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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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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 과연 동아시아를 바꿀까


한국이 과연 동아시아를 바꿀까  



동아시아 2009/12/24 14:31   http://blog.hani.co.kr/sdhan/22884  






  “저는 일본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지금의 일본에 대해서 지극히 비관적입니다. 긍정할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조선에 있습니다. 특히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상황을 돌파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조선반도의 열쇠는 남쪽에 있습니다.”
 역시 햇볕정책과 같은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네, 좀 더 빈틈없게 해서 치켜세울 수밖에 없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할 겁니까? 저는 그런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 과정에서 북쪽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변해 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쪽에서 더욱 꼼꼼하고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쪽이 좀 더 민주화를 탄탄하게 해서 경제를 성장시키고 북쪽과 잘 화합하면 상황은 변해갈 것입니다. 그것이 일본에 대한 힘인 것입니다.”

 힘이 있다면 민주화, 평화,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로 이어지는 것이 되겠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동아시아의 운명은 확실히 한국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21세기 천황제와 일본> 논형, 2006)

 2004년 12월 박진우(53) 숙명여대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윤건차(65) 일본 가나가와대학 교수는 그렇게 말했다. 윤 교수는 그때 이른바 ‘전후 민주주의’덕에 누리던 언론과 표현의 자유마저 급속히 변질돼 가고 있다며 “지금 일본은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개혁 구호를 앞세운 신자유주의 정책을 확대해가던 고이즈미 정권 시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창간된 계간지 <전야> 창간호에서 서경식(58)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이렇게 썼다.

“지금은 밤이다. 밤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이라는 하나의 사회가 빠르게, 거침없이 추락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밤은 칠흑의 어둠이 아니라 오히려 불쾌한 밝은 빛을 띠고 있다. 고장난 텔레비전 화면 같다. 색채만 요란하고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비논리적인 발언을 태연하게 되풀이하면서 경박스럽게 웃고 있다. 웃으면서 확실히 전락하고 있다. 그 끝에는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 전쟁 전야, 파국 전야다….”

 두 자이니치(在日)동포 교수의 음산해 보이는 현실인식이 아주 닮았다. 군국주의, 파국, 전쟁과 같은, 다소 생경해보일 수도 있는 용어들은 현실감없는 과잉의식처럼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딘지 다급해 보이는 그들의 독특한 감수성이 의식과잉인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이 무딘 것인지 결론은 유보해 두자.

 그보다 4년이 더 지난 올해 5월 6일 서울에 온 강상중(59) 도쿄대 교수는 연간 3만명 이상이 자살하는 일본의 현실을 두고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자이니치 2세다. 1세들이 가난 속에서 멸시와 차별을 받고 살았을 때 자살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시대를 거쳐 이젠 자이니치가 중산층 이상의 지위를 누리고 나처럼 대학 교수도 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이젠 일본사회 전체가 자이니치화하고 있다.

일본국민 10%가 연간수입 200만엔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빈곤층이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취급당하고 있고, 사회안전망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용불안 속에 쓰레기취급을 당하고 있다. 지금 일본 젊은이들은 예전의 자이니치와 같은 처지가 됐다.”강 교수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는 한국도

‘버려지는 젊은이들’이 양산되면서 한때 민주화와 통일 등에 대한 꿈을 지녔던 세대들이 무너지고 일본과 비슷한 양상에 직면했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조사 이후 희망이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일본과 한국 모두 정치불신 만연과 함께 매우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 2주일 뒤 노 전 대통령이 뜻밖에도 세상을 버렸다.

 지난 8월 말의 일본 총선에서 자민당의 참패로 50여년에 걸쳐 장기집권한 자민당 ‘55년체제’가 무너지고 정권이 민주당쪽으로 넘어갔다. 이미 자민당 패배가 예견되고 있던 총선 약 4개월 전 시점의 강 교수 얘기가 한층 더 절박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그것은 윤·서 두 교수가 오래 전에 감지해냈던 불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월 윤건차 교수의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 1945년 이후의 한국·일본·재일조선인>이 서울에서 출간됐다. 이 책이 이와나미 서점에서 <사상체험의 교착- 일본, 한국, 자이니치 1945년 이후>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은 2008년. 한국어판 서문에서 윤 교수는 집필에 거의 5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했으니, 집필동기나 책을 쓸 당시의 문제의식은 <21세기 천황제와 일본>에 수록된 2004년 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를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것의 총괄”이라고 했다. “스스로의 시점에서 일본·한국·자이니치를 사상체험의 축으로 삼아 언급해보려는 것, 혹은 일본·한국·자이니치의 관계사, 사상·정신의 교착사입니다.”

