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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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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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259-동이 9려,한겨레 핏줄 회이(淮夷)족 후예 월족(越族)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그 선조 우(禹)의 후예(苗裔)로 하후제(夏后帝) 소강(小康)의 서자(庶子)이다.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禹)의 제사를 받들어 지켰다 월 구천의 도읍지였던 샤오싱(소흥) 회계산의 대우릉의 대우릉 행사전경과 범려(范黎)가 인물평을 했던 대로 그려진 새 주둥이 구천 모습. 범려는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천거해 후배 대부가 된 문종에게 오나라를 멸한뒤 그의 천한 관상을 말하며 고난은 같이 해도 영화는 같이 못하는 인물로 같이 도망가자고 했다. 문종이 정중히 반대하자 범려(范黎)는 서시를 데리고 산동성(山東省) 정도(陶: 定陶縣)로 가서 대부호가 된다(도주공(陶朱公)) 범려가 제나라 노나라 등 동이족 주 웅거지 산동성으로 도주은거하면서 개명한 치이자피(올빼미치,鴟夷子皮)의 이자와 서시의 본래 이름 이광(夷光)의 이 자가 동이 이(夷) 자임을 안다면(범려의 黎도 동이9려(黎)를 증명함.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스승 진희이(陳希夷, 871~989)도 동일) 상고 대륙사의 주요 등장 인물들의 면면이 모두 동이 한겨레 혈통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고전서·자부 유림(喩林) 27권에는 대우(大禹)가 동이에서 태어났다(大禹生於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태평어람(太平御覽) 780권에는 기(杞)나라는 하(夏)의 후예국인데 동이로 되었다(杞夏餘也 而卽東夷)라는 기록이 나온다. 기나라가 하의 후예라는 것은 공자도 언급한 사실로, 그 내용이 논어에 실려 있는데 이런 기록들은 하우(夏禹)가 동이족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뒷받침해준다(심백강)



동이 9려, 한겨레 핏줄


회이(淮夷)족 후예 월족(越族)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한자가 깨져 보일 경우 첨부파일 참조할 것



오월초(吳越楚)는 유방때에서나 한(漢)족의 민족 정체성이 드러나는 점을 고려하면 결코 지나족이 될 수 없다. 오월초(吳越楚)는 바로 양자강 유역의 회이(淮夷) 족이 건설한 국가다. 그 중에서 월족(越族)은 수많은 동이(東夷) 계열의 민족 중에서도 아주 오래된 민족으로, 부락(部落)이 아주 많은 이유로 백월(百越), 백월(百粵:나라 이름 월)로도 불리었다.

이들은 사천성, 호남성, 운남성, 귀주성,  강소성, 절강성 등 양자강(長江) 중 하류 이남 및 중남반도(中南半島)   광활한 토지에 광범하게 분포하여 수천 년간의 역사 위에 면연(綿延)히 생명력을 지속해 온 민족이다. 이들은 주로 어렵(漁獵), 농경(農耕), 금속야련(金屬冶煉), 수토항행(水土航行)에 주로 종사하여 이름을 드러냈다. 단발문신(斷髮文身)의 습속이 있으며, 오늘날 중화민족 문화 창조하고 만드는데 중요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월족(越族)의 기원문제에 관해, 대륙의 사학계는 이설(異說)이 어지럽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 6가지 주요 학설로 정리될 수 있다.

1. 쓰촨(四川省) 석류촌 출신 동이족(東夷族) 우(禹)의 후예라는 학설이 있는데 이는 대륙학계의 전통적 관점으로, 지금까지 그 영향력이 아주 컸다.

이 관점은 2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월족(越族)의 기원이 중원(中原) 소강(少康)의 대(代)에 기원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기(世紀) 월왕구천세가(越王勾踐世家)>에 설명하기를,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그 선조 우(禹)의 후예(苗裔)로 하후제(夏后帝) 소강(小康)의 서자(庶子)이다.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禹)의 제사를 받들어 지켰다.”

장수절(張守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 하순(賀循)의 <회계지(會稽志)>를 인용해 말하기를, “소강(少康)은 그 어린 아들을 우월(于越:吳와 越을 于越이라 칭한다) 이라 칭하니, 월국(越國)의 칭호는 이에서 비롯한다.” 물론 오(吳)나라가 월나라와 같이 동이족의 한 갈래임은 이 기록만 참고해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가 황학루에 올라 양자강을 바라본 정경.동정호가 있는 호북성 악양(岳陽)시 위에 양자강을 끼고 있는 거대 메트로 폴리탄 도시 무한이라는 도시가 있다. 양자강가의 한구, 한양, 무창 3개 도시를 합병해 만든 이 도시에 가면 두보, 이태백을 비롯해 수많은 시인 묵객이 노래 불렀다는 유명한 황학루(黃鶴樓)가 한구역 양자강 너머 무한의 강변 풍광좋은 곳에 있다. 필자는 오나라가 동이족 국가임을 알고 오나라의 중심지를 한번 밟아보고 싶은 마음에. 황학루에 올라 이 곳이 옛 오나라 중심도시로 있었음을 느끼며 양자강을 바라보며 다음의 시를 새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정강산심욕분(志頂江山心欲奮), 흉라우주기잠탄(胸羅宇宙氣潛呑) 강산에 우뚝서서 마음껏 떨치며, 우주를 가슴에 안고 정기를 삼키는데 뜻을 둔다- 사료들을 회수한 뒤 호남성으로 떠나면서도 호북과 호남성은 왠지 한민족 상고 대륙사에 있어 묘한 감정에 휩싸이는 기분을 내내 버리지 못했다. -아자횡도향천소(我自橫刀向天笑), 거류간담양곤륜(去留肝膽兩崑崙)-내 스스로 칼을 빼들고 하늘을 향해 웃으며, 간과 쓸개를 곤륜에 남기리-  양자강을 바라보며 한민족 신교(神敎)의 기원을 찾아 한민족대륙사의 본질을 통해 한민족 후천개벽의 웅비의 대도 증산도를 한민족에게 풀어주려는 마음은 늘 안에서 옹이처럼 박혀 그 마음이 양자강가의 이곳 무한 황학루에서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둘째, 월족(越族:짱꼴라 발음으로는 "위에쮸")은 하(夏)왕조가 상(商)왕조에게 멸망해 없어진 뒤에, 하(夏)의 말왕(末王) 걸(桀)과 일부 유민(遺民)은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 한 지맥을 이루었다는 주장이다. <상서(尙書)>, <사기(史記)>에 기재된 내용을 살피면, 상나라 탕(湯)왕과 하(夏)나라 걸(桀)왕이 명조(鳴條)에서 전쟁을 치루어 걸(桀)이 패하고 탕(湯)이 걸(桀)을 남소(南巢)로 내쫓았다고 나온다.

