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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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의 담론 391.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7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3부



안원전의 담론 390.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7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3부






"초는 본래 만이(蠻夷)니, 곧 회이(淮夷)"

서주초, 형인(荊人) 잔존부락인 -동이족 전욱(顓頊) 자손 계련(季連)의 미(羋)씨 성 자손-이 이미 서쪽으로 이동하여 단수(丹水)와 석수(淅水: 모두 河南省 河川)사이에 당도했다.(초(楚)의 왕들은 무왕(武王)처럼 대대로 웅씨(熊氏)가 계승했지만, 성(姓)은 한결같이 미(羋)였다) 육웅(鬻熊:or죽웅)이 수령할때 좋은 시기를 포착해 초민족을 거느려 폭군 상나라 주왕을 등져 포기하고 서쪽을 향해 주문왕(周文王)에게 몸을 의탁해 주문왕(周文王)에게 신임을 받았다. 주무왕(周武王)이 계승한 후에 남쪽을 도모하고자 하매 초인이 이를 눈치채고 육웅(죽웅)의 아들 웅려(熊麗)의 영솔하에 족속을 일으켜 수산(睢山)과 형산(荊山)사이로 옮겨가 잠시 황량한 들판에서 피해 살았다. 무왕을 이어 주나라 성왕(무왕 아들로 강태공 사위)이 어린나이에 들어서자 주공단이 섭정하는 동안 의심을 받아 초나라로 망명해 화를 피하니 초인은 최고의 손님(上賓)으로 공경했다.  이에 주공이 그 덕에 크게 감격하여 다시 주나라 조실로 돌아가 이일을 왕에게 호소하니 주성왕(周成王)이 감동하여 이에 주성왕(周成王)은 웅려의 손자 웅역(熊繹)을 초군(楚君)에 봉했다. 이로써 형초(荊楚)는 제후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해 초국(楚國)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西周初年,荊人的殘部主要是季連的羋姓後人,已西遷至丹水與淅水之間。鬻熊為首領時,審時度勢,率楚民背棄商紂王,西行投奔周文王,並受到周文王的器重,周武王繼位後,有圖南之意,楚人覺察後,在鬻熊之子熊麗的率領下,舉部南遷至睢山與荊山之間,暫時避棲于荒野之地。周成王時,周公避禍于楚,楚人敬之如上賓,周公大感其德,周公回朝後訴說此事,感動了周成王,于是周成王封熊麗之孫熊繹為楚君。荊楚開始躋身于諸侯之列,楚國正式誕生了。


초인은 수세기동안 참담하게 경영한 뒤 웅거(熊渠) 초에 이르러 위험지경에 빠졌다. 웅거는 웅역(熊繹)의 4 세 손으로, 재능과 학식을 겸해, 진취적 정신을 가진 군주로, 군사를 정비하고 무예을 익혀, 중원지방에 변란이 일어난 틈을 타, 강토를 개척하는 진공작전을 개시했다.  삼묘(三苗)는 일찌기 형초(荊楚)에 귀순했으며, 웅거(熊渠)는 정벌의 중점을 서부와 동부에 두었다.서부를 정벌하는 중에 용국(庸國:지금의 호북(湖北) 죽산(竹山)경내)을 공격해 치고, 강토개척의 서막을 열었다. 토벌중에 초인은 지금의 호북(湖北) 중부 양월(揚越)로 공격해 치고 세력을 강한(江漢) 평원으로 밀고 들어갔다. 계속 신속히 원정에 착수해 지금의 호북(湖北) 악주(鄂州)경내의 악국(鄂國)을 쳐 공격했다.


楚人經過一個多世紀的慘淡經營,至熊渠時初露崢嶸。熊渠是熊繹第四代孫,是一位既有才識又有進取精神的君主,他整軍習武,趁著中原動亂之機,開始了開疆拓土的進程。三苗早已歸順荊楚,熊渠把征伐重點放在西部和東部。在西征中,攻打了庸國(今湖北竹山境內),拉開了拓疆序幕。吊討中,楚人攻打了位於今湖北中部的揚越,勢力推進至江漢平原。接著遠征,攻打了位於今湖北鄂州境內的鄂國。


초족의 갈래는 다원적이었는 바, 황하 장강(양자강)유역에서 고 선주민(古先民)과 장기간 왕래하면서 전쟁과 융합을 하던중에, 마침내 형초지구 형성에 있어 공동 언어, 공동 경제생활, 공동 문화와 공동 심리 등 민족적 바탕과 특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초민족으로 거듭나게되었다. 초족(楚族)은 바로 초(楚)의 땅에서 얻은 이름이다. 그러나 초족의 족원(族源)이 어디에서 기원했느냐 하면, 혹자는 본원이 초지에서 토착적으로 항상 살았던 토착민 족이라 말하는 둥 그 역사기원이 중설분분하나 진실성은 없다. 일찌기 20세기 20년대 말에 곽말약이 <중국고대사회연구>라는 서책에서  "초는 본래 만이(蠻夷)니, 곧 회이(淮夷)"라 생각한다고 했다. 회이(淮夷)는 즉 초인(楚人)이니 즉 만형(蠻荊)이다.  ...회이,서이,형만은 널리 퍼져 매양 관련지어져 말하니, 이들 계열은 반드시 같은 동족일 뿐 아니라, 은(殷:동이족 95% ;임혜상)의 동일 맹족(혈족적으로 느슨한 동일족)이 된다. 후일, <은주청동기명문고석>,<금문총고> 등 책중에 초인은 곧 "웅영족(熊盈族:곰토템족)임을 명확히 인정한다. 초(楚)의  조상들이 회수(淮水) 아래 떠돌며 살았으며 엄인(奄人), 서인(徐人)등과 더불어 함께 동방국(東國)에 속했다.   ....웅영(熊盈)은 마땅히 곧 육웅(鬻熊:or 죽웅)이며, 영육(盈鬻)은 한가지 소리가 전음(轉音)되어 바뀐 字이다.웅영족은 주인(周人)이 압박하매 남하하기 시작해 강에 이르러, 강이 가로막아 다시 서쪽 위로 올라가 악(鄂)에 이르렀다. 호후선(胡厚宣)은 <초민족원어동방고> 한 글 가운데 진일보하여 "초의 시조는 축융(祝融)이 된다"고 주장한다. 축융(祝融)은 곧 육종(陸終)이니....즉 수인(遂人)이 곧 여(黎)족이고; 육종, 수인, 여 모두는 동방민족이다. 때문에 그후 주민족의 동방압박이 황하유역으로 미치니, 점점 상황이 변하여 동방민족이 마침내 허다히 서로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왔을 뿐 아니라, 초민족의 세력이 심히 강하여 점점 남방의 강한(江漢)유역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곽말약, 호후선 두 선생은  초민족 동방설을 인도하니 지금에 이르러 그 영향력이 거듭 심원하여, 적지않은 학자가 이 학설을 따른다 < By 安原田 譯>:여(黎)의 정체 http://www.cheramia.net/board/zboard.php?id=bbs1&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14