 5년의 세월이 흘렀고 한국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인 올해 봄 강상중 교수가 감지했던 희망 상실의 예감 같은 걸 윤 교수도 느끼고 있을까? “열쇠는 남쪽에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운명은 확실히 한국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습니다.”고 했던 그의 생각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러나 한국어판이 나온 직후인 7월 21일 서울에서 만난 윤 교수는 여전히 희망적이었다. “남북한 변화가 일본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라는 믿음은 여전했으며, 시끄러운 한국이 제대로 시위조차 하지 못하는 무저항의 일본사회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고 했다. 하토야마 유키오의 민주당으로 정권교체가 거의 확정적이던 그 시점에도 일본에 대한 윤 교수의 시각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의 등장이 정치사적으로 의미가 작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일본이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해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에 거는 그의 기대는 낙관과는 거리가 멀다. ‘윤건차 사상’의 기본줄기는 절망에서 희망찾기다. 출발점은 절망이다. 그가 낸 책들 제목에 등장하는 ‘사상’부터 그것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사상이 일어난 사건이나 사상(事象)의 설명 내지는 해설뿐이라면 그것은 죽은 사상이며 사상의 무력함을 나타낼 뿐이다.”그래서 그는 마쓰모토 겐이치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동의한다. “사상이란 궁극적으로는 논리가 아니다.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다. 주체의 에토스에 관한 문제다. 사람은 자신의 사상을 삶의 방식 그 자체로 증명해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수반되는 그 사상을 가치관이라고 해도 좋고 사회관이라고 해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어떤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이나 목표가 없으면 사상도 빈약하고 얄팍한 것이 돼버리고 만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다니카와 간이 ‘사상은 일종의 에너지다’라고 한 말에 찬성한다.”그에게 현실을 바꾸는 실천문제와 연계되지 않은 사상이란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상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의 가장 큰 모순·과제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야 비로소 어떻게 세상을 바꿔갈 것인지 그 방도도 알 수 있다.

 그가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와 동시에 출간한 그의 첫 시집 <겨울숲>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임헌영 교수는 제목을 ‘한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자아 찾기’라고 붙였는데, 그것은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는 소학교(초등학교) 때는 본명(조선식 본이름)을 썼고 중학교는 일본식 이름(통명)으로 다니다가 고등학교 들어가서 학적부, 출석부에 자기 이름이 본명으로 기재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일본식 이름으로 고쳐달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차별사회 일본에서 피차별의식, 열등감, 비굴함이 단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일제 패망 9개월 전 교토에서 태어났다. 다섯살 때 그의 가족은 조국으로 돌아가려고 마이즈루 항까지 가서 배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바로 그때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그들은 다시 교토 니시진으로 돌아갔다. 니시진은 비단생산지로 유명했으나 환경은 비참했다. 윤 교수 가족은 직물기로 실을 꼬는 연사작업을 했다.

“생사 한올 한올에 풀을 발라 7올이나 8올로 꼬는 작업입니다. 공장 안은 그 풀냄새와 기계소음이 뒤섞여 엄청납니다. 연사작업은 니시진에서 가장 더러운 작업입니다. 풀이 한번 손에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습니다. 더럽고 돈도 되지 않는 일은 조선인이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대학 2학년 무렵 연사기계 2, 3대로 운영하던 영세 가내수공업으로