명조는 일찍이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에 '순은 동이의 사람이다(舜是東夷之人)' "순(舜)은 제풍(諸風)사람이니 동이인(東夷人)"이라 하였고 또 맹자집주(孟子集註)8권에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 산동성 곡부아래의 연주 부하로 가서 살다가 명조에서 죽으니 동이족 사람이다(舜生於諸風 遷於負夏卒於鳴條 東夷之人也 )라고 했던 바로 그 곳이다.

                
                    
                
            

                        









                    



그럼 탕(湯)이 걸(桀)을 내쫓은 남소(南巢)는 어디냐 하면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중부의 소현(巢縣)인데 춘추전국시대에는 오(吳), 초(楚) 사이에 있었다. 후에 이들 하(夏)나라 귀족들 및 일부 이인(夷人)은 안휘(安徽) 남쪽을 거쳐 강남에 도착해 월인(越人)이 되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월족의 생활습속과 언어, 문화 모두가 중원의 화샤(華夏)민족과 다르며 고고학 자료를 보아도 가히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인정한다. 이 말을 인정한다면, 월족(越族)이 하족(夏族)의 후예라는 것은 불가하고, 사적(史籍)에서 말하는 바 월왕(越王) 구천(勾踐)이 하우(夏禹)의 후예라는 말은 월인(越人)이 옛 말을 인용한데 불과하다.



2.초(楚), 월(越)의 근원이 같다는 설(說)이다.(이 부분은 반도사관에 매몰된 한국인이 혈통적으로 대륙의 춘추전국시절 진,초,연,제,한,위,조가 동일 혈통이었음을 알게 하는 부분이라 다시 자세히 설명할 예정이다. 심지어 여사면은 옛 조선의 처음 땅이 지금의 조선 반도만이 아니라 연의 동북부땅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같은 친연관계의 혈통인 맥족과 함께 했다한다)

옛 사료들 가운데는,  초(楚), 월(越)의 공동 연원(淵源)이 미(羋:양 울 미) 성(姓)의 일개 종족에 기원하고 있다 하는데 이는 일개 씨족 가운데 혈연관계가 비교적 가까운 친족이었다고 한다. <國語 吳語> 가운데 위소(韋昭)가 주(注)해 말하기를 “구천(勾踐)은 축융(祝融)의 후예, 윤상(允常)의 아들로 미(羋)씨 성(姓)이다“ <國語 화(화)씨 성(姓)鄭語>에도 말하기를, ”축융(祝融)의 흥자(興者)가 미(羋:양 울 미) 씨 성(姓)에 있음이로다, 미(羋:양 울 미) 씨 성(姓)에 기월(夔越)이니 명(命)이 부족하니, 민미(閩羋:민은 복건성, 오대10국의 하나)는 만(蠻)이다“

<묵자(墨子 비공(非攻)>에도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월왕(越王) 예휴(繄虧)는 유거(有遽)로부터 나왔다.“ <묵자(墨子 간고(間詁:주석의 해석)>에 이르기를, ”유거(有遽)는 곧 초군(楚君) 웅거(熊渠)이다“ 전국시대 사관(史官)이 편찬한 <세본(世本)>은 직언하기를 ”월(越)은 미(羋:양 울 미) 성(姓)이니, 초(楚)와 더불어 한 조상(越爲羋姓 與楚同祖)“이라고 했다. 그러나 몇 몇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부인하여, 월(越)과 초(楚)의 역사적 관점으로 보아, 양자의 경위(經緯)가 분명하고 언어가 각기 다르며 습속도 크게 다르므로, 이 둘은 각기 다른 민족에 속한다고 여긴다.  

3.외부로부터 왔다는 학설이다. 이 학설 또한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태평양 인종이라는 학설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남태평양 인종이 두 갈래의 길로 중국에 진입한 것으로 본다.

하나는 운남(云南)을 거쳐 사천(四川)으로 들어온 루트과 다른 하나의 경로는 지금의 통킹만(東京灣) 해안인 안남(安南) 연안으로부터 중국의 광동(廣東), 광서(廣西), 복건(福建) 등 동남 연해 일대로 진입해 들어왔다는 루트다. 이 학설은 베트남 역사의 뿌리를 보면 정반대인 사실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베트남 최초의 국가는 반 랑이며, 건국의 아버지는 훙 브엉이다. 또한 베트남 사람들은 훙 브엉의 부모인 락 롱 꿘과 어우 꺼를 그들의 시조로 여긴다. 그런데 훙 브엉의 아버지 락 롱 꿘은 동이족 신농씨의 3대손인 데 민의 손자이다. -신농씨를 조상으로 둔 우리 한민족과 같이 동이족의 후손이란 얘기다. 신농씨가 어디에서 출자하느냐 하면, 염제신농은 강씨 성으로 그 어머니 임사가 화양에서 노닐다가(지금의 섬서성 바오지 市-寶鷄 市) 신룡에 감응해 발이생제하고(신농임금을 낳고) 인신우수(몸은 사람 머리는 소)로 화(불)의 덕으로 천하에 왕노릇했다. 처음 호북 수현에서 도읍하여 후에 산동성 곡부(공자고향)로 천도해 120년 재위에 있었으며 뢰사(쟁기뢰 보습사)를 발명하고 백성에게 농경을 가르쳤으며, 취화교시하고(재물을 거두어 저자를 열고) 백초를 맛보아 의약을 제조하시니(한의학 시조) 호남성 차릉(다릉:뇌현)에서 붕어해 장사지내졌다. 그렇다면 신농씨의 후예인 안남인 베트남 사람은 대륙에서 이주해 간 사람이지 결코 베트남에서 대륙으로 간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말레이시아 인종이라는 학설이다.

이 학설은 월족(越族)을 곧 소위 말하는 말레이시아인으로 보고, 춘추전국 시대 이전에 이미 산동(山東)반도 및 강소(江蘇), 절강(浙江), 민(閩:복건성), 광서성 흥안현(興安縣)에서 호남성 동정호에 이르는 상강(湘江)유역의 광대한 광상(廣湘)지역, 공(贛:江西省) 등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본다.

