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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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http://www.cheramia.net
   안원전의 담론 390. NHK ‘료마전’의 료마와 요시다쇼인(吉田松陰)


(written by 안원전)*참고자료 형태로 방명록에 보관한 글. 다듬어지지 않은 초안형태로 그냥 올림

*일본의 장동건+정우성, NHK ‘료마전’의 료마 역 후쿠야마 마사하루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188649
메이지유신 2년 전, 막부의 신선조에 의해 33세에 암살된 료마의 뜻대로 대정봉환(사무라이 막부정권의 대권을 왕권에 넘김) 에 의해 막부정권은 왜왕에게 넘어갔지만 정작 그가 존경한 고메이 왕은 독살되고 16세 어린 메이지 왕은 실권을 못 갖고 허수아비 신(왕)이 되어 신일본 정부는 실권 총리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되었으니 료마는 절반만 성공한 것.






Click here! 사카모토 료마
신선조 42화(사쵸동맹을 성사시킨 료마가 막부낭인 미마와리 구미 사사키 타다사부로에게 살해당하는 대목: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389

일본TV 대하드라마- 신선조(新鮮組)
도구가와 막부말기에 막부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충성하는 의리의 무리에 관한 이야기로 지금에도 일본 천황에게 충성하는 일본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신선조 1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734
신선조 2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800694
신선조 3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749
신선조 4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761
신선조 5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771
신선조 6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785
신선조 7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797
신선조 8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830
신선조 9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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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 38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319
신선조 39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331
신선조 40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351
신선조 41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376
신선조 42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389
신선조 43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389
신선조 44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4736
신선조 45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5365
신선조 46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6028
신선조 47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6020
신선조 48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6897
신선조 49화: http://www.mgoon.com/player/full.htm?VID=1276997
참고로 일본사를 잘 모르는 한국인은 신선조가 무엇인지 그리고 신선조가 일본인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현대 일본인의 약 90% 이상이 마치 한국인이 춘향전이나 흥부놀부전 알고 있듯이 알고 있는 분야가 일본근대사에 등장하는 신선조 사무라이 얘기입니다. 삼국지의 영웅보다 신선조의 영웅을 더 좋아하는 것이 현대 일본인들입니다. 신선조 온라인게임에 푹 빠져서 사는 것이 일본 젊은이들입니다. 신선조-신센구미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천황 중심의 신일본 정부 건설에 맞서 싸운 막부 최후의 사무라이 특공대 얘기입니다. 신선조(新選組)의 組는 영어로 Squad라 하며 한국에서는 군대용어로 대(隊)라 합니다. 굳이 해석하면 시대에 뒤쳐진 덕천가강 사무라이 막부를 토벌하고자 허수아비 왜왕을 중심으로 권력을 재편하려 한 신일본 정부건설군에 대항하기 위해 도쿠가와 사무라이 막부정부에서 최후의 결전을 위해 "새로 뽑은 사무라이 특공결사대"라는 뜻 정도 됩니다. 그리하여 현대 일본인들은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관우,장비, 조자룡, 여포,마초, 등의 영웅보다 신선조의 콘도 이사미 신선조 국장, 콘도 이사미 친구로 신선조 최고 실권자로 행세한 여성같은 절대 미남 히즈카타 토시조, 문무를 겸비한 신선조의 제갈량으로 이토에 밀려 조직을 위해 스스로  셋뿌꾸(할복자살)를 자처한 야마나미 케이스케 총장, 눈빛 하나로도 능히 고수들을 제압하는 무서운 카리스마 신선조 최고의 고수 세리자와 카모-자신을 지휘하는 신선조 콘도이사미 국장도 세리자와 카모아래 무릎꿇고 난로옆에서 몸이 익어가도 참으며 하루종일 용서빌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졌으나 의리와 동료와의 화합이 없는 그는 여포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 폐결핵을 숨기며 싸우는 동안의 아이돌 최고수 칼잡이 오키타 소우지, 쌀집 아들로 돈관리를 못해 셋뿌꾸(할복자살)당하는 순둥이 오가다 슌타로, 조직의 정도만을 걷는 의리의 충성파 잘생긴 신사 사무라이 나가쿠라 신바치,계략을 좋아하는 잔머리 대가 다케다 칸류사이, 순정파 장난꾸러기 사무라이 하라다 사노스케, 칼의 힘 하나만 믿고 사는 입이 곤륜산인 자객 사이토 하지메- 일본인은 이 사이토를 가장 존경하는데 존경하는 캐릭터를 보면 일본인의 본성과 지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면전에서 혼내(속마음)을 결코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치는 성격 소위 면종복배의 이율배반 성격의 일본인) , 야심으로 가득차 신센구미를 배신하고 존왕파 신일본 정부군으로 신선조를 대거 이끌고 배신하는 이토 오오쿠라(이토 카시타로 개명) 외 무림고수임을 철저히 숨기고 멍청이로 행세하며 출세를 위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스테스케 등 등의 인물에 더 관심있어 합니다(아래 NHK 방영 신선조 1화-49화  동영상 시리즈 전편을 갈무리 해 놓았으니 시간있을 때 참고해 볼 것):역설적이지만 총에 맞선 이들 신선조 칼들의 못난 역사를 일본 근대개화사에 남긴 것은 마지막에 배신한 나가쿠라 신바치가 "낭사문구보국기사"라는 신선조 일기를 통해서이고 처형당한 콘도이사미  국장과 하코다테 전투에서 최후를 맞이한 히즈카타 토시조의 묘비를 건립해 준것도 그의 의리때문이었다.(참고 어느세계나 의로움없이 막되먹은 인간은 공공의 적이 됩니다. 최고의 고수임에도 성질이 더러워 공공의 적이 된 세리자와 카모, 그의 실력은 능히 삼국지의 여포급의 최고수중의 고수임에도 결국 의리 꽝인 여포의 비참한 운명처럼 그보다 하수들인 히즈카타 토시조의 조직력에 걸려 비참하게 죽습니다. 세리자와 카모를 빼면 신선조 최고수인 20대 초반의 동안의 미소년 아이돌 칼잡이 오키타 소우지가 1번 조장으로 으뜸인데 신선조를 출범하기전 오키타를 이긴 검객은 바로 셋뿌꾸로 생을 마감한 야마나미 케이스케 총장, 오키타 소우지와 거의 비슷한 고수로는 말없는 자객 사이토 하지메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장난꾸러기 사무라이 하라다 사노스케와 출세를 위해 순진한 바보역을 자임하는 스테스케는 신선조의 스토리를 재미있게하는 양념역할의 캐릭터라 생각한다.  막부 사무라이 시대에 실권은 막부에서 쥐었고 왜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런데 서구 제국주의가 동양으로 도도히 밀려오던 즈음 미국제국주의 선봉대 페리호 흑선이 개항하라하면서 막부사무라이들과 일대 전쟁을 치룬다. 결론은 총포를 사용하는 페리군단 앞에 막부사무라이는 전멸. 이를 지켜본 일본 막부 사무라이 신지식인들이 막부시대는 끝났다 선언하고 토막론(막부토벌론)을 앞세우며 허수아비 일본왕을 동양권의 중심 천황으로 삼아 동양권을 대동아권으로 묶어 서양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그 개화파 선구자의 시조가 사쿠마 쇼잔이며 일본근대화의 정신적 우익뿌리이자 스승이 바로 그의 제자인 요시다 쇼인이다) 이를 위해 동양 이웃나라를 우선 식민지로 삼는 대 침략전쟁이 필요한 거고...료마 역시 이런 생각을 가진 앞서있는 사람중 하나였다. 신선조는 사실 일본역사에 있어 막부타도와 함께 신일본 정부 건설과 개화라는 시대 조류에 거슬리는 막부 수호라는 역류에 올라타 다들 비참하게 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칼잡이 사무라이들의 막부 사랑과 야망에 대한 이야기로 일본인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 주제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한국인의 정서로 볼때 이러한 사무라이 칼잡이의 역사문화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고 접근하기 어려운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지만 가까이 하기에 먼 이웃의 문화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음미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안원전 코멘트)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대하소설  "료마龍馬가 간다"가 원작이 된 NHK ‘료마전’의 료마 열풍은 명치유신의 기반을 닦은 료마자체보다  료마 역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일본 정치와 경제의 어두운  그늘때문으로 보인다. 의사출신인 료마는 메이지 혁명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에도(江戶)막부를 쓰러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막부를 받쳐 온 가장 큰 파벌 사츠마(薩摩)와 쵸슈(長州)의 연합, 이른바 [삿쵸(薩長) 동맹]을 비밀리에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의 계기를 마련해 일본인의 영웅이 되었다. 료마는 혁명직전인 1867년 33세의 생일날에 막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교토에서 암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겉으로 드러난  현상 내면을 살펴보면 명치유신의 초석을 다졌다고 하는 료마보다 한 길 위로 쳐야 하는 인물이 있으니 1830년에 일본 서남 조슈한(長州藩)에 태어나 1859년에 에도막부에 의해 29세에 처형당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본명은 노리가타(吉田矩方·1830∼1859))이라는 인물이다.  참고:요시다 쇼인 역사관(사진감상)/ http://toads.blog.me/20169804034