    楚族是多元的,在黃河、長江流域遠古先民的長期交往、爭戰與融合中,終於在荊楚地區形成有共同語言、共同經濟生活、共同文化和共同心理素質的楚族。楚族就是以楚地而得名。但是,楚族的族源來自何方,或者原本就是楚地土生土長的民族,歷來眾說紛紜,莫衷一是。早在本世紀二十年代末,郭沫若在《中國古代社會研究》一書中,就認為“楚本蠻夷,亦即淮夷”。淮夷即楚人,即蠻荊,……淮徐荊舒每連言,必系同族,且為殷之同盟。 後來在《殷周青銅器銘文考釋》、《金文叢考》等書中,又明確認定楚人即“熊盈族”。楚之先世居淮水下遊,與奄人徐人等同屬東國。……熊盈當即鬻熊,盈鬻一聲之轉。熊盈族為周人所壓迫,始南下至江,為江所阻,復西上至鄂。
  胡厚宣在《楚民族源於東方考》一文中進一步提出“楚之始祖為祝融”。 祝融即陸終……即遂人即黎;而陸終、遂人及黎皆為東方之民族也。……惟其後以周民族之東方壓迫,及黃河流域之漸漸改變,東方民族遂多相率南遷,而楚民族勢力甚強,乃漸擴土於南方之江漢流域。 郭、胡二先生倡楚族東方說,至今仍影響深遠,不少學者從此說。 < By 安原田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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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BC280-208),진왕조 승상,저명한 정치가,문학가, 서법가, 진시황 통일천하에 협조. 진시황 통일후, 진왕조의 법률을 제정하는데 참여했고 진왕조 제도를 완전히 갖추었다. 대중이 주장하는 의견을 힘으로 물리치고 군현제를 실행하고, 분봉제를 폐지해 없애고, 아울러 문자, 차궤, 화폐, 도량형을 통일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진시황이 죽은 후, 환관 조고와 합작 모의하여 어린 아들 호해를 2세 황제로 세웠으며, 후에 조고가 질투시기하여 시중에서 요참(허리를 잘려 죽는 형벌)당해 죽음을 당했다. 그가 실시한 정치적 주장으로 인해 중국과 세계에 대해 심원한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 이천년 역사의 정치 제도적 기본 격국의 기초를 다졌다.
李斯(约前280年-前208年),秦朝丞相,著名的政治家、文学家和书法家,协助秦始皇统一天下。秦统一之后,参与制定了秦朝的法律和完善了秦朝的制度,力排众议主张实行郡县制、废除分封制,提出并且主持了文字、车轨、货币、度量衡的统一。秦始皇驾崩后与宦官赵高合谋立少子胡亥为二世皇帝,后为赵高所忌,腰斩于市。因其政治主张的实施对中国和世界产生了深远的影响,奠定了中国两千多年政治制度的基本格局。