버티던 집이 도산해버렸고 1주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파친코, 밤의 번화가, 사채업 빼고는 뭐든 다했다. 자이니치들이 거의 모든 자격시험에서도 배재당했던 시절인 고2 때 자이니치도 변호사가 될 수 있는지 교토 지방법원에 조심스럽게 전화문의를 했더니 사무관쯤 되는 자가 잠깐 망설이다가 들어라는 듯 저쪽을 향해 “이것 봐, 조센진이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데!”하고 소리친 다음 그런 방법은 없다며 거칠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말 공부 빼고는 할 일이 없어 교토대학에 들어갔고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다시 도쿄대 대학원으로 갔다. ‘산다는 것은 슬픔을 참아내는 것’이라는 야기 주키치의 시를 읽고 감동했던 대학 말년에 동포학생들과 만나면서 조국이나 민족이라는 걸 생각하게 됐다. 그는 대학원에 가서야

비로소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한국을 처음 찾아갔다. 전혀 다른 세상에 감격했지만 거기서도 그는 살 수가 없다는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30대 후반의 늦은 나이 때였다. 운좋게도 가나가와 대학 교수직 공모에 응모해 36대 1의 경쟁을 뚫고 채용됐다. “문과계열의 경우 공모라는 형태로 자이니치가 대학교수로 채용된 건 내가 최초이거나 아니면 상당히 최초에 가까운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조선 근대교육의 사상과 운동’이라는 그의 박사학위논문 심사위원 중에 가지무라 히데키라는, 조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조선사 전공의 진보적 학자가 초빙돼 있었고 그가 바로 가나가와 대학 교수였다는 행운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런 사춘기적 동요와 아찔한 정체성 찾기과정은 재일동포 지식인이 으레 거쳐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규슈 구마모토의 돼지 키우는 폐품수집상 아들로 태어난 강상중이나, 교토 근교 농가에서 소작일을 하다 섬유제품 장사로 돈을 좀 번 뒤 소규모 방적공장을 운영하기도 했으나 그가 대학에 입학할 무렵 파산해버린 자이니치 집안의 자식이었던 서경식도 그 의례를 아프게 통과했다.

 윤건차가 나이 37~8에야 확립할 수 있었던 정체성을 강상중과 서경식은 좀 더 일찍 체득했다. 야구선수를 꿈꿨던 강상중 역시 대학에 들어가서야 한국을 처음 찾았고 인정에 끌리고 감격했으나 역시 그곳에서도 발붙여 살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와세다대 정치학과에 다녔으나 마찬가지로 취직길도 없고 갈 곳이 없어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으로 유학갔다. 거기서 그는 ‘막스 베버와 미셸 푸코,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자이니치라는 자기규정과 문제의식이 근대화와 서구중심주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더 보편적인 컨텍스트로 이해되고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경식의 의례통과는 좀 더 혹독했다. 그가 와세다대 프랑스문학과에 입학했던 1969년에 집이 파산했고 2년 뒤인 1971년 서울대에 유학중이던 두 형(서승, 서준식)이 날조된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각각 19, 17년씩이나 이어진 두 형의 징역살이는 서경식 교수 자신의 조국 유학꿈을 날렸고 어머니는 그들의 출소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깊고 섬세한 서 교수의 사유와 산문은 이런 그의 가족사 및 충격·좌절감·분노·연민을 안겨준 아픈 상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서구 근대학문의 이론으로 무장한 강 교수의 글은 현란하고 딱딱하다. 유독 높은 강 교수의 일본내 인기도 자이니치라는 ‘외계인’이면서도 현란한 서구적 개념의 보편 컨텍스트를 동원함으로써 한일관계에서 피하기 어려운 특유의 내셔널리즘적 색채가 어느정도 탈색되는 효과 덕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1998년 미귀화 자이니치로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다.

 이에 비하면 윤건차는 투박하지만 집요하다. 임헌영 교수가 윤 교수를 두고 ‘우리시대 동아시아의 논객’이라고 평했지만 이는 세 명 모두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다. 이들 세 자이니치는 각기 특유의 색깔을 지니고 있으나 출발점, 문제의식,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들 고단했던‘디아스포라 지식인들의 자아찾기’는 윤 교수 식으로 얘기하면 결국 ‘천황제와 조선’문제로 귀착되고 문제해결의 기점은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이고 그 중에서도 남쪽 한국이다.