이외에도 안남인(安南人)설, 아안인(阿安人)설, 탄족(撣族:漢代 대륙 서남쪽에 세운나라)설 등이 있다. 근래에 고고학 연구자의 발굴로 말미암아 월족(越族) 문화는 앙샤요(仰韶) 문화에 비상히 접근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학자들은 월족(越族)의 근본이 외부 대륙에서 오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월족(越族)의 문화가 동이족 문화인 앙샤오(仰韶)  문화에 기반하고 있음은 상고시절에 대륙전체를 말아먹은 동이 제족이 이룩한 당연한 고고학적 결과다.

4.묘족(苗族)의 후예라는 학설로 우리 동이 한겨레가 반도사관을 벗어나 대륙사관을 접근할 때 깊이 천착해서 연구해야 할 학설이다.

학자들은 지하에서 발굴된 도자기 문양의 분포지점을 연구 고찰한 관점에서, 월족(越族)이 삼묘족(三苗族)과 더불어 활동한 구역이 대체로 일치하는데다,  삼묘족의 언어습속이 월족(越族)과 대체로 서로 같기 때문에, 이를 추측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즉,  월족(越族)은 화샤(華夏) 왕조가 쇠락한 이후, 남방 삼묘(三苗) 집단 중 특별히 흥성한 한 지파이다. 예기(禮記)에 동이 구려는 묘민의 선조라 했으니(九黎爲苗民先祖) 모두 동이계열 후손이다. 몇 몇 학자들은 심지어 삼묘(三苗)와 월족(越族)을 합칭해 “묘월(苗越)”이라고 부른다.

또한 학자들은 현재 자료들을 참고해 고대 월족(越族)이 삼묘(三苗)중의 한 지파와 닮았으며, 많지 않은 것이 흡사 비견된다. 먼저 삼묘(三苗)와 고대 월족이 활동한 구역과 완전히 서로 일치하지 않으며, 삼묘(三苗)의 이름은 고대 화샤(華夏) 족이 남방 아주 많은 씨족 부락에 대해 두루 부르던 칭호다. 삼묘(三苗) 문화와 월족(越族) 문화는 원류상(源流上)  일치성이 결핍되어 있고, 시간상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둘이 하나로 통일되기는 힘들다.

5.토착설이다. 이는 현재 대륙에서 유행하는 학설이다.

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월족(越族)을 본 주거지에서 중원에 미처 동화되지 않은 토착민족으로 여기고, 월족(越族)은 원래 대륙 동남 연해에서 나왔다고 본다. 고고학자들이 고증한 바에 의거하면, 남방인은 북방인에 비해 앙샤오(仰韶) 문화인의 체질에 근접하고, 앞서 설명한 것으로 말미암아 학자들이 추단하기를, 대개 원시시기에 있어, 화남(華南), 화북(華北)은 모두 대륙민의 선조들이 거주하다가 뒤에 가서 화북(華北)에서 거주하는 선민(先民)들이 북방에서 온 선민(先民)들과 더불어 부단히 융합 혹 동화되어, 체질 특징이 변화되었으니, 남방 거주민은 즉 원래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대륙 동남의 소위  “도이(島夷)”, “조이(鳥夷)”, “구이(九夷)” 등 토착부족을 형성했다. 월족(越族)은 곧 이들 부족이 남향한 소수 화샤(華夏)족 사람과 융합하고 물리치면서 만들어진 종족이다.

6.혼합설이다.

토착설에 대해 일부 의견이 한결같지 않은 학자들이 혼합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사적의 기록을 통해 월족(越族)은 일반적으로 하인(夏人), 초인(楚人)과 더불어 전쟁,  병탄하면서 인원이 넘나들었다고 본다. 이로 인해 월족(越族)은 순수하지 않은 토착민족일 뿐 아니라 하인(夏人), 초인(楚人)과 당지(當地)의 토착인과 융합하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 학설을 부정하는 사람은, 일 개 민족 공동체의 형성이 아무것도 없는 진공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언제나 기타 민족의 영향을 받아야 하고 기타 민족에 융합되면서도 또한 동시에 기타 민족이 유입해 와야 하며 기타 민족에게 영향을 주어야 할지니 민족을 소유하려면 모두 거의 이 같아야 한다.





월나라 도읍지였던 샤오싱(소흥)의 서시전

월족(越族)을 설명하자면, 월족은 토착민족으로 그 주요한 문화특징으로써 자기만의 독특한 풍격(風格)이 있음으로 인해, 유구한 역사 연원(淵源)을 갖추고 있다.  비록 월족(越族)이 하(夏) 민족과 초(楚)민족 속으로 빨려 들어가 융화되었을지라도, 월족(越族)의 언어, 습속, 문화 제 방면을 고찰하면 우리들은 가히 이들 방면 모두 그 독특한 풍격(風格)이 살아 숨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이들 특징이 기타 민족에도 있지만 동시에 월족(越族) 대다수의 특징이기도 하며, 그렇지 않은 것은 월족(越族) 이외의 기타 민족 가운데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는 월족이 주위 동이 제 족과 끊임없이 융화되고 끝내 진한 시대이후 지나족과 혼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체성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광동, 광서 좡족 자치주, 해남, 베트남 쪽으로 밀려 내려온 객가(客家)의 중심이, 황하 지역의 옛 하, 은, 주(하은주는 삼묘, 월, 맥, 등 환단(桓檀)의 동이 제족) 세력의 중심이었던 월족이었음을 보면 가히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이로 보면 월족(越族)은 마땅히 토착민족이다. 이상 6종의 한결같지 않은 주장은 서로가 서로를 납득시키기 어려우니, 이들 연구자가 주장하는 학설은 친애하는 독자가 판단해 완성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그 근본이 동이 제족의 하나였던 초(楚)족이 어느 곳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 발상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앞서 서경을 비롯한 4서 육경이 본래 동이 제족의 영적 문서였던 것을 공자가 왜곡하고 그나마 공자가 왜곡한 것을 동이족 핏줄혈손인 진시황이 분서갱유로 없어진 것을 공자의 공묘(孔廟) 고택 담장에서 발굴된 것이 다시 인멸되고 후일 복생이란 학자가 구술해 고문상서, 금문상서가 되었으며 그나마 복생의 금문상서도 인멸되어 없어지고 후대에 다시 쓰여져 그 진위조차 알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진신서즉불여무서(盡信書則不如無書)라 즉, 서전(書典)은 오류가 많아 모두를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쓴 말인데 이 말은 맹자가 비록 서전에 대해 믿을 것이 없다는 말에 대해 사용한 말이었지만 역사가 흐르면서 사실상 유가사상의 근본이라 할 사서 육경이 모두 왜곡된 것임에야 사실상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모든 사료라는 것이 사실상 참조는 될지언정 크게 신뢰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의 전거로 쓰여져 온 말이다.(그런면에서 민족사관적 측면에서 동이 한겨레의 사관으로 집대성한 국내의 방촌 임균택의 <현경> 9부작을 참조하기 바람) 하지만 동이족을 삭감시키려 노력했던 상내약외(詳內略外)의 지나사관에 살아남은 다음 기록은 초(楚)의 근원에 대해 더욱 의미심장한 의미를 갖는다.  

