹을 남긴 사건이지만 반세기가 지나서야 사건의 진상을 캘 실마리를 잡았다는 점에서 의미는 적지 않은 듯하다. 조 목사가 전하는 이승만정권의 암살 커넥션,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현대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승만의 핵심측근이던 이기붕과 김창룡의 사주에 따라 움직인 암살청부업자들이 야당대통령후보들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승만의 정적들을 제거 했다니…과연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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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다음 글을 보면 지금의 급변하는 세계가 얼마나 약육강식의 세계인지 올바로 알고 자신의 역사혼을 바로 정립해야 하는지 새삼 알 수 있다. 지구상에서 전후청산을 가장 잘 한 프랑스가 정작 인종편견이 가장 심한 여론조사가 나오고(국민 60%이상이 스스로 인종편견을 한다고 고백) 132년간 알제리를 식민통치한 것에 대해서는 국민 대다수가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는 여론조사를 발표했기때문이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인권을 무기로 삼는 현재의 인권국가 미국이 정작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무력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지구상 제일의 패권주의적 일방주의 국가로 군림하고 있으며 과거 군국주의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 제국주의 시절 일제와 악수해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원죄로 한국인 위안부 사건이 터져나올때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프랑스인 55% "알제리에 사죄할 필요 없어"
-한편, 대다수의 프랑스인(55%)은 132년에 걸친 식민정책에 대해 프랑스가 알제리에 공식적으로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여론조사기관 CSA가 일간지 라프로방스(La Provence)를 위해 지난 10월 15일과 16일 양일간 18세 이상의 프랑스인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이다.프랑스가 알제리에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해야 한다고 평가한 프랑스인이 37%이고 55%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또 43%의 응답자는 1830년에서 1962년까지 132년간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했을 당시, 알제리 상황이 더 나았다고 대답했으며 36%는 알제리 독립 이후가 더 낫다고 했으나 21%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인 10명 중 7명(66%)은 알제리 전쟁이 속 시원히 해명되지는 않았다고 했으며 반대 의견은 23%에 불과했다. 이밖에 68%의 응답자는 알제리전쟁 이
후 아르키에 대한 프랑스의 태도가 부당했다고 평가했으며, 정당했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2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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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국회의장은 제막식사에서 "새 시대, 새 천년, 새 출발의 정치를 열망하는 국민의 기대와 외침이 무겁게 우리를 누르고 있는 이 의사당에 우남 이승만 박사와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을 모시게 되니 만감이 교차하고 부끄러움이 앞서게 된다"며 "이 땅에 민주헌정사와 함께 의회 민주주의가 펼쳐진지 52년에 걸친 역사의 곡절 끝에 비로소 두 분의 동상을 제막하게 되니 그 크나큰 족적 앞에 머뭇거린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탓하게 된다"고 서두를 열었다.  박 의장은 이어 이승만 박사에 대해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해방 후에는 제헌 국회의장으로서 척박한 이 땅에 의회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셨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국기를 세우고 건국의 기초를 닦으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박 의장은 또 이승만 박사 동상 건립을 반대하는  일부 여론을 의식, "우리 민족의 유별난 자책감과 자기비하증을 버릴 때"라며 "역사와  후손들을 위해 대한민국 건립과  성장과정에 대한 자긍심 및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긍지를 소중히 간직하자"고 역설했다.
이승만 동상 국회 건립을 찬양미화한 반 4.19, 반헌법 정신의 골빈 박준규 사진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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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살아생전 자신의 우상화 일환으로 북한의 김일성 동상보다 더 큰 81척(8층빌딩높이) 세계제일의 동상을 세운 미친 늙은이 우남 이승만 기록을 보라.

  

김일성 주체탑과 그보다 더 큰 남산의 81척 높이의 이승만 동상.4.19의거에 의해 남산에서 밧줄로 동여매어 끌어내려지는 아주 귀중한 사진(당시 파고다 공원과 남산의 이승만 동상이 밧줄로 끌어내려져 밧줄로 묶여져 질질 끌려 다녔다). 이 사진에는 <*33-2 무너지는 독재 권력 남산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이승만대통령 동상이 4.19 이후 철거되고 있다.>고 설명되어있다(하 왼쪽)4·19항쟁 당시 시위군중에 의해 이승만 동상이 넘어지고 말았다.(하 오른쪽)
(『김천길 사진집』에서) 김일성 주체탑은 56년에 이승만이 남산에 세운 자신의 81척(7,8층 높이) 동상보다도 낮은 동상이다 신경림은 "별"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부른다. -죽산(조봉암)이 목매달리던 날 나는 울면서 한 편의 시를 썼다. 남산의 이승만 동상이 밧줄에 묶여 거꾸러지던 날 나는 환호작약하며 대취했다-  이승만의 동상은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는 신궁이 있었던 서울 남산 중턱에 당시 돈 3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총 높이 25m에, 상 높이만 7m가 되는 큰 규모로 세워졌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조각가 윤효중(창씨명 伊東孝重)으로 그는 당시 '미술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4.19에 의해 이렇게 끌어내려진 부패, 무능, 독재의 상징이 4.19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헌법하의 국회에 목요상을 위시한 넋빠지고 혼빠진 국회의원들이 다시 시대역행적 이승만 동상을 만들어 안치했다. 반 헌법적 작태임은 말 할 것 없으니 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의 위촉과 축사는 역사를 두고두고 비난받아 마땅하다.(안원전)
-우리나라 현대사의 두 인물이었던 김구 선생과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을 비교해 보면 대조적이다. 현실 정치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승자요, 김구 선생이 패자였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임 때 남산 팔각정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또 지폐에다 당신의 초상까지 새겼지만 4·19 혁명 후 당신의 동상은 쇠사슬에 묶여 종로 을지로 네거리에 끌려 다녔고, 지폐는 곧 다른 인물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백범 선생은 이 대통령 사후에 남산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지금도 참배하는 이가 줄을 잇고 있다. 백범 선생의 초상에서는 순박하고 인자한 모습이 마치 조선의 무명천이나 투박하고도 담박한 백자를 떠오르게 하는 데 견주어, 이 대통령의 초상에서는 어딘가 탐욕스럽고 노회(老獪)하며 질이 낮은 외국산 도자기와 같은 천박함이 풍긴다.-(오마이뉴스 박도 기자)원문Click here!