 윤 교수는 자이니치의 삶을 규정한 일본인들의 아이덴티티 현상에는 세개의 기둥이 있다고 정리한다. 하나는 서구의 일본침략, 즉 자본주의 시장으로의 편입. 두번째는 그에 대항하기 위한 통합의 구심점으로 창출해낸 천황제 국가. 세번째가 힘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자를 유린한 아시아침략, 그 중에서도 조선식민지배요 그것은 또한 아시아 멸시, 조선 멸시로 연결된다. 서구숭배와 아시아 멸시·조선 멸시는 이질적인 타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라는 면에서 동전의 양면을 이루며, 일본의 고유성과 우월성, 선민의식을 내세우는 내셔널리즘의 중핵이 천황제다. 윤 교수에 따르면, 이런 한일간의 악연은 근대이후로 국한되지 않는다. 7세기에 백제와 더불어 나당 연합군에 대패한 왜는 중화조공체제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천황체제를 수립하고 천황제 성립에 필수적인 조공 번국을 날조했는데, 그게 통일신라였다. <일본서기> 등에 나오는 진구 황후의 신라정벌과 임나일본부라는 허구가 그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에 내실을 채우려던 16세기 말의 임진왜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으로 그들의 오랜 꿈은 달성된다.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가 서구 제국주의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확보해야 할 필수불가결한 식민지였으며, 그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온갖 논리들이 날조됐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져야 했다. 지금까지 일본인의 내면심성으로 자리잡은 조선 멸시는 거기서 비롯된 것이며, 자이니치는 그 중에서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의 소산이면서 일본의 가혹한 이민족 지배를 가장 예리한 형태로 체현한 역사의 살아 있는 증인”이자 “근대 일본의 모순을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존재”다.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는 바로 그 자이니치의 관점, 즉 윤 교수 자신의 관점에서 일본과 한국(북한에 대해서는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유보하지만 그의 북한관은 별로 긍정적이지 못하다)의 사상적 토양을 오가며 겪고 사유한 사상체험 편력기다.

 문제의 핵심은 결국 천황제다. 선택의 여지 없이 얄궂은 역사적 인과에 의해 일본 땅에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들었던 근본문제의 근원이 바로 천황제였던 것이다.

 윤건차는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감방에 갇혀 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하니 고로가 ‘일본인민에게 바치는 유서’격으로 그의 <자전적 전후사>(1976)에 써 넣었던 글을 인용한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도 패전은 반드시 혁명으로 이어졌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패전함으로써 무조건 항복했다. 그때야말로 일본혁명의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감옥 안에 앉아 젊은 무리가 나를 맞이하러 와줄 것을 생각하면서 하루종일 기다렸으나 저녁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밤이 되어도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도 아무도 와주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일본혁명의 유일한, 절호의 찬스를 놓쳤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패전을 혁명으로 전환하려는 비판적 저항정신이나 정치적 전위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감옥으로 정치범을 맞으러 가고, 시위에 앞장서면서 전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했던 세력은 제국 일본의 가장 비참했던 존재인 자이니치들이었다. 그들은 패전국 일본에 대해서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무지한 점령자로 등장했던 미국에 의해 자신들의 조국이 분단당하고 전쟁의 참화까지 겪는 과정과 더불어 어느날 자신들을 일본국민에서 외국인으로 내팽개쳐버린 일본에서 철저히 도태당한다. 일본을 동아시아 냉전 교두보로 육성하려던 미국은 전후 좌파혁명 가능성을 극도로 우려하고 있던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제해주고 상징천황제 명목하에 천황제를 온존시켰다. 이른바 ’역코스‘를

통해 기시 노부스케나 나중에 한일국교협상 과정에서 ‘망언’을 내뱉게 되는 시이나 에쓰사부로 같은 전범자들에 대한 공직추방조처를 해제해 종속국 일본의 전면에 그들을 다시 포진시켰다.