<시경(詩經)  상송(商訟) 은무(殷武)>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달피은무(撻彼殷武) 분발형초(奮發荊楚)-은무를 매질(楚撻)하고 형초(荊楚)를 분발시키다” 이로 보면 초국(楚國)이 이미 상대(商代)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고형(高亨)의 <시경금주(詩經今注)>를 보면, “남향(南鄕) 우남방(犹南方)”이라 하여  남방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史記) 초세가(楚世家)>에 기재하기를, “(문왕(文王) 11년, 제환공(齊桓公)이 패(覇)가 되었으며, 초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齊桓公始覇, 楚亦始大)” 문왕(文王)이 기두(起頭)하면서부터 기원전 223년 초국(楚國)이 진시황에 의해 6국이 병탄될 적에 함께 멸해 없어지기까지, 초국(楚國)의 강역은 크게 확장되어 가장 크게 번성했을 때 호북성 전체와 섬서성, 사천성, 하남성, 호남성, 안휘성, 강소성, 절강성, 산동성의 광대한 지구를 점하고 있었다.

초국(楚國)은 오랫동안 장강(長江:양자강) 유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까닭에, 사료 가운데는 도리어 초족(楚族)의 발상이 이 곳 한 지역이라는 기록조차 없으니,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들 초족(楚族)의 발상지 전개에 대해 열렬한 논쟁을 벌여왔으니 두 종류로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대륙 학자들의 논쟁의 기저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항상 도사려 있음을 알고 읽어야 한다.

즉, 지나 한(漢) 족은 진한(秦漢) 시기에 이루어졌고 그나마 진시황도 동이족 신농씨의 후예인 산동성 여(呂) 땅에 봉해진 강태공 여상(呂尙)의 후예 삼진(三晋) 산서성 조나라 한단(邯鄲)의 대상인 동이족 여불위의 친아들이었다는 점에서 동이족 국가였으며 진(秦) 황실의 뿌리(앞서 설명) 역시 동이족 출신이었다. 또한 하은주 3대가 동이 제족이 이룩한 것임은 현재 지나 대륙 고고학사가 그대로 인정하는 바이고, 공자가 화하(華夏)사관의 벼리로 삼은 황제헌원이 동이족임은 현재 지나의 고고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이거니와 요, 순 역시 동이족의 혈손임은 요묘(堯廟), 순묘(舜廟)의 기록도 고증하는 바이니 사실상 진한 시대 이전의 모든 상고 대륙사의 주인공은 바로 동이 한겨레가 백월, 형초, 오, 맥이, 맥, 9리, 9려, 삼묘, 융이, 인방, 귀방, 강방, 훈죽, 등 아주 다양한 종족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방촌 임균택이 지나민족의 55개 소수민족 거론은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는 것이 백번 지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55개 소수민족의 뿌리를 캐어들어가면 한겨레 동이족이기 때문에 그렇다. 가령 티벳 장족(藏族)이라 하면 민족사학자들도 상고시절 환단 동이족의 한갈래겠거니 하면서도 그 구분의 실마리를 잡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대륙의 사서를 열람하며 자세히 조사를 하니 장족(藏族)의 신화 전설 속에 여와(女媧)의 “여와낭낭(女媧娘娘)” 우주기원설화가 들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로써 티벳 장족의 뿌리가 동이족 복희, 여와 남매의 후예임을 확언할 수 있었다.

1.하나의 관점은 초국(楚國)이 황하유역 중원지구에서 발상했다는 주장이다. 마세지(馬世之)는 <초족의 뿌리 및 그 발상지(關于楚族的族源及其發祥地)>(강한논단(江漢論壇) 1983년 제 11집) 가운데 설명하기를, “중원(中原)은 초(楚)의 조기(早期)의 웅거지(雄據地)이다” 그는 이에 대해 5가지 이유를 들어 논증하고 있다.

첫째, 전욱(顓頊) 부락은 황제(黃帝)족 가운데로부터 나온 것으로, 전욱(顓頊)의 출생지는 하남(河南) 경내(境內)에 있다. <여씨춘추(呂氏春秋)․고악편(古樂篇)>에 설명하기를, “전욱(顓頊)은 약수(若水)에서 나서 공상(空桑)에서 자랐으며, 이에 제(帝)에 올랐다.” 약수(若水)는 곧 여수(汝水)다. <수경주(水經注)․여수(汝水)>에 말하기를,

“여수(汝水)는 하남(河南) 양현(梁縣) 면향(勉鄕) 서쪽 천식산(天息山)에서 흘러나오는데, 동남을 지나 현북(縣北)으로 흐른다. 또 동남을 지나 영천(潁川:하남성 登封현을 지나 淮水로 흐르는 강) 협현(郟縣:협, 또는 합, 겹) 남쪽을 지나 회수(淮水)로 들어간다.”

이 곳에서 말하는 양현(梁縣)은 곧 지금의 하남(河南) 임여현(臨汝縣)이며, 협현(郟縣)은 곧 지금의 하남(河南) 협현(郟縣)이다. 공상(空桑)은 하남(河南) 경내에 있는데, 지금의 숭산(崇山) 이수(伊水)의 물가에 또 공상(空桑) 간(澗:물가 간)이 있고, 기현(杞縣) 서쪽 10리에 공상(空桑) 성(城)이 있다. 이로 인해, 약수(若水)는 하남에 있으니 곧 제(帝) 전욱(顓頊) 고양(高陽)이 하남(河南)에서 태어났다.

