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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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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메이슨서양사15(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미국의 경우

영국에서의 카발리스트 운동은, 식민지 정복 초기로부터 정복지나 식민지 전역에 롯찌와 대리인들을 도입했다. 미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의 식민지가 북아메리카에 확대되자 이곳에도 그들의 대리인들과 롯찌들이 들어섰다.

영국의 군주제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영국의 연장선에서가 아니라 정복지로 통치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온 식민주의자들을 영국시민들과 대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군주제는 실제의 식민지들이나 그 곳의 부(富)를 영국의 연장선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군주제는 식민지들과 그 부(富)를 군주 개인의 사유물로 여겼다.

식민주의자들은 따로 설치된 법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모든 법정은 영국에 의존했다. 그들은 영국에 정치적인 기반이 전혀 없었다. 식민주의자들은 아주 높은 세금을 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리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체만의 화폐를 발행할 권리도 없었으며, 시종 영국 런던 중앙은행의 변덕스런 정책에 휘둘렸다. 식민지들에 대한 영국의 가혹한 지배가 도를 더해 가자, 식민주의자들은 런던으로부터의 탈퇴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벤자민 후랭클린(Benjamin Franklin) 같은 몇 몇 사람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영국 탈퇴 제안과 독립선언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본국으로의 세금 송금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이 조치는 영국왕 죠지 3세(George 3)에게 반란으로 보였다. 그는 곧 식민지에서 벌어진 이 같은 소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왕은 불행스럽게도 식민지에 급파할 여분의 병사들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자 그는 군대 징발을 도움 받기 위해 당시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메이어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에게 손을 내밀기로 결정했다.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는 이를 비즈니스를 위한 최고의 호기로 삼았다. 그는 영국에 독일의 헤씨안(Hessian) 용병(傭兵) 일인당 8파운드 스털링(Sterling)에 공급하는 것으로 영국 왕 죠지 3세(George 3)와 계약을 체결했다.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는 죠지 왕이 영국 중앙은행에서 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는 한도 껏, 식민지에 급파할 용병(傭兵)을 최대한도로 보냈다.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는 이 엄청난 채권을 빌미로 영국 중앙은행에 대한 통제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영국 왕과 마찬가지로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머쥐기 위해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는 식민지들에 대리인을 선정해 보내기로 결심했다. 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에 알렉산더 해밀튼(Alexander Hamilton),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그리고 죤 아담스(John Adams) 4인이 카발라 운동의 구심적 인물로 스카웃되었다.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는 식민지들의 경제와 돈을 통제하고 싶었다.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 대리인들은 식민지들에 로스챠일드에 의해 조종되는 사설 중앙은행의 설립을 옹호했다. 식민지들에 있어 영국지배에 대한 반란이 점증하자, 국왕은 반도(叛徒)들에게 파견할 군대를 더욱 더 많이 보내야 했던 만큼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에 대한 부채는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영국 정부군과 식민주의자 반란군 사이의 첫 번 째 주요 전투가 1775년 4월 19일, 렉싱톤(Lexington)과 콩코드(Concord)에서 벌어졌다. 5월 10일, 두 번째 대륙 의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려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육, 해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776년 7월 4일, 의회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13개의 영국 식민지는 미합중국의 13개 주가 되었다. 이제 싸움은 중앙정부에 대한 일개 반란의 형태로부터 두 개 국가의 전쟁 형태로 바뀌었다.

전쟁은 5년 간 혈전을 거듭하며 계속되었다. 1781년 10월 19일, 영국군 사령관 콘웰리스(Cornwallis)는 헤씨안(Hessian) 용병(傭兵)들과 함께 전군을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군의 사령관에게 넘겨주었다. 1783년 9월 3일, 영국은 최종적으로 파리협약에서 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그 즈음 영국은 엄청난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으며, 경제상황은 파산상태였다.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는 자신의 대부금을 되찾기 위해, 영국 중앙은행에 간여해 이를 인수할 목적으로 이 값비싼 전쟁손실을 최대한 이용했다.

카발리스트들은  제일 가는, 최고의 은행조직으로 신생 미합중국을 장악하고자 분투했다. 비록 미 헌법 8 번째 섹션(단락) 가운데 5 번째 항목이 “의회는 화폐 주조권을 갖게 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화폐의 가치를 통제하게 될 것”이라고 적시(摘示)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발리스트들은 정부의 사법권을 해치고자 노력했으며, 화폐 주조권의 책임과 화폐 가치의 통제권을 개인 수중에 두고자 노력했다.

이 과제를 책임 맡은 두 명의 주요 카발리스트 인사는 알렉산더 해밀튼(Alexander Hamilton)과 그의 비즈니스 파트너,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였다. 1783년, 해밀튼과 모리스는 영국 은행에서 인출한 1000만 달러를 포함, 합계 1200만 달러 자본금으로 사설 금융기관인 “뱅크 오브 어메리카”를 창설했다. 모리스(Morris)는 대륙 의회의 재정 감독관으로서, 그 새 은행으로부터 정부차관을 빌려서 새 나라를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에 의해 조종되는 영국 은행의 빚 아래에 두도록 권한을 위임받았다. 다른 의회 의원들이 이러한 위험을 직시하자, 그들은 이 새로운 은행에 공인된 특권을 허가하기를 거부했다.

뒤에 해밀턴(Hamilton)은 1789년에 재무장관이 되었으며, 그는 또다시 사적으로 통제되는 중앙은행을 설립하려 노력했다. 1791년, 그는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은행에서 빌린 2800만 달러 자금으로 자본금 3500만 달러의 “합중국 은행(뱅크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을 설립했다.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는 로스챠일드 대출 기관들과 새로운 미국 은행 사이에의 핵심적인 중간 매개자로 남았다. 비록 해밀턴(Hamilton)이 1795년 내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강력한 막후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은행 공동체사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행정부에서 무소불위의 남다른 권한을 휘둘렀다.