산동성 임치의 제나라 대부 안평중 묘 앞에서 필자. 공자가 성인으로 숭앙한 이가 둘 있는데 바로 무왕의 동생 주공단과 제나라 대부 안평중(안영, 일명 晏子:안자춘추 저자)이다. 젊은 공자가 벼슬을 하고자 제나라 대부 안자를 찾았으나 안자는 보기좋게 퇴짜를 놓았으니 아마 1급수에 노니는 열목어에게 혼란하고 격한 탁류의 정치세계를 권하지 않았을 싶다. 안자춘추를 좋아하는 필자는 모든 행실과 말에 객관적인 중의 핵심을 찌른 안평중의 인품을 공자가 높이 사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사와 같은 일국의 대부를 지냈으면서 그들의 인생은 극과 극을 달렸다./안영총은 임치궁성 3리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임치시를 벗어나 4-5Km를 가면 제나라 왕성인 구 임치마을이 나오고 그 곳에 제나라 박물관이 서있다 주위는 온통 논이다. 박물관 뒤 3-4Km되는 논 한가운데 안평중 묘가 있다.  현재는 논 한가운데 4-5M 정도 봉분이 돌출해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평지에 돌기해 있으며 높이는10여미터 둘레가 10여미터라고 되어있다. 원명은 안영(安嬰) 춘추시기 때 이유인(夷維:제나라가 동이족 국가지만 글자만 보아도 동이족 마을 사람. 지금의 高密縣) 자(字)는 중(仲),시호는 평(平)으로 후인이 안평중(晏平仲)이라 칭했다.
그는 제(齊)국의 명재상으로 영공(靈公), 장공(庄公), 경공(景公) 3대에 걸쳐 대부인 정경(正卿)을 맡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 영의 신체는 왜소했으며, 용모도 출중하지 못했으나 50여 년 동안 집정하여 민생의 질고를 끌르는데 관심을 두었으며 기지로 잘 다스렸다. 성품이 강직하고 올바라 아부하지 않았으며 청렴, 순박했다. 그는 재상을 지내고 은퇴한 뒤에도 고기를 많이 먹지 않았고 첩에게 비단을 입히지 않았다. 사서 상에 일찍이 기재된 바에 의하면,"경공이 3번 하사했으나 받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일화는 세 번에 걸쳐 대궐같은 새 집과 거마, 미녀를 내렸으나 반대로 임금을 우화로 풍간(諷諫)했다는 유명한 일화이다. 안 영의 기지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필자도 설원(說苑)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는 터이지만 이 일화를 읽고 다시 한번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재삼 알았다.
오죽했으면 주공단과 함께 공자가 존경한 2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을라고. 한번은 안 영이 명을 받아 초(楚)나라를 방문하러 갔다. 안 영의 신체가 지금의 1.4M 내외로 워낙 왜소하여(등소평보다도 훨씬 작음) 볼품이 없었으므로 초(楚)나라는 안영을 보낸 것을 무척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를 맞아들이는데 성문 옆에 있는 아주 조그마한 쪽 문으로 들어오게 했다. 안 영은 이 좁은 문으로 당당히 들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만 개들이 사는 나라에 당도해 개구멍을 따라 들어왔더니 초(楚) 국은 개 나라가 맞느냐?" 초인은 단지 대문을 열어 영접하는 것을 좋아하여 초왕이 안영이 말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너희들 제나라에는 너같이 못생긴 사람을 보낼 정도로 그렇게 사람이 없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왔느냐"
안영이 말하기를," 제국에는 각계 각층으로 인물이 많아서 사신으로 갈 때는 각 분파별로 사람을 뽑아 보내는데, 현명한 왕에게 사신으로 갈 때에는 능력있는 자가 뽑혀 가고 무능한 국왕에게 갈 때는 무능한 사신이 뽑혀 갑니다. 저는 보다시피 가장 무능한 자이므로 초 나라에 뽑혀 온 것입니다. 바로 이때 대화 중에 초나라 출신 죄인을 불러들여 한  사람이 초회왕(楚懷王:굴원이 바로 같은 동이족 국가 제나라와 정치적 동맹을 맺을 것을 간했으나 정적의 말을 듣고 초회왕이 거부하여 동정호 멱라수에 몸을 던진다.)에게 보고하기를 그는 일개 제 나라 피라미 도둑이라 급히 말했다. 초왕이 곧 이를 빌어 안자에게 고통과 치욕을 주었다. 안영이 치욕을 당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남(淮南)의 귤(桔子)은 회남에 있으면 귤(桔子)이 되는데 회북으로 가면 탱자(枳)로 변합니다. 종자 씨(莢子)는 서로 비슷하나 맛은 같지 않습니다. 이는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면 물과 토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재 제나라에 사는 사람에는 도둑놈이 없는데 초나라에 오기만 하면 도둑놈으로 변합니다. 이는 초국의 물과 토양이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도둑놈으로 변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곡부의 어마어마한 공묘를 보고 필자는 사람이 너무 재를 멀리하면 죽어서도 무덤하나 찾는 이 없이 초라해서 공자는 꼬박 꼬박 닭도 받고 쌀도 받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자묘가 있는 공림에는 공자를 숭앙한 원,명 ,청대의 왕들이 공자무덤 옆에 묻히기를 영광으로 생각해 누워있음을 본 터이고 80여 세를 산 건륭제의 경우는 살아생전 10회나 곡부 공묘를 찾았는데 공묘(사당), 공부(행정통치건물) 의 현판을 도맡아시피해서 쓰고(그는 못생긴 자신의 딸을 공자의 7십 몇 대 손에게 시집보냈을 정도로 공자를 흠모했다) 말년에도 80노구를 이끌고 공묘를 찾아갈 정도로 공자를 존숭한  왕들이 많았음을 보았고 또  공묘의 대성전은 북경 자금성의 태화전과 비슷해 그 높이가 벽돌 하나차이라는 것을 보았기때문이다. 청대의 왕들이 태화전과 같은 공묘의 대성전을 보면 자신들이 비록 왕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부럽고 배가 아파 장막을 치게 하여 입구이외에는 못 보게 가렸다한다. 공묘의 대성전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에는 태화전의 주춧돌보다 화려하게 기둥하나에 7마리의 용들이 비상하는 정밀화를 그려넣어 조각해 넣었다. 그러니 역대 왕들이  자신들이 비록 당장은 왕이여도 죽으면 일개 능 하나만 차지할 뿐 웬만한 치적이 아니고는 자금성에 준하는 사당을 그 누구도 만들어 줄 리 없음을 잘 아는 그들이기때문에 질투가 남은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른다. 수많은 황제들과 기라성같은 수많은 대부들로부터 호위를 받으며 누워있는 공자무덤과- 그것도 동이족의 정신세계를 지나족의 것으로 리프팅해 둔갑 왜곡시켜  출세한 댓가지만- 깨끗하게만 산 안평중의 초라한 무덤과 실사구시의 차원에서 역시 동이족 고유의 중용의 미덕을 강조한 공자의 무덤은 선천 역사에서 참으로 생각을 깊게 해주는 실마리가 되었다. 빈한함도 운이요 부귀함도 그 사람의 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치관이 변한 지금의 개벽 시대에 적용되는 다음의 뜻을 알아야 한다. “헤지고 때 묻은 옷일지라도 황금으로 만든 갑옷보다 낫고, 담장 없는 허름한 집일지라도 철로 만든 집과 같노라.弊衣多垢勝金甲 頹屋無垣似鐵城 ” 결국 지금의  선후천 과도기의 가치관으로 보면 응당 안평중의 가치관이 한 수 위였음을 알 수 있다. 본 글의 주제에 맞게 놓치지 않아야 할 사실은 이사는 초인인 회이(淮夷)족이었으며 안평중 역시 이유인(夷維)인-동이족이었다는 사실이며 이사가 공자처럼 제자만 길렀거나 진시황의 권력에 아부않고 안평중처럼 처세에 공정했다면 거리에서 허리를 잘려 죽는 요참을 면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열주에 용들이 화려하게 새겨진 곡부 공묘(孔廟)