전욱(顓頊)은 초(楚)의 시조니 굴원(屈原)이 설명하기를, “(초(楚)는) 제(帝) 고양(高陽)의 묘예(苗裔)다”라고 했고, <사기(史記)․초세가(楚世家)>에도 설명하기를, “초(楚)의 선조는 제(帝) 전욱(顓頊) 고양(高陽)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였다.


*참고; 「국어」에 여(黎)가 (제곡)고신(高辛)씨가 되었다고 한다. 오회는 그 형과 함께 처음에 또한 중려(重黎)의 정사를 나누어 장악한 연고로,  전욱의 자손이 사는 숙사국(淑士國)의 율(栗) 광야에는 10명의 신이 있어 이름을 여와지장(女媧之腸)이라 하는데 복희와 결혼해 혼례를 제정하고 생황을 처음 제작했으며 여와보천신화가 의미하는 것처럼 지나족의 창세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여와(女媧)가 죽어 숙사국의 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은 전욱의 후예인 숙사국이 배달민족임을 확인시키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앞 안원전 담론중)  


둘째, 전욱(顓頊)의 자취가 드러난 곳은 하남(河南) 옹구(雍丘)다. <수경주(水經注)․휴수(睢水)에, “휴수(睢水),....동쪽 지름길에 고양(高陽)이 북에 머물고 있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설명하기를, “고양(高陽) 성(城)이 옹구(雍丘)현 서쪽 29 리에 있으며, 전욱 고양씨는 소호(少昊)씨를 보좌힌 공으로 이 읍에 봉해졌다.”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 가운데 주석하기를 옹구(雍丘) 시절 장안(張晏)의 설화를 인용해 설명하기를, “고양이 흥했던 성(高陽者, 所興之城)”이라 했다. 옹구(雍丘)가 전욱(顓頊)이 자취를 드러낸 곳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가히 볼지니, 이는 하남(河南) 기현(杞縣)에 있다.


세 번째, 전욱(顓頊)의 후예 축융(祝融) 부락의 거주지도 하남(河南)의 경내(境內)에 있다. <국어(國語) 주어(周語)>에 설명하기를, “옛날 하(夏)가 흥함에, 융(融)이 숭산(崇山)에 임했다.” 숭산(崇山)은 곧 하남(河南) 숭산(嵩山)이다. <좌전(左傳) 소공(昭公) 17년>에도 설명하기를, “정(鄭)은 축융(祝融)의 터(墟)다” 정(鄭)은 지금의 하남 신정(新鄭)을 가리킨다.

<로사(路史․국명기기(國名紀己)>에도 설명하기를, “지금의 정주(鄭州)에 축융총(祝融冢)이 있다” 신정(新鄭)은 정주(鄭州)로 숭산(嵩山)까지 멀지 않다. 이들 설명을 보면, 축융은 그 때에 하남 중부지구에서 확실히 활동했다고 한다.

네 째, <좌전(左傳) 희공(僖公) 2년> 가운데, “諸侯城楚丘而封衛焉”이란 글귀가 보이고 또 <수경주(水經注) 호자하(瓠子河)>에 경상번(京相璠)을 인용해 설명하기를 “지금의 복현(濮縣) 서남 15리에 저구성(沮丘城)이 있는데, 6국시(國時)에 저(沮), 초(楚)가 동음이라 초구(楚丘)가 되었다” 초구(楚丘)는 지금의 하남현 활현(滑縣)에 있다.

이는 이 곳 지방이 이른 시기의 미(羋:양 울 미)씨 성(姓)이 거주 한 적이 있는 계련후인(季連后人)이 있음을 표명한 것이다.(참고로 치우천왕묘가 있는 산동성 태전현 왼쪽을 보면 하남성 복양(濮陽)이 보이고 그 왼쪽을 보면 활현(滑縣)이 있다. 안양(安陽) 바로 아래다:안원전)

다섯째, 초인(楚人)은 미(羋)씨 성(姓)을 제외하면 “웅(熊)”씨 성(姓)이 있는데, 웅려(熊麗)라는 말과 같이(중국에서는 웅려라는 말이 특수한 영예를 지니는 아름답다는 말로 쓰이는 모양) 특수한 영예를 지니는 성씨로, 초족(楚族)  혹은 “웅(熊)”의 관계와 더불어 극히 밀접한 관계를 표시한다. 또 하남(河南) 중부의 적지 않은 지명이 웅(熊) 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신정(新鄭)의 고칭(古稱)이 “유웅(有熊)”이었고, 또 웅이하(熊耳河), 웅산(熊山)등이 있어, 이들 명칭들과 초인들의 조기(早期) 거주처는 서로 관계가 있다. (웅토템은 유웅족,황웅족, 웅영족에서 보듯이 동이족의 전용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하남성 회양은 동이족 복희씨 신농씨(유망대까지)의 도읍지이기도 했고 치우천황이 즉위한 곳(진류)이며 또한 동이족의 은나라 유적지(은허)가 있는 곳이며 춘추전국시대의  동이족국가 3진이 웅거한 곳이다)

이상 5가지 점을 근거로 해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초족(楚族)이 하남 중부에서 발상하여 뒤에 아래로 남천(南遷)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별도로 남은 한 가지 의견은 초(楚)의 발상이 강회(江淮)의 땅에 있다가, 뒤에 호북(湖北) 일대로 서천(西遷)했다는 것으로 국내 재야 사학계의 주장과도 비교적 일치하는 관점이다. 만화 한단고기의 저자 한재규도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국내 재야사학계의 관점을 인용해 회이(淮夷)족이 오(吳), 월(越), 초(楚) 3국을 건국했다고 그려내고 있다. 필자는 한재규 화백이 만화가가 아니라 거의 상고 역사가 수준이라 생각한다.