 전쟁 전의 절대천황제와 전후의 상징천황제는 기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게 윤건차의 생각이다. 히로히토 자신이 전후 미일동맹체제의 실질적 배후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일본국민들이 패전 직후에나 고도성장기 이후에도 천황제를 지지하는 의식구조를 벗어던진 적이 없다. 그것은 외견상의 많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이니치나 한반도에 대한 일본인들 심성 깊숙한 곳에 우월감, 멸시, 차별의식이 여전히 그대로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윤건차는 지금 또는 가까운 미래에 일본인들이 내면화한 천황제가 일본 자체적으로 해소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하듯 말했다.

 일본의 식민지배라는 원죄와 미일동맹의 전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분단 한반도의 고통에 대해 일본 전후 지식인들은 무관심했다. 일본 전후 민주주의의 선봉장들이었던 난바라 시게루나 마루야마 마사오도 조선문제에 눈감았고 심지어 자이니치 문제에 동정적이었던 좌파 다케우치 요시미도 중국에 대한 책임문제에 집착했지만 조선문제는 피해갔다. 일본 식자들은 1931년 만주침략 이후의 이른바 15년 전쟁만 거론할 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강제합병과정의 조선 유린과 대규모 살륙은 철저히 외면한다. 윤 교수는 민족과 국민국가를 간단하게 ‘허구’로 치부하면서 비폭력, 관용, 공생, 화해를 강조하는 그들한테서는 “식민지와 민족문제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려는 자세”와 “가해책임을 보류하는 공동환상”을

발견한다.

 반전의 가능성은 천황제와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일본 내셔널리즘의 출발점인 조선의 변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남북한 변화가 일본의 변화를 추동할 것”이며, 남북한 변화의 “열쇠는 남쪽에” 있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윤건차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했다는 37~8살 나이 때 한국은 막 광주항쟁을 거친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가 안식년 때 런던에 가서 유럽 체류 한국 지식인들을 만난 건 1987년이었다. “그것이 내게는 한국 지식인들과 처음으로 경험해본 본격적인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런던에서 돌아와 민주화된 한국에 자주 가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서는 꽤 큰 사상체험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엄혹한 억압을 헤치고 동아시아에서 그때 처음으로 민중 자생의 민주주의체제, 이른바 ‘87년체제’가

등장했다. “한국에 왕래하면서부터 사회를 보는 눈이 넓어지고 나 자신이 일본비판과 자이니치를 강조할 때 이항대립적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안 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 한국을 공부하기 시작한 겁니다.”

 일본에서 군국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사관’이 등장하고 ‘새 역사교과서 만들기 모임’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이는 한국에서의 87년체제 등장 및 1990년대 초의 냉전붕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과정을 통해 권위주의 정권들의 한일유착 속에 은폐됐던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치부들이 드러나고 일본 전후체제의 정당성 자체가 도마 위에 올랐다. ‘자학사관’배척을 외치는 극우세력들의 반동은 반세기 이상 그들을 살찌웠던 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한데 따른 극도의 초조감을 반영하고 있다. 일본의 그들과 공명하는 한국에서의 뉴라이트 등장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부분이 있다.

 그가 생각하는 한국(조선)의 최대의 사상과제는 분단 극복, 남북통일국가 수립이다. 그게 탈식민의 최대과제다. 한반도 통일 곧 탈식민은 일본 전후사의 최대 실패이자 자이니치 고통의 근원인 천황제 극복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변화는 아시아 전체를 바꾸게 될 것이다. 천황제 해체 또는 극복이 일본 자체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분단국가 한국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고, 민주화과정에서 그 가능성은 입증됐다. 아시아 변화의 출발점이 바로 한반도이며, 그 중에서도 남쪽이다. 동아시아 근대 모순의 최대 희생자요 살아 있는 증인인 자이니치들도 그 연쇄변화의 최전선에 서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제가 되는 식민지 지배의 잔재를 극복하는 과제는 지금도 여전히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그 적나라한 모습을 우리는 무수히 목격하고 있다. 애매모호가 아니라 맹렬히 뒷걸음질치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일본 규슈 가고시마현에 박무덕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임진왜란(1592년) 때 끌려간 조선 도공 70명과 그 후손들이 그곳에 마을을 이루고 400년간 살아왔는데, 1882년 무덕이 태어났을 때 부자였던 그의 집안은 ‘도고’라는 일본 성씨를 돈으로 샀다. 무덕은 시게노리가 됐다.