6국이 모두 멸망하자 천하가 겨우 안정되었다. 승상 왕관(王綰) 등은 황제의 아들을 연(燕), 제(齊), 초(楚) 등의 먼 국경지대의 왕으로 분봉하고, 분봉제(分封制)와 군현제(郡縣制)가 서로 결합된 행정체제를 실행하여 새로 건립된 방대한 제국을 안정시킬 것을 건의했다. 당시의 사회현상과 훗날의 역사발전에서 보면, 이러한 건의는 정세의 필요에 부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원래 6국이 각각 그 정치를 행했고, 각기 상대적으로 독립된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제나라와 초나라 옛 땅의 문화전통은 더욱 근원이 오래 되어 스스로 체계를 이루었다. 다른 백성들이 진 왕조의 정령(政令)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드시 과도기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만약에 다른 지역에 왕을 봉한다면 중앙 정령의 원칙범위 내에서 그 지역의 풍속과 그 지역의 전통에 따르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통치를 실행해야 제국의 안정에 도움을 줄 것은 물론이고, 진문화와 6국문화의 융합을 실현하여 진 제국의 사회질서가 장기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분봉제는 대권을 독점하려는 진시황의 욕심에 부합하지 않았고 일원화된 진나라의 정치문화전통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진시황은 태도를 표명하지 않고 “군신들에게 이 의견을 상의하라고 내놓자, 군신들이 모두 그것이 유리하다고 여겼다.(下其議于君臣, 君臣皆以爲便)”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에 기록된 후생(侯生), 노생(盧生)의 말》


유독 진시황 본의를 잘 알고 있던 정위(廷尉) 이사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애써 배제하며 “통일되었으니 모두 군현으로 삼으라(一統皆爲郡縣)”고《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에 기록된 후생(侯生), 노생(盧生)의 말 》 주장했다. 이사는 자제들을 분봉하면 주대(周代)처럼 제후들이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게 되어 천하대란의 근원이 된다고 변론했다. 진시황은 “정위의 의견이 옳다(廷尉議是)”고 크게 찬성하고, 이로 인해 자기의 마음을 매우 깊이 이해하고 뜻을 따르는 자는 이사만한 자가 없다고 하여 즉시 이사를 왕관을 대신해 승상으로 임명했다.

이사는 진시황을 보좌하여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고(分天下爲三十六郡)”《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진나라는 한 자(尺)의 땅도 나누지 않고, 후손이 왕이 되도록 세우지 않았으며, 공신들을 제후로 삼지 않았고(使秦無尺土之封, 不立子弟爲王, 功臣爲諸侯)”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중앙에서 지방 군현을 직접 통제하는 집권제도를 건립했다. 진시황과 이사의 고도로 일원화된 중앙집권제도를 설립하려는 목적은 물론 “후일의 내란의 우환을 없애고(使後無戰功之患)”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제국의 안녕을 확보하려는 것이었지만, 당시 역사적 조건 하에서 정연한 정령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엄한 형벌과 준엄한 법을 채택하고 지독한 신하와 혹독한 관리를 임용함으로써 들끓는 민원과 사회의 동요로 제국의 평안한 날이 없는 상황을 다스려야 했다.

이사에게 승상을 맡긴 것은 그가 개국공신이기 때문이며, 더욱이 진시황의 욕구를 가장 잘 살필 줄 알아 진시황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때문이다. 천하가 크게 안정되자, 그는 진시황이 통일제국의 통일된 문화를 건설하는데 전력으로 보좌했다. 역사가가 고도로 긍정하는 진대 문화의 공헌, 즉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수레의 궤폭을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법률을 통일하고, 화폐를 통일한 것과 이외에도 바깥으로는 사방의 이민족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건축하고, 안으로는 장애물을 없애기 위해 치도(馳道)를 수축하는 등, 거의 모두가 이사가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집행하여 얻은 것들이다.

역사 발전 면에서 보면, 이러한 문화 건설의 의미는 매우 크고 영향도 매우 크다. 당시의 사회조건에서 보면,  이러한 문화 건설은 힘을 너무 크게 과시하고 너무 급하게 서둘러,  많은 부분 주관적인 욕망에서 나온 정복당한 제후국의 문화전통에 대해 강력히 타파하여 강제로 바꾸려다보니 민중생활과 심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초월하여 민중의 반항정서를 끓어오르게 했다. 이 때문에 단지 물질문화의 성과와 제도문화의 통일만을 실현했을 뿐 행위문화와 심리문화 방면의 성과는 사실상 매우 작았다.

기원전 213년, 진시황이 함양궁(咸陽宮)에서 생일잔치를 크게 벌여 군신들이 축하했다. 복야(仆射) 주청신(周靑臣)이 황제의 위엄과 덕망을 높이 칭송하며 “제후국을 군현으로 삼아, 사람마다 안락함을 누리고 전쟁의 근심이 사라져, 그 공적을 만세에까지 전하게 되었습니다.(以諸侯爲郡縣, 人人自安樂, 無戰爭之患, 傳之萬世)”《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라고 찬양하여 진시황을 즐겁게 했다. 박사(博士) 순우월(淳于越)은 때를 인식하지 못하고 용감히 나가서 직언했다.

진시황은 은(殷), 주(周)가 자제를 분봉하던 것을 본받아 제국을 보위하게 하지 않으려 하니 “고인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일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주청신이 면전에서 아부하여 폐하의 과실을 가중시키려고 하니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닙니다.(事不師古而能長久者, 非所聞也. 今靑臣又面諛以重陛下之過, 非忠臣)”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순우월은 옛일을 인용하여 현재의 일을 비난하여, 물론 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분명히 군현제를 추진한 이래 제국이 안정되지 못하고 진시황이 순시를 나갈 때조차도 종종 뜻밖의 일을 당하는 현실 상황에 근거하여, 제국 존망의 위험을 명확히 인식하고서야 황제의 안색을 개의치 않고 직간했다.

그 근심하는 마음은 감동할 만하고, 그 충정은 존경할 만했다. 진시황은 생일잔치에서 직접 맞대고 화내기가 불편해 또 다시 “군신들에게 그 의견을 물었다.” 진시황의 뜻을 깊이 관찰한 이사는 아첨하느라 그 뜻을 따라 끝없이 과장하며 “지금의 유생들은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것만을 배워 당세를 비난하며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다(今諸生不師今而學古, 以非當世, 惑亂黔首)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고 난폭하게 질책하고, 놀랍게도 사학(私學)을 금지하고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시》,《서》 및 제자백가의 저작(《詩》、《書》、百家語)”을 모두 태워버릴 것을 건의했다. 진시황은 당장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국의 관리들에게 책을 수거해 불사를 것을 엄히 명령했다.