비교적 일찍 이 학설을 주장한 이는 곽말약(郭沫若)으로, 그는 <중국고대사회연구> 가운데, <영은(令殷)>, <금은(禽殷)> 등 서주(西周) 동기(銅器) 명문(銘文)의 연구에 대해, “초(楚)는 본래 만이(蠻夷) 곧 회이(淮夷)로 은(殷)의 동맹국이었다(楚本蠻夷, 亦卽淮夷, 爲殷之同盟國“고 인정한다.  그는 뒤에 저술한 <은주청동기명문고석(殷周靑銅器銘文考釋)>, <금문총고(金文叢考)> 등 저서에서 진일보된 관점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회이(淮夷)는 곧 초인(楚人)이며, 또한 곧 <일주서(逸周書) 작락해(作雒解)> 가운데의 ‘웅영족(熊盈族)’, “초(楚)의 조상(先世)은 회수(淮水) 하류(지금의 샹하이 위쪽)에 거주했으며, 엄인(奄人), 서인(徐人) 등과 더불어 함께 동국(東國)에 속했다.(楚人先世居淮水下游, 與奄人徐人等同屬東國) 웅영(熊盈)은 곧 죽웅(鬻熊)에 짝하며, 영죽(盈鬻) 일성(一聲)이 변한 것이다. 웅영족(熊盈族)은 주인(周人)이 압박해 옴에 남(南)으로 내려가기 시작해 강에 이르렀으며, 강을 넘어서지 못하자 다시 서쪽 위로 올라가 악(鄂)에 도착했다.”




임혜상이 분류한 중국 소수민족 분류법. 위의 행간 분류(역사상의 민족)를 보면  백월, 형오, 숙신, 돌궐, 흉노 등 광의의 동이족을 분리해 내어 동이와 따로 등치시키고 이들 모두가 한족의 구성성분이라 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민족 분류법이 바로 근자의 동북공정을 낳고 있는 현재 중국역사 패러다임이다. 동북3성의 조선족을 대한민국,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한겨레 역사의 일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남북한의 한겨례 역사를 중국 한족을 에워싼 56개 복합민족국가 중국의 일부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보듯이 남북한 정부는 단지 정치적으로 대만보다 업그레이드된 정치적 형태로만 인정할 뿐 역사 문화적인 차원에서는 종속된 중화권역사의 하나로 보려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아래 행간(현재의 민족)을 보면 한족과 등치시키고 있는 종족이 동이족이었던 분탄족, 묘요족, 만주족, 몽고족 등의 먼 환단시대의 동이족이다. 현대적 의미로는 손문으로 시작되었고 고대적 의미로는 정치적 차원에서(문화사적으로는 유방이 동이족 국가 초나라 사람이고 초나라의 뿌리는 회이족 월족 국가임) 유방때로 보아줄 수 있는 비교적 짧은 중화족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그들 측면에서 이러한 견강부회의 역사가 이해가 간다고 할 수 있다.




-풍씨 성을 황웅씨(黃熊氏)라 부른 기록이 또한 「제왕세기」에 나온다.(황제헌원의 유웅씨와 단군이 즉위하는 신목과 웅상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황제헌원은 웅(熊) 도등(圖騰:깃발상징 토템)을 숭배하여 유웅(有熊)씨가 되고 그가 거주한 곳을 웅산(熊山)이라 불렀다 하며 높은 수레(高車)를 발명한 것으로 인해 헌원(軒轅)씨가 되었다 하니 황제 헌원의 유웅씨 역시 황웅씨(黃熊氏)의 태호복희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황웅족 곰족의 후예는 양자강 유역의 동이족 묘요(苗猺) 신화와 더불어 그 이동 경로를 짐작할 수 있지만 우리는 뒤의 담론부분에서 이들이 대륙의 다사다난한 동이 제 족간의 쟁패과정과 이합집산과정에 의해 양자강 유역의 회이족(淮夷族)-초민족(楚民族)인 웅영족(熊盈族)으로 변신해 나아갔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는 황제헌원의 유웅(有熊)씨가 그 한갈래였던 것 처럼 동이 제 족은 웅족으로 이미 그 날을 세우고 있었음을 뜻하며 단군신화중의 곰족과 호족의 쟁패신화 역시 환웅 배달국의 웅(雄)과 웅(熊)은 고대에 서로 통했기때문에 정통 웅족(배달환웅족)과 정체불명의 이족(異族)과의 한반도 간방위 유입시기의 쟁패과정을 가히 추정할 수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곰과 호랑이 신화가 배달국 웅족의 정통후예가 대륙으로부터 북만주로부터 백두산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유입되는 쟁패과정이 기록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안원전의 담론중)-

장정명은 무신 치우 후예인 묘족의 강인한 강항정신에 대해 《초문화사(楚文化史)》에서 다음과 같은 전제 위에서 노자, 장자의 현실초극의 정신세계가 나왔다고 말한다.

-초문화는 초나라와 초인으로 인해 명성을 얻은 주대(周代)의 일종의 구역문화이다. 이것은 동쪽으로 이웃한 오월(吳越)문화와 서쪽으로 이웃한 파촉(巴蜀)문화와 함께 일찍이 장강유역에서 성대하게 꽃피운 세 떨기 상고(上古)구역문화이다.” 또 말하길 “초문화의 형성시기부터 화하문화는 남북의 양 줄기로 나누어 졌는데, 북쪽의 줄기는 중원문화로 웅장하고 힘차기가 마치 지주산(砥柱山)에 부딪혀 흐르는 황하와 같고, 남쪽의 줄기는 초문화로 수려하며 특이하기가 마치 삼협(三峽)을 관통하여 나오는 장강과 같다. 이 남북 양 줄기의 화하문화는 상고 중국의 찬란한 문화의 본보기이며, 시대가 대략 비슷한 고대 희랍과 고대 로마의 문화와 먼 곳에서 서로 눈부시게 빛난다.”라고 했다. 장선생은 초문화에 대한 결론은 굉장히 정확하다. 초문화는 화하문화의 남쪽 줄기이며 이것이 비록 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몇몇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초문화와 묘문화는 물과 젖처럼 서로 잘 융합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민족출판사에서 간행된 향토사료 <호북묘족(湖北苗族)>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초인이 원래 묘족 성인 ‘미(羋)’성씨였다는 것은 초인이 원래 ‘삼묘’의 한 줄기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시조인 이련(李連)에서 죽웅(鬻熊)에 이르기까지 초인은 아직 언어변환을 완성하지 못했었다. ‘죽웅’은 여전히 묘족이 자칭하던 칭호로 ‘대웅(代熊)’․‘대이(代夷)’의 합칭이다. 이것은 이미 적어도 5백여 년을 거친 것이다. 주나라 초기 성왕(成王)때에 이르러 초인의 수령인 웅역(熊繹)은 이미 ‘자남(子男)’의 작위를 받았다. ‘웅역’ 수령의 출현은 묘족 성씨인 ‘미(羋)’가 이미 한족 성씨인 ‘웅(熊)’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는 초인의 언어가 변환되기 시작하여 묘어에서 한어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초인이 한족 성씨로 바뀐 것도 그들과 북방 화하족의 교류가 매우 많았음을 의미하고 웅역이 ‘자남’의 작위를 받은 것 자체가 북방 화하인과 교류가 매우 많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