행정부에서 해밀턴(Hamilton)의 영향력을 경멸한 사람은 부통령 아론 버(Aaron Burr)였다. 버(Burr)는 해밀턴(Hamilton)의 영향력을 자신의 경력과 재정적 야망을 위협하는 정도의 시시한 것으로 보았다. 프로 명사수였던 버(Burr)는 1804년 벌어진 결투에서 해밀턴(Hamilton)을 죽였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패한 뒤, 서부 식민지에 사설 제국을 세우려 시도했다. 그는 뒤에 체포되어 반역죄로 심문 받았다.

그 은행에 대한 20년 동안의 특권으로 인해 1811년에 재정이 고갈되자, 메이어  로스챠일드(Meyer Rothschild)의 아들, 나단(Nathan)이 영국 은행을 경영하여 그 은행의 특권을 갱신하기 위해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핵심적으로 만일  그들이 은행특권을 갱신하지 않을 경우 빚잔치 전쟁을 벌이겠다고 미국을 협박했다.


러시아 혁명

칼 마르크스가 유태인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필자는 런던에 가서야 비로소 마르크스의 무덤이 그 곳에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런데 레닌의 본래 유태인 이름은 오울리아노프(Oulianoff)로 어머니가 유태계 러시안이었다. 러시아 혁명하면 마르크스와 레닌을 빼놓고 말할 수 없으며 무신론자인 카발리스트들이 주도해서 만든 볼셰비키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프리메이슨 조직이 카발리스트들이 세계통일을 목적으로 만든 정통파 조직이라면 볼셰비키는 지상에서 유신론자 특히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를 지상에서 몰아내고 세계를 통일하려는 윤통의 카발리스트 조직이다. 우선 러시아 혁명은 프리메이슨 조직과 유태인과의 관련성을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로 한다.

볼셰비키 행정부 545명 중 447명이 유태인으로 러시안 30명, 발트해 연안 레트(Lett)인 34명, 아르메니안 22명, 독일인 12 명 등에서와 같이 무려 혁명정부 인원의 82%가 유태인이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유태인과 프리메이슨은 세계혁명을 위해 세게 전역에서 서로 돕고 있다. 세계 전역의 고위층 메이슨 자리들은 대부분 유태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메이슨 조직은 유태인의 이익을 지지하고 보호한다.
유태인은 기독교 문명을 붕괴시키기 위해, 장막 뒤에서 이스라엘의 만국지배를 가져다 줄 각종 혁명을 증식시키기 위해 프리메이슨 조직을 만들었다. 유태인 정신은 메이슨 조직을 지배하고 있으며 반 기독교적 증오심을 각인시키고 있는 바 그것이 아니고는 그러한 맹렬한 조직운동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 둘이 언제부터 연합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그 하나는 구즈노 데 무쏘(Gougenot des Mousseaux), 코뺑 알방셀리(Copin Albancelli)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유태인들이 기독교 문명국가들을 붕괴시키고 장막 뒤에서 일반 혁명을 증식시켜 이스라엘의 지배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적으로 프리메이슨 조직을 만들었다는 이론이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단지 유태인 수중에 들어있는 도구이자 수단이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아이작(Isaac) M. 와이스(Wise) 박사의 논문이 1866년 8월 3일 미국의 "이즈레일릿(Israelit)"에서 발간되었다. 그 중 극명하게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 한 곳을 보면 이렇다.

-메이슨 조직은 유태인의 제도이다. 그것의 역사, 계급, 문장(紋章), 암호, 의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유태인의 것이다.-

웹스터(Webster), 윈치틀(Winchtl)이 주장하는 두 번째 이론은 다음과 같다. 프리메이슨 조직은 원리적으로는 선하고 건전한 조직체지만, 혁명적인 선동가들인 유태인들이 주로 이 단체를 비밀사회로 이용하고 있으며 조금씩 조직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들은  혁명적인 목적으로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 그것을 변질시켰으며, 본래의 도덕적, 박애적 목적을 바꾸어버렸다. 이는 영국의 메이슨 조직과 같은 프리메이슨 조직의 일부가 왜 유태인들에게 전염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글이 유태인 베르나르 라자르(Bernard Lazare)의 저서 『반-셈족(유태족)정책(Antisemitisme)』에 나와 있다.

-둘 관계는 무엇인가? 신뢰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작가로서 그럴 것 같다고 언급한 적이 있지만 분명히 말해서 그들은 이들 협회를 지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즈노 데 무쏘(Gougenot des Mousseaux)가 긍정하고 있듯이 그들 자신이 반드시 메이슨 조직의 영혼, 머리, 그랜드마스터는 아니었다. 그러나 메이슨 조직이 생겨난 배경에 몇몇 보존되고 있는 의식(儀式)이 보여주고 있듯이 카발리스트 유태인들이 함께 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가장 가능한 추론은 프랑스 혁명 이전 그들이 비밀교단 지부에 대거 밀려들어갔다는 것이며 그런 뒤에 그들 스스로 비밀사회들을 창립했을 거란 것이다. 그 중에는 바이샤우푸트(Weishaupt)와 마르티네 드 파스칼리스(Martinez de Pasqualis)와 함께 일하는 유태인들도 있었다.

한 포루투갈 계 유태인은 프랑스에서 많은 그룹의 일루미나티(Illuminati)를 조직했는데, 그는 많은 전문가들을 신입회원으로 모집했으며 그들에게 복위(복권)의 도그마를 전수했다.  마르티네 파의 롯찌들은 이성주의자들이었던 다른 메이슨 교단들에 비해 상당히 신비적이었다. 비밀사회들은 실용적 이성주의와 범신론주의라는 유태인의 2 가지 정신적 측면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유일신 신앙의 형이상학적 반영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카발리스트적인 tehurgy로 인도한다.

백과전서파와 쟈코뱅파와 함께 카죠트(Cazotte), 카글리오스트로(Cagliostro), 마르티네(Martinez), 생. 마르땡(Saint Martin), 꽁트 드 생 제르맹(Comte St. Germain) 에카르트샤우젠(Eckartshausen)의 공통점은 이들 두 경향의 일치점을 용이하게 보여준다. 방법에 있어 그들은 서로 반대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동일 결론은 유태인들 스스로 교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들 비밀사회의 교리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유태인들이 그들 단체의 아주 멋진 대리인임을 다시 한번 증명해 줄 것이다.