료마는 시대에 쳐진 허약한 막부정부를 토벌해 쳐 없애자는 도바꾸론_討幕論을 제창하여 메이지유신과 현재의 미일공조의 뿌리가 되는 사상적 기초를 가지고는 있다. 언뜻  2차대전 패전이후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미 군정시대 이후 냉전시대로 인한 오끼나와 미군기지 사용 등 문제와 한반도 1950년 6.25 남북전쟁 당시 군수물자 조달국으로서의 은원관계때문에 벌어진 미일공조가 액면가인 줄 알지만  료마의 토막론(討幕論)을 일본인은 높이 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료마의 토막론 역시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의 진품에 비하면 짝퉁에 불과하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비하면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을 뿐 아니라 보잘 것 없고 옹색하기만 한 일본 근대사상가의 아버지로 만 29세로 명을 마친 Click here!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누구인가.

사이코 다까모리(서향융성),오쿠보 도시미치(대구보이통:현재 한류중심거리가 동경의 신쥬쿠와 인근 신오쿠보거리다)와 함께 메이지유신 3걸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목호효윤)가 모두 그의 문하생이다.료마가 명치유신을 기초잡았다 함은 1866년 1월21일 교토에서 당시 최대 실력자였던 사츠마번의 사이코 다까모리와 쵸우슈(장주번)번의 기도 다카요시가 회담해 삿쵸우 동맹이 이루어지게 주선함으로써 명치유신이 탄생했기 때문이지만 사상적인 기초는 그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있어서였고 일본 근대화의 큰 족적을 남긴 그들 모두는 한국인에게는 서양 제국주의의 짝퉁으로서 모두 악질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영불의 대리전 막부와 삿쵸우 동맹의 전쟁 http://blog.naver.com/ywon605/70154377249

서양 제국주의는 고이즘이라 하여 유대인만 사람이고 그외의 모든 족속은 개돼지라 잡아죽여도 된다 하였고 그 겉모습을 기독교로 포장해 인도, 말레이반도, 남북 아메리카인디언을 종족살해(제노사이드Genocide)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일본의 근대화 사상가로부터 교육받은 정치가들 역시  서양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논리로 안중근 장군의 동양평화론에 반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주장해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병탄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만주사변, 2차 세계대전으로 징병,징용,위안부로 조선인을 개짐승 다루듯했다.

*http://blog.naver.com/shiroyume?Redirect=Log&logNo=150083007081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4157603&qb=7JqU7Iuc64ukIOyHvOyduA==&enc=utf8§ion=kin&rank=3&sort=0&spq=0&pid=gtzReloi5TwssuURc%2Bhsss--075747&sid=TBzRrxyIHEwAAEjRQkA
*http://blog.daum.net/wahibudong/12137589

요시다 쇼인은 마쓰시다의 정경의숙 같은 정치인 배출기관의 창시자로서, 도쿠카와 이에야쓰(덕천가강) 정권의 마지막을 장식한  도쿠카와 요시노부 쇼군 막부를 타도, 폐지해 유명무실한 왕을 다시 복권하여 서양의 진출에 맞서 대동아 공영으로 중국 등 아시아를 제압할 것을 주장했다.-이를 존왕양이(尊王攘夷)라 함- 가히 요시다 쇼인은 왜왕중심의 신일본 제국주의(大和魂) 아래에 만인평등하다는 식민지 대동아 공영권에 서양사상을 접목시키는 놀라운 세계적 안목(개화사상)을 갖추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왜왕아래 만인 평등이라 함은 무슨뜻인가. 사무라이 정권을 압도하며 새로이 등장한 총포를 사용하는 서양문명에 맞서기 위해 그간의 사무라이 막부정권을 해체하고 사무라이 정권아래 허수아비로 존재했던 왜왕을 하늘이 낸 천황으로서 천황중심의 대동아(동양)권를 새롭게 구축할 필요를 느꼈다.  

일본을 동양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중심국가 천조국(天朝國)으로 삼아 청이나 조선 이외의 모든 동양국가는 일본을 섬기는 식민지로서 서로간의 위격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바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한 왜왕아래 만인 평등이다.

현대 일본우익은 바로 이러한 천황중심의 대동아 공영권을 만들기 위한 식민지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자들이다. 일본 야쿠자와 독도문제 및 일본역사교과서 왜곡을 임삼는 일본극우주의의 기원도 바로 이들로부터 기원한 것이니 그 정점에는 바로 요시다 쇼인이 있다.  한국의 우익은 바로 이들 일본우익을 추종하는 친일파세력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혜를 받아 해방이후 이승만의 반공주의 우산정책에 의해 온존하여 박정희 정권, 전두환 노태우정권까지 정경유착으로 세력을 비대화시킨 세력이다.(이들 후예인 2차대전 전범 사사키 재단이 일본 극우 후소샤 교과서를 출판하고 연세대 아세아 연구소에 자금을 대 친일세력을 뿌리내리려 부심하고 있으며 뉴라이트 세력인 <시대정신>에 연구자금을 대주어 그 세력이 학계, 사상계, 정계까지 진출하고 있는 양상이다. 시대정신은 정체가 드러나자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의 뉴라이트 월간 <시대정신>에 크게 감동했다며 게재한 요시다 쇼인의 고향 야마구치현(山口県) 하기시(萩市):http://www.sdjs.co.kr/read.php?num=340&quarterId=SD200904

각설, 요시다 쇼인 그는 메이지 유신 이전 이후의 일본내 걸출한 사상가, 정치가를 길러냈다 그 산실이 자신의 고향인 조슈한(長州藩)에 설치한 쇼까 손지쿠(松下村塾)이다. 여기에서 일본 근대화의 기라성같은 80여명의 인물이 그의 무릎아래서 정치수업을 받고 자라났다. 일본근대화과정의 거의 모든 기라성같은 인물들은 그의 사상적 영향을 음으로 양으로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씨뿌려 개화된 것이라 보면 된다.

대략, 일본국 근대화의 화신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晉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후일의 기토 다카요시(木戶孝允)이자 명치정부의총리대신), 촌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명치정부의 초대 총리대신이 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후일의 외무대신, 조선공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후일의 내무대신, 육군대신)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모두 다타미 여덟장 크기의 요시다쇼인(吉田松陰)슬하의 송하촌숙에서 1년 남짓 호연지기를 배운 젊은이들이었다.  



