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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안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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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중앙정보부창립멤버조웅(본명 조병규)의 현대사X 파일3탄->“나는 왜 황태성 사건을 미국에 고발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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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황태성 사건을 미국에 고발했나?”

 중앙정보부 창립멤버 조웅의 현대사X 파일3탄
                김지형(민족21기자)

    “본지는 그간 두 차례에 걸쳐 조웅(66, 본명 조병규) 목사의 현대사증언을 소개했다. 그와 검질긴 인연을 맺은 김창룡 ‘C I C (방첩대) 3총사’의 증언에 따른 이승만 정권기의 현대사비화들이었다. 조목사의 현대사 X 파일 3탄은 마지막회로서 그가 박정희 정권시기 직접 경험하고 목격한 사례를 중심으로 엮어 본다.

조웅목사는 박정희등이 일으킨 1 9 6 1년 5·1 6군사쿠데타에 처음부터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대학생신분으로서 참여한 이른바 ‘쿠데타 주도세력’의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종필 등과 대립하면서 오늘날까지 ‘평생의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되었을까.


제6대대선 개표장면을 지켜보는 박정희와 김종필

민주당에서 학생운동 자금 받아
그가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이유를 알아보기전에 4·1 9시기 그의 시국관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9 6 0년 대통령 선거기간 조웅 목사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재야에서 주미대사를 역임한 장리욱박사를 추대해 공명선거추진위원회를 결성했을 때 그는 산하조직으로 구성된 공명선거추진전국대학생투쟁위원회(공추위) 중앙위의장을 맡았다. 4·1 9시기 학생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한 조직이었지만그 동안 이 단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조목사의 새로운 증언을 들어보자.

“공추위멤버들은 부정선거규탄과 더불어 이승만타도를 위해 ‘민주주의사수전국대학생투쟁위원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습니다. 1960년 3·1절 기념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장에서 공추위 삐라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금문제 해결이 절실했습니다. 당시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박순천 할머니를 찾아갔습니다.”

박순천 여사와는 전부터 잘 아시던 사이였던가 봅니다.
“명동입구에 있던 충무로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할머니께서 저를 많이 아껴주셨습니다. 그때 가정교사생활을 하며 어렵게 지낼땐 데 자주 도와 주셨죠.”

그러니까 공추위 활동 자금을 박 여사에게 도움 받으셨군요?
“그래요. 할머니에게 찾아 가서 1차 자금으로 1 0 0만 원이 필요하다며 부탁드렸더니 쾌히 승낙하셨습니다. 내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예산집행을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며칠후 냉천동 자택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1 0 0만원을 투쟁자금으로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유인물 제작에 착수해서 며칠 밤을 새워 한트럭 분의 유인물과 현수막을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어떤 분들이 자금 지원을 해주셨는지.
4.19당시 종로의 학생시위대  

“흥사단 박현환 총무가 1 0만 원을 주었고, 《새벽》지 김재순(전 국회의장) 주간이 5만 원을 보태주기도 했습니다. 4·1 9후 민주당정권은 ‘흥사단정권’이라고 지칭될 정도로 흥사단 출신의 실세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흥사단 단원이었구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자금을 받은 것입니다.”

4·1 9시기 공추위 계열의 학생운동세력이 민주당 인사들로부터 활동 자금을 받았다는 증언은 처음이다. 공추위 학생운동이 민주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해오고 있었으나 이처럼직접 자금을 수수했다는사실로 볼 때 공추위와 민주당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수 있는 하나의 시사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추위는 민주당에서 제공한 자금으로 유인물등을 작성해서선전활동에 나서려는 순간 그만 일을 그르치게 되고 말았다. 이어지는 조목사의증언이다.