볼셰비키 정책과 사상에 유태인의 입김을 극소화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공력이 들어갔으나 불행히도 사실은 그 반대로 나타났다. 한술 더 떠 볼셰비키 정책과 사상에 유태인의 주장은 부족함이 없었는데, 이러한 것은 대중의 시선으로 하여금 반대로, 대개 그들의 가치로부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게끔 하지 않았다. 1929년 1월10일 <볼셰비키의 이념, 유태인의 세계>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이는 나에게 러시아 혁명기에 모 조언자가 유태인 신문에 똑같은 주제로 다룬 글을 생각나게 한다. 실로, 효과 면에 있어 그것은 콕스(Cox) 씨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추종자를 거느린 무자비한 전제정치를 이유로 볼셰비키 정책을 보여주는 것은 문명을 심각히 위협하는 것이다. 조언자가 바라본 관측: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으로 그것은 사회국가와 악 그리고 4년 동안 세계가 신음한 전쟁의 대 격변에 의해 절정에 오른 죄악에 대한 인민의 반란이다. 이어 그는 계속한다: <볼셰비키 이념 자체에는 많은 사실이 있다. 볼셰비키들 중 아주 많은 사람이 유태인이라는 사실과, 볼셰비키 이념 중 많은 부분이 유태주의 이념과 일치한다는 사실, 그들 중 약간은 기독교 창시자의 마지막 가르침의 근본을 형성한다는 사실인데, 이들은 생각 깊은 유태인이 앞으로 주의 깊게 조사할 것들이다.-

1920년, 유태인 신문은 중요한 유태인 작가 이스라엘 장윌(Israel Zangwill)이 쓴 성명서를 게재했다. 이 글에서 그는 비콘스휠드(Beaconsfield), 리딩(Reading), 몬타구(Montagu),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트로츠키(Trotsky)를 배출한 종족의 영광을 찬양한다. 셈어계(유태인계)에의 엄청난 열광 속에서 장윌(Zangwill)은 영국정부 유태인, 헝가리 유태인, 볼셰비키 유태인들을 한 집단으로 결집시켰다. 차이점이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유태인이며, 그들 종족에 있어 명예와 이익이 다 똑같았다.  랍비 J. L. 마그네스(Magnes)는 1919년 뉴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태인이 자신의 사상을 적용할 때, 이 세상의 근로자, 약탈 받은 자, 기득권을 뺏긴 자로  향한 그의 모든 영혼과 근본 성격은 모든 것의 근본으로 향해 있다. 독일에서 그는 마르크스(Marx)와 라쌀르(Lassalle), 하스(Haas), 에드워드 베른슈타인(Edward Bernstein)이 되며, 오스트리아에서는 빅토르 아들러(Victor Adler), 후레드리히 아들러(Friedrich Adler)가 되며, 러시아에서는 트로츠키(Trotsky)가 된다. 독일과 러시아의 긴급한 현 정국을 비교하면: 혁명은 창조적인 힘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적극적으로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 많은 유태인들을 탄복하며 바라본다. 혁명가들, 사회주의자들, 멘셰비키 주의자들(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의 온건 소수파), 볼셰비키 주의자들(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의 과격 다수파), 사회주의 다수파 혹은 소수파, 그들에게 부여된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 그들은 모두 유태인이었으며 우리는 모든 혁명적인 당파의 두령이 되었든 일꾼이 되었든 그들 모두가 유태인임을 발견한다.-

1919년 M. 코헨(Cohen)은 「카르코프의 공산주의자(Communist of Kharkoff)」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대한 러시아 혁명은 과장 없이 유태인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압제된 러시아 근로자들과 소작농 등 암울한 대중들이 부르죠와지(부유층 유산계급)의 멍에를 스스로 벗어 던질 수 있었느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인터내셔널(국제 노동자동맹)의 새벽으로 이끈 것은 주로 유태인들이었는데, 그들은 혁명을 지도했을 뿐 아니라 아직도 그들 수중에 보존해 온 소비에트의 대의(목적)를 지도하고 있다. 우리는 붉은 군대의 사령관이 트로츠키(Trotsky)인 한, 평화 속에서 잠들 수 있다. 붉은 군대 안에 사병으로 복무하는 유태인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위원회와 각종 소비에트 조직은 유태인이 장악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용감하게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대중을 승리로 이끌고 있다. 모든 소비에트 기구의 선거에서 유태인들이 승리하고 다수파를 궤멸시킨 것은 당연하다. 수세기 동안 자본주의(기독교도)와 싸워온 유태인의 상징은 또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상징이 되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채택한 붉은 색 오성기(五星旗) 속에서 사람들은 시오니즘과 유태주의의 상징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엠블렘(상징로고) 뒤에서 승리가 진군하며, 기생충의 죽음과 부르죠와지의 죽음이 진군한다.-

그밖에 <영국 백서>가 실은 다음의 글은 1919년 러시아 의회 기록의 초록(抄錄:요약)에 삭제된 기록으로 러시아에 있던 네덜란드 공사가 휜들레이 경(Sir M. Findlay)을 통해 밸푸어 경(Lord Balfour: 수상역임)이 러시아 의회기록 삭제 이전인 1918년 9월 17일 공개한 내용이다.

-본인은 볼셰비키 사상의 긴급한 진압이 세상이 직면한 가장 큰 현안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심지어 전쟁조차 배제하지 않고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는 바, 앞서 말한 조치 그대로 볼셰비키 사상을 지금 즉시 꽃봉오리 채 잘라내지 않는 한, 그것은 반드시 하나 또는 다른 형태로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국적을 갖지 않은 유태인들이 조직해서 활동하는 단체인 바, 그들의 하나의 목적은 그들 자신의 결말을 위해 현존하는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힘을 결집해 단일화시킨 집단적 행동이 될 것입니다.-

다음의 단정적인 원본은 확실한 몇몇 사실을 첨가해 줄 것이다. 즉, 소비에트 고위 관리의 완전한 리스트가 바로 그들에 의해 명백하고도 상세하게 발행되었다. :<1920년 뉴욕 러시아 유니티(Unity) 121 동부 7번가>:

-“누가 러시아를 지배하는가?” 라는 질문은 무책임한 소련정부의 책임 있는 관리의 간단한 일람표로 절대적인 대답을 받는다. 이 팜플렛이 포함하고 있는 데이터(자료)는 가령 이즈베티야 골로스 트라우다(Isvetia Golos Trouda), 레드 가제트(Red Gazette), 그리고 다른 매체들 같은 볼셰비키주의 자들의 공식적 기관지로부터 정성 들여 채택한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명백하다: 소비에트 관료제도는 거의 전적으로 유태인들의 수중에 있다. 반면에 소비에트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러시아인의 수는 터무니 없이도 적다. 이러한 사실을 회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 사실은 유태인 국가가 지배권력인 무제한적 국제주의와는 정반대로 기독교 국가임을 주장하는 나라와 국가 그리고 민족적인 존재양식을 믿고 있는 나라와 국가에 대한 엄숙한 경고로 존재한다.-

이 리스트는 너무 길어 여기에 충분히 밝힐 수 없어 간단히 핵심만 추려 소개한다.