웅(熊)이 한족 성씨라는 지나사관적 견해를 한문(漢文)이 본디 상고시절에 동이족 곧 우리 한겨레의 문자였음을 감안하면 그 내용을 아주 시원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귀가 아닐 수 없다.(이 부분은 별도로 다시 앞뒤를 이어 전체 내용을 소개하려 한다)

호후선(胡厚宣)은 <초민족원우동방고(楚民族源于東方考)> 가운데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초(楚)의 시조는 축융(祝融)이 되며, 금문(金文)을 고찰하면, 축융이 곧 격종(擊終)임을 안다....옛 전적에서 이를 상고(詳考)하면 축융(祝融)이 곧 수인(遂人)이고 곧 여(黎)이다. 격종(擊終), 수인(遂人) 및 여(黎)는 확실히 모두 동방(東方)의 민족이다. <좌전(左傳)>의 초구(楚丘)는 마땅히 초(楚)의 폐허로, 위지(衛地)에 한 군데 있으며(위에 첫 번째 학설 4번을 참고하라),

하나는 조현(曹縣) 동남에 있으며(<춘추(春秋)․은공(隱公)>, ‘융벌초구이귀(戎伐楚丘以歸)’라는 글귀에서 두예(杜預)는 주석해 말하기를, ”초구(楚丘)는 위지(衛地)로 제양성(濟陽城) 무현(武縣) 서남이니(곧 지금의 산동(山東) 조현(曹縣) 서남 40리에 있다), 또한 모두 동방의 땅이다“ 초(楚)는 ‘백부곤오(伯父昆吾)’라 칭하니, 곤오(昆吾)는 위(衛)에 있으니 또한 동방(東方)에 있다.

주(周)가 동이(東夷)의 반란을 정벌함에 그 가운데 초(楚)가 있었으며, 주대(周代)의 동이(東夷)는 , 초(楚)가 그 안에 속해 있었다,.....금문(金文) 가운데 엄(奄)에 있는 초백(楚伯:초의 수령) 정벌했다 하니, 엄(奄)은 지금의 산동성 루(魯)의 곡부(曲阜) 땅에 있었다. 이로 보면 초(楚)는 반드시 동방(東方)의 땅에 있었음을 알겠다. 생각건대 그 후에 주(周) 민족이 동방을 압박하고, 황하유역의 기후가 점점 변하여 동방민족이 마침내 이동을 시작하니 초민족(楚民族)의 세력이 아주 강하여 점점 남방의 강한(江漢) 유역으로 확산되었다.”( 見<사학논총(史學論叢)>)


아주 명확히도, 호후선(胡厚宣)은 초족(楚族)의 발상이 동방에서 시작하여 후일 강한(江漢) 유역으로 확대 발전하여 그 기반을 다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인해 각 파의 학자들은 심히 자신의 논거를 엄밀히 전개해 논술하고 있으므로 거듭 양 학설을 접하는 독자 여러분은 이곳에 제공한 자료를 깊이 탐색하여 초족(楚族)의 미스테리를 파헤쳐 보기 바란다.(초민족의 뿌리는 오,월의 뿌리를 더욱 명확하게 해 주는 부분이므로 이후의 담론에 보다 상세하게 국내 최초로 소개하려 한다. 앞으로의 소개내용에서는 특히 초를 멸한 신생 공룡 진나라를 파고들어가 진의 문화주류와 핵심을 초문화로 바꾸어 버린 것이라든가 진을 멸한 한나라의 개국공신들과 한실의 주류(유방이 초인)들이 초인이었음을 통해 희랍문명을 파괴한 로마가 희랍문화에게 먹힌 문명의 회돌이와 아주 동일한 상황이 지나대륙의 상고대륙사 내면에 드리워진 동이 한겨레의 문명사이었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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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郭沫若은 누구인가 (1892 ~ 1978)

원명:곽개정(郭開貞), 호 상무(尙武), 필명:마이커앙, 디잉탕, 현대 중국의 걸출한시인, 작가, 극작가, 역사학자, 고고학자, 고문자학자이자 사회활동가 였던 곽말약은 1892년 11월 16일, 사천(四川) 성 낙산현(樂山縣)의 한 지주 겸 상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중국의 현대문학 30년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노신,곽말약,모순,파금,노사를 든다.

그때는 중국이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전락되어 가던 시대였다.
1905년 嘉定소학교에 입학하였고, 중학교 시절에는 학교의 전제적 교육제도를 반대한 탓으로 세 번이나 퇴학을 당하였다. 그는 성도고등학당의 분설 중학(成都中學)에서 공부할 때에는 애국 운동에 참가하고 학생대표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1914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후에 문학에 심취하여 쉴러, 하이네, 괴테, 휘트먼, 타고르의 시를 읽는데 몰두하였으며, 특히 타고르와 휘트먼의 시는 그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끼친다.
1918년부터 곽말약은 시를 창작을 시작한다.
1919년 5.4운동이 발발한 후 그는 '하사(夏社)'를 조직하여 초기의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1921년 성방오(成倣吾), 욱달부(郁達夫)등과 함께 '창조사(創造社)'를 조직하고 이듬해 5월 1일에 문학잡지 <창조>를 출판한다.
1923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창조주부(創造周報)>, <洪水>의 편집일을 맡으며, 시집 <별나라(星空)> 등을 내 놓았다.