“유인물과 현수막을 만들어 각 대학별 분배작업까지 마쳤습니다. 이제 살포하는 일만 남았죠. 그런데 당시 대학생복음연맹(IVF) 사무실에 일부 유인물을 보관해 놨었는데 배신자의 밀고로 들통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사건으로 조목사등은 내란죄로 서울지검 공안부에 체포, 1960년 4월 9일 동료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됐다. 본격적인 4월 민중항쟁이 시작되기 열흘전의 일이었다. 결국 그는 4·1 9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된 4월 2 9일이 돼서야 감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김종필과의 만남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정국은 7·29 총선을 거쳐 민주당이 정권을 인수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런 흐름을 당시 조목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저는 그 당시 정국을 혼란상태로 봤습니다. 민주당이 정권을 인수했으나 무능했고 혼란을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웠죠. 그래서 4·1 9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군이 나서야 된다고 봤던 겁니다. 어떻게 군과 연계를 가질까 고민하던 끝에 채원개장군을 찾아갔습니다.”

채장군은 일제시기 광복군 제2지대장을 역임했으며 국군 창군의 일원으로서 시 군의 원로중 한사람이었다.
“채 장군에게 군이 나와서 4·1 9를 완수하고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면 군과 거사를 의논하는 게 어떠냐고 말씀드렸습니다. 한참 묵묵부답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렸죠. ‘지금육군내부에서 정군(整軍)이 시작됐다는데 영관급 장교를 소개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지금 육본(육군본부)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육사 5기로서 당시 군수참모부 인사교육처장으로 있던 이해영대령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해영 대령은 이른바‘장도영 계’인물이다. 5·16 후 장도영중장 내각수반시절 그의 비서실장을 역임했으며 후에 ‘장도영반혁명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했다. 조목사가 그를 찾아간 것은그해 1 0월경의 일이다. 육본 이해영대령의 방에서 그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잠시 뒤 ‘하극상사건’관련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극상(下剋上) 사건은 당시 군의 젊은 영관급장교들이‘군의 상부가 썩었다’며 주도한 이른바 정군운동을 의미한다.

맨앞에 중령계급장을 단 김종필이 조목사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의 첫대면이었다. 이후 일생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펼쳐질 애증의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하극상 사건에 관련된 다른 인물들과도 차례로 인사를 나눴다. 이석재 한국찬 김형욱 옥창호 석정선 석창희 중령, 김동복 유승원 오치성 김명환대령 등이었다. 이해영대령이 그들의 선배이자 수장격으로 이들에게조목사를 소개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조목사.

“그날의 만남은 군의 쿠데타주도세력과의 첫대면이었고 하극상사건과 관련한 얘기들을 주로 나누었습니다. 제가 재판에 계류중이던 하극상사건을 책임질 무료변호사를 선임해 주겠노라고 얘기했어요. 그들이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내 자신도 4·19 직전에 내란죄로 구속됐을 때 무료 변호사가 1 5명이나 되었다고 말하니까 안심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종필이 반색하며 호의를 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울 요량으로 태윤기 이병필 임갑인 이병두 노재필 김섭 변호사 등에게 요청해 무료변론을 허락 받았습니다.”

   알려진대로 하극상 사건은 김동복 김종필 석정선 등이 예편되고 나머지는 무죄판결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 때부터 조목사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재판이 끝난 후 김종필을 수 차례 만났습니다. 이제 하극상 사건도 끝났으니 거사계획을 속히 세부적으로 세우자고 말이죠. 김종필도 동의했습니다. 그때부터 5·16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돼 갔습니다.”

목사님이 맡은 역할은 무엇이었습니까.
“제가 혁명자금을 마련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박현숙 전 무임소장관을 찾아가 거사자금 1억을 요청했습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노력하자는 답변을 얻었죠. 그후에도 수차 방문했지만 실현되지는못했습니다. 자유당 실력자에게 자금을 끌어내려고 했으나 오히려 C I C에 정보가 넘어가 큰 곤욕을 치를 처지가 되기도 했죠.”