요시다쇼인을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총리. (13일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시에 위치한 쇼인신사를 참배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아베 총리의 친 조부가 바로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  쇼인신사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에 영향을 미친 사상가 요시다 노리가타(吉田矩方·1830∼1859)를 기리는 신사다. /사진=TV아사히 동영상 캡처)쇼인(松陰)은 노리가타의 호다.뉴스화면 우측상단에 귀성중(歸省中)의 아베총리가 쇼인(松陰)의 묘앞(墓前)에...라는 자막이 떠있다.일본 야쿠자의 최대파벌인 야마구치 구미가 바로 요시다 쇼인의 고향 야마구치(山口)현에 뿌리박게 된 역사적 이유다.(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3081417364589172&outlink=1)
*아베 총리가 참배한 요시다 쇼인 묘지(사진 중간정도) http://toads.blog.me/20169804034

Click here! 요시다 쇼인의 후예인 전후 일본 야쿠자의 대부 두산만(도야마 미쓰루)과 현양사(겐요샤) 및 흑룡회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본명은 요시다 노리가타(吉田矩方·1830∼1859).제자양육한 쇼까 손지쿠(松下村塾) 정경
*주요사상:(1)일군만민론(一君万民論)-국가가 바쿠후(사무라이 막부정권)가 아닌 덴노(왜왕)에 의해 통치되어야 하며 그 밑의 만민은 모두 평등해야 한다는 사상. 후의 메이지 정부의 핵심 사상이기도 하다. (2)비이장목(飛耳長目)-전국의 주요 지방에 사람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케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메이지 정부에도 영향을 미쳐 당시의 해외 정세를 자세히 알 수 있게 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3)초망굴기(草莽崛起)-조정(朝廷)이 일본을 통치하기 위해 일반대중(초망에 비유)도 떨쳐 일어나 바쿠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 (4)대외정책-류큐(오끼나와)를 일본에 편입시키고 훗카이도를 개척하며 조선을 속국화시킨 뒤 만주, 타이완, 필리핀을 영유(領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훗날의 일본의 대외 정책에서 그대로 실제로 실행 되었다. 일본이 요시다 쇼인을 존경하는 것과 한국이 요시다 쇼인을 혐오하는 것은 주로 여기서 비롯된다.
[출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작성자 shiroyume      
http://blog.naver.com/shiroyume?Redirect=Log&logNo=150083007081
부연참고:사쿠마 쇼잔의 제자인 요시다 쇼인은 저서 <유수록(幽囚錄)>에서 그는 “무력 준비를 서둘러 군함과 포대를 갖추고 즉시 홋카이도[蝦夷]를 개척하여 제후(諸侯)를 봉건(封建)하여 캄차카와 오호츠크를 빼앗고, 오카나와[琉球]와 조선(朝鮮)을 정벌하여 북으로는 만주(満州)를 점령하고, 남으로는 타이완[臺灣]과 필리핀 루손[呂宋] 일대의 섬들을 노획하여 옛날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진취적인 기세를 드러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배경이 되는 정한론(征韓論)과 대동아공영론(大東亞共榮論) 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두산백과>
*요시다 쇼인신사의 기념관에 있는 그의 제자 중 이등박문 실물 밀랍과 초대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사다케 실물 밀랍 인형. 한국인은 안중근 중장이 쏘아죽인 이등박문의 실물을 모르기에 한 번 보라고 소개한다. 쇼까 손지쿠(松下村塾) 강의실 내부 전경 사진도 있으니 한 번 보기 바란다.http://toads.blog.me/20169804034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목호효윤):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요시다 기숙학교에서 공부하며 존왕양이의 사상을 배웠다. 학생 시절에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릴 운동을 이끈 조슈 번의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냈다.조슈 번 정부의 우두머리로서, 사쓰마 번의 급진파 사무라이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와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는 함께 쇼군을 무너뜨리고 일본 천황을 권력에 복직시키기 위한 쿠데타를 지도한 유신 삼걸로 알려졌다.


(사이코 다까모리: 西郷隆盛 (さいごうたかもり) 서향융성[*], 1828년 1월 23일~1877년 9월 24일)는 일본의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정치가이자 무사이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고, 정한론(조선 정벌론)을 주창하기로 유명하였다. 메이지 유신 중앙정부를 장악한 오쿠보의 과감한 제도 개혁의 장애물로 제거되어 낙향. 1877년 사쓰마 번 무사들의 반란인 세이난 전쟁의 패배후 자결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일본어: 大久保利通 (おおくぼとしみち) 대구보이통[*], 우측 사진은 젊은 사무라이 시절 모습.  1830년 9월 26일 ~ 1878년 5월 14일)은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에 활약했던 일본 사쓰마노쿠니 출신의 정치가였다. 264년 동안 일본을 통치해온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유신삼걸로 불린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서 근대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사쓰마 번의 무사 출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뜻을 같이하며 '바쿠후 타도 운동'을 이끄는 개혁파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사쓰마 번의 무사 출신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뜻을 같이하며 '바쿠후 타도 운동'을 이끄는 개혁파의 중심 인물로 성장하였다. 1866년 새 유신 정권이 수립된 뒤에 참의(參議)가 되어 과감한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일파가 하야한 뒤는 메이지 유신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지조(地祖) 제도 개혁, 식산진흥책 등을 추진하여 부국강병의 기틀을 쌓았다. 세이난 전쟁 진압 후인 1878년 도쿄의 기오이자카에서 시마다 이치로 일당에게 암살당했다.

NHK "료마전" 이후 일본은 마치 한국의 대장금열풍이상으로    

일본언론이 여론조사를 했더니 1위를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차지했다. 그리고 2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3위가 오타 노부나가(織田信長), 4위가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수상, 5위가 요시타 시게루(吉田茂), 6위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으로 나타났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를 비롯해 18위 요시다 쇼인의 후계들인 5위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8위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10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그 스승을 올라타고 있는 것이  일본인의 정서다. 당연히 소설과 드라마 언론보도 영향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다.