                                     회원수   유태인    백분율
        인민위원회(인민위원은 장관)    22      17        77.2%
        전쟁 인민위원회                43      33        76.7%
        외무부 인민위원회              16      13        81.2%
        재무부                         30      24        80.0%
        사법부                         21      20        95.0%
        대중교육부                     53      42        79.2%
        사회원조부                      6       6        100%
        노동부                          8       7        87.5%
        비엔나, 베를린 바르샤바,         8       8        100%
        부카레스트,코펜하겐에 있는 볼셰비키
        적십자사  
        지방 인민위원회                 23      21       91.0%
        언론인                          41      41       100%

   여기에 1919년 소련의 <인민 최고위원회>의 명단이 있다.

               가명             실명
   레닌(Lenin)              오울리아노프(Oulianoff)  어머니가 러시아 유태인
   트로츠키(Trotsky)        브론슈타인(Bronstein)       유태인
   스테클로프(Stekloff)      나참레스(Nachamress)       유태인  
   마르토프(Martoff)        제더바움(Zederbaum)        유태인
   고우시에프(Goussief)     프랩카인(Prapkine)          유태인
   카메네프(Kameneff)      로젠휄드(Rosenfeld)         유태인
   소우카노프(Soukhanoff)   김머(Ghimmer)             유태인
   라게스키(Lagesky)        크래치만(Krachmann)       유태인
   복다노프(Bogdanoff)      실버슈타인(Silberstein)      유태인    
   고레프(Goreff)            골드만(Goldmann)          유태인
   오우리츠키(Ouritsky)      라도미젤스키(Radomiselsky) 유태인
   볼라달스키(Voladarsky)   코헨(Kohen)                유태인
   스베르들로프(Sverdloff)   스베르들로프(Sverdloff)      유태인
   캄코프(Kamkoff)          카츠(Katz)                  유태인
   가네스키(Ganesky)        유르슈텐버그(Eurstenberg)   유태인
   단(Dann)                 고우레비치(Gourevitch)      유태인
   메시코프스키(Meshkovsky) 골드버그(Goldberg)         유태인
   파르부스(Parvus)          겔파낫(Gelphanat)           유태인
   로자노프(Rosanoff)         골덴바흐(Goldenbach)       유태인
   마르티노프(Martinoff)      짐바르(Zimbar)              유태인
   체르노몰스키(Tchernomorsky)체르노몰디히(Tchernomordich) 유태인
   피알니츠키(Pialnitzky)      레빈(Levine)                 유태인
   아드라모비치(Adramovitch)  라인(rein)                   유태인
   로인체프(Lointzeff)         블라이치만(Bleichmann)       유태인
   즈베즈디치(Zvezditch)       폰슈타인(Fonstein)           유태인
   라데크(Rad다)              소벨슨(Sobelson)             유태인
   리트비노프-왈락(Litvinoff-Wallak) 핀켈슈타인(Finkelstein) 유태인
   루나챨스키(Lunatcharsky)    루나챨스키(Lunatcharsky)    러시아인
   콜론타이(Kolontai)           콜론타이(Kolontai)           러시아인
   페테르스(Peters)             페테르스(Peters)             레트족
   메클라코프스키(Macklakowsky) 로젠불럼(Rosenblum)       유태인
   래핀스키(Lapinsky)           레벤슨(Levenson)            유태인
   보브로프(Vobroff)            나탄슨(Natanson)             유태인
   오스토독스(Ostodoks)         아크셀로드(Akselrode)        유태인
   가지네(Gasine)               게르펠트(Gerfeldt)            유태인  
   글라소우노프(Glasounoff)      슐체(Schulze)                유태인
   레베디에바(Lebedieva)         림소(Limso)                 유태인
   죠페(Joffe)                    죠페(Joffe)                  유태인
   카멘스키(Kamensky)           호프만(Hoffmann)           유태인
   나오우트(Naout)               군스부룩(Gunsbourg)         유태인
   라고르스키(Lagorsky)          크라치말닉(Krachmalnik)     유태인
   이즈고에프(Isgoeff)            골드만(Goldmann)            유태인
   발디미로프(Valdimiroff)        휄드만(Feldmann)            유태인
   보우나코프(Bounakoff)         화운다민스키(Foundaminsky)  유태인
   크라치말닉(Krachmalnik)       크라치말닉(Krachmalnik)      유태인
   라리네(Larine)                 로우리에(Lourie)              유태인
   크라신(Krassin)                크라신(Krassin)               러시아인
   치체린(Tchitcherin)             치체린(Tchitcherin)           러시아인
   고우코프스키(Goukovsky)       고우코프스키(Goukovsky)     러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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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소비에트 최고 인민위원회 명단이었지만 볼셰비키 행정부 545명 중 유태인이 447명을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고 러시아인 30명, 레트(Lett)족 34명, 아르메니아인 22명, 독일인 12명, 핀족(핀란드) 3명, 폴란드 2명, 영국 죠지 왕조인 1명, 체코인 1명, 헝가리인 1명으로 되어있다. 유태주의가 자유노조와 함께 볼셰비키를 도왔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라는 학자의 논문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에 필요한 자금은  미국-영국- 독일 다국적 연방은행이 자금지원을 했는데, 유럽의 정치가들과 재력가들은 러시아를 경제종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혁명 후의 정치적 승인을 내다보고 정치적 흥정으로 혁명자금을 댄 것이라 말한다.