“난 누구 파도 아니다”
당시 5·16 계획에 대해 아시는대로 말씀해주십시오.
“1차 계획은 4·19 1주년을 맞이해서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샜죠. 사전에 2차 계획은 5월 1 3일이었는데 역시 정보가 새나갔습니다. 5월 1 5일은 야전군 창설기념일이어서 전방 지휘관이 전부 강원도원주에 모여 파티에 여념이 없는 동안에 허를 찌르자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때도 C I C에 첩보가 들어갔습니다. 위기일발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 그 다음날인 1 6일에 쿠데타가 발생했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움직였던 것입니까.
“저는 나름대로 그날의 쿠데타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5월 1 5일 CIC 참모들이 1 6일쿠데타 추진세력의 주요명단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쿠데타세력이 구속직전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때 제가 여러 차례 밝힌 김창룡의 참모 최0을 통해 당시 CIC 부부대장 백운상장군에게 ‘5·16 쿠데타백지화계획’을 알림으로써 역정보를 흘렸습니다. 그게 5·1 6의 성공비결이었습니다.”

조목사는 스스로 5·16 쿠데타의 이른바 ‘주체세력’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자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5·1 6이 성공한 후부터 그의 생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5·16 주도세력 가운데 김종필이 독주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세력을 거세하기 시작하자 불만이 생기게 된 때문이었다.

“쿠데타직후 1주일이 지날 무렵 소위 ‘방첩대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방첩대 부부대장 백운상 장군과 정보처장 조석길 중령, 그의 보좌관 엄00, 옛 김창룡 보좌관 최0 등이 연루된 사건입니다. 이들이 박정희와 김종필 암살을 모의했으며 반혁명 음모를 꾸몄다고 해서 마포형무소에 구속시킨 것이지요. 다행히 백운상부부대장은 제보를 받고 미8군으로 들어가 위기를 모면했습니다만. 이사건은 김종필이 장도영계를 제거하려는 음모였습니다.”

엄00, 최0이라면 1 9 5 0년대 암살공작 등을 실행했다는‘CIC 삼총사’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그 사실을 몰랐고 그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래서 훗날 저도 그들과 함께 장도영계로 몰린 것이죠. 그들이 잡혀간 다음 저도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다음날 새벽에 청구동 김종필집을 예고 없이 방문했습니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김종필과 큰소리를 내며 싸웠습니다. ‘쿠데타는 혼자했어? 방첩대사건을 꼭 장난쳐야 되겠어?”하고 막따졌죠.”

그때 김종필 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장도영이 한강에서 우리한테 총을 쏘고 ( 5·16 당시) 장리욱 주미대사는 미국에서 우리를 반란군이라고 단정하는 글을 써서 유엔각국에 돌리는 행위를 하고 있다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도라!’ 히도라라는 건 당시 내별명이었는데 히틀러라는 얘기죠. (웃음) 그때 주위에서 날 그렇게 불렀어요. 하여튼 히도라! 하면서 ‘내 편에 서라. 장도영편에 서지 말고. 분명히 해라’라고윽박질렀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나는 장도영중장파도 아니고 누구파도 아니다. 대한민국파다.’ 그랬죠. 고성이 오고가다가 결국그날 중으로 석방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발길을 돌려 나왔습니다.”

그럼 방첩대 사건은‘조작’이라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장도영중장을 이집트의 나기브처럼 만들어놓고 기회가 닿는대로 제거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종필을 만나고 와서 중앙청으로 갔죠. 장도영내각수반실의 이해영 비서실장에게 급히 면담 신청을 냈습니다. 이대령과 방첩대 5 0 6부대장이 나와서 맞아 주길래 ‘속히조치를 취해서 김종필, 박정희를 제거하라’고 수차례 말했습니다. 그러나 손을 쓰지도 못하고 7월에 그만 ‘장도영반혁명사건’을 맞아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 옆방의 한 노인
이른바 ‘장도영 반혁명 사건’의 여파는 조 목사에게까지 이어졌다. 그도 구속되고 만것이다. 장도영중장의 참모들 구명운동을 하다가 자신마저 구속된 셈이다. 당시 구속된 5 0여명 가운데는 박관용 전 청와대비서실장, 김우석내무장관, 변상경 부두관리공단 이사장, 하은청, 조창도씨 등이있다.