*일본인이 뽑은 일본의 영웅 20인
1)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2)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3)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4) 다나카 가쿠에이(田中 角榮)
5)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6)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7) 후꾸자와 유기찌 (福澤諭吉)
8)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9)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江)
10)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
11)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12)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1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4)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15) 우에스기 요오잔(上杉 鷹山)
16) 미나모토 요시츠네(源 義經)
17)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 退助)
18)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본명은 요시다 노리가타(吉田矩方·1830∼1859)
19) 카츠 카이슈(勝海舟)
20)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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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さかもと りょうま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1867)
지금의 고치(高知)縣 출신. 남녀노소·직업·학력을 불문하고 언제나 영웅서열 1위를 차지하는 국민적 영웅이다.
메이지 혁명이라는 정치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에도(江戶)막부를 쓰러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츠마(薩摩)와 쵸슈(長州)의 연합, 이른바 [삿쵸(薩長) 동맹]을 비밀리에 성사시켜 메이지 유신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혁명직전인 1867년 33세의 생일날에 막부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교토에서 암살되었다.
동분서주하며 파란만장한 짧은 삶 속에서 아무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를 낸 혁명가였기에 그를 서열 1위에 올려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료마는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 기발한 발상, 탁월한 협상력과 실행력을 갖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시 서구의 서세동점의 시대적 배경하에서 일본이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고 국가위기를 구원해준 구세주로 추앙되고 있으며, 오늘날 일본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불신, 경제의 침체 등과 맞물려 료마 같은 정치리더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어 그의 주가는 더욱 치솟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고액권이 발행될 경우 그 사진의 인물로 꼽아 놓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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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とくがわ いえやす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 전국시대 무장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도토미[遠江]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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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おだ のぶなが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 전국시대 무장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專制武將)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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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たなか かくえい 다나카 가쿠에이(田中 角榮)(1918-1993)
중학교 졸업의 학력으로 학벌의 텃세가 드센 일본정계에서 총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록히드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사건으로 감옥살이까지 했음에도 4위에 오른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으나, 탁월한 리더십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국교정상화를 성사시킨 정치력을 인정받은 것 같다. 또한 그의 딸이 아버지 못지 않게 장관으로 국회의원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어 부친의 후광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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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よしだ しげる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1878-1967)
태평양전쟁중 상공장관을 역임한 전력으로 전쟁후 전범으로 몰렸으나,
전쟁중 미국과 영국에 대해 호의적인 소위 친영미파였기 때문에 군부와 대립했던 연고로 구제되어 외상을 거쳐 수상을 역임했다. 패전후 7년동안 정권을 담당하면서 폐허가 된 일본을 재건하고,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을 성사시키는 등 전후처리에 정치력을 발휘하여 오늘날 대국 일본의 기초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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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とよとみ ひでよし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임진왜란을 일으켰으며. 전쟁중에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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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ふくざわ ゆきち 후꾸자와 유기찌 (福澤諭吉) (1835-1901) 메이지시대 계몽사상가
일본의 지폐 1萬円券 사진의 주인공으로, 지금의 오이타(大分)縣 출신.
영어를 독학으로 배워 1860년 각료의 미국방문시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서구 문화를 체험한 후 [學問のススメ] [西洋事情] 등의 책을 써서 일본국민을 계몽시키고, 일본최초의 대학인 게이오(慶應義塾)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분야에 헌신했다. 그러나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 時事新報에 탈아론(脫亞論)이라는 논리를 펴서 조선을 능멸했다.
그리고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박영효 등이 망명해 오자 자신의 집에서 기거토록 배려하는 등 간접적으로 조선의 내정에도 간여했다.
자국민에게는 [天は人の上に人をつくらず, 人の下に人をつくらずといえり]
즉,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민권운동가였지만, 아시아국가의 민권은 멸시한 것으로 유명하고, 언제나 일본식 옷을 고집한 국수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청일전쟁을 앞두고 승리에 대한 회의감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에 대해 일본민족의 강인함을 보여주자며 개전 무드로 전환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계몽·교육분야에서 선발한다면 당연히 1위를 차지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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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さいごう たかもり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 (1827-1877) 메이지시대 혁명가
가고시마(鹿兒島)출신으로 메이지 혁명 당시(1868년)에는 막부 토벌군의 참모장으로 야전군을 총지휘했다.
[유신 3걸]의 필두. 초기 메이지 정부의 수반으로 版籍奉還·廢藩置縣 등의 정치적 개혁을 주도했으나, 1873년 조선을 정벌하자는 자신의 정한론(征韓論)이 반대파에 의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정부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했다.
1877년에는 옛 무사들에게 옹립되어 [세이난(西南)전쟁]을 일으켰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에 의해 패퇴하여 할복자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2년후 강화도사건을 거쳐 한일합방으로 이어졌다.
한편 그의 친동생 사이고 츠구미치(西鄕從道)는 초대 대만총독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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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いちかわ ふさえ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江)(1893-1981) 쇼와시대 여성정치가
아이치(愛知)縣 출신의 여권운동가. 교사와 신문기자를 거쳐 부인참정권 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 10위안에 든 것은 최근 여권의 지위향상과 더불어 여성에 대한 배려로 상징적인 의미로 뽑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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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いとう ひろぶみ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메이지시대 정치가
야마구치(山口)縣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탈취한 주인공이자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으며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했다. 20대에 영국에 유학한 경험으로 영국과의 전쟁시에는 일본에 불려와 영어통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본최초의 내각총리를 역임했으며, 메이지 헌법의 제정을 주도한 인물로 정계의 원로로서 오랫동안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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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たけだ しんげん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1521-1573) 전국시대 무장
전국시대 일류의 전략·전술가로 지금의 야마나시(山梨) 지방을 지배한 인물이다.
[風林火山]의 깃발을 내건 기마대는 용맹하기로 유명했으며, 호적수 우에스기(上杉 謙信)와의 전투는 많은 일화를 남겼다. 병으로 죽게되자 3년동안은 자신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가케무샤(影武者)를 내세우도록 유언을 남기고 53세의 생을 마감했다. 작년에 상영되었던 일본영화 影武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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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うえすぎ けんしん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1530-1578)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신겐과 쌍벽을 이루는 전국시대의 무장으로 중북부 일본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다.
나가오(長尾)가문의 가독(家督)을 이은 겐신은 에치고지방을 평정했다.
전국무장으로서는 유일하게 「정도(正道)를 걸은 인물」 겐신은 의(義)를 중시했고, 결코 도를 벗어나는행동은 하지 않았으면서도 발 빠르게 한 시대를 달려왔던 것이다.그런 겐신에게는 연중행사 처럼 매년 전투를 즐기는 습관 또한 있었으며, 그 상대가 바로 일본 전국시대상 최고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다께다 신겐과의 전투이다. 신겐 과는 나카카와지마에서 12년간 5차례 대치했다.
신겐의 사망소식이 도달했을 때, 식사중이었던 겐신은 먹던 음식을 모두 토하고
「 아아... 다년의 호적수와 다시 만날 날은 이제 없단 말인가」 라고 한탄하며 슬퍼했다고 한다.1578년. 다음 목표인 관동지방 출진을 눈 앞에 둔 3월 9일... 겐신은 카스가야마성(春日山城) 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인 상태로 13일에 사망했다. 평소에 술을 좋아했던 것이 원인으로,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죽기 한 달 전에 남긴 한시(漢詩)에 영원토록 영번하는 한잔의 술, 49년은 한순간의 꿈, 생을 모르고 죽음 또한 모르니,세월 또한 꿈과 같구나』라는 글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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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みなもとの よりとも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47-1199) 가마쿠라 무장 일본 최초의 무가정권인 가마쿠라(鎌倉)막부를 창설하고 초대 쇼군(將軍)이 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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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おおくぼ としみち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1830-78)가고시마(鹿兒島)출신으로  메이지시대 정치가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와 더불어 유신 3걸. 1868년, 1월 23일에 오사카 천도론을 주장.1869년, 6월, 한세이호칸을 기도 등과 공조하여 실시.1873년 정한론자와의 대립 사이코와 대립.1874년 사가의 난 진압. 대만침공, 기도반발 사임. 1877 세이난 발발 교토 군총지휘.
1878년, 5월 14일에 도쿄의 기오이자카에서 시마다이치로를 비롯한 정부에 불만이 있는 사족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향년 49세. 죽던 날 아침에 후쿠야마 현령인 야마요시 모리스케에게 전란은 끝나고 평화는 왔지만 유신의 정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30년이 필요하다. 3분할 하면 메이지 원년에서 10년은 창업의 시기였고 메이지 11년에서 20년은 내치를 정비하고 민산을 흥하게 할 시기로 나는 여기까지 일하고 싶다. 메이지 21년에서 30년은 후진에게 물려주고 발전을 기다릴 시기라며 장래에 대한 구상을 말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아침에 했다던 말은 그대로 자신의 평가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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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가 흔히 말하는 관료로서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권력이 막강하여 모든 정책을 계획결정하여 유사전제라고까지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위엄이 대단하고 성격이 냉정하여 면전에서 침착하게 응대하는 인물이 드물었으며 근무환경은 너무나 조용했다고 한다. 전제관료로서 압정가로 불릴정도로 나라의 모든 산업계획을 독재적으로 진두지휘하여 이것이 이어져 내려와 일본 관료들의 폐해가 되었다고까지 평가받는 인물이다.
2.가정에서는 가정적인 아버지라 출근전에는 딸 요시코(芳子)를 안고 귀여워했으며 마차에서 돌아오면 자신의 구두를 벗기려하는 삼남 오쿠보 도시타케를 보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3.죽고나서 재산을 조사해보니 140엔(현 500만엔) 정도가 있었으며 부채는 800엔(현 2억 8천 500만엔)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의회정치도 성립되지 않아 전제군주에 비견될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최고위 관료였음을 감안해보면 얼마나 청렴결백했는지 알 수 있다.
[출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작성자 shiroyu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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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うえすぎ ようざん우에스기 요오잔(上杉 鷹山)(1751-1822) 에도 후기 요네자와(米澤)의 번주(藩主).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불씨]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의 주인공인데,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선정을 베푼 명군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름은 우에스기 하루노리(上杉治憲)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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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みなもとの よしつね미나모토 요시츠네(源 義經)(1159-1189) 가마쿠라 무장
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를 도와 정권을 수립했으나 형과 불화하고 쫓겨다니다가 자살했다. 무예에 출중한 비극의 영웅으로 동정적이고 과장된 전설적인 일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가부키의 테마로 곧잘 등장한다. 심지어 칭기스칸으로 부활하여 몽고제국을 세웠다는 속설마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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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いたがき たいすけ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 退助)(1837-1919) 메이지시대 정치가
지금의 고치(高知)縣 출신으로 정한론쟁에서 밀려난 후, 자유민권운동가로 전향했다. 1882년 연설도중 괴한에게 칼을 맞고 쓰러지면서 [이타가키는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고 외쳤다는 일화는 유명하며, 뒤에 내무상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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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よしだ しょういん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막부말기 사상혁명가
지금의 야마구치(山口)縣 출신으로 페리함대에 밀항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붙잡혀 투옥되었다. 출옥 후 쇼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학당을 세우고 젊은 인재를 양성했는데 伊藤博文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은 모두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막부를 타도운동이 발각되어 30세의 나이에 처형되었다.
그가 옥중에서 쓴 幽囚錄에서는 조선을 공략해 영토를 확장할 것을 주장했다.
지금도 일본의 우익주의자들은 매년 10월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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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かつ かいしゅう 카츠 카이슈(勝海舟) (1823-1899) 막부말기 군인정치가
막부의 해군경으로 조약을 비준하기 방미한 후, 문화 충격을 받고 해군력 증강과 개항을 주장했다. 이에 분노를 느낀 사카모토 료마가 그를 죽이러 찾아갔다가 오히려 설복당하고 제자로 받아줄 것을고 간청했으며, 그때까지의 보수적인 사상을 떨치고 혁명가로 변신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가 에도성에 진격해 왔을 때 전면전 일보직전에 자신의 상전인 쇼군과 적장 사이고를 설득하여 성문을 열어 무혈혁명으로 이끌어내고 아울러 쇼군에 대한 신변보장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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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おざき ゆきお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1859-1954) 메이지쇼와 정치가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헌정을 수호한 호헌주의자로 [憲政の神樣]으로 불린다.
중의원의원 25회라는 불후의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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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afe.naver.com/tabilove/211
http://blog.naver.com/duackd_/20048083693
http://blog.naver.com/kiss_sound/100007514241
http://cafe.naver.com/kjijon/2265