“진나라는 뜻을 얻어 천하를 병합한 후에 천하의 시경과 서경을 불살라버렸는데, 특히 제후국의 《사기》가 제일 심했던(秦旣得意, 燒天下詩書, 諸侯《史記》尤甚) 《사기․육국년표(史記․六國年表)》 ‘분서(焚書)’사건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문화 말살 사건으로 중국 상고 문화의 막심한 손실을 초래했다. 역사가들은 종종 진왕조의 분서사건의 중요한 죄과를 이사의 탓으로 돌린다. 이사의 죄는 확실히 피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면 이사는 단지 진시황을 대신해서 발언하고 진시황을 위해 일을 행한 것일 뿐이다. 그가 순우월의 말을 질책하여 ‘분서’를 건의한 근거는 바로 “지금의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이 지존한 분에 의해 결정되도록 했던 것이다(今皇帝幷有天下, 別黑白而定一尊).” 《사기․육국년표(史記․六國年表)》


이 근거는 바로 진시황의 심리와 의지이고 또한 진시황이 실행하려고 하는 문화 전제주의다. 황제가 검다고 말하면 천하의 사람들도 모두 검다고 말할 수밖에 없고, 황제가 희다고 말하면 천하의 사람들도 모두 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어찌 사람마다 거침없이 말하고 갖가지 학문과 예술을 용납하겠는가! 따라서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의 말이 더 이상 분명할 수 없다.

진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이 고집 세고 사나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며, 제후 출신으로서 천하를 통일하여 마음먹은 대로 일을 행하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옥리를 임용하였으니 옥리는 모두 황제의 친애와 총애를 받고 있거늘, 박사는 비록 70명이지만 숫자만을 충족시켰을 뿐 중용하지는 않았으며, 승상과 대신들은 모두 이미 결정된 일들을 명령받으니 황제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되고 있다.(始皇爲人, 天性剛戾自用, 起諸侯, 幷天下, 意得欲從, 以爲自古莫及己. 專任獄吏, 獄吏得親幸. 博士數七十人, 特備員弗用. 丞相諸大臣皆雖成事, 倚辯于上.)

승상 이사는 바로 진 왕조에서 황제의 뜻에 가장 잘 따르고 일의 성사를 장악한 시황제의 대변인이자 집행자였다.

진시황은 분서가 그의 뜻이라는 것을 결코 말하기 꺼리지 않았다. 그가 분서를 명령한 다음해에 후생과 노생이 그를 증오하고 나서 도망치자 그는 부끄러움으로 크게 화가 나서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했다(吾前收天下書不中用者盡去之)”《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고 솔직히 말하고, 화를 많은 서생들에게로 옮겨 여러 서생들을 고문하라고 명령하여 유생 460여명을 생매장해 죽인 전대미문의 사건을 직접 꾸몄다. 분서(焚書), 금학(禁學), 갱유(坑儒)는 진시황이 추진한 문화전제주의의 극단적 조치다.

진 효공이 상앙을 등용하여 학문을 금하고 시와 서를 불사르고, 진 소양왕이 유학을 경시하여 순황을 버린 것부터 진시황이 이사에게 한비를 살해하도록 내버려두고 유생을 생매장한 것에 이르기까지 진문화의 이단을 용납하지 않는 전제성과 정신문화를 경시하고 끊어버린 편파성은 이로써 정점에까지 발전했다.

진시황은 진문화의 무력을 숭상하고 위엄을 과시하는 전통을 그대로 쫓으며 더욱 발전시켜 천하를 통치했으며, ‘법으로써 가르치고(以法爲數)’, ‘관리를 스승으로 삼는(以吏爲師)’ 문화전제주의 정책을 강제로 추진했고, 형벌과 살해로 위협하는 것을 즐기며 사상을 속박하여, 백성들은 두려워하고 복종함에서 원망하고 분노함으로 변하고 문인은 충성스럽게 섬김에서 배반하고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여 제국은 존재의 기초와 튼튼한 지주를 잃고 스스로 곧 폭발할 화산의 입구로 올라가 앉았다. 진문화는 천하의 문화를 전방위적으로 흡수하고 융합하여 정세에 순응하며 발전할 수 없었고 그 형세는 천하의 문화발전 물결로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초나라에서 자라고 순황을 스승으로 모시던 이사는 일찍이 넓고 깊은 초문화의 교육과 유구하고 찬란한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니 필경 진시황보다 현명하고 깨어있었다. 승상으로 임명된 후 그도 형벌을 완화하고 부역을 줄여 백성을 편안하고 나라를 안정되게 하려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었고, 부귀가 이미 극에 달했을 때, 그 역시 “물질이 극에 달하면 곧 쇠약해진다”는 사실을 알았고 공을 이루면 물러나야한다는 진리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은 사욕에 깊이 빠지고 부귀에 미련이 남아 줄곧 진시황을 따르며 극진히 아부하는 일에 능숙해져 지혜와 힘을 다하여 진시황이 전제적인 폭정을 추진하고 진문화의 전제성과 편파성을 널리 떨쳐 극단적으로 하도록 협조하여 자기도 모르는 새에 진 왕조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무덤을 파고 있었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사구(沙丘: 지금의 하북(河北) 광종현(廣宗縣) 경계에 위치)까지 순시 가서, 갑자기 병이 생겨 장생의 방법을 구하다가 얻지 못한 한을 품고 제국의 만세 보존의 어려움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후사조차 알맞게 정할 시간도 없이 죽었다. 조고(趙高)는 기회를 타 수행하던 공자 호해(胡亥)에게 조서를 위조하여 정권을 빼앗을 것을 종용하여 공로와 명망이 높고 현명하며 권세가 크던 승상 이사만을 두려워하였으므로 개인의 생사와 영욕의 이해관계로 이사를 유혹하고 몰아세워 마침내 함께 모반을 꾀했다.