한가지 새로운 사실은 조 목사가 실제로 당시 ‘김종필제거계획’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 계획이 ‘탄로’나 그 역시 장도영파로 몰려 구속되고 말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김종필독주체제를 비판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당시 남아나지 않았다는 게 조목사의 증언이다.

“원충연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당시 최고회의 공보실장이었던 원충연 대령도 김종필의 독주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다가 제거 당한겁니다. 그로 인해 근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비운을 겪고 결국 조국을 버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말았던 것 아닙니까.”

조웅 목사는 장도영 파로 몰려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에 구속돼 혁명검찰부로 송치됐다. 그는 군법회의에 넘겨져 비밀재판을 받아야 했다. 재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아 이듬해인 1 9 6 2년 1 2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풀려나자마자 다시 중앙정보부에 붙들리고 말았다. 재구속, 수감이 이어졌다. 훗날 들은 얘기는 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던 재판장이 시말서를 쓰고 좌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감옥에 갇힌 조목사는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충격적인 정보를 접하게 된다. 바로 ‘황태성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19 6 1년 8월말 북의 무역성부상을 지낸 황태성이 ‘밀사’임무를 띠고 박정희를 만나러 내려왔다가 9월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같은 형무소에 있으면서 당시 ‘국가최고기밀’이었던 황태성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조목사의 회고다.

일제시기 황태성의 가족사진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옆방에 홀로 있던 6 0대쯤으로 보이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나와 같은 방에 있던 간첩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분이 북에서 무역성부상을 하다가 내려온 황태성이란 분입니다. 박정희를 만나러 왔다가 구속돼 있는 것입니다.’ 깜짝 놀랄만 한 얘기 아닙니까. 그 간첩 말이 황태성이 반도호텔 7 3 5호 특실에서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났고 민주공화당창당에도 관여했는데, 지금은 박정희의 입장이 곤란해서 저렇게 됐지만 모든 일이 잘 풀려 곧 석방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5년형이 확정돼 이감을 기다리고 있던 조웅목사는 1 9 6 1년 9월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석방통지서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풀려난 이유가 따로 있었다고 했다.

“하루는 당시 최고회의의장 경호실장 박종규가 만나자고 해서 갔습니다. 그때는 경호실장실이 따로 있었어요. 지금의 미국대사관 자리입니다. 갔더니 ‘쌍권총’이 차를 권하면서 반갑게 맞이 해주는겁니다.”

근데 쌍권총이 누굽니까.
“하하 박종규가 쌍권총이에요. 그때 다들 그렇게 불렀어요. 아무튼 쌍권총이 하는 말이 자기가 각하와 청구동 김종필 형에게 말해서 풀어주었으니 이번 한번만 협조하라는 겁니다. 뭘 협조하라는거냐고 했더니 군의 일부 장성들이 각하를 추방하려고 하니까 그들 속에 들어가서 공작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고함을 버럭 질렀지요. ‘야 이새끼야, 또 이용하려고 해’ 하면서 말이죠.”

“미국의 힘을 빌리려 했을 뿐”
이 사건이 조 목사가 김종필 세력으로부터 완전히 마음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이 있은 직후 조목사는 유엔군 총사령부로 가서 황태성사건의 전모를 제보하고 한미합동조사단구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1963년 2월의 일이다.