*사카모토 료마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54157603&qb=7JqU7Iuc64ukIOyHvOyduA==&enc=utf8§ion=kin&rank=3&sort=0&spq=0&pid=gtzReloi5TwssuURc%2Bhsss--075747&sid=TBzRrxyIHEwAAEjRQkA

http://www.cyworld.com/lovesongforbobylong/3444880


대정봉환과 판적봉환

막부 실권자인 쇼군(대장군)이 천왕에게 국가통치권을 되돌려준 것을 대정본환이라 하고  판적봉환(일본어: 版籍奉還 한세키호칸[*])은 1869년 7월 25일, 일본의 메이지 유신시대 초기에 행해진 조치로, 쇼군의 지방 책임자 다이묘(大名)들이 막부 쇼군에게 받은 재산을 천황에게 자신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반환하였던 일이다.

대정봉환 [大政奉還]
1867년 일본 에도 바쿠후[江戶幕府]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

판적봉환 [版籍奉還]
쇼군의 지방 책임자 다이묘(大名)들이 막부 쇼군에게 받은 재산을 천황에게 자신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반환하였던 일





본문
국가의 모든 정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바쿠후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며 개혁 여론이 높아지자 1867년 서남 지역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이 바쿠후 타도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다. 도사번[土佐藩] 은 이를 견제하여 신정권을 수립하고자 에도 바쿠후의 제15대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줄 것을 권고하고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도쿠가와는 국가 통치권을 봉환한 후에도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서 권력을 장악,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방안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4일 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신청하였고 그 다음날 천황이 이를 허가하였다. 이에 따라 교토[京都]에서 제후 회의를 열기로 하였으나 무산되었고, 그 사이에 바쿠후를 타도하려고 동맹을 맺은 세력들은 왕정복고와 함께 바쿠후 폐지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가마쿠라 바쿠후 이래 675년 동안 계속 되어오던 일본의 봉건제도는 끝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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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자와 유기치(福澤鍮吉1834~1901)


후꾸자와 유기치(福澤鍮吉1834~1901)는 만엔짜리 지폐에 나와있는 인물로 게이오 대학의 설립자이자 명치유신때 서구문물의 도입을 주창한 인물입니다.  그의 주장은 탈아론(脫亞論)이라고 하는데 탈아입구(脫亞入毆) 즉 아시아에서 탈피하여 구라파 유럽으로 들어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비유에 의하면 아시아는 절교해야할 나쁜 친구로 중국, 한국같은 아시아와 가깝다는 이유로 사귀어봤자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후꾸자와 유기치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일본은 유일하게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면한 나라(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완충목적으로 왕조가 보존되었으므로 제외), 아시아에서 가장 서구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서구와의 대립으로 스스로 몰락한 오스만투르크나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나 중화사상으로 서구사상을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있었던 중국에 비해 가장 서구문물에 우호적이었던 일본이 아시아의 리더로 떠오르게 된 계기였습니다.

일본개화기와 명치시대의 사상가요 문필가다. 게이오대학 창시자로 우리나라 개화기에 김옥균등 개혁인물을 적극 도왔고 유길준등 많은 인재들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그의 탈아론(脫亞論) 때문에 한국에서는 달갑지 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 명치유신 초기부터 서구의 새 문명과 새 사상을 문필과 교육을 통해 일본인을 개화시킨 선구자다. 1870년 서양을 소개한 '서양사정'이라는 책은 일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유길준이 1889년에 낸 '서유견문'이란 책은 바로 후꾸자와의 책을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당대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관직의 유혹을 뿌리치며 야인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본근대화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그의 명언이다.

구한말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근대화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을 때, 일본은  이미 페리제독이 오기 이전인 1740년 경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치하 당시 나가사키 부근의 데지마(出島)에 네덜란드 상인들과 거래하는 경제 특구가 마련되어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후 명치유신 초기의 일본정부는 후꾸자와(福澤諭吉)가 1867년 <서양사정>이라는 책에서 이미 주장한 바 있는 『문명개화』라는 화두를 국가가 당면한 최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근대화에 몰두했으며 외상 이노우에(井上馨)를 중심으로 동경에 유럽식으로 새로 지은 로쿠메이캉(鹿鳴館)이라는 서양식 무도회관을 중심으로 일본에 드나드는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명치 신정부는 1871년 봉건제도의 기틀이었던 번(藩)을 폐지하고 오늘날의 현(縣)을 설치하는 소위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일본의 문명개화를 본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이와쿠라 특명전권대사를 단장으로 하는 100 여명의 구미사절단을 파견했다.

