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원전의 21세기담론-세상을 본다 미래를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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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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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론46.저금리시대의 지혜와 후꾸자와의 문명개화 금풍사명


아무튼 일본의 엔화는 일본 국내에서 쓰면 그 효력이 별로 없지만 일단 해외로만 나가면 이와 같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별로 부자도 아닌 일본인은 일본 경제력과 국력의 상징인 엔화의 파우어를 등에 업고 너도 나도 돈을 모아 해외로 해외로 관광을 나가는 것이다.

알다시피 일본은 하나의 돈 많은 부자회사이며 일본인은 단지 돈 많은 회사의 가난한 샐러리맨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가난한 샐러리맨들이 세계로만 나가면 최고의 구매력을 가진 인터내이셔널 잰틀맨으로 대접을 받으니 가지나 외제품 좀 사달라고 정부에서 상품권까지 주어가며 소비가 미덕이라고 외치는 바에야 기왕 쓰는 돈 누군들 해외로 나가서 안 쓰랴.

알다시피 미국이 소비 향락적 현세주의로 부의 세습개념이 희박해 저축을 안 하는 나라라면 이와 반대로 일본은 동양가치관에 의해 부를 세습하기 때문에 '작은 것' 지향주의의 전통적 검약습성과 함께 저축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나라이다.

그래서 세계의 어디를 가도 일본인이 없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 그만큼 그들은 언제든지 자주 해외에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물건은 현지에서 얼마든지 충분히 구입해 쓸 수 있기 때문에 한국의 불쌍한 대학생들처럼 온갖 생활필수품을 챙겨 배낭에 메고 땀 뻘뻘 흘릴 필요를 전혀 못 느끼는 것이다. 엔화의 위력을 말하는 것으로 10여 년 전에 들은 말이 하나 기억이 난다.

지금과 환율차이와 시세차이야 좀 나겠지만 고급양복 한 벌을 오오사카, 동경의 고급 백화점에서 사면 6-7십만엔(5,6백 만원) 하는데 그걸 일본에서 사 입느니 한국 명동 고급양복점에서 돈 백에 해 입고 강남 고급 룸 싸롱에서 한 2백 뿌리고 비행기타고 귀국해도 10만 엔이 남는다고.

사실 일본의 기생여행은 그들이 돈 많은 부자여서가 아니라 이 같은 엔화의 막강한 힘에 의해서였다. 이는 마치 한국의 사업가들이 돈 가치가 한참 떨어지는 동구권이나 중국에 들어가서 헤프게 쓰고 다니는 거와 같다.

여기서 잠시 <통곡하는 민족혼> 사이트에 "저금리 시대를 사는 지혜"라는 제하로 개재된 운영자의 글을 인용해 저금리 시대에 살면서 고금리 시대의 모순과 한계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조선일보 3 월 31 일자 <저금리시대>
50 대의 퇴직자들이 평생을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한 후에 그 퇴직금으로 은행 저축예금 이자로 생활하는 어려움을 보도하고 있다. 개인적인 의문은 조선일보의 기획 보도 시리즈인 이 <저금리시대>의 보도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예금이자가 고금리로부터 저금리로 가면서 저축예금자들의 어려움이 가중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 경쟁력을 고려한다면 필수불가결인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동안 고속성장을 해오면서 자금확보를 위해 고금리 정책을 써왔던 것은 외자가 아닌 내자 확보를 위한 어쩔 수 없었던 고육책이라 해도 예금이자가 높음으로서 자연적으로 대출이자도 높아지므로 은행 자금의 흐름으로 볼 때 그 자금을 쓰는 기업체에 그만큼 부담을 주고 대외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은 굳이 여기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년간 20 % 에 육박하는 은행이자를 감당할 수 있는 정상적인 기업은 아무 곳에도 없었을 것이다. 기업들이 정상적인 기업운영을 해서는 기업운영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내자조달을 목표로 한 고육책인 고금리 정책은 처음서부터 그 차체의 모순을 안고 있었던 실패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편법에 의한 기업운영을 하게 되고 정부는 그것을 눈감아주면서 기업과 정부는 상부상조하는 정경유착의 원인을 우리는 처음서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어떤 기업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년간 20% 이상의 기업이윤을 내기란 현실적으로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업이 부동산업을 겸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기업이 사실은 부동산업이 주 종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그 동안의 현실이었다.