미국의 사업가들도 러시아 혁명에 유혹을 받아 군침을 흘린 나머지 러시아를 담보 삼아 참여했으며 그런 과정에서 볼셰비키의 반 민주주의적인 선전 술책 가령, 매수, 구매, 협박, 꼬드기기 등을 자신들 세계 속에 씨뿌리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미국-영국-독일의 재정 복합체의 엄청난 힘이 자신들의 무릎 위에서 노는 사람들이 진열해 놓은 횡재들을 향해 머리를 돌렸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을 위엄 있게 보이고 싶고 국제 금융가로 불려지기를 바라며, 막상 진정한 기능과 한계는 숨기고 싶어하는 이들 미국-영국-독일의 은행가 그룹에 의해 볼셰비키의 주장과 목적이 지지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영향력 있는 그들은 주위의 친구들, 모임에 모든 사람들이 소비에트의 승인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는 것이다.(안원전의 21세기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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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메이슨 운동의 영향

러시아 문학  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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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은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시대에 접어들면서 신기원을 맞이하였다. 러시아의 작가들은 아직도 프랑스 문학의 모방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점차 러시아 생활의 실제적인 관찰을 통하여 러시아적인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예카테리나 여제(女帝) 시대의 찬란한 문화기를 대변하는 시인으로 제르자빈을 들 수 있다. 극작가로는 폰비진이 나타나 순수한 러시아 희극 《여단장(旅團長)》 《철부지》 등으로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 밖에도 헤라스코프의 《로시아다》, 노비코프의 풍자잡지, 라디시체프의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 등이 이 시대의 중요한 작품들이다. 러시아 고전주의는 예카테리나 시대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18세기 말에 이르러 점차 그 매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천시되어 온 ‘천민(賤民:농민)’에게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감상주의를 유치하기에 이르렀다.18세기 말 유럽에서는 개인의 '감수성'을 숭배하는 감상주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당시 러시아에도 프리메이슨 운동의 영향으로 감상주의의 물결이 서구와 별다른 시차 없이 곧바로 수용되었다. 이러한 감상주의 도입의 선두에 선 사람이 까람진 이었다. 그는 기존의 고전주의에서 중요시 되던 인간의 '이성'이 아닌 인간의 '감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예술의 기본 요서라는 것을 깨달은 인물이었다.이같은 '감정'에 대한 인시이야말로 러시아 문단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획기적 사건이었다.