일제 때의 남산 조선신궁 자리에는 1956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이승만대통령(李承晩大統領)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 동상은 1955년 이승만 81회 생일을 기념하여 기공 건립한 것으로 신장 23.5척과 축대의 높이를 합한 높이가 81척에 달하는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동상으로 알려졌다. 또 1959년 가을에는 남산 상봉에 시민들의 휴식소와 관광명소가 되는 건평 40평의 새 정자를 짓고 이름을 「우남정(雩南亭)」이라 하였다

조흥은행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조흥 백년 숨은 이야기>(1997)라는 책자에는 남산공원의 이승만 동상건립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를 담고 있었다.말인즉슨 이승만 동상은 처음부터 '외상'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이었고, 그 돈은 전국극장연합회가 극장관람객들에게 조금씩 부과하여 충당하려고 계획했던 모양인데, 뜻밖에 4·19를 겪는 바람에 그 돈은 결국 권력의 몰락과 더불어 부도 처리 되고 말았다는 사연이었다.

<조흥 백년 숨은 이야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하고 있던 1956년 봄 국무원 사무국에서는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안건을 하나 의결하였다. 그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제 80회 탄신을 경축하기 위하여 경축 중앙위원회를 창설하고 위원장에 이기붕 씨를 추대한 것이었다.이 경축 중앙위원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을 경축하는 경축금 3억환을 상납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전국 극장연합회를 조직하고 각 극장 입장객으로부터 10환 내지 20환을 더 거두어 경축금을 조성하기로 하였다. 입장권이 2백 환 미만이면 10환을 더 걷고, 200백 환 이상이면 20환을 더 걷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축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당장 현금이 필요했고 이 금액을 다 거둘 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우선 우리은행을 비롯한 4개 은행에서 먼저 대출을 받아 충당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시내 4개 은행이 모두 이 대출에 참여했던 관계로 불가피하게 이 대출을 취급하게 된 우리 은행(즉 조흥은행)은 탄신경축 중앙위원회 이기붕 위원장을 채무자로 하고 극장연합회 간부 임화수를 비롯한 4명을 보증인으로 입보케 한 후 다른 은행과 함께 3억 환을 대출해 주었던 것이다.그 후 1959년 4월까지는 전국 각 극장에서 거둔 수입금으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갔으나 1960년 4·19가 일어났고, 4월 26일 이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자 원금 및 이자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1960년 11월 24일에는 우리 은행을 비롯한 4개 은행이 652만 5944환의 연체 대출금을 안게 되었다.

이에 우리 은행은 연체대출금 상환을 각 극장에 요구하였으나 전국의 각 극장은 이에 응하지를 않았고 결국 임화수를 비롯한 4명의 보증인에게 대출금 상환 청구소송을 내게 되었던 것이다.당시 3억 환의 용도는 1959년 7월25일 전국 극장연합회가 이기붕위원장에 보낸 경축금염출 종료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이 보고서에 이승만 대통령 동상건립 기금으로 이 돈을 모았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 은행은 이 소송에서 일부 승소하였으나, 임화수는 물론 백운성도 압류할 만한 재산이 없어서 실익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순우