대기업의 회장비서실에는 일류대학의 엘리트중의 엘리트를 배치하며 그 중에도 정부고위 인사와 친인척 관계자는 특별대우를 하게 되며 그러한 우수한 인재들이 일종의 기업 정보요원으로 활동을 해서 정부의 중요 사업계획을 미리 입수하고 그 정보를 분석해서 제일 노란자위 땅을 어떤 명목으로든지 회사가 구입하는 것이다.

고속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단위 공단조성, 고속도로 계획, 도시계획 도로확장, 상업지역 선정 등등 필수적인 지가변동상황은 기업의 사활을 좌우하는 요인이라고 그들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생산업체로서 해외 경제 동향, 고객의 취향, 원자재 확보 등 기업 본연의 해외동향은 뒷전이고 대내적인 정부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기업을 정상적으로 운영해서 발생하는 기업이익은 사실 그들 기업주 입장에서 볼 때에는 방패막이는 될지언정 아무실속이 없는 것이었다.

오직 땅, 땅, 땅 만이 그들을 살려주는 금 덩어리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20 년을 그 회사를 운영했을 때 본사 건물 부지, 공장 부지, 연수원, 사원 복지시설 부지 등 모든 땅값이 20 배를 넘게 되었던 것이다.

30년이면 30 배, 40년이면 40 배, 이런 식이었던 것이다. 과연 그들이 고리의 은행이자 돈을 빌려서 그만한 생산성을 올릴수 있는 국내외의 여건이 되었는가? 그리고 그들이 자기의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 생산성을 올렸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간단한 이치이지만 우리 나라와 일본을 비교해 보면 국가간의 생산성 비교가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30 여 년 전에 일본과 우리 나라의 미국 달라대 비율이 360엔대 480원이었다. 이것이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120엔대 1400원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일본은 열심히 생산성을 높여서 좋은 물건을 1/3의 가격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한편으로 우리는 3배 이상의 값을 받지 않으면 만들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과 우리가 1 : 1.5 였던 것이 지금은 1 : 10 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미국에다 팔 때에 1 불 짜리 물건이 있다면 일본은 360엔에 만들었던 것을 생산성을 높여서 120엔에 만들게 되었는데 우리는 480원에 만들었던 것을 이제는 1400원이 아니면 만들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30 년 전에 생산성을 1:1 로 본다면 지금은 1:6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30년 전에 비해서 우리의 생산성이 일본에 비해 1/6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미화 1 불의 가치를 볼 때에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우리가 정말로 일본에 비해서 능력이 그렇게 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 하고서도 우리가 일본을 이길수 있단 말인가?

이것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정부와 기업체의 장들이 공동으로 져야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라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린 주체는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구한말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근대화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었을 때, 일본은  이미 페리제독이 오기 이전인 1740년 경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치하 당시 나가사키 부근의 데지마(出島)에 네덜란드 상인들과 거래하는 경제 특구가 마련되어 서양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후 명치유신 초기의 일본정부는 후꾸자와(福澤諭吉)가 1867년 <서양사정>이라는 책에서 이미 주장한 바 있는 『문명개화』라는 화두를 국가가 당면한 최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근대화에 몰두했으며 외상 이노우에(井上馨)를 중심으로 동경에 유럽식으로 새로 지은 로쿠메이캉(鹿鳴館)이라는 서양식 무도회관을 중심으로 일본에 드나드는 유럽인들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명치 신정부는 1871년 봉건제도의 기틀이었던 번(藩)을 폐지하고 오늘날의 현(縣)을 설치하는 소위 「폐번치현」을 단행하여 일본의 문명개화를 본궤도에 올려놓았으며 이와쿠라 특명전권대사를 단장으로 하는 100 여명의 구미사절단을 파견했다.

탈아론을 주장하며 세계속의 일본을 주장한 후꾸자와는 봉건시대의 일본을 현대의 일본으로 혁신하게 해준 이념적 공로로 오늘날 일본 근대화의 국부로 한국의 세종대왕처럼 일본의 고액권(일만엔권) 화폐에 넣어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후꾸자와의 탈아론은 결코 그 자신만의 창작이론이 아니라 사이코 다까모리, 기도, 오오쿠보,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명치정부의 핵심인물들의 사상적 총 연원이자 스승인 요시다 쇼인(길전송음)의 가르침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29세로 요절한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일본의 현대사를 이끌어 가는 민족주의자들의 총 연원으로 확고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통해 조선침략에 대한 이론체계를 정립하여 후학들을 양성했고 후꾸자와는 그 이론을 활짝 꽃피워 만개 시킨 사람이었다.