러시아 문학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 시대)Click here!
*1830년대 초에 이르자 러시아의 시가(詩歌)는 극히 명료하게 낭만주의적 이상주의의 근본적인 모티프를 표현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환상 ·환멸, 악에 대한 반항, 순수한 우정과 애정, 영원한 진리, 생존의 의의 같은 것이 당시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낭만주의의 이식자(移植者)인 동시에 대표적인 시인인 주코프스키는 미지의 인간들에 대한 연민, 먼나라에의 동경, 사랑의 고뇌, 이별의 슬픔 등을 다루었다. 그 밖에도 낭만파에 속하는 시인으로는 바튜슈코프가 있고 릴레프, 큐헬리베케르, 오도예프스키 같은 이른바 데카브리스트도 있다.1815년 페테르부르그에서 결성된 '아르자마스'는 감상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러시아 낭만주의 운동의 요람이 된 문학단체였다. 까람진 학파에 속하는 이 단체에는 리더인 주꼬프스끼를 미혹하여 바쮸쉬꼬프, 뱌젬스끼 등 다수의 젊은 시인들이 동인으로 활동했다. '아르자마스' 멤버들에 의해 러시아 시는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이들은 1820년대 러시아 시의 황금시대가 도래하는 견인차의 역할을 했다. 뿌쉬낀은 '아르자마스'의 최연소 멤버로서 가장 뛰어난 시재를 우감없이 발휘한 천제적 시인이었다. 18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러시아 문단에는 사실주의가 대두하여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러시아 사실주의는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며 세계 사실주의 문예사조의흐름 가운데 정상의 위치에 우뚝 섰다. 그럼으로써 러시아 문학은 오랜 근대문학의 전통을 지닌 서유럽 문학에 비해 훨씬 짧은 역사를 가졌다는 약점을 완전히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잠재된 저력을 만천하에 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술적 사실주의는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에 대한 부정에서 일어났다. 가령 낭만주의가 예술로서의 시의 본질에 관한 개념을 심화했다고 한다면, 사실주의는 시의 사명에 대해서 시와 실생활과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점들을 추구했다. 러시아 사실주의의 탄생의 이면에는 많은 복합적 요인이 있긴 하지만, 그 중 뿌쉬낀, 레르몬또프, 고골 등 앞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성과가 첫번째 밑거름이 되었다. 거기에 1830년대 이후 대대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프랑스, 독일 문학 등 서유럽 소설문학의 영향을 꼽을 수 있으며, 같은 시기 활성화되기 시작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라는 첨예한 논쟁과 관련한 러시아 서클 운동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1840년대 초부터 '자연파'라는 이름으로 전개된 평론가 벨린스끼의 새로운 미학 운동도 가세되어 러시아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조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의 선구자로는 우화(寓話) 작가 크릴로프와 극작가 그리보예도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문학에 사실주의가 완전히 확립되기까지는 푸슈킨과 고골리의 출현을 기다려야만 했다. 러시아 문학을 서구문학의 수준에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국민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은 푸슈킨이었다. 그는 문학이 사회의 정신적인 발달에 중요한 구실을 하는 국민적인 사업이라는 것을 자각한 러시아 최초의 시인이다. 그는 과거의 러시아 문학의 성과를 집대성하여 다종다양한 장르에 걸쳐 후세 러시아 문학의 규범이 될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1820)는 옛날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새로운 구어풍(風)의 참신한 시작(詩作)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는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를 비롯하여 서사시 《폴타바》 《청동(靑銅)의 기사(騎士)》, 산문 《벨킨 이야기》 《대위의 딸》, 운문소설(韻文小說) 《예프게니 오네긴》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정시를 남겼다. 푸슈킨에 이어 러시아 문단에 두각을 나타낸 시인 레르몬토프는 100여 편의 서정시 외에 서사시 ·소설 등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작품은 《현대의 영웅》이다. 그의 악마주의 내지 염세주의는 절망적인 염세주의가 아니라 이 세상의 온갖 불의(不義)에 대한 전투적인 항의라고 할 수 있다.
푸쉬낀에 이어 러시아 문학에 사실주의를 완성한 작가 고골리는 이른바 비판적 사실주의의 창시자로서 러시아 문학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사실주의는 사회의 부패요소를 제거하고 보다 건실하고 밝은 미래에의 길을 개척하려는 인도주의적인 염원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그는 《검찰관》 《죽은 넋》 등 수많은 걸작을 발표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하급관리의 모습을 그린 《외투》는 후일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이다. 통렬한 풍자와 유머를 구사하는 고골리가 러시아 문학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그는 속악(俗惡)한 현실 가운데서도 인간적 감정을 찾아냄으로써 후세의 러시아 문학의 특징이 된 인도주의적 경향의 선구(先驅)를 이루었다.
러시아 문학은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명기를 벗어나 개화기로 접어든다. 문학상의 사실주의의 승리는 실생활에 대한 비평적 정신의 발흥을 가져왔고, 과거 10여 년에 걸친 폭정(暴政)에 대한 반동으로서 지적(知的) ·사회적 운동이 고조되면서 정부의 탄압에 대한 지식계급의 저항은 농노제도에 대한 예리한 비난 등으로 나타났다. 한편 지식층은 슬라브파(派)와 서구파(西歐派)로 갈라져 격렬한 사상논쟁을 벌였다. 슬라브파는 모스크바 시대의 전통에 입각해서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로 돌아가자고 외쳤고, 서구파는 적극적으로 서구문명을 받아들여서 러시아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것을 자기들의 사명으로 생각하였다. 슬라브파가 종교적 공동생활의 이상을 제창한 데 대하여 서구파는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 및 사회적 권리를 주장하였다.
특히 알렉산드르 2세(1855~81) 시대에는 위대한 작가들, 분명히 거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작가들이 나타나 대표적인 작품들을 연이어 배출하며 러시아 소설의 황금시대를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투르게네프, 곤차로프,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 이른바 40년대의 군성(群星)들이 배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고, 문학비평에 있어서도 벨린스키가 나타나 사실주의 입장에서 ‘생활을 위한 예술’을 역설하였다. 그는 푸슈킨, 레르몬토프, 고골리의 문학사적 의의를 규정함으로써 사실주의 문학이론을 구축하였고, 새로운 작가의 육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벨린스키와 나란히 40년대 이후의 러시아 문학과 사회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람은 게르첸이다. 벨린스키가 주로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활약한 데 대하여 게르첸은 창작 ·철학 ·정치평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소설 《누구의 죄인가》(47) 《과거와 사상》(52∼68)이라는 유명한 회상기가 있다. 그러나 40년대의 문학이 다룬 사회적 모티프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은 민중의 문제였다. 러시아 농민의 처참한 운명에 대한 동정과 전제정치에 대한 분노는 푸슈킨 이래 많은 작가들의 관심을 끌어 왔으나 이 시대에 이르러 농노제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완전히 문학계의 주조(主潮)가 되었다. 그리고로비치는 그의 대표작 《마을》에서 농민의 모습을 생생히 그림으로써 독자의 동정을 끄는 데 성공하였고, 농촌의 빈민에 대한 관심과 병행하여 도시의 하층민에 대한 동정도 이 시대에 이르러 풍부한 문학적 수확을 거두기에 이르렀는데, 벨린스키의 격찬 속에 문단에 데뷔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50년대는 40년대의 연속으로서 독립된 개성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특기할 만한 현상으로는 L.톨스토이의 출현을 들 수 있다. 그의 처녀작 《유년시대》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소년심리를 세밀하게 해부해 보이면서 예술적 향기를 잃지 않은 이상적인 객관적 묘사에 의해서 독자들을 놀라게 하였고, 네크라소프를 비롯한 많은 작가 ·시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50년대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최대의 작가 투르게네프는 농노제를 고발한 《사냥꾼의 수기(手記)》(52)로 명성을 얻은 후 계속해서 《루진》 《전야(前夜)》 《아버지와 아들》 등의 걸작을 발표하여 자연주의의 완성자로서의 작가적인 천분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 곤차로프는 그의 대표작 《오브로모프》(59)에서 러시아인의 근본적인 특징을 완벽에 가까우리만큼 객관적으로 묘사하였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 독서계에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가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체르니셰프스키, 인텔리겐치아에게 큰 영향을 준 비평가로 도브롤류보프와 피사레프가 있다. 또한 이들 비평가들과 함께 급진적 진영에 속하면서 농민혁명의 이상을 내건 시인 중에 가장 유명한 네크라소프가 있다. 한편 이러한 급진적인 문학에 대항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운 보수적인 진영에는 시인 페트를 위시하여 마이코프, A.톨스토이, 튜체프 등이 있다. 60년대는 극문학(劇文學) 분야에서도 러시아 국민극(國民劇)의 개척자인 오스트로프스키를 낳았는데, 그는 대표작 《가난은 죄가 아니다》 외에 50편에 가까운 희곡을 남겼다. 그의 희곡은 일상생활에서 취재한 평범한 내용을 주제로 한 생활극이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기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사건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죄와 벌》(66),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69)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러시아 문학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白痴)》 《악령(惡靈)》,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 세계적인 대작을 낳음으로써 황금시대를 장식하게 된다.
70년대에 접어들어 러시아의 지식계급과 청년들은 ‘민중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농민 속으로 파고드는 운동의 전개와 병행하여 문학분야에도 이에 동조하는 민감한 반응이 일어나 70년대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민중파 운동을 대변하는 작가로 슈체드린 외에 우스펜스키, 즐라토브라츠키, 비평가로는 미하일로프스키 등이 있다. 오랫동안 러시아 인텔리의 마음의 지주였던 이상이라는 것이 무너지고 농민과 지식계급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의식하게 되자, 러시아 작가들은 점차 실의와 환멸에 빠져들었다. 이 시대의 절망적인 기분을 반영하는 전형적인 작가 가르신은 대표작인 《4일간》 《붉은 꽃》(83) 등을 통하여 무익한 희생과 값없는 열망의 테마를 상징화하였다. 이러한 실의의 시대에 출현하여 그 내면생활의 의의와 진상을 통찰하고 거기에다 빛나는 예술적 표현을 부여한 작가가 A.체호프였다. 기라성 같은 장편작가들이 군림하는 러시아에서 단편 작가로 명성을 얻은 최초의 문인이었던 체호프는 20년간의 비교적 짧은 창작생활을 통해 1,000여 편의 주옥 같은 단편을 남겼고, 《갈매기》 《벚꽃동산》 등 4대 희곡을 남겼다.
1880년대에 이르러 러시아 문단은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거장들이 이끌어가던 소설의 황금시대가 막을 내리고, 중.단편의 시대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뚜르게네프, 도스또예프스끼의 연이은 서거와 더불어 똘스또이의 절필 선언까지 겹쳐 사실상 거장들의 시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들의 위업에 필적할 만한 새로운 장편소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1880년대에 새로이 문단에 나타난 신예작가들, 즉 가르쉰, 꼬롤렌꼬, 체홉 그리고 그로부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작품활동을 시작한 꾸쁘린, 부닌 등은 단편 장르에 비범한 재능을 타고 난 작가들이었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그들의 선배 작가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들은 중.단편 분야에서 천부적인 기량을 발휘해 사실주의 문학의 새로운 영역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또한 그들은 민중의 삶의 스승이 되어 그들은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이끌려고 했던 거장들의 태도를 모방하지 않고, 단지 인간을 관찬하고 위로하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은 독자적인 철학을 내세우지 않은 채 단순히 휴머니스트의 관점에서 문학하기를 선호했다.
이같은 경향은 체홉의 경우 관조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그는 결코 과장하지 않는 작가였다. 그의 진신에 대한 태도는 열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아이러니컬하거나 멜랑콜리한 측면까지 있다. 체홈은 인간이란 정의롭지도 않지만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의 소유자였으며, 따라서 그에게 나타나는 아이러니는 일종의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내포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같은 그의 관점은 《약혼녀》 《벚꽃동산》과 같은 후기작품에서 더욱 뚜렷이 부각된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한 줄기 희망이 마치 서광처럼 그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출가 스따니슬랍스끼는 "내가 지금껏 보아온 어떤 사람보다도 체홉은 미래에 대한 강력한 낙관주의를 갖고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1881년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사건 이후 러시아 사회가 급격히 보수 반동의 분위기로 돌아서고, 나악 무기력한 삶의 양상까지 팽배하던 시대적 상황과는 오히려 대조적인 현상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장에서 언급되는 레스꼬프와 레미조프 등은 전통적 리얼리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스타일리스트로서 후세대 작가들의 실험적 산문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이들의 언어와 형식에 대한 과감한 선구적 실험겅은 제정 러시아 말기의 모더니즘 운동시대를 거쳐, 신흥 소비에트 러시아 문단에 나타난 새로운 소설양식의 탐구작업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이정표가 되엇다 소비에트 문단의 이른바 '장식주의 산문' 운동을 이끌었던 젊은 작가들은 언어를 매체로 한 다양한 서술방법, 장르의 혼합, 문학외적 예술 테크닉의 과감한 차용따위를 거침없이 구사하여 기존의 사실주의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보다 현대적이며 현란한 스티일의 산문양식을 창조하며 현대문학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했는데, 그 앞에는 레스꼬프 등의 선구자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시대의 거장들은 어느 면에서는 인류를 이끌어나가는 스승고 같은 정신적 역량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과 세계관으로 시대 정신과 삶의 본질을 통찰했다. 그러면서 개성적이며 풍부한 예술적 능력으로 인간과 삶, 사회와 역사의 상관관계를 풀어 나가며 인류의 빛이 되고자 했다.