이사는 이것이 “나라를 망칠 말(亡國之言)”이며 나라에 화를 입히는 계략임을 분명히 알았지만, 사욕의 구렁텅이에 휘말려 판단을 그르쳐 결국은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며, 눈물 흘리고 한숨을 쉬면서(仰天而嘆, 垂淚太息)” 굴복하고 국가의 안위와 민중의 화복을 돌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부귀영화의 보전만을 추구했다. 그러나 부귀영화는 한때 보전할 수 있었으나 그는 오히려 이때부터 철저히 자아를 상실하고 사욕이 더욱 강한 진 이세(秦二世)와 조고가 마음대로 부리는 부용(附庸)이 되었다. 진 이세는 정권을 찬탈하여 지위에 오르고 나서 천하의 신민(臣民)이 불복할 것이 두려워 조고의 계략을 이용하여 폭력으로 천하에 진위를 떨치고, 대신과 여러 공자들을 마구 주살하여 이분자를 제거했으며 엄한 법과 혹독한 형벌을 극도로 시행하여 백성들을 압박했다.

그는 그의 부친처럼 공로와 업적에 대한 욕구와 책임감도 없었고, 그의 부친처럼 명군(明君)이라는 허울로 자신의 사욕을 덮어 감출 줄도 몰라, 적나라하게 표명하기를, 자신이 천하에 군림하는 것은 바로 “뜻대로 욕심을 넓히고(賜志廣欲)”, “전적으로 천하를 자기에게 맞도록 하려(專用天下適己)”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함이고, 바로 천하의 소유와 만민의 수고로 자신의 끝없는 향락욕을 만족시키려는 것이라 하고, 또한 관동 6국 문화 중에서 추앙받는, 근검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멸사봉공하던 화하(華夏)의 성왕(聖王)을 공공연히 비웃었다. 그의 이러한 반(反)화하문화전통의 관념의 형성은 ‘탐욕스러움을 풍속으로 하고(以貪狼爲俗)’《한서․동중서전(漢書․董仲舒傳)》에 기록된 동중서(董仲舒)의 말), 공리를 추구하고, 도의를 무시하는 진문화 전통과 상관관계가 매우 크며, 진문화와 관동 6국 문화의 가치관에서의 차이를 반영한다.

따라서 그는 교만하고 사치스럽고 음란하며, 잔인하고 포악하고, 무수히 살육하여 안심하고 살 수 없는 민중이 무장봉기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이사의 통찰력으로 어찌 그의 소행을 예상치 못하고 스스로 멸망을 취했단 말인가? 이사도 일찍이 권고와 간언을 했었지만, 결국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두려워하고 사적인 정에 약해져 권고는 무효가 되고 간언은 무력해졌다. 초나라 사람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의병을 이끌고 멀리 삼천(三川)까지 신속하게 진군하여 조정의 관리들이 승상을 질책하여 실직하게 되었을 때, “이사는 두려워하였고 녹봉을 중히 여기며,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는데, 이에 2세 황제의 뜻에 아부하여 용서를 구하여(李斯恐懼, 重爵祿, 不知所出, 乃阿二世意, 欲求容)”《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마침내 천리를 위배하고 《상독책서(上督責書)》를 올려 백성의 죄를 감찰하여 형벌로 질책할 것을 주장하며 “천하를 차꼬와 수갑으로 여기라(以天下爲桎枯)”고 건의했다.

진 이세는 “이러하면 신하를 잘 감찰하고 문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도다(于是行督責益嚴).”라고 하여 진의 사회는 곧 “길에 다니는 사람 중에 반 정도가 형벌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사형당한 사람들이 날로 시장 바닥에 쌓여 갔으며, 많은 사람을 죽인 자가 오히려 충신이라고 여겨졌다.(刑者相半于道, 以死人日成積于市, 殺人衆者爲忠臣).” 이사는 “감찰하고 문책하는(督責)” 상서를 올려 그 명성을 모두 훼손했고, “감찰하고 문책하는” 행위는 이사가 진의 멸망을 촉진했다.

비록 이사가 미천한 출신으로 마음이 비뚤어져 아부와 순종으로 관용을 구했지만, 진 이세와 조고는 여전히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조고에게 모함당해 하옥되어 해명하는 상서를 올렸다.:

신이 승상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린 지가 30여 년이나 되었는데, 그때는 아직 진나라의 영토가 좁을 때였습니다. 선왕의 시대에는 진나라의 영토가 1,000리를 넘지 못하였으며, 병력도 몇 십만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재주를 다하여 삼가 법령을 받들고, 남몰래 지모가 있는 신하를 보내어 보석을 가지고 가서 제후들을 설득하게 하였습니다. 또 남몰래 군비를 갖추고 정치와 교육을 정비하였으며, 투사에게 벼슬을 주고 공신을 존중하여 그들의 직위와 봉록을 충분히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한나라를 위협하고 위나라를 약화시켰으며, 연나라와 조나라를 깨뜨렸고, 제나라와 초나라를 평정하여, 끝내 여섯 나라를 병합하면서, 그 나라의 왕들을 사로잡았고, 진나라를 내세워 천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번째 죄입니다.

영토가 광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건만 더욱 북쪽으로 호, 맥을 쫓아내었고, 남쪽으로 백월을 평정하여 진나라의 강성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죄입니다.

대신들을 존중하여 그들의 직위를 만족시켜서, 군신관계의 친밀함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세 번째 죄입니다.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구축하여 황제의 현명함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저의 네 번째 죄입니다.

눈금을 고치며 되(升)와 자(尺)의 단위를 통일시켜, 그것을 천하에 널리 펴서 진나라의 명성을 수립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다섯 번째 죄입니다.

수레가 달릴 수 있는 도로를 닦고 지방 순시를 즐겁게 하여 황제를 의기양양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여섯 번째 죄입니다.

형벌을 낮추고 세금을 덜어주어, 황제께서 민중의 마음을 얻도록 하였으며, 만백성이 황제를 받들어 죽어도 그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일곱 번째 죄입니다.