사상적 연원이 어찌 되었든 후꾸자와는 현실적으로 일본뿐 만 아니라 한국의 근대화의 뿌리와도 맞물려 있는 인물이므로 한국 근대화의 핵을 캐기 위해서라도 깊은 연구가 필요한 인물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일제하 한반도의 문명개화는 이론적 뿌리인 후꾸자와의 기운을 쏘인 일본에 의탁되어 근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한반도 금풍사명이다.(한배달 시리즈1권 <동양학 이렇게 한다>328P ‘동양철학 기초이론 2’안원전 저 대원 刊 참조)  

후꾸자와의 『문명개화』라는 대국적인 캐치프레이즈는 만주사변, 태평양 전쟁 등 대동아 공영권(동아시아 블럭의 호랑이가 되겠다는 것)에로의 발빠른 진군과 함께 일본이 독일과 연합해 중, 소와 판을 가르며 세계의 기운을 크게 혁신할 정도로 엄청난 기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원자탄 세례와 함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남으로써 결국 한반도만 힘들여 근대화시켜주고 맥없이 물러난 셈이 되었다.

동양의 우주원리로 보면 손(巽)방위인 일본은 간(艮)방위인 한반도에 근대화 바람인 손풍의 가을철 열매바람을 불어주게 되어 있는데 일본은 어쨌거나 이러한 근대화 사명만 충실히 이행하고 손털고 나선 것이다.

후꾸자와의 탈아론은 임진왜란때 도성에 들지 못한 것을 포함해(몽진으로 假도성만 차지하고 임금이 있는 眞도성엔 들지 못했다) 채 이루지 못한 3한(恨)을 풀기 위해 한반도 정복을 명분으로 한 정한론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후꾸자와의 탈아론도 그 연원을 추적하면 한민족에 대한 열등의식 속에서 위조해 낸 2600년의 만세일계 족보서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정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이하 <통곡하는 민족혼> 353 P 안원전 저 대원 刊 참조)

'이러한 정한론 속에는 바로 일본인이 변형시켜 온 백제의 무사도 정신인 사무라이의 정벌 정신이 숨겨져 있었다.

일본의 쌔디즘적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은 구미 열강들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일본은 구미 열강에 의해 취해진 불이익을 대만, 한국침략 및 만주 본토 침략으로 상쇄하려 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저질러진 임진왜란은 비록 정명가도라는 가면을 내세웠지만 본래는 당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활성화 된 무인 에네르기를 외부로 표출시키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구한말의 한반도 수탈은 명치정부 내에 충일했던 정한론의 사무라이 정신이 당시 세계적 조류였었던 구미 열강들의 식민지 경영 경쟁에 맞아 떨어져 일어난 사건이었다.

결국 정한론의 정신적 기원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활성화된 무인 에네르기를 밖으로 쏟아내기 위해 정명가도를 명분으로 하여 치루어진 임진왜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일본 봉건 막부시대의 기원은 천지,천무시대에 있으므로 종내에는 한민족의 문화연원에 까지 뿌리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본은 60년대부터 국가보조금까지 주어가며 젊은이들을 해외에 보내 견문을 넓히게 했으며 그들이 얻은 경험과 정보를 국가 경영에 흡수했다.

그러나 한국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의 해외여행 자유화정책을 전환점으로 해 비로소 90년대에 들어서야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이 일반화되었으며  이에 호응한 일반시민들도 관광이란 미명 하에 바깥공기를 쐴 수 있게 되었으니 이래저래 한국은 이 분야에서도 일본보다 20년은 뒤쳐진 셈이다.

따지고 보면 국가정책에 정보전략이나 관광이란 개념자체가 부재하고 정보전략 산업이나 관광 정책이 전무하다가 근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국제화, 세계화의 안목이 뒤떨어진 이런 측면에서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김 대중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일정한 공로를 가진 김 영삼이 아들 현철의 관리능력 부족으로 수렴청정 당한 채 국정을 농단 당한 끝에 마침내 경제 운용의 실정 등과 함께 IMF 패전투수라는 치명적인 불명예를 입고 전 국민에게 죽일 놈 소리까지 들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 것도 알고 보면 김 영삼 본인은 물론 아래에 포진하고 있던 정책 브레인조차 국제화, 세계화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론철학적 개념 자체부터 정리되어 있지 않았으며 국제화, 세계화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대응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정신과의사 정혜신 박사는 YS의 정신세계에 대해 날카로운 분석을 한 바 있다. "YS의 정신세계는 인격장애의 하나인 타인의 반응 즉, '거울보기'를 통해 자신이 희열을 느끼는 '나르시즘 인격장애'의 대표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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