러시아 문학 세기말에서 10월혁명까지 Click here
*세기 전환기를 맞이하여 러시아 문단은 커다란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존의 사실주의 문학 전통 외에 모더니즘이라는 신문화 운동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쳐,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의 지각변동을 불러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모더니즘 운동의 첫 출발은 1890년대의 상징주의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프랑스에서 발생한 상징주의 문학운동은 1892년경 메레쥐꼬프스끼에 의해 러시아에 도입되엇다. 그는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을 소개하며, 새로운 우미주의적 문학사조를 러시아에 도입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문학을 종래의 사실주의의 좁은 틀에서 해방시켰다. 그것은 문학에 새로운 정신과 기법을 열어주는 일대 사건이었으며, 나아가 총체적인 미학적 관점의 변화를 이룩하게 한 전환점이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침체되었던 러시아 문학은 마르크스주의의 대두를 기하여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작가 가운데 손꼽히는 사람인 M.고리키는 《체르카시》(1895)와 같은 초기 작품에서 부랑자들의 생활을 그리는 동시에 부르주아적인 현실에 항거하는 낭만적이고 고고(孤高)한 형상을 창조하였다. 그는 《바다제비의 노래》 《포마고른제프》를 비롯해서 밑바닥의 인생을 그린 희곡 《밑바닥에서》, 러시아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을 주제로 한 《어머니》 등을 썼다. 그 밖에 고리키와 같은 시대의 사회적 경향을 지닌 작가로는 치리코프, 베레사예프, 쿠프린 등이 있다. 1890년대에는 사회성에 대한 흥미가 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반면 개인주의적 사조도 발달하고 있었다. 즉, 데카당파 및 상징파라고 불리는 개인주의적 ·신비적 경향을 띤 시인들도 많았다. 러시아의 상징주의는 프랑스의 상징파나 니체의 개인주의적 철학, 또는 입센의 영향을 받아 발달했기 때문에 초기에 있어서는 서구 근대파의 모방을 면할 수 없었으나 1900년경부터 순수한 상징파로서 독자적인 특색을 발휘하게 되었고 이것이 10월혁명에 이르기까지 문단을 풍미하게 되는데, 러시아의 상징주의가 이 정도까지 발달을 보게 된 것은 주로 발리몬트, 브류소프, 메레쉬코프스키, 솔로구프 등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신운동(新運動)에 참가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안고 활약한 젊은 시인들의 무리가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메레쥐꼬프스끼는 "예술의 운리적 의미란 사람을 감동시키는 교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가 추구하는, 고매하고 꺾을 수 없는 진실에 대한 사랑에 있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예술의 운리 문제를 미학적 문제와 결부시키는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이 '가치의 재평가'를 시도한 메레쥐꼬프스끼의 혁신적 예술관이었으며, 이 같은 관점에서 출발한 그의 '비정통적' 견해는 그 후 러시아 문학의 발전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초창기 상징주의자들은 예술지상주의, 신비주의, 개인주의, 퇴폐주의를 지향하며 문학과 종교철학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했고, 시 문학을 부흥시켜 이른바 '은세기 문학'을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시작한 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대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모더니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광범위한 신문화 운동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런데 1910년대 초에 이르러 한 시대를 풍미하던 상징주의에 대해 반기를 든 시인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이른바 아끄메이스트라고 알려진 극치주의 시인들과 미래주의 시인들의 등장이 그것이다.
비평가들은 전자를 전기 모더니스트, 후자를 후기 모더니스트로 구분하거니와, 물론 후자는 전자로부터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전자의 대표자에게는 상징주의가 문학적 형식이었으나 후자에게는 세계관이었다. 전자는 순수한 시인이었으나 후자는 예언자를 자처하였다. 그들은 그 시적 창조의 상징적 형상에 의해서 별세계(別世界)의 미(美)와 비밀을 예언하고 선전하는 것을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징파 시인들 외에도 10월혁명 전까지 러시아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염세주의의 안드레예프, 냉소주의의 아흐츠이바세프 및 부닌, 자이체프, 톨스토이 등의 사실주의 문학이 있었다. 그리고 상징파의 쇠퇴와 더불어 아크메이즘(akmeizm)과 미래파가 대두되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처럼 이 시기는 상징주의, 극치주의, 미래주의가 찬란한 경합을 통해 러시아 문학의 수준을 최상의 선으로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해 당시 러시아 예술의 르네상스가 도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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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전
2006/03/04 5539
99
  동영상 특강 '우리역사의 줄기' [1]