권력유착의 극치, 이승만 동상-리가원 <김창숙의 이승만 동상가를 차운하여>

-하늘이 남산을 내실 제는 사사로운 소유가 아니었으니, 백성을 모두 바라볼 제 바위와 바위로 덮였어라. 화강암 덩어리를 붙여서, 이 가까운 곳에 세워 놓고 서울을 온통 위압케 하였는가? 구리로 부어 만든 스물세 척 커다란 몸, 큰 비용과 공병의 힘 휘둘러가며 이루었네.스스로 공명한 당의 대두령이라고 하는 사람이,개돼지를 충동질하여 높은 덕인 듯 찬양케 했네.이로부터 바람에 마비된 늙은 여우의 동상. 삼 억이나 되는 나랏돈 헛되이 써 버려 말리었네.(중략) 이는 곧 구리 몸이요 생살로 된 몸이 아니니,늙은 도적놈을 찾아내라고 우리들 허정에게 외쳤네. 찾아도 잡지 못하자 분한 마음 더욱 뜨거워 구리 몸을 끌어내려 마음대로 깨뜨렸네. (생략)-
송우(Columnist & Ghostwrit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때의 권세(權勢)와 영광(榮光)을 영원히 기리려고 만들어 놓았다가 망치를 맞아 망가지고 자빠지는 기념비와 비석과 동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란공원에 세워진 '김재규장군묘'가 그렇고, 강원도 홍천 팔봉산 아래에 세워진 '전두환대통령공적비'가 그렇고, 서울 남산 공원에 세워졌던 '이승만대통령'의 동상이 그랬다. 이승만의 동상은 이승만이 대통령에 재직 중일 때는 남산 위에 우뚝 서 있었으나, 4.19가 나자 시민 학생들이 '모가지를 동아줄에 묶어 종로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는 수모까지 겪었다. 권력이 무엇인지, 인심(人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사건들이다."

 
-앞의 시는 1957년 8월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여든 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세워졌던 동상이 1960년 4ㆍ19혁명 직후 철거되고 독재자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깨뜨려져 끌려다니던 광경을 그린 것이다. 이승만의 동상은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는 신궁이 있었던 서울 남산 중턱에 당시 돈 3억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총 높이 25m에, 상 높이만 7m가 되는 큰 규모로 세워졌다. 이것을 만든 사람은 조각가 윤효중(창씨명 伊東孝重)으로 그는 당시 '미술계의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부산으로 수도를 임시로 옮긴 직후 진해에 설치하기로 한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작이 경쟁 끝에 그에게 맡겨졌고, 그는 이를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상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이순신 동상 제작 또한 전란에 처해 있던 때였던 점과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 때문에 일반에게 동상의 위력을 인식시킨 첫 사례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미술계의 영웅"이 되었던 것이다.(최석태)-


윤효중 1941, 42, 43, 44 조선미술전람회에 네 번 연속 특전 1954 국전 심사위원,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 1955 예술원 회원 해방 이후 이순신 동상, 이승만 동상, 민영환 동상 등 다수의 동상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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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승만 기념사업회 임원진Click here!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과 정희경 및 위원인 전 연대 총장 송자. 현재 (사)건국대통령 리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에는 중앙일보사 홍석현(洪 錫炫)이 맡고있고 부회장 전 현대고 교장 鄭喜卿이 맡고 있 다. 역시 조중동의 한계를 벗지 못함을 알 수 있고 한국의 수구집단이 얼마나 두터운지 알 수 있다. 홍석현과 정희경이 역사관이 정립되지 못한 것은 언급할 것도 없지만 송자는 필자와 같은 대전고 동문으로 교육부 장관에 올랐으나 이중국적 문제와 리프팅 시비로 물러난 양심이 비뚤어진 인물이며 역사관이 채 정립되지 못한 덜떨어진 인물이다. 더욱이 국회에서 이승만 동상 건립 문제가 통과하는데 찬성표를 던진 어준선, 김범명 의원이 대전고 동문이라는 사실에 대해 더욱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낀다.*홍석현의 이승만관과 그 인연Click here! *홍석현Click here!
*정희경1Click here! *정희경2Click here!*홍석현Click here!  *정희경3Click here!*정희경4Click here!*정희경 한겨레 비리보도맨아래 참고 자료 Click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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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이승만이 나라를 세웠다고?"
  언젠가, 모 신문사에서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라는 제목으로 특집 기사와 전시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그 신문의 언급처럼 그는 정말(법정에 선 두 전임 대통령과는 구별되는) 위대한 대통령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즉 해방 50년을 맞이해 최근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는 이승만 되살리기 운동은 결코 '역사를 바로 아는 행위'가 아닌, 4월 혁명 정신을 모독하고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 놓으려는 망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럼 이승만의 독립 투쟁과 대통령으로서의 행적을 요약해 살펴보고, 그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려보도록 하자.

1. 독립운동을 분열시킨 이승만(1908년∼1940년대)
   1908년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동포 전명운, 장인환 의사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유학생 이승만은 그 재판의 통역을 요청받았지만, '살인재판'의 통역은 원치 않는다며 이를 거절했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마저 '살인행위'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1918년 말부터 1924년까지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을 빼고는 1930년대 말까지 독립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 상해 임시정부와도 자주 맞서고 했는데, 미국에 안주한 후에는 무력투쟁, 義烈투쟁은 반대하고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열강의 호의에 의존하는 외교활동에만 주력했다.
   또한 이승만은 가는곳 마다 독립운동을 분열시켜 '이승만 가는 곳에 민족분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파싸움을 심하게 벌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자금을 가로챘다는 비난을 수없이 듣기도 했다. 결국 이승만은 그후 임시정부의 탄핵으로 물러나게 된다.