탈아론을 주장하며 세계속의 일본을 주장한 후꾸자와는 봉건시대의 일본을 현대의 일본으로 혁신하게 해준 이념적 공로로 오늘날 일본 근대화의 국부로 한국의 세종대왕처럼 일본의 고액권(일만엔권) 화폐에 넣어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후꾸자와의 탈아론은 결코 그 자신만의 창작이론이 아니라 사이코 다까모리, 기도, 오오쿠보,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명치정부의 핵심인물들의 사상적 총 연원이자 스승인 요시다 쇼인(길전송음)의 가르침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29세로 요절한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일본의 현대사를 이끌어 가는 민족주의자들의 총 연원으로 확고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통해 조선침략에 대한 이론체계를 정립하여 후학들을 양성했고 후꾸자와는 그 이론을 활짝 꽃피워 만개 시킨 사람이었다.

사상적 연원이 어찌 되었든 후꾸자와는 현실적으로 일본뿐 만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의 뿌리와도 맞물려 있는 인물이므로 한국 근대화의 핵을 캐기 위해서라도 깊은 연구가 필요한 인물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일제하 한반도의 문명개화는 이론적 뿌리인 후꾸자와의 기운을 쏘인 일본에 의탁되어 근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한반도 금풍사명이다.(한배달 시리즈1권 <동양학 이렇게 한다>328P ‘동양철학 기초이론 2’안원전 저 대원 刊 참조)  

후꾸자와의 『문명개화』라는 대국적인 캐치프레이즈는 만주사변, 태평양 전쟁 등 대동아 공영권(동아시아 블럭의 호랑이가 되겠다는 것)에로의 발빠른 진군과 함께 일본이 독일과 연합해 중, 소와 판을 가르며 세계의 기운을 크게 혁신할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원자탄 세례와 함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남으로써 결국 한반도만 힘들여 근대화시켜주고 맥없이 물러난 셈이 되었다.

동양의 우주원리로 보면 손(巽)방위인 일본은 간(艮)방위인 한반도에 근대화 바람인 손풍의 가을철 열매바람을 불어주게 되어 있는데 일본은 어쨌거나 이러한 근대화 사명만 충실히 이행하고 손털고 나선 것이다.

후꾸자와의 탈아론은 임진왜란때 도성에 들지 못한 것을 포함해(몽진으로 假도성만 차지하고 임금이 있는 眞도성엔 들지 못했다) 채 이루지 못한 3한(恨)을 풀기 위해 한반도 정복을 명분으로 한 정한론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후꾸자와의 탈아론도 그 연원을 추적하면 한민족에 대한 열등의식 속에서 위조해 낸 2600년의 만세일계 족보서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정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이하 <통곡하는 민족혼> 353 P 안원전 저 대원 刊 참조)

'이러한 정한론 속에는 바로 일본인이 변형시켜 온 백제의 무사도 정신인 사무라이의 정벌 정신이 숨겨져 있었다. 현대 일본정신의 정체는 무엇인가? 위안부 사건을 부정하고 한국 식민지통치를 미화하며 독도를 일본 것이이라 정부적 차원에서 주장하는 파렴치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일본이 현대화하는 과정은 도쿠가와 이에야쓰(덕천가강) 막부정부 말기에 미국의 페리제독의 개항요구에 맞서다 전멸한 막부사무라이들과 요시다쇼인의 제자인 일본근대화 3걸의 수하들, 그 영향을 받은 료마(龍馬)의 토막론(討幕論:무능한 사무라이 정권인 막부를 쳐없애고 천황일원제 세우자)에 입각한 천황제를 자세히 살펴야 한다.

료마는 총포를 내세운 페리제독에게 전멸한 막부 사무라이군대를 보고 크게 깨달아 막부정부를 폐하고 허수아비로 존재하는 천황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맹주로 대동아공영권을 만들어 서양과 자웅을 겨룰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기조위에서 탈아론도 나오고 그들 용어로 대동아전쟁도 나오고 한 것이다.

일본의 정신을 한마디로 집약하면 야마도 혼이라 해서 대화혼(大和魂)이라 한다. 이는 무슨뜻인가? 결론내면 일본의 근대화정신인 천황제를 위해 전체가 하나되어 꽃처럼 산화될 가미카제 정신을 갖자는 것이다. 왜냐?

이 말은 원래 논어(論語)「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란 말에서 따온 말이다. 군자는 전체의 흐름에 하나가 될지언정 소인처럼 계파를 이루어 특정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무라이 세계에 윤리와 도덕이 있을턱 없다. 왜인은 원래 동양의 바이킹 해적이었다. 지금도 중국의 아름다운 운하도시 쑤조우(蘇州)에 가면 조그만 강 곳곳에 무지개 다리가 있는데 이를 건설한 이유는 내지 깊숙히 배를 타고 약탈하러 오는 왜구를 원천적으로 막기위함이었다.

막부를 폐지하고 천황제로 뭉치자는 토막론과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의 선진세계와 함께 놀자는 탈아론은 모든 사무라이들이 하나가 되어 신일본정부 건설에 몸과 영혼 모든 것을 던지자는 구호다.  그리하여 구 천황을 암살하고 어린천황을 앞에 내세운 초대 총리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의 신일본 정부가 군대를 조직해 제국주의로 아시아를 짓밟아 피로 물들인다. 봄이면 한꺼번에 피었다가 한꺼 번에 지는 제주도의 왕벚꽃이 일본에서 나라꽃으로 채택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천황제 중심의 제국주의 사무라이 군대 심보때문이다. 야쿠자가 군대로 화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신 일본 정부내외의 우익이란 것은 신선조의 후예들이며, 동시에 요시다 쇼인 및 그 3인의 제자 소위 일본 근대화 '유신삼걸(維新三傑)' 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동경 곳곳에 마치 독일 곳곳에 비스마르크 거리가 있듯이 오쿠보 거리가 있다),사이코 다카모리(西鄕隆盛),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의 제자들, 및 료마의 후예들의 뜻을 따르는 사무라이들-지금은 야쿠샤,일본극우파로 변신-이다.

일본의 쌔디즘적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은 구미 열강들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일본은 구미 열강에 의해 취해진 불이익을 대만, 한국침략 및 만주 본토 침략으로 상쇄하려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저질러진 임진왜란은 비록 정명가도라는 가면을 내세웠지만 본래는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활성화 된 무인 에네르기를 외부로 표출시키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구한말의 한반도 수탈은 명치정부 내에 충일했던 정한론의 사무라이 정신이 당시 세계적 조류였었던 구미 열강들의 식민지 경영 경쟁에 맞아 떨어져 일어난 사건이었다.

결국 정한론의 정신적 기원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활성화된 무인 에네르기를 밖으로 쏟아내기 위해 정명가도를 명분으로 하여 치루어진 임진왜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일본 봉건 막부시대의 기원은 천지,천무시대에 있으므로 종내에는 한민족의 문화연원에 까지 뿌리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본은 60년대부터 국가보조금까지 주어가며 젊은이들을 해외에 보내 견문을 넓히게 했으며 그들이 얻은 경험과 정보를 국가 경영에 흡수했다.
(아베 수상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요시다 쇼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상 안원전 담론 中
http://www.cheramia.net/board/view.php?id=bbs4&no=48


참고자료
http://blog.daum.net/modernhistory/181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30820.010310707470001
http://cafe.naver.com/seonjae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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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의 NHK 드라마  
일본문화와 역사 2010/01/05 09:13   http://blog.hani.co.kr/chris/29692  




요즘 일본에서 사카모토 료마를 그린 龍馬傳이란 드라마가 NHK에서 방영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조선닷컴이 보도하고있습니다. "반드시 변하는 날이 온다"고 미쓰비시 그룹을 일으킨 친구 이와사키 야타로에게 외쳤다며  일본인에게 성장과 꿈을 제공한 인물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여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별관심을 못끌다가 일본의 유명작가인 시바 료타로가 <료마가 간다>라는 소설을 써서 유명해 진 인물입니다. 일본인들은 소설속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경향이 강한데 소설을 통해서 우상화된 사카모토 료마는 제가 보기에는 정파사이를 넘나드는 거간꾼에 불과하고 그가 메이지유신을 이룩하게했다는 평가는 과분하다고 봅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 전의 상황은 막부가 통제권을 잃어 지방에서 반란이 속출하고 조선과 마찬가지로 서양과의 불평등조약과 죠슈번과 사쓰마번의 대립으로 불안했습니다. 더구나 죠슈와 사쓰마번은 영국에게 덤볐다가 조선의 병인양요 신미양요처럼  영국군의 대포와 화력앞에 무참하게 참패하여 서양에는 안된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이때 도사번 출신인 사카모토 료마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죠슈번과 사쓰마번을 중재하여 손잡게 만들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다는 것이 알려진 사실입니다.