안원전
2006/02/16 5119
98
 -[특집]세계제국-동북공정과 간도 그리고 통일의 대세! [1]

안원전
2006/01/27 11620
97
 대만은 백제의 속국

안원전
2006/01/11 5490
96
 어제 KBS1 심야 책을 말하다 동북공정에 대한 토론회를 보고.....2004.9.XX(기록용으로 옮김)

안원전
2005/12/04 7089
95
 망국적 한국역사 소송진행문

안원전
2005/11/16 5784
94
 역사학계동정 [512]

안원전
2005/09/26 6485
93
 (중국 학자 양만연) 한국 문화와 중국 초나라 문화의 연관성 탐구 (치우=묘민/초나라) [471]

안원전
2005/07/27 15655
92
 독도는 우리땅!

안원전
2005/07/13 4807
91
 역사왜곡의 극치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밝힌다

안원전
2005/07/13 7207
90
 동방불패는 한국(동이)이었다. 묘족은 치우천왕의 직계 후예로 동이족이다.

안원전
2005/07/02 6873
89
 周恩來 “만주는 조선족 무대” 63년 대화록 (서울신문)&주은래총리(周恩來總理)의 중국-조선관계(中國-朝鮮關係) 對話전문 [1]

안원전
2005/04/10 8000
88
 '만주는 우리 땅' 입증 유럽 古지도 대량 발견

안원전
2005/02/21 5431
87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계보

안원전
2005/02/15 6253
86
 우리의 역사는 이렇게 말살되었다

안원전
2005/02/15 6351
85
 백두산 정계비에 적힌 그 강… 토문강 찾았다 조선․청의 국경…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드러나

안원전
2005/02/12 5496
84
 문헌에서 본 우리 겨레의 고대역사

안원전
2004/12/25 6186

  프리메이슨서양사15(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2]

안원전
2003/10/22 18252
82
  프리메이슨서양사14(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3]

안원전
2003/10/22 12668
81
 프리메이슨서양사13(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3/10/22 11686
80
 프리메이슨서양사16(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3/10/22 7066
79
 테마 : [역사의 진실] 심청전의 무대는 호남성 동정호 주위 [1]

안원전
2004/09/08 6766
78
 콜럼버스보다 71년 앞서 명나라 제독… 3천개 나라 10만리를 누빈 대항해

안원전
2004/08/31 6753
77
 일만년 대륙사를 꿰는 왕도-한민족 영적세계의 원형인 신교의 세계

안원전
2004/08/17 5360
76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國祖 - 원로 문헌 친일매국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1]

안원전
2004/08/01 5797
75
 방촌 임균택 박사 한경 서문 [1]

안원전
2004/05/22 7537
74
 원문:“영토제국주의 드러낸 허점투성이 논리”-쟁·점·별로 살펴본 국내 학계의 반·박(중국어로 번역)

안원전
2004/01/17 5884
73
 한국사의 인식과 환단고기-반도 고고학의 해독

안원전
2003/12/30 7471
72
 [동영상]대학가에 민족혼의 바람이 불고있다 [3]

안원전
2003/12/25 8902
71
 <개천절 방북기>과연 檀君이 單君임을 확인한 행사 학술토론회, 북측 `대동강 문화` 강조 [1]

안원전
2003/10/11 5586
70
비밀글입니다 (구) 홈페이지 소개글(기록용)

안원전
2003/08/04 4011
69
 민족사의 여명과 역사의 수난 - 송호수,두계학파와 실증사학 -신복룡

안원전
2003/05/14 7618
68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가장 쉽게 정립된 기초 강의안이므로 먼저 읽고 시작할것!),동방 한민족의 대도 세계와 민족사를 공부하는 정신자세에 대하여 [2]

안원전
2003/01/23 8615
67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박성수 교수)

안원전
2003/01/23 8777
66
 프리메이슨 서양사3(안원전의21세기 담론중)

안원전
2002/07/12 11115
65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서희건)

안원전
2003/01/23 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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