2. 해방정국과 친일·민족분열 노선
   이승만은 해방된 지 두달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 귀국하여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정부를 멀리하면서, 지주·친일파를 대변하는 한민당과 짜고 친일경찰을 앞세워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진다. 그 후 대통령이 된 후에도 친일파 제거를 계속 반대했으며 친일파 처단은 민심만 혼란시키고 오히려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친일파 처단을 위해 설치된 반민특위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질적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을 체포하자 이승만은 즉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고, 급기야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1949년 6월 26일, 친일파 제거와 자주통일을 외치던 민족의 지도자 김구선생이 이승만의 심복들의 조종을 받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암살범 안두희는 전쟁때 곧 석방되어 진급을 거듭하고 부호가 되었다고 하니, 과연 누가 사주했는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다 하겠다.

3. 반민주적 독재·타락정치와 한국전쟁
   1948년 국가보안법이 공포됨으로써 이승만은 자주적 통일운동에 쐐기를 박고 분단체제를 강화하면서 정적이나 비판자들 까지도 빨갱이로 몰아 처형하게 된다. 그 대표적 인물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 두차례 대통령선거에서 차점자가 되었다가 처형당한 조봉암 진보당 위원장이었다.
   1949년에는 국회가 농민위주의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자 이승만은 이를 되돌려 보내 토지 상환액을 상향조정하는 반농지개혁법을 마련한다. 이외에도 국민방위군 사건과 중석불 사건 등을 통해 빽과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되는 일 없는 위대한(?) '빽의 나라' "사바사바의 나라'를 건설하게 된다.
  또한 1950년 평소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6월 27일 새벽, 혼자서만 몰래 대전으로 도망간 뒤 서울 시민에게는 '안심하고 있으라'는 녹음 방송을 거듭한 후, 6월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를 폭파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등 무책임하고 반인간적인 행동을 저지른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4. 정권욕과 독재정치의 말로
   국회의원들을 물리력으로 탄압한 52년 부산정치파동이 있고난 후, 이승만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절충했다는 발췌개헌안을 내놓고 국회의원들을 국회에 감금한 후 그 해 7월 4일 기립투표로 통과시킨다. .
   이어 이승만의 대통령 3선출마를 청원하는 牛義馬義까지 동원한 대규모 민의 조작운동 끝에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그러나 극심한 관권 타락선거였음에도 이승만은 생각만큼 많은 표를 얻지 못한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승만의 득표가 선거유세 중에 사망한 민주당 후보 신익희 보다 훨씬 적게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부패 독재 정치를 거듭한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15일, 상상을 초월한 최악의 부정선거를 저지른 끝에 드디어 4월혁명으로 타도되어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된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결국 이승만은 반민족·반민주적 독재자의 전형이었을 뿐, 언론에서 떠들고 또 순회 전시회를 할만큼 존경스런 대통령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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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초대대통령 이승만에 대해서 평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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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국회운영위, '의회지도자상 건립안' 심의 의결

국회운영위, '의회지도자상 건립안' 심의 의결  
국회 운영위원회는 26일 전체회의를 열어 제헌국회의 의장과 부의장을 각각 지낸 이승만 전 대통령과 신익희 박사의 동상을 국회에 건립하는 내용을 골자로한 "의회지도자상 건립안"을 심의 의결했다. 운영위는 우선적으로 사망후 20년이 경과한 의회지도자 가운데 이 전 대통령과 신 박사를 동상건립 대상자로 선정해 국회 경내에 입상 또는 좌상으로 동상을 세우기로 의결했다. 또 제헌국회 의원을 지낸 장면 전 총리,3.4대 민의원을 역임한 조병옥 박사, 4.5대 민의원이었던 박순천 여사도 동상건립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동상건립 자문위원들의 추천이 있을 경우에 적극 추진키로 했다. 정태웅 기자 redael@ked.co.kr  
한국경제신문   1999-11-26 14: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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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내가 일제시대를 살았고...망명해서 독립운동을 하고...아직 조국이 해방되지는 않았지만...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감투 한자리 하거나 어떤 보상을 바란다면 잘못된 생각일까?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바꿔 말하면 독립운동을 한 이들에 대한 보상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의 일생의 3/4를 평하자면... 꾸준히 반일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임에는 틀림없다. 비록 그 행동이 그 자신만의 권력을 위한 발로였을지라도 말이다.사실 그가 임시정부에 몸담고 있었을 때도...그 호칭을 대통령으로 고집, 그 자리에 올랐었고...(;나중에 대통령이란 명칭은 없어진다.)임시정부는 그가 독단 전횡을 일삼자 쫓아낸다. 그래도 그는 그가 가진 배경(미국)을 기반으로 구미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구미위원회; 독립운동(;특히 임시정부)의 최고 자금원이다. 재미교포들 말이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독립론의 한 방향인 외교론에 대한 비판은 접어두고라도...그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으리라...그런 그가 다른 이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게 된다.이미 임시정부측 인사들에게는 배제된 인물이었고...당연히 다른 독립운동 세력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감투 한자리 쯤은 받아 쓸 만한 지명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력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 엉뚱한 선택을 한다. 그가 파트너로 받아들인 세력은 우리 역사에서 치욕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탁통치안에 대한 독립운동 세력들의 알력의 틈바구니에서... 최대 정적이었던 김구를 암살하고 결과적으로 분단된 땅 한쪽에서 대통령이 된다.지금 우리나라가 이 모양이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반민족주의자 이승만이라는 얘기다.