 또 한 사람. 1895년 명성황후(민비) 시해 참극 때 일본인 범행자들을 데리고 사건현장으로 안내한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 사건 직후 그는 처자를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일본여성과 결혼해 1898년에 아들을 낳았다. 그의 이름은 장춘.
 <동아일보> 2009년 11월 6일(인터넷)치 한 칼럼은 이 두 사람의 기구한 인생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도고 시게노리는 나중에 2차대전에 패한 일본의 외무대신(외상)이 돼 연합군과의 패전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일본과 일본 국민을 구했다”고 썼다. 우장춘에 대해서는 광복 뒤 채소 종자 자립적 개발의 길을 열고 한국의 육종기술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썼다. 그런데 그 다음 얘기가 난데없다.

 “납치된 조선 도공의 후예가 ‘일본국과 일본국민’을 구하고, ‘조선 국모 시해범’의 자식이 불모의 한국농업 재건의 기초를 닦은 이 부조리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도고 시게노리가 한국 핏줄을 속이고 일본과 일왕에 부역했다고 침을 뱉을 것인가. 우장춘이 매국노의 아들인데다 조선총독부 돈으로 공부한 친일파라고 돌을 던질 것인가.”그 바로 뒤에 칼럼필자가 정말 하고 싶었던 얘기가 나온다.

“8일 발간되는 친일인명사전에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군 고 박정희 대통령과 우국의 절창 시일야방성대곡을 남긴 위암 장지연 선생이 포함됐다고 한다. 친일문제에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한일관계의 격랑 속에 얽힌 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의 삶이 웅변한다.”
 그러니까, 이 필자는 박정희, 장지연의 친일행위는 짧게는 그 뒷세대, 길게는 400년쯤 뒤 그들 후손이 어떻게 되는지 기다려본 뒤에나 잘잘못을 가리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인가?

 이 칼럼 편집 하루 전인 11월 5일치 <중앙일보>의 또 한 칼럼은 이런 얘기를 했다. 1950년 당시 부통령이던 인촌 김성수의 딸이 일제 때 중추원 참의·경북지사 등을 지낸 친일파의 아들 이한직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김성수는 친일파 아들이라는 이유로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그 뒤에도 딸 부부를 철저히 외면했다. 이 얘기를 인용(중앙선데이 11월 1일치)하면서, 칼럼 필자는 “친일파의 아들인 사위를 철저히 외면했던 인촌 김성수는 ‘친일파’로 낙인찍히게 된다. 일제 말 친일 강연을 했대서다”라고 썼다. 사위마저 친일파 자식이라고 외면했던 김성수가 단지 조선청년들 전쟁터로 내모는 친일강연 좀 했다고 친일인명사전에 담다니, 도대체 말이 되나? 하는 투로 읽힌다.

 동생 김연수가 나중에 반민특위에 불려가지만, ‘조선총독부를 제집 드나들 듯 했다’는 김성수가 유력자 신분에 동아일보 사주가 아니었다면 과연 무사했을까, 라는 지적들이 있어왔다. 일제 때 호남 만석꾼 대지주로 성장했고(그 수탈의 시절에!) 경성방직 등 대공장을 운영하면서 일제와 유착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행적은 광복 뒤 당연히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름난 친일파 자식인 사위를 그렇게 애써 피한 이유가 인촌이 친일파라면 이를 간 강직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던 친일의혹과 비난을 그가 심하게 의식하며 몸조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단지 친일파가 너무 싫어서 그랬다면, 당시 습속으로 보건대, 굳이 딸을 그런 데로 시집보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장지연이나 김성수의 친일행각을 비판할 수 없는데, 이광수나 최남선을 비판할 수 있을까?