1924년 '창조사'에서 간행하던 <창조주보>가 폐간되고 주요 동인들이었던 욱달부, 성방오 등도 흩어지자 창조사는 거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그는 생활고에 허덕였고, 사상적으로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자 그해 4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거기서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가와가미 가게루'의 저작 <사회조직과 사회혁명(社會組織與社會革命)>을 번역하였고, 이것으로 곽말약에게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어 그는 이때부터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로써 사회와 문예의 문제를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 하였다. 1926년 광주(廣州) 광동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에서 문학원 원장을 맡았으며, 7월에 북벌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국민혁명군 총정치 부주임을 맡아 북벌군에 참가하였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이 반혁명정변으로 무수한 혁명가와 대중을 학살하였는데, 이에 몹시 분개한 곽말약은 '다시 보아라! 오늘의 장개석을(請看今日之蔣介石)' 을 무한 <중앙일보>에 발표하였고, 이것으로 당시에 인민들에게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한 후 그는 주은래, 주덕(朱德), 하룡(賀龍) 등이 영도한 '8.1' 남창 봉기에 참가하였으며 혁명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이때 주은래의 소개로 그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다. 1927년 제 1차 국내 혁명전쟁의 실패로 국민당 반동당국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는 이때부터 10년간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10년간 그는 중국의 고문자학과 고대사회사를 연구하여 중국 노예사회의 존재를 논증하였고 기타 학술 연구 분야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좌익 작가 연맹 도쿄지부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이때에 <나의 유년>, <창조 10년> 등을 썼다.항일전쟁이 발발하자 괄말약은 귀국하여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 제 3 청 청장직에 있으면서 항전(抗戰)문화 사업을 지도하였으며, 국민당 반동파의 감시를 받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투쟁을 고수하며, 신문과 잡지를 출판하는 사업을 지도하고 문예창작에 적극 종사한다.

이 시기에 <전투의 노래(戰聲集)>, <매미집>등을 내 놓았고 사극 <굴원(屈原)>, <호부(虎符)>, <축(築)>, <공작담(孔雀膽)>, <남관초(南冠草)>등을 창작하였고, 또한 문예 정치 논문집인 <우서집(羽書集)>, <금석집(今昔集)>, <포검집(蒲劍集)>, <비갱집(沸羹集)>, <천지현황(天地玄黃)> 등을 출판하였다. 항일전쟁에서 승리 한후 그는 전국문학협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줄곧 국민당 지배지역에서 장개석의 독재를 반대하여 투쟁하다가 1948년 동북 해방구(공산당 지배지역)으로 돌아왔다.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전국 정치협상회 부주석, 중국 문학 협회 주석, 중국 과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에도 그는 계속하여 저술에 종사하였고, 많은 시문과 역사, 고고저작 등을 발표하였다. 중국 현대 문예전선에서 줄곧 혁명을 견지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둔 문인으로, 시종일관 분투하는 과정에서 혁명적 지식인의 숭고한 애국주의 정신과 꿋꿋하고 고결한 품성을 보여주었던 곽말약은 1978년 6월,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역사극과 소설

곽말약은 5.4 시기를 전후하여 사극 '탁문군(卓文君)', 왕소군(王昭君)', '섭앵' 등을 창작하였다. 1925년에 이 세 극본을 묶은 희곡집 <세 반역 여성(三個叛逆的女性)>을 출판하였다.
곽말약 사극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곧 옛것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사극 창작에서 역사적 현실을 재현시키면서도 결코 그 역사적 사실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의 극본을 보면, 곽말약은 역사 사실에 대한 기존 명제에 구애되지 않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대담하게 구상하고 역사적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함으로써 풍만하고 생동한 예술 형상을 부각시켰다.

'탁문군'과 '왕소군' 은 다 1923년에 창작된 것으로 탁문군과 왕소군은 봉건 예교와 억압에 반항하고 인격을 소중히 여기며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멸시하는 그런 억센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이런 봉건예교에 항거한 반역 여성을 묘사한 것은 바로 5.4 기의 반제, 반봉건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서였다.사극 '섭앵' 은 5.30 사태 후에 쓴 것으로 전국 시대의 자객이던 섭정이 엄수를 도와 한나라의 매국노 협루를 죽인 역사사실을 제재로 하였다. 그후 항일 전쟁기에 곽말약은 이 '섭앵'을 장막극 '아가위꽃'으로 개작하였다. 이 극본에서는 섭앵과 섭정의 영웅기질을 구가하였다.

곽말약은 또한 적지않은 소설을 발표하였다. 1919년 '금강산애화(牧羊哀話)'를 발표하였는데, 이 소설에서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 한 조선여성이 당한 비극적 사실을 통하여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조선 인민의 형상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이를 통하여 곽말약 자신의 애국주의 사상을 강렬하게 표출하였다. 소설희곡집 <탑(塔)>에 수록된 7편의 작품은 그가 1923년과 1924년 두해 사이에 창작한 것이다. 이 작품들은 거의가 옛 일을 썼거나 타향 생활의 정취를 반영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는 '합곡관' , '소매치기' 와 같은 현실적이며 또한 적극적 의미가 있는 생활을 반영한 작품이 들어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풍자와 과장적 수법으로써 인물 형상을 보다 깊이 있게 부각시키고 있다.

소설산문집 <감람나무>중의 '방랑 3부작' 과 '어려운 행로' 등은 그가 지난날의 생활을 묘사한 자서전적 소설이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자신을 주요한 인물로 내세워 자기의 과거를 깊이 있게 해부하고 있으며 동시에 불합리한 구사회제도를 폭로, 규탄하였다. '방랑 3부작 (漂流三部曲)' 은 '기로', '연옥(煉獄)', '십자가(十字架)' 이 세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었으며 이 세 작품은 그 내용상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단편소설 '기로' 중의 애모(愛牟)는 실상 곽말약 자신의 화신이다. 애모는 일본에서 유학하는 기간에 의학을 전공하면서도 늘 문학을 즐기고 시창작에 마음이 쏠려 그에 골똘하였다. 그는 후에 상해에 돌아와 동이들과 함께 문학잡지를 내어 사회에 기여하려 핬다. 그러나 모진 생활난에 부닥쳐 호구하기 바빠져 그는 하는 수 없이 자기의 사랑하는 처를 일본에 떠나보내고 원통하고 침울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내며 이 생이별의 고통 속에서 살아나갔다. '연옥'과 '십자가'는 계속하여 그 후의 생활을 묘사하였다. 이와같이 이 3부작에서는 곽말약의 생활과 사상정서의 변화를 주저없이 마구 털어 놓고 묘사하였다. 여기서 당시 소자산계급 지식인이었던 그가 어떻게 평탄치 않은 길을 걸었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사회를 인식하고 반항과 사회개혁의 길로 나아갔는가를 역력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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