정권이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서는...이전의 부패가 일소되어야 한다. 이건 애들도 설명하면 알아들을꺼다. 대한민국 정권이 들어선 이후 숙청된 친일파가 몇명인 줄 아는 사람 있냐? 놀랄만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0 명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임시정부의 정통을 이어받아... 그거 거짓말이다.임정의 대표라 할 만한 김구를 죽인자가 잡은 정권이...어떻게 임정의 정통이 될 수 있겠냐? 대한민국 군인도 마찬가지...그 모태는 친일파다.만주 독립군의 전통은 눈꼽만치도 이어받지 않았다. 되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이들의 대부분은 북한군의 주력이 되었고...6.25 초기는 독립군:친일파 의 구도가 된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이승만 동상 국회 건립에 찬성한 대부분의 미친 국회의원들...이승만은 국회를 멋대로 해산하고 독재를 행한 장본인이다.굳이 그런 식으로 자신들이 친일파의 후예임(;세보진 않았지만... 절반 이상일꺼다.)을 내세울 필요가 있는지 머르겠다. 하튼 이승만은 그가 3대 대통령 쯤이었을 때...자기 자신을 호칭할 때 ’짐’ 이라는 표현을 쓴다.너것이 전제국가의 왕이었냐?
필자가 가끔가다가 ’본좌’ 라는 호칭을 쓰는 것 보다 더욱 가소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저 정도면 정신병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 정치하는 넘덜 대부분이 미친 넘이긴 하다만...결국 4.19로 하야하고...죽는 것두 외국에 나가서 죽는다. 그리고 쪽팔리게도 국립묘지에 묻힌다. - 그럴리야 없겠지만...내가 혹시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 죽더라도...국립묘지에는 절대 묻히지 않겠다. - ’대통령의 자리에 있던 십여년... 고작 일생의 1/8 에 해당하는 기간을 위해...반민족주의자라는 오욕을 뒤집어 쓰고,이 나라를 망친 장본인’이라는 평으로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를 마칠까한다. ------------------------------------------------------
추가로 신탁통치에 대해 잠깐 얘기하면...신탁통치 반대=민족주의 신탁통치 찬성=빨갱이 라는 공식으로 배운거 있지?그거 거짓말이다.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위의 도식대로 설명하자면...신탁통치 반대=반민족주의 신탁통치 찬성=민족주의 가 더 맞는 얘기다.혹시라도 궁금한 것 있으면...멜 쎄리던가...내가 쓴 글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도...멜 쎄리시고... 2002년 1월 23일 조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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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은 김수영이 죽은 해다. 이에 대해 이어령은 말한다. '아무리 추워도 가야금으로 불을 때선 안된다', 멋진 말이다. 더 멋진 말도 있다. '화가가 붉은 꽃을 그렸다고 하자. 공안원은 왜 하필 붉은 꽃이냐고 심문할 것이다. 이게 잘못된 것이라면, 이른바 좌파적 평론가가 붉은 꽃이기 때문에 예술적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못지 않게 잘못된 것이다' , '4.19가 끝나고 이승만 사진으로 밑씻개를 하자는 시까지 나왔다.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시대의 예술가는 얼마나 살기 좋은가! 정부 욕만 하면 예술이 되니 말이다.' 그 이승만 사진을 떼서 밑씻개를 하자던 시인은 김수영이었다.   이승만이 도망 안 간다고 했다가 대구로 가버리고 나서,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포로수용소에서 갇혔던 김수영이 그 사진으로 그럼, 밑씻개를 하지, 달리 뭘 한단 말인가! 가끔 '가야금으로 왜 불을 때나? 난 그걸로 어느 놈 하나 패죽일란다'고 하는 시인들이 있었지만, 김수영이 그랬던 건 아니고, 나중 나중의 얘기이다.(뱅의 독서일기.39. 김수영 평전과 이어령 퇴임논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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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경은 누구?

제보자에게 재갈을 물리다
<한겨레21> ‘비리사학재단’관련기사에 반론보도 청구소송 낸 청강학원의 몰상식한 요구

사진/ 청강학원의 학교 경영비리를 다룬 <한겨레21> 359호 기사.

<한겨레21>은 359호 특집 “학교가 니꺼니? 비리사학재단과의 전쟁” 중 “돈 벌려면 학교를 세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수도권에 있는 한 사학의 족벌경영 실태를 상세히 소개했다. 문제의 사학은 익명으로 처리했다. 족벌경영의 문제와 재산유용은 특정 사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수 사학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병폐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제보자 신뢰 않겠다” 각서를 쓰라고?