……(臣爲丞相, 治民三十余年矣. 逮秦地之陜(狹)隘, 先王之時秦地不過千里, 兵數十萬. 臣盡薄材, 謹奉法令, 陰行謀臣; 資之金玉, 使遊說諸侯, 陰脩甲兵; 飾政敎, 宮鬪士, 尊功臣, 盛其爵祿; 故終以脇韓弱魏, 破燕、趙, 夷齊、楚, 卒兼六國, 虜其王, 立秦爲天子. 罪一也. 地非不廣, 又北逐胡、貉, 南定百越, 以見秦之强. 罪二矣. 尊大臣, 盛其爵位, 以固其親. 罪三矣. 立社稷, 脩宗廟, 以明主之賢. 罪四矣. 更剋畵, 平斗斛度量, 文章布之天下, 以樹秦之名. 罪五矣. 治馳道, 興游觀, 以見主之得意, 罪六矣. 緩刑罰, 薄賦斂, 以逐主得衆之心, 万民戴主, 死以不忘. 罪七矣.……)

그가 스스로 진술한 소위 일곱 가지 대죄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진에 들어와서 진나라를 위해 세운 공적을 진술한 것이며, 비록 과실은 말하기 꺼리고 그 공을 과장해서 묘사했을지라도, 대체로 그가 진 왕조의 창립과 건설과정에서 활약한 중요한 역할을 여실히 진술했다. 그러나 진 이세와 조고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이복자를 축출하니 어찌 공신을 애석해하겠는가?

기원전 208년 그는 함양시(咸陽市)에서 허리가 잘려 죽었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아들과 서로 마주보고 통곡하며 옛날 고향에서 사냥 다니며 놀던 것에 대한 그리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 그의 명예와 이익을 쫓던 일생과 한 차례의 부귀영화가 결국에 와서는 상채(上蔡)의 평민보다 못했던 것이다! 기왕 이날이 있을 바에야 당초에 이러한 광경, 이러한 운명을 쫓을 필요가 있었던 가에 대해 어찌 감개하고 상심하며 후회막급해하지 않겠는가? 이사가 죽고 나서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진 왕조는 붕괴되었다.        

진나라가 시와 서를 불사르고 학문을 금지하고 유생들을 생매장하여 “진대(秦代)에는 문학이 없었다(秦世不文).”유협(劉勰)《문심조룡․전부(文心雕龍․詮賦)》 그러나 이사는 육예(六禮: 예. 악. 사. 어. 서. 수)를 모두 알아 정치상 필요하면 때때로 문장을 지었다. 세상에 전해오는 것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진대의 문장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가 진나라에 들어와 객경(客卿)이 되었을 때 지었던 《간축객서》는 역사 인용과는 거리가 멀고 비유에 가까우며 비유가 교묘하고 조탁이 훌륭하며, 표현이 교묘하고 문장의 배열이 가지런하며 힘차면서도 우아하여 전국시대의 초사(楚辭)와 초부(楚賦)의 풍격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가 진시황을 따라 순시할 때 지었던 공적과 은덕을 노래한 각석(刻石)문자는 《진산각석(秦山刻石)》, 《지부각석(之罘刻石)》, 《낭아대각석(琅玡臺刻石)》등이 있는데, 비록 상주(商周)의 송시(頌詩)형식의 사언체를 모방했지만,  그가 쓴 압운은 송시와는 또 다른 것이어서 셋째구에 협운(協韻)이 많고 둘째구 혹은 넷째구에 협운이 있는 것도 적지 않아 초부(楚賦)의 유풍을 드러낸다. 그의《상독책서(上督責書)》에 이르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언사가 인정에 따르지 않으며, 문풍(文風)이 각박하고, 문장이 싱겁고 맛이 없어, 이미 초풍(楚風)을 크게 위배했다. “현존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진의 문장은 이사 한사람뿐이다(由現存者而言, 秦之文章, 李斯一人而已)” 노신(魯迅)《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 1981년 제1판, 제382쪽라고 하여 초풍이 변화한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사의 힘에 의존하여 진나라 황제가 6국을 병탄하고 제업(帝業)을 완성했으며, 이사의 힘에 의존하여 진나라 황제가 백성에게 차꼬와 수갑을 채우고, 천하를 빼앗았다. 사회통일과 역사발전의 촉진으로 말하자면 이사는 천고의 공훈을 세웠고, 진문화의 전제성과 편파성의 극단적인 발전의 촉진으로 인한 사회의 거대한 손해를 조성한 것으로 말하자면 이사는 천고의 대죄를 지었다. 이사의 그 재능과 지혜로 공로는 높이고 잘못은 피해야한다는 걸 모른 것은 바로 그가 개인의 사리사욕으로 진 황제의 사리사욕에 투합 시키고, 개인의 공리추구로부터 진문화의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전통을 더욱 발전시킨데 있다.