“황태성이 박정희의 정치적 고문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보했습니다. 하루가 지나자 케네디 대통령의 안보담당 보좌관, 3정보기관의 정보분석관등이 속속 미8군사령부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조 목사의 제보로 미국이 황태성의 존재를 알았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 이미 정보는 입수했겠지만 그의 제보로 ‘정보’수준에서 ‘사실’차원으로 검증된 것으로 볼 수있다.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이던 김형욱이 망명전에 조 목사에게 알려준 얘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형욱이 나에게 귀뜸해 준 정보에 따르면 황태성의 존재에 대해서 박정희나 김종필 측근중에서 누가 폭로할까봐 그들속에서 서로 이중삼중으로 감시했다는 겁니다. 김형욱에 따르면 미국측에서 황의 존재를 알고 신병인도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자기가 박정희와 미국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가 되어 죽겠다고 했습니다. 미국 측이 자꾸 황을 넘기라고 요구하자 한번은 김형욱이 머리를 박박 깎고 청와대에 가서 박정희에게 황을 넘겨주자고 하니까 박정희가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 고함을 치면서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김형욱이 황을 넘겨주고 다른방법으로 한미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낫겠다는 얘기를 수차 건의했는데 번번이 묵살 당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황태성과 비밀회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논의했던 사실과 민주공화당 창당관련 2 0만불 조달문제 등이 탄로나면 국민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미국에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고 봅니다.”

조 목사는 미8군으로 가기 전 초대 육군 법무감을 역임한 김완용 장군을 만나 황태성사건을 털어 놓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자 김완용은 ‘더 이상 박정희와 김종필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며 ‘미8군 멜로이 사령관에게 잘 보고 드리라’고 했다는 것.

이 사실은 방원철의 회고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김완용, 김동화, 박임항, 송요찬, 황헌친장군등이 버거미대사에게 황태성 사건을 자세히 보고했다고 밝힌 점과 관련이 있다. 공교롭게도 위 인물들은 대개 그후 이른바 반혁명 사건에 연루돼 비극을 당했다. 장군으로서 호령하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이등병으로 강등당하는 비운을 겪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웅목사가 미8군에 제보함으로써 황태성사건이 공론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63년 1 0월 박정희 자신도 ‘황태성 사건의 정보 유포자’로 조웅이라는 이름을 직접 거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조웅목사는 왜 이 사실을 미8군에가서 제보한 것일까.

“당시 나로서는 모든 권력과 군이 박정희의 손아귀에 완전히 들어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힘을 빌리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길만이 박정희와 김종필제거를 가능하게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죠. 내가 절대로 친미사대주의자라서가 아닙니다. 그 길 밖에 없었어요.”

그가 꿈꾸던 5·1 6의 좌절
그런데 결과는 미국 측이 목사님 뜻과는 다르게 움직인 것 아닙니까.
“내가 황사건을 미국과 담판할 때 이미 미국은 박정희에게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미국측으로부터김종필이 추방된다는 메모를 확인한 후에 미8군을 나왔는데 그것도 사태를 교묘히 수습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른바 4대의혹사건이 터지면서 김종필이 책임을 지고 공화당 창당 하루 전에 해외로 출국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미국이 박정희, 김종필에 협조한 것이죠. 미국이 왜 박정
희를 밀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미국 측에 황태성 사건이라는 카드를 내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그 일로 또다시 구속되고 말았다. 미8군에서 나오자마자 중앙정보부에 의해 잡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군사법정이 그에게 내린 구형은 사형. 최종 1 5년형이 확정 돼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한데 그의 감옥살이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해 1 2월 민정이양 특사로 풀려났다.어쨌든 그때의 상처는 그에게 너무나 컸다. 감당하기 어려울정도로. 이후로 그는 곡절많은 사건들을 뒤로한 채 목회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학생이라는 민간인신분으로 유일하게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조웅목사. 애초에 그가 군사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믿고 참여했던 이유는 오로지 ‘4·1 9의 완성’이라는 순수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군이 나서더라도 성공 후에는 반드시 ‘군 본연의임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전제하고함께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 내부의 다른 세력들이 차례로 제거되는 것을 보면서 박정희, 김종필세력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꿈꾸던 5·1 6의 이상은 좌절된 것이다.

5·1 6이 발발한지 어언 반세기가 가까워 오고 있다. 오늘날 5·1 6을 혁명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사의 평가는냉혹하다. 조웅목사의 증언속에서 등장하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이야기는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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