<한겨레21>에 나온 ‘수도권에 소재한 한 사학’은 학교법인 청강학원이다. ‘재단 이사장이었던 15대 국회의원’은 정희경 전 의원이고, 지금은 그의 아들인 이병훈 남양알로에 사장이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청강학원이 지난 7월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이 기사에 대한 반론보도 청구소송을 제기해 <한겨레21>로서는 더이상 익명으로 처리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기사는 족벌경영의 폐단과 함께 사학이 정치권에 줄을 대는 까닭을, 생생한 사례로 제기했다. 15대 국회 교육위원이었던 정희경씨가 교육부 실무과장에게 전화해 전문대 평가결과를 문제삼아 호통쳤던 것을 제보자의 목격담으로 소개한 것이다. 당시 교육부 실무과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정희경 의원이 전화뿐만 아니라 직접 교육부로 찾아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청강학원쪽은 “당시 정희경 의원은 야당 소속일 뿐 아니라 전국구 출신이어서 교육부 관계자에게 호통치거나 그 밖에 위세를 과시한 적이 없다”는 정황해석으로 사실을 비껴간 반론을 청구했다.

더구나 청강학원쪽은 애초 <한겨레21>에 정식으로 반론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요구를 했을 뿐이다. “앞으로 제보자의 의견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부장의 친필사인이 담긴 서신을 보내달라”는 것. 이와 함께 두달 전 문화방송 팀에 보냈던 장문의 의견서를 참고하라고 보내왔다. 의견서 중 제보자에 해당하는 대목은 이렇다. “제보자는 학교에서 징계해임된 뒤 청강학원과 정 의원 일가에 깊은 사감을 품고… 각종 고소고발과 제보를 일삼다가… 그 주장이 모두 허위인 것으로 밝혀져 명예훼손죄로 구속되기도 한 지극히 부도덕한 인물입니다.”

정식 반론요청이 아닌, ‘각서’를 요구한 것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또한 사실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특정 제보자의 도덕성을 문제삼은 것은 상식을 벗어난 행위이다. 청강학원쪽은 <한겨레21>이 각서 쓰기를 거부하자 언론중재위에 반론보도 청구 중재신청을 했다. 기사에 언급된 거의 모든 사실에 대해 양쪽의 주장이 달라 중재는 불성립됐고, 반론여부는 법원에서 다투게 됐다.

언론을 상대로 반론보도 청구소송을 내면 거의 대부분 신청인이 이긴다. 법원은 설사 원문보도가 진실에 부합한다 해도 반론을 청구할 수 있고, 그 반론이 진실이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반론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헌법에 보장된 인격권을 지키기 위한 조처이다. 그러나 이런 조처가 특정 이해당사자와 집단의 이익에 휘둘릴 때 법취지는 실종되고 만다. 이런 한계를 알고 있기에 법원도 ‘명백히 사실에 반하는 경우’에는 반론보도의 게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명백한 허위사실 주장도

사진/ 청강학원의 재단 이사장이자 15대 국회의원이었던 정희경씨.(이용호 기자)


<한겨레21> 기사의 일부 내용을 비슷한 시기에 보도했던 한 매체는 언론중재위에 올라온 반론을 받아들였다. 쉽고 편한 길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반론의 근거가 사실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한 수단이라면 <한겨레21>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제보자였던 이상철씨는 청강학원쪽의 주장과는 달리 “명예훼손죄로 구속된 적이 없다”고 밝혔다. 1998년 청강학원쪽이 이씨를 고소한 것은 이씨와 참여연대가 상속세 탈세 및 공금유용 혐의로 청강학원을 검찰에 수사의뢰하자 곧바로 이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그러나 청강학원은 이듬해 스스로 이 고소를 취하했다. 결국 명백히 허위사실을 <한겨레21>에 주장한 셈이다.