사마천(司馬千)이 말한바와 같이 “이사는 육예의 귀결을 알면서도, 군주의 결점을 보완하는 공명정대한 정치에 힘쓰지 않았고, 작위와 봉록의 막중함을 유지하면서, 군주에게 아부하고 구차하게 영합하였다(斯知六禮之歸, 不務明政以補主上之缺, 持爵祿之重, 阿順苟合).”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한나라 초의 인사(人士)는 이사가 군주에게 아부하고 순종한 것으로 그의 충성됨을 찬양하였는데, 그들은 이사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위해 진나라 황제에게 충성한 것이지 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나라에 충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몰랐기에, 사마천은 세속의 공론을 힘써 배제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사가 극진하게 충성하였으나 오형을 당하여 죽은 줄 알지만, 그 본말을 살펴보면 세속의 공론과는 다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사의 공적도 주공이나 소공과 같은 대열이었을 것이다.(人皆以斯極忠而被五刑死, 察其本, 乃與俗議之異. 不然, 斯之功且與周、召列矣.)”《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사욕은 어느 정도는 확실히 인간이 위를 향해 분발하게 격려할 수 있고, 사욕에 연연하여 공리를 구하는 것도 일정한 조건하에서는 확실히 인간이 공로를 세우고 이로 인하여 역사의 전진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욕의 악질적인 팽창과 공리의 좁고 한정된 추구는 반드시 사욕을 과시하여 공의(公義)를 해치고, 공리를 추구하여 국가를 훼손하게 마련이다. 온화하고 학문이 넓고 고상하며, 도(道)를 숭상하고 덕(德)을 중시하는 초문화는 이사의 재능과 지혜를 양성해냈고, 탐욕심이 강하고 의(義)가 부족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진문화는 이사의 사욕을 팽창시켰다. 이사는 초문화의 정신을 버리고 진문화 전통을 떨쳐 일으켜 공적도 매우 높지만, 잘못 또한 크다. 이사의 번영과 멸망은 후인들에게 교훈이 되었으며, 이사의 공로와 죄는 후인들에게 반성이 되기에 충분하다.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1) 《좌전(左傳)》선공(宣公) 12년.
2) 《좌전(左傳)》선공(宣公) 12년.
3) 《전국책․초책(戰國策․楚策)》.
4) 《전국책․초책(戰國策․楚策)》.
5) 《전국책․초책(戰國策․楚策)》.
6) 《한비자․화씨(韓非子․和氏)》.
7) 하호(何浩) 《논초국봉군제적발전여연변(論楚國封君制的發展與演變)》, 《한강논단(漢江論壇)》1991년 제5기.
8) 굴원(屈原)《이소(離騷)》.
9) 송옥(宋玉)《구변(九辯)》.
10) 굴원(屈原) 《구장․섭강(九章․涉江)》.
11) 《전국책․중산책(戰國策․中山策)》에 기록된 백기(白起)의 말.
12) 굴원(屈原)《대초(大招)》.
13) 굴원(屈原)《대초(大招)》.
14) 《한서․가의전(漢書․賈議傳)》에 기록된 가의(賈議)의 말.
15) 《순자․유효(荀子․儒效)》.
16) 《순자․의병(荀子․議兵)》에 기록된 이사(李斯)가 손경자(孫卿子: 순자)에게 물어본 말.
17) 《사기․소진열전(史記․蘇秦列傳)》.
18) 《사기․소진열전(史記․蘇秦列傳)》.
19) 《사기․소진열전(史記․蘇秦列傳)》.
20) 《사기․장의열전(史記․張儀列傳)》.
21) 《화양국지․촉지(華陽國志․蜀志)》.
22) 《사기․진본기(史記․秦本紀)》.
23) 《전국책․진책(戰國策․秦策)》.
24) 마비백(馬非百)《진집사(秦集史)》, 중화서국(中華書局) 1982년 제1판, 제61쪽.
25) 《사기․진본기(史記․秦本紀)》.
26)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27)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28) 《한비자․내저설하(韓非子․內儲說下)》.
29) 《한비자․내저설하(韓非子․內儲說下)》.
30) 《전국책․조책(戰國策․趙策)》.
31)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32) 마비백(馬非百)《진집사․위염전(秦集史․魏冉傳)》, 중화서국(中華書局), 1982년 제1판, 제175쪽.
33)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34)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35)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36) 마비백(馬非百)《진집사․위염전(秦集史․魏冉傳)》평어. 중화서국(中華書局), 1982년 제1판, 제181쪽.
37)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에서 사마정(司馬貞)이 “숨은 사리를 찾았다고 칭찬하며 말했다.”
38) 《사기․양후열전(史記․穰侯列傳)》.
39) 마비백(馬非百)《진집사․미융전(秦集史․羋戎傳)》참고.
40)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41)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42)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43)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44)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45)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46)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47) 이사(李斯)《간축객서(諫逐客書)》.
48)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49) 《한비자․존한(韓非子․存韓)》참고.
50) 《사기․노자한비열전(史記․老子韓非列傳)》.
51) 《사기․노자한비열전(史記․老子韓非列傳)》.
52) 《한비자․초견진(韓非子․初見秦)》참고. 고금의 많은 학자들은 이 문장이 한비의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근거는 바로 문장 중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亡韓)’라는 말이 한나라의 공자인 한비의 입에서 나올 리가 없고 게다가《존한(存韓)》문장의 견해와 《사기(史記)》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문장의 ‘조나라를 공격하여 취하고 한나라를 멸망시키라는(擧趙亡韓)’ 말과 《존한(存韓)》편의 “두 나라(조나라, 제나라)의 일을 마치면, 한나라는 서찰을 보내어 안정시킬 수 있다.(二國(趙、齊)事畢, 則韓可以移書定也)”는 말과 일치하며, 이는 모두 한비의 진나라를 약화시키고 한나라를 보존하려는 계책으로, 소위 이사가 말했던 “그의 변명은 속이려는 계획을 감추어 진나라에서의 이익을 탐하려는 것(辯說屬辭, 飾非詐謀, 以鈞利于秦)”이다.
53) 《한비자․존한(韓非子․存韓)》.
54) 《한비자․주도(韓非子․主道)》.
55) 《사기․백기왕전열전(史記․白起王翦列傳)》에 기록된 왕전(王翦)의 말.
56) 《사기․노자한비열전(史記․老子韓非列傳)》.
57)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58)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59) 《여씨춘추․귀공(呂氏春秋․貴公)》.
60)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61) 《한서․형법지(漢書․刑法志)》. 복건(服虔) 주(注): “縣은 무게를 다는 것이고, 石은 120근이다. 시황제가 읽어야할 문서가 하루에 120근 정도가 되었다.(縣,稱也.石,百二十斤也.始皇省讀文書,日以百二十斤爲程)”
62)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에 기록된 후생(侯生), 노생(盧生)의 말.
63)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에 기록된 후생(侯生), 노생(盧生)의 말.
64)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에 기록된 후생(侯生), 노생(盧生)의 말.
65)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66)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67)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68)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69)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70)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71) 《사기․육국년표(史記․六國年表)》.
72)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73) 《사기․진시황본기(史記․秦始皇本紀)》.
74)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75) 《한서․동중서전(漢書․董仲舒傳)》에 기록된 동중서(董仲舒)의 말.
76)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77) 유협(劉勰)《문심조룡․전부(文心雕龍․詮賦)》.
78) 노신(魯迅)《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 인민문학출판사(人民文學出版社) 1981년 제1판, 제382쪽.
79)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80) 《사기․이사열전(史記․李斯列傳)》.



說文解字 漢典 http://www.zdic.net/z/29/sw/9DF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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