재작년 조선일보의 도쿄 특파원인 선우정이 "우리나라에는 사카모토 료마가 없다"는 칼럼을 게재하여 제가 선우정에게 항의메일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제나라 역사도 모르는 애송이가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이 왜곡한 역사를 보고 우리나라를 비판하다니 한심했습니다. 역시 조선일보는 아직도 친일에 기울어있는 신문일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료마를 굳이 꼽자면 DJ와 JP의 연합을 이끌어낸 박태준이 아닐까요?

메이지유신이란 에도막부 260년동안 전쟁이 없어 칼을 쓰지못해 출세의 기회가 없어 눌려지내던 지방의 하급무사들이 출세를 위해서 별볼일 없이 무당역할이나 하던 일본왕을 전면에 내세워 에도막부를 타도한 것입니다. 특히 껄끄러운 고메이를 독살하고 그 아들인 나이어린 16세의 메이지를 일왕으로 옹립한 것을 보면 일본무사들에게 일왕의 존재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죠슈번과 사쓰마번의 결탁을 중재한 후 결국 누군가에게 암살당하여 32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출세하자 거들먹거리며 게이샤를 첩으로 삼아 손님접대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던 자들이 한결같이 료마처럼 모두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큰데 그들에게는 무서운 서양과 맞서 싸울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자신들의 출세와 이권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일본역사에는 3대 미스터리가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1. 야마토국의 위치가 어디인가?
2. 아케치 미쓰히데는 왜 오다 노부나가를 죽였는가?
3. 사카모토 료마는 누가 암살했는가? 의 3가지입니다.

"역사를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하겠다는 자유주의 역사관"에 입각한 일본의 역사왜곡이야 너무도 유명해서 말할 필요도 없지만 제가 보기엔 저도 알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와 사카모토 료마의 죽음을 미스터리로 남겨둔 것은 가장 중요한 야마토국의 위치를 밝히면 백제계라는 것이 탄로날까봐 두사람의 죽음을 물타기로 함께 남겨두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일본인스러운 짓인데 일본인들이 신이라고 부르며 125대를 이어 내려왔다는 만세일계의 일본왕 무덤이 125개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요즘은 일왕릉을 발굴하면 할수록 고구려 백제계의 유물이 나오므로 겁이나서 발굴하지도 접근하지도 못하게 한 상태입니다.

일본이 깔보며 이씨조선이라고 폄하하던 조선왕릉이 너무도 잘 보존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어째서 저들이 신이라 일컷는 일본왕릉은 제대로 보존이 안되어있을까요? 이제 일본에서는 옳바른 역사학이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죠슈번과 사쓰마번이 싸우지 않고 화평을 맺자 불만세력이 암살한 것입니다. 과연 일본 역사학계가 130여년 전에 불만세력에게 피떡의 고깃덩어리로 변한 사카모토 료마의 죽음을 밝히지 못할 정도로 무능할까요? 무엇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요?

료마가 주선한 죠슈번과 사쓰마번의 화평은 이후 결코 지켜지지 못합니다. 메이지유신후 죠슈번은 일본육군의 주축이 되고 사쓰마번은 해군의 주축이 되어 사사건건 대립합니다.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일본해군은 돕지 않습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해군이 미국해군에게 패배할 때도 육군은 결코 해군을 돕지 않고 패배를 즐거워했습니다.

대만이나 조선에 총독을 파견하거나 총리나 국방대신을 뽑을 때도 사사건건 해군과 육군이 대립하지만 대개 육군인 죠슈번 출신들이 주도권을 잡습니다.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한 결정적 이유는 사쓰마의 해군과 죠슈의 육군의 주도권과 이권다툼으로 상호협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으니 사카모토 료마의 거간은 실패한 셈입니다.

최근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와 함께 사카모토 료마 붐이 분다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일본이 조선과 아시아를 침략하게한 메이지유신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일본이 넘치던 돈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저개발국가들을 매수하며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엔상임이사국에 진출하려했지만 "오그라든 20년"과 미국추종으로 실패하고 한때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국가경제는 몰락하여 세계최대의 채무국가로 전락한 위기를 외국침략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최근 다시 엿보입니다.

미국추종을 버리고 아시아를 중시하며 "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정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제2의 메이지유신을 하겠다는 의사표시가 바로 사카모토 료마의 드라마라는 것을 우리는 잊으면 안됩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성사시켰다는 메이지유신후 저들은 조선과 중국을 악우로 규정하고 조선을 침탈하여 집어 삼켰습니다. 우리가 경술국치 100년을 새기며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데 일본에서는 외국침략을 가능케한 사카모토 료마를 일본의 영웅으로 묘사하다니 한일양국의 생각이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앞으로도 일본의 첫번째 침략대상은 당연히 국경을 맞대고 가장 가까운 한국입니다. 사실 일본이 베트남에도 못치는 큰소리를 치는 세계유일의 국가가 한국아닙니까? 한반도의 패배자들이 건너가 만든 일본에서 "한반도는 일본의 허리를 향하여 돌출한 단도"라는 저들의 트라우마는 항상 한반도를 향합니다.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저들의 속내는 끝까지 일본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짓입니다.

총칼을 함부로 사용하기 힘든 현대애서 일본의 침략은 앞으로 경제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은데 그들이 주장하는 경제협력과 한일해저터널이나 한일 FTA는 그런 맥락입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기업들의 선전으로 수많은 일본대기업들이 몰락하여 일본경제가 그로기 상태라는 것인데 그 선봉에 삼성과 현대차가 있으니 수출경쟁에서는 든든합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자랑하는 것은 그 이후 벌어진 아시아침탈을 정당화하는 짓이며 요즘 세계에서 외면받고 찌그러드는 일본을 아쉬워하며 과거 아시아를 침략하여 수탈하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이던 살인의 추억을 되살리려는 짓입니다.

제가 보기엔 사카모토 료마는 메이지유신으로 현대일본의 가장 큰 장애물인 일본천황을 만들어냈고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다가 일본역사상 유일하게 미국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기록하게 하고 결국 그들이 신이라 부르던 일왕에게 인간임을 고백하게 했으니 오히려 일본을 망하게 한 단초를 제공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료마의 친구라는 이와사키 야타로는 얼마전 강제징용을 부인하고 99엔을 배상케한 미쓰비시 그룹의 창시자인데 미쓰비시는 아직도 일본에서 정경유착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범이 만든 그룹입니다. 그 친구를 보면 인간성을 안다는데 침략과 정경유착의 전형인 자와 친구라면 료마의 인간성이 보입니다.

일본의 유명 극우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작년 "회사와 집만 아는 멍청한 일본인들을 변화시키려면 북한과 전쟁이 일어나거나 맥아더 장군이 환생해야한다" 고 말했습니다.