<한겨레21>이 이런 사실을 뒤늦게 지면을 통해 밝히는 것은 청강학원이 <한겨레21>에 대한 반론보도 청구소송과 별도로, 제보자였던 이씨를 최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은 이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씨에 대한 청강학원의 고소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언론에 제보한 사람에게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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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은 답하라
한나라당은 중앙일보 사주 홍석현씨가 탈세 혐의로 구속되자 ‘언론탄압’이라고 강변하더니, 국세청의 정당한 세무조사를 통한 한진그룹에 대한 세금 추징을 ‘표적사찰’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에 묻는다. 첫째, 사기업을 가진 언론사 사주가 언론을 방패삼아 사기업 탈세를 자행한 것은 악질적인 범죄행위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국민 대다수는 이에 대해 엄정한 법 집행을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 탈세 비호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조세정의는 배치된다고 보지 않는가?
둘째, 과거 어느 정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국민의 정부 하에서 언론의 자유는 신징되었으며, 현재 언론은‘거의완벽한 수준의 언론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국민적 합의이자 국제적 평가이다.
중앙일보 사태와 관련해 한나라당이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 다른 언론사들이 일방적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셋째, 지난 97년 대선때 중앙일보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위해 편파보도를 했다는데 대해 언론 관계자들은 물론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더욱이 중앙일보는 IPI에 보낸 편지를 통해 ‘편파보도’했음을 자인하고 있다. 이회창 총재가 중앙일보의 입장을 온 몸으로 옹호하고 나선 것은 대선때 중앙일보의 지지에 해나 보은이 아닌가?
넷째, 중앙일보가 ‘삼성재벌 신문’이라는 일반인의 인식에 대해, 이회창 총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섯째, 당명을 바꾸었다고 속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구집권 세력인 한나라당은 여론조작과 정권 안보를 위해 언론을 조정, 간섭하고 탄압까지 해온 ‘정언유착정당’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한나라당은 여당이었던 김영삼 정권시 날마다 보도지침을 내려 언론을 통제했고, 김현철씨 비리에 대해서는 기사 한줄도 나가지 못하도록 언론을 탄압했다. 한나라당은 과거 언론탄압 행위를 불인정 할 것인가?
여섯째, 보광그룹 대주주인 홍석현씨의 탈세를 비호했던 한나라당은 한진그룹의 탈루 소득에 대한 세금추징을 ‘표적수사’라고 강변하고 있다. 대선때 국세청을 이용한 세금 도둑질에 대한 수사에 대해서는 ‘야당탄압’으로 몬 바 있다. 이는 한나라당이 재벌의 탈세비리로 인한 검은 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해온, 정경유착에 뿌리를 둔 정당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한때 ‘세풍당’으로 불렸던 한나라당을 이제 ‘탈비당(탈세비호당)’으로 부를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곱째, 국정감사는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최대 기능이자 국회의원의 의무이다. 한나라당은 중앙일보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면서 이틀에 걸쳐 국정감사를 파행시켰다. 국민이 부여한 국회의 권한 포기이자, 국회의원 직무유기다. 집권 경험이 있는, 책임이 있는 공당으로서 과연 올바른 처사라고 보는가?
1999년 10월 6일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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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현은 어린시절 이승만 내각에서 이승만의 충복으로 일한 부친의 인연으로 이화장을 방문해 미국의 그릇된 독립운동 사진을 보고 흠모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이하)

우남의 평가와 위치를 바로잡는 사명감

먼저, 여러가지 자질로나 나이로나 부족한 점이 많은 저를 본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선출해
주신데 대해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이 자리까지 앉게 된 운명적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선친이 마지막 내각에 봉사를 하셨고, 저도 개인적으로 어르신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생신잔치에 화동으로 뽑혀간 인연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1993년 말, 제가 이화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유구무언의 독립운동을 하시던 시절부터 중국·미국·
하와이 등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더 나아가 학창생활 등 개인사적인 것까지 망라해서
여러가지 많은 자료를 접할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제 가슴속에서부터 용솟음치는 존경의 마음과 저로서 미력이나마 이런 어른을
우리 역사에 다시 되살려내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소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실되어진 것이 연세대학교에 현대한국학연구소의 설립이었습니다. 이곳에
귀중한 역사자료가 학문의 대상으로서, 또 보존의 대상으로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기념사업회는 95년 창립, 신도환 회장님, 유호준 회장님을 모시는 동안 아주 훌륭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그 점 두분의 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추념사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줄 믿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그리고 최근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생각되어지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는데 가장 큰 공로를 세우셨고, 그분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은 남북화해협력의 밑거름이
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이룩되지 못했으며,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번영이 없었다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그럼에도 다른 여러분들에 대한 자리매김은 이루어지고 있는데, 막상 우리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님에 대해서는 대우는커녕, 격하하다 못해 아예 잊어버려진, 제대로 된 평가와
위치를 찾아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저에게 회장을 맡기신 뜻은 여러가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젊은 에너지를 발휘, '이승만 박사의 고귀한 업적'을 계승 발전시켜달라는 당부의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뜻을 같이 하는 여러 어른들과, 그리고 우리 이사님들과 힘을 합쳐 건국대통령의 위치를
제대로 찾아드리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나갈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님의 기념사업은 이승만 박사 한분의 업적을 기리는 일에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사업은 다른 기념사업회와 그 성격이나 규모에 있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을 이제 우리 손으로 해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의로운 마음으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위치를 바로잡고 그에 따른
활동을 위해 모였습니다. 누구보다도 그 사명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이승만 박사의 말씀대로
단합된 마음으로 지혜를 모아 우리의 목적을 달성해야 할 것으로 압니다. 여러분들의 고견과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하며 개회사로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2001년  3월  26일
                                                  뜻깊은 이승만 박사 126회 탄신을 기념하며
                                                               회  장    홍   석   현

