 이 칼럼에도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명단에 포함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군에 배속돼 1944년 7월 만리장성 너머 열하성 반벽산의 보병 제8단에 배치됐다. 주적은 중국 팔로군이었다. 그는 부관으로서 작전명령을 전달하고 부대 깃발을 관리했다. 여러 자료·증언을 종합하면 실제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다.” 그러니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넣는 건 사리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만일 인도가 친일인명사전의 기준으로 친영인명사전을 만든다면 식민지 종주국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딴 간디와 네루도 영락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팔로군이면 중국공산당 부대인데, 국공 합작시기 그들은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며, 조선의 항일무장세력들이 다수 가담했던 조직이다. <항전별곡> <격정시대> <해란강아 말하라> <태항산록> <최후의 분대장> 등을 남긴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이 바로 팔로군 산하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중국의 붉은 별>을 썼던 에드가 스노의 부인 님 웨일즈가 남긴 유명한 <아리랑의 노래> 주인공 김산(장지락) 또한 김학철과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원이었다. 그밖에 많은 조선청년들이 중국공산당 주도하의 항일연합전선인 동북항일연군의 유력멤버로 참여해 일본군과 싸웠다. 일제시기 해외에서 실력저항한 항일세력의 주력은 만주쪽 무장독립운동 그룹들이었다. 박정희가 그곳 위관급 장교로 배치됐다면 주임무는 바로

조선사람들이 다수 가담한 동북항일연군을 비롯한 화북·만주지방 항일무장세력 억제 내지 분쇄였을 것이다.

 시대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들을 친일파라 처벌할 수 있느냐는 사람들에게 윤건차는 그런 시대적 한계 속에서도 만주의 항일빨치산 투쟁과 상하이 임시정부 저항운동 같은 고난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기억한다면 그런 얘긴 쉽게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도조 히데키 전쟁내각의 상공대신과 군수차관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했고 전후 미일 안보동맹체제를 완성한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은 내 작품”이라고 자랑했다. 만주국 총무차장으로 실권을 쥐었던 그는 당시 만주에 주둔했던 도조와 한패였으며, 시이나 에쓰사부로도 바로 그들 밑에 있었다. A급 전범 도조는 다른 6명의 전범들과 함께 처형당했으나 같은 A급 전범 기시는 풀려나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 시이나 등과 미국이 한국전쟁 한복판에서 강력하게 종용했던 한일국교 협상의 주역을 맡았다. 전후 일본 고도성장의 실험장이요 산실이 바로 만주국이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 만주국에 김성수의 경성방직 공장도 가 있었고 박정희는 만주국군 중위로 근무했다. 일제치하에서 지주 및 상공자본으로 성장한 세력을

대표한 김성수의 한민당이 친미파 이승만과 손잡고 반공을 앞세워 중도세력까지 몰아낸 뒤 수립한 분단 한국의 경제성장 뒤에 그때 만주에서 같은 배를 탔던 한국 일본 전범들이 버티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친일인명사전 기준을 적용한다면 간디와 네루도 친영인명사전에 등재됐을 것이라는 얘기는 “발목잡고 물타기나 하려는 게 아니다”고 한 칼럼 필자의 말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일제가 허용한 학교를 다닌 ‘유관순 누나’도 친일인명사전에 실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간디나 네루가 인도의 독립을 막기 위해 변호사 자격을 딴 게 아니라는 건 그들의 그 뒤 행위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여운형은 친일행적이 아니더라도 이미 이 땅에선‘빨갱이’로 난도질당한 사람이다. 친일행적이 있다면 기록하면 될 일이다. 북한 쪽 유력자들이 친일행각을 했다면 그것 역시 기록하면 될 일이다.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을 경우 과거로의 반동적 회귀는 언제든 빠른 속도로 일어날 수 있다며 한국이 과거사 청산을 서둘러야 할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윤건차는 2004년 말 인터뷰 때 경고했다.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에서 그는 일본에 대해서 반성과 사죄를 계속 요구하면서도 그것이 성취될 것이라 섣불리 기대하지 말라며, 더 급한 것은 내부의 일, 곧 한반도 전체를 하나로 생각하면서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완수해서 보란 듯이 잘 사는 방도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계간 <황해문화> 2009년 겨울호에 실린 재일동포 윤건차 가나가와대학 교수의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에 대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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