일본극우들이 말하는 변화란 침략과 전쟁을 하겠다는 의지를 말하는 것인데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니 일본의 진정한 변화는 메이지유신 이후 벌어진 아시아침략과 학살의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며 보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카모토 료마가 제시한 성장과 꿈이란 무엇입니까? 쇄국정책 260년으로 일관한 일본의 성장이란 외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어 수탈하며 피를 빨고 성장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의 꿈이란 외국침략입니다. 이런 식의 꿈이라면 아직도 외국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니 그런 사실을 비판없이 보도한 조선일보의 정신상태를 의심합니다.

일본은 헛된 전통에 집착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라입니다. 저들은 일본을 개항시켰던 페리제독의"일본인은 표리부동하다는 말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처럼 표리부동한 침략의 꿈을 버리고 주변국과 화해친선으로 변화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올해는 경술국치 100년,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으로 슬픈 망국의 역사에서 교훈을 깨달아야 하는 시점입니다.  일본에 과연 사카모토 료마가 "반드시 변하는 날이 온다"고 말했던 그 변화하는 날이 올까요? 저는 일본에 전쟁이 없는한 그리고 누군가 천황을 암살하지 않는 한 그들의 변화는 없다고 봅니다.

제나라를 침략한 토대를 만든 자를 찬양하듯 영웅이라고 보도하는 수치를 모르는 조중동같은 친일언론이 있는 한 일본은 우리를 깔보고 신나게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독도영유권을 주장할 것이니 우리가 뼈저리게 반성하고 경계하며 친일파들을 청산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저는 NHK 드라마에서 일본인들조차 일본역사의 3대 미스터리로 남겨져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카모토 료마의 죽음을 어찌처리 할 지 자못 흥미롭습니다. 일본에 계신 분들이 잘 보시고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이토 하지메 http://img2.ruliweb.daum.net/mypi/gup/254/3716_34880.jpg



 



















도야마 미쓰루(두산만)


1885년 5월 27일-1944년 10월 5일(59세)사망

 


대외론에서는 일본의 해외 진출을 호소해 구미 열강 제국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 문제에 대해서는 대외의 입장에서 주장을 행하였고, 일찍부터 대 러시아 동지회에 참가해 러일전쟁 개전론을 주장했다.


김옥균이나 쑨원, 라스 비하리 보스 등 일본에 망명혁명활동가들을 원조했다.


1881년, 하코다 로쿠스케, 히라오카 고타로등과 겐요샤(현양사)를 설립했다.


 


1881년 도야마 미치루[頭山滿] 등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몰락한 사족(士族:무사계급)의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조직한 국가주의 단체이다. 정한파(征韓派) 사족인 향장사(向場社)를 주축으로 결사되었으며, 처음에는 국회 개설운동에 참가하는 등 민족주의·민권주의를 내걸었으나 차츰 민권운동에서 이탈하여 대외강경론을 주장하는 국권주의적(國權主義的) 단체로 변모하였다.

청일전쟁러일전쟁 때에는 대외강경론을 주장하며, 군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을 지지하여 일본의 한국 국권침탈을 준비하고, 초기의 중국혁명을 지원했으며, 러일전쟁 때는 만주의군(滿洲義軍)을 조직하여 게릴라 활동을 하는 등 정치·전쟁·테러를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 점령군인 미군이 해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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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담론194.당황실의 미스테리-황제헌원, 진시황, 주문왕, 요,순,우,백이와 같은 동이족 혈통2   안원전    2002/11/20  15908
N   담론 193.당황실의 미스테리-황제헌원, 진시황, 주문왕, 요,순,우,백이와 같은 동이족 혈통1   안원전    2002/11/20  18170
N   "푸코의 진자"라는 책을 보고 프리메이슨에 대해 쉬운 설명 부탁드립니다."에 대한 답변 [1]   안원전    2005/01/10  19513
N   특집기획. 웅장한 동이 대륙사 홍산문화(紅山文化) 대문구(大汶口) 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의 놀라운 고고학적 실체 국내 최초 완전 공개! [4]   안원전    2003/05/12  18370
N   담론 특별기획, 속 장량의 미스테리-공명지정대와 자방지종용&한신의 미스테리, 유방이 한신을 버린 것인가 한신이 유방을 배신한 것인가.   안원전    2002/08/26  9752
N   담론 특별기획 장량의 미스테리를 파헤친다.장량은 어디로 갔는가? 또 왜 한의 조정을 떠났는가?   안원전    2002/08/23  9542
N   담론 특별기획, 황제의 동이족 부인 누조(女+累,祖)의 양잠(養蠶) 고사와 양잠시조 동이족 조상 태호복희 천제   안원전    2002/09/16  8638
N   담론 특별기획, 잠사기원 속편-동이족의 주 전공 잠사의 개관   안원전    2002/10/01  7471
N   담론 특별기획 동이족의 영적문서를 빌어다가 개찬한 공자의 소작-나를 아는 자도 오직 「춘추(春秋)」요, 나를 죄줄 자도 그 오직 「춘추(春秋)」다   안원전    2002/10/30  8425
N   동이 대륙상고사 유적지 탐사를 마치고(안원전) 2002.8.16   안원전    2003/04/15  12037
432    안원전의 담론 391.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7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3부   안원전    2013/11/17  3475
    안원전의 담론 390. NHK ‘료마전’의 료마와 요시다쇼인(吉田松陰)   안원전    2013/09/15  3757
430    안원전의 담론 389.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6 -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2부   안원전    2013/03/29  3625
429    *(특집)안원전의 담론 388. 대한민국 한류 디자인-대한민국을 새로 디자인하라!!   안원전    2012/09/07  3747
428   비밀글입니다  안원전의 담론 387.   안원전    2011/07/26  212
427    안원전의 담론 386.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5-진나라를 흥하게 한데 큰 공이 있으며 진나라를 망하게 한 죄인인 楚人 이사(李斯) 1부   안원전    2011/07/04  5311
426    안원전의 담론 385.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4-진나라 제왕의 위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위염(魏冉)   안원전    2011/06/07  4218
425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384. (漢字의 秘密) 한자(漢字)의 주인은 한겨레 韓민족이다.   안원전    2011/06/01  5978
424     안원전 담론 383. 소통(疏通)에 대하여   안원전    2011/05/24  2658
423    안원전 담론 382.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3-초인이 진나라를 섬기던 역사의 공헌 및 통일전쟁의 서막을 올린 감무(甘茂)   안원전    2011/05/17  3091
422    안원전 담론 381.약초를 널리 보급하여 질병을 치료한 다릉(茶陵:차릉)의 ‘세 가지 보물(三寶)’   안원전    2011/05/11  2763
421    안원전의 담론 380. 염제(炎帝)가 불을 광범위하게 응용하던 이야기 2   안원전    2011/05/09  2368
420    안원전의 담론 379.염제(炎帝)가 불을 광범위하게 응용하던 이야기1   안원전    2011/05/09  2508
419    안원전의 담론 378.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2- “진나라가 망하고 초나라가 보전되는(亡秦必楚)”의 문화 운명   안원전    2011/05/03  2405
418    안원전 담론 377. 대륙향토사료를 통해 웅영족(熊盈族) 楚나라 실체를 밝힌다.1-초나라가 갑자기 쇠퇴한 원인은 음란과 방탕 그리고 모든 통치계급의 부패와 문란   안원전    2011/04/30  2353
417    동이 대륙상고사 답사를 마치고2(2002) 續원고   안원전    2011/04/30  2320
416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76. 거영신(巨靈神: 강의 신)   안원전    2011/01/10  2820
415    안원전의21세기 담론 375. 황하(黃河)의 수신(水神) 하백(河伯)   안원전    2011/01/05  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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