N   한겨레 비난한 글을 읽고-이승만 동상 국회건립과 세종로 충무공자리 및 (당시보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남산 81척(56년 이승만 81회 생일을 기념) 동상   안원전    2003/03/06  16658
N   안원전의 21세기 담론.한나라당 조중동의 노무현욕은 민주주의의 업그레이드 상으로 증정하는 꽃다발같은 것   안원전    2007/01/27  13483
N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사천성 성도에 있는 전촉왕 왕건의 영릉은 고려개국왕 왕건이었다는 주장에 대해   안원전    2008/06/16  14197
N   참고;5월들어 글을 못올리고 있는 이유(삭제예정) [17]   안원전    2004/05/19  14487
N   필리핀의 가장 위대한 영웅 호세 리잘을 대하고(2005.12.중순)   안원전    2006/02/22  17444
N   상고사학회에 올려져 있는 안원전 선생님의 글을 인용 소개합니다(송준희)   안원전    2006/01/12  13963
N   담론195. 당황실의 미스테리-황제헌원,진시황,주문왕,요,순,우,백이와 같은 동이족 혈통3   안원전    2002/11/20  16742
N   담론194.당황실의 미스테리-황제헌원, 진시황, 주문왕, 요,순,우,백이와 같은 동이족 혈통2   안원전    2002/11/20  15908
N   담론 193.당황실의 미스테리-황제헌원, 진시황, 주문왕, 요,순,우,백이와 같은 동이족 혈통1   안원전    2002/11/20  18170
N   "푸코의 진자"라는 책을 보고 프리메이슨에 대해 쉬운 설명 부탁드립니다."에 대한 답변 [1]   안원전    2005/01/10  19513
N   특집기획. 웅장한 동이 대륙사 홍산문화(紅山文化) 대문구(大汶口) 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의 놀라운 고고학적 실체 국내 최초 완전 공개! [4]   안원전    2003/05/12  18370
N   담론 특별기획, 속 장량의 미스테리-공명지정대와 자방지종용&한신의 미스테리, 유방이 한신을 버린 것인가 한신이 유방을 배신한 것인가.   안원전    2002/08/26  9752
N   담론 특별기획 장량의 미스테리를 파헤친다.장량은 어디로 갔는가? 또 왜 한의 조정을 떠났는가?   안원전    2002/08/23  9542
N   담론 특별기획, 황제의 동이족 부인 누조(女+累,祖)의 양잠(養蠶) 고사와 양잠시조 동이족 조상 태호복희 천제   안원전    2002/09/16  8638
N   담론 특별기획, 잠사기원 속편-동이족의 주 전공 잠사의 개관   안원전    2002/10/01  7471
N   담론 특별기획 동이족의 영적문서를 빌어다가 개찬한 공자의 소작-나를 아는 자도 오직 「춘추(春秋)」요, 나를 죄줄 자도 그 오직 「춘추(春秋)」다   안원전    2002/10/30  8425
N   동이 대륙상고사 유적지 탐사를 마치고(안원전) 2002.8.16   안원전    2003/04/15  12037
432    안원전의 담론 391.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7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3부   안원전    2013/11/17  3475
431     안원전의 담론 390. NHK ‘료마전’의 료마와 요시다쇼인(吉田松陰)   안원전    2013/09/15  3757
430    안원전의 담론 389.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6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2부   안원전    2013/03/29  3625
429    *(특집)안원전의 담론 388. 대한민국 한류 디자인-대한민국을 새로 디자인하라!!   안원전    2012/09/07  3747
428   비밀글입니다  안원전의 담론 387.   안원전    2011/07/26  212
427    안원전의 담론 386.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5-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1부   안원전    2011/07/04  5311
426    안원전의 담론 385.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4-진나라 제왕의 위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위염(魏冉)   안원전    2011/06/07  4218
425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84. (漢字의 秘密) 한자(漢字)의 주인은 한겨레 韓민족이다.   안원전    2011/06/01  5978
424     안원전 담론 383. 소통(疏通)에 대하여   안원전    2011/05/24  2658
423    안원전 담론 382.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3-초인이 진나라를 섬기던 역사의 공헌 및 통일전쟁의 서막을 올린 감무(甘茂)   안원전    2011/05/17  3091
422    안원전 담론 381.약초를 널리 보급하여 질병을 치료한 다릉(茶陵:차릉)의 ‘세 가지 보물(三寶)’   안원전    2011/05/11  2763
421    안원전의 담론 380. 염제(炎帝)가 불을 광범위하게 응용하던 이야기 2   안원전    2011/05/09  2368
420    안원전의 담론 379.염제(炎帝)가 불을 광범위하게 응용하던 이야기1   안원전    2011/05/09  2508
419    안원전의 담론 378.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2- “진나라가 망하고 초나라가 보전되는(亡秦必楚)”의 문화 운명   안원전    2011/05/03  2405
418    안원전 담론 377.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1-초나라가 갑자기 쇠퇴한 원인은 음란과 방탕 그리고 모든 통치계급의 부패와 문란   안원전    2011/04/30  2353
417    동이 대륙상고사 답사를 마치고2(2002) 續원고   안원전    2011/04/30  2320
41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76. 거영신(巨靈神: 강의 신)   안원전    2011/01/10  2820
41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75. 황하(黃河)의 수신(水神) 하백(河伯)   안원전    2011/01/05  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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